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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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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P181)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면, ‘동물농장7계명은 위의 인용 문장처럼 하나의 계명만 남는다. ‘동물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대입하면 우리 인간 세상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어쩌면 이렇게도 완벽하게 표현했을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1984를 읽은 후 두 번째로 읽는 오웰의 작품이다. 미래사회의 디스토피아를 다루었다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노출되다시피 한 채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동물농장은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화 소설로 알려져 있고 1945년 처음 출판한 당시에는 동화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읽고 나서 보니 동화로만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위기의 시대를 맞아 반드시 읽어야 할 클래식으로 출간 이후 단 한 번도 절판되지 않은 책이라는 평가가 달려 있다. 해설을 먼저 읽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읽어 나갔는데 처음엔 그다지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 않았다. 주석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짜 맞출 수 있었고 소비에트 정치 상황과 연관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차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맨 위의 문장을 만났고 어느덧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인데 전하는 메시지는 제법 울림이 컸다. 소비에트 사회는 물론 국가라는 조직을 갖고 있는 사회라면 어디서든지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어느 날, 존스 씨가 운영하는 장원농장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메이저 영감이 동물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한다. 그 후 사흘이 지나 메이저 영감은 숨을 거두었고 농장에서 조금 똑똑한 동물들은 전과는 다른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동물들 중에서도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돼지, 스노볼, 나폴레온과 식용돼지 중 가장 이름난 스퀼러가 중심이 되어 메이저 영감의 교훈을 하나의 사상체계로 다듬어 동물주의라 이름 붙인다. 그들 세계에도 다양한 생각을 하는 동물이 있었다. 존스 씨가 없으면 굶어죽게 되니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자신들의 도리라고 말하는 자도 있고, 만약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위해 지금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무슨 상관이냐는 동물, 반란 후에도 설탕이 있는 거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암말 몰리까지. 마치 변화가 두려워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 뭔가 바뀌기를 원하지만 선뜻 나서기는 두려운 사람, 혁명 후에도 기존에 누리던 것은 가질 수 있는지 저울질 하는 등 인간 세상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술집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된 존스 씨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동물들에게 밥을 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일꾼들에게 방치된 굶주린 동물들은 폭발하며 반란이 시작된다. 채찍으로 맞으면서도 순종했던 동물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진 주인은 두려움에 떨다 도망을 치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개구리를 밟아 죽게 한 것처럼 어이없이 반란에 성공하고 장원농장은 동물들의 소유가 된다. 그동안 받은 핍박의 흔적을 씻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그들을 억압하던 코뚜레며 사슬, 굴레 등을 모두 불 속에 던져버린다. 농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확인해 보고 이 자유가 진짜인지 확인한 다음 모두 모인 가운데 장원 농장동물 농장으로 바꾸고 일곱 개의 계명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다.


일곱 계명


첫째, 두 다리로 걷는 자는 모두 적이다.

둘째, 네 다리로 걷거나 날개가 있는 자는 모두 친구이다.

셋째,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넷째,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다섯째,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여섯째,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일곱째,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만하면 그동안 존스 씨 밑에서 고생했던 삶을 보상해 줄 만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지 않은가.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 스노볼은 동물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배우게 하려고 학급을 만드는 등 각 동물들에게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단체를 조직한다. 하지만 오합지졸 같이 살아왔던 동물들을 교육시키려는 계획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읽기와 쓰기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어느 정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는데,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완벽하게 읽고 쓸 줄 알았고 나머지 동물들은 딱 관심이 가는 부분까지만 읽을 수 있는 정도다. 특히 머리가 나쁜 양, , 오리들이 일곱 번째 계명을 외우지 못하자, 스노볼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빠!”로 알기 쉽게 바꾸어 준다. 이에 두 다리인 새들이 반발을 하자,


동무들, 새의 날개로 말하자면,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추진기관일 뿐 무엇을 조직하는 기관은 아니오. …… 그것은 다리로 보아야 한단 말이오. 인간의 특징은 인데, 이 손이야말로 온갖 못된 짓을 하는 도구란 말이요.”(P52~P53) 



 우둔한 백성을 등쳐먹기 위해 어르고 달래던 이야기 속 통치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감언이설에 넘어간 동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이 말을 외치곤 하는데, 권력자들이 통치하기 쉽도록 언어를 오용하고 조작하는 구체적인 실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인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동물들은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스노볼은 풍차를 건설하면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있으며 사료 절단기와 젖 짜는 기계를 움직일 수 있다며 꿈같은 계획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나폴레온은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식량 증산이라며 반대를 한다. 이들은 평소에도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하곤 했지만 스노볼은 풍차를 건설함으로써 달라질 수 있는 동물농장의 미래상을 심어주려고 열띤 웅변을 토하자 둘로 나뉘어 있던 지지자들은 스노볼에게 압도당하고 만다. 나폴레온은 이것을 보고 그냥 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스노볼을 내쫓고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집회를 폐지하고 회의는 비공개로 열 것이며 결정된 사항은 나중에 전달할 것이라고 한다. 스노볼의 추방한 것에 충격을 받은 동물들은 나폴레온의 이러한 선언이 이어지자 아연실색한다. 이것을 무마하려고 거드는 스퀼러의 말이 참으로 가관이다.


동무들!, …… 여기 있는 여러분은 하나같이 나폴레온 동무가 희생을 무릅쓰고 중책을 맡고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동무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입니다. …… 그는 여러분 자신이 직접 모든 결정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만약 풍차 운운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던 스노볼을, 알다시피 대역죄인임이 틀림없는 그 스노볼을 따르기로 결정했더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요?”(P83)


 이렇게 풍차 건설을 반대하고 스노볼을 추방했던 나폴레온은 풍차 건설 계획을 발표해서 또 한 번 동물들을 놀라게 한다. 여기엔 나폴레온은 한 번도 풍차 건설을 반대한 적이 없었으며 그가 만든 설계도를 스노볼이 훔쳐간 것이라는 그럴싸한 스퀼러의 변명이 따라 붙는다. 동물들을 감시하는 경찰격인 세 마리의 개들이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조금만 열심히 일하면 돼라거나 나폴레온은 항상 옳아를 반복하며 무조건 복종하는 복서가 있었고, 동물들은 존스 밑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며 위안을 삼는다.


 1년 동안 노예처럼 일하면서 풍차가 거의 완성되려는 시점에 산산조각이 나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두 번째 짓는 과정에서는 음모와 살상, 배신으로 얼룩지며 일곱 개의 계명이 하나씩 사라진다. 우직하게 일만 하던 동물들은 조금씩 뭔가 이상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대항하지 못하고 동료들끼리 수군거릴 뿐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던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그제야 깨닫는다. 비록 몸은 자유로워 졌으나 존스 씨 밑에서 살 때보다 더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동물농장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유일한 대통령 후보였던 나폴레온은 만장일치로 당선된다. 평생 복종 밖에 몰랐던 복서는 폐마 도살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된 나폴레온은 본성을 드러내며 권력을 휘두른다.


 어렸을 적부터 동물을 무척 사랑했다는 오웰은 사람들이 동물을 학대하는 모습에서 인간 사회의 유산자가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것을 떠올리고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평생 간직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내란에 참여하여 스탈린이 이끄는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실상을 목격하고 서방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등장인물을 동물로 설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우화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한 후 동물농장을 이전의 장원농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존스의 행동을 비판하며 평등을 부르짖으며 착취를 일삼더니 주인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네 다리로 걷던 돼지들이 인간의 옷차림을 하고 두 다리로(뒷다리) 걷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은 타락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라고 하겠다. 이 우화를 통해서 국민이 정치적 상황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무관심할 때, 권력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위험한 사회로 치닫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동물은 벤저민과 복서라고 할 수 있다. 복종으로 일관하며 어떤 횡포에도 비판하지 않고 침묵으로 동조함으로써 지배층이 힘을 키우도록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평생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입장이면서도 냉철하게 비판하고 고발했다는 점에서 더욱 뜻 깊고, 오웰이 정말 공을 들여 썼다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결국 평등한 세상을 원하지만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어느 사회에나 갑과 을이 있으며 계급사회는 아니지만 보이지 않게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하는 세상이다. 짧은 이야기에서 인간세상의 삶의 흐름을 다시 발견했다고나 할까. 정치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오웰의 동물농장은 정치의 속성을 제대로 알려주는 작품이다. 관심을 갖고 참여하며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YES24 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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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20
조지 오웰 지음, 박준형 옮김 / 별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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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터 꼭 한 번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벤트에 당첨된 계기로 읽게 되었다. 1948년에 완성되고 다음 해에 출간된 이 작품은 미래 사회를 그린 것으로 회자되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무력한 개인이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에 의해 사생활을 완전히 통제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암담하고 불행한 일일까 오싹함이 몰려왔다. 더 이상 미래소설이 아니게 되었지만 오늘의 현실이 많이 투영된 작품이라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목적의 글쓰기만이 생명력을 가진다는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20세기 최고의 영향력 있는 작가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배경은 초국가 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이스트아시아를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다가 동맹국이 되기도 한다. 윈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빅토리 맨션 주위에는 정부 조직인 진실부평화부’, ‘사랑부풍요부의 거대한 건물들이 모여 있다. 진실부는 뉴스와 엔터테인먼트와 교육과 예술을, 평화부는 전쟁을 맡고 사랑부는 법과 규범을 유지하는 일을 풍요부는 경제를 맡고 있다. 각 부의 이름만 그럴싸하지 허구의 인물 빅 브라더를 내세워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며 국민을 피폐한 생활로 내몰고 있는 주범이다.


 진실부의 기록국에서 일하는 윈스턴 스미스가 하는 일은 모든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수정하는 일을 한다. 이 모두가 당이 원하는 일이며 명령이기 때문이다. 당원들은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어 24시간 감시를 당한 채 살아간다. 정형화된 한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굴복 외에는 없는 것일까.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고 그런 자녀를 교육을 잘 시킨 결과라며 칭찬하는 부모가 있고, 누군가의 교수형을 구경하며 즐기는 등 감시와 폭력이 일상화되어간다. 이 조직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윈스턴은 일기를 쓰기 시작 한다. 들키면 사형이나 노동교화소형 20년 이상을 선고받을 수도 있는 일대의 모험이다.


 어디든 설치되어 있는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이라는 기계에 속마음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 관공서, 은행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은 어김없이 CCtv가 쉼 없이 가동되고 있으며, 문명의 이기인 휴대폰은 위치 추적은 물론 개인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훤히 보여주는 기계가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오늘의 현실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더욱 섬뜩했다.

 

 당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을 억제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맹세하게 한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 스물 네 시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목표는 유라시아 적군을 물리치고 간첩과 파괴 공작원, 사상범, 반역자를 추적하는데 힘을 모으기 위해서다. 더구나 신어라는 개념으로 단어를 줄이고 파괴한다. 그들이 신어 정책을 펴는 목적이란 사고의 폭을 좁혀서 사상범죄가 불가능해지게 하는데 있다. 이중사고를 훈련받아 충성심이 강한 당원으로 만드는데, 결국 모든 것이 당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것, 완벽한 진실을 알고 의식하면서도 정교하게 만든 거짓을 말하는 것무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이중사고이다. 당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당원의 눈 밖에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된다.


 옳지 않은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닿았을까. 줄리아라는 여인을 만나 불안해하면서도 억압되었던 사랑을 하면서 잠시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려 윈스턴의 7년 동안의 행적이 감시되고 있었다는 말에는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기록 속에 존재합니다. 과거를 적을 수 있어요.”

기록 속에 존재한다고? 또 그 밖에는?”

머릿속에 존재합니다. 인간의 기억 속에요.”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거지. 아주 좋아. 그렇다면 우리,

그러니까 당은 모든 기록과 기억을 통제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도 통제하는 거야, 안 그런가?”(P372)


“(중략) 현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해. 개인의 머릿속은 아니야. 그러면 실수를 저지르거나 곧 사라질 수 있으니까. 오직 당의 머릿속에 존재할 때만 집합적이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지. 당이 진실이라고 선택하는 게 바로 진실이야. 당의 눈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진실을 볼 수 없어.(후략)”(P373)


자유란 2 더하기 2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유가 허락된다면 나머지도 따라올 것이다.’(P127)


공포와 증오, 잔인성 위에는 문명을 세울 수 없습니다. 계속 될 수 없어요.”

왜 안 되지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붕괴될 거예요. 스스로 망하고 말 겁니다.”(P403)


당신들은 실패할 겁니다. 우주에는 당신들이 모르는 정신이나 원칙 같은 게 있습니다. 당신들도 절대 극복할 수 없어요.”(P405)


 ‘어둡지 않은 곳에서 만날거라던 오브라이언의 예언처럼 그렇게 둘은 만나게 된다. 끝까지 맞서려했던 윈스턴은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에 두 손을 들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무력한 개인이 절대 권력의 힘에 의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그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또 개인의 기본적인 욕구인 사랑, 행복감 등 개성을 말살당한 채 기계적인 인간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은 적어도 소설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었다.


전쟁은 곧 평화이고

자유는 노예를 만들어내며

무지는 힘이 된다.


 당의 슬로건이라는 이 말이 지금도 일부 권력층의 힘이 되어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정치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국민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속으로 환호를 지를 것이다. 적당한 관심과 알 권리를 무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윈스턴이 자신이 하는 일에 의심을 갖고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을까 걱정한 부분은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는 절대 권력에 의해 무너졌지만 그 정신만큼은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누리고 있는 억압되지 않은 자유와 소박한 행복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점점 복잡하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일독을 통해서 과거를 읽고 현재를 최선으로 살아가는 방법,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지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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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소송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18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제헌 옮김 / 별글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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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이 두 작품을 읽고 안타까움과 혼란스러운 마음이 교차하며 상념에 빠졌던 적이 있다. 특히 <소송>에서 느낀 혼란스러움은 지루함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현재 벌어진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 별글 출판사의 이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처음 읽었던 작품의 애매함을 완화시켜 보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혹자는 공평하다고 하고 혹자는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부조리한 인간사의 일면을 다시금 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변신>

 그레고리 잠자는 악몽에서 깨어난 어느 날,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자 기둥이었고 사랑과 감사의 존재였던 아들이자 오빠가 말이다. 우상 같은 존재였던 아들은 이제 수치심과 더불어 귀찮은 존재로 바뀌어 간다. 집안을 위해 일했던 아들이 이제는 보살핌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인데, 한낱 벌레에 불과해 보이는 것을 아들과 동일시 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가족들의 심리변화를 보는 과정은 실로 섬뜩하다. 마지못해 먹을 것을 주지만 가족과 함께 마주보거나 하지 않고 차단한다.


 벌레가 된 후에도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애쓰는 잠자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용을 쓰지만 무거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거기다 커다란 몸에 비해 어이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서로 엉켜 버둥거린다. 가위에 눌려 아무리 일어나려고 애써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답답함이 연상된다. 의식은 전과 같이 똑같이 그레고리 잠자 이건만. 그렇게 애를 썼지만 출근 시간을 놓치고 회사의 이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급기야는 벌레가 된 잠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몸에도 불구하고 더욱 부지런히 일하겠다는 결심을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들리는 건 벌레의 외침뿐이다.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점점 절망에 빠진다. 아버지 얼굴에 나타난 당황한 빛을 읽어내며 이것이 아버지를 화나게 하지 않았을까 안절부절 못하고 생명의 위협마저 느낀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으로 체념과 슬픔에 빠지면서도 가족의 안위를 걱정한다. 왜 겉모습은 벌레로 바뀌는 벌을 내렸으면서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을 주었을까. 벌레로 바뀐 모습의 잠자는 남은 가족에게 이미 오빠와 아들이 아니다.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성가시고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몸에 박힌 채 죽어간다.


 경제적으로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는 사람만이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좀 부족한 면이 있어도 감싸주고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는 없을까. 가족이 되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문득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 사랑으로 혹은 어떤 인연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편안한 세상이 되었지만 소외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히는 현대인의 생활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벌레가 되어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하지만 듣는 이에겐 시끄러운 웅얼거림이 되어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민낯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이 작품은 소외된 사람의 모습을 벌레로 형상화함으로써 표현주의적 작품이며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면에서 실존주의 소설로도 간주된다. 가족의 의미란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송>

 이야기의 주제가 딱 떨어지는 작품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 그런데 <소송>은 읽으면서도 읽은 후에도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어떤 죄목인지 누구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구속영장도 없이 어떤 힘에 끌려 1년 동안이나 소송에 휘말리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요제프 K의 이야기다.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고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다. 앞으로 나아가지만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조바심이 나고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은 두려움이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닐까. 갑작스런 자연재해나 사고 등에 맞닥뜨려 주저앉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된다. 좀 다른 경우지만 주인공 요제프 K의 경우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는 면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K는 무작정 의기소침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사건을 좀 가볍게 보는 면이 있었다. 변호사의 애인을 희롱하거나 여자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데(여자들 쪽에서 적극적이긴 했다)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한 처신 치고는 좀 아니다 싶었다.


 서른 번째 생일 날 아침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다. 처음에는 은행 동료들이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생각하면서 금세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첫 심리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부터 목격하는 재판소의 풍경은 부조리의 총 집합소였다. 엄격한 잣대로 죄를 묻고 처벌해야하는 곳이 무질서의 극치를 보여준다. 권력의 편에 서서 모여 있는 오합지졸의 집단을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빨래하는 여자, 어린아이들, 재판소의 관리들, 화가 등 재판소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를 보고 재판소를 얕잡아 보았을 수도 있다.


 첫 대면에서 예심판사는 K를 페인트공이냐고 묻자 자신은 대형 은행의 이사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동명이인의 인물을 잘못 부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에 대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없다. 그저 답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죄인으로 치부하고 진행하는 것뿐이다.


 숙부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청원서조차도 제출하지 않는 등 별 진전 없이 몇 달이 흘러가고, 소송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K는 다급한 마음에 은행 고객이 소개해준 화가를 만나게 된다. 법률 조언을 화가에게 하다니. 화가를 찾았지만 화가의 집이 재판소이며 관리들과 결탁되어 있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 장이 될 때까지도 지루한 소송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이탈리아 고객의 접대를 위해 대성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신부인 듯한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신부는 법률 입문서에 적혀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K에게 재판의 심각성을 토로하는데.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한 시골 사람이 이 문지기에게 와서 법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럼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지기는 말한다.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 돼.’ 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열려 있고 문지기는 옆으로 물러서 있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이것을 본 문지기는 껄껄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거든 내가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게나. 그러나 내겐 권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게. 그리고 나는 신분이 가장 낮은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문마다 문지기가 서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권력이 강해진다네. 세 번째 문지기를 보면 나조차도 겁이 나.’(후략)(p436)


 마치 소송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K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이 신부마저 교도소의 신부라고 밝히는데. 사방이 K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오싹함으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 심한 장난 정도로 여기고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곧 풀려날 것이라 믿었는데.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고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지리멸렬한 싸움에 휘말려 희생되고 만다.


 언젠가 인터넷에 회자된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가 된 사건이 떠올랐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범죄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한 상황에 권력의 힘으로 우겨서 한 사람의 인생을 도탄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 같다. 시대가 변했지만 어딘가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 받는 삶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이 소설처럼 말도 안 되는 경우는 없으리라고 믿고 싶다. 법의 저울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며 공정하고 성숙한 그런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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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양장)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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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살고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나니.’(1825)

-역자 후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익숙한 시다. 이 시로 푸시킨을 알았다. 세로글씨로 쓰인 대위의 딸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오빠가 빌려왔거나 사온 책이었겠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은데. 남아있는 기억이 없으니 처음 읽은 거나 마찬가지다. 먼저 읽은 분들의 평이 재미있다고 해서 기대되었는데 역시 그랬다. 이 작품은 연애소설, 성장소설, 역사소설 등의 여러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어려움을 헤치고 하나하나씩 풀어간다는 의미에서는 영웅소설적인 느낌도 난다. 흔히 러시아 소설은 인명 자체가 길고 어려워서 잘 읽히지 않는데 이 작품은 술술 읽힌다. 화자의 말과 생각을 통해서 이 시를 쓴 푸시킨의 긍정적인 성격과 모험에 대한 도전 정신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러시아 근대문학사에 있어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명예와 위업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시로써 러시아 시문학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산문으로는 19세기 후반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으로 이어지는 영예로운 러시아 작가의 선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문학은 러시아를 넘어 세계 독자들에게도 공감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데 그것을 푸시킨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미 이것의 비밀은 푸시킨의 시 속에 나타나 있고 그의 운명까지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삶과 문학에의 열정과 사고가 조화롭게 스며든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의 화자는 ’, 표트르 안드레이치다. 화자는 작가 자신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뒷이야기를 예고하는 등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열일곱 살이 된 청년이 군대에 가게 되는데 아들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마음과는 달리 해방감을 느끼며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삶을 고대하고 있다. 군인으로 공적을 쌓은 아버지의 아들답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자녀의 병역의무를 어떻게든 면제받으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정치계의 상황과 묘하게 대비된다. 하지만 그리뇨프의 바람과 달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골 벽지인 오렌부르크로 가게 된다. 충직한 늙은 하인 사벨리치와 함께 길을 떠나는데...


 군에 도착하기도 전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하룻밤 묵게 된 여관에서 어느 대위를 만나 할 줄도 모르는 당구 시합을 하다가 백 루블을 빚을 져서 돈을 뜯기고, 눈보라 속에 막무가내로 강행군을 하다가 길을 잃었다가 길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데 이 사람에게는 토끼가죽 외투를 내어준다. 아직 어린 청년임에도 귀하고 비싼 옷을 덥석 내어줄 정도로 배포가 크다. 인정을 아는 성품이라고 해야 할까. 천방지축인 이 도련님 때문에 사벨리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무던히도 참아낸다. 다행인지 이런 기이한 인연이 나중에는 위험에 빠진 그리뇨프가 안전하게 목숨을 보전하는 인과응보로 작용한다.


 그렇게 물불을 못 가리는 그리뇨프가 상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샤를 만나고 서서히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일까. 마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약한 겁쟁이였던 마샤가 부모를 잃고 나서는 이런 면도 있었나 할 정도로 바뀌어간다. 사랑이 깊어지고 결혼을 약속 하지만 표트르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거역하려 들거나 하지 않고 축복받는 결혼을 위해 기다릴 줄 안다. 천생 여장부 같은 엄마를 닮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엔 풋사랑일 뿐이라고 결혼을 반대하던 표트르의 부모도 마샤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서 아껴주게 된다.


 한 편 악당의 손아귀에 있던 마샤를 구하기 위해 푸가초프의 도움을 받기까지 그리뇨프와 푸가초프가 얽힌 행적은 정부군의 귀에 들어가고 유배를 당하기에 이르는데, 마샤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당당하게 예카테리나를 만나고 미래의 남편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만들어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나약한 개인이 국가권력인 예카테리나 여제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국가를 위해 공헌을 한 미로노프 대위의 애국심과 충정이 있었기에 예카테리나 여제의 선의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어떤 거창한 위업이나 위대한 투쟁, 대단한 권력을 통해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소한 인간의 선의, 선량한 영혼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푸시킨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국가권력인 예카테리나 여제와 민중 봉기를 통해 민중의 황제로 추앙받는 푸가초프가 대립하던 역사적인 장면이다. 반체제 청년 장교(데카브리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시인 푸시킨의 가장 마지막에 쓰인 푸시킨의 장편소설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온전히 발휘한 작품이라고 한다. 역사권력과 개인의 갈등을 푸는 열쇠는 폭력과 강제성이 아닌 선량함, 선한 의지, 도덕성, 비폭력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18세기 후반 부패한 제정 러시아와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삶의 모습과 더불어 청년 장교의 사랑과 모험을 간결하면서도 생생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당시의 역사의식과 민중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는 고전으로써 항상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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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오네긴 열린책들 세계문학 7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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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몇 해 전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의 자전 에세이를 읽고 깊은 감동과 여운이 남아있었고 그녀가 공연한 동명의 작품이기도 해서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푸시킨의 이 소설에서 소재를 얻어 차이콥스키는 같은 이름의 3막 가극을 작곡하였으며 1879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하듯이 문학작품의 영감으로 음악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또 예술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세상은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발레 공연 영상이나 오페라 음악을 찾아 들어보았다.


 이 작품은 7년여 동안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푸시킨 문학적 역량이 응축되었다는 작품이다. 시와 소설을 탈피하여 시의 리듬과 소설의 전개를 곁들인 독창적인 운문 소설이다. 모두 8장으로 구성으로 각 장은 40~60개의 연으로 이루어져있다. 서구의 소네트와 같은 형식으로 한 개의 연은 14개의 행으로 되어있다. 낯선 장르라서 그런지 처음부터 재밌지는 않았다. 좀 더 진행이 될수록 흥미로웠다.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나는 먼저 발레 공연의 작품으로 알게 된 것이 더욱 뇌뢰에 남아서 읽으면서도 극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었다. 화자는 오네긴을 알고 있는 친구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때는 작가인 푸시킨이 되고 연인 따찌야나가 되기도 하면서 그들의 내면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중간 중간 연을 생략한 기법으로 독자의 상상의 여지를 준다. 화자는 독자를 소설로 끌어들여 참여를 유도하는 참신한 구성도 흥미를 유발한다. 한마디로 일반 소설은 독자 참여의 여지가 없이 관망하는 것과 달리 자유분방을 추구한 푸시킨의 의도가 깔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은 오네긴이 시인인 친구 렌스키와 이웃 마을의 영지에 갔다가 그에게 사랑의 포로가 된 따찌야나의 사랑의 고백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사랑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다른 사람……! 아니, 이 세상에 제 마음을

바칠 사람은 그대밖에 없어요!

높으신 분의 섭리…… 하늘의 뜻으로

결정된 일, 저는 그대의 것입니다.

이제까지 제 인생은

그대와 어김없이 만나기 위한 저당이었어요.

알고 있어요, 신께서 그대를 보내 주셨다는 걸.

죽는 날까지 그대는 제 수호자라는 걸……

그대는 저의 꿈에 나타나셨어요.

보이지도 않는 그대께 제 마음 끌렸어요.

(P101 따찌야나가 오네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임.)

 



미인을 보아도 사랑의 느낌이 없어

그냥 꽁무니만 좇을 뿐.

거절당해도 금세 안정을 찾고

배신을 당해도 오히려 잘됐다 기뻐하고

미녀들의 사랑과 증오에 무감각.

사랑의 환희도 없이 그들을 탐했다가

미련의 아픔도 없이 차버렸다.

마치 무관심한 손님이

저녁때 휘스트* 게임을 하러 찾아와

앉아 있다가 게임이 끝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

제 집에서 편히 잠들고

아침이 되면 깨어나

오늘 저녁엔 어디로 갈까 망설이듯.

주석) *휘스트-트럼프 놀이의 일종.(P113~114)



 젊은 상속자 오네긴에게 아무런 삶의 의욕이나 충만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 예브게니 오네긴은 국외자, 잉여인간으로 살아가던 당시 지성인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살아가지만 그는 자신과 그가 처한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당시 지성인의 정체성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아울러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다.


 자유분방함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던 오네긴은 은둔생활을 마치고 사교계의 야회에서 따찌야나를 마주하게 되는데...

 첫눈에 그녀를 알아보고 오네긴은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상사병에 몸살을 앓으며 자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던 나약한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당당하고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차가운 모습의 따찌야나에게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이미 결혼하여 공작의 부인이 되었는데...




오네긴 님, 저에게 이 화려함.


허위에 찬 이 역겨운 삶.

사교계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제가 거둔 성공.

저의 멋진 저택과 야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장에 이 모든 가면 무도회의 누더기와

모든 광휘와 소음과 악취를 버리고

책장과 황량한 정원이 있는

제 초라한 고향집으로,

당신을 제가 처음 뵈었던

그곳으로,

제 가엾은 유모가 묻힌 무덤 위에

십자가와 나무 그림자 어른거리는

소박한 교회 묘지로 가고 싶어요…….


, 행복은 손에 잡힐 듯

그토록 가까이 있었건만……! 그러나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어쩌면 제가

경박하게 처신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거듭거듭 말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불쌍한

따냐에겐 어떤 운명이 주어지든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부탁입니다.

제발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당신의 가슴속에 자존심과

순수한 명예심이 있다는 걸 전 압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감춰서 뭐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몸,

영원히 그이에게 성실할 겁니다.(P265~266)

 


 뒤늦게 따찌야나에게 사랑에 빠진 오네긴의 정열적인 편지를 받았지만, 묵묵부답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도 도도했던 그녀, 수수한 옷차림에 창백한 모습으로 편지를 읽으며 말없이 눈물을 철철 흘리는 따찌야나를 발견한다. 화려하고 당당했던 겉모습과는 달리 오네긴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한 따찌야나의 직언에 오네긴은 벼락을 맞은 듯 참담한 상황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서 아름다운 것일까.


★ 발레리나 강수진의 <오네긴> 유투브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i2Mb3SDNqqM


 객기어린 행동으로 렌스키의 약혼녀인 올가(따찌야나의 동생)와 춤을 추며 렌스키를 분노에 떨게 하고 그에게 복수했다는 만족감도 잠시 렌스키가 결투를 신청해 온다. 결투... 이 결투로 렌스키는 주검으로 사라지는데... 이 장면 또한 푸시킨의 드라마틱한 짧은 삶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도 미모의 아내 때문에 연적 단테스와의 결투로 생을 마감했다는데 어쩌면 예언과도 같은 이 작품에 섬뜩해진다.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푸시킨은 지금까지도 후대의 작가의 작품들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결핍에서 꽃이 핀다고 했던가. 유배 생활, 정치적인 괴롭힘 등 황제의 시종으로 살아야했던 굴욕 속에서도 그의 문학은 꽃을 피웠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부모 아래서도 산더미 같은 책과 가정교사, 할머니의 이야기가 푸시킨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백 여 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오늘의 삶에서도 작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그려졌다. 어렸을 때 아무 뜻도 모르고 읽었던대위의 딸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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