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스프링버드 (스프링버드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01 May 2026 04:24:36 +0900</lastBuildDate><image><title>스프링버드</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스프링버드</description></image><item><author>스프링버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판타지의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135752</link><pubDate>Sat, 07 Mar 2026 15: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13575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55753&TPaperId=17135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739/65/coveroff/893645575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161729&TPaperId=17135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32/11/coveroff/s76263680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82925&TPaperId=17135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47/40/coveroff/89527829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어린이들은 상상의 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나도 꽤 공상을 하는 어린이였지만 상상의 친구를 만든 기억은 없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큰 기쁨과 위로를 선사받았다.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해 만든 문학이나 영화를 보면 상상의 친구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은데, 그런 걸 보면 아이들에게는 평범한 현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욕구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혹은 현실이 아이들에게 너무 버거워서 그들을 도와줄 보조적 수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nbsp;&nbsp;  &nbsp;   <br>  &nbsp;    &nbsp;  <br><br><br><br><br><br><br><br><br>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토끼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소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외로운 아이다. 텔레비전도 보고 책과 장난감도 많고 가끔 엄마랑 놀이터도 가고 외식도 하지만, 그럴 때는 정말 신이 나지만, 그러고 나면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 소녀는 거친 현실 세상 속에서 너무나 작고 외로워 보인다. &nbsp;  &nbsp;  하지만 소녀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래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 친구 이름이 알도다. 알도는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찾아와 도와주는데, 아이들이 소녀를 발로 차고 때렸을 때도 알도가 나타나서 걔네들을 쫓아줬고 무서운 꿈을 꿨을 때도 책을 들고 와서 읽어줬다. 다행히 소녀는 알도와만 놀지 않고 알도를 까맣게 잊고 지내는 날도 있다. 그런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그것도 알도 덕분인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된다. 혼자 지내는 버거운 하루하루를 알도가 같이 있어줬기에 소녀는 조금씩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는 여전히 어리고 여리다. 그래서 소녀에게는 여전히 알도가 필요하고, 여전히 알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nbsp;  &nbsp;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br>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nbsp;  <br><br>  &nbsp;  여기에 외로운 아이가 또 있다. 그림책이 아니라 글밥이 꽤 되는 저학년 동화인데, 아이들용이라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잘 쓰인 판타지 문학이다.&nbsp;&nbsp;  &nbsp;  &nbsp;&nbsp; <br>  &nbsp;    &nbsp;  <br><br><br><br><br><br><br><br><br><br><br><br>주인공 아이는 햇볕도 안 드는 지하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야 돌아오고 친구들은 아이가 다리를 절뚝거린다고 놀린다. 아이는 학교 준비물을 잘 챙겨가지 않아서 선생님한테 자주 혼이 나고 주인집 개는 너무 무섭다. 아이는 스스로를 '꼬마 여자애'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꼬마'와 '여자'애가 약점이라고 단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아이들 세계에서도 여자가 약점이 되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야기는 이 두 약점을 약점이 아니라 선언하듯, 주인공 아이를 여왕님이 아닌 임금님으로 등장시킨다. 일단은 아이의 이름이 임금님이다. 성이 '임'이고 이름이 '금님'이다.   &nbsp;  금님이는 빈 집에서 외롭고 심심하고 슬프다.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서 자주 한숨을 쉬곤 해서 엄마에게 타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날 중 어느 하루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금님이는 평소처럼 혼자 빈 집에서 어두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하자고 마음을 먹고 다리를 쭉 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발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nbsp;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두 발 사이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두 발 사이에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건 바로 호리병이었어요!"  &nbsp;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그다음에 벌어졌다. 호리병 안에서 개미만큼 작은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빙 둘러서 에워싸고는 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임금님이세요?"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름이 임금님이니까. 작은 사람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다고 기뻐했다.  &nbsp;  "오, 세상에!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네요. 저희들은 임금님의 백성이에요."  &nbsp;  외롭고 불행한 아이에게 나타난 판타지의 세계다. 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이렇게 심심하고 외롭고 불행하고 슬플 때 열린다. 작은 사람들은 판타지 문학의 중요한 모티브인데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들을 아이의 두 발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호리병 속에서 나오게 했다. (두 발을 닿지 않을 거리로 가까이 대보면 꼭 호리병 같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이제 이름만 아니라 진짜 임금님이 된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보살피는 임금님 말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에게 자신들이 몹시 굶주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때 마침 아이도 배가 고픈 참이었다. 엄마 없이 혼자 있을 때 아이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기 때문이다. 금님이는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밥을 차려주었고 작은 사람들이 말했다. "임금님이 드셔야 우리도 먹을 수 있어요." 하고. 그래서 금님이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nbsp;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아이는 좋은 임금님이 되는 법을 배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이 행복해야 백성이 행복하고 임금님이 불행하면 백성도 함께 불행하다고 말했고, 아이에게 지금 왜 불행한지를 물었다. 아이는 자신의 결핍을 돌아본다. &nbsp;&nbsp;&nbsp;  &nbsp;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면 기쁘고 흐뭇하시겠어요? 어떤 일이 생기기를 원하세요?"  &nbsp;  금님이가 행복해지려면 결핍이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무엇이 결핍인지, 결핍을 직면하는 일이다. 그건 아이 어른 누구에게나 그럴 테다. 아이는 진짜 임금님처럼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신 곁에서 든든하게 보살펴주는 하인들이 있기를 바랐다. 아이는 다리를 절뚝거리지 않고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아이는 수염이 까칠까칠하고 목말을 태워주고 휘파람을 부는 아빠를 갖고 싶었고, 팔짱을 끼는 친구를 원했다. 주인집 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용기도.  &nbsp;  이 모든 현실 인식과 욕구 충족이 두 발 사이에서 생겨난 호리병 속에서 나온 작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다 상상 속에서.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결핍감이 채워지면 나면 마음이 좀 위로받지 않을까? 위로를 받으면 자연히 힘이 나는 법이다. 실제로 금님이는 백성들에게 밥을 차려주면서 자기도 엄마가 해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고, 무서운 개를 만났을 때 백성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보았다. 친구들이 놀릴 때도 백성들을 생각해서 당당해져 보았다. 그렇게 해서 금님이의 현실이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그건 금님이가 현실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나간 덕분이기도 하다. 아동문학 평론가 김서정은 이 상호작용을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의 따뜻하면서도 힘찬 포옹'이라고 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nbsp;    &nbsp;  <br>여기에 임금님처럼 다리가 아픈 아이가 또 있다. 이 아이는 금님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다리가 아파서 일 년째 침대에 누워만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영영 못 걷게 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예란. 예란은 엄마 아빠가 자신의 다리를 두고 하는 얘기를 몰래 들었던 날, 판타지의 세계를 만난다.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는 주인공이 판타지의 세계로 도망쳤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판타지의 세계가 예란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아이의 무의식이 혹은 아이의 영혼이 아이를 감싸주려 나섰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본다.  &nbsp;  &nbsp;&nbsp; <br>  &nbsp;    &nbsp;  <br><br><br><br><br><br><br><br><br><br>그 충격적이고 절망스러웠던 날, 예란 앞에 어스름 나라의 백합줄기 아저씨가 찾아왔다. 이층 집의 닫힌 창문으로 불쑥 나타난 작은 아저씨는 예란을 어스름 나라로 데려간다. 어스름 나라는 '허깨비 나라'라고도 불린다는 걸 예란은 알고 있다. 자신도 그게 상상인지 안다는 얘기다.   &nbsp;  어스름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다리가 아파도 걷고 날고 춤을 출 수 있다. 주스를 뿌리며 장난을 쳐도 괜찮고 전차도 운전할 수 있다. 예란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어려움과 불가능과 제약을 벗어난 세계를 예란은 꿈꾼다. 그런 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세계를. &nbsp;  &nbsp;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nbsp;  &lt;알도&gt;의 존 버닝햄과 &lt;나는 임금님이에요&gt;의 이미현, &lt;어스름 나라에서&gt;의 린드그렌은 아이를 판타지 속에 얼마나 머물게 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아이로 하여금 판타지 세계를 완전히 떠나게 하지는 않는다.&nbsp; &nbsp;&nbsp;  &nbsp;  임금님이 어려움을 하나씩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서 현실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그러니까 바쁜 엄마를 도와 설거지와 청소도 해놓고 학교 준비물도 챙기고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느라 바빠서 백성들을 잘 만나지 못할 즈음, 백성들이 임금님에게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임금님 덕분에 자신들도 평화롭고 행복해졌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늘 임금님 곁에 있다고, 그러니 언제나 저희를 잊지 말라고 얘기한다.   &nbsp;  백성들은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호리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호리병은 점점 연해지다가 투명하게 변하더니 마침내 환한 빛이 되었어요. <br> 그런데 그 환한 빛은 내 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요. 발이 따뜻해지고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br> 빛은 남김없이 내 양쪽 발로 빨려 들어가 다리를 타고 배와 가슴으로 가더니 머리까지 가득 차올랐어요. <br> 내 몸이 빛으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요.<br> 나는 가만히 내 몸을 감싸 안았어요. <br> 빛이 된 백성들이 내 안에 함께 있는 것만 같았지요. 백성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br> "우리는 늘 임금님 곁에 있답니다."  &nbsp;  린드그렌 작가의 백합줄기 아저씨는 어스름 나라 여행을 끝내고 헤어질 때면,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임금님의 작은 사람들과 다르게 언제나 이렇게 인사한다.  &nbsp;  "내일 어스름 녘에 다시 만나자."  &nbsp;  예란은 영영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서 그랬을까? 예란은 침대에서 보낸 일 년을 잘 버틴 아이다. 그런데 앞으로 더 힘든 시간이 예란 앞에 놓여있는 것 같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단해질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단순하게 보자면, 아이는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없는 매일의 낮을 견뎌낸 보상을 어스름 녘에 누릴 권리가 있다고도 말하고 싶다. 린드그렌 작가는 아이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작품을 포함해서 몇몇 작품이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판타지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 &lt;그리운 순난앵&gt;이란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현실로 돌아오는 문을 아예 닫아버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 안에서 위로받아야 한다는 듯이. 때가 되면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믿는 것 같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언제나 지지하고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nbsp;  <br><br>일본의 정신분석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판타지를 '영혼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어느 쪽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 또는 몸과 마음을 통합하여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어려움에 놓인 아이들, 그러니까 알도의 소녀와 임금님과 예란 같은 아이들이 힘을 내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건 그들의 영혼 덕분일 것이라고 하야오는 말한다. 영혼이 아이들을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영혼이 아이들과 또 우리 어른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반대로, 영혼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판타지가 마음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nbsp; &nbsp;  &nbsp;  "영혼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영혼은 늘 우리 주위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판타지는 그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nbsp;- 가와이 하야오  &nbsp;  아이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환상 속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른의 세계는 거칠고 무정할 때가 많고, 아이들끼리의 세계는 더 야만적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장애와 위험과 갈등을 판타지 세계 속에서 살아내 보는 게 필요하다. 상상의 존재에게 위로받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망쳐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수 있다. 그럭저럭, 잘 하든 못 하든.&nbsp;&nbsp;  &nbsp;  그런데 나는 똑같은 말을 문학 일반에도 대입하고 싶다. 특히 좋은 소설 속에서 나는, 하야오 식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풀려난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라고 나는 말하게 된다. 문학은 그것이 판타지든 사실주의든 실존주의든 SF든 다 통틀어서 판타지가 아닐까. 어차피 현실은 아니라는 점에서. 회화가 구상과 추상으로 더는 나뉘지 않고 구상이 곧 추상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말이다. 문학을 읽는 우리는 발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걸친 채 두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르겠다. 현실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은연 중에 모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nbsp;    &nbsp;    &nbsp;  인용 자료그리운 순난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홍재웅 옮김, 열린어린이, 2010.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김서정, (주)학교도서관저널, 2021.판타지 책을 읽는다, 가와이 하야오,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2006.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47/40/cover150/89527829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9474073</link></image></item><item><author>스프링버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영원의 시간과 유년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091527</link><pubDate>Sat, 14 Feb 2026 11: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09152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1320&TPaperId=170915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49/13/coveroff/893291132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180111&TPaperId=170915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2/20/coveroff/894918011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826958&TPaperId=170915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190/12/coveroff/895582695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며칠 전 기사에 이금이 작가가 소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금이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게 더 반가웠던 건 &lt;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gt;의 글 작가 티모테 드 퐁벨도 최종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그럴 줄 알았지! 그의 이야기 세계와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nbsp;&nbsp;&nbsp;<br> <br><br><br><br><br><br><br><br><br>이 그림책이 '작품'이 된 건 티모테 드 퐁벨의 글에 이렌 보나시나가 그림으로 완벽하게 화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펜으로 그린 헐렁한 선, 수채화의 맑은 색감, 넉넉한 여백이 아이의 자유로운 여름 방학을 더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 가로 34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의 길고 큰 판형도 신의 한 수다. 책을 펼치는 순간, 화폭은 가로가 2배로 확장되면서 이야기 공간이 독자를 에워싼다. 100호가 넘는 대형 그림이 감상자에게 주는 효과, 아이맥스 영화관이 관객들에게 주는 바로 그 효과를 이 그림책도 노린 것이다. 글과 그림과 판형이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무한한 자유, 빛나는 자유다. &nbsp;&nbsp;&nbsp;&nbsp;&nbsp;<br>여름이 되었다. 열두어 살 무렵의 남자아이는 집을 떠나 혼자 기차를 타고 삼촌 집으로 간다. 아이는 해마다 여름 방학을 삼촌 집에서 보내는 것 같다. 삼촌의 집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있고, 삼촌은 평생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집은 잡동사니로 꽉 차있다. 삼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카를 위해 책을 한 무더기 장만해 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그득한 집에서 보내는 담백한 시간은 아이에게 자유를 허용한다. 아이는 무한대로 펼쳐지는 자유를 얻는다.&nbsp; &nbsp;<br>"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여름날을 생각했다. <br>너무나 아득해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여름날들."<br><br><br>아이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동네와 그 너머를 탐험한다. 삼촌의 집을 중심으로 아이는 나선을 그리면서 점점 더 멀리 나가본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고 작가는 묘사한다. 이것은 영원의 이미지다. <br>그러던 어느 날, 밀 수확으로 길이 막혀서 아이를 나선형의 행로 밖으로 이탈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는 길을 잃고 낯선 모랫길로 들어간다. 길을 따라 넘어간 모래 언덕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가슴을 벅차 오르게 만드는 드넓은 바다가 출렁대는 세상, 그리고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 에스더 앤더슨이 있는 세상이.<br>"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br>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이 떨렸다.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불러본다. 다음 날은 비가 왔고, 비가 그친 그 다음날 아이는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바다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만나려고. 거기로 가려면 길을 잃어야 했다.&nbsp;&nbsp;<br>"어떻게 해야 길을 잃을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br>느슨한 탐색과 자유가 달팽이 집처럼 빙빙 나선을 그리고 이어진다. 어린아이는 안전한 보호자의 품 안에서 마음껏 자유롭다.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았던 달팽이 집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이는 바깥세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은 충격이어서 아이는 입이 얼어붙고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 기꺼이 길을 잃을 줄 안다. <br><br>어릴 때 나는 때로 심심했다. 심심하다는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으라면 딱히 한 단어로는 안 될 것 같다. 어린 나는 심심한 그 시간이 버거웠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이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낮 시간, 무한하게 풀려나가는 실타래처럼 지루했던 시간들, 눅진하게 쌓여 어린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무료한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nbsp;<br>작은 언덕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우리 집에는 영원처럼 길고 긴 낮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루에서 마주 보이는 건너편의 야트막한 초록 언덕도 정적이었다. 앞마당에는 칸나가 뒷마당에서는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만 식물들은 조용했다. 온 집이 죽은 듯이 고요했다. 뒷마당 광의 옥상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도로에는 장난감처럼 작은 차들이 달리고 하늘에는 푸름이 한가득, 흰 구름이 무료하게 모양을 바꾸며 떠 있었다. 그 모든 정적과 고요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진하고 거대했다. 해는 하늘 가운데 박아놓은 듯 기울지 않았고 언니며 오빠, 아버지가 돌아오고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집이 북적대며 활기가 도는 저녁 시간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br>어린 나는 &lt;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gt;의 아이처럼 자전거를 타고 길을 빙빙 휘감으며 조금씩 더 멀리멀리 나아갈 생각을 왜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장소의 탓도 없지 않았을 듯싶다. 나는 익숙한 집에 있었고, 저 아이는 집과 부모를 떠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가득한 집에서 활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사는 삼촌에게 갔으니까. 낯설면서도 안전한 그곳에는 발견과 해방감이 충만했다! &nbsp;&nbsp;&nbsp;&nbsp;<br><br>어릴 때의 나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 파스칼레.<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프랑스 소설가 앙리 보스코가 백 년도 전에 쓴 &lt;아이와 강&gt;의 주인공 아이는 시골의 들판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조그만 소작인 농가에 살고 있다. 밭과 나무 울타리, 식물, 멀리 떨어진 두셋의 농가 밖에 없는 단조로운 풍경에 갇혀서 아이는 쓸쓸하다. 그 풍경 너머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걸 파스칼레는 들어서 알고 있다. 강은 여름철이면 말라 버리지만 봄철에 알프스의 눈이 녹을 때면 큰 강으로 변해서 엄마 아빠는 파스칼레에게 절대로 강가로 가지 말라고 다짐시킨다. 강에는 사람이 빠지는 죽음의 구멍들이 있고 갈대숲에는 뱀이, 강가에는 위험한 집시들이 산다고. 파스칼레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료한 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딴 데 신경을 판 사이, 홀린 듯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br>"조그만 오솔길들이 속삭이듯 나를 이끌었다. <br>'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 보는 거야. 어때? 첫 번째 모퉁이 길이 여기서 멀지 않아? 오베핀느 꽃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된단다.' <br>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br>새들이 가득히 올라앉고, 푸른 열매가 잔뜩 달린 두 줄의 나무들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진 그 오솔길로 일단 발걸음이 내디뎌지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걸음을 멈출 수 있었겠는가?"<br>아이는 결국 강까지 걸어갔고 이끼가 덮인 부드러운 흙바닥에서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친척 할머니는 아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br>"야, 이 떠돌이야! 바람둥이야!"<br>할머니는 아이가 다시 집을 나가 강으로 갈까 봐 사흘 동안 감시했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다시 자기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다시 몰래 집을 빠져나가 곧장 강으로 갔다. 강은 너무나 멋졌다. 파스칼레는 강기슭을 따라서 걷다가 말뚝에 매인 채 흔들리고 있는 나룻배를 발견한다.&nbsp;&nbsp;<br>"배에는 노가 없었다. 삼으로 꼬아 만든 나룻배는 다 헐어빠진 밧줄로 비끄러매어져 있었다. 물이 어찌나 잔잔한지 밧줄은 강물 속에 가만히 잠겨 있었다. 이 고요함과 아늑한 분위기가 곧 내 마음을 끌어갔다. 나는 배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잠깐 망설이다가 발을 뱃전에 얹어 놓았다."<br>어떻게 해야 길을 잃는지 알았던 티모데 드 퐁벨의 남자아이처럼 앙리 보스코의 아이도 기꺼이 길을 잃는다. 절대 가지 말라는 강으로 가서 절대 타서는 안 될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퐁벨이 묘사하듯,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졌다. 배를 묶어놓았던 밧줄이 풀리고 표류를 하면서 파스칼레는 생전 가보지 않았던 강 중앙의 섬 모래밭에 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적이고 매혹적인 소년 가쪼를 만나 위험천만하고 가슴 뛰는 모험을 한다.&nbsp; &nbsp;<br>어린아이의 시간은 영원처럼 펼쳐지고, 나뉠 수 없는 시간임에도 영원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길을 잃거나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보는 거야.'라는 오솔길의 속삭임을 들음으로써. 퐁벨의 묘사를 다시 빌리자면, 영원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br>마크 트웨인의 &lt;허클베리 핀의 모험&gt;은 훨씬 파격적이며 강력하고 풍부한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 퐁벨의 아이와 보스코의 아이의 모험은 문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는 대단히 반문명적이며 냉소적이다. 영원 같은 여름 방학에 바다와 첫사랑을 만나고, 오솔길의 유혹에 넘어가 어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가 집시들이 사는 위험한 강을 향해 갔던 아이들이 이제 허클베리에 이르러서는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며 어른들의 세계, 문명 세계와 정면으로 대결한다.<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lt;허클베리 핀의 모험&gt;은&nbsp;&lt;톰 소여의 모험&gt;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나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라는 허클베리 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허클베리는 술에 취해서 아이를 때리는 아빠 밑에서 방치된 채 숲에서 살다가 어느 날 아빠로 추정되는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한 과부댁의 양자로 들어간다. 과부는 허클베리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나 허클베리는 교양을 위한 모든 규범이 견딜 수 없다. 집 안에서 지내고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 식탁 예절을 지키는 것, 성경을 읽고 학교를 다니는 것 등등. 허클베리는 담배를 피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으며,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또 다른 아이 톰 소여와 갱단을 만들 비밀스러운 작당을 하는 아이다. 허클베리가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배우고 구구단을 육 단까지 외울 수 있었던 건, 다시 말해서 학교를 참을 만하게 여기게 됐던 건 선생의 구타 덕분이었는데, 이 대목은 이른바 교양을 자랑하는 서구 문명의 위선을 향한 마크 트웨인의 조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br>"학교가 견딜 수 없이 싫어질 때에는 땡땡이쳤고, 그다음 날 얻어맞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br>그래서 학교에 가면 갈수록 학교 가는 일이 점점 쉬워지게 되었죠."<br>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악당 아빠가 돌아왔다. 허클베리는 다시 숲에서 아빠와 함께 살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강에서 표류하는 카누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당연히 모험으로 이어진다. 허클베리는 카누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도망을 치고, 동행하는 친구도 생겼다.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흑인 노예 짐이었다. 도망 노예를 숨겨주는 건 위법이지만 허클베리는 짐을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줄 안다.&nbsp;&nbsp;<br>도망치는 이 두 사람은 밤이면 배로 이동하고 낮이면 강어귀에 배를 숨겨놓고 마을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목격한다. 교양 있는 자들의 위선, 인간의 잔인하고 어리석은 본성, 그것이 빚어내는 비극, 또 인간의 선함까지.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을 통해서 노예제도 또한 통렬하게 비판한다. <br>허클베리의 모험 이야기는 솔직하고 명민하며 거칠면서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강을 따라 흘러간다. 한 강변 마을에 들러 이런 일을 겪고 다른 강변 마을에서 저런 일을 겪으면서 허클베리와 짐은 줄곧 강으로 돌아오고 강으로 도망친다. 인간들의 모순적인 사회에서 자연의 너른 품으로. 인간은 이성이 있으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신을 믿으나 신을 배반하며 선하나 동시에 악을 행한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있다. 인간의 희비극은 육지에서 벌어지고 강으로도 흘러들지만 강은 그저 무심하다.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가 있는 곳, 강에서 안심한다. &nbsp;&nbsp;&nbsp;&nbsp;<br>"어느 곳에서도 아무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요-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br>다만 어쩌다 먹개구리가 울어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br>물 위를 저 끝까지 바라다보고 있으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선 같은 것뿐이었습니다-그것은 저쪽 강둑에 있는 숲이었지요-그 밖엔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br>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br>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br>그다음 강이 저 멀리서 뿌옇게 밝아져 검은색은 찾아볼 수 없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br><br>무한하게 이어지는 낮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어린 나도 모험을 꿈꿨다. 모험은 골목길과 산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책과 상상 속에서 이뤄졌다. 꽝꽝 언 강을 따라 스케이트를 타고 내려오는 북유럽 동화를 읽으며 나도 주인공처럼 뺨이 얼얼해진 채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열차 도둑을 잡는 소년을 따라가며 가슴을 졸였다. 모험 이야기들은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다. 소설 속 누구처럼 나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 진짜 엄마가 있어서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고, 내가 죽어서 식구들이 뒤늦게 후회하고 미안해하며 울었으면 좋겠고, 뭐 그런 상상을 하며 청승을 떨었다. 나는 썩 활기 넘치는 아이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장 숙제부터 하고 노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그래서인가 보다. 모험과 일탈에 여전히 은근하게 마음이 기운다.<br>어린 시절의 그 많던 시간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어릴 때는 영원을 알았다. 영원의 느낌을. 그런데 나이가 들며 그 느낌이 슬며시 사라지고 그 대신 단락 단락 끊긴 시간들을 살게 되었다. 풀린 실타래 같던 시간의 그 지루한 느낌들은 잊어갔다. 허공으로 끝간 데 없이 펴지는 광대한 시간들에 대한 기미를 어린 나는 느꼈으나 지금의 나는 관념으로만 이해한다. <br>우주의 시간은 영원하나 인간의 시간은 유년 청년 장년 노년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하고 뻔한 전개를 따라간다. 영원은 곧 무한이다. 우리는 어릴 적 영원을 살았다.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이야기들은 영원을 글로써 잡아놓았다. 그래서 이야기 안에는 영원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영원, 마음과 꿈과 상상에서만 가능한 영원의 시간이 이야기 속에서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nbsp;<br><br><br><br><br>"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 가운데에는 집이 있었다. 나는 나선형 원을 그리면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까지 가려고 애썼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밀밭에서 수확이 한창이라 교차로를 지날 수 없었다. 두 시간이나 더 멀리 돌아 자전거를 타야 했다. 소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잡초 사이로 난 모랫길이 하늘로 향했다. 바퀴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 와 본 곳이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br><br><br style="color: rgb(51, 51, 51); font-size: 14.6667px; letter-spacing: 0.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190/12/cover150/89558269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190129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