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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ㅣ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평점 :
일본이야말로 가깝지만 먼 나라다.
우리나라처럼 일본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나 창구가 막혀 있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TV를 켜면 미국영화나 중국영화는 그냥 흘러나오건만 일부러 찾아보려해도 일본에 관한 프로는 어째서 찾아 볼 수가 없는건가.
그 많고 많은 시사, 교양 프로에선 일본인과 그들의 문화나 역사 등에 대해서는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누락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진작 <어쩌다 어른>이나 <책읽어주는 나의 서재> 등에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던 내가 그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알게 되고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한 국가나 민족의 운명 역시 불변의 법칙보다는 지정학적인 요소가, 피지배민의 행불행은 개인의 실력이나 노력보다는 지배층과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선택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발전은 이와 같은 역학을 역전시키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집트나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인가?"
"산업혁명은 왜 유럽에서 일어났는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제국으로 성장한 이유는 뭘까?"
"찬란하고 유구한 문화유산을 가졌다는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되어야만 했을까?"
지나온 과거에 대한 이런 의문들은 어쩌면 다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답을 찾았다한들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안다는 건 과거로부터 배우겠다는 것이고 그 목적은 보다 나은 미래를 희망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미래란 어떤 미래인가?
보다 나은 앞에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이라는 수식어가 은연 중에 붙는 건 아닐까? '나'라는 관점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 인식의 전제조건이건만 이를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를 벗어나 나를 객체로써 바라봐야하는데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한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아선 안된다.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보다 타민족의 역사 속에 비친 우리나라의 모습이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인이지만 그동안 익숙했던 항일 반일의 정서가 아니라 최대한 객관적인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 국내 자료보다는 대부분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논문 및 고문서들을 참고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이 책은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시대를 평정하는 16세기 중반부터 시작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16세기 초반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진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 세 가지였다. 황제의 영광(Glory), 가톨릭 포교(God), 금(Gold)이었다.
그당시 아프리카와 브라질 등 신대륙에서는 크고 작은 왕국들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무기를 갖춘 유럽인들은 이들을 분열과 이간질 시켜 결국 식민지배를 할 수 있었던 반면,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전국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던 일본으로선 내전을 끝내고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일본보다 더큰 먹잇감(?)이었던 명,청 제국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던 것도 일본으로선 행운이었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로 이른 생을 마친 후,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전면에 나선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히데요시는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무사가 되어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남자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를 일으켰지만 1살짜리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하겠다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조카의 가족 전부를 몰살시킨 '친족연속살인자'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살인자'라는 공식은 참 끈질기게도 잘 맞아떨어지는구나...'
히데요시가 예상 밖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등장한 인물이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쇼군이 된 그는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서유럽 세계와 교류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챙겼지만 빠르게 확산되는 가톨릭에 위기감을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가난과 질병 및 탄압에 고통받던 근대 이전 대다수 사람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던 것 같다.
'쇼군에 복종하지 않고 나라밖 교황에게 복종한다는 가톨릭교도들을 그대로 놔둘 순 없었겠지...'
결국, 이에야스는 서양인들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일본인 가톨릭신자(기리기스탄)들까지도 필리핀 루손섬으로 이주시켜버린다. 뿐만 아니라 아예 해외로 나가지 못하다록 대형 선박의 제조마저 금지시키는데, 이건 콜럼버스보다 60여 년 앞선 1440년 대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해상 원정에 나섰던 명나라가 영락제 사후 선박 제조를 금지한 것과도 일치한다.
태평양을 건너갈 수 있었던 대형 선박을 제조할 수 있었던 당시 일본의 선박제조술은 이렇게 사장되고 만다.
내치를 위해 즉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영구히하기 위해 쇄국을 한 것.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비극이요, 식민지배라는 슬픈 역사를 갖게 된 민족과 나라의 공동된 선택이었다.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등 따듯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왜 굳이 힘들게 모험을 하겠는가?'
부모가 남겨줄 집 한 채 값만으로도 한평생 먹고 살 수 있다면 굳이 능력도 실력도 부족한 데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MZ세대의 심리 또한 이와 비슷하리라...
반면, 유럽 특히 서유럽의 섬나라인 영국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국토뿐만 아니라 자원도 인구도 부족했기에 밖으로 나가 운명을 시험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설령, 그곳이 망망대해일지언정 앉아 죽으나 나가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여겼겠지. 물론, 대중을 호도하고 안심시키는 종교도 한몫을 했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
이데올로기는 철학이나 사상과는 다르다.
철학이란 의심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잘못 알고 잘못 쓰고 있는 것 같다. 흔히 "저 사람은 철학이 있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저 사람은 남달리 믿는 바가 있다'는 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자든 사회 철학자든 진짜 전문가는 확신과 확답을 피한다. '왜?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치인과 종교인 들은 늘 확신하고 확약한다. 대다수 하층 대중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더라도, 의심하고 검증한 후 알리는 건 언제나 지식인의 몫이다.
에도 시대의 일본이 비록 쇄국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네덜란드어 통역관과 난의학자 등 지식층들 사이에선 비록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이라는 단 하나의 좁은 창구였지만 서양의 의학서들과 기술서 들을 부지런히 수입해서 읽고 번역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도 부산 등지에 왜관이라는 무역관이 세워졌는데 우리는 일본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들도 불에 한 번 데고 물에 한 번 빠지면 조심하는 법인데 두 번의 전쟁으로도 배우지 못했으니 이때부터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전국시대라는 혼란기에조차 서유럽 상인들 및 가톨릭 선교사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을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유학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돈독히 하는데만 급급했다.
300명 노비를 직접 거느리면서 드넓은 땅을 경작하여 가산을 늘리는 것에 밝았고, 일일 노동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노비에게 곤장 300대를 치면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했으며, 본인 소유의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 양민과 천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천민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조선 초 노비의 수를 대폭적으로 증가시킨 분... 이분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숭앙해 마지 않던 퇴계 이황 선생님이시다.
반면, 일본의 번주(다이묘)들은 쌀 생산량이 줄어들자 번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들을 대량으로 환량시켜 자유롭게 결혼하여 소가족을 이루도록 하였다. 가족 규모로 농사를 짓도록 한 결과 대규모 노비에 의한 경작보다 생산성이 높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한 만큼 내몫이 늘어나니 힘들어도 흥이 났고 그전에는 자식을 낳아봤자 노비 밖에 더 안되니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았으며 심지어 낳은 자식조차 태어나자마자 엎어 질식사시키지 않아도 되니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도 늘어났다고 한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멸망했어야 옳다.
나는 27명의 조선 왕조 왕들 중, 최악의 왕으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을 뽑겠다. 선조의 수명이 길었던 것과 인조가 왕위에 올랐던 것이 조선의 첫번째 불운이라면,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오래도록 장수한 것이 마지막 불운이었다. 셋 다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이기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인과 자식들조차 안중에 없었다.
1867년 에도 막부는 자신들의 운명이 다한 줄을 알고는 메이지 덴노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형식으로 무혈충돌을 피했다.
'꽃이 질 때를 알아야 꽃다운 거고, 사람도 물러날 때를 알아야 사람다운 것이다'
나는 요즘 조선 왕조를 다루는 TV프로나 책들이 지나치게 많을 뿐만 아니라 과찬하고 미화하는 역사 학자들을 마주하곤 할 때마다 '이제 대한민국이 발전의 정점에 섰는가?'하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가를 보면 현재를 읽을 수 있다. 고려 이전 시대에 대한 사료 자체가 얼마 없다 보니 학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문헌학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조선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안정된 일자리나 경제적 이득을 얻고 싶은 목적에서 시작한 찬양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건 분명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이고 결국엔 사회가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혁명에 성공한 뒤 옆 나라는 2천 년 이상을 모셔온 공자를 '부관참시'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공자를 다시 모셔왔다.
'왜일까?'
혁명을 위해선 기존 질서와 사상을 버려야했지만 이젠 지배 구조와 질서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아름다운 미풍양속이기 이전에 실제로는 기득권 세력이 가장 좋아하고 선호하는 가치관이다.
흔히들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 될 것이면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니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말도 자주 한다.
심지어 자연과학계조차 관찰과 실험을 거쳐 사실로 증명이 된 것임에도 기존 이론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뉴턴의 만유인력을 철저히 신봉하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바로 받아들인 게 아니고, 빅뱅이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도 기존 과학계에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반성하고 기존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버려서 새로운 이론들이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이 죽으면서 후배 과학자들이 더이상 그들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이 신봉했던 이론이 폐기된 것일 뿐이다.
아무래도 '나 죽거들랑....'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서히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지배층이 개혁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쯤에는 이미 거세게 휘몰아치는 변화의 물꼬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대부분이다.
천천히 변하겠다는 건 결국엔 곪을 대로 곪은 다음 무너지겠다는 말과 같다.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대청제국이 그러했다. 물론, 변화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를 놓쳤던 조선왕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고 난 지금 지지했던 대선후보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불연듯 든다.
이미 지나온 길로 되돌아가는 것보단 어디로 이어진 길인진 몰라도 안가본 길을 선택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후손들에게 최소한 내가 지금, '조선은 양반층이 지은 죄가 깊구나...' 하며 덧없는 한숨을 내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 죽은 다음엔 너무 늦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