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es Writing Have a Future? (Paperback)
Vilem Flusser / Univ of Minnesota Pr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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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이 있어서 빌렘 플루서의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엑스북스, 2015)를 읽다가 1장의 처음 두 문단부터 턱 막혔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판 <Does Writing Have a Future?>(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1)를 펼쳐들었다. 노트를 끄적이다 보니 분량이 꽤 되어서 아깝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구하고자 이렇게 올려본다.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가 처음 두 문단을 통해서 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신의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writing about writing)인데, 이런 작업은 “Nachdenken”(=thinking something over)이 아니라 “Uberschrift”(=superscript)라는 것이다.

 

왜 이 간단한 말이 이해가 안 갔을까? 다시 한국어판을 펼쳐보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판 옮긴이는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Uberschrift”를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두 표현의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겨놔서(내가 알기로 이 두 독일어 접두사의 의미폭은 동일하지 않다. 아니 겹치는 부분도 없다......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서로 대비되는 두 표현이 서로 비슷한 표현인 것처럼 읽혔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어판만 보면 “writing about writing”=“Nachdenken”=“Uberschrift”처럼 읽힌다.그런데 1장 곳곳에는 그렇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구절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한국어판과 영어판은 첫 번째 문단의 네 번째 문장을 서로 정반대로 옮겨놨다. 한국어판의 “그래서 이와 같은 모험은 사유들이 사유 자신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메타적 사유(Nachdenken)와 비교될 수 있다”에 해당하는 영어판 문장은 “Such an undertaking cannot be compared with thinking something over, in which ideas are directed against ideas”이다. 즉, 한국어판은 긍정문(“비교될 수 있다”)으로, 영어판은 부정문(cannot be compared)으로 옮긴 것이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틀리게 옮긴 것이리라? 어느 쪽일까?

 

일단 계속 나아가보자. 앞서 플루서는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이 아니라 “Uberschrift”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더 간단히, “Nachdenken”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는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하나는 “뒤에”(after)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향해서”(to[ward])의 의미이다. 즉, (해당 접두사의 첫 번째 의미에서)“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 뒤에 따라붙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당 접두사의 두 번째 의미에서) “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Nachdenken”은,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은 “글쓰기[이 맥락에서는 글로 쓰여진 것 혹은 글 자체]에 관해 글을 쓸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왜냐하면 일단 글로 쓰였다는 것은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자기호들 사이에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이며(그러니 따로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문자기호들은 그 자체로 이미 흔적들(typoi)이기 때문이다(그러니 따로 흔적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글쓰기”(=글[문자]로 쓰여진 것) 자체에서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 혹은 두 가지 기능은 이미 완료됐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 이미 완료된 “Nachdenken”의 전략 혹은 기능을 새삼스레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무엇인가? 플루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사유,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이미 사유된 생각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려는 시도, 이미 사유된 그런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어 다시 쓰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Writing about writing is itself to be seen as thinking of a sort, that is, as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 to track down these thoughts that have been thought and to write them down).

 

이 부분에서 좀 헷갈리는데, 이건 플루서 본인 때문이다. 요컨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도 “Nachdenken”에서와 마찬가지로 “질서”짓기와 “흔적” 더듬기가 관건이다. 그렇지만 “Nachdenken”에서와는 달리, (내가 이해한 바대로라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는 새삼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그 뒤에 따라붙여야 할 “보충적인 생각들”이 필요 없다(이런 점에서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는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다. “글쓰기에 관해 이미 질서 있게 사유된 생각들을 [재]배열하려는 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는 새삼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켜 더듬어야 할 흔적들이 없다. 흔적(=글로 쓰여진 것]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까.

 

하여,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과 (비슷하면서도) 구분되는 “Uberschrift”인데, 이 “Uberschrift”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플루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Uberschrift”라는 표현 자체가 1장을 제외하면 2~3번 정도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플루서의 다른 책들/언급들을 읽어보고 참조해봐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일단 독자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이하는 완전히 내 상상이다.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처럼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혹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글로 쓰여진 것들]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을 재/배치하는 방법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농구팀에 새로운 플레이어를 넣는 게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포지션을 바꾸는 방법이다. 혹은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사유들로 이뤄진 어떤 성좌”의 내부 배치를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예 새로운 농구팀, 새로운 사유의 성좌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벤야민의 꿈, 즉 “인용만으로 이뤄진 책을 쓰는 것” 역시 이런 방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쓰일 것이라 상상해본다. 혹은 나는 몽타주도 떠올려본다. 몽타주 역시 기존의 스틸컷들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가 정말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엇이라면, 우리는 이 “Uberschrift”를 어떻게 옮겨야 할까?

 

앞서 적었듯이 “Uberschrift”를 영어판은 “superscript”로, 한국어판은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다. 일단 한국어판의 번역을 보자면, 그리스어 접두사 “meta-”는 흔히 인문학 분야에서 “~에 관한”(=about)으로 쓰이기 때문에 괜찮은 선택이다. 가령 “언어에 관한 언어”는 “메타언어”라고 불린다. 게다가 독일어 접두사 “Uber-”와 의미폭이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그러니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Schrift uber Schrift=Uberschrift)를 “메타문자”(혹은 메타글쓰기)로 옮긴 것은 괜찮은 선택 같다. 실제로 플루서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한곳이었던 브라질에서도 “Uberschrift”를 “metaescrita”로 옮기고 있다. 단,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옮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혹은 “Nach-”를 “Uber-”와 명백히 구분되는 표현으로 옮긴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meta-”에는 그저 단순히(그러니까 어원학적으로) “~이후”(=post[L.]=after)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즉 “meta-”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Nach-”와의 구분이라는 문제가 곧장 대두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한국어판 옮긴이가 두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영어판 옮긴이가 “meta-script”라는 표현 대신에 “super-script”라는 표현을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영어판의 선택이 더 나은 것일까? “Uber-”를 “meta-”가 아니라 “super-”로 옮기면 확실히“Nach-”와 혼동될 여지가 (적어도 의미론상으로) 확 줄어든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판 옮긴이가 “Nachdenken”를 “thinking something over”로 옮기고 있다는 데 있다. 이 “over”가 문제이다. 영어 접두사 “over-”는 독일어 접두사 “Nach-”와 의미폭이 다르다. 하여, “Nach-”를 “over-”로 옮기게 되면,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뒤에”[after]와 “향해서”[to/ward])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혹은 무척 헷갈리게) 만든다. 게다가 “meta-”에는 “over”의 뜻도 있기 때문에 다시 “Uber-”와 의미론상의 구분이 희미해진다(물론 영어판 안에서는 “Nach-”=“over-,” “Uber-”=“super-”로 일관되게 구분되어 옮겨지고는 있다).


영어판에는 “Nachdenken”를 그냥 “reflection”(=성찰, 숙고)로 옮기는 대목도 있다. 그렇다면 일관되게 “Nachdenken”=“reflection,” “Uberschrift”=“superscript”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Nachdenken”를 일관되게 “reflection”으로 옮길 경우에 문제가 되는 곳은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이 될 텐데, 차라리 그 대목에서도 “reflection”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옮긴이 각주 등을 통해서 그 대목의 논리를 설명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 나의 견해 혹은 제안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Nachdenken”는 “반성”(反省)으로 옮기고, “Uberschrift”는 “메타문자” 혹은 “초(超)문자”(실제로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예 새로운 표현을 쓴다면 나는 “덮어쓰기”(=overscript)를 선호할 것이다.

 

“反”에는 “되풀이하다, 반대하다”의 의미가 모두 있기 때문에 플루서가 말하는 “Nach-”의 두 가지 의미와 얼추 비슷한 의미폭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되풀이할 무엇인가가 선행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이 행위는 선행된 그 무엇에 “뒤따라오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욱 더 좋게는, 한자 문화권인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덮어쓰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렇다, 저 유명한 “surdetermination”라는 표현이다. 그것은 위상학적으로 기존의 것 위에 무엇인가가 덮어 씌여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덮어 씌여짐으로써 기존의 것들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덧붙임말.

 

1. 혹시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서 덧붙이는데, 한국어판의 번역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이런저런 평가를 하기에는 내가 이 책을 아직 충분히 읽지를 못했다). 플루서의 다른 번역본들에 비하면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의 가독성은 굉장히 높다.

 

2. 다만, 나라면 좀 다르게 번역했겠다, 싶은 대목이 눈에 종종 띄는데,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면 “schrift”의 번역이다. 알다시피 이 독일어 단어는 (낱개로서의) “글자”와 (글자들의 집합체로서의) “글”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런 단어를 번역할 때의 방법은 보통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병기이다. “글자/글” 혹은 (더 구분되게) “문자/글.” 나머지 다른 방법은 문맥에 따라 그때 그때 어울리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가령 “Uberschrift”는 “메타문자”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고, “메타글[쓰기]”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다. (끝)

 

[주의] 움라우트(..)와 악상(/)이 깨져 있습니다. 왜 인식이 안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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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첫 번째 문단의 네 번째 문장 영역이 틀렸습니다.

lefebvre 2020-01-2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거도 알려주시면 제게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얼마전 독일어 원본을 구했는데 아직까지 펼쳐보지를 못했네요. 덕분에 펼쳐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2020-01-29 17:08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원문: So ein verschlungenes Unterfangen kann mit dem Nachdenken verglichen werden, bei dem sich Gedanken gegen Gedanken richten. 가능을 나타내는 조동사 kann(<-können)이 긍정형으로 쓰였습니다.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빌렘 플루서 지음, 윤종석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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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이 있어서 빌렘 플루서의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엑스북스, 2015)를 읽다가 1장의 처음 두 문단부터 턱 막혔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판 <Does Writing Have a Future?>(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1)를 펼쳐들었다. 노트를 끄적이다 보니 분량이 꽤 되어서 아깝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구하고자 이렇게 올려본다.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가 처음 두 문단을 통해서 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신의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writing about writing)인데, 이런 작업은 “Nachdenken”(=thinking something over)이 아니라 “Uberschrift”(=superscript)라는 것이다.

 

왜 이 간단한 말이 이해가 안 갔을까? 다시 한국어판을 펼쳐보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판 옮긴이는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Uberschrift”를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두 표현의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겨놔서(내가 알기로 이 두 독일어 접두사의 의미폭은 동일하지 않다. 아니 겹치는 부분도 없다......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서로 대비되는 두 표현이 서로 비슷한 표현인 것처럼 읽혔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어판만 보면 “writing about writing”=“Nachdenken”=“Uberschrift”처럼 읽힌다.그런데 1장 곳곳에는 그렇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구절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한국어판과 영어판은 첫 번째 문단의 네 번째 문장을 서로 정반대로 옮겨놨다. 한국어판의 “그래서 이와 같은 모험은 사유들이 사유 자신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메타적 사유(Nachdenken)와 비교될 수 있다”에 해당하는 영어판 문장은 “Such an undertaking cannot be compared with thinking something over, in which ideas are directed against ideas”이다. 즉, 한국어판은 긍정문(“비교될 수 있다”)으로, 영어판은 부정문(cannot be compared)으로 옮긴 것이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틀리게 옮긴 것이리라? 어느 쪽일까?

 

일단 계속 나아가보자. 앞서 플루서는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Nachdenken”이 아니라 “Uberschrift”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더 간단히, “Nachdenken”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는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하나는 “뒤에”(after)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향해서”(to[ward])의 의미이다. 즉, (해당 접두사의 첫 번째 의미에서)“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 뒤에 따라붙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당 접두사의 두 번째 의미에서) “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Nachdenken”은,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은 “글쓰기[이 맥락에서는 글로 쓰여진 것 혹은 글 자체]에 관해 글을 쓸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왜냐하면 일단 글로 쓰였다는 것은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자기호들 사이에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이며(그러니 따로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문자기호들은 그 자체로 이미 흔적들(typoi)이기 때문이다(그러니 따로 흔적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글쓰기”(=글[문자]로 쓰여진 것) 자체에서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 혹은 두 가지 기능은 이미 완료됐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 이미 완료된 “Nachdenken”의 전략 혹은 기능을 새삼스레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무엇인가? 플루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사유,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이미 사유된 생각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려는 시도, 이미 사유된 그런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어 다시 쓰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Writing about writing is itself to be seen as thinking of a sort, that is, as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 to track down these thoughts that have been thought and to write them down).

 

이 부분에서 좀 헷갈리는데, 이건 플루서 본인 때문이다. 요컨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도 “Nachdenken”에서와 마찬가지로 “질서”짓기와 “흔적” 더듬기가 관건이다. 그렇지만 “Nachdenken”에서와는 달리, (내가 이해한 바대로라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는 새삼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그 뒤에 따라붙여야 할 “보충적인 생각들”이 필요 없다(이런 점에서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는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다. “글쓰기에 관해 이미 질서 있게 사유된 생각들을 [재]배열하려는 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는 새삼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켜 더듬어야 할 흔적들이 없다. 흔적(=글로 쓰여진 것]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까.

 

하여,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과 (비슷하면서도) 구분되는 “Uberschrift”인데, 이 “Uberschrift”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플루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Uberschrift”라는 표현 자체가 1장을 제외하면 2~3번 정도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플루서의 다른 책들/언급들을 읽어보고 참조해봐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일단 독자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이하는 완전히 내 상상이다.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처럼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혹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글로 쓰여진 것들]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을 재/배치하는 방법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농구팀에 새로운 플레이어를 넣는 게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포지션을 바꾸는 방법이다. 혹은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사유들로 이뤄진 어떤 성좌”의 내부 배치를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예 새로운 농구팀, 새로운 사유의 성좌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벤야민의 꿈, 즉 “인용만으로 이뤄진 책을 쓰는 것” 역시 이런 방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쓰일 것이라 상상해본다. 혹은 나는 몽타주도 떠올려본다. 몽타주 역시 기존의 스틸컷들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가 정말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엇이라면, 우리는 이 “Uberschrift”를 어떻게 옮겨야 할까?

 

앞서 적었듯이 “Uberschrift”를 영어판은 “superscript”로, 한국어판은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다. 일단 한국어판의 번역을 보자면, 그리스어 접두사 “meta-”는 흔히 인문학 분야에서 “~에 관한”(=about)으로 쓰이기 때문에 괜찮은 선택이다. 가령 “언어에 관한 언어”는 “메타언어”라고 불린다. 게다가 독일어 접두사 “Uber-”와 의미폭이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그러니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Schrift uber Schrift=Uberschrift)를 “메타문자”(혹은 메타글쓰기)로 옮긴 것은 괜찮은 선택 같다. 실제로 플루서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한곳이었던 브라질에서도 “Uberschrift”를 “metaescrita”로 옮기고 있다. 단,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옮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혹은 “Nach-”를 “Uber-”와 명백히 구분되는 표현으로 옮긴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meta-”에는 그저 단순히(그러니까 어원학적으로) “~이후”(=post[L.]=after)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즉 “meta-”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Nach-”와의 구분이라는 문제가 곧장 대두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한국어판 옮긴이가 두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영어판 옮긴이가 “meta-script”라는 표현 대신에 “super-script”라는 표현을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영어판의 선택이 더 나은 것일까? “Uber-”를 “meta-”가 아니라 “super-”로 옮기면 확실히“Nach-”와 혼동될 여지가 (적어도 의미론상으로) 확 줄어든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판 옮긴이가 “Nachdenken”를 “thinking something over”로 옮기고 있다는 데 있다. 이 “over”가 문제이다. 영어 접두사 “over-”는 독일어 접두사 “Nach-”와 의미폭이 다르다. 하여, “Nach-”를 “over-”로 옮기게 되면,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뒤에”[after]와 “향해서”[to/ward])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혹은 무척 헷갈리게) 만든다. 게다가 “meta-”에는 “over”의 뜻도 있기 때문에 다시 “Uber-”와 의미론상의 구분이 희미해진다(물론 영어판 안에서는 “Nach-”=“over-,” “Uber-”=“super-”로 일관되게 구분되어 옮겨지고는 있다).


영어판에는 “Nachdenken”를 그냥 “reflection”(=성찰, 숙고)로 옮기는 대목도 있다. 그렇다면 일관되게 “Nachdenken”=“reflection,” “Uberschrift”=“superscript”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Nachdenken”를 일관되게 “reflection”으로 옮길 경우에 문제가 되는 곳은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이 될 텐데, 차라리 그 대목에서도 “reflection”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옮긴이 각주 등을 통해서 그 대목의 논리를 설명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 나의 견해 혹은 제안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Nachdenken”는 “반성”(反省)으로 옮기고, “Uberschrift”는 “메타문자” 혹은 “초(超)문자”(실제로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예 새로운 표현을 쓴다면 나는 “덮어쓰기”(=overscript)를 선호할 것이다.

 

“反”에는 “되풀이하다, 반대하다”의 의미가 모두 있기 때문에 플루서가 말하는 “Nach-”의 두 가지 의미와 얼추 비슷한 의미폭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되풀이할 무엇인가가 선행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이 행위는 선행된 그 무엇에 “뒤따라오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욱 더 좋게는, 한자 문화권인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덮어쓰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렇다, 저 유명한 “surdetermination”라는 표현이다. 그것은 위상학적으로 기존의 것 위에 무엇인가가 덮어 씌여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덮어 씌여짐으로써 기존의 것들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덧붙임말.

 

1. 혹시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서 덧붙이는데, 한국어판의 번역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이런저런 평가를 하기에는 내가 이 책을 아직 충분히 읽지를 못했다). 플루서의 다른 번역본들에 비하면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의 가독성은 굉장히 높다.

 

2. 다만, 나라면 좀 다르게 번역했겠다, 싶은 대목이 눈에 종종 띄는데,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면 “schrift”의 번역이다. 알다시피 이 독일어 단어는 (낱개로서의) “글자”와 (글자들의 집합체로서의) “글”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런 단어를 번역할 때의 방법은 보통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병기이다. “글자/글” 혹은 (더 구분되게) “문자/글.” 나머지 다른 방법은 문맥에 따라 그때 그때 어울리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가령 “Uberschrift”는 “메타문자”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고, “메타글[쓰기]”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다. (끝)

 

[주의] 움라우트(..)와 악상(/)이 깨져 있습니다. 왜 인식이 안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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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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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매혹적인, 너무나 위험한 행복론

 

 

<행복의 형이상학>은 프랑스의 한 노(老) 철학자가 투척한 회심의 ‘폭탄’이다. 하여,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권하건대, 핑크색 (반)양장본 껍데기나 속지에 속아 뭔가 말랑말랑한 책이라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알랭 바디우가 조제한 이 폭탄의 어마어마한 폭발력은 자칫 방심하면 당신 자신마저 삼켜버릴지 모를 만큼 강력하니까.

 

  

 

먼저, 이 폭탄은 행복에 대한 기존 통념을 산산조각 낸다. 바디우에 따르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요컨대 일상적 욕구를 채워주는 자잘한 보상들(“훌륭한 직업, 적당한 보수, 무쇠 같은 건강, 명랑한 부부 관계 …… 예쁜 아이들”)로 이뤄진 평온한 삶이란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다. 이런 ‘만족’은 “행복의 유사물”일 뿐으로서 가상의 행복, 혹은 ‘상상적 행복’이다.

 

 

이 폭탄은 속칭 멘토들이 설파해온 ‘행복해지는 방법’도 여지없이 박살낸다. 그들은 행복해지기란 쉽다고, 욕심·집착을 버리고 주어진 것에 감사해 하면 행복해진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행복해지기란 일종의 “도박, 선택, 절대적 결단 …… 시련”인바, “상당한 각오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오직 과/감히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뭘 이 정도로 호들갑이냐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이 정도의 폭발까지는 충분히 버텨내며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왔을 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디우가, 대가를 치러야만,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행복은 ‘만족’=‘상상적 행복’이 아닌 ‘실재적 행복’(bonheur réel)이다. 실로 이 책은 실재적 행복을 설명하는 책이며, 결론으로 수록된 21개의 정의도 이 점을 증명한다. 그런데 ‘실재적’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실재적’이란 ‘실질적’이란 뜻일까?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이 따로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그 행복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혹시 ‘실재적’이란 ‘실재에 속한’이란 뜻일까? 흔히 실재란 상징화될 수 없는 것, 혹은 상징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 정의된다. 그렇다면 그런 실재의 차원에 속한 행복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실재적’이란 ‘실재로 향하는’ 혹은 ‘실재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이란 뜻일까? 요컨대 어떤 특정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가 평소에 가닿을 수 없는 실재와 (잠시나마?!) 접촉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런데 왜 꼭 그래야 하나?

 

 

놀랍게도, 아니 당연한 것일 텐데, 바디우는 나름대로 이 모든 질문에 답변을 내놓는다.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바디우가 한 가지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디우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기존의 세계나 관점 안에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그래서 바디우는 “행복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의 향유”라고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일단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한, 적어도 기존의 이 세계나 관점 안에서는. 그런데 새로운 것이 꼭 좋은 것(bon)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나? 상당한 각오와 위험을 감수하며 겨우 얻어냈는데 그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어쩔 텐가?

 

실제로, 다른 곳에서, 이런 ‘실재에 대한 열정’이 지배한 지난 세기가 파괴의 세기이기도 했다고 말한 건 바디우 본인이다. 물론 그때 바디우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 파괴의 방향이 아닌 또 다른 방향, 이른바 ‘벗어나는’ 방향으로 향할 가능성(기존의 것과 다른 최소의 차이, 그렇지만 절대적인 차이, 그래서 새로운 것으로 이어질 차이의 창출 가능성)도 동시에 언급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렇게 힘들게 도달한 실재=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평가는 없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실재라는 것은 그 정의상 그런 가치평가 너머에 있는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사건,’ ‘진리,’ ‘주체,’ ‘충실성’ 같은 개념을 통해 바디우가 (본인으로서는 최대한) 간결하게 펼쳐 보이는 논의를 이쯤까지 쭉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문득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 뭐랄까, 바디우가 투척한 이 폭탄이 알고 보니 집속탄이고, 처음의 폭발로 떨어져 나와 곳곳에 흩어진 소폭탄들에는 시한장치마저 장착되어 있어서 예상하지 못한 때에, 정신없이 펑펑 터진다는 그런 느낌?

 

 

그렇다. “오로지 불행을 거부하는 데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행복을 구하는 모험을 강행할 것이냐?”라고 재촉하는 이 책 <행복의 형이상학>은 바로 이런 책이다. 행복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속 시원하게 박살내주기 때문에 너무나 매력적인 책. 그러나 더 읽으면 읽을수록 곳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의 질문의 질문을 낳게 하기에 우리의 평정심을 뒤흔드는 너무나 위험한 책.


더더욱 이 책이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지는 건, 이미 만사가 더할 나위없는 막장인 세상인지라, 실재적 행복을 향한 저 어려워 보이는 길조차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지언정, 아니 중도에 포기할지언정, 그 길을 향해 가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바디우가 말하는 실재적 행복은 매력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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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난장의 신간 <푸코 이후: 통치성, 안전, 투쟁>의 옮긴이 김상운 님과 우리의 계획은 원래 이 책을 버전-업할 생각이었습니다. 이왕에 일본의 푸코 연구를 소개하는 김에 일본의 전반적인 현황을 일별할 수 있도록 일본어판에 원래 수록되지 않았던 다른 논문들을 추가할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김상운 님이 옮긴이 해제에서 밝혔듯이, <푸코 이후>의 공통 편집자 중 한 명인 다카쿠와 가즈미의 “일본어판의 원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완곡한, 그러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됐습니다(아래 사진들은 이번에 경합했던 표지 시안들. 탈락작은 다음번에 써먹어야겠다 ㅎㅎㅎ).


 


우리가 추가하려던 논문은 총 5개였습니다. 우리의 계획대로 이 논문들이 추가됐다면 (또 하나의) <푸코 이후> 한국어판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됐을 것입니다(녹색으로 칠한 논문들이 추가될 예정이었다. 해당 제목에 마우스로 화살표를 올려두면 자세한 서지사항이 나오거나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다. 아참, 아래의 사진에서 얼굴 옆면이 보이는 것이 다카쿠와. 다카쿠와, 왜 그랬어? ^^;;).




제1부. 통치성

1. 전쟁으로서의 정치: 1976년 강의 | 오모다 소노에
2. 전쟁에서 통치로: 1976~79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 오모다 소노에

3. 미셸 푸코의 통치성 연구 | 오모다 소노에

4. 인센티브란 무엇인가? | 다카쿠와 가즈미

5. 푸코의 통치성의 생성과 방법을 둘러싸고: 전쟁-인종의 담론분석에서 통솔의 ‘인도/대항-인도’로 | 기타다 류스케

제2부. 안 전

6. ‘생존’에서 ‘생명’으로: 사회를 관리하는 두 개의 장치 | 세리자와 가즈야

7. 군생의 장으로서의 ‘인구’ : 생명정치에서의 ‘생명’ 개념에 관해 | 다카오카 유스케

8. 전지구적 통치성 | 토사 히로유키

제3부. 투 쟁

9. 이슬람적 통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푸코의 이란 혁명론과 대항인도 | 하코다 테츠
10. 혁명과 야만, 이것이 슬로건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사용하기 위하여 | 히로세 준

11. 시민사회는 저항하지 않는다 : 푸코 자유주의론에 부상하는 정치 | 하코다 테츠

제4부. 대 담

12. 푸코, 펑크, 개: 사카이 다카시, 시부야 노조무와의 대담 (진행 가즈야, 가즈미)

우리가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이 5개의 논문 중 “전쟁으로서의 정치: 1976년 강의”는 김상운 님의 번역으로 (해제와 함께) 곧 발간될 <말과 활>(8호/4- 5월)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문제는 나머지 4개의 논문인데, 오는 5월 22일에 <푸코 이후> 발간 기념으로 여는 독자들을 위한 무한 서비스, ‘독자와의 토론’ 행사를 전후로 하여 (부분적으로나마, 틈틈이) 대방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실 분들은, 에, 5월 22일의 행사에 참석하시면 그 개요를 들으실 수 있을 듯합니다. 절대, 결코, 낚시질 아니라는 점을 밝히며 이만 줄입니다. (끝)

<푸코 이후>의 옮긴이 해제에서도 말했지만, 푸코의 논문과 대담 등을 (100%는 아니지만) 수합한 <말과 글>은 이미 일본어판이 나와 있다. 1998년에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해 2002년에 총 10권으로 완간됐으니, 상당히 빨리 번역된 편에 속한다(영어판은 아직도 완간이 안 되어 있다).



어떤 사상가의 저작을 독자들의 모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의 중요성(혹은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들을 간혹 만나는데, 크게 착각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떤 사상가의 저작이 번역된다는 것은 그 저작을 번역한 사람‘만’의 공적인 경우도 있지만, 더 넓게는 그 나라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용지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개별 저작이 아니라 <말과 글>처럼 대작인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저작 전체에서 쓰이는 개념들, 용어들을 일정하게 통일시켜야 되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의 의견이 취합(혹은 참조)되며 당연히 그에 따른 토론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에 A라는 사상가의 전집이 나왔다,” 그러면 독자들로서는 “아, A라는 사상가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성취가 일단락됐구나”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물론 이 성취는 후대의 또 다른 성취에 의해 그 빛이 바래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 다른 성취는 이전의 성취가 없다면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하다(어디 보자, 우리나라에 선집이나 전집의 형태로 나온 서구 사상가들이 누가 있나? 맑스, 니체, 프로이트. 흠, ‘의심의 세 거장들’은 나와 있고 칸트, 플라톤, 하이데거 정도려나……).


우리가 (<푸코 이후>를 포함해) 일본의 푸코 연구를 국내에 소개하려고 한 배경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즉, 일본의 푸코 연구는 이미 일정한 단계에 올라와 있다. 그래서 국내 독자들이나 연구자들에게 이들의 성과를 소개해 토론을 이끌어내고 논쟁을 자극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혹은 도서출판 난장)가 주목할 만한 일본의 또 다른 푸코 연구로는 다음이 있다. 오모다 소노에의 <푸코의 구멍: 통계학과 통치의 현재>(2003/아래 왼쪽 사진)와 하코다 테츠의 <푸코의 투쟁: ‘통치하는 주체’의 탄생>(2009)이 그것이다. 전자는 출판 가능성을 타진 중이고, 후자는 곧 소개될 예정이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도전적인 푸코 연구서가 나오는 것, 혹은 도서출판 난장이 그런 연구서를 낼 수 있는 것일 텐데, 내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도서출판 난장에서 나올 김상운 님이 <생명정치의 푸코, 통치성의 푸코>를 제외한다면) 허경 선생님이 (아마도 자신의 박사 학위논문을 개편했을) 한 권을 출판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제3, 제4, 제5의 푸코 연구서를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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