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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97년 6월
평점 :
이 책은 1988년 1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엔 이듬해인 1989년 1월에 소개되었다. 당시로선 유례없을 정도로 빨리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이 책이 미친 충격파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기체의 생로병사에 따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토인비식 문명사관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적한 네 가지 우상 중 '인종우상 '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인종우상'이란 자연 현상을 포함하여 모든 걸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생명체(특히 인간)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설명하는 오류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폴 케네디는 1500년부터 2000년까지 약 500여 년간의 문명을 다루면서,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신봉하는 왕조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라는 둥, 천명이 다해 멸망했다는 식으로 과거 역사를 의인화(?)하지 않는다. 인종우상을 철저히 배격한 것이다.
폴 케네디에 따르면, 15세기 이후 근대 시대부터 한 나라(집단)의 성장과 멸망은 철저하게 개개인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결과였다.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되고 체계적인 관리제도를 갖추고 있었던 동양에선 개개인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그럴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화약과 나침반 및 정화의 원정 등등... 동양은 능력과 기술은 갖추었으나 의도와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분권적이고 종교적 열정이 가득했던 중세를 지난 서양은 달랐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용병과 무기가 발달했다.
결국, 필요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도전이 성공이라는 자식을 낳았던 셈이다.
유럽의 분산된 국가체제가 통합의 큰 장애였다는 것은 그렇다고 동어반복은 아니다. 당시 많은 수의 경쟁국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수단을 갖추었거나 돈으로 구비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어떤 나라도 혼자서 대륙의 지배권에 성큼 다가설 수는 없었다.
이같은 유럽국가들의 경쟁적 상호작용을 가지고 통일된 '화약제국'의 부재는 설명할 수 있겠으나 유럽의 세계주도권을 향한 꾸준한 부상은 쉽게 설명할 없다. 1500년에 신흥군주국들이 소유한 군대를 술탄의 어마어마한 병력이나 명제국의 대군 앞에 맞세워 놓았다면 아주 초라한 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초, 어느 면에서는 17세기까지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군사력의 균형은 서양에 유리한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같은 변화의 설명 역시 유럽의 세력분산에서 찾아야 한다. 세력분산은 무엇보다도 도시국가들, 나중에는 보다 큰 왕국간의 초보적인 군비경쟁을 유발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인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의 유능한 군대가 봉건기사와 그 수행자 대신 특정도시의 시장이 감독하고 상인이 봉급을 지급하는 창병, 석궁사수와 (이를 호위하는) 기병대료 고체되자 용병대장이 실속을 다하려고 무진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고용한 상인과 시장이 그들에게 돈값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바꿔 말하자면 도시는 일거에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무기와 전술을 요구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비용을 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15세기 후반 프랑스 왕들은 '국민'군을 자기 휘하에 두고 월급을 주면서 이 군대가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기를 고대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유시장체제하에서 많은 용병대장들이 서로 고용계약을 차지하려고 다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공업자와 발명가들 역시 새로운 주문을 얻기 위해 제품개선에 몰구하였다. 이같은 무기의 개선은 15세기 초 석궁과 장갑용 철판제조업에서 나타났으며 마침내 그후 50년이 못되어 화약무기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대포가 최초로 사용되었을 때는 그 형태와 성능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커다란 단철포신으로 돌포탄을 쏘면서 굉장한 폭음을 낸 대포는 가히 인상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성능이 대단하였다. 그 대포는 투르크군이 1456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포격할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지속적인 개량의 자극은 아마도 유럽에만 있었던 것 같다. - 49쪽 '서양의 부상' 중-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무모한 '베팅'은 성공했다. 다만, 그들을 부의 길로 인도한 건 절실히 원했던 동양의 향신료가 아니라 신대륙의 은이었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에게 유린당하고 멸망했듯, 半문명인에 불과했던 서유럽인들에 의해 신대륙의 제국들은 순식간에 몰락해버린다. 그렇지만 맹목적인 믿음만 있을 뿐 신의 선물을 제대로 활용할 소양을 갖추지 못했던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신대륙에서 얻은 부를 동양의 사치품을 사들이는데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데 돈을 쏟아 부었다.
이 과정에서 물자의 이동이 늘어나면서 유럽의 변방과 소국에 불과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재빠르게 기회를 포착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고대 아테나와 중세의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을 모방하다가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실물경제의 범위를 넘어 비실물경제 즉 우리가 말하는 '금융경제'이라는 걸 만들어 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유럽의 '금융혁명'을 부채질한 가장 크고 지속적인 자극요인은 전쟁이었다. 펠리페 2세 때와 나폴레옹 때의 재정 부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 경제적 의미에서 볼 때 강대국간의 끈질기고 빈번한 충돌이 서양의 상업과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기보다는 촉진하였는지의 여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한 나라의 절대적인 성장을 긴 분쟁 전후의 상대적 번영과 힘과 무관한 것으로 평가할 것인가의 여부에 상당히 좌우된다. 분명한 것은 가장 번영하고 근대화된 18세기 국가들도 이 당시의 전비를 경상수입으로 즉각 감당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중세는 세금을 거두어들일 기구를 갗추었다 해도 국내의 저항을 유발할 공산이 컸으며 이는 모든 정부가 두려워하는 바였다ㅡ특히 외부의 도전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정부가 전쟁을 적절히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차입ㅡ공채와 관직을 팔거나 아니면 국가에 돈을 납입한 모든 사람에게 이자부 양도성 장기증권을 매각하는 것ㅡ이었다. 자금의 입수가 확실해지고서야 관리들은 군납업자, 식료품상인, 조선업자 그리고 군인들에게 지불을 보장할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자금을 조달함과 동시에 지출하는 양면체제는 많은 점에서 서양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발전을 부채질하는 풀무와 같았다. -121쪽 '금융혁명' 중-
한자동맹 등을 통해 발트해 연안 무역을 장악했던 네덜란드는 대서양으로 규모가 커지자 국토 면적과 인구 규모로는 새로운 대항해 시대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런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영국이 메꿔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그 당시 유럽의 강대국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따돌릴 수 있었을까? 아니, 프랑스는 어째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까?
'새옹지마'처럼 인간의 의지가 배제된 신의 변덕이 작용한 것일까?
영국의 노력과 의지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남달랐던 건 결코 아니었다. 여기엔 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꿔 말하면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단점이 곧 장점으로 바뀐 과정'이 있었다.
18세기의 영국은 상공업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집요하게 성장한데다 재정신용도는 탄탄하며 우연하고 상승적인 사회구조였는데 반해 구제도의 프랑스는 실속없이 위험하기만 한 군사적 오만에 빠져 있으며 경제는 낙후되고 엄격한 계급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전통적 관념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의 세제가 영국의 세제보다 더 진보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면에서 18세기 프랑스의 경제는 비록 석탄과 같은 기간품목의 자원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산업혁명으로 도약할 조짐을 보였다. 프랑스의 군비생산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수많은 노련한 기술자와 몇몇 내로라 하는 기업체도 있었다. 훨씬 많은 인구와 고도의 지약농업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는 이웃한 섬나라 영국보다는 훨씬 부자였다. 정부수입이나 군대의 규모에서도 프랑스는 서유럽의 어떤 라이벌도 압도하였다. 통제경제 체제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 정부에 비해 훨씬 큰 응집력과 형안을 지녔다. 따라서 18세기의 영국인들은 영국해협 건너의 프랑스를 응시할 때마다 자기 나라의 강점보다는 상대적 약점을 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체제는 재정 부문에서 결정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전시에는 국가의 힘을 제고하고 평화시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영국의 전반적인 세제는 프랑스ㅡ 즉 직접세보다는 간접세에 크게 의존하였다ㅡ보다 뒤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한 양상으로 말미암아 인민들의 원성은 훨씬 적었다. 예컨대 영국에는 프랑스와 같은 세금징수청부인, 세리와 중개인들이 없었다. 영국의 과세는 거의 '보이지 않는' (많은 기본품목에 대한 소비세) 형태이거나 외국인을 겨냥(관세)했다. 영국에는 국내 통행세가 없었으므로 프랑스 상인들은 사기가 저하하였고 상업의 발달이 저해되었다. 영국의 토지세ㅡ18세기 거의 전기간을 통해 주된 직접세였다ㅡ는 어떤 면세특권도 없었으며 이 또한 사회의 대부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각종 세금은 선출된 의회에서 토의된 후 승인되었는데 영국 의회는 많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구제도보다는 훨씬 대의적이었다. -124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요컨대 구제도하의 프랑스는 그 규모와 인구, 부의 면에서 언제나 유럽 최대였지만 '초강대국'이 될 만큼 크지도 효율적으로 조직되지도 않았으며 육지가 제한되어 바다로 눈길을 돌려봐도 자신의 야심이 초래하기 마련인 적의 동맹을 압도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행동은 유럽세력의 다원성을 뒤엎은 것이 아니라 공고히 하였다. 다만 혁명에 의해 국력이 쇄신되고 나폴레옹에 의해 잘 운용됨에 따라ㅡ일시적으로나마ㅡ대륙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성공은 일시적이었으며 군사적 재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러시아와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을 오랫동안 통제할 수 없었다. -136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17세기까지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는 동양의 제국들과 더 흡사한 사회 구조였던 것 같다.
'국왕이 멀쩡히 존재하는데도 대표자들로 이뤄진 의회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국을 바라보면서 프랑스는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작은 섬나라가 고대 그리스 자치도시를 흉내내면서 혼란을 자초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과거는 언제나 현재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강했을 테니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영국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지나온 과거보다 언제나 더 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이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이면서도 착각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확증편향' 중 하나다.
물론, 영국의 정치혁명과 금융혁명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며 독립적으로 진행된 것도 아니다.
의회민주주의에 따른 정치혁명은 종교투쟁을 거친 의식혁명의 결과였고, 의식혁명으로 몽매한 상태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탐구와 과학적 발견이 뒤따르면서 산업혁명을 불러올 수 있었다.
동서양의 대분기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종교를 버리고 과학을 택한 영국과는 달리 중국과 인도 및 오스만 제국은 수학, 천문, 의학 등 기초 과학이 종교적 교리와 충돌하자 종교를 위해 과학을 (덮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지식인과 성직자의 이해득실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중앙관료제 사회에서는 새로운 사상과 혁명이 위로부터 아래로 퍼져나간다는 건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자체적인 제도가 탄력을 받아 규모가 점점 커지자, 이 새로운 게임에 진입하는 사람들과 지역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이 되는 건 시간문제요 이때부턴 힘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 유명한 영국의 해군력은 경제 성장과 함께 발전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필두로,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내 라이벌 국가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대륙까지 영향력을 과시한다.
18세기의 러시아의 지위를 정확히 서열짓기는 쉽지 않다. 군대는 대체로 프랑스보다 규모가 컸고 주요 제조업 분야(직물, 철)에서도 훨씬 앞서 있었다. 어떤 라이벌국가도ㅡ적어도 서쪽으로부터ㅡ러시아를 정복하기에는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곤란하였다. '화약제국'이라는 지위 덕분에 러시아는 동쪽의 유목민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력, 천연자원과 농경지를 추가로 획득함으로써 강대국 대열에 뛰어 들 수 있었다. 러시아가 정부통제 아래 여러 방식의 근대화운동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나 그 속도나 정책의 성공에는 과장된 부분이 다소 있다. 아직도 후진성의 징후가 많이 남아 있었다. 즉 엄청난 가난과 야만성, 너무나 낮은 1인당 소득,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매서운 기후, 기술과 교육의 낙후성뿐만 아니라 로마노트가의 반동적이고 천박한 인물들이 그것이다. 뛰어난 에카페리나대제까지도 경제와 재정문제에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18세기 유럽의 군사조직과 기술의 상대적 정체 덕분에 러시아는 외국의 전문기술을 빌어 자원이 적은 나라들을 따라잡고 앞설 수 있었다. 초강대국의 이러한 무자비한 이점은 다음 세기의 산업혁명으로 전쟁의 규모와 속도가 바뀌고 난 뒤에야 소멸하게 된다. -143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만약, 엄청난 국토와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가 표트르 대제의 열망처럼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18세기 대영제국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독립국이었을 때 서유럽에서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를 자력(!)으로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영국과 충돌해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위로의 시민혁명을 이룩한 영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황제를 정점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에 치중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는 오스만이나 무굴제국 및 중국의 청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처음엔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의 의지와 노력은 반감되고 집단에 무임승차하려는 욕구가 지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는 구조적으로 외부의 방어에는 저항할 수 있어도 외부를 향한 공격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국 경제가 외부의 압력에 무너지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나폴레옹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영국은 산업혁명을 진행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대의 역사적 사건이 서로 특이한 방법으로 상호작용했음은 확실하다. 즉 정부의 무기주문이 선철, 강철, 석탄, 목재무역을 부추겼고 방대한 정부지출(국민총생산의 29%로 추정된다)이 재정실무에 영향을 주었으며 새로운 수출시장은 프랑스의 '역봉쇄'가 억제도 했지만 공장의 생산을 제고시켰다. -188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근대 재래식 전쟁의 끝은 나폴레옹이 장식한다.
물론, 19세기 중후반에도 크림 전쟁, 보불 전쟁 등이 일어나지만 20세기 초 양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들 전쟁들은 소규모 국지전이었으며 역사의 향방을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강대국 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견제구'에 불과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말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만약' 나폴레옹과 태양왕 루이 14세의 운명이 뒤바뀌어 나폴레옹이 태양왕 루이14세가 되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새시대를 연 선두주자가 되고자 했으나 사실은 몰락하는 구시대의 일부로, 스스로를 태워 장렬히 산화하는 근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미국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1815년과 1885년 사이에 상호피폐로 이어진 장기전은 없었다. 1859년의 프랑스-오스트리아전쟁이나 1877년 투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과 같은 이 시기의 소규모 전쟁들은 강대국체제에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보다 중요했던 전쟁마저도 몇 가지 점에서는 제한된 것이었다. 크림전쟁은 주로 지역적인 전쟁이었으며 영국의 자원이 총동원되기 이전에 종결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전쟁도 한철 작전으로 끝났는데 이는 훨씬 오래 끌었던 18세기의 전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그러므로 군사지도자들과 전략전문가들이 미래의 강대국 전쟁은 1870년 프로이센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속전속결ㅡ철도와 병력동원계획, 신속한 공세를 위한 총참모부의 계획, 속사화기와 대량동원된 단기복무병력 등이 결합되어 몇 주 안에 적을 압도하는 작전을 전개했다ㅡ을 바탕으로 하리라고 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신형 속사화기들은 적절히 사용되기만 한다면 공격전보다도 방어전에 이로우리라는 점을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대중적 주의주장과 광대한 지역이라는 사정이 맞물려 그 당시 유럽의 어떤 치열했던 단기전보다도 훨씬 길고 치명적인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미국 남북전쟁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들은 모두ㅡ테네시계곡, 보헤미아 평원-크림반도 혹은 로렌의 들판에서건간에ㅡ하나의 일반적인 결론을 시사했다. 즉 패전국들은 19세기 중엽의 '군사혁신'을 받아들여 새로운 무기를 채택하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무장시키며, 철도 기선 전신에 의한 개량된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는 한편 군대를 지탱하기 위한 생산적인 산업기반을 확립하는 노력을 소홀히 한 나라들이라는 점이었다. 이 모든 전쟁의 승전국측 장군들과 군대가 전투에서 한심스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러한 실수로 훈련된 병력, 보급, 조직 및 경제기반에서 갖는 이점이 상쇄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1860년 이후의 한 시기에 대한 최종적이고 보다 일반적인 관찰을 하게 된다. 이 장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워털루전투 이후의 반세기는 국제경제의 꾸준한 성장, 산업발전과 기술발전으로 인한 대폭적인 생산증가, 강대국체제의 상대적 안정성과 국지적인 단기전의 발발로 특징지어진다. 게다가 육군과 해군의 무장이 어느 정도 현대화되기는 했지만 군대에서의 새로운 발전은 산업혁명과 정치체제의 변화에 민감한 민간 부문의 발전에는 크게 못미치는 것이었다. 이 반 세기 동안의 변천에서 1차적으로 혜택을 입은 것은 영국이었다. 생산력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지고 따질 때 영국은 186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비록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의 정책으로 인해 이 사실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1차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유럽 밖의 산업화되지 않은 농업사회로서 이들은 서양의 제품이나 군사적 침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똑같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산업화가 뒤진 유럽의 강대국들ㅡ러시아, 합스부르크제국ㅡ은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새로 통일된 국가인 이탈리아는 도저히 일등국가에 끼어들지 못했다. -269~270쪽, '산업화와 세계균형의 변동, 1815~1885' 중
양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까지의 복잡한 상황들과 미국의 개입 등에 대해선 이미 충분한 논의와 함께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한 리뷰는 생략하기로 한다. 만약 궁금하다면 최근에 올린 리뷰글들 살펴보시길...
19세기 초까지 도시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직물과 수공업 산업에선 강점을 보였지만, 라인 연방을 통일한 프로이센만큼 근대화에 성공하진 못했다.
1,2차 세계대전은 몰락하는 기존 제국(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과 오스만, 청)과 한 발 늦게 뛰어든 프로이센(독일)과 일본이 이미 구축된 세계 질서에 반발하면서 일어났고, 여기에 영국과 미국 등이 개입하면서 대전으로 확산되었으머 그 결과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폴 케네디는 1945년 이후 미국-소련 양국의 냉전 체제와 군비경쟁 등을 소상히 다루면서, '미국, 소련, 중국, 일본, 유럽공동체로 이뤄진 5강 체제가 한동안 펼쳐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직후, 소련은 해체되었고 80년대 경제성장의 정점을 찍은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면서 저자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정중동'의 전략으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중국에 대한 예측은 맞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일독의 의미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1500년 이후 500년에 걸친 근대 사회를 정치,경제학적 관점과 군사,기술학적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기존의 유기체적 문명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맞춘 점쟁이가 미래도 반드시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라는 격언이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를 살펴보는 그의 방식이 그냥 패를 돌려 뽑는 '무대포'식이 아니라 광범위한 통계와 각국이 처한 상황들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미래에, 어느 나라가 흥하고 쇠할 것인지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마치, 다각도의 통계(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일찌감치 당선자를 맞출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그의 관점을 바탕으로 정리해보면 오늘날 영국과 일본은 국토 면적과 인구를 감안할 때 추락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복귀한 것이다. 과거 스페인제국과 네덜란드의 사례에서 보듯 과잉팽창에 따른 군사비 지출이 과도해지면 무너지게 된다. 둘 다 섬나라로 외부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내부의 강력한 응집력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국토와 인구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영향력 있는 대국의 지위를 보존하는데 만족하게 될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경제력(혹은 생산력)보다는 군사력이 과도하게 발전한 나라다. 더구나 소련이 해체된 후 줄어든 영토와 인구에 반해 소련 시절의 군사적 능력은 고스란히 승계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군사 부문이 강했는데 해체 이후엔 국가 전체에서 군사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한층 커졌다. 러시아는 군사력을 생산력 향상이나 사회 발전 등으로 분산 배치하면서 힘을 길러야하지만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거인과 길게 국경을 맞대고 있다보니 이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 중 러시아가 가장 큰 도전과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이뤄진 유럽공동체는 러시아를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공동 방어 전략을 펴고 있다. 물론, 유럽공동체 회원국의 힘만으로 만들어져야 옳지만, 현실은 미국이 이끌고 있는 나토를 중심으로 국가안보를 추구하고 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이웃나라끼리 전쟁이 잦았고 중국처럼 한 나라로 통일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강력하고 믿을만한 외부 세력(미국)이 리더 역할을 해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중국의 경우는 강력해진 힘을 외부로 투사하면서 미국을 태평양 서쪽으로 후퇴시키고 아시아 지역에서 강자라는 전통적인 역할과 지위를 되찾고자 시도할 것이다. 다만, 이런 중국의 행보가 지역 안보나 질서에 위협이 가해지는 방식은 최대한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핵무장한 북한을 중국이 지원하는 것 역시 기존의 동북아시아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력한 중국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러시아와 미국을 포함해서)은 남한 위주의 통일 한국도 싫지만 북한 위주의 통일 한반도 역시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폴 케네디는 한국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가 강대국이었던 적은 없으니 당연히 <강대국의 흥망>에서 우리나라가 비중있게 다뤄진 건 아니고, 작년 ebs의 '그래이트 마인즈'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비록 한국은 원치 않는 내전과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지만 강대국들의 헤게모니가 충돌하는 한가운데에서(마치 고요한 '태풍의 눈' 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놀라운 경제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인의 노력과 외부 세계의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인구와 영토 및 자원 등 하드웨어를 감안할 때, 한국이 가까운 미래에 강대국의 조건을 갖출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앞으로 한국은 강대국이나 대국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중견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과 지속적인 지역 안보를 추구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양자동맹보다는 다극 체제 및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간 안보와 외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반도(우리)는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로 외부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피곤한 운명을 타고 난 모양이다.
그래도 접시 위에 떠 있는 나뭇잎마냥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만사태평 나른하고 아둔한 운명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좋다. 다시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