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죽였다 한국작가 미스터리문학선 2
류성희 지음 / 산다슬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서재에 10년 동안 1800여편의 추리소설 리뷰를 올려 '전설의 블러거'로 불리는 물만두의 <추리책방>을 통해 알게 되었다.

추리소설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도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존재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류성희 작가란다.


 

그동안 주로 일본추리소설 위주로 읽어 오던 나에게 첫번째로 찾아온 한국추리소설이 류성희작가의 작품이었다는 점은 알고보니 '특별한 행운'이었다. 정말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잡혀 있는 약속까지 취소하면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지 5시간만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쉼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흥분과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내 가슴에 마치 봄바람에 실려온 꽃잎처럼 작가의 후기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중략)

바라건대, 정말로 간절히 바라건대, 때로는 가슴 아파하며, 때로는 머리를 쥐어짜며, 또 때로는 차가운 맥주로 뜨거움을 식히며 쓴 이 글을 읽고 난 후,

주위에 있는 것들이 잠시 낯설어지기를,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아닌 나,가 창밖을 바라보기를,

부디, 욕심 부려본다.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손을 잡듯, 내 글을 곱게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류성희, <나는 사랑을 죽였다> 후기 中-

 


난 지금껏 이처럼 아름다운 작가 후기를 만나본 적이 없다.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같은 사람의 손을 잡듯, 그렇게 곱게 글을 읽어주어 너무 고맙다는 그 작가에게 나는 너무 미안해졌다. 만약, 류성희라는 작가가 한국이 아닌 이웃나라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미야베 미유키 수준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일찍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과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들을 접하면서 '그래, 바로 내가 읽고 싶었던 이야기기들이야!'라며 감격했더랬다. 비록, 범죄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가슴 저미는 사연에 얼마나 많은 공감의 눈물을 흘렸던가.


 

류성희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동'이라는 감정과 조우할 수 있었다.정말 오랜만의 조우답게 헤어짐은 너무나 큰 아쉬움이었다.


하여, 바라건대, 정말로 간절히 바라건대, 때로는 기막힌 반전에 탄성이 절로 나오고, 때로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듯 깊은 슬픔에 젖으며, 또 때로는 아둔한 문학적 감수성에 머리를 쥐어박으며 읽은 이 작품들이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다.


 

열 편의 단편들 모두 제각각 독특한 맛과 멋이 있다.


특히, 허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이는 <코카인을 찾아라>와 <살인미학>도 좋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사쿠라 이야기>와 <벽장 속에서 나오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사쿠라 이야기>는 한 여인이 평생에 걸쳐 서서히 그리고 보이지 않게 원수를 갚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상대를 '죽음의 길동무'로 데리고 간, 가히 이시대 최고의 복수극이라 할만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같은 사랑을 붉고 붉게 그린 <벽장 속에서 나오기>는 한편의 시정시라 하겠다.


 

사랑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면 또 그렇게 순식간에 빠져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그래야 살아낼 수 있다.

                                                          -<벽장속에서 나오기> 김승주 독백 中-

 

 

사랑하는 것보다 차라리 슬퍼하는 게 나아

슬퍼하는 것보다 차라리 화를 내는게 나아

화를 내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

                                                -<벽장속에서 나오기> 백현재와 홍자홍 유서 中-

 

 

백현재는 홍자홍을 사랑했습니다.

김승주는 백현재를 사랑했습니다.

홍자홍은 김승주를 사랑했습니다.

 

 

날 바라보지 않는 당신,

다른 남자만을 바라보는 당신

질투가 내 심장을 파고 듭니다.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이제 대답하지요.

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진짜라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보는 순간부터...

당신의 피가 마시고 싶을 만큼

영원히...

                                                     -<벽장속에서 나오기> 홍자홍의 편지 유서 中-

 

 

만약, 이 정도의 문학적 감수성과 언어적 조탁력을 갖춘 작가가 장르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쪽으로 일찌감치 발을 내딛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네 인생에서 '만약...?'이라는 말처럼 '하나마나 말짱 도루묵'인 것도 없지 않다마는...

 

그만큼 작가의 빛나는 재능에 눈이 멀어버렸다는 증거요, 행여나 작가의 작품들을 앞으로 더 많이 접하지 못하게 될까 싶어 벌써부터 애가 타는 독자로서의 노파심이리라. 아마 류성희작가의 작품을 접해본 이들이라면 이 심정을 십분 이해할 듯...


 

오늘 오후 사무실에서 나와 늦은 점심을 홀로 먹고 인사동 거리를 거닐었다.


화사한 봄햇살 속의 흥겨운 얼굴들...

기름판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맛깔난 호떡들...

나 좀 보란 듯 가슴을 쑥ㅡ 내밀고 서 있는 간판들...

 

익숙한 어느 봄날 오후의 거리 풍경이건만 왜 이리도 낯설기만 한지......


 

작가가 의도한 것이 바로 이런 거였다면, 난 소위 확실하게 '낚였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돌아와서는 류성희작가가 종종 출몰(?)할 것같은 카페에 가입했다.



 

끝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집의 표제로 쓰인 <나는 사랑을 죽였다>라는 작품이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걸까?

하여, 이곳저곳 기웃거려보았으나 어디서에도 그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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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먹는 사람들 조매제 빈처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8
신경숙.은희경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서하진의 <조매제>는 여류작가의 작품 속 화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것과는 달리 남성이다.

작중 화자인 경덕은 일 년 제사만도 열다섯 번인 명망있는 양반 가문의 종손이다. 그래서 부족한 것없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맞선을 볼 때마다 '딱지'를 맞곤 한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실망하지도 않는다. 애당초 종손이라는 점은 그에게는 결혼을 미룰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손의 성혼(成婚)을 위해 집안 어른들이 입시름을 거친 후, 마침내 사대(四代)제사를 이대(二代)로 줄이기로 하는 행사가 고향집에서 일가친척 어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행해졌다.

 

절을 마친 아버지가 낭랑한 음성으로 축문을 읽어 내려갔다.

유세차 ㅡ 갑술 ㅡ 삼월 ㅡ 정유 ㅡ 삭 ㅡ 십일일 ㅡ 정축 ㅡ 효현손 ㅡ 동휘 ㅡ 감고소우.

현고조고통정대부행용양위부군(縣高祖考通政大夫行龍穰衛府君)

현고조비숙부인풍천임씨(縣高祖妃淑夫人豊川任氏)

현고조비숙부인오천정씨(縣高祖妃淑夫人烏川鄭氏)

......

지사대국시개려사지양대심수무궁분즉유한(止四代國施改禮祀止兩代心隨無窮分卽有限)

......

감청신주출취옥우공신존헌(敢請神主出就屋宇恭伸尊獻)

사대조와 고조부의 경우는 조매를 위한 고유(告唯)를 하고 증조부와 조부의 신위는 서울로 모셔 갈 것임을 고하는 길고 긴 축문을 읽는 아버지의 간간이 떨리는 음성이 숨죽이고 선 사람들의 머리 위 퍼져 나갔다. 매안하기를 감히 청하는 마음이 창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백성으로 옮겨 누옥이라도 마련하여 모시고자 가히 아뢰노라는 뜻임을 띄엄띄엄 알아들으며 나는 일렁이는 촛불을 비스듬히기울어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서하진, <조매제> 中-

작품은 제사와 이장 및 신위를 모셔가는 구체적인 순서와 장면등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디테일함은 먼 훗날 더 이상 제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에게 '옛날에는 이렇게 제사을 지내며 조상을 모셨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 교과서에 실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부록의 낱말풀이를 참고하지 않으면 읽기가 녹녹찮은 작품이다. 그렇다고해서 고리타분한 작품이라고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주제는 신(新)시대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구(久)시대의 유물과 유산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어쩔 수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의 끄트머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성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경덕에게 종손이라는 신분은 이제 막 날아오르려는 나비의 꽁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고치와도 같다. 고치가 없었다면 나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려면 고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탁 트인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차들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 갔다.

(......)

나는 조수석에 소중히 모시고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부모의 신위를 내려다보았다.

(......)

사방에서 나를 둘러싼 차들의 틈바구니에는 어디 한군데도 빠져나갈 여지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덫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발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대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하고 혼자 투덜거리는 내귀에. 가다 보면 길이 열리겠지하는 누군가의 음성이 드린 것 같았다. 나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어둑한 뒤편에 보이지 않게 도사린 물체가 있는 듯싶었다. 아무도 없는 뒷좌석에서 누가 금방이라도 불쑥 몸을 일으켜 내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 같았다.

(......)

나는 조수석의 신위를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문득 이 길 한옆에 신위 보자기를 버리고 간다면......하는 느닷없는 유혹이 나를 감쌌다. 달리는 차에 받혀 나무 상자는 조각조각 깨어지고 신위의 검은 글자가 적힌 종이는 갈가리 찢겨 바람에 날리고......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며 황망해하지 않고도 간단히 신위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이까짓 나무 상자쯤은 단숨에 박살이 날 것이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다. 어머니는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냐고 꼬지꼬치 물어오리라. 이처럼 쉽게 신위를 유기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갑자기 유쾌해져서 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매끈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분홍 보자기와 보이지 않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한낱 나무 상자일 뿐인 것이 나를 이렇게 숨 막히게 한다면 그 상자를 모신 거대한 성 같은 집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요새를 지키는 불침번처럼 문마다 붙어 있는 세콤 장치는 기실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닌가. 한 걸음 나가면 훈련된 진돗개가 막아서는 정원. 밤새도록 밝혀져 있는 방범등을 바라보며 나는 또 잠을 설칠 것인가.

 

                                                                                      -서하진, <조매제> 中-

 

 

주인공이 이처럼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순간. 구원처럼 카폰이 울리고 주인공이 사모하는 여자인 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지금껏 망설이기만 했던 말들을 토해내는데...

 

"나는 네가 필요해. 연희야! 내게는 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야 견딜 수 있단 말야!"

연희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는가. 수화기에서는 찌지직 소리만 흘러 나오고 연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모르게......안 들......여보세요?.....여....요?"

연희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지며 들려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지날 때면 으레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전화기가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저만치에 붉은 경고등이 반짝이는 터널 입구가 보였다.

(......)

터널의 출구가 눈앞에 커다랗게 다가왔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나는 깜박등을 켜고 천천히 차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통화를 방해할 만한 산이 사라지는 곳, 어둠이 내린 너른 벌판이 펼쳐진 곳에 이르러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문을 활짝 열고 연희의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눌렀다.

띠리릭, 띠리릭.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먼 곳에서 연희의 음성이 울릴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바짝 거머쥐었다. 차량들의 행렬, 내가 빠져나온 그 끝없는 행렬들이 내 앞에 부신 빛을 퍼붓고 사라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하진, <조매제> 中-

 

 

주인공이 연희와 전화 연결이 됐는지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듯이 주인공은 이미 자신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던 과거와 작별을 고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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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먹는 사람들 조매제 빈처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8
신경숙.은희경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1995년 <이중주>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은희경은 현대인의 소외와 일상속의 위선을 그리는데에 뛰어나다. 1996년 발표된 장편소설 <새의 선물>이야말로 은희경이라는 작가와 작품 세계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새의 선물>은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열두살 진희는 여섯살 옥희보다 훨씬 더 조숙하고 영악하다.

 

 

공교롭게도 <새의 선물>과 같은 해에 발표된 <빈처,1996> 역시 현진건의 <빈처>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그러나 현진건의 <빈처>가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1930년대의 아내상인 반면, 은희경의 <빈처>는 1990년대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중산층 아내의 초상을 담고 있다.

 

 

작중 화자는 비록 하루가 멀다하고 술타령이지만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꼬박꼬박 갖다주는 전형적인 샐러리맨이다. 우연히 보게 된 아내의 일기를 통해 아이 둘을 키우는 가정주부이자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아내의 이면을 엿보게 된다. 물론, 그 이면이라는 것도 주체적 자아찾기라기 보다는 남편이 가정에 좀더 충실해주길 바라는 아내의 속내지만 말이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기 생각을 갖고 산다는 걸까. 좀 뜻밖이었다. 나는 그녀에 대해 그 정도로 알고 있었다. 물론 연애 시절에는 잔디밭에 앉아 문학 토론도 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국에 대한 막연한 의분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줌마가 되기 전 일이다. 결혼 이후에는 그녀가 책을 들치는 것조차 본 적이 없는데......하긴 그녀와 길게 얘기를 나눠본 것도 꽤 오래되긴 했다.

(......)

8월29일

그이가 매일 일찍 들어오는 것도 싫다. 일찍 오는 것이 가정에 충실한 거라는 편견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시간을 갖지 않는 인간은 고여있는 물처럼 썩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나도 못 견딜 외로움이라니!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을 이루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가.

                                                                                       -은희경, <빈처>中-

 

남편은 아내를 시종일관 '그녀'라는 3인칭으로 부르는 반면, 아내는 남편을 '그이'라고 표현한다. 3인칭대명사인 '그녀'는 왠지 모르게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남편의 세계에서 아내의 자리는 저만치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에 덩그렇게 놓여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내는 비록 몰래(?) 일기를 쓰고 남편 몰래 음주를 한 사실을 일기에 털어 놓기도 하지만 이와같은 '일탈'은 자신의 세계에서 남편을 몰아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남편의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으로 해석된다.

 

아들 녀석이 칭얼거린다. 아까 5분 넘게 벨을 눌러도 끄떡 않던 그녀의 잠은 아이의 두척이는 소리에 민감하게 깨어난다. 그녀는 황급히 아이 곁으로 다가가더니 이마 위의 물수건을 내려놓고 아이를 품에 끌어 안는다. 그러고는 졸린 눈을 감은 채 아이의 뺨에 자기 뺨을 대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등을 토닥거린다. 그러나 잠이 덜 깬 탓에 등을 토닥이다가 뒤통수를 토닥이다가, 손놀림이 일정하지 않다. 그녀의 앉은 엉덩이께에는 약봉지며 체온계며 대야, 수건 같은 것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지금 아이를 안는 그녀의 동작이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이를 안은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다. 뒤로 묶은 머리가 머리핀 사이로 잔뜩 빠져나와 어수선하다. 나는 손에 펴 들고 있던 그녀의 일기장을 가만히 덮어준다.

살아가는 것은, 지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은희경, <빈처>中-

그렇다.

아내가 일기를 쓰고 남편이 그 일기를 몰래 읽어 보았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아내의 역할을 그리고 남편의 역할을 규정지어 놓았으므로......

 

 

 

 

은희경의 또 다른 작품 <짐작과는 다른 일들, 1996>은 아무런 생각없이 읽었다. 작가 특유의 물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필체는 곳곳에 뽀족하게 돋아나 있는 가시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신경숙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창비사에서 나온 20세기 한국소설 제48권(신경숙과 은희경외)에 실려 있는 황도경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을 읽고 나서야 단순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3년째 중풍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투명한 눈물을 떨구던 그녀의 모습에 반해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후, 생명보험과 교육보험을 들고 아파트를 청약하는 등 억척를 부렸으며, 싸울 때마다 이혼을 들먹였다.

 

한동안 그는 퇴근하자마자 선배가 얻어놓은 작은 사무실로 달려갔다. 창사회의를 한다고 이틀 계속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집에 들어가니 그녀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밤중에 아파트 놀이터의 벤치에 몽유병자처럼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한참 만에 그녀가 오더니 열쇠를 던졌다. 아이를 업고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젠 내가 외박할 차례야! 그는 발민의 열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여관으로 갔다.

(......)

그는 생각했다. 자기가 사랑한 것은 결혼 전의 그녀라고. 그가 가슴에 간직한 그녀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시커먼 숯검댕이었다고.

처녀 아닌 아줌마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결혼한 남자의 비애임을 그때의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죽었다.

                                                                    -은희경, <짐작과는 다른 일들> 中-

그는 그녀가 병원에 도착하기 10분 전에 죽었다. 술에 취해 이사한 집이 아닌 옛집을 찾아갔다가 열리지 않는 옛집 문을 발가락에 멍이 들도록 걷어차다가는 돌연히 몸을 돌려 차도로 뛰어들어 달려오는 택시에 부딪혀 사망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원망하면서 죽었다. 그는 자신의 짐작-아내가 문을 안 열어준다-과는 다른 일-새집으로 이사갔다-이 일어났음을 모른 채,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를 죽도록 미워하며 오해 속에서 죽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다음 달부터 그녀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회사에서는 사우의 미망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력서의 빈칸을 채우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식물인간이라도 되어줬더라면......그렇게라도 그가 살아 있다면 보험 세일즈나 학습지 방문 교사를 해가면서라도 얼마든지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동창 중에 그런 친구가 있었다. 남편이 암에 걸린 뒤로 암웨이라는 회사의 외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친구를 동정했던 자기를 비웃었다. 이제 그녀의 소원은 바로 그 친구처럼이라도 되는 거였다. 그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어떤 처지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없이는 세상이 다 두려웠다.

방학동에서 회사가 있는 서대문까지는 먼 거리였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탔다. 그녀는 전동차 안에서 두 번이나 외투 단추를 뜯겼던 그의 출근길을 생각했다. 그녀는 운전 학원에 등록했다. 면허를 따자마자 새 차를 샀다.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궁상스러운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오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없고 무능하지 않았다. 자료실 일에 쉽게 적응했다.

(......)

연애 2년 결혼 생활 4년. 그녀는 언제나 캐묻기를 좋아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던 그녀의 성격은 그를 짜증나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녀의 직장이 된 그의 직장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그녀에 대한 오해의 절정은 그것이었다. 그녀의 관심이 누구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업무 처리에는 가정식 백반처럼 정감 같은 게 있었다. 가을 인사 때 그녀는 비서실로 발탁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아직은 이십 대라는 데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컴퓨터를 배우고 향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나자 그녀는 승진을 했다.

                                                                    -은희경, <짐작과는 다른 일들> 中-

 

회사 건물 9층에서 일하는 예술공연팀 차장을 만났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그녀의 아들과 동감내기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었다. 둘은 겉으로만 보기에도 상당히 잘 어울렸다. 그러나

짐작과는 다른 일들은 계속 된다.

 

남자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여자를 안고 싶어한다. 그런 한편 자기에게 안겨오는 여자의 정숙을 의심한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났다. 남자가 그녀를 그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로 안았을 뿐이라는 것은 생각할수록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라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그녀는 바람난 과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 때문에 울었다. 눈물이란 철저히 이기적인 현상이며, 불편한 죄의식을 떼버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택한 통과의례의 한 방식이란 것을 그때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 때 대부분 자기가 왜 우는 지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

남자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흘이 지나자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는 대신 경멸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점심 한 끼 같이 먹기가 평생 소원이라고 농담을 하는 남자 중 하나인 영업부의 신차장과 함께 오페라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갔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페라 극장을 나왔다.

(......)

 

그녀는 자기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다. 더욱이 왜 그도, 남자도 아닌 신차장에게 안겨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신 차장과 결혼했다.

                                                              -은희경, <짐작과는 다른 일들> 中-

 

오페라 '나비의 과부'는 장자가 죽자 장자의 아내가 남편의 무덤이 빨리 마르라고 부채질을 하고, 문상 온 후왕자에게 교태를 부리며 금방 죽은 사람의 골을 파서 눈에 얹어야 낫는다는 후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장자의 관까지 뜯는다는 내용이다.

 

 

남여사이만큼 변화무상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결혼전의 그 혹은 그녀가 결혼후의 남편, 아내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는 오해와 착각 속에서 결혼을 하고, 더 이상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루 빨리 헤어지기만을 손꼽아 바라고 있다는 오해와 착각 속에서 헤어진다. 인생이란 이처럼 짐작과는 다른 일들의 연속인 것일까?

 

그녀와 만나지 못한 한 달이 남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행사란 항상 준비할 때보다 끝났을 때 번거로운 일이 더 많았다.

(......)

사정이 생겨서 남자는 생각지도 않게 열흘 동안이나 광주에 따라다녀야 했다. 돌아와서는 다시 그 뒷정리에 매달렸다. 그동안 몇 번인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남자는 그 한달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시한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그리움이란 얼마나 한가하고 무력한 감정인 것인지.

남자는 그녀가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기에 가장 큰 괴로움이 있었다. 여잔 다 그래. 그런 말말로 일반화할 수가 없었다. 남자에게 그녀는 한 사람의 여자 이상의 존재였다.

                                                                      -은희경, <짐작과는 다른 일들> 中-

 

그렇게 남자가 그녀를 떠나 보낸지도 2년이 훌쩍 흘렀다. 그리고 우연히 황대리와의 잡담 속에서 짐작과는 다른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신 차장이 회사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할 때부터 사이가 나빠졌다나 봐. 결국 다 말아 먹고 집까지 날렸잖아. 근데 이혼은 신 차장 쪽에서 하자고 했다던데.

(......)

그 여자 요즘은 암웨인가 하는 다단계 판매 있잖아. 거기서 외판을 한다고 하더라구. 사람 일이 참. 비서실에 있을 때는 분위기 있고 괜찮은 여자였는데. 나도 왜,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게 소원이라고 농담하고 다녔잖아. 황 대리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패했다면 어쩐지 께름직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애비가 다른 아들이 둘이나 딸려서 재혼하기도 쉽지 않을걸.

아들이 둘이라고? 남자는 불현듯 뭔가에 속은 기분이 들었다. 보름달이 스며들던 그날 밤 호텔의 창문이 생각났다.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다가 깊게 두어 번 더 끄덕였다.

우리는 모두 삶에 속는다. 그러나 굳이 속지 않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다.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은희경, <짐작과는 다른 일들> 中-

 

<마이너 리그>라는 장편소설을 읽고 무지 실망했었다. 그리고 결심한 것도 아니건만 은희경이라는 작가는 서서히 내 기억 속에서 멀어져갔더랬다. 그런 작가를 새롭게 재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다. <짐작과는 다른 일들>은.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2002>는 중산층의 위선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 들어 결국에는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마는 작가 특유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 하겠다.

 

 

부모님의 사랑이 아닌 자랑으로써 키워진 소라는 또래에 비해 똑똑하고 교양이 있지만 시골 학교에서 이와 같은 '다름'은 결국 따돌림의 사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이다운 동심을 잃어버린 소라는 사회로부터 강요된 임무를 수행하느라 엄청난 댓가를 치르며 성인이 되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소연-소라의 본명-은 주체성이라고는 눈씻고 찾아 볼 수 없는 의지박약의 여성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모습에 넌더리가 난 그녀의 남편은 서서히 그녀로부터 멀어지면서 바람을 피운다. 남편의 부정을 알게 된 소연는 스스로 자립하리라 결심하고 친척이 운영하는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월급만 축내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기피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전체를 살펴보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에는 미숙하지만 소연 특유의 성격이 진가를 발휘하는 분야는 있기 마련이라서 마침내 회사에서 '제몫'을 충분히 해내는 커리어우먼으로 자리잡는다.

 

그런 그녀에게 김영재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의 고백이 이어지는데...

 

사실, 나는 촌놈이에요. 땅 한 뙈기 없는 빈농에서 9남매 중 둘째아들로 자랐죠. 누나들은 열 살만 넘으면 읍내로 식모살이를 갔는데 셋째 누나가 들어간 집은 나하고 같은 반 여자아이네 집이었어요. 내가 열 세살 되던 해에 집으로 도로 돌아왔죠. 난 그게 싫었죠. 명절마다 다니러 온 누나한테서 그 여자애 얘기를 자세히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우리 시구들은 이듬해에 서울 변두리로 이사 왔는데 누나들이 공장 일을 해서 나를 공부시켰어요.

(......)

소연씨는 이해 못할 거예요. 어린 시절의 어떤 강렬한 결핍. 그리고 갈망이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았어요. 난 운이 좋았어요. 모두가 다 꿈을 이루는 건 아니니까요. (......)

어린 시절 우리 반에 아주 똑똑한 반장 애가 있었는데, 남들은 잘 몰랐겠지만 우린 꽤 친했어요. 그 애가 나와 비슷한 결핍, 갈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남들은 몰랐죠. 정치가가 돼서 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고 호언하던 소년은 중학교도 못 가보고 열아홉 살에 공장 기숙사에서 자살했어요.

(......)

소연은 김영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으며 유복하게 태어나서 별다른 시련없이 살아온 사람으로서 죽음 같은 엄청난 재난에 대해 듣고 있기가 편치 않았다. 어릴 때 소연은 남이 고통을 겪는 얘기를 들으면 아직 순서가 안 되었을 뿐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고통의 순번이 온다는 생각에 공포를 느끼곤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

사실, 나 소연씨 잘 알아요. 난 당신 두려움 알 수 있다구요.

 

                       - 은희경,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中-

 

김영재의 진지한 고백이 이어졌건만 아직도 소연은 김영재의 실체를 모른다. 그런 소연과 나란히 누운 김영재의 고백은 서서히 소연이 잊고 싶었던 과거로 향하고 있다.

 

김영재의 입에서는 자연스러운 반말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모르겠어? 뭘요? 네가 백일장 대회에서 다쳤을 때 약을 사다 준 게 나야. 이름도 기억하고 있어, 파상겔이라는 연고였지. 실과 시간에 네가 넘어졌을 때 선생님을 불러온 것도 나고, 또 첫눈 오던 날 도망치라고 개구멍도 알려줬잖아. 이년 동안 같은 반이었어. (......) 그리고 구두를 훔쳐다 버린 것도 나였어. (......) 그때 너 다쳤을 때 나뭇더미를 밀어버린 게 누군지 알아? 낙서를 하고 다닌 것은 나였어. 네가 군수 아들 좋아하는 거 참을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나무를 밀었던 건 군수 아들 이현우였어. 이현우는 기억하겠지? 응.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 혼자 속으로 이현우를 점찍었지. 소연의 말에 잠간 동안 짓고 있던 의아한 표정을 풀며 김영재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모든 것을 다 이현우하고 반장이 짜고서 아이들을 시켰었어. 그때 네 편은 아무도 없었지. 알아.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반장 말야, 죽었다니 정말 안됐다.

(.....)

소연의 목소리도 나지막하고 담담하게 들려왔다. 인생은 반복되나 봐. 한번 치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늘 비슷한 일들이 닥쳐오거든. 그때마다 어린 시절 학습된 대로 반응하게 되고, 결과는 똑같아.

 

                         은희경,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中-

 

분명, 은희경이라는 작가는 신경숙이나 공지영 등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고 90년대에 접어 들면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여성 작가들과는 다른 그녀만의 어떤 것이 있었다. 1996년인가 아님 1997년인가 나는 은희경의 강연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 그녀는 30대 후반의 중산층 가정주부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상당히 부끄럼이 많고 다소 고음의 목소리를 고분고분하게 울리던 그녀의 모습이 이제서야 제대로 떠오른다.

'그래, 그 당시 그녀의 가슴속에는 이런 말들이 담겨져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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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먹는 사람들 조매제 빈처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8
신경숙.은희경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신경숙은 1985년<겨울 우화>로 등단했으나 1996년 <풍금이 있던 자리>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특유의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필치로 90년대 한국문학의 특징을 새롭게 구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 출생하여 어렵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내고 70년대의 경제성장과 80년대의 집단적 정치담론 시기를 거친 그녀는 비슷한 동년배 작가들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징되는 후일담 문학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작품 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집단속에 머물러 있던 개개인이 집단 밖으로 나오면서 존재감을 부각시켰던 9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대중의 요구와 잘 부합되었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와 같은 우연적 일치가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만들고 2000년대를 지나오면서 작가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배드민턴치는 여자-1992년> <감자먹는 사람들-1996년> <부석사-2000년> 등은 상처받은 연약한 개인에 대한 '랩소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배드민턴치는 여자>는 여성이 스스로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성의 욕망에 '의해' 혹은 욕망에 '대한' 객체로 등장한다. 신경숙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특정한 이름없이 3인칭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배드민턴치는 여자> 역시 화자인 그녀에게 전해진 명함으로 '이세호'라는 이름이 등장할 뿐 구체적인 이름이나 호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와 등장인물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함이고 이와 같은 '작가-등장인물'간의 거리는 '독자와 등장인물간의 거리를 결정한다. 즉,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감정이입을 최대한도로 억제시키려는 작가의 계산된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화원에서 일하는 '그녀'는 사진기자인 '그'의 갑작스러운 술자리 고백에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나, 할 말이 있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난 여름에 그놈의 바이올렛 때문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당신 내 카메라 바라보느라고 눈 내리깔고 있을 때, 아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내낸 생각했지. 내 마음 몰랐지요?

                                                                      -신경숙, <배드민턴치는 여자- 中>

 

남자의 작업성 멘트와 민소매 브라우스 밑의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유부남인 그는 사랑에 쫒겨 자신을 찾아온, 회사앞의 카페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도 못 알아본다.

 

절망한 그녀는 베드민턴을 치고 있는 짧은 치마의 여자들을 '야릇하게' 쳐다보던 인부들이 앉아 쉬었던 공사현장으로 찾아가 포크레인 위로 기어올라간다. 그리고 스스로를 '매장'시켜 버린다. 물론, 여기에서 포크레인은 남성성과 욕망의 주체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거대하고 강한 가부장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당신은 잊었지? 그날 밤 내 소매 없는 자줏빛 실크 브라우스 밑의 팔뚝에 돋아 있던 좁쌀 만한 소름들, 그걸 쓰다듬어 주었던 일을, 당신은 잊었어,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기억할까.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매장할 흙이 없어 손짓을 멈추고 밤 별들을 눈으로 올라다본다. 그의 얼굴이 잠시, 별들 속에 섞여 피어났을 때 그녀 눈 속의 공허함이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곧 다시 초점이 없어진다. 너무 짧은 공허한 빛남. 지금 그녀는 넋을 잃었을까? 공허한 빛남이 사라지고 난 뒤 그녀는 아무 짓도 안 하고 끄덕끄덕 졸고만 있다.

                                                                  -신경숙, <배드민턴치는 여자- 中>

 

 

고흐의 작품명이기도 한, <감자먹는 사람들>은 서간체 형식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감자먹는 사람들>은 전북 정읍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성장과정과 환경 및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에 대한 사유가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신경숙 작가는 '밥을 한 소쿠리 비벼 놓자, 어린 자식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두렵고 무서웠다'라는 부친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다닌 작가의 이력을 보아도 힘든 노동을 묵묵히 견디며 조촐한 양식으로 기꺼이 끼니를 때우는 '감자먹는 사람들'의 초상은 그리 멀리 있는 것같지 않다.

 

<감자먹는 사람들>의 작중 화자는 뇌수 속을 떠다니는 석회질로 인해 걸핏하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입원 중인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음반을 냈으나 인기를 얻지 못한 무명 가수인 화자는 공교롭게도 등단은 했으나 대표작도 없고 이름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신예작가시절의 작가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감자먹는 사람들>의 작중 화자의 아버지는 한의원이었던 부친이 전쟁 직후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을때 종가 큰형님을 치료하러 찾았다가 병이 옮아 그만 이틀 간격으로 부친과 모친을 모두 잃고 모진 세상을 살아온 이다. 그런 이의 독백을 읽고 있자니 마음속으로 두갈래 물길이 저절로 생겨 흘렀내렸다.

 

이 천지간에......아베 어메를 이틀 사이로 다 잃고 나니께는 입이 닫혀버리더라. 아베 어메를 다 묻고 나서는 그만 나도 죽어버리야지 했다. 단 하루도 살어갈 자신이 없드라. 눈을 뜨면 무서운 생각만 왈칵 밀려들고 문을 열고 대문을 보면 금세 아베 어메가 들어설 것만 같고......세상 사람덜이 모두 다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고 그만 죽어버리야지 해서 철길로 안 나갔냐. 근디 죽게 되질 않더라. 기차가 오면 뛰어들어 버릴 생각으로 나갔는디 마음과는 달리 머리서 기찻소리가 들리면 논둑 뒤로 몸을 숨기곤 했어. 기찻길 너머로 멀리 선산이 보이지 않겄냐. 온종일을 그 자리에 앉어서 울었다. 그 어디께 아베 어메가 있겄지 쳐다봄서 온졸일 울었더니마는 목이 쉬어서는 그나마 닫힌 입이 더는 한마디로 안 나오더라.

(......)

너그덜이 생기고부터는 세상이 덜 무섭고 조금은 만만해 비더라. 나는 암말도 않고 너그덜 가르치는 일로만 살았어야. 누가 시비를 붙여도 속으로 그맀다. 내 자석들이 핵교 다니고 있으니께 너그덜이 나한테 그리 봐야 암 소용 없다. 한때 집을 버리고 다르케 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근디 양친 잃고서 그토록이나 무섭든 내 맴이 나를 붙들더라. 내가 다르케 살자고 너그덜을 무섭게 할 수가 없드나. 나는 가진 것은 없으니께 어떻게든 핵교에나 보내서 배울 만큼은 배우게 혀서 지 걸음들을 걷게 해주야지......그 생각이 마음조차 다물게 허더라.입이 다물고......또 입 다물고 말았던 내 맴이 내 병이다. 그것이 내 머릿속을 그르케 만든 것이여. 너거 어메조차 나한티 어째 그르케 말을 안 허냐고 답답히서 살지를 못허겄다고 해도 나는 암말도 안 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였다. 말이 무서웠지야. 천지간에 양친도 없는 사람이 허는 말을 누가 듣기나 허겄나 싶기도 허더라. 근디 그것이 병이 되야서 돌아왔는갑다......안 글면 어쩌서 내가 이렇다냐?

- 신경숙, <감자먹는 사람들> 中-

 

가진 것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아무말도 안 하는 것은 몰라서 혹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침묵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무기였음을......

 

행운과 불운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도 않은 채,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찾아든다. 철거덕 철거덕 달려오는 기차의 강철 바퀴 소리처럼.

 

 

신경숙의 <부석사>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작품 속 공간적 배경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산 아래의 오피스텔이며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서 있는 양로원이며......

말하자면, 내가 여섯살때부터 30년 넘게 살아온 세검정 일대-좀 더 정확하게는 구기동-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북5도청이며 청록양로원(작품에서는 이름을 살짝 바꾼 듯, 정식명칭은 청운양로원)등등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만은 추억속의 '그곳'을 헤매이고 있었다.

 

암튼, 지금은 이사를 왔지만 계절마다 버스를 타고 부암동 언덕을 지나 세검정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내가 졸업한 세검정초등학교를 지나는 그 순간만큼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빠져들곤 한다.

 

<부석사>라는 작품을 잘 살펴보면, 작가가 작중 화자가 사는 '그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는 개연성이 있다. <감자먹는 사람들>속에서 주인공의 큰 오빠가 처음으로 집을 샀던 동네가 '역촌동'으로 나오는데 역촌동은 구기동에서 터널 하나만 건너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부석사>의 여주인공이 올케 언니네를 방문하여 이것저것 밑반찬을 찬합에 담아 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혹시 그 올케 언니네 동네가 구기동에서 가까운 역촌동은 아니었을까?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가공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실제하는 그곳과 너무나도 유사한 것이 매우 신기했다.

 

내 머리속으로 마치 마쓰모토 세이초가 모리 오가이의 고쿠라 일기를 바탕으로 <어느 고쿠라 일기전>을 쓴 것처럼 <부석사>를 배경으로 한 글을 한편 써볼까? 하는 생각이 삐져 올라온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자, 그럼 이제부터는 작품 <부석사>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1월1일 부석사를 향해 출발한 남녀는 결국 <부석사>에 가지 못한다.

이들은 같은 오피스텔에 거주한다는 점과 종종 북한산 산책길에 남의 집 텃밭에서 야채 서리를 함께했던 '인연'으로 새해 첫날 실과 바늘이 통과할 정도로 살짝 떠 있다는 부석(浮石)을 보기 위해 가볍게(?) 부석사에 갈 약속을 한다.

여자는 자신을 배신하고 영문학계의 원로의 딸과 결혼해버린 P의 돌발적인 방문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실화가 아닌 꾸며진 것이라는 소문의 진원지인 박PD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서......

아, 참! 그리고 동료(?)에게 공격을 받은 경험을 갖고 있어 개를 무서워하는 개도 함께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위에서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한 남자와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과연 새로운 인연이 될 수 있을까.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에 두 사람이 탄 차는 눈길에 길을 잘못 찾아들어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러나 작품은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그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희망도 실망도 아직은 이르다. 아니 어쩌면 살짝 떨어진 상태로 언젠가는 맞닿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천만년을 함께 해온 부석처럼 인간 관계 역시 희망과 실망이 살짝 살짝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결에 머무는데도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박PD는 돌아갔을까. 그들이 찾지 못한 부석사가 바로 근처에 있는 겐가. 희미한 범종 소리가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구에 머문다. 그녀도 범종 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뻗어 첼로 소리를 줄인다. 종소리가 눈발 속의 골짜기를 거쳐 그들을 에워싼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뿐이었다.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피로에 점령되어 그는 점점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녀는 보온통을 기울여 종이 컵에 커피를 다른다. 수석사의 포캐져 있는 두 개의 돌을 닿지 않고 떠있는 것일까. 커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자꾸만 자신의 얼굴을 쓸어 내리고 있다.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진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앞의 흰 자동차 앞유리에 희끗희끗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뒷자리에 개켜져 있는 담요를 끌어와 그의 무릎을 덮어준다. 그녀의 기척에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그는 이 순간만은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시, 저 여자와 함게 나무뿌리가 점령해버린 옛집에 가볼 수 있을는지. 이제 차창은 눈에 덮여 바같이 내다보이지도 않는다.

                                                                                     -신경숙,<부석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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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나목>은 이제는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의 데뷰작이자 생전에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밝힌바 있다. 썸네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완서의 작품 세계는 6.25전쟁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나목> 역시 전쟁 기간 미군 PX에서 육체적 생존을 위해 정신적 생존을 저당 잡힌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작품을 <오발탄>이나 <수난시대>등과 같이 전쟁을 정면에서 다룬 전후 후일담 소설의 일환으로 볼 수는 없다. <나목> 역시 전쟁통에 두 오빠를 잃고 하루 아침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젊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1인칭주인공 시점의 애정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여타의 반전소설과는 달리 전쟁이라는 흔치 않은 체험이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 정신적 차원의 상처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작품 속 주인공인 이경은 물론 당연히 작가 자신의 투영이며 새파랗게 젊디 젊은 시절 그녀가 사랑했던 중년 남자는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다른 환쟁이들과는 달리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슬픔을 보게 되고 또 바로 그러한 연유로 그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목>은 희생적인 이타적 사랑이라기 보다는 나르시시즘적인 이기적 사랑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은 눈먼 자기애로 끝나는 것이 아닌, 성숙한 자기 성찰로 마무리된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枝]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무,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의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에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썸네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 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여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깨닫는다. -박완서 <裸木> 중-


1931년에 출생한 작가는 마흔살이 되된 해인 1970년 11월 동아일보 장편소설 부문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등단한다. 40여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읽는 내내 유행 지난 유행가를 듣는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한계인 설명하기식 전개 역시 작품을 읽는 밀도감과 긴장잠을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위대한 작가의 초기작들이 종종 갖고 있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박완서의 <나목>은 사랑스럽다. 왜냐하면 '치유의 글쓰기'로 대표되는 박완서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11월...

내가 한창 자랄 때처럼 집집마다 수십포기씩 김장을 하던 시절은 더 이상 아니지만, 마지막 입새를 떨군 채 온몸을 부르르 떨며 겨울을 맞이하는 나목(裸木)들 만큼은 변함이 없다.

한올 하나 안 남기고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건, 아직은 저 멀리 있지만 분명 봄의 생명이 다가올 것임을 그래서 버린 것만큼 아니 버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푸르름을 전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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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 없이 조바심치던 그 연유를 이제서야 할 것 같다.

박완서는 스무살 즈음에 겪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나목>이란 작품으로 등단했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 해인 1970년 마흔살의 나이에 말이다.

박완서란 작가가 등단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난 나는 올해로 마흔 한번째 해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마흔살에 쓴 작품 <나목> 역시 이제 막 마흔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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