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이 된 푸코? - 위기의 미국 대학, 프랑스 이론을 발명하다
프랑수아 퀴세 지음, 문강형준.박소영.유충현 옮김 / 난장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cpurple님, 확인해보니 표지가 정말 유사하군요. ㅠ.ㅠ 디자이너에겐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표지 시안 중에서 걸러내지 못한 것은 명백히 편집주의 실수입니다. 2쇄 찍을 때 표지를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상상력 수준이 낮아서 죄송합니다. 좀더 노력해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히로세 준(廣瀬純, 1971~  )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은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둔 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책이다. 첫 번째로 제목에 속지 말아야 하며, 두 번째로 원래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어느 잡지에 연재된 두 쪽짜리 ‘시평’(時評)이었다는 ‘형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속임수에 넘어간다면 독자들은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제목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蜂起とともに愛がはじまる)는 이 책의 제목이 그럴 듯하게 짜맞춰낸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옮긴이가 걱정하듯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말이 뿜어내는 매력”에 아찔할 만큼 눈이 멀게 된 나머지 “혁명에 대한 무력함을 봉합하는 엉뚱한 역할”을 경박하게 솔선수범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이 책의 독자들이 피해야 할 첫 번째 낭패이다.

그 다음으로 짧은 ‘시평’이라는 형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 형식상의 특성처럼 쉽게 술술 읽힌다고 해서 그렇게 읽고 책장을 덮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읽(었)을지언정, 이 책은 차라리 두 번, 세 번 천천히 반복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비유하자면 이 책은 32개(한국어판의 경우는 34개)의 조각으로 이뤄진 직소 퍼즐이다. 각 조각마다 나름의 통찰력과 즐거움을 주지만, 모든 것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퍼즐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옮긴이가 걱정하듯이 이 책은 갖가지 현대 사상(특히 유럽의 사상)과 영화를 요약하며 “자칫 새로운 트렌드를 추종하는 경박함”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크게 오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독자들이 피해야 할 두 번째 낭패이다.

 

당신은 이 지독한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표현이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닌 이유는 이 제목이 그 자체로 히로세 본인의 구상(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압축한 말이기 때문이다.

쉽게 읽으면 이 문장은 이렇게 읽힌다. 봉기가 있고 나서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 그런데 아니다. 봉기와 사랑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함께,’ 즉 ‘공’(共)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저 문장은 “사랑과 함께 봉기가 시작된다”라고 읽어도 성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왜일까?

먼저 ‘사랑’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얼핏 읽으면 이 책의 제목은 1968년 혁명 당시의 저 유명한 사진, 즉 바리케이드 뒤에서 뜨겁게 입맞춤하는 남녀의 사진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히로세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운명애)이다(16쪽).

어떤 운명인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그 어떤 액션도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세계일지언정, 즉 “혁명의 불가능성”(11쪽)이 도드라진 세계일지언정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이 운명이 제아무리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일지언정(그리고 실제로 그럴지언정) 그 운명을 사랑해야만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 말은 이 운명을 ‘감수’할 것이냐, 즉 이 운명에 순응해 세계의 변혁을 그만둘 것이냐,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꿈을 계속 꿀 것이냐는 질문에 가깝다. 전자라면 더 이상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봉기: 혁명의 불가능성에 맞서 세계를 변혁하는 다른 방법

 

그렇다면 이제는 ‘봉기’이다. 히로세에 따르면 혁명은 운명을 부정한다(12쪽). 다른 식으로 말하면 혁명이란 다른 세계가 존재했던(혹은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시기, 혹은 자본이 아직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서 자본이 낳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 답을 공유해 실현하는 것이 가능했던(혹은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시기에 사유되고 실행된 해방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등장했다. 히로세는 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을 원자력 발전에 비유한다. 히로세에 따르면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언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늘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수력 발전은 높은 위치에 있는 물 안의 문제가 낙하에 의해 한꺼번에 해결됨으로써 존재하고, 화력 발전은 화석 연료 안에 있는 문제가 연소에 의해 모조리 해결됨으로써 존재한다. 이에 비해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것은 핵분열 연쇄 반응을 가능한 한 감속시키는 것, 그래서 에너지 생산을 제어하는 것이며, 그런 제어기술을 획득해야만 비로소 원자력 발전이 가능해진다. 반(反)원자력 발전의 담론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원자력 발전은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원자력 발전은 컨트롤밖에 할 수 없는 것(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186쪽).

 

원자력 발전은 수력 발전이나 화력 발전처럼 그 에너지를 모조리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제어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 에너지, 즉 핵분열 연쇄 반응으로 인한 힘을 모조리 방출하면 (핵)폭발=핵폭탄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의 위험 가능성에 불안해하면서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장 자본을 모조리 없앨 수 없다면, 우리는 자본이 양산하는 모든 사고(가령 최근의 부채 위기)에 불안해하면서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히로세가 말하는 ‘봉기’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액션이 아니라 이처럼 그 문제와 ‘더불어 살아갈 것’을 각오한 액션이다. “문제 제어로서의 해방, 문제를 과잉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의한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봉기이다. …… 봉기는 문제를 창출하면서 문제를 껴안고 준(準)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이다”(214~215쪽). 그리고 히로세는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을 빌려 이런 봉기의 주체를 혁명의 주체인 ‘두더지’와 다른 ‘뱀’에 비유한다.

 

들뢰즈는 …… 시작과 끝으로 구획이 나뉜 선분 위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는 또 다시 다른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옛날의 ‘두더지’와 [뱀을]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고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뱀은 땅속에서 휴식을 취할 줄 모르고 피로를 축적하면서 오로지 땅 위를 기어 다니는데, 그 땅 위에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것이다. …… 뱀이 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즉 어디까지나 과잉의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217쪽).

 

이렇게 본다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꿈을 계속 꿀 것이냐?”라는 질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정정, 아니 확장할 수 있고, 확장해야 한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으로 인한 사고를 껴안은 채, 그 과정에서 축적되는 피로에도 불구하고, 계속 변혁의 꿈을 꿀 것이냐?”

여전히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래, 이런 운명일지라도 사랑하겠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봉기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혁명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변혁(즉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봉기한다면 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아니, 차라리 봉기해야만 이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봉기하지 않는다면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것이고, 순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기=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봉기와 사랑’(봉기=사랑)과 함께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라고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강병호 외 지음 / 난장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고 나와야 했을 사다리 같은 책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장치 2010-03-1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사장님ㅋ 한 교수님이 담주 수업시간에 이 책 좀 본다고 하네요. 2~3주 정도 걸쳐서 보겠네요. 책 제목 "~모험"에서 이미 주류의 정치철학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지만, 점점 그 인지도가 높아져가는 난장출판사! ㅋㅋ
 

기획의 말
현대, 정치철학, 모험

 

 

 



 



 


2008년 봄과 여름의 길거리를 수놓았던 촛불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촛불은 현재 ‘공화국’에 대한 논의, 87년-97년-08년 ‘체제논쟁,’ 그리고 ‘급진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을 낳았다. 이런 촛불의 흔적 또는 촛불효과는 신자유주의라는 반(反)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철학)의 귀환’으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서구 유럽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나아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귀환은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경향을 레오 스트라우스나 한나 아렌트 식의 ‘정치’의 자율성론으로 비판하고 존 롤즈, 마이클 샌들, 찰스 테일러, 로버트 노직,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같은 영미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수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처럼 서구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결국 철학이 곧 정치라고 봤던 루이 알튀세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68사상가들’을 결산하며 정치철학의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와 달리 지금 이 땅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지성계에게 사유할 것을 요청, 심지어 명령하는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건설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환은 하나의 철학적 조류에 또 다른 조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컨)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건강하다. 하지만 반신자유주의 연합이든, 반MB 연합이든, 또 그밖에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사유하든 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촛불의 교훈은 이것이다. 즉, 정치란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국가’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요구를 초과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일종의 합의나 체제가 아니라 갈등·경합·투쟁·계쟁·봉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 우리가 지금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공통의 지평 위에 서 있다. 

정치철학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한 국가형태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권력이 정당하며, 누구에게 권력이 돌아가야 하는가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정치철학의 주된 물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정치학』에서 평등/불평등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난제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체제에 대한 고민의 가장자리야말로 정치철학의 아포리아가 자리하는 곳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당성과 배분이라는 문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기. 기존의 정치 개념(권리, 정의, 자유, 평등, 인민주권 등)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바로 이것이 여덟 명의 철학자를 통해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모음집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전략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주)텍스트를 읽기 위한 (곁)텍스트, 그러나 늘 곁에 두고 사유하며 곱씹을 것을 요구하는 (곁)텍스트이다.
 

   
 

▣ 현대 유럽의 철학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 그리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은 ‘칼 슈미트’의 영향, 그리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의회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모색하는 사상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표제나 정당제로 환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사유하고 대표의 원리, 법, 규범, 제도 등에 맞서 인민의 권력이나 다중의 역량의 우위를 강조하려는 사상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슈미트의 ‘제정하는 권력’대 ‘제정된 권력’이라는 문제틀의 자장 안에 있다. 이 짝패는 가깝게는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 바,(1) 이는 제1철학과 무관한 정치철학만의 고유한 주제와 대상을 확보하려드는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눈가림과는 달리 정치철학의 핵심에 언제나 존재론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이데거(왼쪽)와 슈미트(오른쪽)의 캐리커쳐   

 

인민의 힘이 제정된 권력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물음은 ‘권리’(그 중 가장 문제적인 권리는 ‘저항권’이다)를 정초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힘이 곧 권리’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니라, “각자의 권리는주어진 조건 속에서 실제로 행위하고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에티엔 발리바르)고 가정할 때, 우리는 각자 또는 인민의 힘이 뻗어나갈 수 있을 만큼 뻗어나갔을 때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와 마주쳐야 한다. ‘권리’와 ‘폭력’에 대한 상이한 성찰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입장을 변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슈미트는 의회/대의민주주의가 본디 대표의 원리(대표자가 정치체를 인격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와 동일성의 원리(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권자와 복종자 사이의 동일성) 사이의 모순된 결합이지만,(2) 오늘날 정치적 통일체의 동질성과 구성원의 동족성 덕분에 그 모순이 봉합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인격’(persona)은 하나뿐이다. 이는 오로지 왕만이 인간으로서의 신체와 주권자로서의 신체라는 두 신체를 가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 둘째, 슈미트가 바라본 동일성의 원리, 곧 민주주의는 이미 동일하거나 ‘비슷한 자들’끼리의 통치, 심지어 “동족결혼”(알랭 바디우)일 뿐이다.

그러나 비슷하다고 간주된 자들 사이에 균열 또는 나눔이 있으며, 왕이 아니라 인민들도 자신의 정치적 인격을 만들어 정치무대에 오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오늘날 정치철학이 숙고하고 있고, 또 숙고해야 하는 문제이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탈정체화,’ ‘주체화’ 같은 개념은 이런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특히 클로드 르포르,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샹탈 무페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슈미트가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슈미트가 제시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내전’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피/아 적대는 앞서 얘기한 정치적 통일체의 동질성과 구성원의 동족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국가』제5권(470b∼471a)에서 전쟁(polemos)과 내분/내란(stasis)를 구분했다. 전자가 헬라스인들과 이방인들(이들은 자연적으로‘적’이다)의 적대라면, 후자는 헬라스인들간의 적대이다. 서구 정치철학의 정초자는 내분/내란을 ‘병’으로 간주했고, 고대 그리스의 다른 텍스트들에서 내란은 ‘집안싸움,’ ‘형제간의 싸움’에 비유됐다. 흥미롭게도 내분/내란이 어차피 자연적으로 ‘친구’(슈미트 식으로 말하면 동지)인 자들 사이의 적대라는 이유로 플라톤은 그것을 “화해하게 될 사람들로서” 불화하는 수준으로 축소시키고자 무던 애를 썼다. 불화가 있더라도 국토를 유린하지 말며, 가옥을 불태우지 말도록 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말이다. 플라톤에서 슈미트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정치철학에서 내전이 억압된 이유(플라톤이 내분/내란을 끝까지 ‘전쟁’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은 징후적이기까지 하다)는 형제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친구인 동시에 최악의 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친구인 자들(출생하는 동시에 동일한 국적을 갖게 되는 국민들) 사이에 나눔과 균열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 오늘날 정치철학의 과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자가 결정하거나 통치의 원활함을 위해 오늘날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예외상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내전에 대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갈등, 불화, 경합이야말로 곧 정치라는 단언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 선보이는 여덟 명의 철학자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 주장은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지난 게 대부분이다. 이제와 이들의 사유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것도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입문서의 형태로 소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성사적으로 늘 뒤쳐져서 남들 뒤꽁무니 따르기에 바쁜 우리 모습에 대한 자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행하고 있거나 유행할, 하지만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일군의 신상품을 풀어놓는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무엇보다도 푸코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근대’를 하나의 태도, 그것도 ‘비판적 태도’로 규정했듯이 우리 역시 ‘현대’ 또는 ‘동시대’를 하나의 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철학자는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과거의 텍스트를 읽었다. 이것은 오늘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시차적(時差的)이며, 과거의 텍스트를 다른 시각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시차적(視差的)이다. 요컨대 현대/동시대는 이 이중의 시차를 경유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 이 모음집의 텍스트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인용할 때, 다시 말해서 이 텍스트들이 경전들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곁)텍스트가 될 때 이 모음집에 수록된 정치철학은 비로소 현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에 참여해주신 글쓴이들의 약력에는 대부분 ‘과정’이라는 꼬리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학계와 사회의 끝자락 또는 가장자리에 있는, 이 ‘과정 중의’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 아닌가. 이제는 당신의 차례이다.

기획위원
김상운·양창렬


(1) 홍철기,「칼 슈미트와 스피노자」,『진보평론』(제25호/가을), 2005, 176∼192쪽;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새물결, 2008. 특히「잠재성과 법」을 참조.

(2)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일해지는 순간은 투표할 때 뿐(장-자크 루소)이고, 명령권자와 복종자가 한 몸을 이루는 형상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적 없는 수단> 발간 이후 보도자료를 쓰기 위해 아감벤에 대한 이런저런 논문들과 책들을 훑어봤다. ‘전세계 최대의 지식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영미권에는 이미 2005년부터 아감벤에 대한 연구서가 6권 정도 나와 있고, 근간예정인 책도 2권이다. 이 중 편집서가 아닌 개별 학자의 연구서는 근간예정인 2권과 기발간된 6권 중 2권이 있다. 간단히 적어보면 그 4권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4번의 표지이미지는 아직 제공되지 않고 있어서 올리질 못했다).
 


 

 

 

 


    

 
 1. Catherine Mills, The Philosophy of Agamben (2009)
2.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2009)
3. Alex Murray, Giorgio Agamben (2010/3월 7일 예정)
4. Thanos Zartaloudis, Giorgio Agamben: The Idea of Justice and the Uses of Legal Criticism (2010/4월 8일 예정) 

근간예정인 3번은 영국의 출판사 루틀리지의 ‘비판사상가들’(Critical Thinkers)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앨피출판사가 이 시리즈를 계속 내고 있으니 아마 3번은 조만간 국역될 수도 있겠다. 4번은 법학자의 책인 듯한데 지은이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의 지은이들과 모두 ‘안면’을 트게 됐고 책도 모두 볼 수 있게 됐는데(내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 얻은 소득이 있었다면 이것이었다), 이 포스트의 제목으로 쓴 “벤야민은 하이데거에 대한 해독제이다”라는 구절은 그 중 한 책에서 따왔다(어떤 책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 수수께끼가 재미있으니까! ㅎㅎㅎ)

언젠가 <리베라시옹>(1999년 4월 1일자)은 아감벤과 마롱귀(Jean-Baptiste Marongiu)의 대담을 실은 적이 있는데(“아감벤, 인간의 탐구자”[Agamben, le chercheur d’homme]) 그 대담에서 아감벤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술회한 바 있다. 관련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편의상 원문은 생략했다). 

 

   
 

[하이데거와의 ‘지적’ 만남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조우였다. 삶에서도 그랬고, 사유에서도 그랬다. 이런 조우는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또는 간혹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좌우간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내게 그런 것이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우한 벤야민의 사유도 내게 그런 것이었다. 모든 위대한 작품은 상당한 위압감과 독(毒)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늘 그에 대한 해독제를 [동시에]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내가 하이데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해독제였다.

 
   

 

이 인용구절 바로 앞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철학적 소명의식’을 심어줬다고 인정한 바 있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아마 ‘물리적 만남’으로 가속화됐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5년 시몬느 베이유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6년 아감벤은 박사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남동부의 한 마을인 르 토르(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에 위치한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의 별장)에서 열린 하이데거의 세미나(헤라이클레이토스에 대한 세미나)에 참여했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아감벤의 고백, 그리고 실제로 아감벤의 저서 곳곳에서 출몰하는 하이데거적 테마는 하이데거가 아감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음을 입증해준다. 



▷ 왼쪽이 젊은 시절의 아감벤, 오른쪽이 하이데거이다(1966년). 흔하게 볼 수 없는 사진인데 서비스 차원에서 긴급 방출한다(나는 이 사진을 독일에 사는 지인을 통해서 힘들게 구했다. 그러니 퍼 가시는 건 마음대로이나 꼭 출처를 밝혀주셨으면 한다. 그렇다. 이건 홍보이다 ㅎㅎㅎ).

그러나 내가 <리베라시옹>과의 대담 한 대목을 따온 이유는 하이데거가 아감벤에게 끼친 영향을 과대평가하지는 말자는 취지에서이다. 영향 자체를 안 받았다거나 그 영향이 미미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강조해서 반복하자면) 그 영향을 ‘과장’해서는 참으로 곤란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어디에선가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밟고 올라간 다음에 발로 냅다 차 버려야 할 사다리”(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4)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하이데거는 아감벤에게 그런 사다리였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 젊은 연구자가 어느 강연을 통해 “아감벤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는 말을 전해들어서이다.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릇 모든 단언은 명쾌한 맛은 있을지언정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이 문제의 단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결국 “모든 사상가는 플라톤의 주석자”(알프레트 N. 화이트헤드)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말(로고스)은 신의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감벤은 앞서 인용한 술회 뒤에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자신은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들’이 끝내지 못하고 남겨놓은 작업을 끝내려고, 완수하려고 노력할 뿐인 에피고넨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들’(복수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하라)에 굳이 하이데거만 있을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아감벤은 이어지는 술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찰은 벤야민과 미셸 푸코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감벤의 작업은 벤야민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혹은 “아감벤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 기 드보르, 장-뤽 낭시 등등.

한 사상가의 사유를, 그 사상가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상가의 사유 아래 복속시키는 이런 단언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상가의 ‘독특성’을 무화시킬 우려가 있다. 어찌보면 그 ‘독특성’이 그 사상가의 핵심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요컨대 칼 맑스를 헤겔의 에피고넨이라고 단정한다면 맑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겠는가? 질 들뢰즈를 칸트의 에피고넨, 스피노자의 에피고넨, 니체의 에피고넨, 베르그송의 에피고넨이라고 한다면 들뢰즈는 자신이 뛰어내린 아파트를 거꾸로 기어올라가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이렇게 응수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상가의 뒤에 달라붙어서 그 사상가의 아이를, 그것도 아주 흉물스러운 괴물 같은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아감벤이 자신에게는 이런 비역질 취향이 없다고 손사래 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건 그의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철학사는 일종의 비역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철학사에 이런 비역질을 하지 않아도 됐을 ‘부동의 동자’가 존재했다면 그건 오로지 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작에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끝)

※ 여담이지만 나는 하이데거가 현대 사상(특히 유럽의 그것)에 끼친 영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그의 그늘이 너무 짙다(물론 이 말이 위에서 밝힌 내 생각, 즉 누가 됐는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한 하이데거의 영향을 과대평가/과장하지는 말자, 는 말을 취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된 연유는 프랑스 지성계의 하이데거 수용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혹은 반만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이데거의 고향인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인가? 



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책 <프랑스(인들)의 하이데거 해석들: 예외적인 수용>(French Interpretations of Heidegger: An Exceptional Reception,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8)의 편집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들은 나치 부역자로 의심받았던 하이데거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물론 이 대답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하이데거를 왜 그렇게 열렬히 수용하게 됐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건 그 자체로 지성사적인 작업이 필요하며, 앞서 말한 책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이 책은 2002년 “하이데거와 프랑스”라는 주제로 미국 뉴헤이븐의 서던코네티커트주립대학에서 열린 북아메리카하이데거학회의 성과물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은 돈 많은 출판사가 알아서 좀 번역해 출간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하이데거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운 외국 사상가가 누가 있을까? 좌파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맑스나 레닌을, 우파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허버트 스펜서가 아닐까? ‘적자생존’의 창시자인 그 스펜서 말이다. (끝)



이 글은 테마카페에 등록된 테마입니다.
테마는 '먼댓글(트랙백)'이나 '댓글'을 이용하여, 하나의 주제(테마)를 놓고 여럿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테마카페 바로가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