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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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라는 걸출한 인물에 대해 아주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평전 덕분이다. 혁명가로서의 체 게바라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특히 쿠바 혁명을 위한 게릴라 전의 생생한 현장을, 그리고 그 이후의 여정을 이 저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그를 일컬어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간'이라고 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말마따나, 뛰어난 지성과 뜨겁고 순수한 영혼으로 혁명을 실천했던 체 게바라의 인생은 책 한 권으로 요약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사실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간단히 정리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된다.) 그의 행적은 복잡했고 광대했으며 한편으로는 비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특별한 '관점'과 '해석'이 더욱더 필요한 것 같다.  

 

물론 평전은 객관적인 서술이 전제돼야 한다. 그 인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한 쪽으로 치우친 평가를 내려서도 안 되고 삶의 일부분만 부각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평전 안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부터가 사실은 굉장히 주관적인 작업이고, 그래서 주관 속에서 최대한 객관을 유지하는 것 혹은 최대한 합리적인 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평전은 체 게바라를 깊이 있게 해석해내는 작가만의 철학이랄까 해석이 좀 약해 보인다. 체 게바라의 행적과 주변인들의 기억, 평가, 그의 글 단편들을 잘 정리해놓기는 했지만 그 저변에서 체 게바라를 움직이게 했던 개인적 동력이랄까, 그의 철학과 시대정신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해석'은 적었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로,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세계상황이 별다른 사전 설명없이 곧장 제시는 점도 평전의 가독력을 매우 떨어뜨렸다. 낯선 상황과 용어 앞에서 독자로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데, 하나는 막연한 감으로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고(오독과 오해와 몰이해를 감수하고), 다른 하나는 책을 중간에 덮고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다. 어쨌든 글을 읽어나가는 데는 큰 방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평전을 쓰고 읽는 이유는 뭘까. 특별한 한 인물의 삶을 통해서 개인의 삶을 더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건 아닌지. 그 인물이 속해있는 시공간적 좌표를 읽고 그 안에서 보편적 인간과 삶과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체 게바라는 확실히 특별했던 사람이었다. 이상적이고 뜨거웠으며 명철했고 인간적이었다. 사람을 너무 이상화시키는 건 위험하고 어리석다.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이 점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특별했던 사람이 특별한 행적으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지평을 더 넓혀놓았다는 점, 인간이 선량하고 정의로울 수 있는 한계를 더 확장시켰다는 점, 이것은 분명 체 게바라의 위대한 성취가 아니었나 싶다.

 

번역에 있어서도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 번역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아서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우선,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들이 꽤 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하나는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원문 자체에 담긴 정보가 우리에게 너무 낯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인은 번역의 두 번째 아쉬운 점과 연결된다. 체 게바라가 활동했던 시대와 장소는 지금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아주 생소하다. 우리는 같은 서구문화권에 속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시의 남미 상황은 우리에게 거의 이해불가다. 따라서 꼭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역자 주를 붙일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한 마디로, 독자를 위한 배려가 너무 없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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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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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정말 어렵게 어렵게 조금씩 나아간다, 고 느끼며 작품을 읽었다. 그만큼 어느 한 부분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고, 상반되는 철학들 사이에서 균형을 최대한 유지했다. 그러나 작품 안에 담긴 작가의 뜻은 분명하고 간단했다. 삶이 명분에 앞선다는 것. 작가는 이 작품에 앞서 다른 여러 글에서도 일관되게 이러한 가치관을 유지하는 듯이 보인다.

 

<남한산성>에서의 무게중심은 한 나라를 존폐 위기로 몰고간 사건에 있지 않고, 그 위태로움 앞에서 각기 다른 태로로 응전하는 여러 인물들에 있다. 인조, 최명길, 김상헌, 서날쇠, 이시백, 김류, 사공, 그리고 그밖의 인물들... 삶의 위기 앞에서 그들이 취하는 태도는 지위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달라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삶과 명분으로 나뉘었다. 

 

명분이란 실상 사대부에게나 중요한 것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대부의 진영에서 과감히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은 삶의 중요성을 대변한 인물처럼 보이는데, 이렇게만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만으로는 명분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김상헌이 사공과 사공의 딸 나루에게 갖는 애틋한 마음과 서날쇠에게 보내는 믿음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명분과 삶의 길은 어느 순간, 어느 길목에서 맞닿아 있고, 그 지점이 저마다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쓰라린 갈등과 회한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남한산성>을 읽으며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씁쓸하게 되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한 나라의 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는 살고자 한다"고 소박하게 실토하는 그 말에서 어쩌면 큰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고자 한다. 산다는 것. 양파의 껍질은 까도 까도 끝이 없다지만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끊임없이 양파를 까는 행위와도 닮았다. 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기로 한 인조의 결정은 남한산성에서의 겨울에서 다음해 봄까지의 하루 하루를 어렵게 통과하며 명분을 버리고 또 버린 결과였다. 명분의 껍질을 벗겨내고 남은 것은 '무'였다. 결국 우리의 하루 하루는 그렇게 삶에서 끊임없이 '덜' 중요한 것을 버리고 가장 깊고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내려가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결국은 '무'에 도달한다. 아무 것도 없는 자리로.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숭고한 무엇을 만난다. 인조와 최명길과 사공과 백성들은 그것을 '목숨'이라고 보았다. 김상헌은 그 자리에서도 마지막까지 '명분'을 지켰으나, 명분을 받치고 있는 그 자리가 삶의 자리임을 결코 '못' 보지 않았다.  

 

한 명분이 떠난 자리에 다른 명분이 들어서고, 이 명분이 떠나면 또 하나의 명분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살아왔다. 결국 삶이란, 아무 것도 없는 자리 그 자체인 것이고, 그 자리에 우리는 서날쇠처럼 밭에 똥물을 뿌리며 다시 농사를 짓는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눈물겨운 내일의 밥을 입에 떠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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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모험 비룡소 걸작선 56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카를로 콜로디 글,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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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관광상품으로 피노키오 인형이 사방에 보였던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작가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렌체 출신이었다. 그는 1800년대 초중반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이탈리아가 성립한 뒤에는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로 방향을 바꿨다. 곧바로 연상되는 우리나라의 작가가 있다. 방정환.

 

막 성립한 나라, 아직도 혼란 정국이었을 나라,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험난한 여정과 통일 이후의 흥분과 낙관으로 들떠있었을 나라, 그리고 어린이들의 처지는 틀림없이 너무나 열악했을 나라. 방정환처럼 콜로디 역시 이탈리아의 어린이들에게서 연민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지 않았을까.

 

피노키오 이야기는 삽화적인 짧은 사건들이-어찌보면-약간은 즉흥적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이 작품이 어린이용 신문에 짧게 연재됐던 동화였다는 사실, 그리고 어린 독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따라가고 있는 큰 틀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자유와 유혹, 시련과 극복이다.

 

인형, 그것도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진 피노키오가 갑자기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나 이 아이가 끊임없이 유혹에 넘어간다는 점,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상어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작가의 사상적 배경이 기독교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런 배경 위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열심히 배우고 정직하게 일하는 가치'인 것 같다. 이제 막 통일이 된 나라에서 당연히 가장 필요한 가치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이 가치를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고, 작가의 고유한 인간성이 엿보인다. 피노키오를 끊임없이 시달리게 만들었던 주변의 유혹들은 얼마나 음흉하고 폭력적인가. 동시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피노키오에게 충고하고 도움을 주는 선량한 힘들도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지만 꼭 그렇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사람은 약하고 어리석고, 다행히 세상에는 선량한 손길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품 말미에 결국 피노키오는 사람 아이가 되는데, 이것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환(!)되는 것을 연상시킨다. 긴 시련을 거쳐 사람 아이가 된다는 것, 이것은 새로운 또 한 번의 탄생이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예전에 자신이었던 꼭두각시 인형을 바라본다. 그 인형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팔을 달랑달랑 매단 채, 한가운데에 다리를 십자로 꼬고 서 있었는데,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해 보였다.' 피노키오는 그 인형을 바라보며 말한다.

 

"내가 꼭두각시였을 때 얼마나 우스웠을까!"

 

말썽을 피우고, 계속 어리석은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꼭두각시 짓은 분명 우습긴 했겠지만, 결국 사람 아이로 변할 수 있었던 내면의 힘, 순수한 정신, 따뜻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던가. 그것 역시 꼭두각시 인형의 안에 있었다. 아이든 어른이든, 고래 뱃속에서 뜨겁게 삶긴 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 뒤에는 어리석은 꼭두각시 짓을 그만 하고 싶다는 괴로운 자각이 있지만, 나는 그래도 피노키오가 꼭두각시 인형이 되기도 전의 그 평범한 나무토막-갑자기 떼굴떼굴 굴러서 노인을 찾아온, 말하는 그 나무토막에게 무한한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이것은 일종의 퇴행적 감정일 게 틀림없는데, "진짜 사람이 되다니, 정말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 아이 피노키오는 이제 다시는 재탄생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아이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하자면 재미가 없는 아이이고 왠지 사랑스럽지도 않다. 결국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서, 혹은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혹은 철학의 완결을 위해서 나아가지만, 그 끝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재미와 동력과 의미를 얻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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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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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작품 전체를 다 읽지 않더라도 1장만은 꼭 읽어보길. 이렇게 멋진 서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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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이탈로 칼비노 전집 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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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미들이 실제로 굴을 만들고 뚜껑 달린 집을 지을까? 거미가 집을 짓는 곳으로 가려면 아마도 환상의 세계로 통하는 오솔길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특별한 세계로 이어지는 특별한 오솔길이 말이다.  

 

나는 개정판이 나오기 전 2008년에 출판된 책으로 읽었는데, 책 뒤표지에 적힌 '아름다운 성장 이야기'라는 책 소개가 개정판에는 삭제되었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더구나 단순히 성장이야기라고 부를 수만도 없는 작품이다.

 

칼비노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과 자신의 문학관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서문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 하지만 작가의 말 없이도 작품은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이고, 내가 그 이야기를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이다. 대강 정리를 해보자면:

 

- 칼비노에 따르면, 그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이 막 종료되고 그 경험들이 문학적으로 '폭발'하던 시기였으며, 문학은 '예술적 행위이기 이전에 생래적이고 실존적이고 총체적인 행위'였다. 문학은, 요즈음 직픔들이 흔히 그렇듯이, 단순히 관념이나 개인적인 내밀한 감정에 집중하는 용도가 아니었다. 신사실주의는 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필연적으로 등장했어야 하는 최적의 표현양식이 아니었나 싶다.

 

- 칼비노는 이탈리아의 지역적 특징을 작품 속에서 사실적으로 구현하고자 했고 특히 언어를 통해 이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번역문에서는 그것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이것은 번역의 태생적인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한계를 보완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번역서를 읽는 우리 못지않게 원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 작품이 쉽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은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칼비노 왈,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어는 '집에서 이탈리아어로 말하지 않는' 사람의 이탈리아어다."라고 했으니. 그는 가능한 한 언어를 낯설게 사용함으로써 독자에게 또 그 자신에게 낯선 세계, 낯선 사고방식, 낯선 감정, 하여튼 어떤 낯선 것을 열어보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마치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처럼 말이다.

 

- 이념적인 것들, 즉 공산주의와 파시즘, 민족주의 같은 시대적 흐름은 세찼고 그 속에서 휩쓸리는 개개인들의 사정은 복잡했다.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들의 혼란 속에서 칼비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지 않겠다는,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이들의 세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외로운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 장치였다. 작가는 이 작품의 인물 킴처럼 '인간에게 큰 관심을 품고' 있었고 '모든 것의 설명은 철학적 범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움직이고 있는 세포덩어리들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에서 논리성과 확실성을 찾고 싶어' 했지만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몰려'들었던 것인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칼비노는 그 어떤 것도 해석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었다. 껄끄러운 문장들, 생소한 시대배경(작품 이해를 위해서 주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호감 가지 않는 주인공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었던 것은 작가가 말하려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고, 작가가 쉬운 답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답을 원한다.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이것은 사람의 본능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삶의 지표로 삼을만한 것을 책 속에서 찾고자 열심히 책을 판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는 혼란을 견디는 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 쉽게 동조하지 않고 혼란스러워도 참고 견디며 우리의 정신을 찬 바람에 단련시키는 것, 그것 말이다. 시대는 언제나 혼란했다. 그리고 인생 자체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그 속에서 우리의 최선은 차분하게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를 쓰는 것, 그 정도 아닐까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계속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의 세계 속으로 퇴행할 수도 없는, 주인공 핀의 모습에서 인간의 맨 얼굴을 발견한다. 그래서 마음 약한 독자로서, 작품 말미의 이 구절로 나름 위안을 삼는다. ... 핀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촌의 손, 빵처럼 커다란 그의 손을 잡고 걸었다.... '빵처럼 커다란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있다.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 손의 임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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