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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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작부터 자자한 명성을 들어온 작가였다.

<달려라, 아비>는 20대초반에 이미 대상문학상(수상작: 노크하지 않는 집)을 수상하면서 일찌감치 문단에 데뷰한 작가의 초기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이다. 

문학적 천재성을 타고난 작가들이 무릇 그렇듯, 김애란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 같다. 특히, 독특한 언어적 표현은 가히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ㅡ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모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p8 中-


천진난만한 여아를 마주하며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떠올리고, 뜻하지 않은 반가움의 상징인 편지의 도착으로 아기의 탄생을 형언하는 그 발칙한 상상력에 처음부터 압도되었다.

무책임한 아빠를 두었으며 또 딱 그만큼한 무책임한 엄마를 둔 주인공의 '가족 로망스'는 해피엔딩이라 할 순 없어도 해피엔딩처럼 따듯하다.


여자를 덜컥 임신 시켜놓고는 출산하던 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남자...

그런 남자를 남편으로 그리고 아빠로 둔, 모녀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을 터. 거친 삶의 질곡들이 작품 속 곳곳에서 은연 중에 튀어 나온다. 작품 해설에서는 이를 두고, '원치않는 탄생이라는 걸 거부하기 위해 아버지를 긍정하면서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주인공 '나'의 '긍정적인 의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처럼 아버지에 대한 주인공의 긍정적인 시선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남자를 이해하고 사랑한 엄마의 영향이 반영된 결과로 읽힌다. 

하여,

나는 김애란 작가의 초기 대표작 <달려라, 아비>의 또 다른 미덕을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돌리고 싶다. 


어머니는 그날 밤, 아버지가 왜 집을 나갔는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또 절대 물어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머니의 침울한 표정을 보자 울컥하니 신경질이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매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가......미안하대. 평생 미안해하며 살았대. 이 사람 말로는." 어머니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나는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엄마, 그때 참 예뻤대......"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부분에?" 나는 편지를 훑는 시늉을 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집에 와서 매주 잔디를 깎았습니다'라는 부분을 짚어주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기."어머니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부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손으로 곱게 매만졌다. 그때 나는 농담 잘하고 씩씩한 내 어머니가, 한번도 울어본 적 없으나 성대가 부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p26 中-


인간에게 모친의 이미지는 일맥상통한다.

아 들이건 딸이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뭐랄까 서로를 끌어당기는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만큼 강한 운명으로 엮여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자석의 양극과 음극처럼 합일을 이루어내지 못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영향력을 투사하는 관계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다. 아버지가 없는 경우일지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부친의 부재'라는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애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는 물론이거니와, <스카이 콩콩> <사랑의 인사>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등등 여러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탄생과 존재 가치를 아버지-부재 여부와 상관없이-와의 관계 속에서 끈질기에 추구하고 있다.


전파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형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스카이 콩콩을 타며 놀 만큼 어리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나'는 인간이란 그저 지면에서 2~3미터 높이의 가로등이 그려내는 원주율과 지구 원주율 사이에서 복작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만큼 어른스럽다. 바로 이 점이 주인공 '나'가 옥상에서 콩콩거리며 스카이 콩콩을 타는 행위가 절대로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다. 열심히 스카이 콩콩을 타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굴러떨어지는 돌을 언덕위로 계속해서 굴려 올리는 시지프시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은가. 주인공 '나'는 스카이 콩콩을 타면서 짧은 한순간 지상에서 우주로 '도약'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다.  



한편, 1인 가구의 각박한 도시 생활을 그려낸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노크하지 않는 집>은 작품 전반을 걸쳐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외로움과 서글픔이다. 노동의 소외라는 후기산업화 시대를 거쳐 노동의 종말이라는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의 자화상으로 읽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90년대 초반 대학에 다니던 내가 한, 첫번째 아르바이트는 바로 명동과 압구정동의 정해진 지점에서 하루종일 유동 인구를 연령별 성별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모 대기업이 일본식 체인점을 여는데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일본의 '로션'이라는 편의점이었다. 그 후 월드컵을 전후로 하여 도시의 요지(要地)를 속속 점령하기 시작한 편의점은 그로부터 고작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인적이 드문 농촌 마을까지 깊숙히 들어가 있다.  '과연 이런 곳에 사람이 살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24시간 연중 무휴'라는 익숙한 로고의 편의점 간판이 인가의 불빛보다 먼저 나그네를 맞이하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작품 해설 속의 지적처럼, 21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획일화된 '편의점(패스트푸트점 포함)'과 '대형마트' 그리고 '원룸'이라 하겠다. 비록 가족과 관계가 단절되더라고 편의점과 대형마트와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이제 더 이상 편의점 혹은 대형마트의 이용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거부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이 되었기때문이다. 가족보다 편의점의 존재가 더 중요해진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소름이 돋는다. '아니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속 허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임을 우린 모두 너무나 잘 안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변두리 원룸촌의 일상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보호되는 편리한 생활공간이어야 할 그곳이 어서 빨리 탈출해야만 할 것 같은 으시시한 '귀신집'처럼 다가온다.

고시원 사람들은 서로 옆방에 누군가 사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통성명은 커녕 서로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묵계라고 한다. 

바로 '소통의 부재'다.

인간은 존재하나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이웃간 소통이 단절된 사회는 생물학적 '생존'만 존재할 뿐 정신적 '생활'은 없는, 도시의 무덤이라 하겠다. 그 무덤 속에서 주인공 '나'는 절규한다. '미안해요, 무서워서 그랬습니다'라고......


서로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더더욱 돈독해지는 인간관계의 부재야말로 우리 모두가 직면해 있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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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이다.

다만, 굳이 소설의 3요소(인물, 사건, 배경)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인물과 배경의 부각이 너무 커서 사건 즉 '스토리의 부재'라는 점에서 소설 읽기의 재미는 다소 떨어지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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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전민식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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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시내 대형 서점에서 눈에 띈 책인데 제8회 세계문학수상작품이란다.

작가 소개란에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라는 미군 기지촌에서 자랐다'고 적혀 있다.

얼마든지 감출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밝혔다는 사실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미화하려고 하는 법인데...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는 한순간의 '실수'로 안정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잘 나가는 컨설턴트에서 실업자로, 다시 노숙자로 전락한 주인공 임도랑의 방황과 사랑 그리고 희망과 좌절이 작품 전체에 깊숙히 배어 있다. 



고급 애완개들을 산책시키는 댓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

배신과 좌절보다 그를 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끝없는 자기비애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우연한 행운...

마치 눈앞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호화여객선 같다.


왠지 불안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비록 목적지는 모르지만...

승선을 거절할 자존심이 그에게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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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의 가장 큰 장점이자 결점은 십년도 훨씬 넘게 작가 지망생으로 삶을 헤쳐왔다는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작품을 읽는 내내 임도랑이라는 작품 속 주인공이 마치 전민식이라는 작가로 여러 차례 오버랩됨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작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작품화시키면 사실적이다. 한마디로 '리얼'하다. 그리고 일찍이 박완서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작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건 작품화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경험한 걸 글로 표현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소설을 읽는 목적이 어느 한 개인의 경험담을 엿보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캄캄한 어둠속을 더듬어 나가는 것처럼 외로움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일상 속에서 소설을 펼쳐든다는 건 바로 희망 때문이다. 어둠 속, 저 깊은 곳에서 사그라질듯 깜빡이는 작은 희망의 불씨 하나를 만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다.  작은 불씨 하나가 어둠을 몰아낼 수 없고 굶주린 나그네에게 일용한 양식과 따듯한 쉼터를 제공해 줄 순 없지만, '저기에 그 누군가가 있구나... 나 혼자가 절대 아니었어...' 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나그네가 어둠을 뚫고 마침내 새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작가란 이런 불씨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단순히 경험한 바를 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 의식을 작품 속에서 구현해내야 한다. 어둠 속 불씨처럼 나그네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전해주어야 한다. 


안 타깝게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에게는 현실의 양감(量感)-나는 이 심사평을 '사실적으로'로 이해했다-은 충분히 느껴지나, 이와 같은 불씨가 없다. 비록 찰나일망정 깊디 깊은 어둠 속 마음 한켠을 훤하게 밝히는 그런 한 톨의 불씨 말이다.




끝으로 책 제목이다.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라는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데자뷰'를 불러 일으킨다. 처음에는 이런 느낌이 뭔지 몰라 애써 외면했는데, 얼마 전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다시 한번 보고 나서 그 느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화 <더 리더> 속에는 몇 편의 실제 책제목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안톤체홉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남자 주인공 마이클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도입 부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여주인공 한나는 서서히 책속으로 빠져든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한나에게 책 속에 펼쳐진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어쩌면 한나는 책 속의 여자 주인공처럼 사랑과 희망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사랑...

그리고...

희망...


이제 막 욕망에 눈을 뜬 십대 소년의 마음으로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사랑이고 그런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 책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의 주인공 역시 그런 사랑과 희망을 꿈꾸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기지촌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만큼은 사랑과 희망을 간절히 품으며 소설을 써내려갔을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 제목이 가져다 주는 절묘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봄이 지기 전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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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의 사흘 동안 조그만 체험기 엄마의 말뚝2 해산바가지 외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35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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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하지 않은 건 쓸 수 없다'


 

이 세대 최고의 소설가인 故박완서 작가의 문학성은 한마디로 '복원과 증언'으로 규결된다. 1932년생인 작가는 감수성이 무르익을대로 익은 20대 초반에 6.25 전쟁을 겪는다. 개풍출신이지만 고향에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10살 터울의 오빠 그리고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예기치않은 전쟁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시절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았던 많은 이들의 삶처럼...


마흔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들어선 작가는 '영원한 현역 작가'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작고하기 직전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가의 작품들은 주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남편을 둔, 어느 평범한 부인의 옥바라지를 기록한 <조그만 체험기> 역시 작가가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라고 한다. 빠른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절 우리 사회에 난무해 있던 공무원의 부정부패와 전국민의 배금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글쎄. 며칠만 기다려보시면 아시겠지만 검찰에서 불기소로 풀어 주게 되어 있다구요.'

그는 K지청엔 검사가 통들어 다섯 명밖에 안 되는데 자기가 그들과 얼마나 친하다는 얘기며, 검찰청 수사과는 경찰의 수사과보다 얼마나 질이 높고 세도가 당당하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나서 갑자기 딴사람같이 낮고 곰살궂은 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내가 이 사건을 맡을 테니까 아주마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괜히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부탁하고 덤벼봤댔자 뭐가 되는 게 아니라구. 아줌마가 사람 하나는 기차게 잘 만났어. 몇 다리 건너는 거하고 직통 코스하곤 드는 비용이 곱절도 넘어 차이가 나거든"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中 1976년 作-

 


불량 형광등인 줄 모르고 판매한 남편을 잡아 가둔 담당 경찰의 태도와 말 속에는 비리와 부정을 더 이상 죄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능력과 실력 즉 '빽'으로 생각했던 70년대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때 나는 작가랍시고 언론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문제로 제법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진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세상 하고 많은 지붕 밑, 어느 지붕 밑에고 다 계집 서방이 만나 자식 낳고 사는 게 사람 사는 기본 형태라면 서방은 저녁에 계집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계집은 서방을 맞아 바가지 긁을 자유만 있으면 됐지 그 이상의 자유가 무슨소용이랴 싶었다.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中 1976년 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인 <조그만 체험기>의 작중 화자 '나'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자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그동안 얼마나 편협했으며 집과 회사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소시민의 고민에 불과했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증언과 복원 그리고 자기 성찰로 이어지는 박완서 작품의 기본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은 남편을 빼낼 수 있다는 온갖 비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변호사에게 의뢰하지만 변호사도 30만이라는 소송비용만 꿀꺽 한 채 남편의 기소를 막지 못한다. 결국 이주만에 주인공의 남편은 언도 공판에서 자유의 몸으로 돌아온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생활의 평온이 돌아오니 다시 그전처럼 자유의 문제를 생각하는 밤까지도 돌아왔다. 어느 날이고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 좋아져서 우리 앞에 자유의 성찬이 차려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전 같으면 아마 가장 화려하고 볼품 있는 자유의 순서로 탐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하고 많은 자유가 아무리 번쩍거려도 우선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부터 골라잡고 볼 것 같다.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中 1976년 作-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조금은 거칠게(?)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젊은 시절 겁탈당해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 받은 상처을 갖고 있는 여의사가 '의도적'으로 소파수술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산부인과를 운영한다. 그녀는 이와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의를 표출하고 있다.


만약, 작품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충분한 정당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 의사의 행동은 반인륜적인 살인행위로써 질타와 협오감만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의사의 모습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보여준다. 박완서 작품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 수많은 고백체 문장의 일부로 남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다.


 

이 박에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생명경시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으로는 <해산바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를 또 딸을 출산한 며느리를 못마땅해하는 작중 화자의 친구네 이야기와 딸 넷을 내리 출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아무런 차별도 차이도 없이 소중하게 생명을 거둘 줄 알았던 시어머니에 대한 작중 화자의 회상이 마치 서로 다른 이야기인냥 하나의 구조속에서 펼쳐진다. 혹자는 작품의 주제를 분산시키는 구조적 결함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메일 해설의 김양선 평론가의 말처럼 이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수다떨듯 편안하게 전해지는 작가의 작품적 특징으로 오히려 솜씨 좋은 장인에 의해 짜여진 옷감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잘 호응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시집갈 때, 신랑이 하필 과부의 외아들이라고 해서 친정에선 참 걱정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과부 시어머니를 처음 뵈었을때부터 싫지가 않았다. (......) 시어머님은 내 관상이 적중해 나는 마음 편히 시집살이를 할 수가 있었다. 실상 시집살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두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낳았지만 젖만 먹였다뿐 기른 건 시어머님이셨다.

(......)

그분의 망가진 부분이 육신보다는 정신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 후였다. 우리는 그걸 서서히 알아차리게 됐다. 처음엔 아이들 이름을 헷갈려 부르는 정도였다. 노인들이 흔히 그러는 걸 봐온지라 대수롭지 않게 알았다. 그러나 바로 가르쳐드려도 믿지를 않고 한사코 자기가 옮다고 주장하는 건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

집에서도 같은 말의 되풀이가 점점 심해졌다. 그 대신 그분의 주된 관심사에서 제외된 어휘는 급속도로 잊혀지는 것 같았다. 쌀 씻어 놓았냐? 빨래 걷었냐? 장독 덮었냐? 빗장 걸었냐? 등 주로 의식주에 관한 기본적인 관심이 온종일 되풀이되는 대화 내용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같은 말에 같은 대꾸를 해야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빈도가 하루하루 잦아지고 있었다.

-박완서, <해산바가지> 中, 1985년作-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런 시어머니의 증세는 마침내 한밤중 아들 내외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되고....

결국, 며느리는 신경안정제 없이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집안에서는 요양원이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모시자는 말이 나온다. 가족들의 일상이 산산히 쪼개지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남편 역시 휴일이면 어머니를 맡길 만한 곳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방방곡곡을 찾아 나선다. 그러던 어느날 그런 여정길에 아내도 따라 나서게 되는데...


 

내가 첫애를 뱄을 때 시어머님은 해산달을 짚어보고 섣달이구나. 좋을 때다. 곧 해가 길어지면서 기저귀가 잘 마를 테니, 하시더니 그해 가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 시골에 가서 해산 바가지를 구해 오게 했다.

"잘생기고, 여물고 굳고, 정한 데서 자란 햇바가지여야 하네. 첫 손자 첫 국밥 지을 미역 빨고 쌀 씻을 소중한 바가지니까."

이러면서 후한 값까지 미리 쳐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의 그분은 너무 경건해 보여 나도 덩달아서 아기를 가졌다는 데 대한 경건한 기쁨을 느꼈었다.

-박완서, <해산바가지> 中, 1985년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님의 예전 모습은 이처럼 정갈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셨다. 첫딸 이후 내리 딸 셋을 낳고 다섯번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도 시어머님은 더도 덜도 없이 한결같은 마음과 태도로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셨더랬다.

 

네 번째 딸을 낳고는 병원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의사나 간호사까지 나를 동정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시어머니의 그 경건한 의식을 받을 면목이 없었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 분은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고 경건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영접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 분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분의 여생도 거기 합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나는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그분의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만 보았지 한때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이 깃들었었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 빈 그릇이 되었다 해도 사이비 기도원 같은 데 맡겨 있지도 않은 마귀를 내쫓게 하는 수모와 학대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완서, <해산바가지> 中, 1985년作-

 


노인문제가 심각하다고 다들 난리다.

거창한 보고서나 통계자료를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그저 평일 혼잡한 출퇴근 시간을 피해 지하철이나 전철을 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조금이나마 운신을 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전부 출동이라도 한듯 삼삼오오 혹은 혼자 유유자적하며 그 넓은 전동차의 객실을 꽉 메우고도 모자라, 구부정히 서 있거나 아무데나 자리 펴고 앉아 있는 진풍경이 펼쳐져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탄 '젊은 것'들을 당황케 한다.


 

그런데 그런 그분들도 한때는 고결한 영원의 소유자였을 터이고 가장으로서 혹은 가정주부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가족들을 부양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완서의 <해산바가지>는 80년대 중반에 쓰여졌으니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이다. 그때는 저출산이니 고령화니 하는 말들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주제 의식이 담겨 있는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가는 때론 지나온 과거를 재평가하고 때론 현시대를 대변하기도 하는가하면, 다가올 미래를 미리 내다보기도 하나 보다.


 

연작소설인 <엄마의 말뚝2>는 6.25전쟁으로 오빠를 잃은 작가의 가족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엄마를 끔찍히도 아꼈던 오빠. 영민하고 고결한 인격까지 갖춘 오빠. 그런 오빠가 전쟁의 와중에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온 정신이 망가진채 살아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현저동 산꼭대기 빈촌으로 피난 아닌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 바보(?) 오빠는 후퇴하는 북한장교에 의해 다리에 총상을 입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물론, 작품은 교외로 이사나간 친구의 집에 놀라갔다 뒤늦게 도착한 작중화자가 이미 고령에 접어든 친정엄마가 장손주네에서 기거하다 넘어져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작품은 대학병원과 수술장 그리고 가족들의 병구환 등으로 한참이나 돌고 돌다가 마침내 작중 화자의 회상으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세심하게 잘 지어진 오래된 절에 들어서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유서 깊은 절일수록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부처가 바로 보이지는 않는다.

큰 문 지나 사천왕상을 지나 길게 이어진 돌담길을 건너 계단을 올라서서야 겨우 대웅전에 당도하고 다시 댓돌에 신발을 고이 벗고 올라서서 높은 천장을 머리에 이고 시선을 살포시 위로 해야 마침내 부처와 마주할 수 있다.


 

작가가 이처럼 주제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불필요(?)하게 주절거리면서 독자들을 이리저리 이끄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가족의 죽음은 불쑥 말할 수 없는, 가슴 속 깊숙히 새겨 있는 상처로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은 다음에나 간신히 말하여 질수 있는 그런 것임을 은연중으로 표현하려는 장치이다.


 

<엄마의 말뚝> 연작들과 약간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모두 참척(慘慽: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오빠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평생 지우지 못하고 견뎌냈던 가족-특히 엄마-에 대한 연민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큰 일이었는지는 <엄마의 말뚝>이라는 연작의 탄생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복해서 기록하고 복원하고 증언해야 견내뎔 수 있는 그런 참혹한 아픔이었으리라.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개풍군 땅은 우리 가족의 선영이 있는 땅이었지만 선영에 못 묻히는 한을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2> 中, 1981년作-

 

그런데 듣자하니, 박완서 작가도 그녀의 모친처럼 아들을 먼저 잃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실제로 경험했다고 하니 다시 한번 작가의 작품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손윗 동서와 전화 통화를 하는 형식을 띄고 있지만 동서의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작중 화자의 말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변형된 독백형 작품이다.


아마도 작중화자의 아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온 나라가 뜨겁게 타오르던 지난 80년대의 어느 언저리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은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열사의 죽음으로 '승격되어' 버린다. 사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애미에게 온 국민의 애도속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열사' 칭호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저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이까짓 것(?)나 의미를 부여하며 슬픔과 분노를 달랠 뿐.

 

뭐, 창환이 잃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뭔 줄 아세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 중요해진 거예요. 증조모님 제사도 안 중요해진 것 중의 하나일 뿐이지, 다는 아녜요.

(......)

제삿날 말고 또 안 중요해진 게 뭐가 있느냐고요. 많지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과연 형님이 이해하실 수 있으실라나 몰라. 형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제삿날처럼 그렇게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내가 더 중요해요. 남을 위해서 나를 속이기가 싫어요. 무엇보다도 피곤하니까요. 가장 쓰잘 데 없는 걸로 진 빼기 싫어요. 또 있구말구요. 그전엔 장만하는 게 중요했는데 이젠 버리는게 더 중요해요. 형님보담은 좀 덜 했지만 저도 물건 욕심이 꽤 있었잖아요.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中, 1993년 作-

 

 


박완서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국민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체험한 바를 기록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냥 체험한 것들을 쏟아내며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생명존중, 중산층의 인중성, 물신주의 같은 시대적 모순들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어쩌면 작가 자신도 포함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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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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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베스트셀러일수록 왠지 멀리하려는 나의 청개구리식 아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소설작품들을 한동안 멀리했던 독서편식탓인지는 몰라도 암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이제서야 읽었다. 사실, 한국현대소설들을 차근차근 읽어 보리라 결심을 한 후, 신경숙 작가의 단편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엄마를 부탁해>를 언젠가는 읽어 보리라 생각했었는데 그 언젠가가 내 생각보다는 일찍 찾아왔다고나 할까.

 

 

암튼, 평소 즐겨 찾는 동네 도서관의 사서추천작코너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역력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발견하고는 마치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것마냥 '뜻밖의 행운'에 감격해 했다. 최근 이 작품이 아시아 맨문학상 최종수상작으로 선정되고 또 수상식장에서 작가가 수상소감 말미에 덧붙인 탈북자 강제 북송을 반대하는 발언이 언론에 집중 소개되면서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이 다시 많아졌을텐데도 불구하고 얌전히 제 자리에 놓여 있다가 내 눈에 띄었다는 점이 마냥 신기했다.

 

 

'읽을 운명인가보다......'했더랬다.

 

 

1938년 7월24일생인 박소녀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상경했다가 서울역 전철역에서 앞서 걷던 남편이 오른 전동차를 따라 타지 못하면서 행방불명되고 만다. 엄마의 부재를 통해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족들은 엄마의 존재 가치를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 나간다.

 

 

첫째딸의 독백과 장남, 남편 그리고 주인공인 엄마의 독백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은 신경숙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몇 번이고 엄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 역시 몇 번이나 엄마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을 억누르며 '엄마! 엄마! 우리 엄마ㅡ'를 가슴으로만 셀수도 없이 외쳐 불렀다.

 

 

내 엄마 역시 작품 속의 박소녀 할머니와 같은 1938년생이다.

박소녀 할머니처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허리가 많이 휘어 거동이 불편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병원에서 지내신다.

우리 엄마도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삼남매를 키우셨다.

 

자신의 건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채 자나깨나 자식 걱정뿐이셨다. 그래서 얻은 노환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일찍 일찍 병원을 찾지 않아서 이렇게 본인 고생 자식 고생이라며 푸념을 해대지 않았던가.

 

 

엄마의 희생으로 성장했으면서도 자식들은 그런 엄마의 희생을 마주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한다. 그건 인간으로 하여금 그토록 헌신하게 만드는 그 '모성'이라는 힘의 위대함을 진작부터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단언컨대, 모성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소녀 할머니는 3살때 사고로 아버지를 여인 까닭에 학교 문턱조차 밟아 보지 못했단다. 그래서 그녀에게 학교란 가고 싶었지만 못 간, 그래서 한없는 '그리움'이자 또한 너무나도 낯선 '그대'이지 않았을까. 돈과 시간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기차타고 상경하기는 글을 읽지 못하는 박소녀 할머니에게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미국에 가는 것과도 같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을 뚫고 대학 입학 원서 제출용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큰 아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채 서울로 달려온다. 이것이 바로 모성이고 엄마인 것이다.

 

 

그런 엄마를 잃은 것이다. 아니 잊은 것이다.

 

박소녀 할머니가 젊어서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과 그런 남편 대신으로 의지했던 곰소의 그 남자를 찾아 나서지 않은 건 남편에 대한 애정이나 의리가 아니었으리라.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닌 다섯 남매의 엄마라는 사실이 그녀를 주저 앉혔을 것이다.

 

 

내 엄마도 그러했을까?

아마도...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 엄마도 고단한 삶을 헌 신 벗어던지듯 그렇게 훌훌 털어내고 훨훨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난히도 총명하여 명문 약대를 나온 똑똑한 둘째 딸이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자신의 아이들 사이에서 등골이 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박소녀 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 애미 힘들게 하는 손주 새끼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을 고스란히 들어내고 있다.

 

 

친정 엄마가 외손주를 돌봐주는 것은 외손주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예뻐서가 절대로 아니라, 조막만한 손주보다 몇 배는 더 큰, 이제는 어른이 되어 엄마까지 된 '내딸'이 힘들까봐서다.

 

 

예전에 언니가 첫딸을 낳았을 때였다.

그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아장아장 걸음를 떼어 놓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엄마는 한없이 행복해했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짓굳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엄마!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인데 말야. 언니와 조카가 동시에 물에 빠졌어. 그럼, 엄마는 누구 먼저 구할 것 같아?"

그때 엄마의 대답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당연히 네 언니지!"였다.

내 딸이 없으면 손주 손녀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과 함께......

 

 

난, 그때 사랑은 절대 '내리사랑'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의 사랑이 딸에서 손주로 내려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영원히 딸에게만 머문다. 손주에 대한 사랑 역시 딸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 '엄마'인데, 그런 엄마를 그런 엄마의 존재와 소중함을 우린 너무 자주 잊고 산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작품속의 '너' '그' '당신'은 모두 이땅의 딸들이고 아들들이고 또한 남편들인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작가의 또 다른 단편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읽었을 때와 매우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입원을 계기로 자식에 대한 부모 특히 부성애가 진하게 배어 나오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연작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두 작품은 배경에서부터 분위기 등이 서로 잘 어울린다.

 

 

끝으로, '장미묵주'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에필로그는 그냥 작품의 후일담으로 남겨 두었다가 다른 지면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그 엄마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데, 굳이 감정이 고조될대로 고조되어 있는 독자들을 낯선 이국땅으로 데리고 가 굳이 서구적이고 이국적인 모성애 앞에 '불쑥 '던져 놓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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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3 - 나의 식인 룸메이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2
이종호 외 9인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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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의 추리단편집인 <나는 사랑을 죽였다>에 이어 두번째로 읽은 <한국공포문학단편선-3>은 진작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독서목록에 올려 놓은 채 이제나 저제나 '기회'만 엿보고 있던 터라 부담스럽게 두꺼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추리소설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장르문학작품집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읽는 만큼 그 수준에 너무 실망하면 어쩌나...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식인괴물에 볼모처럼 붙잡혀서 사람들을 유인하여 식인괴물에게 받치는 주인공의 삶을 그린, 신지수의 <나의 식인 룸메이트>는 독특한 설정과 호러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다만,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찌지리 못난 놈'인 주인공은 사회적 약자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복수심의 칼끝이 향하는 방향은 뜻밖에도 자신을 못살게 괴롭힌 사회적 '강자'가 아니라 오히려 노숙자나 배달부 등 자신과 비슷한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한편, 모두 열편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을 꼽으라면 장은호의 <노랗게 물든 기억> 을 들겠다.

친구와 함께 건널목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친구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본 열살배기 어린 남자아이가 겪어야했던 공포의 깊이가 아주 밀도 있게 잘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특히,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을 떠밀어 죽였다고 생각하는 상우 엄마로부터 유발되는 공포와 파국적인 결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의사라는 직업적 특수성을 십분 발휘한다면 장은호라는 작가는 '매디컬스릴러'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같다. 

 

개개인의 심리 깊숙히 내재되어 있는 '무의식적 공포'를 소재로 한, 신진오의 <공포인자> 역시 참신한 작품이었다.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의해 감기에 걸리면 일명 '홉스 증후군'이라는 포비아 증상을 겪게 되는데, 이때 나타다는 공포는 개개인에게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공포의 발현이다. 그래서 주인공 정우의 어머니는 '모서리 공포증'을 동생 유미는 '귀신 공포증'을 아버지는 고독 공포증'을 겪는다.

소재와 주제 그리고 형식 등에 있어서 어딘가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동네 꼬마들을 유인하여 잡아간다는 이야기는 어릴 적 어느 동네에서나 한 번쯤은 유행했을 법한 '괴담'이다. 동네마다 괴괴하거나 인적이 드문 폐가나 오래된 절 혹은 건물 등이 있었다는 것과 그곳을 중심으로 한, 믿거나 말거나식의 풍문이나 괴담들에 대한 기억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한두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우명희의 <담쟁이 집>은 바로 이러한 어린시절의 추억 속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어느날 갑자기 변해 버린 언니 그리고 하나 둘씩 사라지는 동네 아이들. 그들을 함께 찾아 나선 엄마의 돌변 등등......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시달려 보았을 악몽들이 아닐까. 

공포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마지막 마무리까지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엄성용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고객을 상대하는 특히 고객의 불만을 직접 대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엄청난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로 나에게는 공포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사회고발르포로 느껴졌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앞으로는 마트나 놀이공원 등에서 고객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의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그 어떤 요구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나 역시 빈번하게 울려대는 휴대폰을 통한 각종 영업과 안내전화에 불만이 많은 편인데, 일명 '악질고객'의 항의에 참고 참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주인공이 악날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서비스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간접 쾌감을 제공한다는 점에만 만족하지 않는다면 좀 더 강력하게 주제의식을 살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준영의 <붉은 비>는 서구식 호러물과 가장 유사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비가 쏟아지고 그 비를 맞은 동물들이 '좀비'가 되어 인간을 공격한다는 설정은 아마도 이제는 이 분야의 전설이 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라는 작품 혹은 이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후에 탄생한 수많은 호러물들로부터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이 밖에도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 중 황희의 <얼음폭풍> 역시 서구 공포스릴러물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김준영의 <붉은 비>는 배경을 한국으로 옮긴 반면, 황희의 <얼음폭풍>은 미국의 어느 한 도시를 배경으로 동양계 이민가족이 겪는 자연재해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작품의 주제는 자연재해보다는 그 자연재해 속에서 보여지는 미국 사회의 이중성 즉 인종차별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인종차별이야말로 그 어떤 폭풍우보다도 더 무겁고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통사고로 외상후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과 함께 교통로 여자친구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친구의 흔적은 온라인상에서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나를 미행하는 한 남자......

 

전 건우의 <선잠>이라는 작품은 뇌사상태에 빠진 내(나)가 또 다른 나에게 사건의 진상을 설명한다는 발상은 참신하다 못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오싹함을 전해준다. 인간의 뇌는 우뇌와 좌뇌로 양분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과학적 사실이다. 그런데 한쪽 뇌는 죽었으나 또 다른 한쪽 뇌는 살아 있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하지 않다는 법 또한 없지 않은가.

 

이종호의 <은혜>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보 험금을 타기 위해 젊은 여성에 의해 저질러진 직계가족살인의 전말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그녀가 저질은 사건은 그 잔인감과 반인류성으로 인해 종종 사이코패스를 언급하는 텍스트나 서적에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나 역시 이종호의 <은혜>라는 작품을 읽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던 터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끔찍한 공포가 다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사건의 피해자들도 처음에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40이 되도록 불우한 가정형편때문에 장가를 가지 못한 형이 새하얀 얼굴의 마음 착한 여성을 데리고 와 형수라고 소개했을 때는 이 세상에 저렇게 착하고 예쁜 여자도 있나...하고 말이다.

 

이종호 작가의 작품은 비록 이 작품이 처음이지만 소개된 작가의 이력으로 볼때, 이미 추리장르소설을 여러권 출판한 경력이 있는 만만찮은 내공을 소유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허옇게 변해 버리는 '귀신(?)'을 등장시킬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이 작품을 보험사기를 소재로 한, 본격추리소설로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발화체라는 매우 독특한 소재와 형식을 선보이고 있는 김종일의 <불>은 아동학대에 대한 경종으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부모로부터 갖은 학대를 받은 소년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다른 생명체를 불태워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은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친구를 더 이상 '좆삐리'로 부르며 무시하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두려움으로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내몰리게 된다. 그리곤 그 비밀을 그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만다. 무덤까지 갖고 가야 했던 그 비밀을 말이다.


마지막 반전이 아주 훌륭하다.

근데, 어린 시절 학대에 노출된 적이 없는 작중화자가 엄청난 그 '능력'을 이어받게 된다는 결말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암튼, 상당히 두꺼운 책을 지루하다는 생각없이 순식간에 읽었다.

앞으로 뛰어난 한국추리작품들을 많이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독자로서 이 땅의 추리소설작가들에게 많은 격려와 성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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