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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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는 아름다운 세계가 무너져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생명의 순환을 경시하고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는 것에 몰두함으로써 살아 숨쉬는 것들의 절망과 고통의 응어리진 비명들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더 나은 세계를 발견하여 한 걸음씩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인류의 역사는 어둠 속의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자연과 생명이 존재하는 세상을 탐험하며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깨닫게 하는 작가 배리 로페즈의 아름다운 글을 만나볼 수 있는 마지막 에세이로 인상적이다.


특히, 이 책은 어린 시절 끔찍한 성폭력의 고통이라는 내밀한 개인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고백하는 동시에 경이로운 숲과 평원, 사막 등을 탐구하고 땅과 인간의 관계, 자연 안에서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찾아다니는 여정을 통해 치유의 시간을 기록한 한 인간의 숭고한 모습을 담아내어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작가 배리 로페즈는 성적 학대의 트라우마, 부모의 폭력적인 결혼과 이혼,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라는 결핍이라는 그림자에서 머물지 않고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희망의 빛을 향해 걸어갔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빛을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밸리의 초월적인 정수, 이곳이 표출하는 생명의 기운에 인종보다 깊고 돈보다 깊고 교리보다 깊은 영속성이 있다는 감각은 한번 발견하면 놓치려야 놓쳐지지 않는다. 한번 발견된 이 감각은 겁에 질린 사람도 보호해줄 수 있다. 일상적인 악의 침입으로부터, 도착자로 인해 덮쳐오는 반복적인 공포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몰랐던 일이라고 한사코 우기게 만드는 그 공포로부터."


여기에 더해 배리 로페즈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실존의 난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각각의 세대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허물어지지 않을 땅, 선조들의 끝을 지속시킬 땅을 다시 찾아내고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치유의 구원자인 땅과 자연에 대해서 향수가 아니라 공경을 느끼며 이끌렸고, 대지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근본적인 문화적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복잡성을 잃어버릴 때 인간에게는 진보가 아니라 멸종이라는 퇴보와 파괴의 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리 로페즈는 다채로운 세계를 떠나고 다양한 사람들과 자연의 신비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비열한 위협이든 야생의 아름다움이든 피하지 않고 적응해가는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절망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발견한다.  


이 밖에도 배리 로페즈는 다양성은 생명의 특징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 책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 어디든 거기서 마주치는 차이가 적어질수록 죽음이 세력을 확장한 것이"라는 배리 로페즈의 글은 멸종 위기의 지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경고를 전한다. 한계를 더 잘 인식하고 탐욕 대신 연민이 풍부하고 편견 대신 포용에 강하고 더 착취를 삼가는 문명을 고안해내야 한다는 배리 로페즈의 글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를 직시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다짐을 담아낸다.


"여행을 다닌 세월 동안 다양성에 대한 나의 이해는 진화했다. 처음에는 내가 듣고 믿었던 것보다 이 세계의 장소와 장소가, 문화와 문화가 서로 훨씬 다르다는 직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차츰 이런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무감각한 행위일뿐더러 부당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이를 무시하면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소외와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낳을 뿐이다. 거기서 나는 더 깊은 통찰을 얻었다. 모든 사회적 생명체들의 사회조직이 건강하게 장기적으로 유지되느냐 아니냐는 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동시에 개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구나 하는 통찰 말이다. 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자율성과 존중의 결합이고 그것이 갈등을 최소화해왔으니 말이다."


책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성폭력이라는 내면의 고통을 자연과 생명이 태동하는 장소를 여행하면서 존엄성을 기록해나간 작가 배리 로페즈의 아름다운 탐구를 만나볼 수 있어 독자에게 감동과 공감을 선사한다. 또한 이 책은 어떤 장소를 알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여 교감하고 인식을 확장하며 치유의 믿음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독자에게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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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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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은 <안네의 일기><이것이 인간인가><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작품들과 더불어 홀로코스트 문학의 필독서이자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한 신시아 오직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전쟁의 광기를 직접 겪지 않았던 유대계 미국인 신시아 오직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에 닥쳐 인간의 존재 의미, 인간 조건의 무게를 새삼 돌아보게 하여 눈길을 끈다.


단편 '숄'에 이어서 뒤이어 이어지는 작품 '로사'는 '숄'의 배경이 된 시대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를 다루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로사 루블린은 강제수용소 경비병이 어린 딸을 살해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30여 년 후 그녀는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한 호텔에서 "미친 여자이자 과거의 쓰레기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는 '숄'이 있다. 그것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숄, 뜻하지 않게 그 아이를 파멸시키는 숄, 나아가 마법처럼 그 아이를 되살리는 숄이다.


"마그다의 눈은 언제나 맑았고 눈물이 없었다. 마그다는 호랑이처럼 지켜보았다. 숄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숄을 건드릴 수 없었다. 오직 로사만이 건드릴 수 있었다. 스텔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숄은 마그다의 아기였고, 반려동물이었고, 여동생이었다. 마그다는 숄을 덮고 숄과 뒤엉켰고, 아주 가만히 있고 싶을 때는 숄의 모서리를 빨아댔다. 그러던 중 스텔라가 숄을 가져가서 마그다를 죽게 했다.

나중에 스텔라가 말했다. "추웠어요.""


<숄>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담은 홀로코스트 문학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생존자라는 단어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삶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어두운 감정들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전쟁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빼앗고 고통 안에 머무르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생존자. 무언가 참신하다. 그들이 인간을 말할 필요가 없다면 말이다. 과거엔 난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존재는 없다. 더 이상 난민은 없고 생존자만 있다. 번호와 다름없는 이름 - 평범한 무리와는 따로 셈해지는 존재. 팔에 찍힌 파란 숫자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들은 어쨌거나 당신을 가리켜 여자라고 하지 않는다. 생존자라 한다. 심지어 당신의 뼈가 흙먼지 속으로 녹아들 때도 여전히, 그들은 인간을 잊고 있을 것이다. 생존자와 생존자 그리고 생존자. 언제나, 언제까지나 생존자. 누가 그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 같은 단어다."


"마그다, 사랑하는 아가, 부끄러워 마라! 나비야, 나는 네 존재가 부끄럽지 않단다. 나에게로 오렴, 다시 나에게 와주렴. 지금 더 머물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오렴. 이런 것들이 로사의 마음속에 있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욕구를 억누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소리 내어 마그다에게 하지 않았다. 순수한 마그다, 등불처럼 밝은 머리의 마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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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벽 -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박신양과 철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
박신양.김동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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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벽>은 화가로 변신한 한국 대표 배우 박신양과 예술에서 철학적 가치를 읽어내는 인문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이 책은 다양한 작품에서 철저한 캐릭터 분석으로 유명한 배우 박신양이 러시아 유학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까지의 고통스럽고 솔직한 고백을 만나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10여 년 동안 그려 온 박신양의 그림 가운데 131점이 수록됐고, 박신양의 그림에 대한 인문학자 김동훈의 해설로 더욱 풍성하게 박신양의 그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을 '제4의 벽'이라고 한다. 벽이라는 '실재'가 '현실'에는 없고 '상상' 속에만 있는데도 배우와 관객 모두가 마치 현실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벽이다. 그런데 박신양 화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4의 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넘나들 대 또 다른 창조성이 나온다고 여긴다. 책 <제4의 벽>은 박신양 화가 개인의 예술철학에서 예술 일반을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까지 독특한 독서 경험을 체험하게 해준다.

박신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의 진심에 가닿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기에 몰두했듯이, 사람들의 눈에 닿고 영혼에 닿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의 근원과 뚝심, 그리고 고독과 고립 같은, 사람들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평생의 노력과 뚝심을 바친 많은 예술가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예술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추구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바쁜 삶에 쫓기느라 살펴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대신하여 애써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다. 그것의 대부분은 아마도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것들에 해당할 수도 있고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못한 채로 부여잡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박신양은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전혀 배운 바 없었고 연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신양은 내 안에는 그리움만 가득했고 사람들을 그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림도 연기도, 그리고 모든 표현은 표현자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가 연기에 접근했던 방식과 다르지 않게, 나와 타자, 나와 세상, 그리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길에는 지난하게 힘들고 험난한 과정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결코 쉬운 지름길 같은 건 없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교과서도 없다. 누군가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다. 아무리 등불과 가이드가 있다 해도 본질적으로는 예술가가 스스로 길을 찾아내고 거기에 수반되는 짐을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당나귀가 짐을 지는 데 꾀를 부리지 않듯이."

박신양은 자신에게 생일을 생소하기도 하고 오히려 침착하며 엄숙하다고 말한다. 박신양은 어쩌면 매년 날짜를 정해 놓고 생일이라고 우기는 건 다분히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태어남과 있음이 경이롭고 축복받을 일이라면 매일과 매 순간이 그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혹시 어느 날 문득 생명의 기쁨이 나의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부터 느껴진다면 그날을 생일로 하는 건 어떤가에 대해 말하는 박신양의 글이 눈길을 끈다.

"가령 무언가에 몰두하다가 잠깐 본 청명한 하늘과 시원하게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축복을 느낄 때, 그리고 예상치도 않았던 감격스러운 사람과의 만남에 진정한 감사와 행운을 느낄 때, 엄청난 좌절 가운데 한 줄기 희망을 느낄 때, 어떤 의도 없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가 어디선가 배웠던 고독이 전혀 슬프거나 암울한 것이 아닌 매우 친근하며 심지어 흥미로운 것임을 느꼈을 때, 문득 아주 작은 것에서 커다란 의미를 발견했을 때처럼."

인문학자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가 생일을 맞아 뭔가 생소함을 느끼는 것은, 생소함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임'을 뜻한다고 말한다. 김동훈은 생소함은 작가에게 단순히 도전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많은 유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작가의 답답함과 고민을 언어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아가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의 생일에 겪는 생소함은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며, 우리가 그의 작품과 작업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여기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문학자 김동훈은 박신영 작가가 행복이라는 강박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10년 동안 네 번의 수술과 진통제 복용을 견뎌내었고 혼미한 정신을 오가며 다다른 막다른 길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가 마침내 늘 되뇌었던 행복이 틀렸다고 선언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길을 나선 순간부터 그의 구도의 길이 시작되었고 화가로서의 작업에 불이 내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을 말하면서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감 없는 사람들이 참 많다. 특히 '아무말 잔치'를 하는 사람들은 과장된 언어로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과장된 언어는 언제나 거짓말로 판명된다. 효능이 없는데도 있다고 하고 아직 안 한 것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결실도 없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 생색만 낸다. 하지도 않을 일에 대한 뻔뻔한 공치사는 자신의 무관심과 무책임, 무능력에 대한 가림막이며 기만적 태도의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몰염치한 행복에 저항한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행복 리스트나 행복 십계명을 따르지 않는다. 수술의 상처나 정신적 고통 속에서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행복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젠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며, 행복론자들의 리스트에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향유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인문학자 김동훈은 어떤 작품을 감상하고 1차적으로는 추하거나 두렵고 위태함을 느꼈는데 거기서 그 감정만으로 끝나지 않고 무너가 멋있고 아름답게 느껴져 매혹된다면, 이것이 숭고한 감동이라고 말한다.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는 아마 열등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움의 감동과 함께 그림 자체에서 감정의 변화, 즉 숭고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박신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 공개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고 한 적이 있었고, 기분 좋게 빨간 사과를 그렸다고 이게 그림이냐고 된통 혼나기만 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 후로는 사과도 그림도 그리지 못했고, 지금 사과를 그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후로 거의 40년이 지나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흔한 빛바랜 보라색 비닐봉투에 담긴 사과 두 알을 선물로 싸 주셨던 두봉 주교님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사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박신양은 그동안 수많은 사과를 보아 왔지만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사과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그림이냐는 말은, 다시 말하면 그렇다면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어때야 하는가라는 말의 다른 의미이겠다. 어떻게 보면 그때 큰 화두를 얻은 것이다. 무엇을 그린다는 건 그게 무엇이건 그것과 비슷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두봉 주교님은 그렇게 내가 다시 오랜만에 사롸를 그릴 수 있게 해주신, 아니 처음으로 의미를 갖고 사과를 바라보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박신양은 나와 우리는 여러 이유로 규정되고 한정지어지지만, 정해진 규정들을 넘어서 역할 이외에, 그리고 역할을 넘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노력을 왜 하는가에 대한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가지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관심에 대한 애정의 지속과 근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진심을 쏟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품은 열정이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박신양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인 문제이지만 그 자체로는 틀린 질문이다. 그건 그냥 삶과 인생과 자신에 대해서 정해진 대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깊게 잘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일반적으로 총칭하는, 편의상 정해진 질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러 방식으로 우상화되고 구태의연해지고 도식화된 질문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버리고 철저하게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누구나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 역할만으로도 우리는 힘겹다. 한마디로 역할 이외의 시간을 만들어 내거나 사용하지 못한다. 역할에 충실하는 것은 삶의 임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역할을 나 자신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캐릭터들은 절대로 나 자신일 수 없으며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선택하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수행일 뿐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역할을 넘어서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캐릭터라는 말은 뭔가 독특한 면을 가진 극 중 등장인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사람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극에 등장하는 무언가 특징적인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그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진정한 사람, 진정한 캐릭터가 되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희망이다."

박신양은 2020년에 갑상선 기능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았고, 그전에는 서 있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가 10년 가까지 지속됐었다고 말한다. 몸이 거의 말을 듣질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박신양은 자신의 몸에 비타민 같은 것조차 주지 않고 가혹하게 혹사해 오기만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해야 할 일과 감당하수 있는 몸 사이의 균형을 항상 잘 몰랐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해야 할 일들에 비중을 뒀으며, 지금부터라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내기 위해서라도 몸을 조금은 아껴야겠다고 고백한다.

"나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총체적으로 다시 해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나를 이루는 근본이 무엇이었으며 이제까지 부여잡고 있던 것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라고 엄청나게 의미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박신양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한다. '본다는 것'은 대상을 깊이 파악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대상을 대하는 '나 자신을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지속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건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과 더불어 그리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림에서 감정을 다루는 시선은 1인칭이다. 그것은 다른 방법 없이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내 감정과 마주한다는 것은, 제3자의 시선과 입장에서 묘사될 수 없다. 그래서 1인칭이다. 그랬을 때라야만 그 표현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박신양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그리는 행위 자체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로 비생산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효용성 관점에서 그림 그리기는 매우 쓸데없는 짓에 해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필요와 효율에 해당하는 쪽의 반대편에 서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고 밑바닥 어딘가로부터 기쁨이 올라온다고 말하는 박신양의 글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효율적이기 위해 태어났는가? 생각해 보면 그래야 한다는 강요를 참 많이도 받아왔다.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효율적이어야 하는가?"

박신양은 우리는 제4의 벽뿐만 아니라 모든 상상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미 어떤 선택을 의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선택의 근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한 감각인 감정은 공들여 들여다볼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보며, 그것은 인생의 다른 것들을 알아가기에 참으로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박신양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이미 공고하게 결정되어 있는 제4의 벽의 위치를 조금이라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한다면 상상을 포함한 주어진 근거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이다. 그것은 시점이 강제로 고정당하는 것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다. 결국 누가 나와 나의 상상의 근거를 결정하고 그것이 무엇 때문에 결정지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며, 운명 같은 거대한 것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구조와 마주선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봐야 하는 실존이기도 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한 가능성이며, 동시에 손에 진땀이 흐를 정도로 가능성의 흥미로운 저주이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강력하고 원초적이고 파토스적인 움직임의 시작이 들어 있고, 또한 그 순간 그 지점에 서 있는 자신을 지켜보기 위한 단초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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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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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서울을 떠나 하동군 평사리에 정착한 소서가 공지영. 그 무렵 작가로서의 번아웃에 시달리며 더 이상 글을 쓸 수 있을까, 심각한 회의에 빠진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그것에서 평화와 행복을 되찾아가던 어느 날, 작가는 문득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목적지는 예루살렘, 예수의 탄생과 성장,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곳, 평온한 일상을 살면서 잊고 있던 그곳으로.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2022년 가을에 떠난 순례의 여정 속에서 만난 깨달음의 기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공지영 작가의 신작 산문이다. 그의 대표 에세이 중 하나인 <수도원 기행 1,2>를 잇는 영성 고백과 삶에 대한 절절한 통찰이 담겨 있다. 각 순례지가 작가에게 던져준 삶의 메시지를 묵상하고, 치열하게 현재와 과거, 하동과 예루살렘을 교차하며 진한 감동을 전한다.

"사랑하는 나의 벗들, 그분께서는 나를 산과 바다로 인도하시고 고통의 낚싯바늘에 걸리게도 하셨다. 나는 배고픈 물고기처럼 미끼들을 물고 아슬아슬 죽음을 비켜 여기까지 왔다. 우울하고 눈물 흐르던 시간도 있었고 불면으로 쭉 이어진 새벽도 있었다. 가장 큰 후회는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 사랑함을 소유로 굳혀버리려던 것.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찬란한 가을볕 아래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았고 사랑했던 시간이 더 많았음을 깨닫는 것은 가을이기 때문이리라. 여름을 떨구는 리넨 이불처럼 나는 지난날의 나를 조용히 떨구며 생각한다. 삶을 지중해풍 샐러드 같다.

죽음을 거쳐온 사람들, 사랑에 상처 입은 사람들, 주린 이들과 배고픈 이들, 그리고 샘물을 갈망하는 사람들, 밤새 광야를 헤맨 사람들에게 내 책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아니 어쩌면 그들만이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의 벗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섬진강가에 정착했던 공지영 작가는 3년 넘게 남들에게 글을 내비치지 않고 살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다시 글을 쓴다면 정말 쓰고 싶어서, 생계가 아니라 정말 그러고 싶어서 쓰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공지영 작가는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라는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자신에게 남았고, 고통과 외로움 결핍 대신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생각을 끝까지, 아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론은 늘 단순하다. 이것은 신비롭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질문의 끝이 삶의 암반에 도달하고 나면 기초를 쌓아 올리는 일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서울 집을 처분하고 완전히 이곳으로 이주했다. 섬진강가 열다섯평짜리 농가를 떠나 악양 벌이 내려다보이는 옆 동네에 터를 봐두고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때 또 몇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데, 하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그만두게 된 것이고, 또하나는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둘까 하는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평생 처음 있는 격변이었다."

공지영 작가는 주인에게 학대받던 강아지 동백이를 위하여 자신의 잠과 안락을 내어주고 뒤척임으로써 아주 잠시이지만 이 세상의 이기심을 떠나 우주의 커다란 법칙 속으로 들어갔고, 어쩌면 잠시 우주와 한 맥박으로 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지난날 자신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익을 고집하면서 살았을 때, 어쩌면 작은 이익 같은 것을 분명 얻고는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홀로 있는 순간 한없이 외로웠고 초라하며 무력해졌다는 것도 기억났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남에게 나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결코 약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하고 힘이 센 우주 혹은 신과 하나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자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습니다"라고 했던 거였다. 그래서 우리가 조건 없이 무엇을 남에게 주기로 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거센 대양의 조유를 올라타는 조각배처럼 우주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공지영 작가는 지구상의 많은 곳을 구경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정작 성경의 중심지이며 그리스도교 공인 성지인 예루살렘에 갈 기회는 없었다고 말한다. 공지영 작가는 오래전부터 신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에 불러주시기를 기다렸고, 가장 큰 원칙이 떠남이라고 정해졌으면 나머지 것들은 포기하거나 저절로 큰 원칙에 맞춰지기를 기다려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왜 예루살렘이야?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정확히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천천히 깨닫게 되겠지. 이건 나이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 답이 언제나 그 순간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답은 없어도 좋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떠나는 것을 선택해야 했으므로, 버릴 것들이 많았다. 금목서, 은목서 핀 정원의 화사함, 늦가을 하동 하늘의 맑음, 운전을 하고 가다 멈추게 만드는 서러운 황금빛 들녘, 그리고 동백이와의 다정함 같은 것들. 어쩌면 나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고 스스로를 느낀 타향의 나그네 같았는지도 모른다. 떠나야 했고 나는 떠났다. 그저 떠나보았던 것이다."

공지영 작가는 혼자인 것은 싫다고,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일 같은 것은 자신에게 왜 시키는 거냐고 세 번이나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이 멀고 우습고 낯설었고, 결국 신의 바람대로 광야에 혼자 서 있을 뿐 아니라, 서 있어보니 좋았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저기압이나 고기압 혹은 기압골과 같이 우리 눈에 절대 보이지 않지만 필연코 존재해서 눈이나 비 혹은 햇빛이나 바람으로 닥쳐오는 어떤 놀라운 힘이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 번 더 깨달았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하면서 내키는 대로 날고 움직이고 있는 줄 알았으나 실은 제트 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뛰어도 이 지구보다 빠른 속도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야 하나,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 아니 이 모든 것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외와 전율이 나를 엄습했다. 심지어 나는 지금 말하고 있지 않나 말이다. 저 광야가 매혹적이라고."

공지영 작가는 나이를 먹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퇴보할 뿐이라고 말한다. 더 딱딱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편협해지고, 자기가 바로바 될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자신이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면이 있다면 그건 성숙해지고자, 더 나아지고자 흘린 피눈물이 자신에게 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미사가 끝나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뒤쪽 언덕으로 돌아가니 안개 바다 속으로 커다란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운 뿌연 안개는 정확히는 사해 쪽에서 끝없이 올라오는 수중기였다. 말하자면 사해는 끓고 있는 커다란 물이었다. 어느 먼 옛날 이곳을 지나는 지진대가 난데없이 이 땅을 쩍쩍 라그로 그 나머지는 가라앉아 모든 물들이 그리고 흘러들었다. 사해. '죽은 바다'라는 뜻의 사해는 받아들이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제 물을 나누어주지 않아, 결국 생명 없는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저 가지려고만 하고 움켜쥐려고만 할 뿐 내어주고 흘려보내고 놓아버리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죽음으로 변한다는 것을 사해가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선가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너는 또다시 소수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하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너는 택해야 한다. 그 고독을,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아득하고 슬픔 바람이 미지근하게 불어왔고 계속해서 불어왔다."

공지영 작가는 수많은 성인들, 수많은 현자들이 인간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간 것은 우리 감각을 미혹시키는 배경들이 가장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지영 작가는 불교에서 '미혹'이라고 말하는 그 모든 감각을 지워버리고 나면 인간은 하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만나고, 통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끝도 없는 광야.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물 한 방울 없는 광야. 유백색의 메마른 광야는 나를 매혹했다. 이곳에 머무르면 어둠까지 내린다면 그때는 신과 내가 대면하는 그런 순간이 오는 것은 아닐까."

공지영 작가는 고통이 오면 우리는 이 고통이 내게 원하는 바를 묻고, 반드시 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졌던 틀이 이제 작가지고 맞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공지영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끈다.

"약간 깨달은 것 가지고는 삶은 바뀌지 않는다. 대개는 약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 결국 이렇게,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고통 말이다. 변화는 그렇게나 어렵다. 가끔은 존재를 찢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바뀌지않는 사람이 있는데, 대신 고통을 거부하려고 헛되이 싸우던 그가 망가지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공지영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를 향해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으며,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타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자 신기하게도 기도의 응답처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너의 자세는 무엇이냐? 이 삶을 바라보는 너의 방향은. 그가 성자가 된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신을 만나 황홀한 접선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은 성자가 아니라도 온다. 상처도 온다. 가난도 오고 멸시와 따돌림도 온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다. 성자가 될 것인지, 희생된 비참한 늙은이가 될 것인지."

공지영 작가는 성모는 하느님의 하늘을 낳아서가 아니라 그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놔두고, 내버려두고, 그리고 떠나보냈기에 거룩한 어머니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지영 작가는 인생에서 얻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백배는 더 어렵고, 그중에 제일 어려움 것이 아마도 자식일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한때 나도 아이들에게 집착한 적이 있었다. 내가 불행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바리사이 같은 엄마가 되었다. 아이의 성적을 위해 밤늦도록 매를 때려가며 가르치려고 한 일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버릇없이 굴면 가차 없이 벌을 주었다. 나중에는 엄격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방식을 바꾸었다. 방황하는 사춘기 아이를 위해서 그 애 학교 운동장 담벼락을 돌며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 유명한 집착이라는 것이구나, 이게 그 유명한, 남을 내 마음대로 하고, 아이에게 내가 몸소 하느님이 되어 그 애의 고유한 생김새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교만의 죄구나, 싶었다. 내 긴긴 기도도 실은 집착의 다른 포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공지영 작가는 고통은 몇 가지 특별한 해악을 우리에게 끼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지영 작가는 어느 날부터 고통이 유혹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공지영 작가는 고통은 우선 첫째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악심을 불러일으키고, 두 번째로 우리로 하여금 남을 판단하게 만들고, 세 번째로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며 사랑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통은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공지영 작가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공지영 작가는 해가 있어야 싹이 튼다고 생각하지만 어둠 속에서야말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난다는 것, 이것은 정말 위해단 일이며, 그러니까 우리는 밤에 자랐고, 고통 중에 성숙했고, 아프고 나서야 키가 반 뼘쯤 자란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자신에게 은둔, 인간에 대한 혐오와 절망, 사회에 대한 공포심 어린 경멸, 모든 만남에의 거절과 취소는 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말하곤 했었다.

"자라. 자고 나면 나아 있을 거야."

자고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바지가 껑충해지고 옷소매가 짧아져 있기도 했다. 비단 인간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하동에 와서 살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아랫집 감나무가 초록초록 했고, 자고 일어나면 길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기도 했다."

공지영 작가는 성지순례를 다녀온 다음날 반려견 동백이의 전 주인과의 소동이 벌어졌던 일을 생각했고, 밤에 잠이 깨어 문득 올려다보았는데 별빛에 눈이 시렸다고 말한다. 공지영 작가는 달도 없는 밤에 별빛이 홀로 저렇게 맑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고, 몸이 뻐근하고 아프고 놀랐지만 엄청난 핵복감이 자신에게 밀려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크신 어떤 분이 공지영 작가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의 눈빛 같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크고 밝은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단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하고.

"천사가 일어준 대로 그분은 거기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살아나셨고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야로 가셨다. 예수가 거룩하게 변모해서 초막을 지어서라도 머물고 싶은 타보르산이 아니고 갈릴래아, 권력층이 사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래아,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허탕을 치고 목동들이 양을 모는 그곳, 그러니까 이곳, 걸어가는 강아지를 낚아채고, 욕설을 하고 싸움이 일어나고 시비를 걸고 이 시골에서 뒷담화해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 폭력을 당해 간 경찰서에서 "폭력을 당한 건 아니지요?"라고 묻는 이곳, 여기 갈릴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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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 모리가 화요일에 다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
모리 슈워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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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는 전 세계 4000만 독자라 사랑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 교수가 학자가 아닌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사회학자이자 심리치료사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누구도 소외받지 않으며, 환경으로 평가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던 모리 교수는 삶을 마지막 날까지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의 시간이라 보았다. 나이 듦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앞으로 주어질 시간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바라는' '자기만의 세계'로 완성한다면 생의 어느 단계에 있든 큰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세상, 가족, 죽음, 자기 연민, 사랑에 대해 미치 앨봄의 목소리로 대신 전해 들었던 영혼의 가르침을 모리 교수의 육성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1장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는다, 2장 감정 밸런스 게임, 3장 인생이라는 하모니, 4장 멈추기, 보기, 듣기, 5장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6장 무엇이 두려운가, 7장 렛 잇 비, 8장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9장 멘시. 좋은 사람'이라는 9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는 65세 이상과 은퇴자를 주 대상으로 삼지만 그 외 모든 연령대에도 해당한다. 중년에게는 미래의 모습을 그릴 유용한 토대가 될 것이다. 현재 삶에 적용할 내용도 많지만 나이 든 부모를 더 잘 이해하고 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또 노인 생활 센터와 공동 시설에서 노후의 기회, 도전, 딜레마에 대해 집단 토론을 할 때 담당자가 참고할 만하다. 물론 젊은 독자들도 얼마든지 이 책에서 노후의 삶을 내다보거나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모리 슈워츠는 나이 들면서 우리는 모순되거나 상충하는 방향과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예컨대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욕구와 상충하고, 사회생활에 참여하려는 욕망은 집단과 거리 두고 싶은 마음과 충돌한다. 우리는 어떤 현실을 대하고 싶은지, 어떤 현실을 피하거나 부인하고 싶은지 갈등한다. 누군가에게 도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최대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서 의존하는 정도의 균형을 맞추려 애쓴다. 결국 우리는 희망을 품는 일과 절망에 지는 일 사이에서 갈등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양극성이나 상충이 아니라 노년기의 모습을 인정하고 융합하는 과정의 양면으로 볼 수도 있으며, 노년기는 이질적인 것들을 조율하려고 애쓰는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저자 모리 슈워츠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문제들과 타협하기, 잘 나이들기, 최대한 좋은 사람 되기를 추구할 수 있느냐는 활기 있고 희망찬 삶과 자신을 지치게 하는 절망적인 힘의 균형이 좌우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인 모리 슈워츠는 희망과 절망 사이의 두 딜레마 사이의 균형을 최대한 빨이 잡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삶에 적극적이고 충만하게 뛰어들라. 현실을 되도록 많이 대면하라. 최대한 자립하라. 미래를 희망적이고 낙관적으로 대하라. 친밀한 관계들을 유지하되 필요할 때는 고독을 누려라.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라. 비난, 고립, 공동체에서 멀어지려는 유혹에 저항하라. 의존을 최대한 피하되 필요할 때는 의지하라. 절망을 극복하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희망을 찾으라."

저자는 잘 늙고 최대한 멋진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지각'이라고 말한다. 지각을 확장하면 문제 영역을 구분해 해결책을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저자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자신, 타인들, 아는 것들에 대해 사고하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과 바깥세상을 반추할 수 있다. 삶에 대해 더 복잡하고 사고하고 다른 영역까지 이해를 넓힐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인간은 한평생 가까이 몽유병자로, 반만 지각한 채 자동 주행 장치를 가동한 것처럼 살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훨씬 더 지각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저자는 '멈추기, 보기, 듣기'는 지각 확장을 시작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되어왔으며, 지각 확장법으로 전체를 바라보기, 밖을 내다보기, 안을 들여다보기, 관찰한 것들을 파악하기를 소개한다.

"'멈추기'는 집중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보기'와 '듣기'는 온 마음으로 앞에 놓인 현실들을 관찰하고 돌파할 방도를 다양하게 시도하라는 의미다. 따라서 지각의 확장은 흐릿하거나 한눈 팔거나 부주의한 지각에서 직시하고 사려 깊고 또렷한 지각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그런 지각은 내가 하는 행위뿐 아니라 내면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하게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더 충분히 의식하고 단순한 습관 이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저자는 노인층을 모욕하고 차별하는 치욕적인 편견인 노인 차별의 개념을 확장해 '노인 낙인'이라는 용어를 도입하고 싶다고 말한다. 노인층에게 가해지는 제약과 배제를 규정할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저자는 노인 차별이라는 나쁜 낙인이 더애히면 새로운 신분이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이 신분은 노인에게 제약을 가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며,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사회와 격리시킨다. 저자는 따라서 우리 노인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노인 차별된 투영된 그림자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노년층을 향한 경멸은 우리 문화의 핵심 가치들을 반영한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미국 사회는 젊음을 숭배하며, 텔레비전 문화는 인격보다 외모를 추앙하고 평가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속도와 효율성에 대한 욕구는 노년층을 낡은 기계처럼 무용지물로 만든다.

"미국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여전히 핵심 가치로 평가된다. 독립성과 개인의 진취성을 높이 사고, 반대로 의존은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의존은 모든 지구 상 생명체의 현실이다. 완전한 독립이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모두 육체적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지구의 생명계와 상호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하려고 애쓴다. 노인층은 서로가 필요하며, 장수할수록 더 의존하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결국 우리는 가족과 도우미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 철저한 개인주의라는 미국식 윤리는 이런 미래상을 거부하고 노년층, 특히 의존하게 된 노인들을 평가절하 한다.

노인 차별이 만연한 또 다른 요소는 돈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이다. 우리는 가장 전능한 돈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에 산다. 여기에는 자존심, '가치'의 원천으로 고된 노동과 밥벌이를 필수로 삼는 문화가 포함된다. 은퇴해 수입이 없으면 사회는 우리를 실패자들, 즉 연금 수급자, 저도득층, 노숙자와 똑같이 취급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하찮게 생각하게 된다. 물론 어이없는 양상이다. 인간으로서 누구도 수입과 고용 여부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문제인 죽음에 대한 공포도 또 하나의 이유이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연령층인 노년은 음울한 필연성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려 애쓰기에 죽음은 물론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연상시키는 노인들을 거부한다. 노년층은 아직 늙지 않은 이들에게 장래의 이미지이며, 젊은이들은 이 이미지를 꺼린다. 그래서 미래가 보낸 메시지를 직시하가로 채근하는 메신저들을 모욕한다."

저자는 노년층과 노후에 대한 대토와 전망으로, 모든 인생은 소중하며 어떤 연령대이든 그 주인이 아름답고, 쓸모 있고, 보살피는 삶으로 가꿀 수 있다고 말한다. 독창적이고, 경험을 쌓고, 충만하게 지각하며 인간애를 발휘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저자는 내 인생, 건강, 자부심, 자존감, 삶에서 지속적으로 얻는 만족감은 남들의 그것들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공통의 인간애를 공유하며 인류에 기여할 게 많다. 저자는 살아 있는 한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존재로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술, 지식, 지혜 ,관점을 많이 갖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들을 분별하고 명예로운 윤리의식을 보전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고, 실패를 감당하고 성공을 축하할 수도 있다. 또 타인들을 민감하고 책임감 있게 대하며, 더 깊고 진솔한 자아를 접할 수도 있다."

저자는 노년기에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면 전에 없던 통렬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죽는 과정은 개념이나 관념을 넘어선다. 더 생생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저자가 맥서 러너의 저서 '천사와의 씨름'에서 죽음과 노후에 대해 말하는 글을 소개하여 인상적이다.

"노화는 생의 한 단계이며 죽음은 최종 상태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국과 더불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노화의 두려움은 누구나 잘 아는 두려움이다. 이 둘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노화는 그 여파로 생긴 병증들과 함께 임박한 죽음을 알리는 조기 경보체계가 된다. 죽음의 두려움은 에너지와 분주함이 생기도록 자극하고, 그 기운은 죽음의 공포를 가려준다. 노화에 대한 두려움, 즉 생활 반경을 좁히고 세상에 기여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두려움은 우리에게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을 재발견하고 여생을 더욱 만끽하라고 자극한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남은 삶 동안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중심에 둘지 재고하라고 부추긴다."

저자는 흔히 통증과 괴로움을 동의어로 보지만 둘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사망, 마음의 상처, 관계의 절연으로 인한 괴로움과 다리 골절, 치아 신경 치료, 중증 질환으로 겪는 통증은 같지 않다. 저자는 통증과 괴로움을 하나로 묶는 것은 '견딜' 수 없어서 죽을 것 같은 느낌과 극심한 거북함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그 과정에서 겪을 통증과 괴로움이 두렵다고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의 저자 모리 슈워츠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여 노후와 노후의 넘쳐나는 기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늘 바꾸고 싶었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돕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노화에 관한 지혜와 잘 나이 들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노령기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이 든 부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으로 인상적이다.

저자는 노후는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잘 살아내야 할 단계이며, 꽃피우려면 영원히 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의 과제는 노화의 어려움과 기회 속에서 각자의 필요, 관심사, 능력에 맞는 최선의 노후 생활 방식을 찾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모험에 나서는 데는 나이가 없으며, 늙었다고 해서 매력적인 신비와 수수께기를 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멘시,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여 눈길을 끈다. 저자는 '유대어의 기쁨'에서 멘시를 "반듯하고 영예롭고 고결한 사람. 중요한 인물, 감탄하고 본받을 인물, 숭고한 인격의 소유가. 진짜 멘시가 되는 열쇠는 바로 인품이다. 정직함, 기품, 올바름, 책임감, 예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다."라고 정의한다고 이야기한다.

"멘시가 되라는 것은 득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인이 되라고 채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취할 때마다, 최선의 인간형에 가까워질 때마다 희열을 얻을 수 있다. 예상컨대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삶의 질이 높아지고 만족감이 쌓여 자존감과 자기 존중이 커질 것이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는 노년기의 삶이 변화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저자 모리 슈워츠의 글을 만나볼 수 있는 책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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