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번호 113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0
류성희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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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번호 113>은 범죄추리소설이지만 초반에 범인이 들어나므로 '누가, '어떻게'에 기반한 정통추리물이라기보다는 '왜, 어째서'에 무게가 실려 있다.


한 젊은 남자가 무참히 살해된다.

범인은 젊은 여자다.

그녀는 어째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을까?

여자는 엄마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 집착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론 불행한 중년 여인이 있다.

우연히 딸의 살인 현장을 보고는 딸의 범행을 감추려 한다.

모성이란 이렇게 무모하리만치 강한 걸까?

여인은 딸의 죄를 뒤집어 써서 희생양이 됨으로써 자신의 과거 잘못을 스스로 징벌하려 한다. 이런 행동이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딸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라는 건 모른 채.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또 다른 젊은 여자가 있다.

엄마의 집착이, 자신을 향한 엄마의 그 사랑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검사가 되어 사건을 파헤치고, 다시 변호사의 신분으로 진범을 밝혀낸다.

이 과정에서 비록 너무 늦었지만 엄마에 대한 미움이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깨달음은 이렇듯 언제나 한발 뒤늦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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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류성희 작가의 단편추리소설들을 읽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그녀의 장편인 <사건번호 113>은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대형서점에서 심심풀이로 몇 페이지를 넘겨 읽다가는 추석 명절 연휴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명절 연휴 기간 동안 다 읽어 버렸다.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아쉬움 또한 큰 작품이다.

법률과 법정 및 재판 과정 등등...

작가 나름대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여 사실성을 높이려 했으나, 지나치게 주제의식에 매몰되었다는 느낌이다. 

작품속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등장인물 뒤로 자신을 감춰야 한다. 등장인물보다 작가의 목소리가 커지면 생동감이 사라지고 사실성이 떨어져 독자는 감정이입을 방해받게 된다.


작가는 법을 이야기하고 싶었단다.

변호사 혹은 검사로 또는 딸이나 엄마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실'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며, 법의 잣대 역시 신분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의 부조리를 말하고 싶었으리라.


법의 잣대는 어떤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정한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살인에는 무조건 사형'과 같은 법이 공정하다고 할 순 없듯이...

법이 공정하고 공평하기 위해선, 상황과 입장에 따라 불공정하고 불공평해 질 수 밖에 없다.

바로, 법의 부조리다.


하긴 뭐...

우리의 삶 자체가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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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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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무섭다.

각고의 노력으로 힘겹게 쌓아올려 지켜온 평범한 일상들이 순식간에 물속 저편으로 가라앉아 버릴까봐...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은 바로 누구나 갖고 있는 이런 두려움에 대한 '재인식'이요 '재발견'이라 하겠다. 

철옹성같은 거대한 댐이 새오라기같은 미세한 균열에 무너지듯, 평탄한 일상으로 채워진 삶이 예기치 않게 무너질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그 불행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도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게 '기회'였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

어쩌면, 인생이란 애당초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쌓아온 자신만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주인공 최현수도... 그의 아내 강은주도...

오영제도...

역시 그랬다.


힘겹게 쌓아 올린 자신만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러나,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그 몸부림이 타인의 일상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자각은 하지 못한다.



<7년의 밤>은 바로 그런 '몸부림'의 교향곡이다.

작가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와 같다.

각기 다른 악기들이 모여 전혀 다른 세상을 연주해내듯,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들을 하나의 정점으로 집결시켜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주인공 최현수와 '우물'에 얽힌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는 교묘하게 '세령호'와 연결되고...

월남에서 돌아온 아버지 최상사에 대한 반감과 어린 아들 서현에 대한 집착 사이에는 '부성애'라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영제와 그의 딸 세령은 어떻게 연결될까?

최현수의 일상을 뒤흔든 작은 균열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아들에 대한 집착이라면, 오영제의 일상에 파고든 균열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가족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가족에 대한 폭력은 자학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런지...



최현수와 최서현의 7년의 밤이 '후회'와 '외면'이었다면, 오영제와 그의 아내 하영의 7년의 밤은 어떠했을까?

500페이지가 넘는 적잖은 분량 어디에서도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첫번째 아쉬움이다.


최현수의 아내 강은주의 삶에 여러 지면을 할애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퇴장' 장면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두번째 아쉬움이다.


세번째 아쉬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시작해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다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마무리되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승환이라는 인물의 '소설'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형식을 취한 점이다. 


전반부와 중반부의 고강도 흥미와 재미에 비해, 거칠고 장황하며 기대했던 '반전' 따윈 없었던 후반부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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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처럼,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언제나 '그러나'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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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음모 - 위험천만한 한국경제 이야기
조준현 지음 / 카르페디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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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천만한 한국경제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비주류(?) 경제학자의 사회현실 비판서라 하겠다.


저자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은 여덟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수출주도형 경제가 아닌 내수주도형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법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셋째, 대기업 재벌의 존재는 우리사회에 득보단 실이 더 크다.

넷째, 생산성 향상은 노동의 양이 아닌 질이다. 

다섯째, 부동산 개발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더 이상 경제 성장을 이끌지 못한다.

여섯째, 부동산 불패 신화는 말그대로 현실이 아닌 과거의 '신화'일 뿐이다.

일곱째, 학교와 군대가 바뀌어야 한다.

여덟째, 통일의 편익과 분단 비용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저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던 내용들이다.

다만,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이 분야의 '스타 학자'라 할 수 있는 장하준교수에 대한 비판이 눈길을 끌었다.

장하준 교수의 책을 재밌게 읽은 나로서는 솔직히 그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보호무역주의를 옹호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무튼 애매모호하던 장하준교수의 '본질'을 이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과거 6,70년대식 '국가주도형 국내산업보호주의'로 귀결되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칠십 넘은 노인이 아흔인 부모앞에서 색동저고리를 입고 우유병을 빠는 망령 행위'라고 묘사했다. 말 그대로 '어른이 되었으면 어른답게, 노인이 되었으면 노인답게' 행동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가 성장했으니 이제 과거의 '박정희'식 개발정책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제상황도 바뀌었고 경제구조 또한 노동집약에서 자본, 기술집약으로 전환된 마당에 다시 과거로의 회귀는 누가 봐도 잘못되었다. 그런데 장하준 교수는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폭넓은 인기와 지지를 얻을 수 있는가? 승자(자본가)에게 유리한 규칙을 주장하는 그를 어떻게 일반 대중들이 지지할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본가보다 일반대중이 어리석기때문이다. 


이 밖에도 노동시장 유연화와 최저임금 인상 및 저출산 문제가 마치 우리 사회를 '벼랑'으로 내몰기라도 하듯 호들갑을 떠는 것 역시 승자의 음모에 다름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자꾸만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주장은 알고보니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산업예비군(일명 '실업자')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승자(자본가)의 음모'라는 지적에 100% 공감이 갔다. 

정부와 기업은 청년층을 치열한 취업경쟁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생산성 향상'이라는 불로소득을 거두고 있다. 여기에 노년층 부양을 위해 더 많이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양의 의무를 국민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이며 기업이 지속적으로 저임금 노동자를 손쉽게 고용할 수 있도록 예비 실업자들을 더 많이 양산하라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뿐만아니라 부동산 개발 등은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라기보다는 부동산과 자본 등 노동을 제외한 생산요소를 소유한 이들의 '이익 실현'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 역시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데 대중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지는 걸까?'

한마디로 어리석기때문이다.


근무시간 단축 문제도 그렇다.

대다수 국민들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많을수록 소비 즉 내수가 확대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수출지상주의의 세례를 흠뻑 받은 사람일수록 수출이 늘어나면 국민 생활의 질도 저절로 향상되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수출이 늘어난다고 해서 국민들의 소득이 더불어 늘어나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국민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야말로 진짜 선진국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풍부한 인구와 자원을 갖고 있었던 남미의 대국들이 지난 6,70년대에 수출주도형 정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물론 이미 수출대체산업으로 자리 잡은 기득권 세력 때문에 채택할수도 없었을 테지만-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알면 알수록 슬퍼진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지 못하니 화가 난다.

대안은 정녕 없는 걸까?

없는 것 같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게임의 룰'을 만드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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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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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해가 바뀌어서야 읽었다. 

'선물 받은 책은 잘 읽지 않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읽는 내내 책을 선물해준 이에 대한 미안함이 불쑥불쑥 밀려와 책읽기를 방해했다.



수상작인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솔직히 재미있게 읽히진 않았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눈에 비친 작가의 새로운 시도와 참신성을 알아보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책력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굳이 문학상은 주로 어렵고 난해한 작품에 수여되는 걸까?라는 오래된 의구심이 치밀었다.


암튼, 수상작을 포함하여 심사위원들이 좋다고 평한 작품들은 김숨의 <국수>를 제외하곤 나에게 별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김숨의 <국수>는 어머니와 의붓딸 간의 대립과 화해를 여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신경숙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밖에 심사위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은 김경욱의 <스프레이>라는 작품 역시 택배에 얽힌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그려냈다고 하는데 무딘 나의 감수성을 자극하진 못했다.


오히려 심사위원들이 외면(?)한 조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이란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글쓴이의 추억과 경험이 곳곳에 배에 있는 듯한 작품은 성장기 소설로 단편이 아닌 장편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닌 유년의 터널을 지나 온 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비밀들...

이런 남다른 혹은 남모를 비밀들이야말로 마치 성인식의 '상흔'처럼 아로새겨져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법이다.


어린시절의 추억과 비밀에는 '장소와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얽혀 있곤 하는데 조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 역시 '왕십리'라는 특정 지역의 변천과정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왕십리에서 어린 시절 한때를 보낸 이들이라면 자신의 추억과 작품 속 주인공의 추억이 오버랩되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위를 종횡무진하는 무당집 딸 '미설'과 '민혁'이라는 친구는 누구에게나 한두 명 쯤 있는 유년의 '인연'이 아닐까싶다.

이야기 전개 구성과 등장 인물 묘사 등등...

모든 것들이 친숙하여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큐비클'이라는 사무 공간 안에 갇힌 현대인의 소외를 그려낸 중견작가 하성란의 <오후, 가로지르다> 는 내가 이해하는 문학작품의 테두리 안에서는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작품이지 싶다. 내가 보기에 그만큼 새롭고 전위적이라는 의미다.


이 밖에 함정임의 <저녁 식사가 끝난 뒤>와 조해진의 <유리>, 초재훈의 <미루의 초상화> 등의 작품들은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문학 작품이라는 게 반드시 주제나 의미를 갖고 있어야 작품인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요지는 '할 말 없음'이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할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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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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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는 작가의 첫 작품집 <달려라, 아비>의 뒤를 이어 나온 두번째 작품집으로, 주로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 여덟편을 모은 것이다. 2002년 스물둘이라는 젊은 나이로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에 대한 문단과 독자의 관심을 이어간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는 각각 21세기와 함께 성인이 된, 소위 '88만원세대들의 자화상이자 넋두리다.

비록, 전쟁을 겪고 굶기를 밥먹듯 하진 않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부모 밑에서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고, 마침내 대학생이 되어 상경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도시 변두리의 반지하 자취방과 최저임금 아르바이트 뿐이다. '청춘'의 들끓는 고뇌도 불같은 열정도 없는 젊은이들은 소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명함'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매진한다. 누구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누구는 노량진 4인용 독서실에서......


특히, 둘만의 오붓한 '공간'이 절실한 젊은 연인들의 성탄 전야 풍경을 그린 <성탄특선>은 기성세대로서 적게는 10살 많게는 20살 어린 '3포세대'의 아픔과 슬픔이 절절히 전해져왔다.   


여자와 남자는 대학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 벌써 네번째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첫번째 크리스마스 때, 여자는 남자에게 한마디 말도 않고 시골집에 내려가버렸다. 남자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닐까, 통화가 안되는 휴대 전화를 붙들고 끙끙댔지만, 여자가 낙향한 이유는 단지 '옷이 없다'는 거였다.

(......)

두 번째 크리스마스 땐 남자가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자는 그날 서울에 있었다. 옷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남자는 졸업 후 일년 동안 취직을 못한 탓에 여자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

남 자는 여자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저녁도 먹고, 선물도 주고, 와인이나 칵테일도 마시고, 평소 가던 곳보다 조금쯤 더 비싼 모텔에서 근사한 섹스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남들처럼. 남자는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 날까지 여자에게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만드는 형편없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 그것이 자신과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세 번째 크리스마스 즈음, 두 사람은 헤어진 상태였다. 여자가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는 동안, 남자는 야근과 과로 때문에 여자에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

(......)

그 리고 비로소 오늘, 이들은 둘만의 온전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기쁘고 여유롭게 성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다. 이제 남자에겐 번듯한 직장이 있고 여자에게도 깔끔한 구두와 소박한 정장이 있다. 두 사라은 조금쯤 세련돼졌고, 데이트 비용보다 주차 공간을, 옷보다는 주택 청약을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옷이나 돈이 아닌 '방'일 것이다.


-김애란, <성탄특선> p91~95 中-


' 젊음'으로 대변되는 20대는 젊어서 푸르고 싱그러운 만큼, 또한 젊기에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사회 환경에 따라 각 세대가 보낸 청춘의 색채는 다르지만, 세대마다 개인이 어찌할 없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6.25 전쟁 세대가 전쟁의 아픔과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4.19세대가 독재와 고강도의 노동을 견뎌야 했으며, 소위 '386'세대가 시위와 데모로 점철된 청춘을 보낼 수밖에 없었듯이 말이다. 어느 세대가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애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이별'과 '좌절'의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내 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잡힌 취업준비생과 아르바이트생 혹은 비정규직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졸자(혹은 휴학생)들의 깊은 좌절감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마도 이제 막 사십 고비에 접어든 '초짜' 중년이나 이제 막 젊음의 딱지를 떼어낸 삼십대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취업의 좌절감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리라. 무엇보다도 학원 강사를 '먹물들의 막장'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보면 안 될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 깨끗이 잊고 싶었던 청춘의 씁쓸함이 입안 가득 단물처럼 고였다.


김애란의 단편들은 어딘지 모르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상처를 어루만지게 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화려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청춘의 어느 그늘진 한켠을......



열차가 노량진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성좌 중 어느 한 점.

유난히 흔들리며 약하게 빛났던 작은 별에 깃든 이야기.

노량진.

좌절된 꿈처럼 그곳을 감싸 안고 있던 성운과 고운 색의 먼지들.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p125 中-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이십여년전 나도 노량진에 있었더랬다.

청운의 꿈이라기보다는 취업의 압박감과 거듭된 좌절감에 시달리면서 한동안 노량진의 새벽을 밟고 다녔더랬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주인공(정아영)처럼 잠깐 머물다 갈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이다.


노 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재수생 언니도, 민식이도, 총무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는'곳에서의 생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p137~138 中-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우주의 별자리를 떠올리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의 일부분은 아무리 작더라도 모두 '질량보존의 법칙'의 적용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 역시 인간의 실존적 범주를 머나먼 저 우주의 끝까지 길게 연장시키는 재주를 갖고 있다.

'눈 먼 물고기처럼 정해진 노선대로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 앉아,  정해진 궤도를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의 행성 속 '인간'임을 인식하고, 이를 타인에게 인식시키다니... 그 발상의 전환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한점에서 또 다른 한점으로 이동하듯,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이 땅에서 사라진 생명들은 '블랙박스'를 이용하여 지구에서 우주의 어느 별로 혹은 그 반대로 우주의 어느 별에서 다시 지구로 이동해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 잃은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어린 주인공의 얼굴에 작가의 얼굴이 그리고 다시 나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짜피 이 땅의 모든 어미는 새끼보다 먼저 떠날 운명을 타고 나지 않았던가. 하여, 새끼들은 모두 대부분 엄마를 잃는다. 어린 새끼에게 엄마와의 이별은 참을 수없는 상처이자 슬픔일 터. 영원한 이별이 아닌, 그저 잠시 잠깐의 헤어짐이라고 해두자.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쪽 별에서 저쪽 별로 이동해간 것 뿐이라고...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오이도와 송탄이 매우 가까운 줄 알고 택시를 타면 금방이라고 말하던 친구가 떠오른다. 자가용만 타고 다녀 지하철 노선도 상에서 인접해 있으면 실제 거리도 그렇게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다만, 4호선 오이도역과 1호선 송탄역 사이의 거리처럼 우리 둘 사이에는 친구지만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단>에 실려 있는 여덟 작품 중, 나는 <칼자국>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비록 '안목'은 없지만 문학적으로도 가장 완성도 높은 것 같고, 全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작품 <칼자국> 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화장을 할 줄도 울 줄도 모르지만 순종적이지도 않은' 모성애의 전형이라 하겠다.

'난감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은 죄로 20년 넘게 칼국수집 '만나당'을 운영한 엄마는 평생 '손안에 반지의 반짝임 대신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아 왔다.' 대략 난감한 그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무심한 듯 넘어가는 엄마....


'갚을 수는 없지만 잊어서는 결코 안되는 빚'이 있다면, 자식이 부모 특히 엄마에게 지고 있는 빚이리라. 김애란의 단편 <칼자국>은 바로 그 '빚'의 존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별 다섯 '명품'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 복도 많아. 우리 때에 비하면 세상 살기 얼마나 좋아졌어?!'라는 말을 달고 사는 기성세대가 아직도 있다면, 그들에게 김애란의 소설집을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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