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스프링버드 (스프링버드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23 May 2026 14:32:57 +0900</lastBuildDate><image><title>스프링버드</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스프링버드</description></image><item><author>스프링버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우리가 배워야 할 세상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291897</link><pubDate>Fri, 22 May 2026 19: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29189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635172&TPaperId=172918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748/96/coveroff/k39263517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18012X&TPaperId=172918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84/coveroff/894918012x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37003&TPaperId=172918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4/89/coveroff/890113700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시각장애가 있는 어린 남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대단히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는 선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nbsp;&nbsp;&nbsp;<br>맹학교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던 날, 4학년 그 아이는 손에 작은 기계 하나를 들고 왔다. 글을 점자로 변환해 주는 점자단말기였는데, 음성 기능도 있어서 오디오북 역할도 했다. 기계 상단에 달린 작은 화면에는 글자가 떠서 그걸 통해 나는 아이와 글을 공유할 수 있었다. &nbsp;<br>나와 아이를 이어주는 건 화면의 글도 있었지만 당연히 서로 주고받는 말, 대화였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음성과 느낌으로도 우리는 연결돼 있었다. 서로의 미묘한 감정은 시각 기능과는 별개로 전달된다. 음성의 음조나 속도, 웃음의 다양한 변주들이 대화의 내용과 어떨 때는 합치되고 어떨 때는 부조화를 이뤘다. 마치 다성음악처럼 전혀 화음을 이루지 못한 채 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사람의 맨얼굴이 더 잘 보이는 법이어서 눈이 보이지 않은 아이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무안할 때가 많았다. <br>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난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는데 그즈음에는 명암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약하게 유지되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 체육관에서도 몸을 구르며 뛰어논다고 했다. 체육시간이 참 좋다고 아이는 말했다. 책 읽기도 좋아해서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던 참이고 자연스럽게 국어와 영어도 재밌어했다. 수학이 어렵다고 했지만, 활짝 웃는 명랑한 아이의 모습은 몇 가지 힘들고 싫은 것 빼고는 세상 모든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와 만날 때 아이는 싱싱하고 푸릇했다. <br>그러나 미래의 꿈이 비행사라는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이와 걸을 때 어떻게 방향을 인도해야 하는지 몰라서 망설였다. 영어로 길 묻기 놀이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공간을 이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밥을 먹을 때 반찬을 고를 수 없다는 것도, 학교에서 집까지 너무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아주 뒤늦게야 알았다.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집에 데려왔을 때 아이가 여기저기 가구에 부딪히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몸 둘 바를 몰랐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내가 여전히 진부하디 진부한 조언을 쏟아냈다는 사실이 뒤돌아서니 명료하게 보여서 낯이 뜨거웠다. 한 마디로, 나는 하늘 아래 이렇게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과거에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언니가 동생 얘기를 한다. 자기에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동생이 있고, 그런 동생은 드물고 특별하다고. 이 동생은 피아노를 칠 줄 알고 피아노가 우릉우릉 울리는 느낌을 좋아하지만 노래를 부를 순 없다. 동생은 춤도 추고 뛰고 구르기를 좋아하지만 조심하라는 외침을 듣지는 못한다. 언니와 동생은 사슴을 뒤쫓는 놀이도 하는데, 언니는 사슴의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동생은 언니 뒤를 밟으며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면서 사슴 자취를 찾는다. 동생은 입술 읽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웠지만 발음이 분명하지 않아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은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고, 동생은 언니의 마음을 정확히 읽기 위해서 손가락과 입술만이 아니라 언니의 눈빛까지 들여다보길 원한다. &nbsp;&nbsp;&nbsp;<br>아이들은 직설적으로 묻는다. "소리를 못 들으면 귀가 아프니?" 그러면 언니는 대답해 준다. "아니, 귀는 안 아파. 하지만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않을 때, 마음이 아프단다." 동생은 귀가 들리는 사람들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기도 하다. &nbsp;<br>"방 저쪽에 있는 내 동생이 나를 보게 하려면, 발을 쾅쾅 구르거나 손을 흔들어요. 그 애 옆으로 가서 팔에 손을 올리든지요. 내 동생은 발 구르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손 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손 흔드는 걸 힐끗 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내가 등 뒤로 가서 이름을 부르면, 그 애는 내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표지의 저 아이의 이름은 히르벨이다. 히르벨은 시립 아동 보호소에서 살고, 그곳 아이들은 모두들 히르벨을 아주 못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히르벨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히르벨은 병에 걸린 아이였으니까. <br>아무도 히르벨의 병명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히르벨이 태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이 히르벨을 엄마 몸에서 꺼내다가 집게로 머리를 잘못 건드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히르벨은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큰 아이들은 히르벨이 머리가 약간 돌았다고 말했다. 히르벨의 엄마는 히르벨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아서, 가끔씩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 든 큰 봉지를 들고 찾아왔을 뿐이다. 그녀는 금방 다시 오겠노라고 히르벨에게 약속했지만 다시 두 손에 사탕과 초콜릿을 잔뜩 들고 찾아온 건 세 달이나 지나서였다. 히르벨은 엄마가 다녀간 다음부터 다시 찾아올 때까지 세 달 동안 내내 안달을 하며 엄마를 기다렸다.<br>히르벨은 병에 걸렸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도 알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은 수시로 히르벨을 괴롭혔고 귀도 아팠다. 종종 어지럼증에 시달렸으며 배도 아팠다. 사실 히르벨이 아프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러나 히르벨은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 있는 한, 두통이 너무 심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만 아니라면, 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히르벨은 두통이 너무나 심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방벽에다 머리를 짓찧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히르벨을 맡았던 위탁 가정의 양아버지는 그걸 보고는 그 아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br>거의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 보고 히르벨을 오해했지만 히르벨을 세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히르벨이 매우 영리하며 선량하고 순수한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한 번은 보호소에서 소풍을 나갔다가 히르벨이 일행에서 떨어져 양 떼 속에 갇힌 적이 있었다. 히르벨은 양들과 함께 밤을 보냈는데, 양치기가 히르벨을 발견하고 보호소로 데려왔다. 양치기는 말했다.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귀여운 녀석이에요. 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어디 그 애 탓이겠습니까? 도시애들이란 게 다 그런 걸요." 아저씨는 히르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언제라도 놀러 오고 싶으면 와도 된다."<br>사람들은 히르벨에게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는 아이라고 항상 말했다. 하지만 히르벨은 머리가 아주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단지 배우는 게 힘들었을 뿐이다... 히르벨이 배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히르벨은 아동 보호소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하는 검사에 나오는 그림들도 다 외우고 있었다. 히르벨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피할 줄도 알았으며,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에 맞서 싸우는 법도 알았다. 또 머리가 아파도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법도 배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히르벨이 배운 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건 바로 아동 보호소와 병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혼나거나 매 맞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히르벨은 그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작품 중에서 인용<br>히르벨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며 말을 잘 하지 못했지만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목소리가 맑고 투명했다. 한 번 들은 노래는 절대 잊지 않았다.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 없이 부르는 히르벨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 순간에 사람들 안에서 깨어난 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혹시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보편적 사랑은 아니었을까. &nbsp;&nbsp;&nbsp;&nbsp;&nbsp;&nbsp;<br> <br><br><br><br><br><br><br><br><br><br><br>스즈는 자폐증이 있다. 스즈의 어머니는 딸이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유치원 친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종이 연극 그림책을 자비로 만들어 아이들 앞에서 낭독했는데, 그 작품이 출판사를 통해 그림책이 되어 나왔다. <br>어머니는 자폐를 앓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스즈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 준다.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있고 운동이나 동작이 느리다는 것, 기억과 정보처리 구조가 달라서 뇌의 정보들이 시간 순서 없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갑자기 울거나 웃을 수 있다는 것, 마음의 안정을 취하거나 즐기려고 하는 반복적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을 알려준다. 특히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소리와 빛, 냄새, 맛, 피부 자극으로 들어오는 감각에 과민하다는 부분도 유념할 만하다. 그래서 귀를 막거나 이어폰을 끼기도 하고, 감각 과민과 체온 조절을 못하는 불쾌감 때문에 소리를 지르거나 자해나 가해 행위를 하고 패닉에 빠지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뇌의 문제이다. <br>"스즈의 뇌는 한가운데 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조금 다르게 작동해서 "삐잇삐, 삐이이이이"하고 여러분과 다른 명령을 내릴 때가 있대요."<br>스즈의 어머니는 스즈를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헤어져도 스즈의 뇌에는 그들과의 추억이 가득하다고. 갑자기 그 기억이 표면으로 떠오르면 스즈가 기분이 좋아져서 웃을 거라고. 우연히 만나면 몰라볼지 모르지만 함께 했던 시간들을 뇌의 어딘가에 분명히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얘기할 거라고 말이다. "고마워! 너희들과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너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br>스즈의 어머니는 유치원의 친구들을 '어린 이해자'로 호칭했다. 그림책 후반부에 덧붙인 설명글에서 들려주는 일화는 아이들이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느 날 유치원에 등원해서 어머니가 사물함에 스즈의 짐을 넣고 있는데 스즈가 화내는 소리가 들렸고 그런데 그 소리가 금방 그치기에 어린이집 마당을 내다보니 친구들이 스즈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스즈는 무표정해 보였지만 눈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친구들도 활짝 웃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너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규범에 대한 지식과 가치관, 자아 개념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두터운 벽을 세우는 일이기도 해서 너그러움은 절대 들이지 않는 우물처럼 편협하고 좁은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nbsp;&nbsp;<br>내가 사는 하늘 아래 참으로 많은 다른 세상들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하늘을 하나씩 이고 있다. 내 하늘이 무너질 때 다른 사람들의 하늘이 멀쩡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내 머리 위의 저 하늘이 내가 이고 있던 하늘이었을 뿐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단지 장애만 아니라 세상사 모든 고통과 불행이 각자의 하늘 날씨를 바꾼다. 그렇게 해서 흐린 하늘이 있고, 무너지는 하늘이 있고, 천둥과 번개와 폭우가 치는 하늘이 생긴다.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 같다. <br>그러나 유난히 더 요동치는 하늘이 있다. 그런 하늘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잘 모르며, 모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해하고, 불편해하며, 종종 무례를 범한다. 우리는 비슷하며 또한 비슷하지 않아서, 어떤 삶의 양태는 특별히 더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나의 하늘 옆에 다른 하늘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면, 스즈 어머니가 말하는 어린 이해자처럼 너그러운 이해자가 되려고 애써 본다면, 나의 하늘이 맑고 투명해도 누군가의 하늘에서는 비바람이 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가 이고 있는 하늘이 더 가벼워지고 우리 모두를 두르고 있는 하늘이 경계 없이 무한하게 확장되지 않을까 싶다. &nbsp;&nbsp;&nbsp;<br><br><br><br><br><br><br><br><br><br><br><br><br style="color: rgb(51, 51, 51); font-size: 14.6667px; letter-spacing: 0.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4/89/cover150/890113700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248998</link></image></item><item><author>스프링버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나무의 말을 듣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273767</link><pubDate>Wed, 13 May 2026 11: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27376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8699&TPaperId=172737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6/coveroff/893647869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이른 봄, 작가는 나무 시장에서 앙상하고 구부정한 나무 한 그루를 데려왔다. 과실수도 아니고 꽃이 예쁜 벚나무도 아니어서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못하는 특징 없는 나무였다. 작가는 이 나무에 신선한 흙을 덮고 흠뻑 물을 주었다. <br>나무는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깊은 겨울밤을 보내고, 연둣빛 이파리가 반짝이고 새들이 떠들썩하게 날아다니는 깊은 봄을 보냈다. 태풍이 온 산을 할퀴고 지나간 여름과 작은 별무리가 강물처럼 흐르고 풀벌레가 우는 가을밤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겨울. 그렇게 수많은 날과 달이 흐른 뒤, 나무는 문득 마당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있었다. <br>바람은 나무에게 "너는 천년을 사는 나무란다." 하고 속삭였지만 나무에게 천 년이라는 시간은 무의미한 관념에 불과했다. 나무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라는 구체적 시간을 살았다. 어느 날 달빛이 나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니?" 나무가 대답했다. "별과 구름, 해와 달, 그리고 바람과 함께 춤추는 나는 나무입니다."<br>나무는 그저 나무라고 했다. "나는 나무입니다." 분류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인간이 붙여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책 마지막 장에서 봄 민들레가 나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느티야?"<br>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신학자가 나름의 답을 했고, 더 많은 문학인들도 '나'를 주어로 하는 이야기를 썼다. 사람들은 이 짧은 생을 지탱하기가 힘겨워서 '나'를 붙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고, 모두들 "나는..." 하고 얘기를 시작하지만 '나'는 영원한 수수께끼며 영영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다. 그러니 '나'를 괄호 속에 넣고 말을 시작하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지 않을까. 영어는 주어가 없는 문장을 비문으로 치는데 한국어에서는 주어 없는 문장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한국어의 세계관으로 생각한다면, '나'란 내가 그렇게 매달려야 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때 비로소 찾게 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nbsp;&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헤세도 나무를 사랑했다. 그는 나무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심지어 경외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헤세는 나무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나무를 최고의 설교자라고 불렀으니까. 조용히 나무 곁에 서서 헤세는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아주 조용히. &nbsp;<br>"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br>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헤세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이었으리라. 종교인이든 아니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사람들이 모두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것.&nbsp;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 번뇌가 다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으로 통하는 어느 길목에서 이것을 실현할 수 있기를&nbsp; 나는 꿈꾼다.&nbsp; &nbsp;<br>일 년 된 작은 살구나무 묘목을 심었다. 어린 나무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테다. 다만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고 햇살을 받고 어두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보내고 그렇게 수많은 계절들을 보내며 꽃과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인간은 나무에 이름표를 붙여주기를 좋아하지만 나무는 그저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만 집중한다. 본연의 일에 충실해서 살구나무는 살구나무로 자라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로 자란다. 헤세의 말처럼,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살구나무의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나무 곁으로 다가간다.&nbsp;마음의 다른 모든 소리를 끄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nbsp;<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6/cover150/89364786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678605</link></image></item><item><author>스프링버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판타지의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135752</link><pubDate>Sat, 07 Mar 2026 15: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5452123/1713575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55753&TPaperId=17135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739/65/coveroff/893645575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161729&TPaperId=17135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32/11/coveroff/s76263680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82925&TPaperId=17135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47/40/coveroff/89527829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어린이들은 상상의 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나도 꽤 공상을 하는 어린이였지만 상상의 친구를 만든 기억은 없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큰 기쁨과 위로를 선사받았다.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해 만든 문학이나 영화를 보면 상상의 친구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은데, 그런 걸 보면 아이들에게는 평범한 현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욕구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혹은 현실이 아이들에게 너무 버거워서 그들을 도와줄 보조적 수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nbsp;&nbsp;  &nbsp;   <br>  &nbsp;    &nbsp;  <br><br><br><br><br><br><br><br><br>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토끼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소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외로운 아이다. 텔레비전도 보고 책과 장난감도 많고 가끔 엄마랑 놀이터도 가고 외식도 하지만, 그럴 때는 정말 신이 나지만, 그러고 나면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 소녀는 거친 현실 세상 속에서 너무나 작고 외로워 보인다. &nbsp;  &nbsp;  하지만 소녀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래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 친구 이름이 알도다. 알도는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찾아와 도와주는데, 아이들이 소녀를 발로 차고 때렸을 때도 알도가 나타나서 걔네들을 쫓아줬고 무서운 꿈을 꿨을 때도 책을 들고 와서 읽어줬다. 다행히 소녀는 알도와만 놀지 않고 알도를 까맣게 잊고 지내는 날도 있다. 그런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그것도 알도 덕분인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된다. 혼자 지내는 버거운 하루하루를 알도가 같이 있어줬기에 소녀는 조금씩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는 여전히 어리고 여리다. 그래서 소녀에게는 여전히 알도가 필요하고, 여전히 알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nbsp;  &nbsp;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br>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nbsp;  <br><br>  &nbsp;  여기에 외로운 아이가 또 있다. 그림책이 아니라 글밥이 꽤 되는 저학년 동화인데, 아이들용이라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잘 쓰인 판타지 문학이다.&nbsp;&nbsp;  &nbsp;  &nbsp;&nbsp; <br>  &nbsp;    &nbsp;  <br><br><br><br><br><br><br><br><br><br><br><br>주인공 아이는 햇볕도 안 드는 지하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야 돌아오고 친구들은 아이가 다리를 절뚝거린다고 놀린다. 아이는 학교 준비물을 잘 챙겨가지 않아서 선생님한테 자주 혼이 나고 주인집 개는 너무 무섭다. 아이는 스스로를 '꼬마 여자애'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꼬마'와 '여자'애가 약점이라고 단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아이들 세계에서도 여자가 약점이 되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야기는 이 두 약점을 약점이 아니라 선언하듯, 주인공 아이를 여왕님이 아닌 임금님으로 등장시킨다. 일단은 아이의 이름이 임금님이다. 성이 '임'이고 이름이 '금님'이다.   &nbsp;  금님이는 빈 집에서 외롭고 심심하고 슬프다.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서 자주 한숨을 쉬곤 해서 엄마에게 타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날 중 어느 하루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금님이는 평소처럼 혼자 빈 집에서 어두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하자고 마음을 먹고 다리를 쭉 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발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nbsp;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두 발 사이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두 발 사이에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건 바로 호리병이었어요!"  &nbsp;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그다음에 벌어졌다. 호리병 안에서 개미만큼 작은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빙 둘러서 에워싸고는 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임금님이세요?"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름이 임금님이니까. 작은 사람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다고 기뻐했다.  &nbsp;  "오, 세상에!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네요. 저희들은 임금님의 백성이에요."  &nbsp;  외롭고 불행한 아이에게 나타난 판타지의 세계다. 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이렇게 심심하고 외롭고 불행하고 슬플 때 열린다. 작은 사람들은 판타지 문학의 중요한 모티브인데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들을 아이의 두 발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호리병 속에서 나오게 했다. (두 발을 닿지 않을 거리로 가까이 대보면 꼭 호리병 같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이제 이름만 아니라 진짜 임금님이 된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보살피는 임금님 말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에게 자신들이 몹시 굶주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때 마침 아이도 배가 고픈 참이었다. 엄마 없이 혼자 있을 때 아이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기 때문이다. 금님이는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밥을 차려주었고 작은 사람들이 말했다. "임금님이 드셔야 우리도 먹을 수 있어요." 하고. 그래서 금님이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nbsp;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아이는 좋은 임금님이 되는 법을 배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이 행복해야 백성이 행복하고 임금님이 불행하면 백성도 함께 불행하다고 말했고, 아이에게 지금 왜 불행한지를 물었다. 아이는 자신의 결핍을 돌아본다. &nbsp;&nbsp;&nbsp;  &nbsp;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면 기쁘고 흐뭇하시겠어요? 어떤 일이 생기기를 원하세요?"  &nbsp;  금님이가 행복해지려면 결핍이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무엇이 결핍인지, 결핍을 직면하는 일이다. 그건 아이 어른 누구에게나 그럴 테다. 아이는 진짜 임금님처럼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신 곁에서 든든하게 보살펴주는 하인들이 있기를 바랐다. 아이는 다리를 절뚝거리지 않고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아이는 수염이 까칠까칠하고 목말을 태워주고 휘파람을 부는 아빠를 갖고 싶었고, 팔짱을 끼는 친구를 원했다. 주인집 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용기도.  &nbsp;  이 모든 현실 인식과 욕구 충족이 두 발 사이에서 생겨난 호리병 속에서 나온 작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다 상상 속에서.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결핍감이 채워지면 나면 마음이 좀 위로받지 않을까? 위로를 받으면 자연히 힘이 나는 법이다. 실제로 금님이는 백성들에게 밥을 차려주면서 자기도 엄마가 해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고, 무서운 개를 만났을 때 백성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보았다. 친구들이 놀릴 때도 백성들을 생각해서 당당해져 보았다. 그렇게 해서 금님이의 현실이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그건 금님이가 현실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나간 덕분이기도 하다. 아동문학 평론가 김서정은 이 상호작용을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의 따뜻하면서도 힘찬 포옹'이라고 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nbsp;    &nbsp;  <br>여기에 임금님처럼 다리가 아픈 아이가 또 있다. 이 아이는 금님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다리가 아파서 일 년째 침대에 누워만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영영 못 걷게 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예란. 예란은 엄마 아빠가 자신의 다리를 두고 하는 얘기를 몰래 들었던 날, 판타지의 세계를 만난다.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는 주인공이 판타지의 세계로 도망쳤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판타지의 세계가 예란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아이의 무의식이 혹은 아이의 영혼이 아이를 감싸주려 나섰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본다.  &nbsp;  &nbsp;&nbsp; <br>  &nbsp;    &nbsp;  <br><br><br><br><br><br><br><br><br><br>그 충격적이고 절망스러웠던 날, 예란 앞에 어스름 나라의 백합줄기 아저씨가 찾아왔다. 이층 집의 닫힌 창문으로 불쑥 나타난 작은 아저씨는 예란을 어스름 나라로 데려간다. 어스름 나라는 '허깨비 나라'라고도 불린다는 걸 예란은 알고 있다. 자신도 그게 상상인지 안다는 얘기다.   &nbsp;  어스름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다리가 아파도 걷고 날고 춤을 출 수 있다. 주스를 뿌리며 장난을 쳐도 괜찮고 전차도 운전할 수 있다. 예란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어려움과 불가능과 제약을 벗어난 세계를 예란은 꿈꾼다. 그런 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세계를. &nbsp;  &nbsp;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nbsp;  &lt;알도&gt;의 존 버닝햄과 &lt;나는 임금님이에요&gt;의 이미현, &lt;어스름 나라에서&gt;의 린드그렌은 아이를 판타지 속에 얼마나 머물게 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아이로 하여금 판타지 세계를 완전히 떠나게 하지는 않는다.&nbsp; &nbsp;&nbsp;  &nbsp;  임금님이 어려움을 하나씩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서 현실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그러니까 바쁜 엄마를 도와 설거지와 청소도 해놓고 학교 준비물도 챙기고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느라 바빠서 백성들을 잘 만나지 못할 즈음, 백성들이 임금님에게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임금님 덕분에 자신들도 평화롭고 행복해졌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늘 임금님 곁에 있다고, 그러니 언제나 저희를 잊지 말라고 얘기한다.   &nbsp;  백성들은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호리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호리병은 점점 연해지다가 투명하게 변하더니 마침내 환한 빛이 되었어요. <br> 그런데 그 환한 빛은 내 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요. 발이 따뜻해지고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br> 빛은 남김없이 내 양쪽 발로 빨려 들어가 다리를 타고 배와 가슴으로 가더니 머리까지 가득 차올랐어요. <br> 내 몸이 빛으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요.<br> 나는 가만히 내 몸을 감싸 안았어요. <br> 빛이 된 백성들이 내 안에 함께 있는 것만 같았지요. 백성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br> "우리는 늘 임금님 곁에 있답니다."  &nbsp;  린드그렌 작가의 백합줄기 아저씨는 어스름 나라 여행을 끝내고 헤어질 때면,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임금님의 작은 사람들과 다르게 언제나 이렇게 인사한다.  &nbsp;  "내일 어스름 녘에 다시 만나자."  &nbsp;  예란은 영영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서 그랬을까? 예란은 침대에서 보낸 일 년을 잘 버틴 아이다. 그런데 앞으로 더 힘든 시간이 예란 앞에 놓여있는 것 같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단해질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단순하게 보자면, 아이는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없는 매일의 낮을 견뎌낸 보상을 어스름 녘에 누릴 권리가 있다고도 말하고 싶다. 린드그렌 작가는 아이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작품을 포함해서 몇몇 작품이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판타지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 &lt;그리운 순난앵&gt;이란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현실로 돌아오는 문을 아예 닫아버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 안에서 위로받아야 한다는 듯이. 때가 되면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믿는 것 같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언제나 지지하고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nbsp;  <br><br>일본의 정신분석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판타지를 '영혼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어느 쪽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 또는 몸과 마음을 통합하여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어려움에 놓인 아이들, 그러니까 알도의 소녀와 임금님과 예란 같은 아이들이 힘을 내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건 그들의 영혼 덕분일 것이라고 하야오는 말한다. 영혼이 아이들을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영혼이 아이들과 또 우리 어른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반대로, 영혼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판타지가 마음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nbsp; &nbsp;  &nbsp;  "영혼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영혼은 늘 우리 주위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판타지는 그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nbsp;- 가와이 하야오  &nbsp;  아이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환상 속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른의 세계는 거칠고 무정할 때가 많고, 아이들끼리의 세계는 더 야만적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장애와 위험과 갈등을 판타지 세계 속에서 살아내 보는 게 필요하다. 상상의 존재에게 위로받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망쳐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수 있다. 그럭저럭, 잘 하든 못 하든.&nbsp;&nbsp;  &nbsp;  그런데 나는 똑같은 말을 문학 일반에도 대입하고 싶다. 특히 좋은 소설 속에서 나는, 하야오 식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풀려난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라고 나는 말하게 된다. 문학은 그것이 판타지든 사실주의든 실존주의든 SF든 다 통틀어서 판타지가 아닐까. 어차피 현실은 아니라는 점에서. 회화가 구상과 추상으로 더는 나뉘지 않고 구상이 곧 추상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말이다. 문학을 읽는 우리는 발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걸친 채 두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르겠다. 현실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은연 중에 모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nbsp;    &nbsp;    &nbsp;  인용 자료그리운 순난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홍재웅 옮김, 열린어린이, 2010.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김서정, (주)학교도서관저널, 2021.판타지 책을 읽는다, 가와이 하야오,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2006.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47/40/cover150/89527829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947407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