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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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이상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일본어 책제목도 한국어 제목과 같은진 모르겠으나 제목만 보면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선택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그래서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로 귀결된다. 


후대인에게 과거에 일어난 이벤트들이 종종 이해되지 않는 건 사건 자체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나온 과거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선 사건의 배경이나 주변 즉,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여기엔 여러 사람들의 오판과 오해 및 예기치 못한 우연이나 실수 등도 포함된다.



출중한 역사서는 대개 물음표로 시작해서 마침표로 끝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시종일관 '그럼에도 일본은 왜 전쟁을 선택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되서 일본은 전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로 마무리한다. 청중(독자) 역시 '그래서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었군(요).'하고 수긍하게 됨은 물론이다.  




대다수 일본인이 중일전쟁은 잘못된 침략전쟁이라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자 마치 해방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군부와 정치인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에 일본 국민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졌다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황은 전쟁 재가를 머뭇거렸고 일부 정치인은 끝까지 전쟁만큼은 막으려고 애썼으며 지식층에선 한탄을 토로했다.



현대의 우리는 수렁에 빠진 중일전쟁이 더 나쁘게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됐다고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인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당시의 중국통 다케우치는 중일전쟁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강대국인 미국 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밟은 전쟁이라는 감회를 말했습니다. 다케우치의 글에는 전쟁을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은 소설가이자 문예평론가였던 이토 세이의 일기에도 나옵니다. 그는 개전 다음 날인 12월9일 일기에 "오늘은 모두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고 밝다. 어제와는 전혀 다르다"라고 적었습니다. (...) 그렇다면 서민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주오대학의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쓴 <민초의 파시즘>에는 서민의 편지나 일기가 등장하는데, 이 책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야마가타현 오이즈미촌의 소작농 아베 다이이치는 개전한 날 일기에 "드디어 시작된다. 몸이 바싹 긴장되는 것 같다"라고 썼고, 진주만 공격의 전과가 발표된 12월10일에는 오후부터 농사일을 쉬고 반나절 동안 "신문을 보았다"라고 썼습니다. 화려한 전과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입니다. 
요코하마 시내 다카시마역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는 개전 당일 일기에 "역장에게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제까지의 나태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썼습니다. 난바라 시게루만 태평양전쟁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지식인 다케우치 요시미, 소설가 이토 세이, 농민 아베 다이이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 등 모두가 태평양전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364쪽




어떻게 방금 저지른 잘못(중일전쟁)을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똑같은 과오를 저지를 수 있을까?

대공황으로 대다수 일본인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누구나 강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듯이 1930년 대 대공황은 전세계인이 겪었던 일이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자신보다 몇 배나 강한 국가를 상대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에 대한 희열감과 자부심이 넘쳐난다.

히틀러조차 미국을 직접 공격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전력 상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건 독일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감행했고 일본 국민은 환호했다.  

그렇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이성을 갖춘 국가와 국민이라면 설령 전쟁을 수행할 목적과 능력이 있더라도 최대한 회피하려고 하지 우선 순위로 고려하지는 않는다.  



일본인 중에는 과거를 올바르게 보는 독일인과 그렇지 않은 일본인, 이런 식의 비교는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면 저도 그것을 근거로 올바르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중 하나가 포로의 대우입니다. 어떤 미국 단체가 미군 포로 병사 398명의 명부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 비율을 지역별로 산출했습니다. 그 데이터를 보면 일본과 독일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1.2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37.3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상당한 차이입니다. 포로를 대우하는 일본군의 방식이 굉장히 가혹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포로 문화가 없었던 일본 병사로서는 투항한 적국 군인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일본은 자국의 군인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성격이 결국 포로 학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
전쟁에는 식량이 필요합니다. 뉴기니 북부의 정글 등에는 자동차도로가 없습니다. 병사의 1일 주식은 600그램입니다. 최전선에서 5000명의 병사를 움직이려고 하면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주식만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3만 명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으로 식량을 보급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뉴기니 전선에서 병사들은 전사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아사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같은 책 418쪽에서 '뉴기니에는 제18군이 파견됐는데, 10만 명의 군인 중에 9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라고 구체적 수치를 들어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일본군의 체질은 국민의 생활에도 나타났습니다. 전쟁 중의 일본은 국민의 식량에 가장 신경 쓰지 않은 국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패전에 가까워질 무렵 일본 국민이 섭취하는 칼로리는 1933년 시점의 60퍼센트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일본은 1940년을 기준으로 농민이 41퍼센트나 있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일본의 농업은 노동집약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농민에게는 징집유에가 거의 없었습니다. 공장의 숙련 노동자에게는 징집 유예가 있었지만 말이지요. (...)
반면 독일은 달랐습니다. 독일은 일본보다 더 심하게 국토가 파괴됐습니다. 그러나 1945년 3월, 즉 항복 2개월 전 시점에 에너지 소비량이 1933년보다 10~2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전시체제 이전보다 좋아진 셈입니다. 독일은 국민에게 배급하는 식량을 절대로 줄이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전쟁은 군인에게도, 국민에게도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의 탄광에서는 많은 중국인 포로, 연행돼온 한국인 노동자가 일했습니다. 원래 포로에게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식량과 급료를 주어야 하고, 장교에게는 노동을 시키면 안 된다는 등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규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업장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장면은 점차 잊혀갔습니다. 일본의 병사와 국민은 자기 자신의 열악한 처지와 힘든 생활만을 기억했고, 그 기억으로 포로와 식민지 주민의 비참했던 모습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430~432쪽 中




늘 수동자이자 피해자의 시선으로만 바라봤던 근현대의 전쟁들-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및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행위 당사자 중 한 편의 시선으로 보니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분명히 깨달았다. 외교는 철저히 '기브 엔 테이크'이며 '전쟁은 비지니스'라는 걸 뼈저리게 절감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역사 인식의 폭이 확대되었다.



이 책은 일본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5일 동안 이뤄진 역사 강의를 묶은 것이다.

일본측 사료와 자료들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적절하게 통계 수치를 인용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갖고 있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대한 불편함과 의구심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변명하지는 않지만 역사적 과오에 대한 회한이나 반성보다는 오히려 전쟁 선택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바둑이나 장기 시합에서 패한 후, 복기하면서 다음번엔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는 건 똑같은데, 그게 패전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전쟁 자체에 대한 것인지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비록 저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이 전쟁을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가 다름 아닌 인명에 대한 경시가 아닐까 싶다. 

타인의 생명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조차도 쉽게 내던지는 일본인의 DNA에 오랫동안 새겨져온 생명경시풍조가 바로 전쟁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이자 주된 이유였다.  





일찌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들을 관찰한 후,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만약 그녀가 일본과 일본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관찰한다면, 뭐라고 했을까? 

'악의 순진성'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려는 의무를 저버린 순간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듯이, 자기희생이라는 의도의 순수함과 집단주의라는 행위의 숭고함에 경도되면 악을 행하고도 악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순수한 백치 상태, 즉 절대악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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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비교 통사 - 역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때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박은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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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중일 세 나라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서는 접해보지 못했다.

내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비교적 일찍(?) 한국 역사를 자신의 학문 세계에 포함시켰던 저자의 이 책조차도 2020년도에서야 출판되었으니, 한국의 역사관은 여전히 애국심 고취가 주목적인 국내용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한국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균형잡힌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저자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 친일파의 공격을 피하지는 못한 것 같다.


K-pop은 일찌감치 일본에 진출했건만 우리는 법적으로 일본 연예인의 국내 공연조차 금지하고 있으면서 BTS가 일본 TV에 나오고 공연 티켓이 매진된 걸 메인 뉴스로 알리면서 자랑스럽게 여긴다.

10여 년 전만해도 한국의 아이돌 지망생과 출신들에게 일본 시장은 실력을 쌓고 스타로 도약하는 발판이었다. 

이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춤과 노래를 배우려 오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건만 아직도 일본 노래나 연예인의 국내TV 출현이 금지되어 있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왜풍이 무서워서인가?

그렇다면 반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식민강점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어디 연예계뿐이랴.

역사 분야에서의 논란과 분쟁은 예상 외로 뜨겁고 끈질기다. 

물론, 독일처럼 전쟁의 유산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일본의 국내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정치 세력 역시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하면서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분쟁을 일삼고 있다.

이런 의도적인 분쟁에 한중일 세 나라 국민 모두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나라의 자국 중심적인(심지어 왜곡된) 역사 교육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으로 긴밀했던 세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이를 위해 세 나라 역사 학자들의 공통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연구한 대표적인 일본 역사학자로, 이 책은 한중일 세 나라의 공통된 주식인 '쌀'을 생산하는 농사 방법과 변화를 중심으로 세 나라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비교 분석한 책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했으나 읽기에 어렵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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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세 나라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달랐는데, 특히 중국과 한국보다는 일본의 이질성이 더욱 두드려졌다. 


우선, 유교(주자학)의 수용 면에서 그렇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중국과 한국 및 일본에 순차적으로 전래되어 고대 국가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한국에선 적극적으로 수용된 반면, 일본에선 에도 시대에 양명학이 일본 지식층의 관심을 끌었을 뿐 근대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과거제도의 유무였다.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료를 뽑는 과거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국과 한국 및 베트남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제도였다. 

세습 귀족을 억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채택된 과거 시험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대로 세습되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단히 근대적인 제도였다. 과거 제도 덕분에 중국과 한국에선 전문적인 시험준비과목이자 학습서로써 주희의 주자학이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중세를 마무리하고 근세로 접어든 조선 역시 고려의 문벌 귀족 대신 유학자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 반면, 문(文)보다는 무(武)가 지배적이었고, 무사 출신인 쇼군에 의해 다스려졌던 일본에서는 과거 제도가 수용될 수 없었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통치 시스템이 절실했던 에도의 지배층은 조선을 통해 유학에 접근했지만, 충(忠)보다는 효(孝)를 숭상하는 주희의 주자학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국 전국 시대에 공자에 의해 창시된 유가의 가르침, 곧 유교는 한대(漢代)에 국교가 된 이후 국가체제에 큰 영향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주자학 이전의 유교는 사상으로서 체계화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특히 불교가 유입되고 나서는 지배적인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따라서 주자학은 장대한 체계를 가진 불교에 대항하는 가운데 태어난 새로운 유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주자학의 성립을 전후하여 유교 자체의 면목이 완전히 일신되었다. 더욱이 주자학의 탄생은 그것을 낳은 계층인 과거(過擧) 관료층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존재 양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4쪽

중국 화북의 농업은 그 기후적 조건 때문에 축력(畜力)의 이용이 불가피하므로 가족 경영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역축(役畜)을 소유한 대경영과 거기에 보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영세 경영 내지는 예속적 노동력의 존재라는 이중구조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약도작의 발전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시켜 가족경영의 보편화를 초래했다. (...) 송학(宋學), 특히 주자학은 이와 같이 대두한 농민층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를 강하게 의식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생래적인 신분의 차이를 부정하고, '배움'의 차이를 통해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주자학은 귀족적인 체제를 부정하고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통해, 즉 실력으로 지배 엘리트가 된 사대부층에 적합한 사상이면서 동시에 경영 주체로서 성장해 온 '민(民)'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자각적으로 의식하는 가운데 성립한 것이다. -46쪽




그 다음은 지배구조였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한국은 일찌감치 조공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군신 관계를 구축했다. 

한국이 중국 대륙을 천자로 받들고 신하의 신분에 머물렀던 가장 큰 원인은 원에 의한 침략과 100여 년에 걸친 원간섭기로부터 기인한다. 원이 멸망하고 고려가 다시 일어섰더라면 한국 역시 일본처럼 무를 중시하는 체제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학을 신조로 삼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중국 대륙을 천자로 스스로를 낮춰 자발적으로 신하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국 대륙이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음에도 이미 사라진 명을 떠받드는 건 무엇 때문인가?

이건 명분일 뿐이다.

이미 지배세력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사대부로선 새로 부상하는 학문이나 사상 체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당시 사회에 필수불가결할지라도 문호를 개방하기보단 쇄국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조선 근해에도 서양 선박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이들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정부는 그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특히 청과의 책봉 관계를 내세우면서 독자적으로 외교를 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거부의 이유로 삼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취했다. 그러나 유럽이나 세계정세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부족한 상태로 17,18세기 서학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도 외부세게에 대한 관심은 매우 약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이 되어 유럽이나 미국, 나아가 일본이 무력을 배경으로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대 적절한 대응을 어렵게 했다. -150쪽




반면, 중앙집권화도 통일된 사상이나 사회체제도 아직 성립되지 않았던 일본은 15세기 초반 서구에서 시작된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종착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엔 태평양과 동지나해까지 이어지는 일본 제도의 지리적인 이점과 섬이라고 하기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일본에 비해 황해와 동해가 마치 호수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륙 깊숙이 폭 들어앉은 한반도는 영토도 작았고 인구도 적었다. 여기에 더해 체제 수호 경향이 강한 중앙집권적인 왕국 체제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대항해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에겐 조선은 그냥 지나치는 간이역이었다. 




마지막으로, 군현제이냐? 봉건제이냐? 의 차이점이다. 

모든 통치자는 직접 통치를 지향한다. 그러나 다스리는 영토가 넓을수록 다스려야하는 인구가 많을수록 중앙집권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리자에게 땅을 나눠주고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여 영토를 수호하면서 황제를 대신해 다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는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봉건제는 지역 봉건 영주의 힘이 커지고 황제의 힘은 약해지는 생태적 특징으로 군사적 충돌과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국은 봉건제와 군현제가 번갈아 등장하다가 수당을 거쳐 송(宋) 대에 이르러서야 군현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한국 역시 삼국 시대라는 혼란기와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를 거쳐 송과 동시대인 고려에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군현제가 정착된다.  

반면, 일본은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전국시대에 들어선다. 전국시대는 일본의 봉건 영주인 다이묘(번주)들 간의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로 60여 년 간 이어진 이 혼란기를 오다 노부다가가 끝내면서 일본도 중앙집권화로 접어들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예상치 못하게 빨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후 일본은 도요토미와 이에야스를 거치면서 서서히 덴노-쇼균-다이묘로 이어지는 봉건체제가 구축된다.

중세 서양의 봉건제와 가장 흡사한 사회 구조였던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봉건제라는 사회구조 덕분에 동아시아에서 발전이 가장 뒤처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먼저 서구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른바 '서양의 충격'에 직면하게 된 동아시아 각국은 무엇보다도 구미의 군사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은 참으로 파란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 과정을 규정한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서구에서는 18, 19세기에  형성되는 국민국가의 체제와 유사한 체제를 동아시아의 국가, 특히 중국과 조선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
이러한 유사성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서양의 충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 특유의 어려움을 부과했다. 즉 양국에서도 19세기 말기가 되면 국가체제의 개편이 과제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으나, 과연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 파악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아시아 가운데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농업 면이나 문화 면에서의 공통성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와 공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국가체제 면에서는 동시기의 중국,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유사성의 다수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양의 충격'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크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곧 무엇보다도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던 구미에 대해, '무위(武威)에 의한 평화'를 체제이념으로 한 막번체제로서는 그 존립기반을 곧장 위협받는 것이 되므로 부득이 민첩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154쪽




'왜 유럽인가?

라는 질문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티즘"라고 답했다. 

나는 한 때 이 말을 철썩같이 믿었더랬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을 읽어본 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네가 아니고 나니까"라는 대답처럼 결과론적인 혐의가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뛰어난 문헌고증학자이자 사회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는 유럽인이라는 원초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 학문적으로 그 안에 안주해버렸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윤리>는 철저하게 유럽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럽의 세계화 분석에 불과하다.  



'왜 일본인가?'

늘 품게 되는 질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리더는 누가 봐도 세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중국(청)이었지 변방의 섬나라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동안 너무 한국인다운 사고 패턴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비한국인의 사고 방식을 알기 위해 스스로 비한국인의 길을 택할 필요는 없다. 비한국인을 편견없이 바라보려는 노력만으로도 시야가 확대될 수 있다. 

고개 숙여 자세히 보기 전에 우선 고개 들고 멀리 봐야 한다. 그럼, 세상은 두 배로 넓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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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이우형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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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90년 대 이후 언론 표현의 자유와 함께 현대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몰랐던 현대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하고 정치가 바로 서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쓰여진 반쪽짜리 역사 교과서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나에게 현대사는 마치 희뿌연 안개가 잔뜩 껴있는 것처럼 희릿하고 헷갈렸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 하나씩 퍼즐이 맞춰졌다. 그동안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미친듯이 분노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제대로 알았으니 제대로 평가하고 분노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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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책은 1863년 고종 직위 즉 흥선대원군의 집권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60년 세도정치를 끝낸 후 흥선대원군의 초기 10년 집권기는 어쩌면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잘 알다시피 뼈속까지 전근대적 인물일 뿐이었다. 


젊은 고종과 민비가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것까진 좋았으나 역시 미래를 내다보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에는 식견이 부족했고 주변엔 매관매직으로 제대로된 관리와 인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왕과 왕비 주변에 모여드는 건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는 간신배들 밖엔 없었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면서 외국을 경험하게 된다.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면서 메이지유신으로 환골탈퇴한 일본을 보게 된다. 


어쩌면 이때가 마지막 터닝포인트였을 수도 있다.  

당시 일본에선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탈아입구론이 대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아입구론이란, 일본이 앞장서서 아시아의 영국이 되고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를 서유럽처럼 발전시키겠다는 말 그대로의 '대동아발전론'이다. 만약 이때 1854년 미국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켰을 때 일본처럼 개국을 택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조선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만다. 

결과론적이지만, 갑신정변이 설령 성공했다치더라도 조선의 개국과 발전이 일본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일단, 조선에겐 일본이 15~16세기 서양과 교류했던 경험 자체가 부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일본은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조선이라는 디딤돌이 있었고 임진왜란을 통해 일찌감치 이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조선에겐 그런 존재 자체가 없었다.  

결국, 구한말 조선에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상황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20세기 초, 조선은 선진국처럼 발전과 경쟁의 역사 대신 대립과 저항의 역사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선 지역이나 세대에 상관없이 심지어 남북한 모두 일치된 견해와 목소리로 가르치고 배운다. 물론, 개별 사안이나 사건 혹은 인물들에 관해선 자료 부족이나 해방 이후 시대적 정치적 이유들로 날조 왜곡된 경우는 예외로 한다.


문제는 해방 이후의 역사다. 

사람마다 세대마다 내용과 편차가 너무 커서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제각각이다. 

단일 민족이 그것도 현대사에 대해 이처럼 이질적이고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다.

나는 우리나라가 국토나 인구 및 경제력과 문화 수준에 비해 내부 분열이 심각한 원인 역시 해방 이후의 역사 인식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동아일보의 모스크바 3상 회의 오보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16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러시아, 영국의 외상이 모인 회의로, 이 회의에서 미국은 신탁 후 독립을 주장한 반면 러시아는 즉각 독립을 주장했었는데 이 사실이 정식으로 공표되기 하루 전날 동아일보가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한 반면 러시아는 신탁 후 독립을 주장했다고 정반대로 보도를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단순한 착오였을까?'


조선인이 신탁통치를 반대할 것이라는 건 명약관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남북한 전역에서 동시에 신탁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바로 이틀 뒤, 소련이 들어와 있는 북한에선 찬탁으로 돌아선 반면 남한에선 반탁 시위가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때 친일파들이 모여 만든 한국민주당이 가장 활발하게 반탁 시위를 전개하면서 '찬탁=빨갱이, 반탁=애국자'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면서 친일파에서 반공친미파로 신분 세탁에 성공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외교독립 운운하며 있지도 않는 나라의 자치권을 미국에 구걸했던 친미파 이승만이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다. 

한반도에 공산주의 독립정부가 들어설 것을 우려해서 신탁을 주장했던 미국으로선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고, 8.15 해방 직후 미국이 자국의 이득을 지켜줄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이승만은 철저하게 미국과의 약속을 수행한 것에 불과했다.  전범국인 일본이 독일처럼 분할되었어야함에도불구하고 미국이 태평양 전략으로 일본을 살리고 조선을 희생시킨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본토를 공격한 적국임에도 처음부터 일본편이었고 오늘날에도 이 정책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는 강대국이 진행하는 게임판의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말(일본)을 위해 내놓는 한낱 '쫄'에 불과했다. 


이준 열사가 죽음으로서 참가하고자 했던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외친 안중근 열사의 '코레아 우라!'...

끝까지 조선 독립군의 2차대전 참전를 반대했던 연합국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김구선생님의 입국조차 막았던 미군정...


이 모든 게 그저 역사의 불운이요 우연이었을까?

주사기 던지기처럼 다시 던지면 또다른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을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일어날까?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조선 스스로 변하지 않는 한, 상대는 바뀔지 몰라도 우리가 겪어야 하는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식민지배를 받았을 것이며, 분할되었을 것이고, 내전을 치러야했을 것이다. 


역사는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라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동영상 한 편을 봤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부가 직접 연주하고 부른 존레논의 <Imagine>이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고, 의도를 알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뿐, 그저 안타까운 연민이었다. 

그리곤 뒤이어 예기치 못했던 깨달음과 마주쳤다.


'이준열사의 할복 기사 사진과 내용을 접한 세계인들이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간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접한 세계인들은 어리둥절했겠구나!'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평화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타인의 시혜에 의한 행복 역시 그림의 떡일 뿐이다.

 



2010년 이후부터 각양 각색의 역사책과 강좌 및 관련 TV 프로그램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현대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세대별로 다르게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 원인은 그동안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된 역사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만 탓할 게 아니다.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앞으로 30년 60년이 흐른 뒤 내 자녀와 손주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이길 바라는지 그때 그들에게 어떤 조상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한번쯤은 꼭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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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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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국사다.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이어 인도와 중국 및 일본의 역사를 훑어본 후, 마침내 한국사에 이르렀다.

한국사는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과 저자의 관점에 따라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다르게 설명되며 나 또한 나이 먹어 감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2000년 대 초반에 나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우리 역사 책으로, 80~90년 대 좌파적 역사 사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선 누락(?)되었던 발해를 통일신라와 같이 한반도의 역사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라는 표현 대신 '남북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발해에 대해선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를 쓰면서 처음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되었단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 80년 대까지 우리나라 역사계에선 철저히 무시되었다가 2000년 대 초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로 발해를 완전한 한반도 역사로만 편입시키려는 주장이 펼쳐졌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발해사는 어느 한 나라의 역사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100% 고구려인이 아닌 혼혈이었으며 인구수로만 보면 말갈 등 북방 유목민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본 역사서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분명히 밝히고 신라와 당에 대해선 끝까지 적대적이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앞으로 발해사에 대해선 러시아, 중국, 남북한의 더욱 활발한 공동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였다. 

소수림왕이 다지고 광개토대왕 때 드넓은 영토를 정복해서 장수왕 때는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어째서 갑자기(아무런 설명도 없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으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꼽고 있다.


"15년(427년)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중 <고구려본기>, 장수왕조 (p48)


잘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에서 기록된 역사서다. 그러니 고구려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는 없지 않았을까. 김부식이 이렇게 짧게 사실만을 남겨놓은 건 실제로 이유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라와 백제를 치기 위해서 15년(427년)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당시 중국 대륙은 588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5호 16국 혼란기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당연히 우선 등 뒤를 안전하게 만든 후 대륙 진출을 노렸을 것이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 백제를 한강 이남으로 밀어냈지만 백제의 저항과 군사력이 만만찮았고 수, 당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힘이 빠졌는데 이때 신라가 당나라와의 연합이라는 신의 한수를 꺼내들면서 고구려는 진퇴양난에 빠져 급격히 기울고 만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고구려의 국운이었을 뿐이다. 만약,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겠지만 그게 반드시 고구려의 삼국통일과 대륙 차지라는 영광의 역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한반도와 대륙 사이에 자리한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대륙 세력과 맞부딪혀 먼저 무너졌다면 백제와 신라까지 오늘날엔 중국 대륙과 한 나라가 되어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장수왕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연개소문에 대해 살펴보자.

북방 오랑캐를 물리친 자랑스런 고구려 장수에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매국노(?)라는 혹평까지 고대사 인물들 중 연개소문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연개소문이 영양왕을 퇴위시키고 보장왕을 왕으로 추대한 가장 큰 이유로, 영양왕을 필두로 한 대신들이 당에 대해 사대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수 문제 시절 먼저 수나라를 공격했다가 수 양제 때 세 차례에 걸쳐 침략을 당하지만 모두 잘 막아냈다. 그 유명한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 등이 모두 선비족인 탁발 씨가 세운 수나라에 대한 승리였다. 고구려 정벌과 패배로 국력이 급격히 떨어진 수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 역시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당 태종과 고종 모두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도 연개소문이 잘 막아냈다. 하지만 신라 김춘수 등이 당과 연합하여 백제(660년 멸망)에 이어 고구려(668년 멸망)도 무너지고 만다. 연개소문은 666년 사망할 때까지 대륙의 공격을 꿋꿋히 버텼지만 그가 죽은 후 세 아들이 모두 나라를 나누어 당과 신라 등에 갖다바쳤다.

결과적으로,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를 팔아먹었다는 말이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다. 



한편, 찬양 위주로만 배웠던 (통일)신라에 대해서도 빛과 그림자가 모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영토 2/3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는 게 '신라의 그림자'라면, 일찌감치 당의 야욕을 파악해 당과의 전쟁을 미리 준비해 물리쳤다는 건 '신라의 빛'이라 하겠다.

만약, 이때 신라의 기득권층이 19세기 말 조선처럼 스스로 자강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사치와 세도정치를 일삼으면서 민란마저 청과 일본 군에 의지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국사력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부족했지만 지도층의 솔선수범으로 약점을 보완하여 백성들의 희생과 일치단결을 이뤄냈다.

나는 (경상도 출신이 절대 아니지만) 신라의 아니 우리민족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똘똘 뭉치는 것!

어렵고 불가능할수록, 똘똘 뭉쳤다. 

직면한 난관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협력의 규모가 가족이나 씨족, 마을, 국가 등으로 확대되어 언제나 우리끼리 똘똘 뭉쳤다. 

집안에선 싸우던 형제 자매도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선 하나로 뭉치듯 나라 안에선 티격거려도 밖에선 하나가 되는 게 바로 우리민족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신라가 운좋게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은 역사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했던 말이요 믿었던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중세인 고려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무기를 내려놓고 문화인이 되어 간 시기'라고 하겠다. 

모든 문명은 풍요 속에서 싹터 사치와 향략 속에서 발전한다

덕분에 고려인은 현대 기술로도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비취빛 고려청자와 일독하는데 30년이나 걸린다는 팔만대장경 등 빼어난 문화유산을 남겼지만 무를 버리고 문을 숭상했기에 나약했다. 사람이 약하면 비굴해듯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거란족으로부터 외교 담판으로 서희가 강동 6주를 얻어낸 것과 강감찬 장군의 살수대첩 승리는 거친 야만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 마지막으로 타오른 불꽃이었다.   

저자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서희의 담판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나는 우리 민족의 기개가 이때 정점을 찍고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국력은 겉으로 들어나는 역사적 사실이 전부가 아니다. 행동은 과감했고 결과는 좋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호연지기로 가득차 부풀어오르는지 아니면 온힘을 다한 위기의 순간이 끝나고 '휴~'하고 한숨을 몰아쉬는 상황은 분명 다르다.


전자라면 계속 도전하면서 실패와 발전을 거듭해 성장해 나가지만, 후자라면 모든 일에 겁부터 집어먹고 머뭇거리면서 후퇴하게 된다. 


경제는 파탄났고 무신의 난을 불러왔으며, 이는 신분 질서의 파괴로 이어졌다.



고려는 결국 몽골 제국의 지배와 간섭기에 들어갔다. 물론, 강화도에서 항쟁하다가 강화를 하고 나왔기 때문에 조선의 인조처럼 아홉번 무릎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친조의 예'를 강요당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한 번 꺾인 기상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패배 의식에 갇혀 버렸다. 

범죄자들이 실제로는 모지리에 찌지리들이 많듯이 악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가 행하는 법이다. 짙은 패배감은 마음속 열등감으로 자라나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행태로 뿜어져 나왔다.  


지배 계층은 단순히 넘쳐나는 풍요를 누리고 즐기는 사치에서 벗어나 다 쓰지도 못하고 다 먹지도 못할 곡식들을 창고에 쟁여놓았다.

쌓고, 쌓고, 또 쌓고....

탐욕의 시작이었다. 

마음이 빈곤하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듯 백성들을 아무리 수탈하고 짜내도 문벌귀족들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은 그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반기임에는 분명하다. 몽골이 무너져 내정간섭도 없으니 신돈을 내세운 공민왕의 개혁이 성공한다면 고려는 다시 일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몽고 간섭기에 성장한 문벌귀족 등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너무나도 거샜다.  

하여, 나는 조선의 건국 자체에 대해선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건국이념을 성리학에서 찾았다는 게 악수라면 악수였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으니 이념으로 시작한 조선은 결국 이념 논쟁에 빠져 침략을 당했고 또한 무너졌다. 

500년 동안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백성과 후손에겐 비극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2000년 대 초반부터 갑자기 문사철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어엿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한 것 같다.

공자 및 소크라테스 등등 동서양의 고대 철학과 칸트와 니체 관련 책들과 강연들이 한동안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트로이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 등으로 강력했던 그리스 폴리스들이 소크라테스 등장 이후 이념과 철학 논쟁에 빠져 무너졌다는 걸 알기나 하고 열광하는 걸까?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탄생한 백가쟁명은 평화로운 시기엔 하등 쓸모가 없건만 중앙집권화와 과거제도의 실시로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에 도전하기보다는 "공자 왈, 맹자 왈" 암기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인구에 그 발달한 상공업을 가졌던 나라치고는 그 뒤의 역사가 너무 비극적이지 않은가. 

좀 심하게 표현하면, 문사철의 인기는 인문사회계열 출신 386세대들의 지적허영에 찬 글쓰기와 토론문화를 하나의 상품과 산업으로 만든 것뿐이다.

무슨 새로운 발견이나 철학 혹은 이론이나 책임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 옛날 주희가 더 옛날 책들을 읽고 토를 달았듯, 그들도 똑같이 이미 쓰여진 책들을 읽고 해석할 뿐이다. 다만, 오늘날엔 그 대상이 동양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교육방송의 <위대한 수업> 시리즈는 반갑고도 놀라웠다.

과학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인문 분야에서도 기존 이론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독창적 사상이나 깊이있는 관찰과 분석적 사고를 통한 철학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성리학으로 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율곡 이이를 따르는 서인과 퇴계 이황을 따르는 동인에서 출발해,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나누었다. 

왕을 퇴위시키는 것도 모자라 독살하고 서로 모함하여 떼죽음으로 내몰고, 그러다 전쟁 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의 양반들은...  다 부질없는 탁상공론과 트집잡기에 사람 목숨만 날아갔던 헛된 입씨름들만 한평생 하다가 갔다. 

나는 지금까지도 조선의 당쟁과 사화가 헷갈린다.  열심히 기억할 일말의 가치조차 없지만...



정조라는 어질고 유능한 임금 한 사람만으론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돌려 놓기에는 너무 멀리 그리고 오래 흘러왔다. 


청이 건륭제를 끝으로 19세기 내내 몰락한 것처럼 조선도 정조 대왕이 이른 나이에 죽자마자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글자 하나 모르는 강화도령을 임금으로 앉히질 않나... 두 살짜리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켜 달라고 무너져가는 청의 서태후와 리훙장에게 수십 만 개의 금은괴를 보낸 왕비가 있질 않나.... 5년 동안 관리에겐 봉록을 지급하지 못하고, 군대에게 13달치 밀린 봉급 중 그것도 기껏 한 달치만 지급하면서 모래와 돌을 섞질 않나... 나라 곳간은 텅텅 비었건만 금강산 1만1천 봉 한 개마다 쌀 한 섬과 베 한 필을 바쳤다 하니, 그런 나라가 아니 망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힘들어서 더이상은 못 쓰겠다.

이 다음부터의 역사는 이미 흘러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일어나 겪고 있는 현실인 것마냥 힘들고 괴롭다.   

어째서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괴롭고 슬픈걸까?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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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 - 18세기 산업혁명에서 20세기 민족분쟁까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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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알면 현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750년 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21세기 초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을 집어준다. 

세계사임에도 마치 유럽 근현대사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18~20세기가 아시아와 중동이 아닌 유럽의 세기였고 그때 구축된 질서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등 나라명 하나만 봐도 두 민족 이상이 결합되었다는 걸 알 수 있고, 결국 오늘날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도 19세기부터 시작된 영토를 기본으로 한 국가 체제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 발 앞서 국가 시스템을 구축한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과 지역에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어느 민족이 어느 민족을 침략했고 어느 나라가 영토를 잃었으며 또 넓혔는지를 따지는 건 역사 인식의 과정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결과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오늘날의 관점으로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는 것 역시 역사를 올바르게 대하는 자세가 아니며, 자연법칙과 같은 불변의 인과률을 역사 속에서 찾아 현대와 미래에 대입시켜 적용하려는 것도 위험하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는 평화롭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뒷물결이 앞물결을 힘차게 밀어내며 강물이 흘러가듯, 크고 작은 물리적 충돌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이었다. 




모든 건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학창시절 벼락치기식 암기로 끝냈던 역사적 사건들의 발생 원인과 과정 및 영향 등을 쭉 훑고 나니, 역시 역사 공부는 암기가 아닌 이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흥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나로선 소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감상이 배제된 건조한 문체가 익숙치 않고 불편했는데, 한 줄 한 줄 한 문단 한 문단 꼼꼼하게 읽고 나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걸 균형감각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평소 역사 관련 TV프로들을 즐겨 보면서 유명한 이들이 쉽고 재밌게 설명해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게 마치 설탕에 중독된 것처럼 나쁜 습관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이들의 해석과 설명에 의지하게 되면, 스스로 비교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출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역사는 잘 몰라."

"나는 정치는 잘 모르는데..."

라는 말은 결코 겸손이 될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선택한 우리나라에서 대표를 제대로 뽑으려면 당연히 정치를 잘 알아야 한다. 정치란, 한 마디로 '지금 세상이 굴러가는 상황과 이치'라 할 수 있다. 과거를 알고 있으면 현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니, 과거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되며, 더더욱 타인의 판단과 해석에 맡겨서도 안된다.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나는 역사를 배우고 알고 싶어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상이 누구이며 어떤 삶의 과정을 살았는지를 안다면 현재의 내 모습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에 반드시 이해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이해하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과거를 잘 알고 제대로 이해한다면 현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현재를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더 나은 오늘과 미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인생과 같아서 항상 즉흥적이다.'라는 카보우르의 말은 틀렸거나 해석(번역)이 잘못됐다. 

역사는 때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 즉흥적으로 보일 뿐, 즉흥적인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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