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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더디 세계문학 1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김지혜 옮김 / 더디(더디퍼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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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열 권짜리로 읽은 책에서는 앤이 길버트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이야기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앙숙이었던 앤과 길버트가 겨우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지난 일을 용서하고 화해한 부분까지다. 예전의 기억으로는 정말 재미있어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고, 특히 앤과 길버트의 자존심 싸움, 우정이 사랑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괜히 두근두근 마음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짠한 마음에 울컥하고 아이 같지 않은 말투에 웃다가 울고. 생각해보니 예전에 읽었을 때는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 측은지심이나 공감대가 확장되어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 것 같다. 여전히 앤은 매력적이었다. 매일이 감탄이고 매사가 놀라움이었다.


초록 지붕 집의 매슈 커스버트 아저씨 되시죠?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데리러 오시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못 오실 상황이 뭐가 있을까 혼자 온갖 상상을 하고 있었죠. 만약 오시지 않으면 저기 아래 기찻길을 따라 내려가서 길모퉁이에 있는 벚나무 위에 올라가서 밤을 보내려고 했어요. 저는 무서움을 잘 안타거든요. 그리고 흰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잔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대리석으로 된 방에서 머문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요. 그렇죠? 게다가 오늘 못 오시면 내일은 꼭 오실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P22)


 매슈와 마릴라 남매는 노바스코샤의 한 고아원에서 남자 아이를 데려오기로 하고 브라이트리버 역에 갔는데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고... 매슈와 마주친 역장이 어린 여자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왜 남자아이가 아니냐고 물어봐야 하는 일이 숫기 없고 소심한 매슈에게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처음 보는 매슈에게 천연덕스럽게 말문을 여는 앤이다. 작고 뼈만 앙상한 아이가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재잘대는데 말없고 수줍은 예순의 매슈는 자기도 모르게 연민을 느낀다. 혼자서 수습하기 힘들어서 일단은 데리고 가서 마릴라에게 떠넘겨야겠다면서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아저씨와 가족이 된다니 꿈만 같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집으로 가는 내내 주위의 경치에 감탄하면서 잠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저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죠! 제가 남자아이가 아니어서 싫으신 거죠! 제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아무도 저를 원한 적이 없었죠. 영원히 지속되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걸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저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 저는 이제 어쩌면 좋죠?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요.”(P39)


황홀한 꿈을 꾸며 집에 왔는데 마릴라의 놀라는 반응에 앤은 눈물범벅이 된다.


아주머니께서 고아라고 생각해보세요. 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왔는데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고요. 아주머니도 분명 울고 싶을 거예요. 제 인생에 가장 비극적인 일이라고요!”(P40)

못 먹겠어요.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고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음식이 넘어가겠어요?”(P43)


 인생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밥을 먹겠느냐고. 외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살아오던 매슈, 마릴라 남매에겐 감정이 풍부하고 꼬박꼬박 할 말 다하는 앤을 보고 참 당황할 만도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웃음이 난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매슈 아저씨는 좋은 분이세요. 동정심도 많으시고요. 제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려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심지어 제 수다를 즐기시는 것 같았는걸요. 저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영혼의 단짝을 만난 기분이었어요.”(p54)


차마 못 나가겠어요.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초록 지붕 집과 사랑에 빠진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밖에 나가면 저 나무, , 과수원, 개울이랑 친해지게 되고, 그러면 저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요. 더 힘들어지면 곤란해요. 다들 절 부르는 것 같아요. ‘, , 이리 와, 같이 놀자.’ 이렇게요. 하지만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결국 헤어질 거라면 사랑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게다가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여기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정말 좋았던 점이 바로 그거예요. 저는 사랑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을 거라 생각했고, 아무도 저를 방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순간의 꿈이 되어버렸죠. 이제 제 운명을 받아들일 참인데 다시 운명을 거스르고 뛰쳐나갈까봐 두려워요.”(P55)


 매슈를 따라 오면서부터 온갖 상상을 하며 꿈을 꾸었건만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앤의 상황이 안타깝다. 하지만 결혼도, 아이도 키워보지 않은 앤이 마릴라는 귀찮기만 하다. 다시 고아원에 보내려고 화이트샌즈에 가서 스펜서 부인을 만나러 간다. 앤의 수다에 질려하는 마릴라는 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하루하루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해먼드 아저씨는 그곳에서 작은 제재소를 운영하셨고, 아주머니는 여덟 명의 아이를 돌보셨죠. 아주머니께서 쌍둥이만 세 차례 낳았거든요. 아이들은 숫자가 적당할 때는 귀엽지만 쌍둥이를 세 번이나 연달아 낳는 건 너무 많잖아요. 저는 막내 쌍둥이들이 태어났을 때 단호하게 말씀드렸어요. 얘들을 돌보느라 제정신이 아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P62)

…… 본마음은 그러셨을 거예요. 진심이 그러했다면 밖으로는 늘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은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많은 분들이셨어요. 술주정뱅이 남편과 같이 산다는 거나, 쌍둥이를 연달아 세 번이나 낳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분들도 본마음은 제게 잘해주고 싶으셨을 거예요.”(P64)


 그렇게 엄격하고 냉정한 마릴라도 앤의 지난날 이야기를 듣고는 안타까움에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 얼마나 굶주리고 궂은일과 가난, 홀대로 지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정말이지 상상력이 없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 같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앤이기에 견뎌내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마릴라는 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앤은 마릴라와 매슈와 가족이 되어 온갖 사건이 끊이지 않는 좌충우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 눈물이 나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저 지금 너무 기쁜데 말이죠. ,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환희의 새하얀 길과 벚나무를 봤을 때도 기뻤어요. 하지만 그대와 지금은 달라요. 그때보다 훨씬 더한 기쁨이에요. , 너무 행복해요. 착한 아이가 되겠어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저더러 매번 꼬마악당 같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노력해볼게요.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요?”(P81)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된 앤의 꿈이 이루어져 기쁨을 이야기하는 뭉클한 장면이다.


집이라는 곳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 같아요. 전 초록 지붕 집이 참 좋아요. 지금가지 어딘가를 이렇게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요. 집이라고 느낄 만한 곳이 없었거든요. , 마릴라 아주머니, 저 정말 행복해요. 지금 당장에라도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도가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만 같아요.”(P114)


 순수하고 감수성 풍부한 앤이 내뱉는 어른스러운 말에 웃음이 난다.

여자아이라면 질색이었던 마릴라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모성애를 느끼며 마음이 혼란스럽다. 우리는 가끔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며 살 일이다. 앤처럼 세상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아요. 마음이 아파요. 언젠가는 아주머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실 거예요. 제 마음을 찢어 놓으셨으니까요. 하지만 용서해드릴게요. 그때가 오거든, 제가 용서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저더러 뭘 먹으라고 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해요. 특히 삶은 돼지고기와 채소라면 더 더욱이요. 상처받은 사람한테 어울리는 음식은 아닌 것 같아요.”(P146)

제가 이실직고할 때까지 방에 가둬둔다고 하셨잖아요. 전 소풍을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뭐라도 고백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어제 밤새 침대에 누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어요. 가능한 재밌는 이야기를요. 그리고 까먹지 않으려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결국 소풍을 못 가게 되었어요. 전부 헛수고였던 거죠.”(P148)


 또 하나의 영혼의 단짝 다이애나와 친구가 되고 난생 처음으로 소풍을 가게 되어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릴라의 브로치가 없어져서 앤은 의심을 받게 된다. 브로치를 만져보기만 한 건데. 용서해 주겠지 싶어서 그토록 가고 싶었던 소풍을 가기 위해 거짓 고백을 했는데... 자신의 숄에 붙어 있는 걸 찾아내고 마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안타까운 상황과 어이없는 반전에 눈물과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런 날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지 않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불쌍해. 이런 날을 누려보지 못하잖아.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좋은 날을 맞겠지 물론. 하지만 이렇게까지 눈부시진 않을 거야. 게다가 학교 가는 길마저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황홀하지 않아?”(P151)

단풍나무들은 참 다정해. 항상 바스락거리면서 나한테 속삭이거든.”(P155)


다이애나 때문이에요. 전 다이애나가 너무 좋아요. 그 얘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 되면 다이애나는 결혼을 해서 저를 떠나 멀리 가버리겠죠? , 저는 그럼 어떡해요. 그 얘 남편이 될 사람이 너무 싫어요. 상상만 해도 너무 싫어요. 그 아이의 결혼이고 뭐고 상상을 했더니 죄다 싫었어요.”(P170)


 다이애나와 앤의 우정은 우정을 넘어 사랑하는 연인과 다름없다. 숲을 같이 걸으며 나무와 호수, 다리 등 온갖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세상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어른 못지않은 삶의 철학이 느껴진다. 학교에 가게 되고 친구를 사귀고 공부에 열중하면서 점점 성장하는 앤을 보는 일은 대견스럽다. 어딜 가나 실수와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좋은 매듭을 지어가면서 조금씩 성숙해지는 앤이 되어 간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앤의 말은 기억하고 싶은 말이 넘친다. 오랜만에 읽었어도 재미와 감동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앞으로도 사랑스런 앤과 자주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듣고 살아가는 힘을 얻어야겠다.



 사랑하는 나의 오랜 세상아! 넌 정말 사랑스러워. 내가 네 안에 살고 있다는 게 기뻐.”(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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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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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먼드 카버는 작년에 읽은 작가와 술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에서 소개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을 알게 되어 언젠가 꼭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다. 얼마 전 명사의 서재라는 이벤트를 통해 소설가 김연수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고 그가 번역한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한 작가와 만나게 되는 과정은 절묘한 타이밍이 작용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열 두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단편소설을 읽을 때마다 짧은 글 속에 이토록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녹여낼 수 있을까 감탄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한 리얼리즘의 대가로 평가된다. 한 번도 자전적인 것을 쓴 적이 없지만 술, 가족이라는 테마는 그의 단편 소설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을 정도로 형상화 되어있다. 특히 작가와 깊은 관계가 있는 술에 관한 문제로 고민하는 마음이 여러 작품 속에 들어 있었다. 인물들은 평범하면서도 소외된 빈민이나 약자 계층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도드라지게 못된 성격의 인물군은 거의 없으며 자신의 주어진 삶에 불만을 품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보인다.


 현재 우리는 소통의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기차>도 역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비타민>에서 흑인 넬슨이 누런 새끼들의 잘라낸 귀를 기념품이라고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왠지 섬뜩했다. 황인종을 가리키는 베트남인은 물론 여러 작품의 공간 배경으로 나오는 우물, 칸막이 자리, 다락방, 칸막이 객실, 소파, 알코올중독치료 센터 등 닫힌 공간 속에서 외부의 소리와 차단된 상황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잘라냈다는 귀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겠다.


 <신경써서><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술을 끊지 못해서 아내와 별거를 하거나 치료센터에 들어가 생활해야 하는 인물이 나온다. 앞 작품에서 아내 이네즈는 로이드와 이혼을 하려는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은데, 로이드는 한쪽 귀가 귀지로 꽉 막혀서 답답하고 어쩔 줄 몰라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는 등 괴로워하는 상황이다. 그런 모습을 보니 냉정하게 이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주인집 할머니로부터 베이비오일을 빌려서 귀지를 빼내고 귀가 들리도록 로이드를 돕는다. 헤어지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런 도움조차 싫을 텐데도 묵묵히 도움을 준다. 헤어지는 마당에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고 배려의 마음이 느껴져서 더 연민이 느껴졌다.


이제 잘 들려.” 그가 말했다. “괜찮아진 거야! 이제 들을 수 있다고. 당신이 꼭 물속에서 말하는 것 같았는데. 이젠 아니야. 깨끗하게 들려. 괜찮아. 세상에. 잠시나마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구. 하지만 이젠 좋아졌어. 다 들려. 들어봐. 여보. 커피를 끓일게. 주스도 있고.”(P170)


 그러게 평소에 신경써서아내의 말을 잘 듣고 소통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술 때문에 가정이 흔들릴 지경까지 갔으면 멈출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로이드는 화장실 변기 뒤에까지 숨겨 놓고 마신다. 이제 잘 들린다는 건 그녀에게 고맙고 같이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안 그래도 늦었다구.” 그녀는 문으로 갔다. 하지만 문 앞에서 그녀는 돌아서더니 그에게 뭐라고 얘기했다.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입술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그 말을 끝마친 뒤, 그녀는 안녕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문을 열었다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P171)


 로이드의 귀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약속시간에도 늦었지만, 로이드와의 재고된 삶도 다시 시작하기에 늦었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고 건성으로 들으면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수는 없다. 문장이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위트가 있다. 짠한 장면을 읽으면서도 웃음이 난다.


 맨 처음에 나오는 <깃털들>은 한 번도 아이를 원한 적이 없이 잘 살고 있던 잭과 프랜 부부가 잭의 친구 버드의 초대를 받아 놀러갔다가 낙원의 새를 의미하는 커다란 공작을 키우고 있는 기이한 그들을 본다. 그리고 단순히 못생겼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엄청나게 못생겼다는그들의 아기를 보고 와서는 어떻게 마음이 바뀌었는지 잭과 프랜은 아이를 갖는다. 아이가 생기면서 부부는 소원해지고 둘 사이를 차지하는 것은 TV뿐이라고 넋두리를 한다. 이른바 그들의 낙원이 사라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카버는 에세이에서 아이들이 생기면서 더욱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는데 이 작품으로 재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은 아내 아일린이 칼라일의 직장 동료와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집을 떠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처한 칼라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장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시터를 구해야 하는데 난감하기 짝이 없다. 집을 떠난 아내의 도움으로 세 번째 시터로 웹스터 부인이 와서 아이들과 가정이 겨우 안정되었는데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정을 듣게 된다. 아내에 대한 미련과 애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칼라일은 열병을 얻게 되고 웹스터 할머니의 간호로 낫게 되는데 떠나는 할머니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집 떠난 아내를 완전히 놓아줄 수 있다고 마음의 매듭을 짓는다. 자신에게는 일어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얼룩 일수도 있는 그것도 삶의 일부라고 인정한 것이다.


 <굴레>는 부동산 임대업과 미용실을 겸업하는 화자가 나온다. 이 화자도 <>의 웹스터 할머니처럼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한때 미네소타 농장주였던 홀리츠 가족이 그들이 탄 자동차만을 건진 채 이사를 온다. 베티는 무직인 남편 홀리츠와 두 아들의 생계를 위해 분할근무제 식당에서 일하는데, 어느 날 머리 관리를 받으러 왔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점점 나아져가고 희망에 차 있었는데 경주마를 사는 홀리츠로 인해 삶은 버거워졌고, 놀랍게도 자신은 두 번째 아내이며 친아들도 아닌데 친아들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말까지. 주변 사람들과 좀 친해져서 같이 어울리다가 어쩌면 치기 어린 장난으로 홀리츠가 머리를 다치고 그들은 떠나게 된다. 검은 가죽의 낡은 말굴레만 놓고서. 빠뜨린 것인지 일부러 놓고 간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베티는 이런 힘듦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베티는 이런 삶 속에서도 불평불만도 없이 이 가족을 떠나지도 않았다.


재갈은 무겁고 차갑다. 이빨 사이에 이런 걸 차게 된다면 금방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 재갈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 때가 바로 그때라는 걸.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P284)


 재갈이 물려졌다는 것은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일 게다. 살아있으니까 그런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벗어나기 위한 굴레가 아닌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고 거기서 도망치지 않는 베티는 아마도 자신의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는 아니었을까. 레이먼드 카버의 굴레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에 감동이 진하게 몰려온다.


 마지막의 <대성당>은 소외 계층의 약자 중에 약자라 할 수 있는 맹인이 나온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진실을 못 보는 것은 아니고 환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성을 다해 들으려 하지 않고 진실을 보려는 진심 없이는 진정한 소통은 요원할 것이다. 여러 단편 속의 인물들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이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건 아닐까 위안이 생긴다

 

이 사람아, 다 괜찮네.” 그 맹인이 말했다. “난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P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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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판 새움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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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을 고1때 읽었으니 기억은 그리 세세하게 남아있지 않다.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간결하면서도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 문장은 오랜만에 접했어도 그 강렬함은 여전했다. 비교적 짧은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받고 보니 분량이 상당했다. 역시나 번역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어서인지 번역의 문제로 반론을 제기하는 역자 노트가 작품 내용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위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을 우리는 거의 번역본으로 읽는다. 고전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번역서들을 접한다.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재능을 부여받았다면 모를까, 번역서를 만나면서 우리는 가끔 잘 안 읽히는 책을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러한 부류의 책은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는다. 한 나라의 언어에는 그들의 역사, 문화, 풍습, 그들의 생활까지도 모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등장인물의 성격이 달라지고 내용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책읽기였다. 원래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나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번역의 과정에서 왜곡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사실 리뷰를 쓰면서도 조심스럽기는 하다. 번역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이 분야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도 이렇게 도마 위에 올라 분쟁을 하는구나 싶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나는 단지 독자로서 이 작품을 읽고 냉정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주로 김화영 번역가의 번역본을 비교하는 문장이 주로 차지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확실히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없는 접속사나 말을 끼워 넣었다거나 하는 오류를 범한 것을 낱낱이 지적한다. 프랑스어에 전혀 문외한인 나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지면을 할애하여 예를 든 문장들이 사실이라면 작품을 번역하는 역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피가 나도록 여자를 때렸다. 그전에는 그 여자를 때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손찌검은 했지만 말하자면 살살 했던 셈이지요. 그러면 그년은 소리를 지르곤 했지요. 나는 덧문을 닫아 버렸고, 결국엔 늘 마찬가지로 끝나 버리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번엔 본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년에게 벌을 속 시원하게 다 주지 못했거든요.”(김화영 역 민음사 P39~40)

그는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 전에는, 여자를 때리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를 때린 건, 말하자면 다정함의 표현이었소. 그 여자가 조그맣게 소리를 질러 댔고 나는 덧문을 닫아 버리면 그것으로 항상 끝나는 일이었지. 그러나 이번엔 진짜였고. 그래도 나로서는 그 여자를 충분히 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본문 P52~53)

(※ 프랑스어 원문도 실려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했다.)


 밑줄 친 부분은 그 여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Elle’를 그렇게 번역하여 등장인물 레몽을 파렴치범이나 양아치의 부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역자가 임의로 옮긴 번역의 예라고 하는데 작가가 맨 처음 쓴 인물의 성격과는 정 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뫼르소는 어느 일요일, 이웃과 함께 보내다가 레몽을 다치게 한 아랍인과 마주치게 되고... 그가 겨누는 칼에 대응하여 그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게 된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파고들어 아픈 두 눈을 후벼 팠다. 모든 것이 휘청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를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날카롭고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P88~89)


 아,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라니 간결한 이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고난은 얼마나 큰 것인가.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과정은 뫼르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햇볕 때문에 그를 죽였다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오랫동안 쌓아온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게 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 무덤덤한 성격은 어쩌면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악한이다, 라는 쪽으로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다. 그리 살갑지 않은 성격이지만 거짓말을 싫어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변 사람들이나 관계 맺은 사람들에게 굽신 거릴 줄 모른다. 어느 정도로 거짓말을 싫어하냐 하면 마음에 있는 여자 마리가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그에게 묻는데, 사랑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결혼해 줄 수도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 자신에게 충실하다고 해야 할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면 묻어가지 못하는 사람 뫼르소는 그렇게 이방인취급을 받으며 죽을 날을 기다린다.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지만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치고는 너무 담담하다. 사형집행일에는 덜 외롭게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맞이해 주길 바라기까지 하면서.


<번역문장의 비교 예>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김화영 역 민음사 P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본문 P17)


잔은 그 녀석을 붙잡으려고 하질 않았다고요.”하고 여자가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 그래?” 하고 사내는 말했다. “당신이 나오면 그 녀석을 꼭 붙잡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붙잡으려들지를 않았어요.”(김화영 역)

잔이 그를 돌볼 수 없대요.” 그녀는 목청을 다하여 소리쳤다. “그래, 그래.” 남자가 말했다. “내가 그 여자에게 당신이 나오면 다시 그를 돌볼 거라고 했지만, 그 여자는 그것을 원치 않는대요.”(본문 P107)


나는, 그것도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 놓고 나를 무시해버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가 나 대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그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김화영 역 P116)

나는 그것이 나를 이 사건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 버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대체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 법정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본문 P144)


 책을 읽다보면, 특히 번역서의 경우 정말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건가 하다가도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고 탓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번역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역자는 여기서 이렇게 당부한다. 번역서를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을 의심하기에 앞서, 역자의 권위에 우선 주눅 들지 말고 그가 번역을 잘못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러한 논쟁은 수없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한다. 해당 업계에서는 불편한 감정이 있겠지만 이를 계기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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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더디 세계문학 8
제인 오스틴 지음, 이정아 옮김 / 더디(더디퍼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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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이 나온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이 그토록 사랑받는 비결이 되었을까. 자료에 의하면 제인오스틴은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 한 번은 남자 쪽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또 한 번은 청혼은 받았으나 사랑 없는 결혼에 회의를 느껴서 거절했다. 그러니 어쩌면 연애다운 연애도 못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연애와 결혼 이야기다. 아마도 자신의 소망을 작품에 쏟아 부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빛나는 사랑의 결실의 과정을 보여주고 흥미를 돋우며 독자를 참여시킨다. 그저 흔한 사랑 이야기에 오만편견이 빚어내고 엮어내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흘리거나 웃음 짓게 된다. 인물들의 개성 있는 성격과 위트와 풍자 섞인 대화의 자연스런 조화에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다섯 명의 딸을 둔 시골 소지주인 베넷 씨 부부를 둘러싼 베넷 가를 배경으로 경쾌하고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예나 지금이나 과년한 딸이 있다 보면 혼사 문제에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인 것 같다. 작품이 쓰인 시대만 해도 여성들에게, 특히 재산이 없는 여성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마디로 결혼은 최선의 생계대책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청춘 여성들이 듣는다면 어이없어 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베넷 씨의 집은 아들이 없는 관계로 한정 상속이라는 문제를 코앞에 두고 있어서 더욱 골칫거리가 된다. 즉 가장인 베넷 씨가 죽고 나면 콜린스라는 친척에게 재산이 다 넘어가게 된다는 상황이다. 부인의 미모에 반해 결혼한 베넷 씨는 이해력이 부족한 아내와 정신적 교감 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한 채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서재에 틀어박혀 지내거나 냉소와 조롱이 유일한 낙이다. 베넷 부인 또한 남편에게 큰 기대 없이 딸들을 결혼시키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이며 수다 떨기와 마실 다니는 일에 열심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딸들의 결혼에 목을 매는 베넷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하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네더필드 파크에 연수입이 4,5천 파운드나 된다는 잘생긴 미혼 남자 빙리가 사륜마차를 타고 왔다고 소문이 돌면서 베넷 부인의 신경은 온통 거기에 쏠린다. 당사자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자인 이 남자를 사위 삼고 싶은 마음에 남편에게 빙리를 꼭 만나고 오라고 성화다. 얼마 후에는 무도회가 열리고 빙리의 친구 다아시가 들어오자 연수입이 1만 파운드라는 소문이 쫙 퍼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그에게 쏠린다. 키 크고 멋진 외모에 재산이 많은 젊은이가 나타났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 어떻게 하면 딸을 그런 사람과 결혼 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고 바쁘다. 시대는 변했어도 백만 탄 왕자는 뭇 사람들의 로망이라는 것.


 빙리와 다아시는 첫인상으로 인해 호불호로 갈리게 된다. 첫인상이란 한번 굳어지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고 하듯이, 다아시의 말수가 적은 것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빙리는 유쾌한 표정에 소탈한 태도로 사람들의 단번에 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다아시는 빙리보다 현명함은 한 수 위였지만, 내성적인 성격이 거만하고 까다롭게 비친다. 이렇게 정반대의 성격임에도 끈끈한 친구사이인 이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다아시는 그 특유의 오만함으로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빙리와 큰 딸 제인의 사랑은 점점 싹터 가는데... 갑자기 빙리와 다아시 일행이 런던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어 엘리자베스가 콜린스 씨의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면서 두 딸을 결혼시키려던 베넷 부인의 희망은 물 건너간다.


엘리자베스, 넌 이제 불행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구나. 오늘 이후로 너는 부모 중 한 사람과 남남이 되어야 한단다. 네가 콜린스 씨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네 어머니가 다시는 너를 안 볼 테고 ,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다시는 너를 안 볼 테니까.”(P157)

베넷 부인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베넷 씨는 이런 말로 독자를 웃기고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이런 유머와 풍자가 작품 전반에 포진되어 있어 있다.


있는 힘을 다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열렬히 찬미하고 사랑하는지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P258)

처음엔 엘리자베스의 웃음이 헤프다는 둥 시큰둥했던 다아시는 자신도 모르게 엘리자베스에게 빠져든다. 물론 당찬 엘리자베스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그러다가 외삼촌 가드너 부부를 따라 여행길에 나섰다가 켄트에서 여러 번 다아시와 마주치게 되고, 어느 날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다아시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엘리자베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떤 여성이 이런 고백을 듣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지 않겠는가. 자신에 대한 애정 어린 찬사가 싫진 않지만, 묵은 감정이 있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오만편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사랑은 시작된다.

제목에 충실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주로 다아시의 오만과 그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심각한 편견이 풀리는 과정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후 서서히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고 다아시의 열렬한 사랑에 대한 감동과 고마움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의 환희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주변 인물의 결혼의 사례를 보여주는데 현실감 있는 이야기라 공감하게 된다.


 콜린스 씨의 청혼을 엘리자베스가 거절하자 이웃에 있는 그녀의 친한 친구 샬럿은 성직자의 지위와 재산이 있는 콜린스 씨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한다. 가난 대비책을 잘 찾은 셈이다. 사랑 없는 결혼이지만 어쩌면 실질적인 이득 면에서 계산한 것이다. 뭐라고 탓할 수 있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던 당시의 여성들의 지위를 보면. 또 하나의 커플은 베넷 가의 막내 딸 리디아와 위컴의 결혼이다. 이 경우는 정상적인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도주를 통해서 가족들의 마음을 실컷 졸이게 하고 마을의 비웃음을 사게 한 철딱서니 없는 행위가 다행히 결혼으로 이어진 결과였다. 이 커플들의 대비로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 이야기는 더욱 빛을 발휘 한다.


 첫인상의 편견을 깨는 인물들의 사례도 참 재미있었다.(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 한다.) 다아시가 내성적인 것이 오만함으로 보였다면 위컴의 경우는 어떤가. 위컴 이야말로 훤칠한 미남에 좋은 평판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완전히 반전이다. 역시 겪어보고 그 내막을 알지 못하면 겉모습이 그의 전부가 되는 항간의 편견 또한 유감없이 깨준다. 또 쾌활하고 친절한 빙리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결정적인 행동을 친구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면이 있다. 이렇게 저마다 사람은 단점을 가진 완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단점을 발견하고 조금씩 성장하는 바람직한 모습이 보여서 읽으면서도 흐뭇해진다.


 확실히 엘리자베스의 톡톡 튀는 재기 발랄함은 그 시절의 여성상과는 달리 두드러진다. 그 오만했던 다아시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랑스런 캐릭터다. 귀족층이라는 권력자의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는 캐서린 영부인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부분은 얼마나 후련하던지. 그 당돌함에 영부인도 혀를 내두른다. 귀족과 서민의 신분이라는 격차를 뛰어넘은 신데렐라 같은 사랑이라고 할까. 제인 오스틴은 작품 속에서나마 그 소망을 이룬 것은 아닐까. 티격태격하며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성숙해지는 예쁜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로 노는 것 같지만 불행 앞에서는 한 마음이 되는 베넷 부부와 가족 이야기, 특히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진한 자매간의 사랑은 오늘날엔 희귀할 만큼 느껴져서 보기 좋았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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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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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으로 르 클레지오의 작품은 처음 접하게 되었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프랑스 현대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라는 평을 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화자는 의 뜻을 가진 라일라가 과거를 회고하는 구성으로 쓰였다. 예닐곱 살에 인신 매매단 에게 유괴당한 이 흑인 여자 아이를 랄라 아스마라는 여주인이 샀고, 밤에 들어왔다 하여 그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 일은 차라리 꿈이랄까. 아득하면서도 끔찍한 악몽처럼 밤마다 되살아나고 때로는 낮에도 나를 괴롭힌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먼지가 날리는 텅 빈 거리, 푸른 하늘, 검은 새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손이 나를 잡아 커다란 자루 속에 던져 넣고,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린다.(P9)


 이 어두운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동안 따라다닌다. 어둠과 밤이 무섭고 거리를 무서워하게 된다. 밖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남자의 목소리도. 마당을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유괴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할 수도 없다. 그나마 랄라 아스마를 만난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오로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이 할머니, 마님뿐이다. 그녀를 위해 집안일과 심부름을 해 주는 대가로 읽는 법과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로 쓰는 법을 배우고 암산과 수학을 그리고 종교에 입문하는 것도 배운다. 또 몸을 깨끗이 하고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랄라 아스마는 항상 라일라의 편이 되어 주었지만, 며느리 조라의 학대와 아들 아벨이 뻗치는 추악한 검은 손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방패막이가 되었던 랄라 아스마가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늙고 지쳐서 더 이상 읽기도 공부도 시키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경련을 일으켜 쓰러지고... 의사를 부르러 갔다가 여인숙에서 산파인 자밀라 아줌마를 데려오지만, 간절한 라일라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게 된다. 이에 라일라에게 쏟아진 화살, 분노로 일그러진 조라를 피해 멜라의 저택을 빠져나오게 된다.


 수 년 동안 마당 밖을 벗어나지 못했던 라일에게 있어 이 사건은 어쩌면 극적인 장면이다. 깨끗하게 정돈된 랄라 아스마의 집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사는 여인숙의 창녀들을 공주님이라 부르며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여태까지 받아본 적 없는 환대와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크고 작은 심부름을 하며 돌아다닌다. 억압으로 인해 가질 수 없었던 자유를 갖게 되어서인가. 도둑질과 거짓말에 재미를 붙이게 되고 이를 염려하는 자밀라 아줌마에 의해 기숙학교에 들어가지만, 오래지 않아 쫓겨나고 자유분방한 삶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또 붙잡혀가고 만다. 조라의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경찰에 붙잡혔던 라일라는 다시 조라에게 넘겨진다. 친절한 들라예 씨 부부를 만나게 되어 조라의 매질에 벗어났다고 안도하지만, 여지없이 검은 유혹은 계속된다.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들라예 씨의 이상한 행동에 환멸을 느끼고 가능한 한 멀리 지구 끝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부터는 한번 찾은 자유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라일라의 강한 의욕을 엿볼 수 있다. 떠나야 할 때, 도망쳐야 할 때를 잘 포착하는 감각, 촉수가 느껴진다하도 당해서 단련되었을까 어리지만 강인한 성격이다. 대담하고 낙관적인 면도 보인다. 아직도 어린 나이에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어느새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을 먼저 찾게 마련이다. 여인숙 사람들이 라일라에게 있어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시 찾은 여인숙은 온데간데없고 자밀라 아줌마는 감옥에 갔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타가디르, 후리야를 만나고 감격에 젖어 뭉클해진다. 하지만, 이 곳 타브리케트 천막촌의 삶은 만만치 않다. 갇혀 있었으되 가난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라일라에겐 더욱 그렇다. 하나같이 기구한 인물들이다. 남편에게 학대를 당해 도망쳐 나온 후리야, 다리가 괴저에 걸려 썩어 들어가서 이제 일도 못하게 된 타가디르. 그래서였을까. 일자리를 찾아달라는 라일라에게 후리야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며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 영어로 된 책과 공책들을 사다준다. 우리처럼 돼서는 안 된다며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변호사나 의사 같은 사람이 되라고. 타가디르도 한 마음으로 라일라를 다독인다. 피붙이도 아닌 이들의 애정에 라일라로선 감동할 수밖에 없다. 마을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어나가며 학구적인 일상이 계속된다

 

 후리야와 함께 밀입국을 계획하고 에스파냐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간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한다. 집시들, 프로메제아 부인을 만나고 노노, 하킴과 하킴의 할아버지 엘 하즈, 시몬을 만난다. 영혼을 울리는 시몬의 노래 소리를 듣고 고향을 떠올리기에 이른다. 저항할 수 없는 그 음악은 라일라를 자신의 뿌리인 힐랄 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시몬의 삶도 화려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로 가득하다. 자유가 없는 삶이다. 자신의 육신을 가졌음에도 남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삶이다.


 무엇이 라일라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했을까. 항상 가둬두려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지만, 결국은 박차고 나왔다. 생애 처음으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음반 계약을 했고 숨어 살아야 했던 고통의 몸부림의 대가로 새로운 이름의 여권을 선물 받았지만, 그것을 뒤로 하고 떠나온 곳으로 회귀했다. 수많은 위험과 생명 담보를 무릅쓴 과정이었다. 아무리 통과제의라고 하더라도 너무나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세상은 그녀에게 호시탐탐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그에 굴복하지 않고 굳건히 일어섰다. 유괴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의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한편 강자가 약자에게 군림하는 세태의 고발, 현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혹사시키고 있는가 묻는 메시지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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