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두편씩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봤다는 신경숙 작가.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독서 이력서에는 고작 단 한줄뿐이다. 1985년 <겨울 우화>로 데뷰한 작가가 1993년 발표한 단편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내가 읽은 작가의 작품 전부이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한창 '문학열'에 불타 있던 때에 우연히 찾아 들었던 그녀의 강연이 한없이 '우울'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나에게 깊이 새겨진 작가의 이미지는 우울과 몽상 그리고 나약함이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다시 내 곁에 찾아왔다. 한창 기승을 부리는 꽃샘 추위와 함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옌례커의 <딩씨마을의 꿈>, 요시모토 바나나의 <호수> 등과 함께
'2011년 맨아시아 문학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이후 마침내 최종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기까지는 국제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여타의 소식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탈북자 북송 문제가 쟁점이 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주해군기지 건설 찬반논란과 한미FTA발효 등으로 언론의 관심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시점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지난 3월15일.
한
미FTA가 발효되던 그날 홍콩에서 열린 '맨아시아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신경숙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단다.
(신경숙 작가의 수상소감 전문을 중국어로든 한국어로든 혹은 영어로든 구하려고 검색을 했지만 구할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동시통역사가 말을 받았다. "지금 생존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
다시 북송되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콘래드호텔 7층 시상식장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가던 참석자 100여명이 허리를 세우고
수상자를 바라봤다. 신경숙이 말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조선일보 '만물상' 中-
'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깊은 슬픔에 빠져, 마치 세상과 담 쌓듯이 도 닦듯이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는 이기적(?)인 작가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녀의 수상소감은 그 유명한 하루키의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소감인 '벽과 알'에 버금가는 '힘'이 느껴졌다.
저는 오늘 한명의 소설가, 그러니까 전문적인 거짓말쟁이로 여기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물론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정치가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
(그러나) 오늘은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예루살렘 상을 받으려고 여기에 가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심지어 만일 간다면 사람들에게 제 책을 사지 말라고 선동하겠다는 경고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물론 그 이유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때문입니다. UN은 봉쇄된 가자의 거리에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비무장한 일반 시민들, 어린이와 노인들이라고 발표했습니다.
(......)
수상 통지를 받은 후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스라엘로 여행을 가고 문학상 수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이 충돌상황에서 제가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인상을, 그것도 내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국가의 정책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인상을 주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전쟁도,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당연히 제 책들이 보이코트 당하는 것들 보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심사숙고한 끝에 여기까지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그러나 한 가지 굉장히 개인적인 메시지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
조각에 적지도 벽에 붙여 놓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니까 그건 내 마음의 벽에 각인되어 있는 말인데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
“높고 단단한 벽과 그것에 부딪쳐 깨진 계란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계란 쪽에 서겠다.”
그래요, 그 벽이 얼마나 옳거나 그 계란이 얼마나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계란을 지지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결정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시간이나 역사가
그렇게 하겠지요. 만일 어떤 소설가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벽을 지지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 작품에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
어느 정도는 우리들 개개인이
계란이라고. 우리들 각자가 독특하고 대체불가능한 영혼을 담은 깨지기 쉬운 계란껍질이라고. 이것이 나의 진실이고 여러분 각자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정도야 어떻든 모두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벽의 이름은 뭘까요? 바로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벽은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되고 우리를 죽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죽이게 만듭니다. 차갑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며,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개인들이며 시스템이라는 단단하고 높은 벽과 마주하고 있는 깨어지기 쉬운 계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우리에게 승리의 희망은 없습니다.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강력하며, 그리고 너무나 차갑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타인의 영혼의 절대적인 유일함과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온기로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각자는 느낄 수 있고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런 영혼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이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입니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by 무라카미 하루키 中-
그렇다!
신경숙은 정말 약하디 약한 작가이다. 더 이상 '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벽의 일부가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대한 '벽' 앞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마는 약하디 약한 계란의 편에 섰다.
여기 또 한명의 작가가 있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또한 중국인이 아니기도 하다. 이름은 아라이(阿來), 고향은 쓰촨성 서북부 티베트 자치구인 마얼캉현.
중국어에는 '一方水土养一方人'이란 표현이 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인 아라이의 작품은 전혀 중국적이지 않다. 중국 소설 특유의 익살이나 허풍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고 서사적 구조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다. 중국인에 의해 중국어로 쓰여진 소설이 '중국'답지 않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작가가 그만큼 중국인의 색채를
띄고 있지 않거나 중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티베트인인 작가의 작품이 '중국적'이지 않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티베트인은 중국 한족과는 전혀 다른 생활풍습과 종교와 사유세계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당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아라이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고 오롯히 티베트적인
분위기에 젖어 보려 노력했으나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티베트와 티베트인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적고 얕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라이의 작품은 신(新),구(久) 시대의 변화와 위협받는 민족 정체성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아려한 아픔을
자아낸다.
'거라'는 빈총을 내던지면서 소리쳤다.
"왕! 왕왕!"
"왕왕! 왕!"
그가 흉내낸 사냥개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낭랑하게 숲 전체를 가득 채웠으며, 그 누구도 자신을 침범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
동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거라가 오늘 총을 쏜 것이 처음이라면 개 짖는 소리는 마을 전체에서 제일 잘 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개짖는 소리를 배웠다. 사람들이 말했다. "거라, 한번 짖어봐."그러면 거라는 왕왕 짖어댔다.
(.....)
"거라는 자신이 엄마와 똑같이 피를 흘렸고 엄마와 똑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밖에선 눈 내린 뒤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방 안에선 화로 속의 불꽃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는 아들과 엄마의
피냄새가 떠다녔다.
(.....)
엄마가 말했다.
"그 곰 정말 크더라."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많이 아팠어요?"
"많이 아팠지. 듣기 괴로웠나 보구나?"
"아니에요. 엄마"
엄마가 눈물을 반짝이면서 머리를 숙여 거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의 몸에서 젖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거라의 몸에서도 한약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아라이, <소년은 자란다> 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년 '거라'와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동생을 출산하는 엄마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피'이다. 소녀가 출산의 고통을 겪은 후 여자로 거듭나듯, 소년 역시 사냥을 통해 남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는 사이, 동네 아이들의 사냥을 따라갔다가 무섭게 자신을 추격하는 곰을 쓰러뜨린다. 진정한 남자의 길로 자신을 이끌어줄
아버지가 없는 소년은 이렇게 스스로 성장한 것이다. 마치 엄마 '쌍단'이 떠돌이 몸으로 지촌 마을에 정착하여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들 거라를 낳고 또 다시 거라에게 예쁜 여동생을 낳아주었듯이...
아라이의 <소년은 자란다>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짧은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주제의식과 함께
시각과 청각 뿐만 아니라 후각적 효과까지 뛰어나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기-승-전-결에 따른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명작
한편을 접한 기분이다.
훌륭한 작가는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주제를 구현한다'고 했던가.
이 점에서 볼 때, 아라이는 자신이 성장한 티베트 마을 지촌에서 겪은 경험을 배경으로 '인간과 삶'이라는 주제를 아주 잘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그의 작품은 고작 한편 뿐이다. 언젠가는 그의 '진정성'이 세상에
전해질 날이 반드시 오겠지만, 만약 그가 '계란의 편'에 서게 되고 또한 그 이유 하나만으로 거대한 '벽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우린 영영 그의 작품을 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하여, 나는 조급하게 중국어로 출판된 아라이의 작품집들을
사방팔방 수소문하여 소장하려는 것이다.
.
.
.
신경숙, 하루키 그리고 아라이...
내 마음 속에 두고 두고 기억될 작가들이다.
왜냐하면,
'성공이란 타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란 말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