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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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 세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의 편리함과 컴퓨터를 인류 두뇌의 대체물로 확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1부에서는 문자와 도구가 인류의 사고를 어떻게 확장시켰는지를 다루고 있다. 기록 이전의 시대 즉 문자가 없던 시대에 인류의 지혜는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인류의 기억력이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기억력에 의지하여 연설을 통해 지혜를 전수시켰다. 그후, 문자가 탄생하고 기록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두뇌의 기억력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플라톤이야말로 글쓰기를 통해 사상 체계를 이루고 전달한 최초의 학자일 것이다.


완전한 구어 문화에서 사고는 인간의 기억력의 지배를 받는다. 지식은 기억해내야 하는 무엇이며, 기억해내는 대상은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 내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문자 없이 살았던 수천 년 동안 언어는 개인의 기억 영역에서 복잡한 정보를 저장하도록 하고, 말을 통해 이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기 쉽도록 진화했다. 진지한 생각은 기억 쳬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반면, 글로 쓰여진 말은 개인의 기억력이라는 속박에서 지식을 자유롭게 했고 기억과 암송을 위한 리드미컬하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시켰다.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인간 잠재력의 보다 완벽하고 내적인 실현을 위해 진정 핵심적인 것이었다. 글쓰기는 의식을 고취시킨다.

-<생각하지 핞는 사람들> '문자, 새로운 사고의 도구'中-


니콜라스 카는 학자들이 실시한 의미있는 실험이나 논문들을 인용하여 깊이 있게 몰입해서 문자을 읽을 때 인간 두뇌의 시냅스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반면, 인터넷에서의 글읽기는 몰입과 사색을 방해하며 장시간에 걸친 집중적인 읽기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검색과 같은 반복적인 작업은 우리의 뇌구조까지 바꾼다는 것이다! 사실,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넷에서 정보와 정보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만 다닐 뿐, 의미 있게 정보를 활용하고 재생산하는 일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되지 않았는가.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인류는 예전처럼 많은 정보들을 뇌속에 저장하려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망각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건 인류는 스스로 컴퓨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생각하는 힘을 컴퓨터에게 위임한 후 컴퓨터에 속박되어 있는 노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을 인터넷에 아웃소싱하는 것을 환호하는 이들은 은유를 호도하고 있다. 그들은 생물체의 기억이 지닌 근본적으로 유기적인 인격을 간과한 것이다. 정말 기억을 풍부하게 하고 그 특징을 형성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비함과 연약함뿐 아니라 우연성 때문이다. 몸이 변하듯이 변화하면서 시간 속에 존재한다. 기억을 되살리는 바로 그 행동은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만드는 단백질 형성을 포함하는 모든 강화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셉 르두가 설명했듯이 "기억을 하는 뇌는 기억을 처음 형성하는 그 뇌가 아니다. 오랜된 기억을 현재의 뇌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은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검색과 기억' 中-


또한 저자는 구글 북서치 즉, 구글도서관이라 불리우는-도서관의 종이책들을 스캔하여 검색과 이용 서비스를 제공하려는-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책의 미래> 저자인 로버트 단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하버드 강단에 서며, 도서관 시스템을 관장하고 있는 로버트 단턴은 이렇게 말한다. "구글과 같은 사업체는 도서관을 단지 학문의 전당으로서만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도서관을 발굴 준비가 된, 자신이 '콘텐츠'라 부르는 것 혹은 잠재적인 자산으로 본다." 그는 이어서 비록 구글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증진시킨다는 찬사받을 만한 목표를 추구해 오긴 했지만 이윤 추구를 위한 기업에 철도나 철강도 아닌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독접을 허락한다는 것은 너무 많은 위험을 수반한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구글이라는 제국' 中-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를 읽었을 때는 솔직히 핵심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로버트 단턴이 인류를 위해 한, '위대한 행적'을 깨닫게 되었다. 즉, 인류에게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천사의 선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서을 쓴 조지 다이슨은 구글플렉스를 방문한 후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안락함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행복한 골든 리트리버들이 잔디 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스프링클러 사이를 느긋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고, 도처에 장난감이 널려 있다. 나는 이내 생각지도 못한 악마가 어두운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지상으로 내려온다면 몸을 숨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 같은 반응은 분명히 과하긴 하지만 이해할 만하다. 구글의 엄청난 야심과 어마어마한 자금 그리고 지식 세계에 대한 제국적인 디자인과 함께, 구글은 우리의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 또한 담고 있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세르게이 브린은 "어떤 이는 구글이 신이라고 말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또 어떤 이들은 악마라고도 합니다."라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구글이라는 제국' 中-


1544년 경. 금 주조 기술자였던 구덴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종이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그 당시 지나치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와 독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인류를 게으르게 만들고 정신 세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처럼 구글의 '도서검색서비스'와 '인터넷의 편리함'에 가해지는 비난의 목소리들이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뇌를 컴퓨터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은 인류의 두 다리를 대신했던 기차, 자동차의 탄생이나 눈을 대신하는 망원경의 발견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망원경과 같은 발명품들은 인류에 의해 인류를 위한 편리함을 제공할 뿐 인류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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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언어 - 우리가 모르는 광동어 이야기 고려대중국학연구소 문화시리즈 5
조은정 지음 / 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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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준 중국어 일명 '만다린'어만 할 줄 안다. 그런데 홍콩과 광둥 지역을 포함하여 동남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화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광둥어이다. 사용인구가 1억명에 달한다고 하니 중국의 방언 중 가히 대표적이라고 할 만하다. 


평 소 광둥어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혀 있던 <장국영의 언어-우리가 모르는 광동어 이야기>를 집어 들었다. 고려대중국학연구소의 문화시리즈 중 제5권으로, 얄팍하여 두껍지 않고 일반인의 호기심도 자극할 만한 내용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글쓴이는 내 나이또래-적확하게는 나보다 한살 아래-로 성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대만국립사범대에서 광동어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광동어의 발음과 성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청각적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시각적으로 읽기만 하니 '수박 겉핥기식' 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나 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부분은 케짬(茄汁)->케첩(ketchup), 라이치(荔枝)->리치(litchi), 딤쌈(点心)->딤섬(dim sum), 다이퐁(大风)->타이푼(typhoon)등의 영어 표현이 원래는 광동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대표적인 서양 소스로 알고 있던 케첩이 원래는 광동 지역 어민들이 만들어 먹었던 해산물 소스 '케짬'이 서구로 넘어가 토마토를 주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지금의 토마토 케첩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표준중국어로는 토마토 케첩은 '판체장(番茄酱)' 이라고 하는 등, 위와 같은 유래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종성이 발달되지 않았고 특히  'ㅁ, ㅂ'의 받침을 소리낼 수 없는 표준 중국어의 특징때문에 의역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중국 북방에서 토마토는 주로 西红柿라고 하는 반면, 남방지방에서는  番茄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영어에서 들어와 중국어 단어로 자리잡은 경우도 있다. 대륙에서는 택시를 '出租车'라는 반면, 홍콩등 광둥지역에서는 '的士'라고 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원래 的士는 영어 발음 taxi와 가장 가까운 광동어로 광동 지역에서는 的士를 '땍시'라고 발음했던 것이다. 그 후, 的士가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택시를 의미하게 되었고 발음도 중국 표준 발음으로 '디스'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해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아직도 택시를 '出租车'보다는 '디스(的士)'라고 부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택시(taxi)->땍시(的士)->디스(的士)


이 밖에도 대륙 표준어와 쓰임이 다른 단어들도 상당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姑娘으로, 중국어로는 아가씨를 뜻하지만 광동어로는 '간호사'를 의미한단다. 이유인 즉, 과거 선교사들이 들어와 현대식 병원을 운영하면서 수녀들이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수녀들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가씨를 뜻하는 姑娘이 간호사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단다.


그리고 영어를 중국 표준어에서는 뜻으로 번역한 반면, 광동어는 음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쿠키(cookie)는 광동어로 콕케이(曲奇)인 반면, 표준 중국어로는 의역하여 '마른 떡'이라는 뜻의 '빙간(饼干)'이라고 한다. 이런 단어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한국어
 영어  광둥어
 표준 중국어
 젤리  jeiiy   嘟哩(찔레이)
 果冻(궈둥)
 스토로베리  strawberry  士多啤梨(사또뻬레이)  草莓(차오메이)
 넘버  number   冧巴(람바)  号码(하오마)
 바이올린  violin  歪乌连(와이우린)  小提琴(샤오티친)
 스탬프  stamp  士擔(시땀)  邮票(유파오)



젤리/찔레이, 바이올린/와이우린, 넘버/람바 등등 한국어와 광둥어는 영어 발음과 상당히 유사한 것에 비해, 의역한 표준 중국어는 원래의 영어 단어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발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에 표준 중국어로 표기된 외국인 이름이나 지명등 고유명사는 일일히 사전을 찾거나 검색하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설령, 의역하지 않고 발음대로 표기했다 하더라도 영어 발음에 가까운 광둥어에 비해 표준 중국어는 전혀 다른 발음처럼 들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베이커한무(贝克汉姆)가 축구스타 베컴(Beckham)이고, 지무카이리(吉姆凯利)가 영화배우 짐 캐리(Jim Carrey)라는 걸 발음만으로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반면, 광둥어에서는 베컴은 碧咸(빽함), 짐 캐리는 占基利(찜께이레이)라고 표기하고 발음한다 하니, 표준 중국어보다는 원 발음에 훨씬 더 가깝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만약 중국의 표준어가 지금의 북경지방언어가 아닌 광둥어로 결정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성조와 발음을 익히기 위해 훨씬 더 힘이 들었겠지만, 외국인 이름과 지명 등으로 혼란을 겪는 일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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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집의 살인 집의 살인 시리즈 3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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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우타노 쇼고는 1988년 <긴 집의 살인>으로 데뷰한 이래, 정통 추리소설(일명 '본격파' 추리소설)을 발표하면서 입지를 다진 작가이다. 특히, 2004년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기리워하네>로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과 제4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다.

 

 

<움직이는 집의 살인>은 <긴집의 살인>과 <흰 집의 살인>과 함께 '집의 살인'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이다. 화려한(?) 작가의 이력에 이끌려 배경 지식도 없이 집어든 책이어서 그런지 나에겐 상당히 느리게 책장이 넘어간 책이었다. 독자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야 추리소설로써 합격점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우타노 쇼고의 <움직이는 집의 살인>은 일단 나에게는 실패작처럼 보인다. 작가의 애독자들에게는 기대와 경애의 대상일수도 있는 괴짜 탐정 시나노 조지와 그의 활약상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결론부터 말하면, 시나노는 죽었다'는 도입부 첫문장마저 강렬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작품의 구성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시나노 조지의 친구인 이치노세 도오루는 신문을 통해 시나노 조지가 누군가와의 싸움 중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의 마지막 행적을 쫒아가는 형식이다. 이 부분이 다루어지는 작품의 맨 앞부분은 지나치게 밋밋하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눈치 빠른 독자에 막판 반전을 들킬 것을 우려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피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럼, 시나노 조지라는 인물은 어떻게 죽었을까?

 

시나노 조지는 '마스터 스트로크(masterstroke: 신기)'라는 극단에 스태프로 참여하게 된다. 극단은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라는 작품 공연으로 한창 바쁜데, 알고 보니 이 공연은 6년 전인 1983년 무대에서 창에 찔려 죽은 이자와 기요미라는 단원을 추모하기 위해 열리는 추모공연이었다. 그리고 공연장소는 최첨단 시절을 자랑하는 시어터 K1으로 결정되는 데, 시어터 K1은 죽은 이자와 기요미의 아버지인 건축가 야스노리 이자와가 사재를 털어 만든 것으로 무대가 360도 회전하도록 설계되었다.

 

 

운영자금이 부족한 극단을 위해 시나노 조지는 사채까지 끌어다 쓰면서 적극적으로 공연을 돕고, 그 과정에서 모리 교코라는 여성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공연 도중 모리 교코의 연출용 칼에 스미요시가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스미요시는 병원에 입원하고 경찰의 조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키가와 요스케의 고집으로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참고로, 다키는 기요미의 연인이자 그녀를 연극의 세계로 입문시킨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극본을 맡은 공연 도중, 실제로 죽고 만다. 극 중 칼에 맞는 라스트 신을 끝으로 컬튼 콜이 이어졌지만 결국 그는 일어나지 못한다.

 

 

스미요시가 무대에서 뒤바뀐 칼에 상처를 입으면서 공연은 뜻밖에도 입소문을 타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다키가 죽으면서 시나노 조지는 야스노리 이자와를 강력한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 이유는 야스노리 이자와가 딸의 죽음을 다키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시어터 K1의 무대의 설계자로서 그라면 충분히 360도 회전하는 무대를 이용하여 다키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시나노 조지가 죽는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나노 조지를 사칭한 인물이 죽는다. 반전은 정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사(情死)'를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

결국, 기요미와 다키 그리고 교코도 다 사랑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움직이는 집의 살인>이라는 작품은 놀라운 반전과 뛰어난 트릭으로 추리소설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가히 우타노 쇼고다. 그의 대표작품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작가로의 그의 재능은 이미 이 작품 하나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집중과 몰입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내린 판단으로는 아마도 그의 작품이 대화체 위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점과 비쥬얼(영상)을 중시한 글쓰기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배경과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지나치게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는 '복선'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이나 추측을 전개해 나갈 수가 없다. 즉, 추리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인 '두뇌 플레이'를 펼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만화나 영화 등으로 만들어진다면 책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을 수도 있을 것같다.

 

 

한 작품을 읽고 작가와 그의 작품성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섣부른 짓도 없으리라. 진작부터 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우타노 쇼고의 대표작인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기리워하네>를 어서 빨리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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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차이
연준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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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돈을 써가며 구입하진 않지만 한번쯤 진지(?)하게 눈길이 가는 책들이 있다. <사소한 차이> 도 아마 그런 종류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독서 계획표에 담겨 있지는 않지만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무심코 손이 가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만이 갖고 있는 비밀스런 습관이나 행동을 서른 세 가지로 요약하여 보여준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아직도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들처럼 훌륭한 습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작은 차이가 모이고 쌓여 커다란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이런 사소한 차이가 성공을 부르는 결정적인 요소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사소한 차이>와 같은 '처세술' 용 지침서들은 경쟁에 내몰려 있는 현대인들의 불안하고 조급한 심리를 잘 이용하여 마치 나도 책에서 언급한 좋은 습관만 갖는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2010년 상반기 <사소한 차이>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보이지 않는 차이>라는 책이 서점가에 등장했었다. 내용은 위대한 발명이나 아이디어의 탄생에 담겨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 나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책들은 일단 읽기에 부담이 없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에 누구나 공감하는 말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책읽기는 진정한 '독서'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을 덮으면 모든 내용들이 망각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무릇, 좋은 책이란 좋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독서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혹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끝없이 이어지는 진지한 질문과 대면하는 행위이다. 스스로 깨닫고 체득하지 않은 앎은 얄팍한 지식에 불과할 뿐, 진정한 지혜로 승화되지 못한다.


성공적인 삶을 절실히 바란다면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이나 처세술을 모은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인도하는 책들을 가까이 해야 한다. 생각의 폭과 넓이가 확장되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 역시 그만큼 커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막 책읽는 습관을 갖추기 시작한 독서 초보자도 아니요 처세술 서적을 가급적 멀리하려 노력해 왔고 또 나름대로 독서 목록과 계획을 갖고 있는 내가 냉큼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정독을 했다. 역시,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만들어낸 저자답다. 도서 구입을 위해 쉽사리 지갑을 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타성에 적은 일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는 이들은 일독을 해도 무방할 듯...


참고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범인과 초인의 사소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마감시한 이틀 앞당기기

2, 하기 싫은 일 3분 더하기

3, 가족과 함께 아침밥 먹기

4, 맨 앞자리에 앉기

5, 늘 펜을 가지고 다니기

6, 핸드폰 바탕화면에 목표 띄워 놓기

7, 약속 시간 15분 전에 도착하기

8, 노는 계획 먼저 세우기

9, 큰 소리로 먼저 인사하기

10,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일주일 안에 이메일 보내기

11, 이름과 직위를 정확하게 부르기

12, 신용카드 잘라 버리기

13, 평생의 동반자, 취미 만들기

14, 3초 기다린 후에 대답하기

15, 만장구치면서 듣기

16, 닫힘 버튼 누르기 않기

17, 한 숟가락 덜어내고 밥 먹기

18, 매일 다른 사람과 점심 먹기

19, 흘리지 않고 밥 먹기

20, 하루 30분 걷거나 뛰기

21, 배웅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기

22, 모든 대답은 '예'로 시작하기

23, 잠자리에 들기 5분 전, 스스로에게 질문 던지기

24, 5분 안에 꿈 일기 쓰기

25, 종이 신문 꼼꼼하게 읽기

26, 책 한권 가지고 다니기

27, 일주일에 한 번 다른 길로 출퇴근하기

28, 가만히 앉아 사람 구경하기

29, 컴퓨터 끄고 퇴근하기

30, 모르는 척해주기

31, 안 좋은 이야기는 이메일로 보내지 않기

32, 없는 사람 칭찬하기

33,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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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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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아사다 지로의 작품에 흠뻑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은빛비> <장미 도둑> <철도원> 등등... 그 당시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가슴 따듯한 지로의 목소리에 젖어 들곤 했다. 아마,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그의 작품들을 주기도 하고 또 추천도 상당히 많이 했었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에게도 감탄의 눈길이 저절로 갔다.


히라노 게이초로의 <소설 읽는 방법>이란 책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고 대출 예정에도 없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큼' 집어든 이유는 순전히 '양윤옥'이라는 번역가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녀라면 허접한 작품 따위를 번역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앞서 출간된 <책 읽는 방법>에 이어 나온 <소설 읽는 방법>은 얇은 분량이지만 상당한 독서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덤볐다가 '윽크ㅡ'하고 비명을 지르며 앞장을 다시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는 마치 자신에 대한 배경지식 하나 없이 순전히 번역가의 이름만 보고 고른 책을 고른 나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 나의 지성(知性)을 무참하게 뒤흔들어 버렸다. 문학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순수 문학을 추구한다는 히라노 게이치로에게 나는 보기좋게 한방 먹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마음먹고 날린 강펀치가 아니라 힘을 뺀 잽에 말이다. 


알고 보니, 1975년 출생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1998년 데뷰작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을 쏟아낸 무림의 고수였다. 엊그제 시내의 대형 서점에 들러, 따로 마련되어 있는 그의 서가를 둘러 보고는 나는 내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소설 읽는 방법>에 대한 서평이 자꾸만 자기 한탄조로 흐르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이해할 만큼의 독서 '깜냥'조차 안된다는 증거이리라. 부끄럽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더 나은 독서와 습작을 위해 몇 자 남겨본다.


일단, 히라노 게이치로는 <소설 읽는 방법> 제1부 기초편에서 소설에 대해서 '작은 것을  말하는 것(小說)' 즉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밑바닥을 작은 크기로 압축하여 농밀한 시간과 함께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 부유하며 마치 스스로 과거보다 훨씬 더 똑똑해졌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작고 사소한 이야기'인 소설은 어쩌면 불필요한 혹은 구시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소설을 읽고 싶어하고 또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지나치게 넓게 확대된 세상이라는 공간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좀 더 사랑하기 위함이 아닐까. 


만약, 순수문학의 힘을 굳게 믿고 있다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좀 더 많은 이들이 소설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설 읽는 방법>이라는 책을 썼다면 그는 100%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최소한 한명의 독자는 영원히 확보했으니 말이다.


그 는 소설 읽기의 방법으로 조류학자인 틴베르헌의 '네 가지 질문: 매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를 활용할 것을 권한다. 첫째는 '매커니즘'이다. 소설의 매커니즘이란 말 그대로 소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은 몇 명이며 배경은 어디이고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등... 지극히 작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발달'이다. 발달이란 한 작가의 일생에서 그 작품이 어떠한 시기와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이미 작고한 대가의 작품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이 상당히 유효하다. 최근 나 역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한 작품이 또 다른 작품의 탄생과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상당히 흥미롭게 유추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설 읽기 방식은 작품의 범주를 넘어서서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번째는 '기능'이다. 기능이란 작품이 독자와 작가 사이에 갖는 의미로 쉽게 말하면 바로 '장르'에 따른 구분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을 쓴 목적이나 의도일수도 있고 독자 입장에서는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일수도 있다. 예를 들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이유>는 현대 일본 사회의 가족해체 문제를 다루면서 현대사회의 병폐는 개인의 책임 못지 않게 그런 개인을 만든 혹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히라노가 언급한 소설 작품으로서의 <이유>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진화'란 문학사적으로 더 나아가 인류 역사적으로 그 작품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하는 점을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이란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역사책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또 다른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치듯 한 소설작품이 또 다른 소설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한 사람의 작가가 또 다른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다. 이 또한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소설을 읽는 네 가지 방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지만, 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느낌' 즉 감동과 동감이다.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감동받고 동감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난 후, 만약 서평을 쓴다면 무조건 '매우 감동했다'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무감동적인 것도 없으므로 서평을 쓰거나 소설을 창작하고자 하는 이들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네가지 방법을 숙지하고 소설 읽기에 적용해보는 것도 유의미한 시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밖에도 히라노 게이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롯'을 '화살표'에 빗대어 설명한다. 즉, 이야기의 큰 뼈대를 거대한 화살표라고 한다면 이 거대한 화살표는 작은 화살표들이 모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편, 화살표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주어+술어'라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결국 소설이란 '~는 ~이다'라는 궁극의 술어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장은 인물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도와주는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과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으로 구분되어 있단다. 즉,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은 '역방향 화살표'가 되겠고,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은 '순방향 화살표'가 되는 셈이다.


주 어 충전형 술어 문장이 많으면 인물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깊고 넓어져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만 자칫 이야기가 쳐지는 재미없은 소설이 되기 쉽고, 반대로 작품이 전반적으로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속도감은 있으나 인물에 대한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하여 독자와 등장인물, 작가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히라노 게이치의 표현대로 무릇, 좋은 소설은 '플롯 전진형 술어'와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이 군형 있게 배치된 작품이다.


<소설 읽는 방법> 실천편인 2부에서는 일본과 서양 작가들의 작품 9편을 대상으로,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론이 펼쳐진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와타야 리사의<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젊음 없는 젊음>,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일본문학 성쇠사> 중 <알고 보면 훨씬 더 무서운 '한나절'>, 후루이 요시키치의 <사거리> 중 '한나절의 꽃',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 세토우치 자쿠초의 <발> 중 '환',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미카의 <연공>등이다.


다만, 나는 이 아홉 편의 작품 중 그 어떤 것도 읽지 못했고 습작다운 습작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설명을 이해하는데에 솔직히 한계를 느꼈다. 그만큼 나의 지적 수준이 낮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분석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법학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소설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 이론과 분석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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