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
박병기.강수정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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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은 부제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으로 8일간의 여정으로 행복, 환상,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 실존적 삶, 일상 속 철학함에 대해 묻고 철학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 여덟 가지 주제는 우리의 삶에서 항상 고민하며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주제인 만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 중 몇 가지 소개해 보겠다.

 



1일 행복에 대해 묻다


인간은 누구나 문득 던져진 존재라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면서 많이 듣고 말하는 단어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어떤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어느 정도 비슷할 것이다. 저자는 행복에 대해 묻는 이야기를 헤세의 작품과 소크라테스 지혜를 언급하면서 이야기한다. 수레바퀴 밑에서의 한스가 자아를 찾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골드문트는 정처 없는 방랑생활 중에 아름다운 조각품을 본 후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술가로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탁월성을 발견하고 꽃을 피웠다는 얘기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접하고 보면 행복이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넘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정신적인 측면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물질적인 풍요가 뒷받침되어야 누릴 수 있는 혜택일지도 모르지만.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대한 언급에서는 먼저 자신을 아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고, 육신의 쾌락과 풍요로움에 취해 영혼이 시들어가게 방치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하는데 이것을 무지의 자각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진리는 다름 아닌 도덕적 지식이다. 어느 것이 선인지 악인지 판별할 수 있을 때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덕은 곧 지식이라는 주장을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호랑 애벌레의 화두를 언급하며 행복한 삶은 어떤 삶인지 이야기한다. 맹목적으로 애벌레 기둥을 오르지만 맨 위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는 허탈함은 우리 인간 사회의 경쟁적인 삶에서 맛보는 허무를 엿볼 수 있다. 이 내용은 트리나 폴러스(Trina Faulus)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주인공 호랑 애벌레의 이야기다.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와 풀밭에서 먹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치열한 경쟁과 속도의 덩어리인 애벌레 기둥을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삶,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잠재된 참모습을 끌어내 나비가 되는 삶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진정한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에 대한 사랑인 관조적 삶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는 것을 언급한다. 호랑 애벌레가 자신에게 잠재된 탁월함으로 호랑나비가 되듯이 자신 안에 있는 가장 탁월한 무언가를 실현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탁월성은 지적인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을 완성하여 좋은 인간이 될 수 있고, 이 바탕에는 실천적 지혜가 있고 이를 통해 품성적인 덕인 중용의 덕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밖에도 환상에 대해서는 영화 <매트릭스>를 언급하며 우리는 가상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묻는다. 또 나머지 주제인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에 대한 물음을 문학, 영화, 드라마 속 이야기를 화두로 마치 철학자와 대화를 하듯이 철학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녹아들고 있는지 보여준다.

 



7일 실존적 삶에 대해 묻다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 나오는 주인공 하리 할러 이야기를 하며 니체가 말하는 철학으로 답한다. 인간의 왜소화, 평균화가 우리에게 최대의 위험이라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주의가 보다 높은 인간의 출현을 막고 인간을 평균화하고 범속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헤세와 니체의 공통점은 금발의 야수가 되기를 꿈꾸는 황야의 이리였다.

 



8일 일상 속 철학함에 대해 묻다는 세 가지 화두가 나오는데 그중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화두를 철학자 하버마스의 답이 흥미롭고 무척 공감할 수 있었다. 카프카의 그 작품을 여러 번 읽었음에도 그 내용을 다시 접할때마다 먹먹한 감동은 여전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성장을 위해 극심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일은 너나없이 버거운 일이다. 어느 날,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고 동정심보다는 자신들의 생계를 걱정한다. 가족 모두 그에게 의지하며 살았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자 그레고르을 짐스럽게 여긴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체계와 생활세계로 분화되어 왔다고 말하면서 이처럼 경제체계와 행정 체계가 생활세계를 침범하는 현상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배움의 광장인 학교는 직업 세계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가족도 이러한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본연의 가족 공동체의 의미가 변모하여 물화 현상의 상징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여덟 가지 삶의 주제와 철학적 대답 이야기 속에서 만난 영화 문학 이야기는 잘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접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특히 헤세를 좋아하면서도 읽지 못한 작품이 아직도 많구나 싶었다. 앞으로 한 작품씩 만나야겠다. 인문학 바람이 불면서 동서양 철학을 다룬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삶에 대한 고민에 부딪힐 때 철학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 서양철학자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고 한다. ‘서양철학은 철학의 한 특수한 영역이자 부분일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잘 활용해서 내 삶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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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1-15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책이 좀 철학적이어서 그런지 헤세 책 이야기가 많네요? ㅋ
행복이 1번으로 나오는걸보니 역시 행복이 최고 입니다~!!

모나리자 2023-01-15 18:53   좋아요 1 | URL
맞아요. 헤세의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고 다소 철학적인 부분이 많지요.
역시 그렇죠?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소망이겠지요!
편안한 주말 저녁 보내세요. 새파랑님.^^
 

뭐, 그 정도 소리쯤 남들은 아무렇지 않으려나. 하지만 깊은밤 홀로 방에 틀어박혀 달그락 소리 하나 없는 가운데 조용히구상을 가다듬고 문장을 쓰는 나 같은 사람은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 이상하리만치 잘 들린다. 때로는 그 소리가 신경을 돕시 건드리거나 흥분시킨다. 반면 붓은 아무리 빨리 써 내려가 - P191

도 절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붓으로 쓸 때, 원고지도 일본지가 편하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것까진 없을 터. 일본지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간사이 교외에 살고 있기에 원고를 기자에게 직접 건네주지 않고 거의 언제나 우편으로 보낸다. 그러려면 무게가 나가지 않고 부피가 크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종이가 좋다. - P192

연필은 원고지 사이에 카본지를 끼우고 복사할 때 쓴다. 조금 소리가 나고 저항감이 있고 적당한 연필깎이가 없다(요사이나온 바리캉식 연필깎이는 제법 쓸 만하다, 책상에 붙박아 두는 기존 - P194

녀석은 풍류가 없어 괴롭다)는 결점이 있긴 해도 지우개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압지도 필요 없고 책상이나 손이 더러워질 일도 없다. 긴장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쓰기에는 연필이 제일이지 싶다. - P195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딱 이맘때가 제일 좋지 않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새잎의 시기, 선명치 않은 바깥 공기에닿으면 어쩐지 창작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고 펜이 술술 나가지않아서 생각한 대로 글을 쓸 수 없다.
도대체 어느 때가 글을 쓰기에 좋은 계절이란 말인가. 그런사치스러운 이야기를 할 처지가 아니지만, 한여름 또는 한겨울처럼 덥다면 몹시 덥고 춥다면 몹시 추운 그 극한의 시기가 좋다. 하루로 말하면 낮보다는 밤에 글이 훨씬 빨리 써진다. 낮동안 원고 다섯 장을 쓴다고 치면, 밤사이에는 열다섯 장을 쓴달까.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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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느니 굉장한 저택을 지었다느니 땅과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벌었다느니, 갖가지 소문이 세간에 떠도는 모양이지만 다 거짓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면 이런더러운 집에서 살 턱이 없다. 땅과 집을 어떤 경로로 사들이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집도 내 집이 아니다. 셋집이다. 매달집세를 내고 있다. 세상의 소문이란 게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 P145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기존 국판본외에 요사이 따로 작게 인쇄한 문고본이 나왔다. 양쪽을 합쳐35판을 찍었고 부수는 초판이 2천 부, 재판부터는 거의 1천 부였다. 무엇보다 이 35판은 상권이 그렇다는 얘기고 중권과 하권은 훨씬 판수가 적다. 여하튼 얼마의 인세를 받는 탓에 내가책을 팔아 돈을 벌어들인다고 알려진 셈이다.
- P145

더 밝은 집이 좋다. 더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 서재 벽은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천장은 빗물이 새서 얼룩이 졌다. 상당히 지저분하지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그다지 없으니까이대로 놔둘 생각이다. 무엇보다 다다미가 안 깔린 마루가 문제다. 널빤지 사이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겨울이면 추워서 견딜수가 없다. 채광 상태도 나쁘다. 여기에 앉아 읽고 쓰는 일이 괴로워도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에 개의치 않으려 한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천장을 도배할 종이를 보내준다고 했지만거절했다. 특별히 내가 이런 집을 좋아해서 이렇게 어둡고 더러운 집에 사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살 뿐이다. - P148

햇빛 쏟아지는 미닫이창 아래서 쓰면 가장 좋지만, 이 집에는 그런 장소가 없으므로 종종 양지바른 툇마루에 책상을 꺼내 놓고 머리에 햇빛을 흠뻑 받으며 펜을 든다. 너무 더우면 밀짚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이 잘 써진다. 결국 밝은곳이 제일이다.
- P151

밤새워 일하면 아무래도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아아‘ 하고 지쳐버리니. 하지만 낮에는 내 손님뿐만아니라 가족들 손님도 찾아온다. 반찬 만들기, 속옷 세탁 등등도무지 편한 생활이 아니다. 때론 나이 먹은 식모를 둘까 싶다 - P161

가도 지금의 식모아이는 열세 살 때 들어와서 3년 동안 잘 지내왔기에 뭔가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이게 가장 행복한 길이지싶다. 무엇보다 식모를 두다니! 『마농 레스코, 어딘가에도 한구절이 나오지만, 벼락출세한 나로서는 부끄러울 만큼 감사한일이다. 게다가 3년이나 있었다.
- P162

때론 먼지 털듯 매서운 악평을 들으면 괴롭기 그지없다. 남보다 갑절로 자극에 약한나는 넋이 홀라당 나가서 썩은 생선처럼 이삼일 이불을 덮어쓰고 자버린다. 작품이 좋지 않아서다, 자신이 제일 잘 알기에 한동안 갈 길을 잃는다. 하지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아등바등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나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저 꾸준히 쓰는 - P162

것이다. 그 삼매경에 빠져 있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결국 ‘만년 문학소녀‘다.
- P163

‘맑은 물처럼 아무 맛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 내 글은손짓이나 거짓말이나 꾸밈새가 도드라진다. 괴롭다. 힘이 모자라는지도 모른다.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툇마루에서햇볕을 쬐는 듯한 생활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남성 작가들에게 대항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한 단계 더 발돋움하고 싶다. 무로 사이세이 씨의 요즘 왕성한 창작은 놀랐기만 하다. 다케다 린타로 씨도 상당히 활력이 넘친다. 훌륭하고 존경스럽다.
다들 긴 역사를 가졌건만 용케 지치지 않는구나. 그 괴로움이어떨지 상상해본다. 나는 고작 7, 8년의 역사다. 그것도 스스로춤추는 이야기라 쓴맛으로 가득하다. 맑은 물처럼 아무 맛이없는 글을 쓰는 것은 이제부터라고 반성해본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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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0-25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모나리자 2022-10-26 09: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서곡님.^^
오늘도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일전에 마지막 시집 『어제오시기를』, 『무로 사이세이 작품집』 열두 권, 자필 하이쿠집 『원야집』이 출간됐다. 거의 문학가의 삶에 매듭을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린 문학 애송이도 여기까지 성장하고 보니 인간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것, 뭐든지 마음껏 배워두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글러먹은 인간을 못쓰겠다고 내동댕이치더라도 그가 혼자서 걸어가는 길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어찌 됐든 간에 그 녀석도 어딘가에 다다른다.
좋든 나쁘든 목적지는 당사자에게 맡겨야 한다. - P91

나는 글 쓰는 게 좋은 걸까.

뭔가 쓰려고 마음먹는 순간, 예전 체력이 슬슬 돌아옴을 느낀다. 이제 써볼까 할 때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을 때보다 확실히 병이 뒤로 저만치 물러나는 것 같다. 조금씩 건강해지는기분이다. 음식을 먹으면 맛이 바로 느껴지는 원리와 같다. 병이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인간은 병과 싸우는 동안 그 어느 피폐한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빼앗긴다.
이렇게 간단하게나마 작품과 이력을 나열한 나의 문학사를써봤다. 내게 제4차 문학사는 더는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그다지 길지 않은 차분한 작품을 뚜벅뚜벅 쓰지 않을까. 그런작은 작품조차 더욱 연마하려는 자신을 발견하는 날을 오늘의즐거움으로 삼아야겠다. 야심 없고 또 소망 없는 나야말로 미래의 나이리라. - P92

내가 가난한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원고를 재촉하는 편집자들에게 늘 호소하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뿐이다. 편집자들은 적당히 흘려듣는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일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린다거나 아주 고심해서 문장을 다듬는다거나 하는 점을 간판으로내세우는 게 싫어서 나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는다. - P117

가끔 어떤 대목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섰다가 앉았다가 마셨다가 피웠다가를 점점 더 자주 되풀이한다. 담배를한 대 피우고 나서 5분이나 10분 가만히 원고를 노려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번에는 차를 마시고 또 노려본다. 그래도 안 풀리면 소변보러 나갔다가 내친김에 정원까지 걸어 다닌 뒤 돌아와 또다시 원고에 매달린다.  - P117

내가 굼뜨지 않다면, 지금 온 힘을 다해 쓰는 하루치 원고를오전 중에 다 쓴다면 오후 반나절은 유유자적하며 지낼 수 있을 테고 따로 ‘노는 시간‘을 만들 필요가 없으리라. 사실 많은작가가 날마다 잽싸게 일정한 양을 일한 후 산책을 하고 독서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잡무를 처리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달 걸릴 일을 일주일 또는 열흘 사이에 다부지게 해치운 뒤 남은 기간 느긋하게 생활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 P119

지금 나는 육지의 인어』라는 신문소설을 쓰고 있다. 대체로작가의 일 가운데 신문소설만큼 뼈가 휘도록 힘겨운 일은 없다. 작가 지옥 중 신문소설 지옥이야말로 가장 괴롭다. 『진주부인』을 쓸 때는 기력이 왕성했던 덕분인지 이토록 고달프지 않았건만, 이번에는 문득 푸념을 늘어놓고 싶을 정도다. - P121

나는 아침에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문소설은 한 회당 원고지 네 매면 충분하니 금세 쓸 듯해도 펜을 들기 전에 이미 두세 시간 허비한다. 다 쓰고 나면 일이 고된 만큼 두세 시간 넋이 나간다. 결국 하루에 활동하는 시간을 전부 신문소설에 뺏겨버리니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 펜이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의 괴로움이란,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다. - P121

도무지 시간이 없어 독서를 못 하니 곤란하다. 신문소설을쓰는 동안은 바빠서 당연히 책을 읽지 못하고, 겨우 다 쓰고 나면 이번에는 그때까지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서양 잡지 서너종과 일본 잡지 그리고 외국에서 주문해 받은 책이 쌓여 있다.
그것도 읽어 보고 싶은데, 고새 젊은 친구들이 자신이 쓴 작품을 들고 와서 읽어봐달라, 비평해달라 조른다. 또 편지가 오면답장을 쓰거나 손님이 오면 응대를 하느라 바쁘기 그지없다.
남들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필시 한가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웬걸, 그렇지도 않다. 학교에 나갈 때가 지금보다 손님이 적고 훨씬 여유로웠다. 여하튼 이런 식이면 어쩔수 없기에 사이사이 틈을 봐서 독서하려고 애쓰건만 별로 읽지못해서 난감하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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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작년 여름부터 신경쇠약 기미가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축농증 탓인가 했다. 자꾸 콧물이 나고 구역질이 일어서 엎드리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일어나 있을 때는 끊임없이 코를 풀어야 했다. 자연히 사고력과 집중력이 떨어졌다.
죽을힘을 다해 원고지 삼천 매 남짓한 장편소설에 몰두하자고각오한 것도 이 육체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싶다. 아니 극복해 - P83

보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이 노력이 무리수였지 싶다. 삼백 매나 오백 매라면 또 모를까, 삼천매넘는 작품이 하루아침에 써질 리 만무하다. 당연히 체력을 적잖이 더욱더 소모하지않을 수 없었다.
  - P84


나는 악착같이 일과 싸웠다. 산만하고 느슨해진 주의력을 높이려고 각성제를 다량 복용하고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더는 술만으론 소용없어 수면제를 써야 했다. 내가 먹은 수면제는 정량의 열 배쯤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이미 잠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 P84

짜증만 안 나면 글은 죽죽 써진다. 때때로 글자 쓰는 시간이성가시기도 하다. 쓰다 막히면 손에 집히는 대로 책상 위 책을펼쳐본다. 대개 두세 장 읽는 사이 다시 쓸 수 있게끔 된다. 책은 뭐든지 괜찮다. 어릴 적부터 사전 읽는 버릇이 있어서 『딕슨영숙어사전』따위를 읽곤 한다. 다만 지우는 일도 글쓰기에 들어가니까, 완성한 원고 매수와 작업 시간의 비율로 따지면 오히려 속도는 느린 편에 속한다. 지울 때는 별 미련 없이 지워버린다. 그래도 아직 덜 지운 감이 들지만. - P88

다 쓰고 나면 언제나 녹초가 된다. 쓰는 일만큼은 이제 당분간 거절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주일쯤 아무것도 안 쓰고있으면 적적해서 견딜 수 없다. 뭔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또 앞의 순서를 되풀이한다. 이래서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을 성싶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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