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발견을 향한 피아노 연습
시모어 번스타인 지음 / 음악춘추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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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타협, 변명, 속임수, 가짜 등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연습한 대로 연주하는 것이다.‘(p.319)
‘종교와 같은 심취와 어린아이 같은 정열‘로 내 앞의 무엇에 나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꼭 음악일 필요는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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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7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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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맞물리는구나, 감탄을 하며 읽었다.

결말은 나의 예상을 벗어났고,

나니아 나라를 하나의 이상향으로 간주하며 읽었던 나로서는

나니아가 멸망한다는 결말이 놀라웠다.

 

한 이야기가 죽음과 파멸로 마무리가 됨에도

나는 안도했다.

이 안도감은 무엇일까?

 

....나니아는 시작과 끝이 있었지. 그것은, 언제나 여기 이렇게 있고 앞으로도 영원할 진짜 나니아의 복사판이나 그림자에 불과해... (P.235)

 

저자는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 사상과 결합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진짜 세상의 그림자임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믿음이다.

믿음은 논박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믿을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다만, 이 세계관이 나에게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주는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 까닭은 삶이 고달프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씁씁하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그곳'이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일까?

 

또 하나 내게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신을 믿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신을 믿는지가 요체임을 저자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하느님을 믿는지, 불교의 부처님을 믿는지, 이슬람의 알라신을 믿는지는 정작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속에서 나니아는 아슬란을 믿고, 적대국 칼로르멘에서는 타슈 신을 신봉한다.

이야기 말미에서 타슈 신을 온 마음으로 믿는 한 병사(아메스)를 향해서 아슬란은 "아들아," 하고 부른다. 

아메스는 놀라서 말한다.

"슬프게도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타슈 신의 종이옵니다."

그러자 아슬란은 대답한다.

"아들아, 네가 타슈 신에게 다했던 정성은 나에게 한 것과 다름없느니라."

 

나는 이 말을,

선한 정성은 결국 향해야 할 신에게 이르게끔 되어있다는 것,

혹은

신이란 사람의 가장 선한 정신이 지향하는 바로 그것,

이라고 이해했다.

C.J.루이스의 이 철학이 당시 영국 사회에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기독교의 사상이 단순히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 이상의 더 높고 깊고 넓은 정신성과 통함을 그 사회가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닐까 싶다. 

 

주변에서 접하는 신자들의 기도, 법회, 예배, 미사 등에서 들리는 말과 생각들이 때로는 너무

편협하고 강팍해서 마음이 오히려 메말라버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은총을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는

단순한 말이 진리이기는 하나

그것 이상의 더 풍부한 이야기로 나의 마음을 적시고 싶은 갈증을 느낄 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넓디 넓은 아름다운 세게 속으로

깊디 깊은 푸른 물 속으로

자유롭게 헤엄쳐들어가는 것 같은,

해방되어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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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눈물 -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메도루마 슌이 전하는 오키나와 '전후'제로년
메도루마 슌 지음, 안행순 옮김 / 논형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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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일본에 관해서 잘 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바로 이웃한 나라이고,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서로 갈등했던 사이이며,

일본의 국민성이 우리와 매우 다르다는 것 등.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나라임에도

일본 자체의 역사에 관해서는 많이 배우지 못했다.

 

오키나와가 독립된 별개 국가였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나는 몰랐다.

그러니 오키나와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으며

오키나와인들과 본토인들의 미묘한 관계와

오키나와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알았을까.

 

메도루마 슌이라는 소설가에 관해서 먼저 알게됐고

그의 소설이 오키나와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 다음에 알게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책으로 연결됐는데,

일본이 그 나라 안에서도 대단히 왜곡되고 이율배반적인 얼굴과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알기위해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책이 좀 더 독자를 배려해서 만들어졌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무엇보다 일본 역사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고 세심한 주석 내지는 소개글이 필요했고,  

띄어쓰기가  읽기를 방해할 정도로 지나치게 무시됐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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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새로운 이해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0
앙드레 라콕.폴 리꾀르 지음, 김창주 옮김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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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가는 두 챕더를 먼저 읽었고 창세기2-3장의 분석을 읽다가 결국 포기했다. 다시 번역해야 할, 아까운 책! 역자가 전공자이니 원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고, 번역은 역자가 이해했는가와 별도로 전달이 절대 중요한 문제인데, 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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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1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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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가 1642년에 그린 탕자 그림은 26년이 흐른 1668년에 매우 다른 분위기와 구성으로 바뀐다. 헨리 나우웬의 렘브란트 해석은 말년의 이 그림을 바탕으로 한다.

 

나우웬은 성직자의 눈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깊이 읽어내는데, 렘브란트가 오랜 세월을 성경의 이 이야기에 천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선 놀랍다. 렘브란트는 탕자로서 살았고 그 값을 톡톡히 치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철저하게 삶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것 같다. 그 고통스러운 삶의 끝자락에서 렘브란트는 비로소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완전히 비워진 삶,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삶, 그 삶의 품이 바로 신의 품이 아닐까.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깨닫는 것만큼 신을 느낀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가장 최근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너그러움이었고, 가장 최근까지 내가 공감했던 것은 큰아들의 분노였다. 이 책을 읽으며 아버지의 너그러움이 이해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하는 말,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가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큰아들은 이제 결정할 일만 남았다. 계속 노여워할 것인지, 기쁨의 잔치에 함께 할 것인지.

아버지의 너그러움이 이해되고 큰아들의 분노가 근거없는 것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 것은 내가 나이들었다는 사실의 반증인가. 어쨌든 나우웬의 글을 더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아마도 공감의 폭이 적었을 듯 싶다.

 

나우웬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는 <탕자의 귀향>과 같은 시기에 쓰여진 책인데, 그 즈음 나우웬은 큰 심리적 충격을 겪었던 모양이다. 이 두 책은 같은 경험에서 나온 두 가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글 모두 나우웬의 자기 고백이다.

 

매우 현명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성직자의 고백은 민망하리만치 노골적이다. 이 고매한 성직자가 나처럼 온갖 잡생각들과 유치한 비교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와 근거없는 망상 같은 감정들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라웠고, 또 한편으로는 회의도 들었다.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편협하고 부족하다면 신을 믿기에 앞서 마음공부가 먼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가 마음공부이고 신을 닮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마음공부이니 이 의심은 곧 버렸다.  

 

무례하게 재산을 요구하고 매정하게 그것을 들고 나가 다 써버린 아들, 가족과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외면해서 철저하게 자신을 배신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늙고 눈 먼 아버지는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탕자는 민둥머리로 맨발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데,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자궁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본원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큰아들은 엄격하고 완고한 도덕주의자며 '왜 죄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느냐'고 예수님께 따졌던 바리새인이고 '바른' 사람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그 도덕의 뒷면은 분노임을... 큰아들은 기쁨을 느낄 수 없어서, 어쩌면 탕자보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삶은 매일이 잔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탕자 이야기의 요체라고 나는 이해했다. 이것은 나우웬이 긴 고통의 끝에서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기도 하지만 나우웬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다른 게 마땅하다. 그러나 나우웬의 글을 통해서 탕자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일까?

기쁨은 작은 반짝임,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아주 귀한 것.

마음 안에 기쁨이 반짝일 수 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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