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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영화 <명량>이 10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1000만!
거칠게 계산해도 우리나라 인구가 4000만이 넘으니 노약자를 제외한 성인 중 1/2은 봤다는 얘기다.
'나도, 볼까?' 하다가 말았다.
극장에 사람들이 넘실댈 것 같다.
나란 인간, 인파에 심히 취약하단 말이지....-.-;
지난 봄에도 뒤늦게 <겨울왕국>을 보려고 큰 맘먹고 갔다가 평일 한낮 극장안에 줄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발길을 돌린 전력이 있었지...
대신,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21세기 새천년과 함께 세상에 나온 책,
나오자마자 화제를 몰고 온 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책',
바로 <칼의 노래>다.
<칼의 노래>는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마흔이 넘어 작가가 되고 쉰이 넘어 쓴 단 한편의 장편으로 대표작가 반열에 오른 김훈의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이십대 언저리에 읽은 <난중일기>에 깊히 매료된 나머지 이순신을 수십년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온듯 싶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책을 읽고 있노라면, 충무공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의 정도가 매우 깊고 넓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작가는 스스로 충무공이 되어 그의 삶과 죽음, 슬픔과 두려움, 희망과 좌절을 그려내고 있다.
<칼의 노래>는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순신이 풀려나 '백의종군'하는 시점부터 전개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적이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던들 순신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임금의 뿌리깊은 질투와 의심과 좌절을 가라앉힐 수 있었을까...?
갈갈이 찢긴 조국강산을 되살리고, 흩뿌려진 백성의 피와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이순신은 희생양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수졸들이 여자들의 시체를 들어서 밭둑 위로 옮겼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피난민들의 시체 20여구가 밭둑에 쌓여 있었다. 수졸들은 묵은 밭 가운데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았다. 역질이 돌고 있었으므로 구덩이는 깊었다. 수졸들이 시체를 하나씩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수졸들은 시체의 팔다리를 마주 잡고 흔들다가 공중으로 휙 날렸다. 시체는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쌓였다. (......)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훈, <칼의 노래> p102~104 中-
순신은 전쟁의 실체를 보았다.
적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사는 것도 아니요, 내가 죽는다고 해서 적이 사는 것도 아닌 것임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정치인들)은 모두 살고, 전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백성들만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전쟁인 것임을...
충무공은 베어낸 적들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개별적인 죽음을 마주하며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자괴감과 슬픔에 빠진다.
한편, 전쟁의 실체와 개별적 죽음의 비애를 외면하는 조정 대신들은 사악했고, 그들에 둘러싸인 임금은 무능했다.
왜군을 막아줄 요량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의 군대는 싸움은 하지 않은 채, 강화도와 중부지방 요지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일개 장수가 한나라의 임금을 모욕해도 죄를 물을 수 없고, 적군과 내통해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조선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는 '노예'와 다름 없어 보였다.
적들은 조선인 포로들 중 극소수는 데리고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거나, 해안 진지에 배치했다. 적들은 조선인 포로들 중 병약자 3백 명을 죽여서 시체를 바다에 버렸다. 조선인 포로를 죽일 때, 적들은 포로를 바닷가 창고에 가두어놓고 하나씩 끌어내서 목 베었고, 시체를 배에 싣고 외항으로 나갔다. 광양만 바다에는 적병들의 시체와 조선인 포로들의 시체가 섞여서 떠다녔다. 시체들은 모두가 머리가 잘려 있었다. 적들은 베어낸 머리통을 소금 창고에 보관하고 창고 주변에 경비 병력을 배치했다. 이 머리통들의 용도는 적들이 바다에서 퇴로를 열 때 진린에게 바칠 뇌물일 것이라고 정탐들은 판단했다.
-김훈, <칼의 노래>p297~298 中-
제 나라 백성도 아니요 제 나라 영토도 아닌 조선을 위해 명나라 군인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길 바란다는 건, 처음부터 순진한 발상이었다. 싸움보다는 명분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있고 심지어는 퇴각하는 적군과 내통하는 명나라 수군 대장 진린 앞에서 충무공은 한없는 울분을 삭혀야만 했으리라.
비록 그 당시로서는 결코 젊지 않은 나이인 50줄에 들어섰지만 순신 역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살아서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운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할 것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충무공의 담대하고도 위대함은 바로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를 피하지 않았던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평범했지만 또한 평범치 않고...
나약했지만 또한 나약하지 않으며...
살아있되 살아있는 것이 아니요,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닌 인물이다.
이와 같은 충무공의 깊은 내면을 김훈은 일찌감치 엿보았다. 물비늘에 흔들리는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그의 문장들은 바로 복잡다단한 충무공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내내 휘감고 돈다.
이름있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역사란, 이름없는 민중들의 삶이다.
이 점을 잘 알았던 충무공은 <난중일기>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만약 <난중일기>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하여 기억했을까...?
새까맣게 잊혀졌거나 아니면 역적 죄인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지 않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난중일기>의 중요성에 다시 한번 심장이 울려온다.
순신은 스스로를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고, 시간에 의해 잊혀지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다.
그는 일기로써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더 나아가 역사에 기억됨으로써 마침내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일찍이 수전 손택은 '일기란, 단순히 신변잡기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창조하고 규정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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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일기를 쓰고 있는 나, 부끄러워진다.
일상의 편린들과 감정의 조각들만 격하게 토해내고 있는 내 일기들은 과연 무얼 위한, 누굴 위한 기록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