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특히, 나에게) 편리하다는 것 쯤은 잘 알기에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거리감이 속절없이 좁혀지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갖고 있는 이들이다.

불안하고 두렵고....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도시를 스쳐가는 바람에도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을 뚝뚝 떨구는,,,

스스로를 지킬 힘도, 그럴 마음도 아직 갖추지 못한 사람들...  

 

흔들리는 그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말해주고 싶다.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때론 견딜 수 없이 두렵고 슬프고 또한 외로운 거라고,,,

 

그렇지만,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일지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꿈이 없는 삶일지라도 괜찮다고,,,

누구나 현실과 맞바꾼 소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기 일쑤라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거지같은 하루를 보내도,,,

일년을 그냥저냥 살아도,,,

괜찮다고,,,

 

산다는 건,

원래 영화처럼 소설처럼 멋지지도 근사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거라고,,,

 

그렇지만,

이처럼 별 것 없는 삶일지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직,

우리의 영혼은 잠들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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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십여년 전의 가까운 '과거'일 뿐인데 말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tv와 독서 혹은 신문 및 잡지 등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매개체였다. 그리고 간혹 흥미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어 추가로 알고 싶은 내용이나 궁금증이 생겨도 상황과 조건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담아둬야 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을 통해 즉시 궁금증이나 추가로 알고 싶은 내용 등을 접할 수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와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막연했던 궁금증은 명확해졌으며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문제해결 능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우리 삶 속에서 체험과 경험을 통한 내적인 성장은 더 멀어진 것 같다. 궁금증과 지적인 욕구를 너무나도 손쉽게 해결하다보니 오히려 호기심은 사라지고 생각하는 힘과 문제 해결 능력은 갈수록 결여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면서도 이게 '과연 스마트한 삶일까?'라는 질문을 불연듯 던지게 된다.

외식을 할때도... 쇼핑을 할때도... 여행을 갈때도...

우선 인터넷으로 소위 '정보'라는 걸 먼저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정보'가 알려준대로 '그곳'을 찾아가서 '정보'가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한다.  맞으면 기뻐하고, 다르면 화를 내면서 말이다.

 

소위, 낯섦을 통한 배움이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성장이란 접해보지 못했던 사물과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새롭게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즉, 기존의 지식과 지혜가 맞는지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어 더 큰 질서와 더 넓은 세계와 마주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는 언뜻 보면 유용한 것 같지만, 새로움(낯섦)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체험의 기회와 성장의 계기를 우리로부터 앗아간다. 우리가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에 집착하고 의지한다는 건, 바꿔 말하면 '낯섦에 대한 거부요, 새로움으로부터의 도피'라 하겠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기를 멈춘 채 인터넷의 정보를 확인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를 '스마트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인터넷 보고 찾아갔는데 맛은 별로.'라던지...

'인터넷으로 본 모습과 실제 모습이 똑같네.'라던지...

'인터넷에서는 이러저러 하더니 실제는 저러이러할 뿐.'이라던지...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수많은 시행착오을 거치면서 마침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도전과 실패를 통한 성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패와 거듭된 도전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배워나가는 것 대신 타인의 지식과 지혜(인터넷의 정보)에 무임승차하여 단 한번의 선택과 시도가 곧장 성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심지어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비문명적인 인간으로 치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인간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인간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뢰의 부재'라고 하겠다. 신뢰란 서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만 가능하며 이런 관계는 함께 한 시간과 경험의 깊이와 두께로 결정된다.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서로 천천히 이해하고 알아갈 때에만 생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요즘은 SNS등으로 소통은 활발해졌으나 인간 관계는 빈약해졌다.

접속이 쉽고 빠른 만큼 관계 단절 또한 간편해졌다. 해고도 이별도 문자로 한다. 이를 두고 서로 어색하게 얼굴 맞대지 않아서 좋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인간관계가 편리함(?)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말그대로 인관관계 또한 소비하는 극단적인 소비사회를 맞이하게 될 뿐이다. 아니, 이미 이런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하리라. 개인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소설네크워크)를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고 심지어 생중계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현대인이 이렇게 SNS에 사생활을 공개하는 건, 그만큼 외롭다는 방증이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지만 1:1 대면접촉은 낯설고 불안하다. 일단 나와 다른 사람은 두렵고 무섭다. 어느 순간, 타인은 나와 또다른 세상을 연결해주는 매신저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침범해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남'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거울이요 창(窓)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남'이란 나의 세상 너머 존재하는 그러므로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낯선 대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안쓰럽게도 상처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나의 세계 밖에 있는 외계인과도 같은 대상과 끝없이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너무나도 '스마트'하고 '스피드'하다. 바야흐로 인간관계 또한 인스턴트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한마디로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접속하지만 관계부재 소통부재의 사회라하겠다. 이를 엄기호라는 학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단속(斷續)사회'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는 동명저서 <단속사회>에서 현대사회를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타인의 고통처럼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외면하며 개입하려 하지 않는, 소위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차단하고 동일성만 추구하는 단속사회'라고 정의한있다.

 

바야흐로, 우린 모두 단속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과 기술의 결합으로 탄생한 현대사회의 '편리함'이야말로 우리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접속과 차단을 수시로 하면서도 또 다른 타인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포기한 댓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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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인터넷으로 영화 한편을 봤다.

이유는 작년 말 극장에서 봤던 영화와 여러모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하나는 바다에서 일어난 조난을 다룬 영화고, 또 다른 하나는 우주에서 일어난 조난을 다룬 영화다. 둘 다 등장인물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자연에 복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헐리우드산이지만 헐리우드적이지 않은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둘 다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건져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이는 아마도 등장인물과의 감정이입에 충실했던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감독의 '배려'이리라.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는 매순간 소멸('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이 과정에서 생명체의 승률은 아쉽게도 절반을 넘지 못한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전승에 가까운 성공률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결국 인간도 소멸을 피할 순 없다.

 

두 영화속 주인공들 역시 예기치 못한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 치다가 결국엔 '죽을 준비를 한다'.  한명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음을 고백하는 유서를 적은 종이쪽지를 유리병 속에 담아 바다위에 띄우고... 또 다른 한명은 지구로 돌진하는 우주선 안에서 사고로 먼저 떠난 4살짜리 딸을 떠올리면서 "I'm ready!" 라고 외친다. 이 단 한마디가 어찌나 가슴을 파고 들던지...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를 내리치는 것처럼 돌직구가 되어 내 마음속으로 날아들었다.

 

러시아가 자국의 인공위성을 폭파시킴으로써 야기된 재난으로 우주 미아가 된 주인공이 중국의 우주정거장 티엔궁으로 피신하고 중국의 우주 비행선 선저우를 타고 지구로 불시착한다는 내용에 소원해진 미-러 관계와 긴밀해진 미-중 관계를 순식간에 떠올린 못쓸 직업병(?)조차 용서가 되더라.


나에게도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I'm ready!"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치지 않으면, 그날 하루를 견뎌내기 힘들었던 절망의 나날들이 있었다. 하루하루 매순간을 몸부림치며 죽을 듯이 이 악물고 참아내던 시간들...

한때는 상처였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내몸 구석구석을 떠다닌다.


난, 실패 많이 한 사람이다.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것도 아니고, 인내심이 남들보다 강한 것도 아니었다. 

남들은 한번에 합격하는 사소한 시험에서도 자주 고배를 마시곤 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도 쉽지 않았다. 국문학이란 게 배울 땐 재밌었는데 막상 밥벌어먹으려니 쓸 데가 없었다.

 

독서와 문학으로 다져진 예민한 감수성이 오히려 독이 되어 무수한 거절과 실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나를 공격하고 무너뜨렸다.

접시물처럼 얕디 얕지만 현재 나를 지켜주는 내 지식의 원천과 자긍심의 발로는 사실 수많은 거절과 좌절 속에서 시작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섣부른 성공은 교만을 부르지만 진정한 실패는 교훈을 준다.


각설하고...


한편, 이 두편의 영화는 모든 철학 종교 예술의 영원한 테마라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인간은 결국엔 죽을 건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 

결국, 소멸하는 존재라면 이렇게 살다가나 저렇게 살다가나 매일반이지 않은가....?

 

맞다! 결과는 동일하다.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이 어찌됐든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죽으며, 이 결과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바뀔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혹은 '저렇게' 라는 삶의 과정일 뿐이다.

 

정해진 결과에 가변적인 과정!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운명이고, 결과(죽음)를 바꿀 순 없지만 그래도 과정(삶)에 열중해야 하는 이유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죽기'때문이다.

 

인간의 위대한 도전과 수많은 발견 그리고 창조는 인간의 유한성에 기초한다.

만약, 우리가 소멸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인류의 모든 신과 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물주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 조물주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단 한번뿐'인 삶의 매순간 순간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 감각세포를 발달시키고 감정선을 극대화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소멸하는 '나'의 존재를 영원히 각인시키기 위한 작업이나 노력도 게을리 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나의 삶을 타인의 삶과 구분짓기 위한 그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어떤 것에도 감동받지 않고 아름다움 또한 느끼지 못하는 불멸의 존재로 존재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짜르트의 선율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주보다도 넓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작품들도 없었을 것이고...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그 모든 예술적 행위들과 감동의 스포츠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아름다운 건, 불멸의 존재가 아닌 소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특별하고 소중한 건, 결국 언젠간 사라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가족이, 혹은 친구가 끔찍하게 좋은 이유 역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꽃이 예쁜 건 언젠간 지기 때문이듯 말이다.

우리가 삶의 결과가 아닌 삶의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하는 이유 역시 결국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이유 하나때문에 특별하다.

 

영화 <올 이즈 로스트>와 <그래비티>가 특별한 건,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즉, Are you ready? 를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상기하게 만든다. 

이 질문에 응답할지 말지... 만약 한다면 어떤 답을 할지는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감동적인 것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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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이유없이 거부받는 일만큼 억울하고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아픈 경험들을 한두번쯤 갖고 있으며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리고 때론 상처가 아문 후에도 각인처럼 심한 흉터가 남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기적이라서 내가 '받은' 상처만 기억할 뿐, 내가 '준' 상처는 금방 잊고 만다.  마치, 땅에 떨어지자마자 사라져 잊혀지는 눈송이처럼...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듯, 이유 없이 미운 사람도 분명 있다.

특별히 못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 그 어떤 악의를 표시한 적도 없건만, 그냥 만난 그 순간부터 무조건 싫은 사람...

이런 사람, 분명 있다.

 

내가 악의적 감정을 갖고 상대방을 위기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저 멀리하고 싶을 뿐이다. 그냥 내 시야에서,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면 그뿐이다. 

 

이런 감정....

불편하고 피하고 싶지만 종종 마주하게 된다.

 

일회적 접촉이라면 별 상관없겠으나 이런저런 인연들로 묶여있거나 일적으로 일정 기간 반드시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상대가 나보다 연배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면 오히려 천만다행이다. 특히, 위계질서 속에서 상대가 '上'이고 내가 '下'라면 더욱더...

 

상대방을 실컷 미워하고 아무리 저주해도 세상이 나를 용서해줄 것 같은 터무니 없는 당당함이 마음속에 슬그머니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은 이런 '못난(혹은 못된)' 감정에 너그러운 편이다. 

 

문제는...

상대가 나보다 아래 사람일때다. 

나이도 지위도 능력도 월등히 내가 앞서 있으며, 상대는 내 도움과 호의를 원하거나 필요로 한다. 절대적은 아닐지라도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커다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그를 고양시킨다. 이런 경우, 나의 감정은 세상으로부터 면죄부를 구할 수 없다. 이해는 커녕 손가락질만 되돌아올 뿐이다.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마음속 깊은 감정일 뿐인데, 지탄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다소 억울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만 억울함과 함께 남몰래 밀려오는 죄책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죄책감에 솔직한 내 감정은 저만치 떠밀려 흘러가 버린다.  

 

 

 

ㅡ나의 감정을 감춰야 하나?

(좋아하는 감정처럼 싫어하는 감정 역시 숨길 수 없는 법이지...)

 

ㅡ상대방을 좋아하도록 노력해야 하나?

(감정이 노력으로 바뀌는 거 봤어...?)

 

ㅡ그럼, 어떡하지...?

(정답은 없어. 다만, 선택만 있을 뿐...)

 

 

이처럼 우리는 늘 '감정'에 휘둘린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거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죄책감마저도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한증식하여 폭발하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저는 도덕적 의무감과 사회적 체면 그리고 솔직한 감정 사이에서 감정을 선택하는, 감정적인 너무도 감정적인 사람입니다.'라고 큰소리로 고백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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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열정, 겸손, 용기, 정직, 솔직, 희생, 지혜...

모두 기꺼이 높이 평가받아야 할 품성이고, 멘토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격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용기는...

단순히 위험을 무릅쓰는 용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타인에게 베풀어지는 너그러움인 겸손이나 관용도 아니요,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나 거짓없는 솔직함도 아니다.

 

오히려 용기는 이와같은 이타적 행동으로 얻게 되는 개인적 존중이나 존경 혹은 자기 만족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 심지어 비난을 이겨내야만 하기에 개인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행동이다.

또한,

용기는 거짓없는 솔직함으로 나타나지만,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기에 정직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위대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품성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찾아왔더랬다.

나는 인내와 열정을 마주한 바 있으며, 희생과 정직도 잘 알고있다. 

항상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날 필요로하고 날 찾을 때마다 때론 기꺼이 혹은 억지로 맞이했더랬다.

 

용기 역시 여러차례 나를 찾아왔더랬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머뭇거렸고 뒤로 숨었으며 심지어 고개돌려 외면하기까지 했다.

용기는 나를 여러번 선택했으나, 난 단 한번도 용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용기 앞에서...

나는 여러번 도망쳤고...

수없이 무너졌으며... 

한없이 작아졌더랬다.

.

.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건, 개인적 의무감과 사회적 책임감으로 진정한 용기를 내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멘토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진정한 용기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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