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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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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전집 14권에 해당하는 작품을 모두 읽었다. 연대순으로 읽었다면 좋았을 것을. 여섯 번째 소설을 맨 나중에 읽은 셈이다.

 


 이야기는 화자인 가 죽으려고 마음먹고 집을 무작정 뛰쳐나가 산길을 걷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도련님으로 살아왔던 열아홉 살 청년이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 사건의 배경에는 두 소녀가 있었다. 두 번째 소녀와 태어나기 전부터 약속이 있었던 모양인데 두 소녀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모양이다. 그것이 부모와 친척에게 알려져 비난을 듣게 되었고 괴로운 나머지 가출하여 자신이 사라짐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다. 죽으려고 할 만큼 그렇게 큰일일 이었을까. 산 속에서 낯선 남자가 일을 해 볼 거냐고 물으며 접근하는 바람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 조조라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로 꼬드겨서 한바 책임자에게 넘겨주는 사

람이다.

 

 한 번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는 순순히 따라간다. 일자리만 생기면 그것으로 족했고 갱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기뻤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왔지만, 죽지 않아도 좋으니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햇빛을 보지 않고 속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음침한 곳에서 일하는 것이 자기에게 너무나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붉은 담요와 꼬맹이까지 쉽고 간단하게 사람을 모은 조조는 이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산 속으로 향한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똑같이 갱부가 되겠다고 대답을 하는지 모두 다 똑같이 바보였다고 회상을 한다. 그런데 나는 혼자 전락하게 되는 것보다 같이 전락할 길동무를 얻은 것을 아주 유쾌하게 생각한다. 소세키의 유머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강에서 죽을 때는 반드시 뱃사공 한두 명을 끌고 가고 싶어지고 만약 죽고 나서 지옥에라도 가는 일이 생긴다면 사람이 없는 지옥보다는 반드시 요괴가 있는 지옥을 택할 거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가 마음은 든든한 법이다.

 


 숨 가쁘게 걸어가면서 자신의 행동이 가출이 아니라 소풍이었다면 어땠을까 살짝 후회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얌전하다, 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광산으로 가는 길에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고 광산 안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한다. 얌전함이 극에 달하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게 된다는 말도. 아마도 갱 안에서 큰 고생을 할 듯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왜 사서 하는 것일까.

 


 조조가 한바의 책임자에게 를 데려다주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는 걸 알고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내하는 할멈을 따라 굿길에 갔는데 모여 있는 갱부들을 보고 압도되어 자신의 결심이 흐려진다. 그 갱부들의 얼굴은 그냥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다. 둥글고 따뜻하고 다정한 그런 느낌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다. 모두 거칠고 난폭해 보이는데 그런 사람들이 만 명이나 된다니 완전히 기가 죽는다.

 


 희멀건 얼굴의 열아홉 살짜리 청년을 보는 눈이 고울 리가 없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을 하는 듯한 분위기다. 그 중 서른이 좀 안 되어 보이는 갱부가 여기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돌아가서 신문배달이라도 해라, 자기도 학교에 다녔는데 방탕하게 보내다가 여길 와서 굿길 밥을 먹다가 이렇게 되었다 나처럼 되면 끝장이다, 라는 충고를 해 준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겁이 나기도 하지만, 왠지 는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하층 노동자에게조차 동료로 대우받지 못하는 모욕을 받고 있다고. 그들은 규칙을 내세우며 여기는 십장도 있고 의형제도 있기 때문에 돈을 벌려고 해도 그렇게는 안 되니까 어서 돌아가라는 말을 반복한다. 돈을 벌어도 그 사람들에게 모두 빼앗기는 걸까. 이렇게 조롱을 당하면서도 는 돌아갈 결심을 하지 않는다. 왠지 젊은 혈기에 못할 일이 뭐 있나 하는 베짱이 느껴지기도 했다.

 


 ‘는 걱정이 되면서도 사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할멈이 밥 먹으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는데. 갑자기 배고픔을 느끼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밥이 떠지지 않는다. ‘벽토로 불리는 안남미라는 것을 처음 먹어 보았다. 그들은 안남미도 모르면서 갱부가 되려고 한다고 조롱을 하기 시작한다.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그것도 적응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갱부의 조수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시추, 호리코, 야마이치가 죽었을 때 하는 장례식이라는 잔보의 행렬을 보고 숙연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산 속 추위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불을 돈을 내고 덮어야 한다. 집에서 쓰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럽다. 자다가 빈대에 물리면서 비참한 생각이 든다. 갱 안의 둘러보는 일을 안내하는 하쓰 씨는 여기가 지옥의 입구라고 하며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 말에도 조롱이 섞여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갱부로 전락한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네가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느냐는 경멸까지 느껴졌다. 따라서 들어가는데 하쓰 씨는 살아서 나갈 생각이라면 건방지게 굿길 같은 곳엔 들어오지 않는 게 좋다고 혼잣말처럼 한다. 그럼에도 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돌아가라고 충고해 주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이렇게 갱 안의 묘사를 실감나고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갱 안을 따라가는 과정이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암담한 기분이었다. 속세의 길과 전혀 다른 굴곡진 길, 절벽을 넘어 급기야는 허리까지 차는 물웅덩이가 있는 마지막 갱까지. 서서 갈 수 없고 기어서 통과해야 하는 곳도 있다. 열다섯 개나 되는 사다리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은 식은땀이 나게 했다.

 


 ‘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처음엔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모면하려고 가출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갱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뻤다. 다음엔 그곳에서 속세의 사람 모습이 아닌 그들을 보고 후회와 호기심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하쓰 씨의 안내를 따라 갱 안을 둘러보고 간신히 빠져나오는 과정에서는 여기서 죽으면 큰일이다,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게곤폭포로 가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서 갱 밖으로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쓰 씨와 굿길 입구에서 8번 갱까지 견학을 하고 돌아 나오다가 길을 잃는다. 갱부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인품을 가진 야쓰 씨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일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갱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마음을 되돌린다.

 


어둡기만 했다. 손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손발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닿는 감촉, 발에 닿는 감촉만으로 살아서 간다. 살아서 올라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오르는 것이고, 오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 사다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P268) 

 


 어둠 속에서 손발의 감촉만으로 앞길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과 함께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살아 있어서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사다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건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는 갱부는 되지 않았다. ‘먹물을 좀 먹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장부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처음 와서 며칠 동안은 그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외계인 취급을 당했었는데 갱부들의 월급을 계산하고 나누어 주는 장부 정리원이 되자 상황은 역전된다. 그 일을 다섯 달을 하고 나오게 된다. 갱부가 되려고 했으나 갱부가 되지 못해서였을까.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능청스러움을 보인다.

 


 하지만 소설가 장정일은 해설에서 반론을 펼친다. ‘소설이 되지 못했다는 작가의 허튼소리는 모두 잊어야 한다고. 어쨌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가출했지만 여태까지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이 갱부가 되진 못했지만 갱부의 일상을 접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또 소세키의 제자 후지무라 미사오가 게곤폭포에서 자살한 일에 대한 석명이라고도 한다. 후지무라 미사오가 죽기 전에 남긴 글에 인생은 불가해(不可解)!’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 고뇌에 대한 대답으로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며 힘써 살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그래서 여로(旅路)소설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교양소설이라는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런 소세키의 바람이 퇴색되어 이웃 나라의 무고한 사람들이 갱부로 전락한 일은 심히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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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안에서 - 나쓰메 소세키 최후의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의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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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신주쿠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던, 지금은 소세키 산방기념관에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산문을 모은 것이다. 2018년 도쿄여행 때 여기를 다녀왔는데 기념관은 외진 지역이 아니라 동네 골목으로 이어져 있을 만큼 가까워서 자전거를 탄 할머니들이 손쉽게 찾아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부럽게 생각되었다. 다시 가고픈 곳이다.

 

 이야기를 읽은 느낌은 아무래도 아플 때 쓴 작품이라서 그런지 힘이 빠진 작가의 모습이 느껴져 좀 안쓰러웠다고 할까. 그리고 그의 소설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가까운 지인이며 작가로서 흠모하는 이들이 찾아와서 나눈 이야기며 무엇보다 어린 시절 양자로 보내져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내밀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겉보기에 좀 거만해 보이는 무뚝뚝함(그 모습도 멋지지만) 속에도 아픔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마에 시달리면서 바깥출입을 잘 못 하고 유리문 안에서 안과 밖을 내다보며 사유했던 이야기로 나쓰메 소세키의 고독한 내면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지인으로부터 얻은 개 헥토르 이야기가 짠했다. 친구를 만들어서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그 헥토르가 병에 걸려 죽었는데 시를 지어 묘표에 적고 고양이 묘 근처에 묻어준다

 

風の 土にてやり

(가을 바람도 들리지 않는 곳에 고이 묻어 드리리)

 

 그리고 언젠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리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병중에 나약해져 있었으니 연민과 슬픔도 있었겠다.

 

 어떤 날은 독자인 듯한 여자가 찾아와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기구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설로 써줄 수 있느냐고 했다가 번복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 여자에게 숨이 막히도록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날 밤 오랜만에 인간다운 흐뭇한 마음을 맛보았다고 한다. 향기 짙은 문학 작품을 읽고 났을 때의 기분과 똑같은 마음이었다고.

 

 또 단자쿠(短冊)(글씨를 쓰거나 물건에 매다는 데 쓰는 조붓한 종이)를 보내며 한시를 써 달라고 졸라대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를 토로하기도 한다. 아픈 상황에 이런 저런 사람의 방문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겠다 싶다. 작가의 집에 도둑이 든 이야기, 대학에서 <나의 개인주의>라는 강연을 하고 10엔을 받았다가 불편한 마음에 기부한 이야기 등이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살던 옛집을 회상하는 장면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예불 종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 종소리가 작가의 마음을 슬프고도 외롭게 했단다. 동네에 있던 요세(지금의 소극장이라 함.) 근처의 망루 옆의 작은 종을 기념하기 위해 마사오카 시키(하이쿠 시인,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쓰메 소세키의 친구라 함.)와 시를 읊던 일, 누나들이 연극을 보러 꼬박 하루를 걸려 돌아다녀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셋째 형에게 듣고 놀랐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그렇게 화려한 시절이 있었나 꿈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막내아들인 자신을 양자로 보내놓고 그렇게 살 수 있나 원망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키우던 고양이 이야기가 나왔다. 고양이가 찬장 속 냄비 속에 빠졌는데 참기름 범벅이 되어 그 몸으로 작가의 원고지 위에 드러눕기까지 했다는. 원고지 망친 것에 대해 속상했을 법도 한데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 고양이가 피부병에 걸려 털이 빠져 안타까웠던 중 작가가 병이 나서 회복되었는데 고양이도 새 털이 나고 회복되어서 어떤 인연이 있는 것 같은 암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양자를 갔다가 집으로 되돌아와서 기뻤던 이야기를 한다. 부모를 할머니, 할아버지인 줄 알고 그렇게 불렀는데, 하녀가 어머니, 아버지라고 알려주어서, 그렇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얘기해 주어서 더욱 기뻤다는 이야기다.

 

 만나러 오는 사람마다 병환은 이제 다 나으셨습니까? 하는 물음에, 그는 독일이 연합군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은 병마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병은 계속 중이고 어떻게 변화해 갈지 모르는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제각기 꿈속에서 제조한 폭탄을 소중히 껴안고 너나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껴안고 있는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P115) 

 

 끝나기 전에는 계속되는 삶 속에서 어떤 폭탄을 껴안고 있는지 모르니까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모르기 때문에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폭탄을 만나기도 하겠지.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 되면서 어머니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그래도 막내둥이인 자신을 가장 귀여워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고. 토막토막 남아있는 어머니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안타까워한다. 하루는 무서운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어서 마음 놓고 잠들 수 있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올이 성근 감색 홑옷에 조붓한 흑공단 오비를 입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그 어머니도 그 아들도 모두 없는 세상이고. 작품으로 남아서 우리를 위로해 준다.

 

 

유리문 저쪽에서 보면 내가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리문 이쪽에서 보면 당신이 유리문 안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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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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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덜 읽힌다는 태풍19071월에 발표된 그의 네 번째 작품이다. 과연 이렇다 할 큰 서사가 없어서 밋밋한 느낌도 들었지만 나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러 작품이 제목과 큰 관계가 없듯이 이 작품도 태풍과는 관계가 없었다. 굳이 들자면 신자유주의라는 태풍’(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 속에서 ‘()문학이라는 나비가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나카노의 애인이 부르는 노래 속에만 태풍이 언급될 정도다. 여기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시라이 도야라는 가난한 지식인, 부유한 계층의 나카노와 대학 동기 다카야나기다. 시라이 도야는 문학자로서 중학교 선생을 하다가 세 번이나 옮기다가 결국 쫓겨 나온다. 나쁜 선생들이 학생들을 선동해서 도야 선생을 괴롭혀서 쫓아낸 것이었다. 시골에서 도쿄로 온 도야는 아내에게 이제 교사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시골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궁색한 살림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아내는 불만이 가득하다.

 


 나카노는 부잣집에서 잘 자란 수재에 얼굴도 잘 생기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 줄도 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다. 다카야나기는 그런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는 나카노가 부럽다. 가난하고 병약한 다카야나기와 나카노가 친구가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비백 무늬의 오시마 비단과 질이 떨어지는 지치부 비단’(P33)이 하나로 꿰매어 졌다고



 마치 어떤 운명적인 사건이 연결된 건 아닐까 상상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나카노는 부자 계층이지만 특별히 두드러져 보이지 않고 온화한 캐릭터로 나온다.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에다 착하기까지 하다. 시라이 도야와 나카노는 자신의 세계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도야 선생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다. 다카야나기 군이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을 위한 세상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도 원한을 갖지 않는다. 자신을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을 개의치 않는 세상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P126) 



 이 문장은 도야 선생과 다카야나기의 삶에 대한 태도가 확실히 드러난다. 가난해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다. 물론 아내는 그런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한다. 결혼 생활이 이런 거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다면 시집을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든 남편이 자기 말대로 따라 주었으면 싶은데 쉽지 않다.

 


 비 내리는 어느 가을 몹시 아픈 다카야나기는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도야 선생을 만난다. 서로 같은 처지의 외톨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야 선생을 보면 왠지 힘이 솟는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조금씩 매료된다.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지 자신의 개인사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일곱 살 때 우체국 직원이었던 아버지가 공금을 횡령해서 구속되고 폐병으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자신은 죄인의 아들인데 죄악도 유전이 되는 거냐고, 숨이 막힐 지경이라며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 말을 듣고 안타까워진 도야 선생은 과거는 잊어야 한다면서 당신은 앞으로 꽃을 피울 사람이라고 한다. 다카야나기는 꽃이 피기 전에 시들어버릴 거라고 하자 도야는 시들기 전에 일을 하면 된다고 한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외톨이고, 외톨이는 숭고한 것이라고.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고 창작을 하라고 권한다. 선생의 이 말을 들으며 다카야나기는 외톨이 선생의 얼굴에서 어떤 후광을 본다. 이보다 앞서 도야 선생의 집에 찾아갔는데 문학자에 대한 태도 등의 이야기를 듣다가 중학교 시절의 잘못을 사죄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친다. 도야 선생이 고코 잡지에 쓴 해탈과 구애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자 다카야나기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한편 생활이 곤란한 도야는 형님 댁에서 백 엔을 빌려 썼는데, 갚아야 할 기한이 되자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져온다. 그 바로 전에 그 형이 와서 도야의 아내에게 어떻게든 도야를 다른 일에 한 눈 팔지 못하게 하겠다고 작전을 짰지만 자신은 연설 약속이 있어서 형에게 갈 수 없다고 한다. 3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현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이 타는 아내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도야, 그 아내를 보는 마음이 답답해진다. 여기서 도야는 계몽적, 지사적 인문학자의 역할을 한다. 소세키의 육성이 많이 느껴졌다. 도야와 나카노라는 두 계층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 속에서도 부자는 학자를 존중해야 한다고 도야를 통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인격)의 본질을 성찰하고 이것을 수호해야 할 인문학의 투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야 선생의 연설이 인상적인 부분이 많아서 모아 보았다.

 

자신은 과거와 미래의 연쇄입니다.’(P175)

 

자기 속에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자기 속에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자기 속에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자식을 낳을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입장은 이런 점에서 명료합니다. 난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가? 난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수립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의 생존의 의미는 이 셋 중의 하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P176)

 


바람이 강하게 부는 추운 날 무명옷 차림을 한 도야 선생의 연설을 듣고 야유를 하다가도 열중하는 청중들의 모습이 보인다. 셋 중 하나에 생존의 의미가 있다는 거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수립하는 삶이라면 만족스러운 삶이 되지 않을까. 도야의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다. 자신 그 자체를 수립하기 위해 글을 썼지만 출판을 할 수가 없다. 글이 도로 빚이 되는 셈이었다.

 


자기에게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타락입니다. 현대의 청년은 도도하게 날로 타락하고 있습니다.“(P183)

 

서양의 이상에 압도되어 눈이 먼 일본인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노예입니다. 노예로 만족할 뿐 아니라 앞 다투어 노예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이상이 발효할 수 있겠습니까?”(P183)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원대한 이상이 있는 사람은 큰길을 걸어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과는 달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길을 걸어냅니다. 방황하고 싶어도 방황할 수 없습니다. 혼이 이쪽, 이쪽 하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디까지 걸어갈 생각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후략)”(P184)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걸어가야 하는 길을 알고 있고, 원대한 이상이 있는 사람은 큰 길을 걷는다는 말에 왠지 힘이 난다. 방황하지 않고 혼이 알려주는 데로 갈 수 있다는 이상의 길. 이것이 청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까.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 이상의 길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여겨진다.

 


어떻게 하면 학문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지를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물음은 없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학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학문을 통해 돈을 벌 궁리를 하는 것은 북극에 가서 호랑이를 사냥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P187)

 


돈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학자와 언쟁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품격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좀 생각해 보는 게 좋아요.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병이 들었을 때는 의사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금화를 달여 마실 수는 없습니다.……”(P190~P191)

 

학문적 능력이 있는 사람, 이치를 이해한 사람은 부자들이 돈의 힘으로 세상에 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통해, 학문을 통해 이치를 이해함으로써 사회에 행복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장은 다르지만, 그들은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지위에 확고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후략)”(P191)

 


 청중 속에 있던 다카야나기도 도야 선생의 연설을 듣고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다카야나기 군은 폐병에 걸려 아픈 상황임에도 가장 크게 함성을 질렀다. 태어나서 이런 통쾌함은 처음이었다. 도야 선생은 학문이란 돈에서 멀어지는 기계라고 말하고 있었다. 돈을 벌고 싶으면 실업가나 상인이 되어야 한다고. 학자가 돈을 기대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상인이 학문을 목적으로 견습생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돈과 학문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도야 선생의 연설을 듣고 온 다카야나기는 각혈을 한다. 의사도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엄두도 못 낸다. 나카노는 그가 요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도 받는 것도 싫다면서 거절을 한다. 다카야나기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 나카노는 요양을 가서 그 작품을 완성하는 조건으로 돈을 쓴다면 미안한 일도 아니라고 제안을 하자 그것을 수락한다. 백 엔을 받은 다카야나기는 저잣거리로 뛰어 가다가 도야 선생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하려고 찾아간다. 거기엔 빌려준 돈 백 엔을 받으러 온 손님이 와 있었다.

 


 다카야나기가 가진 돈이 딱 백 엔이고, 오늘 밤까지 갚기로 약속한 돈 백 엔을 어서 달라고 추궁하는 손님이 있다. 그런데도 도야 선생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다카야나기는 선생에게 쓴 원고를 보여 달라고 하더니 그 인격론을 백 엔에 넘겨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선생을 괴롭혀서 쫓아냈던 제자였고 잘못했으니, 그 원고를 넘겨달라고. 이로써 요양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보다 더 위대한 인격론을 품에 넣고 나카노와 그 부인이 베풀어준 호의를 갚고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이 부분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읽히는 모양이다. 다카야나기가 선생의 원고를 넘겨받음으로써 돈의 힘으로 인간사를 결정하면 안 된다는 시라이 도야 선생의 가르침을 배반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하지만 다카야나기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해야겠다는 결심이 실현되었고 선행의 결말과 함께 인간성(인격)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다시 읽기가 언급되고 있었다. 꼭 읽어봐야겠다 싶어 검색해 보니 절판된 작품으로 나온다. 아쉽다. 일본작가인 팬이 지은 책 같은데. 나중에 원서로라도 볼 수 있으려나.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문학자란 원고지를 앞에 두고 숙어사전을 참조해가며 머리를 흔들어대는 그런 여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학문이 가능한 한 연구를 방해하는 것을 피해서 점점 인간 세상과 멀어지는 것과 달리 문학자는 자진해서 이 장애 속에 뛰어드는 것입니다."(P100)



 병약하고 가난한 다카야나기는 그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도야 선생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문학자라는 두 외톨이가 열심히 창작열을 불태우게 되었을까. 도야의 입을 빌어 문학자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듯이 가난과 고독과 궁핍을 즐기며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을까. 그래도 둘이어서 덜 외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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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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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쓴 미완의 작품으로 소세키의 문학적 시도의 도달점이며 최고봉에 위치한다고 평하고 있다. 육백 여 쪽이나 되는 상당한 분량이다. 제목에서 떠오른 것은 인간의 삶의 밝음과 어둠의 대조적인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극적인 사건이나 파란만장한 비극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 쓰다는 산시로,그 후,의 주인공인 산시로, 다이스케, 소스케를 떠올리게 한다. 고학력자이며 성격적으로 허세와 우유부단함,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당시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병폐와 그로 인한 사회적 모순을 꼬집은 작품으로 보인다. 남녀, 부부, 부모와 자식, 친척이나 주변의 인물로써 타자의 갈등 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언제나 내면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로운 것 같다.


 쓰다 부부는 교토에 있는 부모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세가 밀렸다, 수리비가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돈을 보내줄 수 없다는 편지를 받는다. 쓰다는 고질적인 질환인 치질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난감하기 짝이 없다. 쓰다는 아내가 자기 아버지를 경멸할까봐 두려우면서도 오노부의 고모에게 가서 융통해 보면 어떠냐고 묻는다. 이 말에 오노부는 단칼에 거절한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데로 시집가서 생활의 곤란함도 겪지 않고 행복하게 살 거라는 말을 듣는 마당에 절대로 내색할 수 없다고 한다. 결혼한 지 6개월 남짓, 애틋한 사랑이 싹틀만한 시기임에도 밖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들 부부가 왠지 좀 위태로워 보인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면 좋을 텐데 남의 눈을 의식하며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성격도 정반대이다. 쓰다는 남에게 어필하기 위한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파고들지만 오노부는 눈치가 빠르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며 적극적인 성격이지만 불행히도 허영심 같은 자존심을 갖고 있다. 소세키의 다른 작품에서는 희미했던 여성상이 여기서는 변화된 모습이다.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 남편을 향해 속상한 마음 등 안에서 충족되지 못한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때문에 시누이인 오히데는 오빠가 오노부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튀는 성격일 수도 있는 오노부는 주변의 미움을 받는 편이다. 예쁘게 포장한 선물꾸러미의 속은 알 수 없다. 화려한 겉모습이 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백년이 넘은 소설이지만 지금도 낯설지 않은 인물군의 내면을 들여다본 것처럼 실감나는 심리 묘사의 대가 역시 소세키였다.

 

 오빠의 병문안을 오면서 오히데는 돈을 준비해 가지고 왔는데도 말다툼이 일어난다. 쓰다는 돈이 필요하고 받고는 싶지만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자신을 제외시키고 은밀히 어떤 말이 오가지 않았을까 의심하며 불만이 가득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가족, 형제, 부부 등 주변인들과의 심리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자기중심적인 자존심은 오해를 부르고 진실을 왜곡시킨다. 오노부는 오카모토 고모의 딸들이 쓰다 형부가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찔린다.


내 과실에 대해서는 내가 괴로워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P197)


 오노부는 평소에 이런 변명을 마음속 깊이 저장시켜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고모댁에서 자라면서 화술에 능하고 활달한 고모부의 지지를 받으며 자유롭게 성장한 오노부에게 자신과 딴판인 남편을 대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원래 활달한 자신의 성격을 자제하고 남편에게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왠지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답답하다.


 쓰다의 오노부에 대한 무미건조한 태도는 왜 그럴까 궁금했다. 오노부만 있는 집에 쳐들어와서 쓰다의 낡은 외투를 얻으러 온 고바야시는 쓰다의 과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 시작한다. 짓궂게도 쓰다의 과거의 여자 이야기를 흘리게 되는데...

 

 쓰다는 수술 후 퇴원을 하면서 요시카와 부인의 제안으로 온천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한때 사랑했던 여자 기요코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준다. 어떤 핑계를 대서든지 남편을 따라 가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쓰다는 혼자 간다. 남편의 사랑받기 위해 그렇게 마음 졸였던 오노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조각 설렘을 갖고 떠난 쓰다는 기요코와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미완성으로 끝난다.


한편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큰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별빛이 달빛처럼 환한 밤에 비치는 굉장한 그림자로 판단하자면 늙은 소나무와 같은 나무와 돌연 한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여울물 소리가 오랫동안 도회를 떠나지 않았던 쓰다의 마음을 불시에 전환시켜주었다. 그는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렸을 때와 같은 감상에 젖었다.

아아, 세상에 이런 게 존재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중략)

잃어버린 여자의 모습을 좇는 그의 마음, 그 마음을 멋대로 번역하자면 곧 이 야윈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눈앞에서 코로 숨을 내쉬는 가련한 동물은 그 자신이고, 그 동물에게 거칠게 채찍을 가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중략)

운명의 업이다. 그것을 목표로 찾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P527~528)


쓰다와 오노부를 중심으로 ()’의 세계와 요시카와 부인의 계략으로 기요코를 만나러 간 ()’의 세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첫사랑은 다시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변화된 옛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잠시 딴 마음을 먹었던 자신을 반성할 수도 있다. 또는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 오노부가 찾아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기 위해 열연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완의 소설로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독자에게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의 여지를 남긴 것도 소세키 나름의 문학적 궤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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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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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제목은 새해 첫날부터 시작해서 춘분이 지나고까지 쓸 예정이라는 소세키의 소망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제목과 이야기의 내용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이러한 작품은 그 후도 있다. 소세키는 각각의 단편을 써서 그것을 모두 모아 장편을 만들어 재미있게 읽도록 시도하려고 했는데 이 작품은 그런 의도로 쓰인 것이라 한다.


 대학을 졸업한 게이타로에게는 어머니와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취업에 연연하지도 않고 고상하게 생활하는 스나가라는 친구가 있다. 게이타로는 일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스나가에게 간다. 경시청의 탐정 일을 하고 싶지만 그의 마음이 허락지 않는다. 탐정이 하는 일이란 사회의 잠수부 같은 존재라 그만큼 인간의 불가사의함을 포착하는 직업도 없을 것이며 남의 어두운 면을 관찰할 뿐이고 애석하게도 죄악의 폭로에 있기 때문에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속셈 하에 성립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꺼려진다.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그보다 먼저 경탄할 만한 사건을 만나고 싶은데, 전차를 타고 이리저리 아무리 돌아다녀도 전혀 소용이 없네. 소매치기도 못 만난다니까

이보게, 교육은 일종의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속박이네. 아무리 교육은 일종의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속박이네. 아무리 학교를 졸업해도 먹고사는 게 힘들다면 그게 무슨 권리라고 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지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멋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니 말일세. 지독하게 사람을 속박하네, 교육이 말이야”(P54)


 백 년 전에도 이렇게 일자리를 얻는 게 힘들었을까. 백 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취업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어서 교육을 받은 자체가 사람을 속박한다는 말이 어쩜 그렇게 와 닿는지 모르겠다. 스나가는 게이타로의 일자리를 위해 이모부 다구치를 소개하는데 여러 번의 우역곡절 끝에 만나게 된다. 게이타로는 우선 놀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는데. 한참 후 해야 할 일이 들어있는 편지 봉투가 도착한다. 그런데, 그가 할 일이란 마흔 살 쯤 되는 사내가 오가와마치 정거장에서 내린 후 두 시간 이내의 행동을 정찰하여 보고하는 내용이다. 결국, 마음에 두었던 탐정 일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스나가와 그의 가족들과 관계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야기다.


 원래 소세키는 호기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탐정이라는 직업이 무척 흥미롭지만 도의적인 면에서는 이 직업을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을 날카롭게 통찰할 필요에 의해서 탐정소설 기법을 차용한 것 같다.


 스나가의 이모부인 다구치, 이종사촌 지요코, 외삼촌 마스모토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밝혀진다. 특히 스나가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이 아기였을 때 조카딸 지요코와 혼인하도록 약속을 했는데 혼령기에 접어든 스나가와 지요코의 관계는 친척 이상의 사이로 발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 마음을 내 주지 않는 스나가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지요코가 애처롭기만 하다.


 그런 말 있지 않나. 자신의 것으로 정하기는 망설이면서 남 주기는 아까운 것. 지요코를 향한 스나가의 마음이 딱 그랬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황을 그려보고는 결국은 도리질을 한다.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지요코에 비해 스나가는 두려움이 너무 많다. 만약에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된다면 그녀가 원하는 남편상이 못 될 거라는 생각에 빠진다. 이 나약한 성격은 사회 속으로도 들어가지 못한다스나가는 자신의 유약한 마음을 이렇게 합리화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안는 기쁨보다는 상대의 사랑을 자유의 들판에 놓아주었을 때의 남자다운 기분으로 내 실연의 상처를 쓸쓸하게 지켜보는 것이 양심에 비추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P274)


 스나가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보다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스나가가 자신의 결점을 줄이기 위해서는 안으로 숨어들지 말고 외부에 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스모토는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리고 이쯤 해서 나타나야 하는 반전... 생각지는 못했는데. 역시 그랬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좀 더 변덕스러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P312)


 바로 스나가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에 어울리는 문장이다. 의지할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불행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좀 변덕스럽더라도 일단 해보는 것, 우리의 삶이란 실수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가는 것이 아닐까.


 청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둥지 안에서 보호받으려는 오이디푸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맨 앞의 이야기에서 게이타로는 같은 하숙에 있었던 모리모토의 지팡이를 갖게 되는데 지팡이에는 뱀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 신화에서 뱀은 부활을 상징한단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밖으로 향하는 게이타로와 집안에만 안주하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에도 어려워하는 스나가의 성격이 묘하게 대비된다. 결국 탐정의 일자리로 인해 스나가의 가족과 연결되고 전반적인 가족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스나가는 둥지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도 자아 정체성의 고민과 주변인들의 관계맺음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알고 있는 이웃을 만난 듯하다. 그것이 백 년 전에 쓰인 오래된 작품임에도 위로와 감동을 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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