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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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쿠르 상 수상작인 <달콤한 노래>를 읽었던 감흥이 남아있어서 그녀의 데뷔작이라는 이 작품이 정말 궁금했었다. 제목과 달리 사악한 발톱을 감춘 스릴러가 떠오를 만큼 오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제목이 주는 아련함과는 달리 내용면에서 이렇게 폭력적인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작품의 원제는 식인귀의 정원(Dans le jardin de l’ogre)이라고 한다. 유럽의 민담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그려지는 식인귀를 모티브로 한 식인귀의 정원에 놓인 하나의 인형이 되고 싶은아델의 이야기라고. 그것을 알게 되어 아델의 상황이 약간 이해는 되었지만 완전히는 아니다.


 

담배를 입에 문다. 샤워기 아래에 서니 온몸을 할퀴어 두 조각으로 찍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벽에 이마를 찧는다. 누구든 내 몸뚱이를 휘어잡아 이 유리벽에 내리쳐서 두개골을 박살내주면 좋겠어. …… 무리 한가운데에서 잡아 뜯기고 먹히고 온몸이 핥아졌으면 좋겠어. 그들이 내 두 젖가슴을 꼬집고 배를 사납게 물어뜯어줬으면 좋겠어. 식인귀의 정원에 놓인 하나의 인형이 되고 싶어.’(P12)



 도입부부터 심상치 않다. 아델의 내면이 어떤 생각으로 들끓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아델은 35세의 파리지앵이며 지성과 미모의 신문사의 기자다.(글쎄 지성은 좀 의심스럽다.) 가정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하는 외과의사 남편, 세 살짜리 아들 뤼시앙과 살고 있다. 이만하면 겉보기엔 어느 정도 행복한 중산층의 삶이다. 격한 감정의 내면을 보면 섹스 중독으로 일그러진 그녀가 보인다. 그 상대방은 특정의 상대도 아니다. 특정의 상대라면 어느 정도 연애감정을 느낀 불륜이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만도 하겠지만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구한다. 직장에서, 출장지에서, 심지어 남편의 친구까지 얽히게 되면서 그 끝이 도대체 어디일까 싶을 만큼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가학을 즐기는 듯이 보이고 폭력의 수준까지 요구한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아델은 기자라는 직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다가 지각하는 것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둘러대면 된다. 최대한 죄책감을 감추고 태연할 것. 그녀의 욕망은 오직 타인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남편 리샤르는 아들 바보다. 아델이 보기엔 부자끼리만 살아도 행복이 넘칠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델은 안도했을까. 이런 아델의 숨겨진 모습을 리샤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아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모르고 껍데기만 데리고 살 뿐이다.


 읽으면서도 많이 기가 막혔다. 아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것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델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을 왜 그럴까 하고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 그냥 몸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였다. 결혼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그런데... 조금은 자신의 행동에 뭔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결혼도 출산도 세상에 귀속되어 타인들과 그 외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P44)로 여겼던 듯하다. ‘방탕의 나날에 기댈 곳이 되어줄 피난처’(P45)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조금은 자신도 이것을 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과에 상담을 받거나 하는 등의 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지만 뤼시앙이 태어나면서 자신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돌보기에 적합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무분별한 행동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엔 겁도 났겠지만 들키지 않고 해냈다는 것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조금씩 강단이 생겼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호텔방에 혼자서 엄마를 기다리던 공포의 기억, 피갈 광장에서 엄마와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느꼈던 공포와 욕망, 혐오와 에로틱한 흥분은 열 살의 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든 감정으로 각인된다. 또 열다섯 살의 아델에게 수치심과 성취감을 동시에 안겨준 비뚤어진 기행(奇行)이 있었다.



당신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내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좋겠어. 리샤르,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야. 당신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믿어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 자신보다 더 힘센 어떤 게 날 움직여.”(P206~207)



 리샤르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 날 오히려 단잠을 자게 되었다는 아델. 리샤르는 분노로 길길이 뛰면서도 아델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안 것은 아무것도 몰랐던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이 어떻게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스쿠터 사고로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이 되자 아델의 머릿속은 계산으로 복잡하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라. 만약에 죽는다면? 빈털터리가 되어 끔찍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리샤르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생각인가. 심지어 남편의 수술을 담당한 의사에게까지 작업을 거는 아델이 아니었나. 그저 식인귀에 마귀가 씌였다고 하기에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참아내기 힘든 상황임에도 리샤르는 가정을 지키려는 마음과 아델을 치유해 주기 위해 시골로 이사를 하며 환경을 바꾸는 등 어느 정도 노력에 성과가 보이는 듯하다. 이상하게 조용하게 살고 있는 듯한 아델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미심쩍은 마음이 생긴다. 아델은 잘 견디고 있는 걸까. 과연 리샤르의 바램대로 회복할 것인가. 매여 있던 아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식에 가게 된다. 이를 계기로 숨통이 트였는지도 모른다.


 

아델, 그게 끝이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끝나지 않아. 사랑은 인내일 뿐이야. 경건하고 열정적이며 폭군과도 같은 인내. 비이성적일 정도로 낙천적인 인내.

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P293)



 괴로움을 안고서도 아델에 대한 사랑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엾은 리샤르는 아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과연 그녀는 돌아올 것인가.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아마도 아델의 외모와 몸짓에 사기당한 리샤르의 광기어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추천 평에 마리클레르는 왜 여성의 성을 순수함, 성스러움 속에만 가두려고 하는가?’라고 했는데 이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평에 맞는 이야기라면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여야 한다. 아델의 행위는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 가학이고 폭력이고 일종의 질병이다.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광기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절망에 이르는지 잘 보여주는 외침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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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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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아니 확실히 난 김인숙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참 이런 일도 다 있다. 아무리 그의 작품 제목을 들여다봐도 읽었다고 확신을 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왠지 김인숙의 소설은 세련된 도시인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쓴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 그것은 나의 선입견이라는 것을 알았다. 맨 처음에 실린 <델마와 루이스>를 읽으면서부터가. 의외였다. 우리 주변에서 친숙한 사람들이 등장인물이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어디서 본 듯한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 실수도 하고 그것으로 인해 평생을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남아 있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이제라도 인연이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차용했다는 제목의 <델마와 루이스>87,89세 할머니 자매들의 유쾌한 일탈을 그려낸 이야기다. 이렇게 연로한 노인의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환갑이 넘은 며느리와 아들의 집에서 살고 있는 동생 델마를 보러 미국에 살던 루이스가 며칠만 있겠다고 왔다가 아예 눌러 앉게 된다. 며느리의 분노는 남편에게 향할 수밖에. 그 공간의 불편함을 감지해서였을까. 자매는 어느 날 밤에 택시를 잡아타고 가출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모의하면서 마음은 들떴으리라. 모텔에서 하룻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고 매운탕집에서 밥을 먹으려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사장의 지갑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진다. 자유분방한 미국에서 살던 영향인지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루이스는 델마에 비하면 무척 대범하다. 가출로 인해 며느리에게 격렬한 분노를 안겨 주었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신속하게 판단하고 움직인다. 델마와 루이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식당 여자 최영자와 딸 부영희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바다를 보러 간다. 매이고 매인 삶, 핍박 받던 삶에서 벗어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은 얼마나 후련했을까.

 

이 나이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최영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 손을 잡듯이 델마의 손을 잡았다. 델마가 그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나 쪽지 한 장만 달랑 놓고 떠나온 집의 자식들을 떠올려서는 아니었다. 델마는 자식 생각들을 그때 아주 잊었다. 첫 새끼를 낳고부터 그날에 이르도록 육십여 년이 넘게 자식 생각을 잊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P55)



 그 나이가 되면 걱정을 끼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서글프다. 노인이 되면 주변의 보호 아래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고 성가신 존재로 여기는 반면 그것을 당하는 편에서는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울까하는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함박웃음을 웃는 그녀들을 보며 후련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달라질 것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가는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아홉 번째 파도><내 이럴 줄 알았어>에 나오는 화자인 의 부모와 언뜻 닮은 모습이 보인다. <아홉 번째 파도>의 그 남녀는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뜨거운 열정도 없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삶,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끈끈이 엮어지지도 못하는 삶이 안타깝기도 했다. 혼자 여행을 떠났다가 휴대폰을 도둑맞돌아온 후 어느 날 클라우드에서 도둑이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빨간머리의 여자의 얼굴.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싱싱한 사랑,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환기시킨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더이상 '버티는 삶'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후자는 더는 같이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부모의 홍콩여행에 실직자인 아들이 따라가는데 극심한 태풍을 만나 호텔에 묶이는 상황이 나온다.



좀 무서웠지만, 사는 건 안 무서웠나, . 꿈속에서 울면서도 그렇더라고. 왜 우는지를 모르겠는 거야. 죽는 게 슬픈가? 그럼 사는 건 안 슬펐나. . ‘그는 이처럼 기꺼이 굴복하는 삶을 다시 묵인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P252)

 

 어머니는 혼자 암 검사를 받고 암이란  암은 다 아니라고 했다는데 왜 아픈거냐고 아들에게 묻는다.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이 구절을 말하면서 지나온 삶을 토로하는 어머니가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지난날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내 이럴 줄 알았지. 결국 이럴 줄.'(P258) 마치 의지하고 싶었던 일이 엇나가서 실망스럽다는 듯이 쓸쓸하게 들린다. 특별히 행복하지 않더라도 특별히 불행하지 않다면 그냥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일까. 어쩌면 모나지 않고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삶에 안주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반면 하루하루 견디는 삶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일깨워주는 <넝쿨>도 있다. 형오와 형윤은 연년생 남매다. 형오의 군 입대를 앞두고 송별식이 있던 날 오빠의 친구 김정호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난장판이 된 분위기를 피해 밖에 나갔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다. 그 범인이 김정호 인 줄 알았는데 진범이 따로 있다는 소식은 그들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기억이 단번에 뒤엉키는 순간이다. 형윤은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고 형오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마치 형벌처럼 삶을 점령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그들. ‘아무것도 아니게 된 삶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

 

토기박물관


 영어학원에서 알게 된 67세의 미라가 65세의 제니와 토기박물관에 가서 발굴된 토기, 깨어진 토기가 온전한 모습을 갖춘 것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딸이 다니다 만 날수를 채우기 위해 대신 다닌다는 제니가 우습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은 그녀와 다르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대한다. 우연히 무너져 내린 제니의 울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질그릇처럼 다 깨져 더는 담을 게 없어진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깨어져 상처투성이인 삶도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모두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고만고만한 사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인생이 끝나지 않은 이상 삶도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을.

 

단 하루의 영원한 밤


 이 소설집의 표제로 붙은 이 작품은 3인칭 시점으로 선생의 숨겨진 딸 M과 연애를 했던 를 내세워 선생의 삶을 이야기한다. 삼십 년 전, 하룻밤의 실수로 영원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선생이 있다. 선생은 해안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여제자와 동행했는데 충동적으로 도중에 하차를 하고 밤을 같이 보내고 여자는 딸을 낳는다. 덕망 있는 학자라고 주변에서는 오히려 여자에게만 돌팔매질을 하였다. 여자는 한복집을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우는데. 선생은 여자와 아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침묵으로 일관한다. 학문적인 명성보다는 세상의 모든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연히 꾼 악몽쯤으로 여겼을까. 나쁜 꿈을 막아준다는 인디언의 부적인 깃털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절실했을까.

 

선생은 언제나 기차역이 바라보이는 여관의 창가에 서 있었고, 창문 바깥에서는 키 큰 나무의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P143)

 

분명한 것은 선생이 주기적으로 그 기차역의 여관방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혹은 그것을 꿈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 살아 있는 날의 한낮인지, 아니면 살아 있는 날의 한낮으로 굴절된 꿈의 한 장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생은 언제나 가방 속에 깃털 하나를 지닌 채 나뭇잎이 흔들리는 창가에 서 있는 것이다.’(P147)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남아서 자신을 괴롭힌다. 이미 저질러진 일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졌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방관자처럼 회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의 뭇매를 맞은 여자의 삶도 얼마나 고단했을까. ‘꽉 붙들어! 꽉 붙들란 말이야, 이 늙은이야.”(P150) 사랑과 미움이 애증이 되어 메아리치는 삶이었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창피한 마음을 지닌 채 감당해야만 하는 삶, 그 고통을 마주하면서 끝까지 가야하는 삶이었다. 세간의 이목을 떠나 좀 더 용기를 내어 책임을 지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선생은 떠났어도 남은 사람은 따뜻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빈 집


 남편과 27년을 살아온 쉰다섯 살의 그녀가 나온다. 수더분한 남편과 이제는 더 이상 전율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 이 여자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아간다. 이삿짐과 화물을 운송하는 남편의 일터에서 젊은 애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어 중얼거리다가 택시기사의 핀잔을 듣고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도 그리 나을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남편을 경멸했지만 속으로는 사랑했다는 것을. 미웠던 마음이 문득 그에게 얹혀진 삶의 무게가 가엾음을 느낀다. 팔리지도 않는 쓰레기같은 영천 집을 고모부에게 상속받은 남편은 그곳에 자신만의 내밀한 기쁨의 공간을 구축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개 대신 또 하나의 백구를 키우면서. ‘소리 내는것을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온 답답함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치이고 치인 마음의 상처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남아있는 삶은 그렇게 자신을 위한 세계를 쌓고 서로 보듬을 수 있는 정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으리라.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여기에도 그다지 성공한 인생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이 나온다.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여 전처가 두 명이고 아들이 두 명인 남자. 두 명의 아들은 히어로를 좋아해서 히어로 영화를 보고 히어로 장난감을 사고 히어로를 이야기한다. 일 년에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어서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도 혼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눈치를 보는 주눅이 든 아빠다. 아들에게조차도 히어로가 되지 못하는 남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특별한 쓸쓸함이 뭔지는 알 것도 같았다. 적어도 그 쓸쓸하고 달콤한 느낌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비루하기까지 한,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한, 아니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그걸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도 어쩌면 저 사소한 히어로들의 소그룹 하나쯤에는 끼어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P225)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중에라도 이룰 수 있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우리는 아주 사소한히어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힘들게 살기보다는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삶은 살 수 있지 않을까. 내 눈에 비친 타인들은 모두 잘 나가는 인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한두 개의 아픔은 지니고 산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삶의 과정에서 시간은 아픔의 흔적을 조금씩 희석시켜 줄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는 인생이지만 우리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조금 나은 길을 안내받는다. 알 듯 말 듯한 친근한 이웃처럼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내밀한 감정 묘사는 웃음과 쓸쓸함, 따뜻한 연민을 품어주었다. 마치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어, 인생 다 비슷하지 않아?’ 라고 위로해 주는 듯했다.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 너머로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작품은 그녀의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가교가 되고 한동안 울림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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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라이즈 아르테 미스터리 16
T. M. 로건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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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던 조셉 린치는 아내와 아들 윌리엄을 끔찍이 사랑하는 가정적인 남자로 나름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윌리엄이 태어난 후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고 일주일에 3일로 일을 줄였고, 커리어우먼인 아내 멀리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일까지 도맡아하며 한 조각의 퍼즐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을 데리고 오던 중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들의 눈에 엄마 차가 눈에 띄고 조셉의 눈에 익은 번호판 분명히 아내 멀의 차가 맞다. 테니스를 하러 간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부리나케 따라가다 보니 피리미어 인 호텔의 주차장에 이르고. 멀과 절친인 베스의 남편 벤 딜레이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끼어들어 아는 체 하기도 이상한, 이야기하려는 멀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으르렁대는 벤을 본 조셉은 윌리엄이 보게 될까봐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상황에 벤이 나타나고 멀을 봤느냐고 묻지만 벤은 잡아떼고는 오히려 화를 내며 몸싸움을 일으킨다.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공격적으로 나오는 벤을 뿌리치며 살짝 밀쳐냈는데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바닥에 쓰러진다. 귀에서는 핏방울이 흘러나오고. 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조셉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윌리엄은 천식 발작을 일으켜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벤도 급하지만 아들의 상태를 먼저 수습하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찾은 호텔 주차장. 온갖 두려운 상상을 하면서 벤에게 갔지만, 아무것도 없다. 벤도 그의 차도 조셉의 휴대폰도 사라졌다. 피 흘리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이것은 조셉에게 잘 된 일일까. 분명히 안도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금세 빠져든다. 돌아온 멀에게 아까 보았던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호텔에 가지 않았다는 말에 조셉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내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만큼 조셉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한 조각의 퍼즐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던 조셉의 일상은 멀의 거짓말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휴대폰은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의 온갖 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은 범죄에 이용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셉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주차장에서 다툰 현장의 모습이 담긴 게시물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벤이 살아있기에 이런 짓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조셉에게는 안도감을 주는 것도 같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만 하면 되니까. 벤은 학창 시절 찌질이 였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앱을 만드는 기업가다. 그렇게 부자라서 아내 멀의 마음이 기운 것일까. 미심쩍은 마음에 조셉은 괴롭기만 하다. 결국 추궁에 못 이겨 벤의 회사 기밀 문제로 조언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멀의 사과를 듣기는 했지만 왜 자신의 계정에 그런 게시글을 올리는 것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베스는 괜찮은 것일까. 조셉과의 몸싸움 이후 흔적 없이 사라진 벤이 살아있거나 적어도 연락은 되어야 한다. 베스는 조셉의 집에 와서 벤이 물건을 부수고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가 연락이 안 된다고 울먹인다. 또 조셉에게 위협적인 말을 하며 엽총도 하나 없어졌다고. 베스와의 대화에서도 이제 멀의 거짓말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말릴 수도 없다.


 베스의 소식을 들은 조셉은 어딘가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에 경찰에 알리고 벤을 찾아보자고 하는데. 멀은 경찰에 알리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2년 전 벤과의 실수를 실토한다. 이것이 그냥 거짓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아내는 불륜을 말하면서도 어찌나 당당한지. 하나씩 드러나는 더한 일에도 마음은 무너지지만 가정을 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조셉이 정말 안쓰럽다. SNS의 위력은 조셉을 교직에서 정직을 당하기에 이르고 힘든 이 상황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믿었던 친구 애덤마저 등을 돌린다. 어쩐 일인지 경찰도 조셉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된다. 시체가 없는데 어떻게 살인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가정을 이전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벤을 찾아야만 한다.


 위기에 몰린 조셉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하지만 변호사마저 조셉의 편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경찰이 너무 많은 증거를 확보해서 조셉에게 불리하니 자진 출두하여 협조하라고 조언하는 변호사에게 화가 나 미칠 지경이다. 철저히 혼자가 된 기분이다. 압수된 조셉의 차 트렁크에서 벤의 혈흔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나. 누군가 조셉의 무덤을 파고 있는 건 확실하다. 벤을 만나기 위해 선덜랜드까지 찾아갔지만 흠씬 얻어맞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돌아온다. 범인이 누굴까. 머리가 똑똑한 엘리사가 게시글을 올리며 혼란을 일으켰나 생각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발신번호 없는 이 문자 메시지를 받은 조셉은 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벤은 살아있는 걸까.


 예상치 못한 마지막의 반전은 정말 놀라웠다. 그렇게 8일간의 조셉의 악몽은 끝났다.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철저한 계획과 음모를 꾸민 이들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억눌린 채 살아야했던 정신적 학대를 벗어나고 매여 있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모험이라고 해도 좋을까. 씁쓸한 마음이 든다.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겪어봐도 모르는 사람의 마음 밑바닥에는 어떤 불신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꺼진 불도 다시 살펴야 한다. 한 번의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요즘의 일상에서 페이스북, SNS는 많은 사람들의 소통의 장이다.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알리고 사진을 퍼 나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 덜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문명의 이기를 악용하여 한 사람의 소박한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누군가 나의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거짓말은 언젠가는 탄로나게 되어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거짓말의 끝은 결국 자신이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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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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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읽은 후에도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이 있었다. “지옥은 타인이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과 지옥은 텅 비어 있다. 모든 악마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고 했던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책인데 이 문장을 발견하고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했을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살아있는 한 타인과 관계맺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지금 여기,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딱 그랬다.


 사건이 일어나는 지역의 배경은 상상속 안개의 도시 무진이다. 안개에 대한 느낌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시야를 제한하고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안개는 두렵다. 여기서도 그런 느낌이다. 철저히 숨겨서 은폐하려는 권력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인터넷 신문사에 다니는 한이나는 대장암 수술을 앞둔 엄마를 간병하기 위해 고향 무진으로 내려온다. 열일곱 살에 도망치듯 떠났던 안개의 마을 무진에. 그리고 엄마의 죽을 사러 내려가던 길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여자와 마주친다. 절박하고 슬픔이 어린 그 여자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들어준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대학을 다니던 딸이 갑자기 성당을 다니더니 장애인 봉사 활동을 하다가 어느 날 여윈 몰골에 임신한 몸으로 나타났고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고. 그 사건의 배후에는 백진우 신부와 이해리가 있었다. 해리가 신부의 애인이고 돈은 모두 해리에게 간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말을 해준다.


 이나는 잊고 싶었던 기억, 아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고향 친구 이해리의 얼굴. 속옷 가게 아저씨에게 자신의 속옷 색깔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며 깔깔거리던 해리. 해리의 그런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어울려 다니기 싫었던 기억. 천사의 날개, 엔젤스 윙이라는 장애인 센터를 운영하고, 백 신부는 필요한 돈과 일할 사람을 해리의 장애인 시설에 보낸다는데... SNS를 통해 뿌리를 내린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헐벗고 가녀린 모습의 사진을 올려놓고 동정을 호소하면 구호의 성금이 산처럼 쌓인다. 남편이 죽고 낳은 아이 하나와 입양한 두 아이를 키우며 오로지 장애인들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해리의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 더구나 한국의 마더 데레사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데 해리의 참모습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즈음에 타이거스 클럽 총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해리의 동영상이 급물살을 타고 전파된다.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알쏭달쏭한 정황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삼천만 원의 합의금을 받아낸다. 리포터의 요청도 없었는데 이십 년 된 자신의 지갑을 꺼내 보이는 해리의 모습이 낯설고 어떤 가식마저 느끼게 한다. 장애인만을 위해서 이 돈을 사용할 거라는 해리의 말에 열광하는 사람들. 뛰어난 명배우도 어쩌다 실수를 보이듯이 해리의 태도에서 미심쩍은 태도를 감지한다.


 물이 흐르지 않는 구덩이는 언젠가는 썩기 마련이고 악취의 진동이 퍼져가기 마련이다. 갑질을 당하고 권력을 가진 자의 기세에 눌린 억울함은 하나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최별라는 목숨 걸고 빼왔다는 백 신부의 통장내역을 복사한 자료를 내민다. 조사해보니 가관이다. 이리저리 돈세탁을 하고 부동산을 사는 등 무성했던 소문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난다. 사실을 확인했지만 불법 자료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에다 거대한 천주교를, 무진 교구를 상대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뉴스텐의 팀장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일명 도가니사건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인권센터의 서유진을 소개해준다. 2의 최별라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양식업자 정성일의 증언이다. 남자들에게 봉침을 놓는 이야기, 심지어 장애 어린이들에게까지 성의 노리개로 삼았다는 정황은 어떻게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기가 막힐 뿐이다. 이뿐만 아니다. 채수연은 자기 집과 남편을 빼앗긴 억울함을 하소연한다.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고 했던가. 이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 증언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것일 수가 있을까.


 한번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다. 이수미는 페이스북에 찬양 댓글과 십일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애인 센터에서 쫓겨나고 도리어 고소를 당한다. 여기서 또 놀라운 사실, 신부 잘렸다는 백진우는 그 센터장으로 와 있다는데... 이건 뭐 전관예우도 아니고, 정말 우스운 코미디가 아닐 수가 없다. 마치 비즈니스의 달인을 보는 듯하다. 경찰, 검찰을 떡 주무르듯 한다는 이해리의 권력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숭고해야 할 성직자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해리의 책사 노릇을 한다. 게다가 자격이 안 되는 이해리를 센터를 운영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는 거짓말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 부류가 있어요. 흔히 상식적으로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생각하는 사람들, 이게 이들의 토양이에요. 이게 이 사람들 먹이예요. 그래서 상식을 가지고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해내기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하면 절대 안 돼요.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다 의심해야 해요. 그래서 싸움이 정말 힘들어요.”(1P246)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했던가. 놀랍고도 석연치 않은 반전이 일어난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결국 권력을 가진 더 강한 자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약자일까.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는 장애인들의 핍박당하는 삶이 안타까웠다. 가시화되었던 사건들은 유야무야되고 꼬리를 감추고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간다. 침묵과 무관심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고 당연한 관례처럼 굳혀진다. 여기서는 종교단체를 둘러싼 이야기가 주로 다루었지만 어느 조직에서든지 일어날 만한 일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주변을 돌아보며 더불어 살아가자고 외치며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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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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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시절부터 들어온 유명한 작품임에도 이제야 읽게 되었다. 고인의 추모를 계기로 리뷰대회를 열어주신 관계자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시위 현장의 모습과 광장에서의 민중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인가 했었는데, 읽어가면서 깨닫게 된 광장은 인간의 삶의 터전,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시 처한 상황에서 이명준이 겪어야 했던 운명적인 개인사와 국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사랑, 자유를 둘러싼 환경에서 그 고통과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당시 사회의 어떤 이의 아들이었고 오빠였으며, 이웃의 고통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중략)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의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P18, 1961년판 서문)


 광장과 밀실의 대조를 들어가며 끌어가는 이 이야기는 우리 삶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친 삶의 현장인 광장과 아늑함을 느끼는 밀실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이루는 과정일 터이다. 오래전 쓰인 작품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분단국가인 상황에서 남북이산가족으로 남아 있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의 월북으로 인해 이명준은 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고백하도록 강요당한다. 권력의 힘으로 짜 맞춘 그들의 밀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내보내진다. 밝은 대낮에 민중에게 보여도 아무 상관없다는 처사다. 법률의 혜택도 이명준 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뭇 시선 또한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일이 지금은 없을까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대로 재현되고 있을 것이다. 팽배한 무관심은 비리를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두어 번의 부름 후에 이명준의 마음 저 밑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의 파문이 인다.

자 보람 있는 삶이 끝내 자네 것이 된 거야.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벅찬 불안에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루의 시간이 어두운 무서움으로 짙게 칠해진, 알차게 익은 시간이란 말일세. 자네가 그렇게 조르던 바람이 아닌가. 이제 심심하단 말은 말게.’

스스로 두려운 불안을 어떻게 이겨낼까 몸부림친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의지할 혈육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 섬뜩해진다. 이미 추악한 탐욕과 배신, 살인이 난무하는 한국 정치의 광장에 신물을 느끼던 이명준은 월북을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는 어땠을까. 월북 후에 바라 본 만주벌판의 붉은 저녁노을은 활활 타오르건만 정작 자신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잊은 지 오래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겠지. 하지만, 만주의 저녁노을과 달리 잿빛 공화국을 마주대한다.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맥 빠진 얼굴들이다. 자신은 최대한 죽이고 당 선전부의 뜻을 살려야 한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늦은 시간가지 공부를 하면 노력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P124)


 누구를 위한 당이고 국가인가. 인민들은 당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존재다. 굿만 보고 무관심 일색인 그들은 당의 노리개가 될 뿐이라고 아버지에게 외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실체 없는 두 사상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배를 불려주었다. 인민들은 힘없는 나약한 존재다. 그것도 살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민중의 삶은 얼마나 가여운가.


 남녁도 북녘도 명준이 의지하고 살만한 광장은 없었다. 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만, 날선 시선을 느끼며 값진 요령을 깨닫는다. 옛날 S서에서 취조를 받고 느꼈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 두 번이나 거부당하는 삶의 광장. 전쟁은 끝났지만 두 체제의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 그것은 이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 배 타고르호를 타도록 만든다.


 윤애의 반쪽 사랑에 비하면 은혜는 온전한 사랑이었다. 대중의 광장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은혜와의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밀실이었던 동굴에서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였을 수도 있는 은혜의 죽음을 알고 얼마나 황망했을까. 그것이 그를 푸른 심연의 광장으로 뛰어들게 했을까. 어디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삶, 그곳에서는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을까. 여기서도 저기서도 원하는 삶은 이룰 수 없었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한 개인의 힘은 약했다. 이미 짜여진 사회조직을 바꿀 만큼 힘을 실어주지도 못했다. 어쩌면 시대의 아픔일 수도 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뿌리치고 제3국만을 고집했던 이명준의 저 안의 고여 있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안타까웠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이 작품을 읽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 광장과 밀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민중이 이어가는 삶이 곧 역사가 된다. 대중의 광장보다는 심해의 밀실을 택했지만 그를 나약하다고 탓할 수는 없다. 개인을 발붙이게 할 수 없는 국가의 이념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올바른 민주주의 광장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전보다 조금씩 나아가는 건강한 광장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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