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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가 걸어온다.
큼지막한 캐리어를 갖고 있어서 언뜻 여행객처럼 보이지만 그는 노숙자다. 이제 막 중앙역으로  굴러 떨어진...
술판과 악취와 욕설이 난무한다. 그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다.  한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캐리어에 넣어둔 돈은 그대로다. 적지만 그거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안도감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모두 없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이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이나 자존감, 그런 것들이 정말 있다면 그건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리고 마는 거다.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는 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오는 최악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29쪽

 

여자는 늙고 아프다.
남자와 여자는 밤을 기다린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나란히 눕는다. 추억할 과거도 기약할 미래도 없는 이들에겐 오직 현재 뿐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란 불청객이 불쑥 끼어들테니까...

종일 별다른 것을 먹지 않아도 여자의 배는 늘 불룩하다. 임신한 것처럼 솟아난 그 배가 거슬리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많다. 자꾸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곧 스스로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86쪽

 

 

남자는 아픈 여자를 돌보고 아픈 여자는 남자 주위를 맴돈다.
이게 과연 사랑일까?   
만약 사랑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너와 여자의 관계는 이곳에 있을 때만 유효한 거다. 팀장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벗어나는 즉시 너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다. 그렇게 단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속하지 않은 그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내겐 이 여자가 전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35쪽


작품 해설에서 지적했듯 이 작품을 읽는 독법은 여러가지다. 어떤 작품인들 단 하나의 독법만 있을까마는...
암튼, 평론가는 '희생당한 인간(호모 사케르)'과 '사랑하는 인간(호모 에로스)' 그리고 '희망 혹은 절망하는 인간' 이렇게  세가지 접근법을 제시한다. 


일단 작품의 주인공들은 노숙자다. 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거리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산업화 사회에서 아니 인류 사회에서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자는 늘 존재해 왔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노숙자를 지원하는 센터나 임시 쉼터 등등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노숙'만큼은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노숙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희생당한 인간에 대한 연민만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아선 안된다. 두번째는 육체적 욕망으로써 표출되는 사랑의 실체다. 남자와 여자는 절망할수록 생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에로스에 몰입한다.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내 육체가 혐오스럽다. 사는 게 이토록 힘겨운데 쉬지 않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허기를 느끼고 다른 누군가의 체온을 바란다는 게 징그러울 정도다. 인간다움과는 먼 이런 방식으로 내 몸이 바라는 걸 해결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몸을 섞고 신음을 내뱉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가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285쪽

 

 

 

짝짓기 후 숨을 거두는 자연계의 많은 생명체들처럼 남자와 여자는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임을 웅변한다. 작가는 사랑을 불쾌하고 역겹고 심지어 자기파괴적인 지경으로까지 추락시킨다. 더이상 물러설래야 물러설 곳도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도 없는 곳으로 사람을 몰아부친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제 끝이구나' 생각한 순간, 불연듯 앞부분에서 스쳐가듯 지나쳤던 한 문장이 튀어올라왔다. 

 

 

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 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161쪽

 


나는 이 문장에 전율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선전하지도 자기희생적 사랑의 숭고함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이게 희망의 끝인 것 같지? 아냐, 희망 같은 건 없어. 희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다른 걸 희망하게 돼.'
'이게 절망의 끝인 것 같지? 아냐, 절망 같은 건 없어. 절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희망하게 돼.'
'이게 사랑의 끝인 것 같지? 아냐, 사랑 같은 건 없어. 사랑이라고 생각한 순간 사랑이 아닌 거야.'



마지막 세 번째는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 "그"는 완전한 절망을 바라 광장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다시 희망을 바라게 된다. 미래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미래를 꿈꾸자 현재는 형편없는 요구를 해온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채무증서처럼 시간은, 갑자기 그를 몰아세운다. 희망은, 그보다는 절망을 계획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유혹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온전한 희망 역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 된다. 삶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절망이나 희망의 몫은 없다. - 작품 해설 <캐리어 혹은 탈구된 영혼에 대하여>  중  by 강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가 필요하다.'
나는 이 작품을 모든 실존의 시작이요 끝인 이 단 한마디로 귀결짓고 싶다


멀리 돌아왔다.
한참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첫 번째를 거쳐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독법에 도달해 있었다. 
여러가지 시선으로 읽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면 김혜진의  『중앙역』처럼 여러가지 시선 전부로 읽히는 작품은 어떤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원래는 이 작품이 목표가 아니었다.  
호평 일색인 『딸에 대하여』를 읽기 앞서 예행연습(?) 차원에서 집어든 작품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였기 때문에 일단 '스타일'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목표로 한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 이 작품은 '맛보기용' 혹은 '머리식히기용'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작가 김혜진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멀리 나갈지... 얼마나 빨리 달릴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그저 김애란이나 황정은의 작품을 읽고난 것처럼 호흡이 빨라지고 신열이 나고 얼굴이 달아오를 뿐이다. 솔직히 난지금 '멘붕' 상태다.  '거인'을 만난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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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6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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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작'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한 마디로 가능할 걸 열 마디하고, 한 장이면 될 걸 수십 장씩 남발하며, 한 권이면 충분할 주제를 두세 권씩 시리즈로 묶어내거나, 비슷한 문체와 구성으로 이 작품이 저 작품같고 저 작품이 그 작품같은, 소위 자기 자신을 무한정 표절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작가들이 국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이건 독자의 수준을 탓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출판사의 장삿속을 탓해야 하는 건지...


암튼, 나의 이런 편벽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박완서의 작품들을 애써 골라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완.서.가 누구인가?  

불혹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한 작가, 전쟁과 이산의 과거사 속에서 탄생한 작가, 팔순이 넘도록 작품 활동을 한 작가 등등...

그녀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다. 그만큼 그녀는 그 어떤 한 마디로도 규정될 수 없는 한국 문학의 거목과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굳이 내가 찾아 읽지 않아도 이미 읽은 사람들 많고, 앞으로 읽을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을 작가다. 그런 그녀의 작품집을 불쑥 집어들었다가 화창한 봄날 오후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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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는 작가 생전에 펴낸 단편선집(총7권) 중 여섯 번째로 90년 대에 쓰여지고 발표된 작품 열 편이 실려 있다. 두어 편을 제외하고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주인공이거나 화자로 나온다. 정욕이 제거된 '그레이 로맨스'의 겉멋을 지적하는가 하면(「마른 꽃」),  평생 체면과 허영심에 얽매여 있던 육십 대 여성이 헛되이 애만 쓰며 보낸 하루가 펼쳐지고 (「너무도 쓸쓸한 당신」) , 부모는 열 자식 건사해도 열 자식은 부모 한 명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세태가 그려진다 (「환각의 나비」,「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꽃잎 속의 가시」) .



 

배꼽 아래는 참담했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짜 말린 명주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처져 있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니련만 그 추악함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욕실 안의 김 서린 거울에다 상반신만 비춰보면 내 몸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또한 욕조에 잠겨서나 나와서나 내 몸 중에서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즐기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 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을 했다.  - 『마른 꽃』 36쪽-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 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 기를 쓰듯이 목을 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 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댔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 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마른 꽃』 46쪽-

조금은 과장을 하고 조금은 생략을 해도 좋으련만 그녀의 손끝에서 묻어나오는 노년은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적나라하다. 적나라하다 못해 꽃샘추위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듯 소름이 돋고, 뜨거운 태양 아래 장시간 펼쳐져 있던 생선 좌판 사이를 지나칠 때처럼 콧등에 주름이 잡힌다. 

 

지는 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애잔하다 했던가.

사람도 젊음과 완숙미가 다 빠져나간 자리엔 스산함만 고인다. 영원한 소멸 앞에서 모든 생명체는 처연할 수밖에 없다. 

그냥 이대로 가자니 억울하고... 되돌아 가자니 되돌이킬 수도 없어 속만 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이 무력감이라니... 

지독하다. 산다는 건, 지독한 일이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종일관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 노릇을 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149쪽


 

남편은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위로가 필요 없는 인간처럼 참을 수 없는 인격이 또 있을까. 그의 체제 순응은 강요된 것도 의도적인 것도 아닌 체질적인 거였다. 그의 매력 없음의 본질 같은 거였다. 그와 다시 합친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생각하기가 싫어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표면적인 별거의 이유가 완전히 소멸되는 날이다. - 『너무도 쓸쓸한 당신』 158쪽

 

 

한편, 이처럼 쓸쓸한 풍경만 담겨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나만 알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자화상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아란은 깨끗하고 반득한 건물만 모여 있는 거리를 이방인처럼 달착지근한 향수에 젖어 유유히 거닐다가 그럴듯한 찻집에 들어가 랩을 들으면서 비 오는 날은 일 나가지 않고 샹송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바보같은 엄마, 별난 파출부를 생각했다. 지금도 거금을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인데 거짓말처럼 불안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렀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시는 그렇게 못나빠진 불안증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따개비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 살던 세상에서 어느 만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맛을 여유 있게 즐기고 나서 아란은 집으로 향했다. 너절한 동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여유를 두고 바라보니 영화 세트처럼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돈이라는 윤활유가 넉넉해지면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 『공놀이 하는 여자』 275쪽-


아란은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본처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나 친부가 죽으면서 물려준 집 한 채에 그동안 쌓였던 모멸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심지어 본처 가족들을 용서하고픈 마음마저 생긴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도 존엄성도 없다. 아니, 돈이야말로 자존심이요 존엄성 그 자체다. 그래서 원래부터 갖고 있던 사람보다 없다가 갖게 된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예전엔 모욕인지도 몰랐던 모욕들이 불편인지도 몰랐던 불편들이 부끄러운줄도 몰랐던 부끄러움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아무리 지우고 털어내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그 천박과 옹색과 거칠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학대한다.  왜냐하면 꿈엔들 나타날까 두려운, 잊고 싶은 자화상이니까....



 

집에 가면 우선 헌이한테 전화부터 걸어야지. 헌이하고 잔 게 얼마 만인지. 어서 헌이하고 자고 싶었다. 헌이 자기한테 시키던 온갖 굴욕적이고  야비한 짓거리를 그에게 시켜가며 데리고 놀고 싶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도권이란 이렇게 간단히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을. 그의 비리비리한 팔뚝을 담뱃불로 지질 수도, 그로 하여금 방바닥을 기게 할 수도, 개처럼 헐떡이며 온몸을 핥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란은 혼자서 미친 듯이 킬킬거렸다.

헌하고 급하게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꿈은 더이상 일편단심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다리다가 기어코  개천에서 난 용의 조강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아니라도 개천에서 용 날 꿈에 매달려 사는 너의 여덟 식구만 해도 너에게는 버거운 악몽일 테니 나는 이제 개천바라기에서는 빠지겠노라고. 그렇더라도 헌의 쓸모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용은  아니라도 필요에 따라 기둥서방을 삼을 수도,  싫증나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훗날 헌신짝처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 두려워해야 할 이는 이제 내가 아니라 헌이 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네가 아니라 나다. 여태껏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주도권은 항상 가진 자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다.  - 『공놀이 하는 여자』  


 

박완서는 박완서다.

그녀는 남에겐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욕망을 들춰내는데 탁월하다. 마치 나만 알고 넘어가길 바랐던 일들만 용케 알고 일러바치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감추고 또 감추고 싶었던 내 안의 욕망들을 헤집어내어 낱낱이 까발겨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는 가시에 찔린 듯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그래,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표제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인 줄 미처 몰랐다.  

「그 여자네 집」은 작중 화자가 김용택 시인의 시 <그 여자네 집> 전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된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작중 화자가 들려주는 사연인 즉,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여 년 전 쯤, 하늘 아래 봄이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도 행촌리(杏村里)란다. 이 행촌리엔 만득이와 곱단이라 불리우는 어여쁜 총각 처녀가 살았더랬는데 둘은 동갑내기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잘 어울렸더랬다. 그러던 어느날 만득이가 징병으로 차출이 되고, 혼례라도 서둘러 치러주려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곱디 고운 곱단이를 그렇게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만득이는 꼭 살아돌아와 꽃가마 태워주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전쟁터로 끌러갔더란다. 그러나 만득이가 돌아오기도 전에 마을마다 결혼 안 한 젊은 처자들만 골라서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하는 수없이 곱단이네는 서른 넘은 아이 셋 달린 홀아비에게 울며 불며 안 가겠다는 곱단이의 등을 떠밀어 시집을 보내버렸더란다. 살아돌아온 만득이는 곱단이가 시집갔다는 신의주쪽을 향해 목놓아 곱단이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 만득이는 하는 수없이 순애라는 마을의 또다른 처자와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는 서울로 도망치듯 이사를 나왔단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중국 단체 관광으로 압록강 유람선을 처음 타본 만득이는 압록강 푸른 물을 바라보다가 그만 '엉엉' 목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단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곱단이를 잊지 못해 그러냐고 시샘어린 한마디를 쏘아부쳤단다. 



 

웬지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사연이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부모님 혹은 우리 조부모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차고 넘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만득이과 곱단이라는 젊은 남여의 슬픈 사랑 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적이고, 피해자의 피맺힌 고통뿐만 아니라 피해를 면한 자의 억울한 슬픔까지 담아낸 역사 그 자체다.    



 

비록 곱단이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곱단이가 딴 데로 시집가면서 느꼈을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을요.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장만득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 『그 여자네 집』 213~214쪽-


'아!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마음'이라니...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지 30 년이 다 되어가고 1992년부터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건만, 일본의 정식 사과는 커녕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역사 왜곡과 일본 국민의 무책임한 역사 외면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당한 자의 한조차 미처 풀어주지 못하고 있거늘 무슨 여력이 있어 면한 자의 슬픔까지 어루만져 줄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나는 당한 자의 고통에 머물러 있었을 뿐 면한 자의 슬픔같은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인식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역시, 박완서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전부 섭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그 누가 뭐래도 그녀의 대표작은 『나목』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여자네 집』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이란 처음 읽던 다시 읽던 누구나 '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웬지 처음 읽는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읽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처음 읽어도 언젠가 한번은 읽었던 작품처럼 느껴지는 게 또한 고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박완서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고전이라 하겠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고 말하면 아직도 읽지 않았느냐는 핀잔을 받을 것만 같고, 처음 읽어도 언젠가 읽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고 익숙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바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에게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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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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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집을 읽기 전, 뒤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을 먼저 읽었다.

작품보다 평론이나 해설을 먼저 읽으면 확실히  독자적(獨自的)인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눈앞에 두고서 읽지 않고 버텨낼 면역력(?)이 나에겐 아직 없는 것 같다. 

 

평론가이면서도 독자적(讀者的)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항상 작품과의 거리감이 나의 의도보다 훨씬 더 크게 줄어든다. 또한 학구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일반 평론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의 문체는 마치 한 편의 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단순히 '잘 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영혼마저 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신형철의 글 앞에서만큼은 작품을 직접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특별한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곤 한다.   


 

이 작품집을 두고, 그가 이런 글을 남겼다.

 


 

이미 오래전에 빅터 프랭클 같은 이는 인간은 이성으로 사유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고통받는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더 중요한  측면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면서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라는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봄밤」과 「이모」 같은 소설을 읽으며 '호모 파티엔스'를 달리 번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고통은 '고통을 받다'라는 형태로만 사용되는데 이 경우 인간은 고통에 대해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만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한다. 환자(patient)는 견디는(patient)사람이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전에는 없는 동사인 '고통하다'를 발명해내고, '호모 파티엔스'를 '고통-받는 인간'이 아니라 '고통-하는 인간'이라고 옮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형철「호모 파티엔스(patiens)에게 바치는 경의」중 -


그렇다면,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생의 마지막 2년 동안만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다간 '이모'(「이모」)와 남동생 관주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는 옛 직장 동료(문정)을 끝까지 원망하지 않는 관희(「카메라」). 그리고  정신지체 누나를 둔 탓에 여자친구(예연)로부터 버림받은 전직 헬스트레이너이자 일식요리사인 인태(「층」)는 분명 '호모 파티엔스'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106쪽「이모」중-


그것은 어쩌면 10년 전에 지자체의 책임자가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돌길을 깔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1년 9개월 3일 전에 문정이 지나가는 말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136쪽「카메라」중-


 

한때 그녀를 보면서 그녀가 누나였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그녀를 예연씨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날 그녀는 사촌에게 사정을 다 듣고도 그에게 내색을 안한 거다. 그가 바래다줄 때도 와이퍼와 우산 얘기만 했다. 결국 누나는 흘려졌다. 그날 인희는 그녀에게 흘러들어갔다. 사촌의 무식함도 같이 흘러들어갔다. 그는 그런 인간들을 많이 봤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다 뒤통수를 치는, 그녀가 그런 년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예연은, 예연은, 그는 어딘가에 칼을 찔러넣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개년이다. 예연은, 개년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온갖 낯선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그녀의 머릿속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하고 싶었던가.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초밥를 먹는 이 남자처럼.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230쪽「층」중-

 

 

그저 손바닥 위에 담뱃불을 눌러 끄고... 남동생이 어이없이 쓰러져 죽어간 돌길을 찾아나서며... 옛 여자친구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다녔던 길 건너 도서관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견뎌낼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의 성격이나 어떤 행동들이 잔인한 운명을 불러온 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하마르티아(hamartia) 때문에" (「시학」13장) 불행에 빠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마르티아'란 원래 '화살이 과녁을 비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이 ① 단순한 판단 착오나 실수인지, ② 주인공의 도덕적 성격적 결함인지가 불분명하여 여전히 논란거리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에토스가 곧 다이몬'이라면 (즉 성격이 곧 운명이라면) 세상의 모든 성격은 제안에 비극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신형철「호모 파티엔스(patiens)에게 바치는 경의」중-


 

예술가의 기질을 '자의식 과잉'으로 착각한 어느 신참 여류작가의 환각과 환청(「역광」)의 원인은 인물의 성격이 그들을 비극적 운명으로 인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람의 성격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후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에서 비극의 원인을 전적으로 개인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성격보다는 환경이나 상황이 어떻게 개인을 되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 넣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지자체에서 도로를 새로 깔면서 기존의 아스팔트 대신 고궁이나 공원처럼 작은 돌들로 교체했다는 평범한 현실 속에는, 한 남자가 죽었고 그로 인해 한 여자가 실연을 당하는 아픔과 그 충격으로 앞니를 가는 습관이 생겨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정신지체 장애인 누나가 또다시 가출을 해서 임신을 했다는 어이 없는 소식에 자기도 모르게 '미친년'이라는 욕이 튀어나와버린 대수롭지 않은 상황 속에는,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에 빠진 박사 학위를 소지한 여자와 고졸 학력이 전부인 남자가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합당한 이유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일찌기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일갈했는지도 모르겠다. 운명이란 만들어지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롯이 견뎌내는 것이고 참아내는 것이다. 견뎌내고 참아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딱, 여기까지였다면 그러니까 이렇게 운명을 견뎌내는 호모 파티엔스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그저 그런 눈물팔이식 통속 소설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타협하지 않고, 기어이 눈물로 가득찬 독자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다.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천사같은 얼굴이 붉디붉은 피로 물들어 고통스럽게 이그러지도록 만든다.


 

바로, 이거다.

연민하지 말고 공감하라는 것.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소시오패스를 빼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배고픔에 우는 아이를 보면 저절로 눈물이 고이고, 실의에 빠진 사람을 보면 가만히 어깨를 다독거리며, 장애아나 그 가정을 보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나 이런 눈물 한방울 돈 몇 푼 속에는, '내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속마음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반면,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실제로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차마 눈물을 흘리지도 호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지도 못한다. 그런 작은 호의나 선의로 사라질 슬픔이 아니라는 걸 줄어들 고통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들은 앓는다. 천갈래 만갈래 고통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행운을 재확인하는 목격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눈을 마주바라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체험자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나저나,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작가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눈물 몇 방울 돈 몇 푼 떨구고는 서둘러 현장을 떠나버리는 목격자인지 아니면 고통의 현장에 남아 슬픔의 매순간을 고스란히 견뎌내면서 끙끙 앓는 체험자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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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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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읽지 않아도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독자를 '울컥'하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나에게 작가 공선옥은 그런 존재다.


공선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로 다루는 작가로 그녀의 작품들은 언제나 '그때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한 것이 있다면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치며 쏟아내던 통곡이 마른 침을 조용히 삼키며 먼곳을 응시하는 서늘한 침묵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리라.  


일본의 대표적 반전 작가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작에서 제목을 따온『내가 가장 예뻤을 때』역시 그녀답게(?) '후일담' 소설이다.

1980년 그해 봄, 스무살을 보내던 아홉 명의 이야기가 봄날처럼 때론 따사롭게 때론 변덕스럽게 펼쳐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인 이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거리에서 한명은 피를 흘리며 죽었고, 또다른 한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살아남은 일곱 명 중 누군가는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이 되는가 하면, 또다른 누군가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엄마가 된다. 


스무살답게 그들은,

꿈꾸고... 도전하며...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리고 또한, 사랑하고... 이별한다...   



 

어떡하든 돈을 좀 마련해서 서구보건소로 오라며 전화를 끊는데 속에서 뭔가 왈칵 치밀었다. 경애가 죽었을 때 태용이 어린애처럼 악을 쓰며 울던 것이 생각났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덴뿌라 하나씩 입에 물고 찐빵 같은 웃음만 지어도 행복한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서러웠다.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그리고 나 해금이. 우리 곁에 경애와 수경이가 있었다. 아홉 송이 수선화 중 두 송이가 졌다. 그리고 승희가 애를 낳았다. 승희 아이는 새로 핀 꽃송이인가. -42쪽


사는 게 외롭고 괴롭고도 서글퍼서 밥을 먹고도 단 초코파이를 먹는 판님이와 판님이 또래들이 과자와 음료수봉지를 안고 양지 쪽으로 몰려간다. 공장 안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그 얼굴들이 수척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온다. 오후에는 좀더 분발해서 외로운 것은 어떻게 못 해줘도 일 때문에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각오를 새기며 찰기라곤 없는 밥과 붉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육개장 비슷한 국, 고춧가루와 소금으로만 무친 듯한 김치와 딱딱한 닭튀김 조각이 놓인 식판에 고개를 숙인다. 또 눈물이 비어져나오려고 한다. 코를 처박고 기름을  피해가며 국물을 떠먹는데, 누군가 내 등을 툭 친다.  -242쪽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퐁퐁 샘솟기 시작했다. 시인이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환이 때문에, 해금이 너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몰라. 봐, 네가 울기 전보다 지금 별이 훨씬 더 반짝이잖아." -211쪽


 

독자답게 나 또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눈을 감고 장면을 상상하며...웃고...울다가...

결국, 비어져나오려는 눈물에 잠시 잠깐 고개를 든다...



 

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숭늉을 마셨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깊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

나는 승희 엄마의 품속에 안겼다. 승희 엄마 옷자락에서 아주 아주 오래 묵은, 엄마 냄새가 났다. 그건, 바로 흙냄새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면 마당의 마른 흙에서 뿜어져나오는 냄새, 가을에 고구마를 캘 때면 땅속에서 솟아나는 자우룩한 냄새. 그리고 저녁 냄새가 났다. 모든 저녁이면 나는 냄새들. 환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어둠이 스며들면 비로소 피어나기 시작하는 냄새들. 뜨물 냄새, 연기 냄새, 수챗물 냄새, 쉰 행주 냄새, 파 마늘 냄새.... 그리고 별냄새, 달냄새. 승희 엄마 품은 한없이 포근했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이며 노래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흥얼거렸다. -65쪽 


 

난, 이 문장이 좋고 또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사는 건 죄가 아닌데... 왜, 눈물이 자꾸 나는 걸까.'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 역시 참 슬펐던 것 같다.

비록,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멀쩡한 주위 사람들이 순식간에 송장이 되어나가는 참극을 겪지는 않았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종종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더랬다. 

또래 친구들보다 뒤처질까 늘 전전긍긍했고, 남들 눈에 비치는 내모습이 초라하진 않을까 자주 긴장했으며, 드넓게 펼쳐진 미래는 너무 막연해서 그저 막막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마치 어젯일처럼 손에 잡힐 듯 기억은 생생하건만, 왜 그렇게 서글펐는지 도무지 구체적인 이유도 까닭도 떠오르질 않는다. 마치 작중 화자 해금이에게 스물 살이 꿈처럼 피안(彼岸)으로 사라져 갔듯 나의 스물살도 그렇게 기억 너머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더랬다.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은 안타까운 거리만큼,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이환과 보낸 세상물정 모르던 시간들은, '내 가슴에 은하수 흐르던 시절'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그 시절은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환에게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절들이 그렇듯, 목련이 지듯, 모란이 지듯, 속절없이 지나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절들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졸음이 밀려오는 틈새로, 은하수도 흐르지 않는 깜깜한 밤에 건조한 모래바람 부는 사막을 횡단하는 김진혁의 영상이 떠올랐고, 저 깊은 근원으로부터 일어서 표면에 이르러서야 파문을 일으키는 물결처럼, 저 깊은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진저리를 느끼며 나는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282쪽



 

그녀의 작품은 마치 '집밥'같다.

'어떤 맛일까?' 궁금증을 유발하지도 않고 침이 꼴깍 넘어갈만큼 식욕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투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표현할 순 없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집밥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한결같다. '한결같다'는 건 작가로서 개별 작품들에 특징이 없다는 것이고, 그만큼 창조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들은 이상하게 물리지도 질리지도 않는다. 친숙한 인물들과 익숙한 사건 및 배경들이건만 왠일인지 그 느낌이 불편하거나 거북하기는커녕 오히려 엄마 손길이 깃든 집처럼 포근하다.  


역사는 어쩌면 그저 평범한 생을 살다 갈수도 있었을 사람들을, 어쩌면 그것이 한평생 소망이었을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이바라기 노리코를 일본의 대표적 반전(反戰) 작가로 만들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은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공선옥을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후일담 작가로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난 후, 자꾸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마음을 이바라기 노리코의 또다른 시 한편으로 추스려본다.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바짝바짝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가는걸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건 어느쪽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걸 가족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기만했던건 나 자신이 아니던가


초심이 사라져가는 걸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안 된 일들을 모두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간신히 빛나던 존엄의 포기일 뿐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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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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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균 성인 독서량이 채 열 권을 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하루에만 리뷰글이 무려 열 몇 개씩 달린다는, 바로 그 책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어쩌다(?) 읽게 되었다. 

'힐링'과 '멘토링' 위주로 도배되다시피한 신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국내 순수문학 그것도 여성주의 소설이 오랜만에 등장했다는 뉴스도, TV 르포 작가 출신답게 충분한 사전 조사로 사실성을 살리면서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성공 비결도, 내 관심을 끌진 못했다.


여성가족부가 출범한지 십 년이 넘었고, 성폭력방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었지만, 일터에서의 유리천장은 여전하며, 가정에서의 가사 노동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고, 일상에서의 성차별과 성폭력 또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긴 '역사(history)'를 바꾼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모든 구성원들의 일상이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일상의 변화는 단순히 생각이 바뀌었다고해서 가능한 게 아니다. 생각은, 즉 마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가 다시 애벌레로 돌아갈 수 없듯, 철저한 구조적 '변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수 천년 인류 역사를 유지 존속시켜온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 착취와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하루 이틀만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에, 이런 류의 현실 고발성(?) 소설들은 여성들만의 공감으로 막을 내릴 공산이 크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자면, 독자로서 이에 따른 심리적 상실감과 공허감은 예상외로 오래 갔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이 책은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알렸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고, 방법들을 고민하고 찾아나서게 만든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서구 남성 중심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44쪽 -


'82년생 김지영'씨도 그녀의 어머니인 오미숙 여사도 어른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여자 아이로 태어나 성장한다.

오미숙 여사가 시골에서 국민학교만 나온 뒤, 농사일을 돕다가 열 여섯살에 서울 청계천 봉제 공장에 취업해서 번 돈으로 오빠 둘이 대학을 나왔다. 억울했지만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오미숙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난 김지영씨는 남동생만을 챙기는 할머니의 눈총과 남자아이들만 반장이 되는 게 이상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여기면서 자란다. 



기업 추천서는 공부 잘하는 여자 선배가 아닌 고만고만한 남자 선배들 차지였고, 졸업 후 힘겹게 입사한 홍보대행사에서는 열심히 일했고 롤모델도 만났지만, 남자 동기가 먼저 진급하고 똑같은 일을 해도 남직원과 여직원의 연봉 체계가 처음부터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결혼과 동시에 사직을 하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136쪽-


남자는 결혼하고 아빠가 되면 승진하고 월급이 오른다. 그만큼 책임감 있게 열심히 일할 거라는 생각에서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반면, 여자는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회사 입장에서는 빨리 털어버려야하는 '비용'이 된다.


'아이는 나라의 미래요, 민족의 미래'라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소중한 존재를 여성에게만 떠맡기는 걸까?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해서? '


인류 사회는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에게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역할을 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체제를 유지 발전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도 이상으로 출산과 육아 및 모성애를 중시하고 숭배하는 소위 '어머니 이론'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길 좋아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사 노동의 가치를 수치화 하는데 인색한 이유 역시 일단 돈으로 계산되면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류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의 노동과 헌신에 무임승차해 온 셈이다.  



가부장제는, 가족은, 국가는, 민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활용 매개 동원함으로써만 유지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토록 어머니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로 간주되는 여성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가질 수 없다. 그녀의 몸은 남성만이 주체가 되는 가족과 국가의 소유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57쪽-



 

그냥 '그런 거려니 ...' '원래 그런 건가 보다...' 하고 여겨왔던 '차별'의 원인과 이유를 깨달았다.

몰랐던 걸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몰랐을 때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아프고 슬프다.



이 글을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제서야 요즘 내가 한없이 무기력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깨달음은 고통을 동반한다.는 그녀의 말은 옳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상이 사람이든 이데올로기든 조직이든, 더 헌신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열정이 지나간 뒤의 황폐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왜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사람이 상처받는지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이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되지 않은 인생의 근원적인 불합리이고,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즘은 없다. 상처는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 머리말 중-


 

 

나는 부디 이 책이 '많이 팔린  책'이 아닌, '좋은 책'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현실에) 더 많이 아파하고 분노하고, (현실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이 한 권의 책이 많은 이들에게 페미니즘을 새로 접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이 책만 읽은 사람은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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