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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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녀는 시인이다.

말하자면 이런 시를 쓰는,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

그녀의 시 <서시>중 일부다.

'서시(序詩)'란 글자 그대로 책의 서문(序文) 처럼 시(詩)들의 앞에 붙여진 시다. 그래서 시인의 <서시>는 종종 그의 작품 세계 전체와 인생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읽힌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그녀는, 이 작품에 <운명> 대신 <서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녀에게 운명은 무엇일까?

글쓰기일까?

그런데, 말이 필요없다고 한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에 집착했고... 무엇에 매달렸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고 있다.


 

그녀의 작품 읽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반.드.시.


..............................................

 

 


한 남자가 있다.

열일곱 살때 독일로 이민을 갔고, 17년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십대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마흔정도 되면 그의 세계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길 것이다.  

잘 보지 못하는 그는, 희랍어를 가르친다.


 

한 여자가 있다.

열일곱 살때 처음으로 말을 잃었는데, 친엄마가 그녀의 출생을 원치 않았다는 걸 제외하곤 특별한 발병 원인은 모른다. 

그녀는 이혼 소송 과정에서 일곱살짜리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잃은 후, 다시 말을 잃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녀가, 희랍어를 배운다.


 

문법 규칙이 너무 까다로워서 오히려 놀랍도록 정교하고 간명했던 언어...

플라톤과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구사했던 언어...

문장으로만 존재할 뿐, 더이상 음성으로 소통할 수 없는 언어...

그리스 문명과 함께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린 언어...


빛을 잃어가는 남자의 고독과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이 이 사멸한 언어를 통해 만난다.



 

  

 

그녀는 그의 옆얼굴을 본다. 흔들리는 그의 눈길이 가 닿아 있는 아스팔트의 어둠을 본다.

안경을 끼지 않은 그의 얼굴은 낯설어 보인다. 짐작보다 큰 눈, 공포와 당혹감을 숨기려 애쓰는

표정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다치지 않은 그의 왼손을 끌어다 잡는다.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바닥에 또박또박 쓴다. (137쪽)

 

먼저

병원으로

가요.

 

 

 

 
때론, 말이 필요없는 순간들이 있다.

아니, 말을 하면 할수록 하고자하는 그 '말'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분명, 말이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써 표현되어질 수 없을 때, 외면하거나 포기한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기껏 취할 수 있는 건 철저한 타자로서의 감상, 즉 연민뿐이다.



 

'많이 아프고 힘들겠구나...'

'그렇지만 나도 어떻게 해줄 순 없어.' 

'이건 내 잘못도 내 책임도 아니란다...'

'너를 그런 운명속으로 던져넣은 신에게 물어보렴.'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43쪽)

 



남자가 독일에서 사랑했던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자, 여자는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43쪽)'


여자의 예언은 맞았다.

그는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었다. 

다만 여자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는 선하고 유능한 인간이 되었다.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인간은 무능한 존재이다.

인간이 선하지 않고 다만 유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인간은 악한 존재이다.

인간이 선하지도 유능하지도 않다면 인간을 만든 신의 실수다.

그러므로 선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은 인간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또한, 그녀는 작가다.

말하자면 이런 작품을 쓴,


부당하게 잊혀지는 명작은 있어도 과분하게 기억되는 명작은 없다고 했던가.


감각적으로 언어를 다루는 시인들은 많다.

철학적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그려내는 작가들 역시 적지 않다. 

그러나 감각적이되 감상적이지 않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되 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내재화할 줄 아는 감수성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중에서도 특별히 선하면서도 유능해서 성립 불가능한 신의 오류처럼 비춰진다. 


그녀는 이런 작가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아프다.

나도 며칠 앓았다.


그녀의 또다른 시 <괜찮아>를 읽으면, 이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을까...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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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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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나와 물 한잔을 마셨다.

'켁-켁--'

발작적으로 기침이 쏟아졌다.

잠시후, 고통이 잠잠해지자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짧은 순간, 나는 감히 열일곱 어린 나이에 바다로 몸을 던진 아이의 고통을 떠올렸던가.    


'아니, 아닐 것이다. 차마 그럴 순 없다.'


산자는 죽은자의 고통을 영원히 알 수 없다.

살아남은 자에게 허락된 거라곤 그저 영원히 죽은자를 기리는 일 뿐이다. 


뜨고지는 별처럼,

피고지는 꽃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그렇게, 영원히...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228쪽 


'내 엄마는 누구일까?' 


미국으로 입양된 카멜라는 엄마의 흔적을 찾고자 한국으로 건너온다. 

선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점점히 흩어진 과거들을 찾아나서는 일은 마치 탐정의 그것과 흡사했다.  



 

한국의 남쪽 해안 지방에서만 자생한다는 동백꽃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카멜라...

그녀는 사과같기도 하고 홍등같기도 한, 그 붉은 꽃들이 교정 가득 떨어져 있는 어느 여학교에서 엄마가 남긴 단 한장의 사진 속 배경을 마주한다.



 

나는 교장실에서 나와 복도 끝의 계단을 향해 걸었다. 두 눈에서 연민의 눈물이 쏟아졌다. 잘못 기재된 서류만 믿고, 잘못된 곳에 가서 엄마를 찾으려고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오빠라는 남자의 주장 역시 잘못 배달된 편지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나는 거기, 진남, 오랫동안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믿었던 항구 도시에서는 절대로 태어날 수가 없는, 불미스러운 존재라 어딘가 다른 곳, 그러니까 서울이나 부산처럼 악과 불의가 판치는 대도시, 아니면 한국의 다른 어느 곳, 거기가 어디든, 아무튼 어딘가 다른 곳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어쩌면 나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계단을 다 내려가 본관 건물 앞까지 가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뒤, 그 붉은 벽돌을 향해 돌아서다가, 바닥에 떨어진 그 꽃봉오리들을 보기 전까지는, 그제야 나는 졸업 앨범의 표지에 그려진 꽃이 사진속 발치에 떨어진 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무덤덤한 깨달음 앞에 어떤 나무가 붉은 것들을 잔뜩 매달고 서 있었다. 사과라고 해도, 어쩌면 홍등이라고도 부를 만한, 붉은 것들. 꽃들. 동백들. -53~54쪽

 

카멜라의 친엄마(지은)는 미혼모였고 어린 딸을 가슴에 꼭 안고 동백나무 아래서 찍은 사진 한장을 남긴 채,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카멜라)를 가졌고 낳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각자 자신의 입장에 따라 지은이의 진심을 이해(오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자 한마디씩 했고...

그 말의 조각들은 소문이 되었으며..

소문은 바람을 타고 한없이 떠돌았다...


 

무심히 내뱉은 한마디가 혹은 악의를 품고 꾸며낸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혹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수도 있다는 자각은 언제나 너무 뒤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는 반복된다.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285쪽


'이제, 카멜라는 어떻게 해야하나?'

찾으려는 엄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한국을 떠났던 카멜라를 다시 부른 건, 다름아닌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였다. 아니, 엄마와 카멜라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넓고 깊은, 그 '바다'였다.




마찬가지로 열일곱 살에 미혼모가 된 뒤,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를 생각해야 하는 건 나였다. 나라는 존재, 내 인생.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

그 소녀가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나일 것이라는. 바다 안에서, 죽음 속에서. 그렇다면 그 소녀를 가장 간절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 역시 나여야만 한다는. 거기에는 어떤 변명도 불가능했다. 나는 무조건 그 소녀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건 의무와도 같았다. 달마다 꼬박꼬박 집세를 내듯이, 제한 속도를 반드시 준수하듯이 나는 그 소녀를 '꼬박꼬박', '반드시' 생각해야만 했다. 마치 문집에 실린 시가 그 소녀의 한때를 기억하고 있듯이. 그 시의 제목은「밤과 낮」이었다.  -117~119쪽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이들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의 위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길뿐입니다. (...)

중단된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끝까지 읽히기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그 프로젝트야말로 바로 그런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 엄마를, 그녀의 고통을, 절망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다음 행선지는 한국의 진남입니다. -148쪽



이제, 카멜라는 친모와 자기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심연을 건너간다.


....................



 

작년 이맘 때였으리라. 

시내 대형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이 작품을 처음 접한 나는 수첩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김연수 신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입양아의 부모찾기(개인의 정체성 탐구?)'



 

 



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은 후, 나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나가 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 사레에 걸려 '켁켁'거렸다. 

나의 오만함과 서투름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치다가 그만........

(정말 쌤통이다)



이 작품은 '입양아의 부모찾기'나 '개인의 정체성 탐구'를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며, 부조리한 사회현상이나 현대인의 이기적 행태를 고발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 범인(혹은 '카멜라의 친아버지')을 찾아가는 추리탐정소설은 더더욱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실존과 절대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깊디 깊은 그 '심연'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고, 상대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을 걸때 내 소설이 시작된다.'라는 저자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김연수 그는,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닌, 너와 나 '사이'를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다.

다시 말하면, 무게 잡지 않고도 실존 철학을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다. 



 

이 작품을 다 읽은 후, 이 짧은 시를 떠올린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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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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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은 등단 10년 미만 작가들의 단편만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신인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신춘문예상과도 다르고 장편소설만을 심사대상으로하는 혼불문학상과도 다르며, 작품이 아닌 작가 개인에게 수여되는 여타 문학상들과도 다른,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설익은 듯 옅은 빛깔의 풋과일인줄 알았는데 한입 깨물자마자 과일 특유의 식감과 향긋함으로 입안이 가득차는 제철 과일이랄까...


 

역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던 황정은의 <상류에 맹금류>가 가장 좋았던 반면, 기대했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다시 읽어보고 나서야 작품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품은 조해진의 <빛의 호위>였다. 퇴근길 전철안에서도 이 작품이 자꾸만 떠올랐다. 짧은 작품 속에 전혀 다른(다른 듯 보이는)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결국엔 단 하나의 주제 즉 '사람을 살리는 일'로 귀결되고 만다.


'아, 감동적이다.'


학교를 무단 결석하는 같은 반 여자애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녀가 부모로부터 방임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린 어린 반장...

가끔씩 그녀를 찾아가보곤 하지만 특별히 도와줄 방법을 몰랐던 소년은 자기 집에서 몰래 카메라를 들고 나온다. 왠지 카메라라면 돈이 될 것만 같았고, 그 돈이면 그녀가 먼 곳으로 일 나갔다는 쟤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굶주림을 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잡지사 기자인 '나'는, 위험한 전쟁터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다는 젊은 여성 사진작가를 인터뷰한다.

형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갈때쯤 하늘에선 눈송이가 내리고, 이를 본 여자가 '태엽이 멈추면 멜로디도 끝나고 눈도 그치겠죠.'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녀와의 두번째 만남으로 '나'는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를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1916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알마 마이어는 유대인이면서 여성이라는 차별을 딛고 1938년에 브뤼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입단했다. 하지만 1940년, 벨기에에 유대인 등록령이 내려지면서 그녀는 오케스트라에서 해고됐고 게토에 갇히거나 수용소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그때 그녀의 연인이자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호른을 연주하던 장이 브뤼셀 외곽에 위치한 사촌형의 식료품점 지하창고에 그녀의 은신처를 마련해주었다. (...)

이 주에 한 번씩 장이 물과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지하창고를 찾아오긴 했지만 그 무렵엔 누구나 그렇듯이 장 역시 가난했으므로 그 양은 보름을 버티기엔 늘 부족했다. 바구니는 가볍고 초라했지만 장은 바구니 밑바닥에 자신이 작곡한 악보 한 장씩을 깔아놓는 걸 잊지 않았다. 빛으로 에워싸인 허공의 악기상점을 본 날이면 그녀는 바이올린을 꺼내 호라이 줄에 닿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악보들로 연주를 했다. 조명이 없는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받지 못한 채, 소리가 없는 연주를.


ㅡ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식료품점 지하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 생각하던 내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 -조해진의 <빛의 호위> 58~59쪽 中-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은 유대인인 알마 마이어와 그의 아들 노먼 마이어의 이야기다.

모자(母子)였던 이들은 가자 지구에 갇혀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전해 줄 식료품을 싣고 국경을 넘다가 (이스라엘측의) 폭격으로 아들은 죽고 엄마만 살아남는다.


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알마 마이어는 미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 도착해서 분신과도 같은 바이올린을 팔아 출산을 하고... 아이가 다섯살 되었을 무렵, 아이 아빠인 장을 찾아나서지만 그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사실을 알고는 돌아선다. 알마는 자기 때문에 장은 이미 너무 많은 위험을 무릅썼으므로 그의 삶에 또다시 혼란을 끼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아들 노먼 역시 커서 의사가 된 이후 줄곧 자신의 아버지인 장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채... 


단 한번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 무대에서 연주된 적이 없고, 마흔이 넘어서는 소도시 오케스트라에서도 쫓겨난 장...

그는 음악가로는 실패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바로 사람을 살려내는 일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확인한 후, 노먼은 수십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여성의 목숨을 살려냈듯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걸고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한다...




 

편지 안에서 그녀가 내게 묻는다. 반장,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은이.


그 편지가 저장된 날은 그녀와 내가 을지로에서 만나 맥주를 마신 날이었다. 내게 고맙다고 말한 뒤 택시를 타고 떠난 그녀는 연말의 서울 거리를 가로지르는 택시 안에서 언젠가 살아 있는 사람이 읽을 수도 있는 이번에는 꽤 쓸모 있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63~64쪽


너무 아름다워서 믿기 어렵고, 그래서 너무 소설같은, 이런 작품이 난 참 좋다.

단편소설은 분량은 짧아도 내용이 짧은 건 결코 아니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이 작품만 하더라도 몇십 장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시공간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세상의 관심과 박수갈채 따위 신경쓰지 않고 의연히 작가의 길만을 가겠다'는 그녀의 포부가 마치 관심받지 못하는 작고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위대'한 삶을 계속 그려나가겠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가끔씩 특히 말도 안되는 기가 막히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왜 아직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 걸까?'


유대인 여성을 무려 2년 동안이나 숨겨주고 해외 이주를 도왔던 장...

자신의 조국이 내건 기치와는 달리 사람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노먼 마이어와 알마 마이어...

친하지도 않은 같은반 여자애를 위해 어린 마음에 감히 하기 어려웠을 집안의 카메라를 훔친 화자인 '나'....

그리고,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고 읽고 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 밖에도 최은미의 <창 너머 겨울>은 묘한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었고,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과 손보미의 <산책>을 읽으면서는 레이먼드 카버와 제임스 셜터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한편, 수상작 일곱편 중 나의 감성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윤이형의 <쿤의 여행>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나에겐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SF인지 환타지인지 모호한 작품의 색깔도 그렇고, 화자로부터 쉼없이 소환되는 '쿤'의 존재는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 거라면, 나는 작가가 쳐놓은 그 함정(?)에 제대로 빠져든 셈이다.



 

끝으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그녀의 작품집을 읽어볼 예정이므로 그때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 같기에 여기선 아쉽지만 생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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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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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는 무라카미 하루키 못지 않게 국내에선 상당히 유명한 일본 작가인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은 작가 중 한명이다.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 라는 작품도 읽었건만 단 한 줄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으니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읽기 위해 소환(?)한 아홉 권의 책들 중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이 두 권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엔 단편소설 모음집 아니면 경장소설인 줄로만 알았더랬다. 그런데 읽다보니 수필이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이십여년 전인 90년대 중후반에 쓰여진...


 

수필은 '타이밍'에 매우 민감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신변잡기를 나열한 오래된 수필일수록 문학사적 연구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게 커다란 공감이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는 매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그런 사건과 감상들로부터 너무 많이 흘러온 것 뿐이다.  개인의 감상이나 일상이 아닌, 깊은 사색과 철학적 통찰력이 빛나는 수필만이 시간과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다.


 

'읽을까? 말까?' 살짝 갈등했지만, 에쿠니 가오리에게 입문(?)할 수 있는 우연한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2013년) 출판되었지만 일본에서는 1997년 출판된 수필집으로 그녀가 8년동안 써왔던 수필 모음집이라고 하니, 20대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에쿠니 가오리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녀의 팬이라면 지금은 50대인  작가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을 채우기엔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다만, 나처럼 그녀의 작품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아니, 읽었을 테지만 단 한 글자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안 읽은 셈이나 마찬가지- 사람이라면 그녀의 독서일기에 시선이 꽂힐지도 모른다. 그녀의 독서일기 덕분에 나의 독서목록이 단 하루만에 수십줄로 늘어났다. 


젊은 작가의 마음을 휘어잡은 작품에 대한 서평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독서일기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물론, 나도 잘 안다. 타인의 독후감에 낚여 읽게 된 작품들이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감상을 전해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번역 출판되지 않은 작품이라도 있으면 아쉬움부터 솟구쳤다. 그만큼 그녀의 독후감은 세련되고 멋스럽다. 어쩜 그렇게 글들이 모두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진 신혼부부의 밥상 같은지...


그렇다고 그냥 앙증맞기만 한 건 절대 아니다.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쓴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프로답다. 묵직한 중량감이랄까... 적잖은 독서량과 글쓰기 연습을 거친 문장들은 어딘지 달라도 다른 법이고, 아마 이와 같은 점들이 2,30대 여성 독자층의 감성을 건드리지 않았나 싶다. 가령, 메리 웨슬리의 <마지막 날의 시작>이나 존 치버의 단편집에 대한 그녀의 글 속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글 쓰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몹시 궁금한데, 나는 압도적으로 재미있고 질도 좋은 데다 완성도도 높고, 게다가 신선한 소설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수긍하고 나면 소설 쓸 용기를 잃고 만다. 태생이 낙천적인 성격이라서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간혹(가나이 미에코 씨나 비어트릭스 포터를 읽었을 때) 그런 기분이 덮치곤 한다. 이번에는 팀 오브라이언이었다. 소설이란 이렇게 입체적으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현기증 같은 마음속 목소리. -『울지 않는 아이』p106 中-



같은 가족이나 부부를 그려도, 예를 들어 카버나 업다이크가 가족과 부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치버의 초점은 한 인간의 내면적 고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도망갈 곳이 없다. 읽는 이는 그 엄격함에 질리고 우울해지며, 때로는 큰 타격을 받는다. (...) 게다가 이 사람의 굉장한 점은 이야기를 파탄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니, 은둔 생활을 하며 바깥 세상을 조소적으로 바라봐야 할 텐데, 이 사람은 완강하게 버틴다. 도망치지 않는다. 세상에 구원 따윈 없다고 쓰지만, 그래도 절망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가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쓰는 소설은 제 아무리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라도 하나하나가 이미 구원이다.


 - 『울지 않는 아이』p111~113 中 발췌-

  



온 몸으로 감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뽑아낼 수 없는 문장들이다.

이와 같은 글들을 읽고 어떻게 메리 웨슬리와 존 치버의 작품들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 그녀 덕분에 나는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읽게 될 것같다.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책이 있다. 그림이나 문장은 물론, 여백까지도 아름다운  책.

스콧 피츠제럴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는 연인을 보고, "하루에 열 페이지 이상은 읽지 않는 게 좋을 거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서,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읽은 부분을 잘 소화시켜야 해"하고.


앙리 드 레니에의 <베니치아 풍물지> 역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전편이 시에 아주 가까운 산문으로, 언어가 집어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현기증마저 인다. 언어가 지니는 일종의 마약 같은 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문장은 한꺼번에 많이 읽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관능적이기 때문에, 조금씩 읽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언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울지 않는 아이』p117 中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일찍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프랑수와즈 사강을 매료시키더니, 아쿠니 가오리도 예외없이 당했다!


특히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슬픔이여 안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를 쓴, 프랑수와즈 사강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작품 속 여주인공의 이름인 '사강'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지 않았던가.


 

한편, 에쿠니 가오리는 사랑과 연애를 그려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작가로 프랑수와즈 사강을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신간을 읽고서 실망하는 일이 없는 흔치 않은 작가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있다. (...) 탁월한 문학이 지니는 힘, 그 깊이와 강함과 아름다움을 이 작가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가도 없다. (...) 연애를 바짝 졸이고 졸인 소설, 브랜디를 듬뿍 머금은 케이크처럼 속속들이 연애로 절여진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몹시 신랄하고, 인간의 슬픔에 거침없이 도달하는 예리함이 그야말로 사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소설(<사랑은 속박>)을 읽으면서 점점 더 로랑스에게 매료되었지, 뱅상은 한 번도 동정하지 않았다. 로랑스는, 뱅상의 말을 빌리면 이런 여자다.

 

 

 머리는 좋지만 기지는 없다. 돈은 헤프게 쓰지만 너그러운 베풂은 없다. 아름답지만 매력은 없다. 헌신적이지만 친절함은 없다. 기민하지만 생기발랄하지 않다. 타인을 부러워하지만 스스로 바라는 것은 없다. 그녀는 사람을 헐뜯지만 증오하지는 않고, 자존심은 세지만 자긍심은 없으며, 친근하게 굴지만 따뜻함은 없다.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상처 입는 일은 없다. 그녀는 어린애 같지만 순수함은 없고, 투덜거리기는 해도 포기하지 않으며, 값비싼 옷을 입고 있어도 우아하지 않고, 신경질적이지만 분노는 없다. 그녀는 솔직하지만 성실하지 않고, 겁은 많지만 두려움을 모른다. 그러니까 즉 정열은 있어도 사랑은 없는 것이다. 


 

사강의 문장은 숨 막힐 정도로 긴밀하고 감미롭고 산뜻하다. (...) 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렇듯 아름답고 상큼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에쿠니 가오리,『울지 않는 아이』p108~110 中 -

 

 

아, 프랑수와즈 사강....

이름만 들어도 애잔해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작품을 떠나 그냥 인간적으로 너무 좋다. 나와는 너무 다른 인종이라서...

원래부터 비범함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일상은 어쩔 수없이 '비범'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 전형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사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설령 그녀의 이름과 작품은 낯설지언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은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작가 중 한명도 그녀의 이 말을 책 제목으로 빌려왔더랬지...

 

 


끝으로,

나와 너무 취향이 같아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행위다.

나도 찻집을 좋아한다. 대개는 혼자서 간다. 누구랑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신이 날 때도 있다-하지만 찻집에 가는 것 자체를 즐기기에는 혼자가 훨씬 좋다. (...) 문제는 좋아하는 찻집이다. 좋아하는 데다 늘 혼자가는 찻집에, 같이 가도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너무 가까운 사람은 또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나그네가 되기 위해 가는 장소다. 일상을 끌여들일 수는 없다. 그러니 같이 가는 사람도 소설 속 사람같은 이가 좋다. 마음 속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 밖에서는 먼 사람.

 -에쿠니 가오리,『울지 않는 아이』p195~196-

 

 

좋아하지만 또한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는 사람...

마음 속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 밖에서는 아주 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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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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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건 작년 봄의 일이었고, 나에게 남겨진 그의 첫인상은 '불친절'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불친절한 작가도 다 있구나....'싶었다.

이야기가 풍부한 것도 결말이 깔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품마다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도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을 우유나 커피도 없이 씹는 맛이랄까...

달지도 쓰지도 않은 그런 심심한 맛이 별 것 아닌 우리네 일상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올봄,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방송에서 그를 두번째로 만났다.


『대성당』에 실려 있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이었고, 예전에 읽었던 터라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울컥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젊은 부부에게 자신이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위로하는 초로의 빵집주인 모습에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나 살다보면 '실수'라는 걸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실수에 악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누군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점이다. 상처입은 이들 앞에서 나는 그저 오해했거나 조금 부주의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일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이를 살짝 친 운전자 역시 악의는 조금도 없었다. 백미러로 바로 일어서는 아이를 보고는 그저 '별일 아니려니...'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의사 역시 검사 결과 이상소견이 없었기에 그저 가벼운 뇌진탕으로 며칠 지나면 아이가 의식을 회복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빵집주인 역시 어린 아들의 생일케익을 주문해놓고는 찾아가지 않는 젊은 엄마가 조금 괘씸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고 30대 젊은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가 떠올랐다.
일년 전, 나에게 '불친절'이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사라졌던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그제서야 그날이 세월호 참사 1주년이라는 거... 그 누구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거... 그래서 뜻밖의 사고로 자식을 잃을 수 밖에 없었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서 정규방송 대신 특별방송의 형식으로 카버의 이 작품 전편을 낭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알게 된 사실들도 있다.
카버의 작품들은 한번 읽으면 안 된다는 거... 두번 세번 네번... 거듭 거듭 읽어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

​1938년생인 레이먼드 카버는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좋은 교육이나 문화적 혜택은 커녕,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유년을 보낸다.
그리고 19살에 예상치 못한 결혼을 하고...  
20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생계를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한다. 안톤 체홉을 좋아했으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에겐 작품을 쓸 장소도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는 좁고 시끄러운 집을 떠나 자신의 픽업트럭에 앉아 운전대를 책상 삼아 글을 썼다. 
원고료를 빨리 받기위해 짧은 단편만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이 짧은 작품마저도 편집자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편집되고 가위질당하기 일수였다. 

원문의 반 이상이 잘려나간 상태로 출간된 자신의 작품들을 보면서 카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흔 아홉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매달린 일이 다름 아닌 자신의 작품들을 원상복구시키는 일이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카버의 작품들이 원작 그대로 복구되어 재출간되었다.

그 유명한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제목인「Beginners(풋내기들)」를 표제로 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카버와는 분명 다르지만 훨씬 더 카버다운 카버를 만날 수 있다.  

카버의 3대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영어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또 들었지만,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다.




'헉....'

사랑에 대해서 이처럼 신랄하고도 적확하게 표현하다니...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이 뭔지 얼마나 알겠어?" 허브가 말했다. "뭐 그건 내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이런 얘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내가 보기에 우린 사랑에 순전히 풋내기들이야.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사랑하지, 그건 의심하지 않아. 난 테리를 사랑하고 테리도 날 사랑해, 또 두 사람도 서로 사랑하고.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이 어떤 건지는 알 거야. 성적인 사랑, 파트너가 되는 상대를 향한 끌림 같은 거, 그리고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사랑, 상대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 상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일상적인 사랑을 구성하는 사소한 것들도 있지. 말하자면 육체적인 사랑이랄까, 그런 거랑 음, 정서적인 사랑이랄까, 날마다 서로 아껴주는 사랑 말이지. 그런데 가끔은 내가 분명히 전처도 사랑했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사랑했어, 그건 확실해. (...)


 "여하간 난 한때 전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여겼고 아이도 낳았어. 근데 이젠 꼴도 보기 싫거든.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랑은 어떻게 된 걸까? 그냥 지워지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그 사랑이 어떻게 된 건지 난 그게 궁금해. 누가 얘기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


 "우리 중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ㅡ이런 얘기 해서 미안ㅡ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에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상대는, 남은 배우자는 얼마 동안은 애도하겠지만 결국 다시 사랑하게 되고 조만간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고, 그럼 이 사랑이라는 것도ㅡ맙소사, 이걸 어떻게 이해하겠어?ㅡ 그것도 다 그저 추억으로 남는다는 거야. 추억조차 안 될지도 몰라. 어쩌면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말이 틀려? 내가 아주 헛소리를 하는 건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내가 틀렸으면 좀 알려줘. 나도 알고 싶어, 난 도저히 모르겠어,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풋내기들」 中-


마치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간 듯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두군거리는 내 심장의 움직임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듯, 대형서점의 외서 코너로 향했고...

그 다음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대성당​」속의 집주인 남자처럼 장님의 손을 맞잡고 연필로 대성당을 그려나가듯,  그렇게 영어 원문을 따라갈 수 있었고...

(...) and it ought to make us feel ashamed when we talk like we know what we're talking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카버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해. '



카버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바로 이거다.


부.끄.러.움.



카버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이 불친절하지만 그 불친절함을 견뎌낸다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카버를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하루키가 들었던 바로 그 소리...

 




"진이 다 떨어졌어." 멜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테리가 물었다.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모두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방이 어두워졌는데도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내고 있는, 그 인간적인 소음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by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정영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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