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프롬은 자신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즉, 어떻게 사랑하는지 배우고 싶다면, 다른 기술이나 음악, 그림,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한 가지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이론에 따라 훈련하되, 실패시 문제점을 파악한 후 교정해 나가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다하더라도 완벽하게 숙달되기전까지는 배우려는 노력을 멈추어서도 안된다. 만약, 노력을 게을리하면 그 수준에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퇴보하고 만다. 그러므로 다음에 다시 시작하고자 할 때에는 멈추었던 그 지점에서가 아니라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쉽게 빠지지만 사랑을 제대로 하는 기술을 익힌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사랑의 기술을 마스터(?)한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은 열정'이라고 말할 때, '사랑은 헌신이요 희생'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할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한다.

애완동물이나 아기들의 사랑은 절대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대상을 사랑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에 따르는 헌신과 희생은 강요된 의무에 가깝다.(어느 한쪽의 헌신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사랑을 유아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부모의 절대적인 헌신과 희생 속에서 성장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사랑의 기술을 익힌 성숙한 성인의 경우에는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한 것'임을 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사랑에 헌신하고 희생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후에도 그 빈자리를 지킨다.  


우린 잘 알고 있다.

하나는 '사랑했다'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한다'라고 했을 때, 먼저 마음이 떠난 자가 오히려 인간관계의 주도권을 쥔 강자가 되어, 아직 마음이 떠나지 않은 약자의 관계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걸...

그리고 결국엔,

사랑이 지나간 빈자리엔 후회와 분노와 원망이 빠르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린 깨닫게 된다.

경멸도 증오도 아닌, 사랑때문에 단지 사랑때문에 상처입을 수 있다는 걸...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완벽하게 배워 익힌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진정한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면서, 스스로는 사랑에 울고 웃었노라 착각하며 떠나고 만단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이라 여겼던 건,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가장한 자기연민 혹은 나르시시즘으로, 완전한 사랑을 위한 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습이었다면, 더더욱 실패와 상처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실수없이 무언가를 배울 수 없고,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통달할 수 있는 진리란 것은 없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많이 아프다면, 상처 없이 사랑을 배우려고 했던 건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사랑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었고, 앞으로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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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땅의 겨울은 당락(當落)과 함께 시작되는 것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불안과 초조함으로 시험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던 겨울을 수없이 맞이했더랬다.


다행스럽게도 불합격보다는 합격의 소식을 더 많이 접했던 것 같은데, 이는 남들보다 시험운이 좋았다거나 실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목표를 낮춘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 실력보다 한 단계 높여 도전해야 발전이 있건만 내 실력만큼 혹은 그보다 낮게 목표를 설정하고 얻은 결과이니 그다지 내세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도전'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만큼은 무참해지곤 한다.


내 자신은 도전 앞에서 한없이 몸을 사리고 타협한 주제에 다른 사람들 특히 손아랫 사람들 앞에서는 '도전하라!'고 목청을 돋군다. 정말이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도전의 실패에 따른 상처는 오롯이 상대방의 몫이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만용'이 아닐까 싶다. 


이루지 못한 욕망이나 감추어진 욕망은 그대로 타인에게 투영되는 법이다.

학벌에 대한 좌절이 심한 부모일수록 자녀에게 학벌을 강조한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한마디를 덧붙인 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클수록 도전을 회피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도전을 부추긴다. 해결되지 않은 도전에 대한 미완의 욕망이 내재화된 결과다. 


요즘 흔들리는 청춘을 위로하는 에세이가 대세인가 보다.

명망있는 중년들의 말 한마디에 위로받을 청춘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터.

그러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땅의 중년 역시 막막하고 두렵고 흔들리기는 매한가지라는 걸 말이다.

고민에 대한 낯섦만 줄어들었을 뿐 고민의 무게와 방향은 변함이 없다. 함께 고민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것은 청년이나 중년이나 노년이나 똑같지 않을까.


누군가의 삶에 이정표가 된다는 건 영광스러우면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말을 아껴야 하리라. 그게 정답이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졸인 우리 부모님들이 명문대 출신 교수님들보다 인생을 더 잘 견뎌내신 이들일지도 모른다.

학연과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한국 사회에서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아픈 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운명의 돌을 내리 친 사람들이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젊다고 더 아픈 것도 아니고 나이 들었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다. 도전과 실패가 젊음의 전유물도 아니거니와 위로와 상담이 중년의 의무나 권리도 아니다.


물음표로 이어지던 삶이 중년에 접어 들어 마침표와 느낌표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도 결코 아니다.

우리 삶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제들이 순차적으로 해결이 된다면 애당초 종교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고민과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데 전지전능한 신에게 의탁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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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아프니까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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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알라딘중고서점 강남점까지 일부러 찾아갔더랬다. 내가 원하는 책이 입고되었기 때문이다.

정가의 1/2밖에 되지 않는 가격에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새것이나 다름없는 책을 품에 안았다.

바로 스티븐 킹의 <살렘스 롯>이다.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

 

<살렘스 롯>은 한가롭기만한 뉴잉글랜드의 한 마을에 어느날 갑자기 흡혈귀가 출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언뜻 보기에 그렇고 그런 공포소설로 보이지만 작품이 던지는 주제의식은 사뭇 묵직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더 전에 쓰여진 작품이건만 놀라우리만치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추고 있다.

 

다들 요즘 뉴스 보기가 겁난다고 한다. 그 어떤 공포추리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훨씬 더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강력범죄들은 마치 인간이 아닌 혹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또 다른 '인종'에 의해 저질러진 것만 같다. '괴물의 탄생'이라는 선정적인 부제처럼...

 

다시 스티브 킹의 작품 얘기로 돌아가보자.

일찍이 스티브 킹은 인터뷰에서 <살렘스 롯>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흡혈귀 자체가 아니라 흡혈귀의 출몰을 불러온 '마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통과 교류가 단절된 마을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며 경쟁 일변도로 치닫는 마을...

스티븐 킹은 작품속에 흡혈귀를 등장시켜 소통 부재인 현대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4가구 중 1가구가 1인가구라고 한다. 앞으로 20년 뒤인 2030년이 되면 그 비율은 1/3로 높아질 전망이란다.

다닥다닥 벽을 마주하고 들어서 있는 집들...

서로 서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익명의 바다...

일대일 대면접촉보다는 최첨단 기기를 통한 간접접촉이 주류가 된 사회...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소위 '괴물의 탄생'을 부채질한 건 아닌지 되돌아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강력범죄자들은 가족과 인연을 끊고 혼자 생활해 왔으며 변변한 직장이나 친구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사회적 관계망의 부재야말로 괴물의 탄생을 불러온 온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참고로,

흥 미로운 점은 얼마전에 자수한 한 용의자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로 아버지가 공개수배사진을 보고 아들임을 직감한 후, 아들을 설득하여 자수하게 했다고 한다. 만약 이 아버지가 자식의 범죄를 모르는 척 했거나 아니면 '너 같은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며 외면했다면 그 용의자는 아마도 서서히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범죄를 반복하면서 멀지 않은 미래에 괴물로 변해가지 않았을까.

 

가족의 역할과 의미 그리고 부모의 역할과 도리는 무엇이며 인간의 길은 또한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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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가을이다.

장르추리소설을 탐독하다 문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쪽빛 하늘만 계속되었으면 싶다.

그럼, 그 하늘 아래 세상도 아름답기만 할 것같은데...

 

 

ㅡ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을 읽다가 문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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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두편씩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봤다는 신경숙 작가.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독서 이력서에는 고작 단 한줄뿐이다. 1985년 <겨울 우화>로 데뷰한 작가가 1993년 발표한 단편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내가 읽은 작가의 작품 전부이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한창 '문학열'에 불타 있던 때에 우연히 찾아 들었던 그녀의 강연이 한없이 '우울'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나에게 깊이 새겨진 작가의 이미지는 우울과 몽상 그리고 나약함이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다시 내 곁에 찾아왔다. 한창 기승을 부리는 꽃샘 추위와 함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옌례커의 <딩씨마을의 꿈>, 요시모토 바나나의 <호수> 등과 함께 '2011년 맨아시아 문학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이후 마침내 최종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기까지는 국제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여타의 소식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탈북자 북송 문제가 쟁점이 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주해군기지 건설 찬반논란과 한미FTA발효 등으로 언론의 관심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시점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지난 3월15일.

한 미FTA가 발효되던 그날 홍콩에서 열린 '맨아시아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신경숙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단다. (신경숙 작가의 수상소감 전문을 중국어로든 한국어로든 혹은 영어로든 구하려고 검색을 했지만 구할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동시통역사가 말을 받았다. "지금 생존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 다시 북송되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콘래드호텔 7층 시상식장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가던 참석자 100여명이 허리를 세우고 수상자를 바라봤다. 신경숙이 말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조선일보 '만물상' 中-


'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깊은 슬픔에 빠져, 마치 세상과 담 쌓듯이 도 닦듯이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는 이기적(?)인 작가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녀의 수상소감은 그 유명한 하루키의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소감인 '벽과 알'에 버금가는 '힘'이 느껴졌다.


저는 오늘 한명의 소설가, 그러니까 전문적인 거짓말쟁이로 여기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물론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정치가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

(그러나) 오늘은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예루살렘 상을 받으려고 여기에 가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심지어 만일 간다면 사람들에게 제 책을 사지 말라고 선동하겠다는 경고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론 그 이유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때문입니다. UN은 봉쇄된 가자의 거리에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비무장한 일반 시민들, 어린이와 노인들이라고 발표했습니다.

(......)

수상 통지를 받은 후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스라엘로 여행을 가고 문학상 수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이 충돌상황에서 제가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인상을, 그것도 내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국가의 정책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인상을 주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전쟁도,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당연히 제 책들이 보이코트 당하는 것들 보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심사숙고한 끝에 여기까지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그러나 한 가지 굉장히 개인적인 메시지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 조각에 적지도 벽에 붙여 놓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니까 그건 내 마음의 벽에 각인되어 있는 말인데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

“높고 단단한 벽과 그것에 부딪쳐 깨진 계란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계란 쪽에 서겠다.”

그래요, 그 벽이 얼마나 옳거나 그 계란이 얼마나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계란을 지지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결정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시간이나 역사가 그렇게 하겠지요. 만일 어떤 소설가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벽을 지지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 작품에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

어느 정도는 우리들 개개인이 계란이라고. 우리들 각자가 독특하고 대체불가능한 영혼을 담은 깨지기 쉬운 계란껍질이라고. 이것이 나의 진실이고 여러분 각자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정도야 어떻든 모두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벽의 이름은 뭘까요? 바로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벽은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되고 우리를 죽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죽이게 만듭니다. 차갑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며,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개인들이며 시스템이라는 단단하고 높은 벽과 마주하고 있는 깨어지기 쉬운 계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우리에게 승리의 희망은 없습니다.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강력하며, 그리고 너무나 차갑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타인의 영혼의 절대적인 유일함과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온기로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각자는 느낄 수 있고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런 영혼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이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입니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by 무라카미 하루키 中-


그렇다! 

신경숙은 정말 약하디 약한 작가이다. 더 이상 '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벽의 일부가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대한 '벽' 앞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마는 약하디 약한 계란의 편에 섰다.



여기 또 한명의 작가가 있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또한 중국인이 아니기도 하다. 이름은 아라이(阿來), 고향은 쓰촨성 서북부 티베트 자치구인 마얼캉현.


중국어에는 '一方水土一方人'이란 표현이 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인 아라이의 작품은 전혀 중국적이지 않다. 중국 소설 특유의 익살이나 허풍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고 서사적 구조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다. 중국인에 의해 중국어로 쓰여진 소설이 '중국'답지 않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작가가 그만큼 중국인의 색채를 띄고 있지 않거나 중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티베트인인 작가의 작품이 '중국적'이지 않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티베트인은 중국 한족과는 전혀 다른 생활풍습과 종교와 사유세계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당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아라이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고 오롯히 티베트적인 분위기에 젖어 보려 노력했으나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티베트와 티베트인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적고 얕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라이의 작품은  신(新),구(久) 시대의 변화와 위협받는 민족 정체성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아려한 아픔을 자아낸다.


'거라'는 빈총을 내던지면서 소리쳤다.

"왕! 왕왕!"

"왕왕! 왕!"

그가 흉내낸 사냥개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낭랑하게 숲 전체를 가득 채웠으며, 그 누구도 자신을 침범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 동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거라가 오늘 총을 쏜 것이 처음이라면 개 짖는 소리는 마을 전체에서 제일 잘 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개짖는 소리를 배웠다. 사람들이 말했다. "거라, 한번 짖어봐."그러면 거라는 왕왕 짖어댔다.

(.....)

"거라는 자신이 엄마와 똑같이 피를 흘렸고 엄마와 똑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밖에선 눈 내린 뒤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방 안에선 화로 속의 불꽃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는 아들과 엄마의 피냄새가 떠다녔다.

(.....)

엄마가 말했다.

"그 곰 정말 크더라."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많이 아팠어요?"

"많이 아팠지. 듣기 괴로웠나 보구나?"

"아니에요. 엄마"

엄마가 눈물을 반짝이면서 머리를 숙여 거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의 몸에서 젖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거라의 몸에서도 한약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아라이, <소년은 자란다> 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년 '거라'와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동생을 출산하는 엄마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피'이다. 소녀가 출산의 고통을 겪은 후 여자로 거듭나듯, 소년 역시 사냥을 통해 남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는 사이, 동네 아이들의 사냥을 따라갔다가 무섭게 자신을 추격하는 곰을 쓰러뜨린다. 진정한 남자의 길로 자신을 이끌어줄 아버지가 없는 소년은 이렇게 스스로 성장한 것이다. 마치 엄마 '쌍단'이 떠돌이 몸으로 지촌 마을에 정착하여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들 거라를 낳고 또 다시 거라에게 예쁜 여동생을 낳아주었듯이...

 

아라이의 <소년은 자란다>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짧은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주제의식과 함께 시각과 청각 뿐만 아니라 후각적 효과까지 뛰어나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기-승-전-결에 따른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명작 한편을 접한 기분이다.  

 

훌륭한 작가는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주제를 구현한다'고 했던가.

이 점에서 볼 때, 아라이는 자신이 성장한 티베트 마을 지촌에서 겪은 경험을 배경으로 '인간과 삶'이라는 주제를 아주 잘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그의 작품은 고작 한편 뿐이다. 언젠가는 그의 '진정성'이 세상에 전해질 날이 반드시 오겠지만, 만약 그가 '계란의 편'에 서게 되고 또한 그 이유 하나만으로 거대한 '벽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우린 영영 그의 작품을 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하여, 나는 조급하게 중국어로 출판된 아라이의 작품집들을 사방팔방 수소문하여 소장하려는 것이다.

.

.

.

신경숙, 하루키 그리고 아라이...

내 마음 속에 두고 두고 기억될 작가들이다.

왜냐하면,

'성공이란 타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란 말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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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을 버리면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말이 있다. 너무 잘 하려고 할수록 역효과가 난다는 의미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뭔가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수 연발이요, 꼭 합격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 오히려 합격권에서 멀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우리 속담에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있다'는 말처럼 '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사심 즉 생각이란 행동을 유발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역시 주객이 전도되어 사심(생각)에 빠져 집중력이 떨어지고 행동에 방해가 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걸까?

마음을 쓰면 쓸수록 마음만 다친다. 전심전력이란 말은 '온 마음을 다해서'이지 '온 마음을 채워서'가 아닐진데 어느덧 마음속엔 욕심만 가득 차있다. 이러하니 몸이 가벼울 리가 없다. 한 걸음 떼어 놓기에도 힘에 부치는 몸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뭔가 이루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그런데 마음을 비운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마음을 '턱'하니 비워버리면 뭔가 하고자하는 의욕마저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러니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한다고 하나보다. '비우는 것'과 '비울 줄 안다'는 것은 언뜻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비우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반면, 비울 줄 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연습하고 배워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혹은 마음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명상도 하고 수행을 해서라도 자신을 오롯히 비우려고 한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서, 그렇다면 어째서 비우려고 하는가? 바로, 채우기 위함이다. 채운다는 것은 바로 뭔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비우지 않으면 안된다. 비운다는 건 바로 욕심과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나부터 도저히 욕심과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욕심과 욕망이야말로 하루를 견뎌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 자신을 도저히 비워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을 던지는 수밖에는 없다. 깡그리 비울 수 없다면 송두리째 던져버리는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욕심과 욕망을 도저히 저버릴 수 없다면 욕심과 욕망 속으로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욕망 즉 목표는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 버림 즉 '몰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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