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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일찍이 나는 아사다 지로의 작품에 흠뻑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은빛비> <장미 도둑>
<철도원> 등등... 그 당시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가슴
따듯한 지로의 목소리에 젖어 들곤 했다. 아마,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그의 작품들을 주기도 하고 또 추천도 상당히 많이 했었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에게도 감탄의 눈길이 저절로 갔다.
히라노 게이초로의
<소설 읽는 방법>이란 책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고 대출 예정에도 없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큼' 집어든
이유는 순전히 '양윤옥'이라는 번역가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녀라면 허접한 작품 따위를 번역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앞서 출간된 <책 읽는 방법>에 이어 나온 <소설 읽는
방법>은 얇은 분량이지만 상당한 독서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덤볐다가 '윽크ㅡ'하고 비명을 지르며 앞장을 다시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는 마치 자신에 대한 배경지식
하나 없이 순전히 번역가의 이름만 보고 고른 책을 고른 나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 나의 지성(知性)을 무참하게 뒤흔들어 버렸다.
문학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순수 문학을 추구한다는 히라노 게이치로에게 나는 보기좋게 한방 먹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마음먹고
날린 강펀치가 아니라 힘을 뺀 잽에 말이다.
알고 보니, 1975년 출생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1998년 데뷰작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을 쏟아낸 무림의 고수였다. 엊그제
시내의 대형 서점에 들러, 따로 마련되어 있는 그의 서가를 둘러 보고는 나는 내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소설 읽는 방법>에 대한 서평이 자꾸만 자기 한탄조로 흐르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이해할 만큼의 독서 '깜냥'조차 안된다는 증거이리라. 부끄럽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더 나은 독서와 습작을 위해 몇
자 남겨본다.
일단, 히라노 게이치로는 <소설 읽는 방법> 제1부 기초편에서 소설에
대해서 '작은 것을 말하는 것(小說)' 즉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밑바닥을 작은 크기로 압축하여 농밀한 시간과 함께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 부유하며 마치 스스로 과거보다 훨씬 더 똑똑해졌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작고 사소한 이야기'인 소설은 어쩌면 불필요한 혹은 구시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소설을 읽고 싶어하고 또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지나치게 넓게 확대된 세상이라는 공간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좀 더
사랑하기 위함이 아닐까.
만약, 순수문학의 힘을 굳게 믿고 있다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좀 더 많은
이들이 소설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설 읽는 방법>이라는 책을
썼다면 그는 100%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최소한 한명의 독자는 영원히 확보했으니 말이다.
그
는 소설 읽기의 방법으로 조류학자인 틴베르헌의 '네 가지 질문: 매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를 활용할 것을 권한다. 첫째는
'매커니즘'이다. 소설의 매커니즘이란 말 그대로 소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은 몇 명이며 배경은
어디이고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등... 지극히 작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발달'이다. 발달이란 한 작가의 일생에서 그 작품이 어떠한 시기와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이미
작고한 대가의 작품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이 상당히 유효하다. 최근 나 역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한
작품이 또 다른 작품의 탄생과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상당히 흥미롭게 유추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설 읽기
방식은 작품의 범주를 넘어서서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번째는
'기능'이다. 기능이란 작품이 독자와 작가 사이에 갖는 의미로 쉽게 말하면 바로 '장르'에 따른 구분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을
쓴 목적이나 의도일수도 있고 독자 입장에서는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일수도 있다. 예를 들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이유>는 현대 일본 사회의 가족해체 문제를 다루면서 현대사회의 병폐는 개인의 책임 못지 않게 그런 개인을 만든 혹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히라노가 언급한 소설 작품으로서의
<이유>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진화'란 문학사적으로 더 나아가 인류
역사적으로 그 작품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하는 점을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이란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역사책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또 다른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치듯 한 소설작품이 또 다른
소설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한 사람의 작가가 또 다른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다. 이 또한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소설을 읽는 네 가지
방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지만, 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느낌' 즉 감동과 동감이다.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감동받고 동감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난 후, 만약 서평을 쓴다면 무조건 '매우
감동했다'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무감동적인 것도 없으므로 서평을 쓰거나 소설을 창작하고자 하는 이들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네가지 방법을 숙지하고 소설 읽기에 적용해보는 것도 유의미한 시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밖에도 히라노 게이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롯'을 '화살표'에 빗대어 설명한다. 즉, 이야기의 큰 뼈대를 거대한 화살표라고
한다면 이 거대한 화살표는 작은 화살표들이 모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편, 화살표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주어+술어'라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결국 소설이란 '~는 ~이다'라는 궁극의 술어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장은 인물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도와주는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과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으로 구분되어 있단다. 즉,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은 '역방향 화살표'가 되겠고,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은 '순방향 화살표'가 되는 셈이다.
주
어 충전형 술어 문장이 많으면 인물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깊고 넓어져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만 자칫 이야기가 쳐지는 재미없은
소설이 되기 쉽고, 반대로 작품이 전반적으로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속도감은 있으나 인물에 대한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하여 독자와 등장인물, 작가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히라노 게이치의 표현대로 무릇, 좋은 소설은 '플롯 전진형 술어'와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이 군형 있게 배치된 작품이다.
<소설 읽는 방법> 실천편인 2부에서는 일본과 서양 작가들의 작품 9편을 대상으로,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론이 펼쳐진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와타야 리사의<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젊음 없는 젊음>,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일본문학 성쇠사> 중 <알고 보면 훨씬 더 무서운 '한나절'>, 후루이 요시키치의 <사거리> 중 '한나절의 꽃',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 세토우치 자쿠초의 <발> 중 '환',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미카의 <연공>등이다.
다만, 나는 이 아홉 편의 작품 중 그 어떤 것도 읽지 못했고 습작다운 습작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설명을 이해하는데에 솔직히 한계를 느꼈다. 그만큼 나의 지적 수준이 낮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분석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법학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소설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 이론과 분석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