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을 책들을 선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 또 절감하고 있다.

세상은 넓고 읽을 것들은 부지기수로 쌓여 있는지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읽는다는 행위' 자체에 중독되어 '읽는 이유'를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생각없이 살면, 습관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이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생각없이 읽다가 생각없이 사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에만 안주하지않기 위해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것도 오래되니 패턴이 생기더라...

솔직한 느낌보다는 평가를 하게 되고 줄거리 요약에만 집중하는, 한마디로 영혼 없는 글쓰기가 될 따름이었다.

 

그래서 일단 책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책읽기의 습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을 나누고 비율을 정해 지켜나가기로 했다. 현재 나는 4:1에서 3:2 비율 사이를 오고가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을 어떻게 선정하고 그 기준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다.

읽고 싶은 책은 사실 특별한 선정 기준이 필요 없다. 그냥 그저 눈길 가는대로 손길 가는대로 읽으면 되니 말이다. 진짜 중요한 건, 소위 '읽어야 할 책들'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주로 '읽고 싶은 책'이 아닌, '읽어야 하는 책'을 선정하는 방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할까 한다. 

 

일단, '읽어야 하는 책'의 선정에 앞서, ''읽어야 한다'라는 것은 누구의 혹은 어떤 관점에서 정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자신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책'들을 결정해야 한다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둘 중 하나다. 이미 시대를 선도하는 지성을 갖추고 있어 독서의 도움이 필요없거나 아니면 절대무지와 절대오만의 늪에 빠진 불쌍한 영혼이거나...

 

'읽어야 할 책'들을 선정하는 나의 방법 첫번째는 타인의 판단이나 생각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나은 지성을 갖춘 사람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믿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 바로 필독도서목록이요 소위 세계문학전집이리라. 특별한(?)단체나 기관에서 선정한 필독도서목록, 예를 들면 서울대교수들이 추천하는 필독도서 등등도 참고할만하겠지만, 나는 주로 국내외 문학상 수상작품들과 명망있는 출판사들이 회사의 명예를 걸고 출판하는 문학전집을 선호하는 편이다.

 

민음사와 문학동네 그리고 열린책들이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고 있는데, 이 세곳의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문학전집 목록에 겹치는 작품들이야말로 '1순위'다. 그런데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주로 너무 유명한 작품들이라서 이미 읽었거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이때야말로 '다시 읽는 나만의 명작' 목록을 만들 때이다. 나는 십대 시절에 읽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도 다시 읽고 싶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물론, 뒤마의 <몽테크리스토프백작>과 톨스토이의 <부활>도 '죽기 전에 꼭 다시 읽고 싶은 책들' 이다.

 

특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지난 연말 눈내리는 날, 내가 좋아하는 극장(이곳은 내가 젊은 날부터 너무너무 사랑하는 곳인지라 주로 혼자만 간다. 물론 영화 좀 좋아하시는 분들이야 어디를 말하는지 금방 눈치채겠지만...^^;)에서 본 영화 <올 이즈 로스트>을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작품이었다. 영화작품 속 주인공인 로버트 레드포드(작품 속에서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가 곧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였고 또한 헤밍웨이였으며, 헤밍웨이가 곧 산티아고이자 영화 속 주인공이었으며 또한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헤밍웨이와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을 위한 '오마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새긴 하지만,  <스팅>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영화배우가 세계 최대규모이자 유일한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를 후원하고 있다는 걸 아는가? 그리고 <올 이즈 로스트>의 영화감독인 J.C 챈더 역시 자신의 첫작품을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함으로써 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첫 장편 대작이자 다른 등장인물들은 전혀 나오지 않는 1인 재난극 <올 이즈 로스트>에 로버트 레드포드를 캐스팅했다. 자신을 감독으로 만들어준 선댄스영화제와 그 영화제를 후원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댄스 영화제는 미국 솔크레이크시티의 작은 지역 영화제에서 출발했으나 운영난으로 폐지 위기에 몰리자 로버트 레드포드가 그 소식을 듣고는 후원에 나서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세계적인 영화제로 급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제 이름 역시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인공 이름인 '선댄스'로 바뀌었단다. (외모가 멋있다고 연기를 잘한다고 좋은 영화배우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송강호를 봐라! 송강호 외모만 따지면 평균 이하일게다. 그렇다고 연기만 잘 하는 배우도 아니더라.그는 영화 <변호인>을 찍은 배우다. 설마했는데 진짜 섭외가 확~ 줄어들었단다. 그래도 걱정은 안 한단다. 어느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이야기다.)

참! 

그리고 이 老배우 바다를 참 좋아하나 보다. 특히, 제주도의 푸른 앞바다...

(이 사람, 미국 환경잡지에 제주도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올린 바 있단다. 나도,,, 너도,,, 하지 못한 걸 그가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내정간섭이라고 하더라마는...)


너무 옆길로 많이 샜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와 그 다음 2순위는 세계 3대 문학상(노벨문학상, 맨부커상, 공쿠르상) 수상작이나 수상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 과정을 거쳐 읽게 된 책들이 주제 사라마구 작품들과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와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 등이다. 참고로, 이렇게 선택된 작품들을 읽기 전에는 반드시 '준비단계'라는 걸 거쳐야 한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지 못하거나 작품의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난, 이런 책도 봤다!' 정도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 읽은 후에는 독후감이란 걸 쓰면 좋겠지만(사실 이런 책들을 읽고 독후감을 쓸 수 있다면 이미 '굿리더'의 반열에 올랐다고 봐야하지만) 그러나 뭐 굳이 독후감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검색등을 통해 괜찮은 서평 등을 몇 편 찾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놓쳤던' 혹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독서토론회 활동 등을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나 역시 이런 건 대학 졸업 후 해본 적 없으니 언외로 하기로 하자.)

 

세번째 선정(?) 기준은 내가 즐겨 찾는 관련 사이트나 신뢰하는 블로거들의 서평들을 참고하는 것이다.

이게 참 어려우면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참고로, 이런 사이트나 블로거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는 두번째 선정 기준에서 언급했듯 문학상 작품들을 읽은 후 서평등을 검색하다보면 좋은 서평과 그렇지 않은 서평들을 가려낼 수 있는 소위 '안목'이라는 게 생긴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블로거는 일단 글 참 잘 쓴다. 장소와 작품 혹은 영화와 작품 등을 연결지어 소개하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이 사람, 아무래도 문학비평이나 미학 계통을 전공했거나 심도 있게 공부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나처럼 비전문가의 흔해빠진 서평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수준있는 문학비평의 세계로 인도하지만 너무 어려워 일반인의 접근조차 차단하는 논문급 단계에서 멈출 줄 안다. 그의 미덕은 '딱' 거기까지의 '딱' 거기가 어딘지 잘 안다는 것이고, 그의 단점은 업데이트를 너무 늦게 한다는 점이다.  (나와는 비할바가 안될만큼 훨씬 훨씬 늦게 한다. 그래도 나를 비롯해서 그의 팬들은 보채지도 않은 채 느긋이 기다린다. 원래 맛있는 음식은 천천히 뜸을 들여 음미해야한다는 걸 실천에 옮기기라도 하듯...)

 

이렇게 읽게 된 책들은 주로 신간이 많다.  

여기서의 '신간'이라 함은 진작 출간되었으나 당시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명작에서부터 비교적 최근(2000년대 이후)에 출간되었으나 대대적인 홍보가 아닌 입소문에 의해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다. 이 '입소문'에는 영화로의 제작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1~2년 정도로는 '제대로' 된 입소문을 확인할 수 없고, 최소한 3년 이상은 되어야 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이 슐링크의 <책 읽어 주는 남자>와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 그리고 최근에 읽은 다이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등을 꼽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역자를 보는 방법을 소개할까 한다. 

흔히 '볼' 만한 영화를 고를 때 감독뿐만 아니라 출연 배우의 성향과 전작(필모그래피)를 확인하듯, 책 역시 역자를 보고 고르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생각보다 적중률이 상당히 높은데 생각보다 많이 알려진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대학교 문학 전공 교수들이나 교수가 되어야 마땅하나 운이 안닿아 전문 번역가의 길을 가는 이들이 적극 나서서 번역한 작품들이다. 주로 영미권 번역서들을 고를때 써먹으면 좋다. 이렇게 알게 되고 읽게 된 작가나 작품으로는 하진과 <핑거스미스> 및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번역한 최용준의 역서 등이다. 


참!

그리고 역자의 이름 못지 않게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책의 맨 끝에 실려있는 '옮긴이의 말'이다. 이 글을 잘 살펴 보면, 역자의 문장력을 가늠할 수 있고 해당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과 역자의 이해 정도를 엿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번역할 때 역자가 얼마나 몰입하며 즐기면서 번역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도착어 언어권에서 첫번째 독자라 할 수 있는 역자의 소감 혹은 느낌이야말로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후 느끼게 될 감정의 기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괜찮은 배우가 좋은 작품을 선정하듯 괜찮은 번역가 역시 좋은 작품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역자의 말'이 실려 있지 않은 번역서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절대로 읽지 않는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 중에는 전문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좋은 번역가는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 아니 좋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 부디, 여러분들이 좋은 독자에서 출발하여 좋은 번역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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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4-02-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책 고르는 방법을 이리도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해주시다니요. 저도 그 동안 읽고 싶은 책만 읽어왔는데, 읽어야 하는 책도 보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감사히 참고하겠습니다 ^^

빨강감자 2014-02-2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이 늦었네요. ^^; 제 나름대로 깨달은 것들을 운영하는 카페에 올렸는데 생각보다 호응이 좋아서 이곳 알라딘 서재에도 올렸는데... 뜻밖에 공감도 많이 해주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마니 마니 감사합니다. ^^
 

누군가 말했다.

사랑에 빠지면 사과를 닮게 된다고...


처음엔 푸른 하늘 위를 날듯 파랗게 물들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붉고 빨갛게 변해버린다.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창처럼 푸르디 푸른 순수함은,

어느새 이기적인 소유욕과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누군가 말했다.

사랑에 빠지면 사과를 닮게 된다고...


잘 익은 사과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멍이 들듯 사랑도 쉽게 '멍'이 든다.

멍든 사과는 도려내면 그뿐이지만 사랑에 멍든 가슴은 어찌할 수 없다.


누군가 말했다.

사랑에 빠지면 사과를 닮게 된다고...


그러나...

나는 말한다.


사랑에 빠지면 사과를 닮아가지만, 사과처럼 되는 건 아니라고...

한번 멍든 사과는 도려내지않으면 결국 썩어버리지만,

한번 사랑에 멍든 가슴은 도려내지않아도 썩지 않으며, 오히려 더한층 깊고 그윽해진다고...

.

.

.

이 세상에 실패한 사랑이란 없습니다.

비록,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든 사랑일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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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들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그러나 친구를 만난다고해서 우정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쉽게도 현대인에게 친구는 많으나 우정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일찍이 그리스인들은 세가지 사랑을 찬미했더랬다.
피조물(인간, 자식)에 대한 조물주(신,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agape)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정열적 사랑인 에로스(eros)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필리아(Philia)다. 필리아는 우정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덕의 하나로 규정한 바 있으며, 키케로는 우정을 사랑의 근간으로 보았다. 키케로가 우정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아미키디아(amicitia)'의 어원은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다.

우정이란,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 그리고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마치 거울에 비춰보듯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통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다.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한점 부끄럼없이 '고백'할 수 있는, 나 아닌 또 다른 타인을 갖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며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정은 당연하게 주어지거나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꺼이 헌신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서로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기울여주고,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선의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처럼 특별한 감정이 사랑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취급받는다는 게 너무나도 유감스럽다.

진정한 우정이란 술 몇잔에 안부 몇마디에 돈 몇푼에 얻을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고해서 잊혀지거나 퇴색되는 것 또한 아니다.
.
.
.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친구...

내가 아무것도 아닐때,
사는게 너무 괴롭고 힘들때,
그저 말없이 내곁에 있어줬던 친구...
나에게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줬던 친구...

자신을 인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몸소 보여줬던 친구...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면서도 뒤돌아설땐 모든 걸 내려놓았던 친구...

내가 끊임없이 친구의 우정을 의심할 때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었던 친구...

그리고,

내가 진짜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 때 내 곁을 떠난 친구...

나는 친구를 통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났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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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딴청을 부리게 된다.

하던 일이나 해야만 하는 일들을 뒷전으로 미룬 채, '멍'하니 공허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진다.

얼마전까지 울긋불긋 화려함을 뽐내던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있다.


'결국은 저렇게 다 내려놓을 것을... 어쩌자고 봄부터 싹을 틔우고 여름 내내 잎을 키웠을까...?'싶다.


무기력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누군가 그러더라. 무기력은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병(病)이라고...

우울증이 병이라는 건 알겠는데 무기력이 병이라니...?

언뜻 이해가 안된다.

.

.

.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마틴 셀리그만은 한 발 더 나아가 무기력은 외부로부터 학습된다고 했다.

그는 개를 대상으로 한 공포반응실험을 통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면 무기력에 쉽게 빠져버린다는 걸 확인했다.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옆 우리로 피할 수 있는 개들과 그렇지 못한 개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비록 전기충격이 가해지더라도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반면, 후자의 상황에 노출된 개들은 설령 옆 우리도 피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충격을 고스란히 감내했던 것이다!


인간 역시 개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단정짓고는 상황을 전환시키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이처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자주 노출되면 누구나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 무기력은 단순히 일시적인 의욕상실만을 불러오지 않는다. 무기력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무기력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존재(存在)'감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무기력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인정 즉, 자기 '부재(不在)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존재감을 잃은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앞의 실험에 처해졌던 개들은 전기충격이라는 실험 환경을 바꿀 수 없었다.

인간이 철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러번 시도해도 변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개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외적 환경으로부터 무기력이 학습되는 매커니즘이라 하겠다.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게 된 개의 무기력은 누구의 잘못인가?

개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개의 나태함때문인가...?


개의 무기력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실험 환경때문이라면, 우리를 종종 무기력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은 불공정한 사회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틴 셀리그만은 어린 시절 학대와 소외에 시달렸거나 경쟁이 심한 조직에 몸담고 있는 경우 무기력에 훨씬 쉽게 노출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1등만을 기억하는 사회,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사회, 과정이 아닌 결과만으로 평가받고, 상명하달과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 사회에서는 누구나 결국엔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할지라도 영원한 1등일수는 없으며, 언제나 게임의 승자가 될 수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무기력에 빠지는 건 개인의 잘못만이 결코 아니다.

무기력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에도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소개된 각종 무기력 극복 방법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삶에 대한 개인의 의지력을 높이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무기력을 조성하는 사회 환경을 둘러보고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다시 힘을 내서 바뀌지 않는 환경에 온몸으로 부딪히라고 개개인을 몰아세운다.

 

무기력에 빠지기는 쉽지만, 그 늪에서 벗어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단순히 마음을 다독이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의지는 삶에 대한 의미를 발견한 순간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개인의 심리 문제로 치부해왔던 무기력를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봐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개인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

제도와 규범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억압하는 사회,

그 속에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끝없이 경쟁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고,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꺽인 채,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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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등등...

언제부턴가 '죽기 전에.......'로 시작하는 문장이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절박함과 절실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리라.

우 리는 죽음을 피할 순 없지만 평소 죽음에 대해 관조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우리는 점점 '죽음'으로부터 멀어진 듯 하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인간의 평균 수명은 채 50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질병과 굶주림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죽음을 의식하며 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그중 하나였다.

언 제라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기에 삶은 훨씬 더 진지하고 생동감 넘쳤다. 굳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발딛고 서있는 모든 곳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야말로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는 그의 나이 52세(헤밍웨이는 61세에 엽총 자살했다)때 쓰여진 작품으로 흔히 거장이 남긴 마지막 '스완 송'으로 불리는 명작이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에게는 평생 동안 모험과 도전으로 일관된 삶을 추구했던 헤밍웨이의 잔영이 깊게 투영되어 있다.  

 

 

멕시코 만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째 단 한마리도 낚지 못한다. 이틀 동안 망망대해에 떠 있던 산티아고의 낚시바늘을 큼지막한 청새치가 덥썩 물었다.

노인이 탄 조각배보다도 훨씬 더 큰 5.5미터짜리 청새치는 마치 노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리 저리 배와 배위의 노인을 끌고 바다를 누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낚싯줄을 잡은 노인의 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리고 마침내 청새치는 움직임을 멈춘다. 

일생 일대의 대어를 낚은 노인은 청새치를 뱃전에 묶고 항구로 돌아가는 도중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포획물을 상어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수는 없어."

 

상어떼의 공격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육지에 도달한 노인에게는 살점 하나 남지 않은 청새치 뼈다귀뿐이었다. 노인은 비록 자신의 노획물을 지켜내진 못했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포기하기 전까진 실패도 패배도 없는 법이니까...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1953년에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문학상선정위원회는 <노인과 바다>를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노인과 바다> 를 꼽을 것이다.

죽 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산티아고'를 선택하리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이 땅의 모든 산티아고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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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헤밍웨이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 계기가 된 사진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화제가 된 모양입니다.

생전 헤밍웨이에게 어떤 사람이 내기를 걸었답니다.

'가장 짧은 소설로 사람을 울리게 만들 수 있다면 당신이 이긴 거요.'

결과는 헤밍웨이가 이겼지요.

내기를 수락한 헤밍웨이는 단 여섯 단어로 가장 짧은, 그러나 가장 슬픈 소설을 지어냈습니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 E. Hemingway

 

- 팝니다. 아기 신발, 한번도 신어본적 없음.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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