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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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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야말로 가깝지만 먼 나라다.

우리나라처럼 일본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나 창구가 막혀 있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TV를 켜면 미국영화나 중국영화는 그냥 흘러나오건만 일부러 찾아보려해도 일본에 관한 프로는 어째서 찾아 볼 수가 없는건가. 

그 많고 많은 시사, 교양 프로에선 일본인과 그들의 문화나 역사 등에 대해서는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누락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진작 <어쩌다 어른>이나 <책읽어주는 나의 서재> 등에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던 내가 그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알게 되고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한 국가나 민족의 운명 역시 불변의 법칙보다는 지정학적인 요소가, 피지배민의 행불행은 개인의 실력이나 노력보다는 지배층과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선택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발전은 이와 같은 역학을 역전시키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집트나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인가?"

"산업혁명은 왜 유럽에서 일어났는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제국으로 성장한 이유는 뭘까?"

"찬란하고 유구한 문화유산을 가졌다는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되어야만 했을까?" 



지나온 과거에 대한 이런 의문들은 어쩌면 다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답을 찾았다한들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안다는 건 과거로부터 배우겠다는 것이고 그 목적은 보다 나은 미래를 희망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미래란 어떤 미래인가?

보다 나은 앞에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이라는 수식어가 은연 중에 붙는 건 아닐까? '나'라는 관점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 인식의 전제조건이건만 이를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를 벗어나 나를 객체로써 바라봐야하는데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한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아선 안된다.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보다 타민족의 역사 속에 비친 우리나라의 모습이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인이지만 그동안 익숙했던 항일 반일의 정서가 아니라 최대한 객관적인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 국내 자료보다는 대부분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논문 및 고문서들을 참고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이 책은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시대를 평정하는 16세기 중반부터 시작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16세기 초반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진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 세 가지였다. 황제의 영광(Glory), 가톨릭 포교(God), 금(Gold)이었다. 

그당시 아프리카와 브라질 등 신대륙에서는 크고 작은 왕국들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무기를 갖춘 유럽인들은 이들을 분열과 이간질 시켜 결국 식민지배를 할 수 있었던 반면,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전국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던 일본으로선 내전을 끝내고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일본보다 더큰 먹잇감(?)이었던 명,청 제국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던 것도 일본으로선 행운이었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로 이른 생을 마친 후,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전면에 나선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히데요시는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무사가 되어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남자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를 일으켰지만 1살짜리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하겠다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조카의 가족 전부를 몰살시킨 '친족연속살인자'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살인자'라는 공식은 참 끈질기게도 잘 맞아떨어지는구나...' 



히데요시가 예상 밖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등장한 인물이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쇼군이 된 그는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서유럽 세계와 교류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챙겼지만 빠르게 확산되는 가톨릭에 위기감을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가난과 질병 및 탄압에 고통받던 근대 이전 대다수 사람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던 것 같다. 

'쇼군에 복종하지 않고 나라밖 교황에게 복종한다는 가톨릭교도들을 그대로 놔둘 순 없었겠지...'

결국, 이에야스는 서양인들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일본인 가톨릭신자(기리기스탄)들까지도 필리핀 루손섬으로 이주시켜버린다. 뿐만 아니라 아예 해외로 나가지 못하다록 대형 선박의 제조마저 금지시키는데, 이건 콜럼버스보다 60여 년 앞선 1440년 대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해상 원정에 나섰던 명나라가 영락제 사후 선박 제조를 금지한 것과도 일치한다. 



태평양을 건너갈 수 있었던 대형 선박을 제조할 수 있었던 당시 일본의 선박제조술은 이렇게 사장되고 만다. 

내치를 위해 즉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영구히하기 위해 쇄국을 한 것.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비극이요, 식민지배라는 슬픈 역사를 갖게 된 민족과 나라의 공동된 선택이었다.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등 따듯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왜 굳이 힘들게 모험을 하겠는가?'

부모가 남겨줄 집 한 채 값만으로도 한평생 먹고 살 수 있다면 굳이 능력도 실력도 부족한 데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MZ세대의 심리 또한 이와 비슷하리라...    



반면, 유럽 특히 서유럽의 섬나라인 영국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국토뿐만 아니라 자원도 인구도 부족했기에 밖으로 나가 운명을 시험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설령, 그곳이 망망대해일지언정 앉아 죽으나 나가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여겼겠지. 물론, 대중을 호도하고 안심시키는 종교도 한몫을 했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 

이데올로기는 철학이나 사상과는 다르다. 

철학이란 의심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잘못 알고 잘못 쓰고 있는 것 같다. 흔히 "저 사람은 철학이 있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저 사람은 남달리 믿는 바가 있다'는 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자든 사회 철학자든 진짜 전문가는 확신과 확답을 피한다. '왜?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치인과 종교인 들은 늘 확신하고 확약한다.  대다수 하층 대중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더라도, 의심하고 검증한 후 알리는 건 언제나 지식인의 몫이다.  



에도 시대의 일본이 비록 쇄국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네덜란드어 통역관과 난의학자 등 지식층들 사이에선 비록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이라는 단 하나의 좁은 창구였지만 서양의 의학서들과 기술서 들을 부지런히 수입해서 읽고 번역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도 부산 등지에 왜관이라는 무역관이 세워졌는데 우리는 일본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들도 불에 한 번 데고 물에 한 번 빠지면 조심하는 법인데 두 번의 전쟁으로도 배우지 못했으니 이때부터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전국시대라는 혼란기에조차 서유럽 상인들 및 가톨릭 선교사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을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유학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돈독히 하는데만 급급했다.

300명 노비를 직접 거느리면서 드넓은 땅을 경작하여 가산을 늘리는 것에 밝았고, 일일 노동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노비에게 곤장 300대를 치면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했으며, 본인 소유의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 양민과 천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천민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조선 초 노비의 수를 대폭적으로 증가시킨 분... 이분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숭앙해 마지 않던 퇴계 이황 선생님이시다. 

반면, 일본의 번주(다이묘)들은 쌀 생산량이 줄어들자 번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들을 대량으로 환량시켜 자유롭게 결혼하여 소가족을 이루도록 하였다. 가족 규모로 농사를 짓도록 한 결과 대규모 노비에 의한 경작보다 생산성이 높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한 만큼 내몫이 늘어나니 힘들어도 흥이 났고 그전에는 자식을 낳아봤자 노비 밖에 더 안되니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았으며 심지어 낳은 자식조차 태어나자마자 엎어 질식사시키지 않아도 되니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도 늘어났다고 한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멸망했어야 옳다.

나는 27명의 조선 왕조 왕들 중, 최악의 왕으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을 뽑겠다. 선조의 수명이 길었던 것과 인조가 왕위에 올랐던 것이 조선의 첫번째 불운이라면,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오래도록 장수한 것이 마지막 불운이었다. 셋 다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이기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인과 자식들조차 안중에 없었다. 

1867년 에도 막부는 자신들의 운명이 다한 줄을 알고는 메이지 덴노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형식으로 무혈충돌을 피했다.

'꽃이 질 때를 알아야 꽃다운 거고, 사람도 물러날 때를 알아야 사람다운 것이다'    



나는 요즘 조선 왕조를 다루는 TV프로나 책들이 지나치게 많을 뿐만 아니라 과찬하고 미화하는 역사 학자들을 마주하곤 할 때마다 '이제 대한민국이 발전의 정점에 섰는가?'하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가를 보면 현재를 읽을 수 있다. 고려 이전 시대에 대한 사료 자체가 얼마 없다 보니 학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문헌학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조선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안정된 일자리나 경제적 이득을 얻고 싶은 목적에서 시작한 찬양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건 분명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이고 결국엔 사회가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혁명에 성공한 뒤 옆 나라는 2천 년 이상을 모셔온 공자를 '부관참시'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공자를 다시 모셔왔다.

'왜일까?'

혁명을 위해선 기존 질서와 사상을 버려야했지만 이젠 지배 구조와 질서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아름다운 미풍양속이기 이전에 실제로는 기득권 세력이 가장 좋아하고 선호하는 가치관이다. 




흔히들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 될 것이면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니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말도 자주 한다.

심지어 자연과학계조차 관찰과 실험을 거쳐 사실로 증명이 된 것임에도 기존 이론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뉴턴의 만유인력을 철저히 신봉하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바로 받아들인 게 아니고, 빅뱅이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도 기존 과학계에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반성하고 기존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버려서 새로운 이론들이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이 죽으면서 후배 과학자들이 더이상 그들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이 신봉했던 이론이 폐기된 것일 뿐이다.   

아무래도 '나 죽거들랑....'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서히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지배층이 개혁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쯤에는 이미 거세게 휘몰아치는 변화의 물꼬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대부분이다. 

천천히 변하겠다는 건 결국엔 곪을 대로 곪은 다음 무너지겠다는 말과 같다.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대청제국이 그러했다. 물론, 변화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를 놓쳤던 조선왕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고 난 지금 지지했던 대선후보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불연듯 든다. 


이미 지나온 길로 되돌아가는 것보단 어디로 이어진 길인진 몰라도 안가본 길을 선택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후손들에게 최소한 내가 지금, '조선은 양반층이 지은 죄가 깊구나...' 하며 덧없는 한숨을 내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 죽은 다음엔 너무 늦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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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터키사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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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는 이란의 페르시아와 자주 혼동하지만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한 축을 이뤘던 튀르크족의 역사다.

한자로는 돌궐(厥)이라 불렀으며, 중국 역사서에는 한무제가 북방의 흉노를 막기 위해 장건을 월지국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발전할 무렵인 6세기경, 튀르크족은 우수한 철 생산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연(몽골 지방에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 이때 튀르크족을 이끌던 사람은 부민(토문)이었다. (유연의 공주와 결혼을 하려 했으나 아나괴가 거절하자) 이 기회를 노려 부민은 스스로 '일릭-카간', 즉 '나라를 세운 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뒤 중국(당시는 서위)과 손잡고 유연을 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을 받은 유연은 멸망했고, 아나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 <자치통감>이라는 역사책에서 이 일을 "돌궐의 토문이 유연을 습격해서 크게 격파하다. 유연의 아나괴(두병가한)가 자살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부민은 튀르크인의 나라가 탄생했음을 선언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인 552년의 일이다. 이때 부민이 세운 나라가 튀르크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로, 터키는 이해를 건국의 해로 기념하고 있다. -69쪽 




역사적으로 현대에 좀더 가깝게는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가 바로 이들 민족이 세운 제국들로 아나톨리아지방 뿐만 아니라 아랍과 북아프리카까지 다스렸다. 특히, 비잔틴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에 1077년 또다른 튀르크족이 룸 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고원 지대인 콘야로 수도를 옮기고 십자군을 막아내면서 명실상부 아나톨리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터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룸 셀주크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으면서 늙어가는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지만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진다. 중앙 초원에서 불어닥친 폭풍이 사그라든 뒤 오스만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나타나서 다시 튀르크족을 통합하여 오스만 튀르크를 세웠다. 이 오스만 제국의 4대 술탄인 메메드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고 일찌기 그리스인이 세웠던 도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 튀르크족의 손안에 들어온다. 

도시 이름도 이슬람의 도시라는 뜻인 '이스탄불'로 다시 한 번 바뀐다.


그리스정교회의 상징인 성소피아성당과 토프카프궁전 및 여섯 개의 미나레트가 돋보이는 블루모스크가 공존하는,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200여 년이 지나면서 제국은 성장을 멈추고 정체되기 시작하는데, 그 첫걸음은 지혜와 용기로 제국을 이끌었던 술탄들의 무능과 향락 그리고 군대(예니체리)의 부패와 타락이었다. 

때마침 유럽은 길고 긴 암흑기를 지나고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독일 등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온도가 높아지는 물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변화하는 세상을 눈치채지 못한다. 물론, 몇 차례의 크고 작은 개혁 시도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귀족과 예니체리 등 기득권층의 저항에 물러나고 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개혁의 주체인 술탄이 스스로 개혁의 대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만 제도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치 두 차례의 커다란 외침을 받고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는 왕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선조와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을 보는 것만 같다.  이때부터 조선이 정조대왕이라는 뛰어난 왕이 뒤늦게 나타났지만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고 19세기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듯이, 오스만 제국도 솔로몬의 이름을 딴 슐레이만이라는 술탄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터트리지만, 이집트와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차례로 제국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제국 가운데 환자가 있다."
1851년 페테르부르크 궁전에서 영국 대사를 만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라고 비꼬았다.  세 대륙을 주름잡고 동지중해를 호수로 삼으면서 서유럽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유럽의 놀림감이 되었고, 심지어 작은 나라인 그리스와의 싸움에서도 쩔쩔매는 종이호랑이로 풍자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스만 제국은 정체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쪽



당시 유럽에 오스만이라는 환자가 있었다면,  아시아엔 청이라는 환자가 있었다. 

둘 다 엄청난 영토와 인구를 거느린 제국이었지만 넘쳐나는 부와 지속되는 평화에 안주해버린 결과였다.

프로이센(독일)이 유럽의 풍운아로 빠르게 성장 발전하면서 주변국에 위협을 가했다면 아시아에선 일본이었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인 영국 그리고 정통의 강대국인 프랑스는 그렇다치더라도 유럽 변방의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러시아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군대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놀랍고 신기했다. 다음 번 세계사 여행(?)은 러시아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렵사리 실현된 의회민주제마저 경제성장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시위를 틈타 일어난 쿠데타와 술탄의 복귀로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다시 30여 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버리면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삼국동맹(독일, 폴란드-헝가리, 이탈리아)편에 서서 패전국이 되고 만다. 그나마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젊은 장교의 리더십으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과 이슬람주의라는 썩은 부위를 잘라내고 1923년 세속주의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터키는 이슬람국가 중에서 가장 세속적이며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다. 하지만 쿠르드족 탄압과 중개무역에 뿌리내린낡은 경제구조로 1960년과 1971년 그리고 1980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여전히 제자리를 잡지 못한 모습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2인자들(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더 길고 멀리 본다면 더 큰 변곡점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세기~20세기에 걸친 200여 년이라는 시간은 제국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엔 서서히 내리막길을 내려간 시간에 불과했다.  


터키는 한국전쟁 때 연합국 편에 서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만5천 명을 참전시켰던 나라라고 한다. 그런 터키가 현재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까?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는 인삿말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때 제국이었던 나라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부심으로 마음을 채우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역사의 순환 과정에서 최저점은 각 민족마다 제각각이지만 최정점만큼은 '이제 이만 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거다. 


한 국가(왕조)의 탄생과 성장 및 멸망을 보통 300년으로 본다. 

우리나라는 1950년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했으므로 그뒤 100년은 재건과 성장의 시간이 될 테고 우린 그 시기를 잘 헤쳐오고 있다. 앞으로 100년 동안 국력을 더한층 응축시켜 발산시켜 나갈지, 아니면 거란의 요나 발해 및 티무르 제국처럼 100년 제국으로 끝나고 말지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 자체가 눈 내리는 광야에 절망 대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듯, 우리도 먼훗날 백마타고 올 초인을 위해 희망의 씨를 뿌려야하지 않겠는가.



역사를 배운다는 건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과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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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일본사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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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일본사를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일본 소설이나 인문서적은 읽었을지언정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왜 일본의 역사는 잘 모를까?'


 

단순한 우연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지 않으려는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학창시절엔 그저 우리나라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 위주로 그것도 주로 피해자로서 가해자의 악랄함을 고발하거나 미개한 일본에 선진문명을 전해준 것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역사만을 배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대 일본은 미개하지도 않았고 문화가 우리나라보다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특히, 대대로 덴노(天皇)가 거주하고 있는 교토는 천년고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것만 무려 17개나 된단고 하니,  2차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폭격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도요데미 히데요시가 지었다는 오사카 성은 사진만으로 봤을 뿐인데도 규모와 화려함에서 솔직히 조선의 왕궁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탈아입구(脫亞入歐)'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일찍부터 앞선 것들을 배우고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지 않았다. 네델란드 상인이 드나들 때 그들은 엽총 두 자루를 비싼 가격에 사서는 그걸 분해해서 원리를 익히고 배웠다. 네델란드인이었던 하멜 역시 조선에 표류했지만 우리는 그냥 그를 붙잡아 놓았을 뿐이다. 왜 그를 통해 바깥 세계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 밖에도 태자는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오키미 대신 덴노(天皇)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덴노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말에 즉위한 덴무 덴노 때부터였지만, 쇼토쿠 태자가 집권할 때부터 이미 주기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쇼토쿠 태자는 덴노 중심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온힘을 다했다. 1984년까지 1만 엔짜리 지폐에는 쇼토쿠 태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역사에서 쇼토쿠 태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몸소 실천한, 남의 것이라도 좋다면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이이토코토리' 정신은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 태도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39쪽

 



 

'우리는 선진문화를 일본 열도에 전수해 줬다?' 


 

아직기와 왕인 뿐만 아니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기술자들이 많았다. 이들을 '도라이진(渡來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모여살았던 장소며 남긴 유적과 유물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야만족에 가까운 해적(왜)에게 선진문화와 기술을 전해줬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아무 댓가없이 사람과 기술 및 서적 등을 제공해줬을까? 

그당시 일본은 지역으로 나눠져 서로 힘을 겨누며 싸우는 춘추전국시대 같았다. 군사력이 강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여 배운다? 힘 쎈 유목민이 약한 정주민에게 굽실거리면서 약탈한다는 말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대도 왜 단한번도 이런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어쩌면 백제는 일본의 군사력이 무서워서 자발적으로 혹은 강요에 의해 인적 물적의 형식으로 조공을 바쳤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을까? 

중국 대륙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중국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던 일본을 등한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역시 사대주의가 불러온 우리 역사의 또다른  불상사라 하겠다.  

 


 

<일본서기>에는 삼국 문화의 전래 기록이 무수히 등장한다. 삼국 중에서도 백제가 일본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백제의 왕인이 유학과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도 우리 역사책이 아닌 <일본서기>에 전한다. (...) 일본에서는 왕인을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전파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불교문화다. 백제가 불경과 불상을 전파함으로써 일본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 이후 백제는 승려뿐 아니라 기술자까지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 발전과 사찰 건립에 이바지했다. (...) 이때 꽃핀 것이 일본의 아스카 문화였다. (...)
그러나 군사적 교류 관계를 살펴보면, 고대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단순한 주변 국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고구료, 백제, 신라 등과 각축을 벌이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에 적극 참여한 측면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왕자로서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동성왕, 무령왕을 빼더라도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박제상 설화'를 보면 당시 일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88~89쪽

 

 


 

'일본의 군국주의는 바쿠후(幕府) 체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무라이 즉 무사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 최초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건 우리나라의 무신정변과 비슷한 시기(1192년) 가마쿠라 바쿠후였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100여 년을 존속하다가 무로무치 바쿠후에 바톤을 넘겨준다. 일본의 천황은 '신인'으로 상징성을 띄었을 뿐 실질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마치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와 '술탄'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將軍) 밑엔 봉토와 사병을 거느린 번주가 있었다. 각 장원의 번주들은 서로 경쟁하고 때론 물리적 충돌을 하면서 쇼군을 갈아치우기도 하는 등 늘 무사들이 사회의 지배층을 자리잡았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들어서기 전까진 신분제가 고정되어 있지는 않아서 하층민이었던 도요데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 무사가 되어 장군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직업 세습을 통한 신분제를 고착시켰다. 사회적 지도층이었던 무사들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상류층을 유지하며 유지되는 일본 사회는 늘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고 16세기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인이 무인 위에 군림했던 조선의 상황과는 정반대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세기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스스로 권력을 덴노인 메이지에게 이양할 때까지 내전을 치를 때 단 한 번도 외세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군사지향성을 꿰뚫어본 미국 등 서구열강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와는 다르게 일본을 대우하고 평가했음은 당연하다.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더라면?'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소위 '아시아의 우등생'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교육과 실용기술을 중시하고 열심히 배웠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따라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이 양무운동에도 불구하고 서양세력을 제대로 상대하질 못했고, 조선 역시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면서 일본은 아시아 국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렸다. 특히, 청일전쟁이야말로 일본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향하게 하는데 이정표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만약 청일전쟁에 졌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역사가 쓰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조선의 왕정이 폐지되거나 입헌군주정으로 돌아선 후, 일본을 가까이 하면서 배우고 함께 움직였더라면 우리나라 역시 전혀 다른 역사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1만 엔 지폐에 새겨진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서양의 근대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소개하고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근대화의 선구적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다. 사족 출신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에도 바쿠후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발전된 모습을 접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는 서구 열강의 발달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청과 같은 아시아 여러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비참한 상황도 접했다. 당시 일본 사회에는 일본 역시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팽배했는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학문의 권장>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1872년 간행된 <학문의 권장>은 근대화의 길목에 선 일본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이다. -270쪽

 

 


 

'아시아의 모범생에서 전쟁광으로 변신하다'

 


일본 역시 자발적으로 개항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1858년 패리 제독의 강압에 의해 일미통상조약을 맺은 후엔 빠르게 서구를 모방하고 따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지식층의 역할이 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게이오대를 세우고 아시아의 공동 발전을 꿈꿨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는데 자본을 쾌척했단다. 김홍집 역시 일본으로 그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양무운동에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는 청과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러시아로 기우는 조선을 보면서 '아시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탈아입구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까지만 해도 톈진조약을 맺으면서 청에 밀렸던 일본은 그위 10년 동안 빠르게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측이 의도적으로 도발하여 일어난 전쟁이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외세와의 대면을 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게 아니라 충돌을 피하지 않았고 실력을 가늠한 후 부족한 점을 적극적으로 키운 후 다시 그 실력을 확인하려고 했다.

조선과 청과는 다른 일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일본에겐 호연지기가 있었고 조선과 청에겐 없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특수를 누리던 일본 경제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황에 빠지자 승전국임에도 얻은 게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난과 민중 시위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 입헌군주정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수상이 암살당하면서 소수의 군인들이 덴노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구 열강들 간의 패권 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군인이 정치를 하게 되자 군부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갈 수밖에 없었고, 1차세계대전에 이어 1936년 중일전쟁일, 1941년 진주만 공격 등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첫 단추는 잘 끼었지만 중간에 단추 한 개나 어긋난 형국이라고나 할까.

 

 


'패전국에서 어떻게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일찍부터 중국 및 동남아시아의 중간 기항지로서 일본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1858년 패리 제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미수호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군부간 충돌을 지켜보면서 일본 사회 특우의 무사 우위 사회의 군사력과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그뒤 일본을 막무가내식으로 억압하지 않고 아시아 침략의 앞잡이로 활용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서구 선진국이 되려는 일본과 미국의 의도가 맞아떨어진다. 1905년 청일전쟁 후 포츠담에서 전후처리를 논의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세계외교무대에 소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공산주의국가인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던 미국은 회담 전에 이미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일본에게 유리하게 회담을 이끌어서 러시아 대표들이 한 차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였다. 

이런 미국을 먼저 공격했고 전쟁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후 미국은 일본을 다른 패전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우하는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철저히 미국 국익에 유리하도록!

일본을 러시아와 중공 세력의 확대를 막는 방패막으로 삼고, 오키나와를 미국의 태평양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의도가 명백했고 실제로 미군정은 오키나와를 1972년에서야 반환한다. 

 

 


'헤이안 시대 이후의 일본은?'

 


패전 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수립했지만 90년 대에 접어들어 군사대국을 꿈꾸면서 헌법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엔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무장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에 따르는 비용 증가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이 좀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기를 바라고 있고, 이럴 능력을 갖춘 일본은 그 반대 극부로 군대를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대다수 일본인은 헌법 수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일본 우익 정부와 국민의 견해차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정상군대'라는 망토를 흔들었다가 등뒤로 감추는 미국의 꼭두각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6000여 개나 넘는 시민단체의 힘과 평화를 사랑하는 대다수 일본인의 바람에 따라 과거사를 청산하고 아시아의 모범생으로 되돌아올 것인가?

일본이 설령 '탈구반아(脫歐反亞)' 한다 하더라도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꿈을 버리지 않는 한, 그건 역사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그건 일본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역사를 잘못된 과거로 반성하지 않고 되돌아가고 싶은 영광의 시절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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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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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동안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전자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진화생물학과 인류고고학을 영민하게 뒤섞어 인류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빅히스토리')으로 그려냈다면,  후자는 상상 · 협력 · 탐욕이라는 사피엔스의 본능적 특질이 어떻게 컴퓨터 공학 및 의학과 결합하여 인류를 불멸의 존재로 이끄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틀렸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저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도 틀렸다. 인간은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그저 욕망할 뿐이다. 애초 인간에게는 자의식 즉 내면의 목소리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내면의 목소리라고 굳게 믿어왔던 건 다름 아닌 두뇌의 알고리즘일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어떤 외적 실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유권자, 소비자, 관객은 저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자기 인생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든다. (...)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자유의지와 개인의 존재를 의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 중국,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2,000년도 더 전에 '개별적인 자아는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이 경제, 정치, 일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실제로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인간은 인지부조화의 대가라서, 실험실에서는 이것을 믿고, 법원이나 의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믿을 수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낸 날 그리스도교가 사라지지 않았듯이, 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417~419쪽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싶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구글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시스템에 개인 정보를 넘겨주면 된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미래는 내가 검색하고 클릭하고 '좋아요'를 눌렀던 수많은 나의 '흔적'들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어 내가 어떤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고 어느 곳에서 생활하며 어떤 음식을 먹는게 더 좋을지를 통계 수치로 알려주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라도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절대 권력과 종교에 저항하기 위해 강조되었던 개인의 지위와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인본주의와 개인주의를 불러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인식. 개체로서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최고이자 절대진리라는식의 개인우선(우월)주의 사고가 현대 자본주의 물질소비문명과 결합하여 역으로 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유신론자들이 '데오스(theos,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경배하는 반면,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경배한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이념은 호모 사피엔스는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선 또는 악이 된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다. 축산 농장은 인간의 필요, 변덕, 소망을 신성시하는 반면 그밖에 모든 것을 무시했다. 동물들은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축산 농장은 동물에게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축산 농장에는 신도 필요 없다. 현대 과학과 기술이 고대의 신들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농장주들은 과학기술 덕분에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조건들보다 더 극단적인 환경에서 젖소, 돼지, 닭을 기를 수 있다. -142쪽


 

흔히, 다른 생물종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으로 '생각하는 힘'을 들곤 한다.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란,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보다 육감('느낌')이나 생각('상상')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 사피엔스는  이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다른 유인원종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집단 협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인류 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와 같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가상의 존재('허구')를 수없이 창조하고 또한 이를 경배해 왔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246~247쪽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는 '신(信)'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인류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것을 위해 목숨도 불사했다. 신(神)을 위해 죽었고 왕(國)을 위해 전쟁을 했다. 오늘날에도 이 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좀더 교묘해졌고 더한층 악랄해졌을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살고 죽을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은 외부나 타자가 아니라 자기 내부 즉 바로 자기 자신(自身)으로 바뀔 따름이다. 과거 인간은 필멸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영혼(종교)을 통한 불멸의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빌어 영원한 육체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神) 즉 '데우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가치를 상실하는 과정 속에서 그 무엇(혹은 '누구')으로도 대체불가하고 인공지능(빅데이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 신인류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神)은 얼마나 될까?

<그리스 로마신화>만 봐도 그속에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그동안 수많은 신들이 존재해왔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고 있으리라. 


맨  처음 창조주는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신들을 만들어냈다.

신의 복제품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복제품)을 본떠서 수많은 신들을 만들었으니 신들은 '복제품의 복제'인 셈이다. 이제 인류는 신들을 복제하는 것(시뮬라크르)에서 벗어나 신들을 그대로 흉내내는(미메시스) 단계로의 진입이 머잖아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복제품(인간)과 진품(신)이 구별되지 않는, '시뮬라시옹(가상이 현실이고, 가짜가 진짜인 세상)'의 세계로 접어든 것이다.   


보통 인문서나 과학서 한 권을 정독하고 나면 겨울철 목욕탕에 갔다가 막 나왔을 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관통하면서 온몸이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알듯말듯했던 궁금증들과 조각난 지식들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맞춰지면서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책은 읽고 나서 기분이 산뜻해지기는커녕 더한층 우울해졌다. 아무리 미래에 대한 예측은 '장미빛 환상' 아니면 '지옥의 묵시록' 양극단을 오고가는 시계추라고는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발전된 미래임에도불구하고 그것에 환상을 품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동안 인류는 스스로 만든 창조물들 앞에서 창조주로서 그것을 사용하고 관리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의지하고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얽매이고 지배당하는 피조물로서의 역할에 더 익숙해왔기 때문이리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가 만들어냈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그것에 통제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한 권의 책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복음서인지 아니면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계시록인지는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복음서라면 신을 향한 복음이 아닌 인간을 향한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요, 계시록이라면 인간에 '대한' 계시록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계시록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 모든 열쇠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쥐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복음서 혹은 계시록이 될지는 순전히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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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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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과학 분야에 선천적으로 취약한 내가 흥미를 보이는 유일한 분야가 있다면 생물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이다.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그의 <진화론>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책들이 출판 되었고, 이를 계기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제프리 밀러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이쪽 분야의 책들을 꽤(?)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나처럼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최재천 교수의 책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 역시 진화생물학(혹은 진화심리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즉,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행동 및 자연현상까지 진화론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려는 이 책은 나름의 통찰력을 선사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였던 건 문학작품의 존재 이유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부분이었다.

 

이야기에 대한 별스러운 애착은 인간이 다른 진화적 적응들을 갖추다 보니 부수적으로 발현하게 된 부산물일 수 있다. 예컨데 우리의 마음이 진화한 소규모 집단에서는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아내는 일이 번식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자연선택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정보를 얻는 활동에서 짜릿한 즐거움을 느끼게끔 석기 시대의 우리 마음을 설계했다. 하지만, 대중매체와 과학 기술이 득세하는 현대 환경에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실 또는 상상 속 인물들의 사생활을 엿보면서 즐거움 그 자체만을 탐닉하는 현상이 뒷소문을 추구하는 적응의 부산물로서 생겨나게 되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즐기는 성향 그 자체가 어떤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된 진화적 적응일 수 있다.(...)

 

이야기는 극중 인물이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게끔 설계된 적응이다. 즉 이야기는 삶의 모형이다. 생존과 번식이 결판나는 치열한 전장으로 투입되기 전에 이러한 모의실험이 굳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의 인생항로가 그만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p148~149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부터 있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읽기를 싫어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류에게 '이야기'는 본능이다.

한편, 여성이 남성보다 책을 더 자주 사고 더 많이 읽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남성 작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설명한 진화론적 관점이 흥미롭다. 제프리 밀러는 저서 <연애>에서, 여성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반면 남성은 이야기를 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잘 하는 남자가 여성에게 선택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지어내는 쪽은 남자일 수 밖에 없노라고... 

 

이 책의 저자 역시 인간의 '웃음 본능'을 설명하면서, 여성은 웃기는 남성을 선호하는 반면 남성은 자기를 웃기는 여성보다는 잘 웃어주는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프리 밀러의 가설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은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재주를 특화시키고 여성이 이야기를 잘 듣고 읽는 재주를 특화시킨 건, 좋은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를 구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자연선택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진화심리학과 진화생물학 및 진화행동학 등에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어떤 초월적인 영혼이나 합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선택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은, 20세기 초 인간 행동의 모든 원인을 '성'과 연관지었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롭지만 또한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동성애의 비율이 돌연변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비율(1~10%)을 차지한다는 점은 진화생물학에서는 변변한 가설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무조건 진화론과 연관지으려는 태도에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창조론를 창조학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일 순 있어도 결코 과학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자연선택되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불투명한 단서로부터 내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지닌 행위자의 존재를 다짜고짜 가정하는 성향은 사악하고 지능적인 악령, 그리고 이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주는 자비로운 신에 대한 관념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 인지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약간만 낯설고 이상한 것에 가장 관심이 가고 더 잘 기억한다. 반면에 시시하도록 정상적인 것이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것은 제대로 기억하거나 전파하지 못한다. -p218

 

'신이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신을 믿는다면 실재로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잃을 게 없지만, 반대로 내가 신을 믿지 않는데 실재로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전부를 잃는 것이다.'

 

인간이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유신론쪽으로 더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실재로 인류의 조상은 길을 가다가 낯선 존재와 마주쳤을 경우, 일단 상대를 자신보다 강력하다고 전제한 후 잽싸게 도망감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여왔다. 신처럼 '불가지론'에 대한 인간의 비과학적인 믿음과 복종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표현처럼 인류에게 종교란 부정할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면, 본능 즉 직관은 이성적 판단, 즉 추론보다 앞선다. 설령 그것이 현대 과학에는 위배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간의 경우 혐오감이라는 감정이 작동하여 병원체가 들어 있는 대상을 멀리하게 해준다. (...) 단순히 어떤 사람이 우리 집단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임을 알려주는 단서만으로도 그를 회피하거나 배척하는 기제가 작동한다. 내부인들끼리 뭉치며 외부인을 몰아내려는 심성이 어떻게 전염성 질병을 막아주는 방패가 될까? 답은 기생체와 숙주 사이의 공진화 군비경쟁에 있다. -p73

 

동물의 사체 섭취, 더러운 물체와의 접촉, 근친 상간,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흉칙한 외모와 자극적인 냄새에 대한 거부 등등......

굳이 배우지 않아도... 법에 저촉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아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들은 전통과 터부 등의 이름으로 불허되어 왔는데, 이는 전염병이나 병균을 멀리함으로써 생존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우리의 마음 지도 때문이란다. 

 

여기에는 음식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향신료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사용하는 음식을 선호하는 지역일수록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온도가 높고 습해서 병원균에 훨씬 쉽게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국가가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덜 개방적이고 더 폐쇄적인 것도 다양하고 많은 향신료를 사용하는 음식이 발달한 이유도 모두 진화론적으로 보면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외부적 실재가 아니다. 잡식성 영장류인 인간이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특정한 환경을 잘 찾아가게끔 그 환경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정서일 뿐이다. -p126

 

어째서 진화적으로 쓸모 없어 보이는 꽃에 매혹되었을까? 꽃은 오래지 않아 이 자리에서 과일이나 견과, 덩이줄기 같은 음식물이 나게 되리라고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꽃이 있는 곳에는 인간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도 찾아온다. -p135

 

아프리카 사바나 풍경과 폭포 및 분수대 등등... 

이런 사진과 그림들을 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런 장소들이 먹이를 구하고 위험을 피하기 쉬우며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나 나무에 대한 인류의 높은 호감도 역시 이들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카페의 2층 창가 자리부터 손님이 차는 이유와 백화점 1층 정중앙에 주로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는 이유 역시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 대한 인류의 동경과 모방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도 역시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아무리 지고지순한 지위를 부여한다 한들, 기껏해야 '털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등에 흥미를 갖는 이유 역시 진화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기에 앞서,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간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탐구하도록 진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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