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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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바티스트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때문이다. - P9


물론 악취가 가장 심한 곳은 파리였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도시였기 때문이다. 파리 안에서도 특히 악취가 지옥의 냄새처럼 배어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페르 거리와 페론리 거리사이에 위치한 이노상 묘지였다. 8백 년 동안 시립병원과 주변의 교구에서 죽은 시체들이 이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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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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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때 두 차례 진보초 고서점가를 다녀온 후, 언젠가 그 책방 거리를 누비면서 나날의 기억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번역 수업 시간에 야기사와 사토시의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을 알게 되고 꼭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다. 두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시점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히데아키와 1년 동안이나 사귀고 있던 다카코는 어느 날 그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던 다카코는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10년 동안 만난 적 없던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그가 운영하는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내면서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는 이야기다.

 


허리 아픈 외삼촌이 병원에 다녀올 동안 서점을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씨구나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아직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다카코가 곰팡내 나는 중고책 서점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몰입하며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면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잠에 빠져사는 다카코를 보며 외삼촌은 걱정한다. 어느 날 아침 다녀올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외삼촌의 말에 다카코는 시큰둥한다. 앞으로 몇 시간을 자든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자 할 수 없이 따라나선다. 50년도 넘었다는 외삼촌의 단골 가게라는 카페 스보루는 다카코의 기분 좋게 하였고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스보루에 다녀오고 나서 다카코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반전처럼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될 만큼 그곳을 좋아하게 된다. 데면데면하기 그지없던 외삼촌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숙맥이라고 여겼던 외삼촌이 다르게 보였다.

 


돌연 집을 나가 5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외숙모 모모코, 잔소리꾼 같았던 단골손님 사부 씨, 카페 스보루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점점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다카코의 인생 대반전을 기대했는데 약간 밋밋한 결말은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참 따뜻한 소설이다. 다카코를 천사라고 여기며 응원해 주는 외삼촌을 보며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뉘우친다.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는 외삼촌의 마음을 이제야 알다니. 갑자기 떠났던 외숙모는 왜 돌아왔을까. 외삼촌은 모모코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다카코에게 부탁을 하지만 모모코는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모모코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채 따라나선 다카코는 지난날의 외숙모의 아픔을 알게 된다. 다카코가 쓰라린 실연을 겪은 후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낸 날들은 다카코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어쩌면 모리사키 서점은 사람들을 이어주고 품어주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외삼촌은 다카코에게 오랫동안 방황했던 경험을 들려주면서 모리사키 서점이야말로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야.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내 인생의 전반부가 지나갔어. 그리고 나는 이제 가장 마음에 드는 항구로 돌아와 거기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한 거야. 나에게 이곳은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야.”(79P)

 


다카코는 어느새 히데아키를 원망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늘 적당히수동적으로 살았던 태도를 반성한다. 헌책들의 곰팡내가 떠도는 모리사키 서점 2층 작은 방이 그렇게 소중한 공간이 될 줄이야. 책을 좋아하고 진보초 책방 거리를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따뜻한 이야기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자신이 좋아하는 소중한 공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닐까. 모모코가 다카코에게 여행을 권유한 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이 공간으로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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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1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p.79에 나오는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라는 말이 굉장히 공감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나리자 2024-04-01 1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쵸. 이 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네요. 4월에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1 10:44   좋아요 1 | URL
예 감사합니다. 모나리자 님도 보람찬 4월 되시길 바랍니다!

모나리자 2024-04-01 11: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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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너무나도 가슴 뭉클해지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묘미는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하는 반전이 아닐까. 그런데 이 소설은 끝까지 반전을 보여주지 않고 주인공 스토너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그대로 조망한다. 마치 그에게 주어진 총체적인 삶의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구경이나 하자는 듯 작가는 아무런 미사여구도 보태지 않는다. 1월 중순에 읽기 시작했는데 우선순위 일에 밀려 멈추었다가 최근 다시 붙잡고 몰입하여 읽었다. 읽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애잔한 여운이 남아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1965년에 쓴 이 작품은 50년이 지나서야 유럽 독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단다. 아마도 그 시대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뒤늦게 알려진 게 아닐까, 작가에게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농업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좋겠다는 부모의 말씀에 따라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영문학도의 길을 걷고 교수가 되어 4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한다. 놀랍지 않은가. 농업기술을 배워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려고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났는데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강의를 듣다가 스토너의 삶은 혁명적으로 변화된다. 슬론 교수는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를 가르치는 중에 느닷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그 질문을 스토너에게도 들이대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무렵부터 토양화학 등 농업 과목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농과대 커리큘럼은 모두 빼버리고 철학과 고대역사 기초강의와 영문학 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도서관의 서가를 누비며 신세계라도 발견한 듯 빠져들며, 그의 문학을 향한 관심은 점점 깊어만 간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참전하는 분위기 속에서 스토너는 아처 슬론 교수의 도움으로 강의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종신교수가 되기에 이른다. 문리대 학장인 조시아 클레어몬트의 사촌뻘인 이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거기까지만 보면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설렜던 스토너는 결혼하자마자 곧 실패한 결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거기서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집요한 교육관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안고 성장한 이디스는 스토너가 가까이 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한 것일까. 딸 그레이스를 낳았지만 이디스는 아프다며 늘 누워 지냈기에 육아도 살림도 스토너 몫이었다. 그레이스의 기저귀를 갈고 음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이디스에게 줄 수 없는 사랑을 딸에게 줄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해했다. 멋대로 스토너의 서재를 뒤집어놓고 구석방으로 내몰렸어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순한 양처럼 참고 견디는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레이스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시샘하며 떼어 놓는 등 약한 척 꾀병을 부리던 이디스는 본색을 드러내며 스토너를 괴롭힌다. 놀랄 법도 한데 스토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작은 일에 감사하며 체념한다. 인내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주인공 스토너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았다는 점에서 그가 진짜 영웅이며, 그의 삶이 결코 슬프고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했단다. 역시 그 부분은 공감할 수 있다. 완벽한 삶은 없다고 했던가. 열변을 토해 가며 영문학을 가르치고 그를 시기하는 로맥스나 워커, 이디스 등 악의 무리에게 당하면서도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헤쳐가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에게 학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캐서린과 잘 되었다면 가난하고 불행한 그의 삶이 조금은 보상이 되었을 텐데. 어쩌면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했기에 고독과 슬픔이 더욱 크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다가 병으로 몸져누워 지난날을 돌아보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병든 몸으로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스토너는 이디스를 부르려다 말고 자꾸만 자신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갈까. 훗날 언젠가 행복이 올 거라 믿으며 지금을 대충 살기도 하지 않나. 죽어가는 스토너의 독백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 함께 하는 가족, 지인,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친절한 말 한마디와 미소를 나눌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나중은 없다. 지금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삶이 되지 않을까. 스토너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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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직업을 삼다 - 85세 번역가 김욱의 생존분투기
김욱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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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힘든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모처럼 일주일 동안 휴강이라 책을 읽는 호사를 누렸다. 이 책의 저자인 김욱 번역가는 몇 년 전 김애리의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를 읽고 나서 알았다. 나이 일흔에 번역가가 되었다는 것과 30년 기자 생활을 하다가 은퇴 후 보증을 잘못 서서 쫄딱 망했다는 사연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얇은 분량에 내 책 판형보다 더 작은 이 책에 저자의 묵직한 인생이 들어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아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문학동인회를 만드는 등 대학에서도 국문학을 전공했단다. 문학지 신인 작품 모집에 응모하여 1차 예심에 합격하고 2차 심사만 남겨둔 어느 날, 6.25 전쟁이 터졌다. 그 후로는 이북에 끌려갔다가 2개월 만에 죽기 살기로 도망쳐왔고, 생업을 위해 신문 기자가 되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30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은퇴 후 그의 인생은 급변하여 거센 풍랑을 만난다. 고통스러운 인생 이야기를 어쩌면 그렇게 생생하고 재미있게 쓰셨는지.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존재인가. 웃다 울다 가슴 찡한 먹먹한 감동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번역 공부를 하는 중인 나로서는 어떻게 김욱 할아버지가 번역가가 되셨는지 제일 궁금했다. 1930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어를 강제로 공부해야 하는 시절이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5세에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기자 생활 30년을 했으니 글밥을 먹는 인생을 사셨다. 그렇다고 해도 학창 시절 배운 일본어로 번역가가 된다는 건 다른 문제다. 하지만 김욱 번역가는 어렸을 때부터 외우다시피 읽었던 책들이라 번역이 아니라 독후감 쓰듯 술술 글이 나왔단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어느 날 뚝딱 하고 번역가가 된 게 아니었다. 꿈을 향한 열정과 꾸준함이 낸 성과였다. 공부의 쓸모란 정말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95세에 일어 번역가를 은퇴하고 나서 새롭게 중국어를 공부한 다음 백열 살쯤에는 루쉰의 명작 광인 일기를 번역하고 싶다던 김욱 할아버지의 도전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이가 많다, 여건이 안 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날마다 과제가 있고 마감 시간을 지켜야 하는 다소 벅찬 번역 수업을 수행하면서 괜히 사서 고생하는 건가,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잠깐 이런 고민을 하던 나는 큰 힘을 얻었다. 그리고 역시 시작하길 잘했다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열심히 번역에 몰두하고 일을 마치면 점심시간이란다. 남들이 한창 일할 시간에 여유롭게 서점에 나가 책을 고르거나 산책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번역가의 삶을 엿보며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나이 여든이 되어서도 번역에 열중하고 있는 인생이란 멋지겠다. 적어도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일 테니까.

 


김욱 번역가의 인생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엇을 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는 걸 상기해준다. 번듯한 기자 생활을 하다가 남의 가문 묘막 살이를 하는 등 혹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어렸을 적 꿈을 간직하고 있다가 일흔에 번역가가 되고 작가도 되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줄 만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인상적인 몇 대목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치려 한다.

 


묘막에 기거하던 어느 날, 하릴없이 백과사전을 뒤지며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바그너가 소개된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고, 히틀러와 니체가 우상처럼 섬겼던 대작곡가가 현재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빚에 쫓겨 감방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중략)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바그너보다는 형편이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보자면 감방을 들락거리던 바그너도 예순아홉 나이에 필생의 역작인 파르지팔을 완성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p46~47)

 


찰스 스트릭랜드도 포기하며 살았을 것이고, 폴 고갱도 포기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 또한 포기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찰스 스트릭랜드는 찾아냈고, 폴 고갱도 결국에는 찾아냈다. 남은 것은 우리들이다. 찾아내려고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늘 마음 한구석에 미련이 남고, 궁금하고, 흥분되는 뭔가가 있었지만, 바쁘니까, 누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늙었으니까 나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부정해온 만큼, 핑계를 찾아낸 만큼, 게으름을 피운 만큼, 빈둥거리며 가는 시간만 재고 앉았던 수고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하고,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서두르고, 뭔가를 붙들려고 노력한 시간들이 쌓였더라면 지금과 같은 후회스런 모습은 결단코 되지 않았으리라.’(p123~124)

 


그런데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못하겠다며 물러난다. 여든이 넘은 늙은이도 해내는 판에 나보다 훨씬 어린 것들이, 건장한 것들이, 힘이 있는 것들이, 능력이 있는 것들이 못하겠다며 우는 소리를 해댄다.’(p135)

 


막다른 골목은 절대로 나쁜 의미가 아니다. 여기보다 재미난 놀이터는 없다. 길이 끊긴 벽 앞에서 어떻게 해야 이 벽이 부서질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즐거울 때가 없다. 나를 가로막는 벽이 없고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것이야말로 곤란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누가 나를 아프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누가 나를 때리기 전에 내가 먼저 모나게 구는 것이다. 자처하는 삶이자, 선점하는 인생이다.’(p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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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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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전 겨울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오래전 내가 속해 있던 상록독서회20051월 선정도서다. 당시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보내야 했는데, 보냈는지 어쨌는지 기록해둔 것도 없고, 어쩌다 보니 독서회와 연락이 끊어지고 늘 아쉬운 마음이었다. 십수 년 넘게 활동했던 내 정신의 의지처였던 독서회였다. 작년 나의 첫 책을 쓰는 과정에서 독서회의 추억이 되살아났고 언젠가 꼭 다시 읽어보리라 했었다. 읽으면서 희미해진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과연 책 제목처럼 화자인 인디언 소년 작은 나무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며 자투리 시간에 읽느라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감동과 웃음이 내 안으로 밀려왔다.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시고 다섯 살인 작은 나무’(본래의 고향인 테네시 주에 머무른 그룹의 자손에 속한다고 함)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산속 오두막에서 살게 된다. 여러 마리의 개들과 산속의 새들과 온갖 동물들, 자연이 소년의 친구다. 체로키 인디언인 조상의 전통을 이어받아 위스키를 제조하는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고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연이 주는 풍족한 혜택을 아낌없이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너무 어려서인지 부모를 잃은 슬픔 같은 건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어른스러움 마저 느껴졌다. 그저 눈뜨면 자연과 접하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되는 삶, 대지의 큰 사랑을 받고 살아서였을까.

 



몇 되지 않는 산속에 사는 이웃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이야기, 개척촌에서 찾아온 정치인이나 기독교인 등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하나의 다른 사회를 배워 간다. 자연의 풍성한 혜택을 누리면서도 자연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물을 사냥하더라도 모조리 다 잡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튼튼한 종을 남겨 두어 대를 이을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자연과 교감하는 법, 고통을 참는 법 등 인디언의 정신을 할아버지께 배운다. 그리고 이웃 어른들의 죽음을 통해서 삶의 이치도 알아간다. ‘작은 나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살아갈 날이 길지 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면서 작은 나무는 어렸지만 어떤 애틋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워낙 영특한 아이였으니.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낯선 여자의 방문은 모두를 슬픔에 빠뜨린다. 교육을 받아야 할 어린이가 자격도 없는 늙은 인디언들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누군가 고소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작은 나무는 고아원에 들어갔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된다. 소년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받은 고통 따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그후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 수 있었던 기간은 고작 2년이었다. 작가 자신의 자서전 격으로 볼 수 있는 이 책은 백인 미국 사회의 잔혹성과 위선을 보여주고 체로키 인디언 사이에서 전해지는 가르침들, 할아버지가 작은 나무에게 말해주고 싶은 가르침이 녹아들어 있다. 1977년 초판이 간행된 이후 뉴욕타임즈를 비롯하여 산악지방의 주간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작은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인디언 소년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자연과 사람들 이야기가 감수성 넘치는 필체로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언뜻 생각으로는 우리가 산을 짓밟으면서 앞으로 나갈 것 같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산이 손을 벌려 온몸으로 감싸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자국소리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뭔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만물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휘파람소리와 숨소리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P15)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P25)

 



할머니가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손에 넣으면 무엇보다 먼저 이웃과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말로는 갈 수 없는 곳까지도 그 좋은 것이 퍼지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P96)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더 커진다.

할머니는 이해와 사랑은 당연히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P101)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정리할 기회를 주는, 자연이 부여한 축복의 시간이다. 이렇게 정리해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했어야 했던 온갖 일들과…… 하지 않고 내버려둔 온갖 일들이 떠오른다. 가을은 회상의 시간이며…… 또한 후회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지 못한 일들을 했기를 바라고…… 하지 못한 말들을 말했기를 바란다……’(P261)

 



처음 그 별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는, 그 별을 보며 떠올릴 일들을 낮 동안에 미리 생각해두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얼마 안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나에게 추억들을 보내주셨다.

할아버지와 나는 아침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산꼭대기에 앉아있다. 햇빛을 받은 얼음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반짝거리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산이 깨어나고 있어.”

그러면 나는 그 창가에 서서 이렇게 대답한다.

네 할아버지, 산이 깨어나고 있어요.”(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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