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하지 않은 건 쓸 수 없다'
이 세대 최고의 소설가인 故박완서 작가의 문학성은 한마디로 '복원과 증언'으로 규결된다. 1932년생인 작가는 감수성이 무르익을대로 익은 20대 초반에 6.25 전쟁을 겪는다. 개풍출신이지만 고향에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10살 터울의 오빠 그리고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예기치않은 전쟁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시절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았던 많은 이들의 삶처럼...
마흔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들어선 작가는 '영원한 현역 작가'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작고하기 직전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가의 작품들은 주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남편을 둔, 어느 평범한 부인의 옥바라지를 기록한 <조그만 체험기> 역시 작가가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라고 한다. 빠른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절 우리 사회에 난무해 있던 공무원의 부정부패와 전국민의 배금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글쎄. 며칠만 기다려보시면 아시겠지만 검찰에서 불기소로 풀어 주게 되어 있다구요.'
그는 K지청엔 검사가 통들어 다섯 명밖에 안 되는데 자기가 그들과 얼마나 친하다는 얘기며, 검찰청 수사과는 경찰의 수사과보다 얼마나 질이 높고 세도가 당당하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나서 갑자기 딴사람같이 낮고 곰살궂은 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내가 이 사건을 맡을 테니까 아주마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괜히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부탁하고 덤벼봤댔자 뭐가 되는 게 아니라구. 아줌마가 사람 하나는 기차게 잘 만났어. 몇 다리 건너는 거하고 직통 코스하곤 드는 비용이 곱절도 넘어 차이가 나거든"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中 1976년 作-
불량 형광등인 줄 모르고 판매한 남편을 잡아 가둔 담당 경찰의 태도와 말 속에는 비리와 부정을 더 이상 죄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능력과 실력 즉 '빽'으로 생각했던 70년대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때 나는 작가랍시고 언론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문제로 제법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진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세상 하고 많은 지붕 밑, 어느 지붕 밑에고 다 계집 서방이 만나 자식 낳고 사는 게 사람 사는 기본 형태라면 서방은 저녁에 계집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계집은 서방을 맞아 바가지 긁을 자유만 있으면 됐지 그 이상의 자유가 무슨소용이랴 싶었다.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中 1976년 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인 <조그만 체험기>의 작중 화자 '나'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자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그동안 얼마나 편협했으며 집과 회사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소시민의 고민에 불과했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증언과 복원 그리고 자기 성찰로 이어지는 박완서 작품의 기본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은 남편을 빼낼 수 있다는 온갖 비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변호사에게 의뢰하지만 변호사도 30만이라는 소송비용만 꿀꺽 한 채 남편의 기소를 막지 못한다. 결국 이주만에 주인공의 남편은 언도 공판에서 자유의 몸으로 돌아온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생활의 평온이 돌아오니 다시 그전처럼 자유의 문제를 생각하는 밤까지도 돌아왔다. 어느 날이고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 좋아져서 우리 앞에 자유의 성찬이 차려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전 같으면 아마 가장 화려하고 볼품 있는 자유의 순서로 탐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하고 많은 자유가 아무리 번쩍거려도 우선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부터 골라잡고 볼 것 같다.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中 1976년 作-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조금은 거칠게(?)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젊은 시절 겁탈당해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 받은 상처을 갖고 있는 여의사가 '의도적'으로 소파수술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산부인과를 운영한다. 그녀는 이와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의를 표출하고 있다.
만약, 작품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충분한 정당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 의사의 행동은 반인륜적인 살인행위로써 질타와 협오감만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의사의 모습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보여준다. 박완서 작품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 수많은 고백체 문장의 일부로 남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다.
이 박에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생명경시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으로는 <해산바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를 또 딸을 출산한 며느리를 못마땅해하는 작중 화자의 친구네 이야기와 딸 넷을 내리 출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아무런 차별도 차이도 없이 소중하게 생명을 거둘 줄 알았던 시어머니에 대한 작중 화자의 회상이 마치 서로 다른 이야기인냥 하나의 구조속에서 펼쳐진다. 혹자는 작품의 주제를 분산시키는 구조적 결함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메일 해설의 김양선 평론가의 말처럼 이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수다떨듯 편안하게 전해지는 작가의 작품적 특징으로 오히려 솜씨 좋은 장인에 의해 짜여진 옷감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잘 호응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시집갈 때, 신랑이 하필 과부의 외아들이라고 해서 친정에선 참 걱정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과부 시어머니를 처음 뵈었을때부터 싫지가 않았다. (......) 시어머님은 내 관상이 적중해 나는 마음 편히 시집살이를 할 수가 있었다. 실상 시집살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두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낳았지만 젖만 먹였다뿐 기른 건 시어머님이셨다.
(......)
그분의 망가진 부분이 육신보다는 정신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 후였다. 우리는 그걸 서서히 알아차리게 됐다. 처음엔 아이들 이름을 헷갈려 부르는 정도였다. 노인들이 흔히 그러는 걸 봐온지라 대수롭지 않게 알았다. 그러나 바로 가르쳐드려도 믿지를 않고 한사코 자기가 옮다고 주장하는 건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
집에서도 같은 말의 되풀이가 점점 심해졌다. 그 대신 그분의 주된 관심사에서 제외된 어휘는 급속도로 잊혀지는 것 같았다. 쌀 씻어 놓았냐? 빨래 걷었냐? 장독 덮었냐? 빗장 걸었냐? 등 주로 의식주에 관한 기본적인 관심이 온종일 되풀이되는 대화 내용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같은 말에 같은 대꾸를 해야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빈도가 하루하루 잦아지고 있었다.
-박완서, <해산바가지> 中, 1985년作-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런 시어머니의 증세는 마침내 한밤중 아들 내외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되고....
결국, 며느리는 신경안정제 없이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집안에서는 요양원이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모시자는 말이 나온다. 가족들의 일상이 산산히 쪼개지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남편 역시 휴일이면 어머니를 맡길 만한 곳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방방곡곡을 찾아 나선다. 그러던 어느날 그런 여정길에 아내도 따라 나서게 되는데...
내가 첫애를 뱄을 때 시어머님은 해산달을 짚어보고 섣달이구나. 좋을 때다. 곧 해가 길어지면서 기저귀가 잘 마를 테니, 하시더니 그해 가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 시골에 가서 해산 바가지를 구해 오게 했다.
"잘생기고, 여물고 굳고, 정한 데서 자란 햇바가지여야 하네. 첫 손자 첫 국밥 지을 미역 빨고 쌀 씻을 소중한 바가지니까."
이러면서 후한 값까지 미리 쳐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의 그분은 너무 경건해 보여 나도 덩달아서 아기를 가졌다는 데 대한 경건한 기쁨을 느꼈었다.
-박완서, <해산바가지> 中, 1985년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님의 예전 모습은 이처럼 정갈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셨다. 첫딸 이후 내리 딸 셋을 낳고 다섯번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도 시어머님은 더도 덜도 없이 한결같은 마음과 태도로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셨더랬다.
네 번째 딸을 낳고는 병원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의사나 간호사까지 나를 동정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시어머니의 그 경건한 의식을 받을 면목이 없었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 분은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고 경건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영접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 분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분의 여생도 거기 합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나는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그분의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만 보았지 한때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이 깃들었었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 빈 그릇이 되었다 해도 사이비 기도원 같은 데 맡겨 있지도 않은 마귀를 내쫓게 하는 수모와 학대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완서, <해산바가지> 中, 1985년作-
노인문제가 심각하다고 다들 난리다.
거창한 보고서나 통계자료를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그저 평일 혼잡한 출퇴근 시간을 피해 지하철이나 전철을 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조금이나마 운신을 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전부 출동이라도 한듯 삼삼오오 혹은 혼자 유유자적하며 그 넓은 전동차의 객실을 꽉 메우고도 모자라, 구부정히 서 있거나 아무데나 자리 펴고 앉아 있는 진풍경이 펼쳐져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탄 '젊은 것'들을 당황케 한다.
그런데 그런 그분들도 한때는 고결한 영원의 소유자였을 터이고 가장으로서 혹은 가정주부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가족들을 부양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완서의 <해산바가지>는 80년대 중반에 쓰여졌으니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이다. 그때는 저출산이니 고령화니 하는 말들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주제 의식이 담겨 있는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가는 때론 지나온 과거를 재평가하고 때론 현시대를 대변하기도 하는가하면, 다가올 미래를 미리 내다보기도 하나 보다.
연작소설인 <엄마의 말뚝2>는 6.25전쟁으로 오빠를 잃은 작가의 가족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엄마를 끔찍히도 아꼈던 오빠. 영민하고 고결한 인격까지 갖춘 오빠. 그런 오빠가 전쟁의 와중에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온 정신이 망가진채 살아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현저동 산꼭대기 빈촌으로 피난 아닌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 바보(?) 오빠는 후퇴하는 북한장교에 의해 다리에 총상을 입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물론, 작품은 교외로 이사나간 친구의 집에 놀라갔다 뒤늦게 도착한 작중화자가 이미 고령에 접어든 친정엄마가 장손주네에서 기거하다 넘어져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작품은 대학병원과 수술장 그리고 가족들의 병구환 등으로 한참이나 돌고 돌다가 마침내 작중 화자의 회상으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세심하게 잘 지어진 오래된 절에 들어서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유서 깊은 절일수록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부처가 바로 보이지는 않는다.
큰 문 지나 사천왕상을 지나 길게 이어진 돌담길을 건너 계단을 올라서서야 겨우 대웅전에 당도하고 다시 댓돌에 신발을 고이 벗고 올라서서 높은 천장을 머리에 이고 시선을 살포시 위로 해야 마침내 부처와 마주할 수 있다.
작가가 이처럼 주제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불필요(?)하게 주절거리면서 독자들을 이리저리 이끄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가족의 죽음은 불쑥 말할 수 없는, 가슴 속 깊숙히 새겨 있는 상처로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은 다음에나 간신히 말하여 질수 있는 그런 것임을 은연중으로 표현하려는 장치이다.
<엄마의 말뚝> 연작들과 약간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모두 참척(慘慽: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오빠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평생 지우지 못하고 견뎌냈던 가족-특히 엄마-에 대한 연민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큰 일이었는지는 <엄마의 말뚝>이라는 연작의 탄생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복해서 기록하고 복원하고 증언해야 견내뎔 수 있는 그런 참혹한 아픔이었으리라.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개풍군 땅은 우리 가족의 선영이 있는 땅이었지만 선영에 못 묻히는 한을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2> 中, 1981년作-
그런데 듣자하니, 박완서 작가도 그녀의 모친처럼 아들을 먼저 잃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실제로 경험했다고 하니 다시 한번 작가의 작품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손윗 동서와 전화 통화를 하는 형식을 띄고 있지만 동서의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작중 화자의 말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변형된 독백형 작품이다.
아마도 작중화자의 아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온 나라가 뜨겁게 타오르던 지난 80년대의 어느 언저리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은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열사의 죽음으로 '승격되어' 버린다. 사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애미에게 온 국민의 애도속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열사' 칭호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저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이까짓 것(?)나 의미를 부여하며 슬픔과 분노를 달랠 뿐.
뭐, 창환이 잃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뭔 줄 아세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 중요해진 거예요. 증조모님 제사도 안 중요해진 것 중의 하나일 뿐이지, 다는 아녜요.
(......)
제삿날 말고 또 안 중요해진 게 뭐가 있느냐고요. 많지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과연 형님이 이해하실 수 있으실라나 몰라. 형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제삿날처럼 그렇게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내가 더 중요해요. 남을 위해서 나를 속이기가 싫어요. 무엇보다도 피곤하니까요. 가장 쓰잘 데 없는 걸로 진 빼기 싫어요. 또 있구말구요. 그전엔 장만하는 게 중요했는데 이젠 버리는게 더 중요해요. 형님보담은 좀 덜 했지만 저도 물건 욕심이 꽤 있었잖아요.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中, 1993년 作-
박완서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국민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체험한 바를 기록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냥 체험한 것들을 쏟아내며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생명존중, 중산층의 인중성, 물신주의 같은 시대적 모순들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어쩌면 작가 자신도 포함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