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여자
권우정 감독, 소희주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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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집은 시골이라 좋겠다."

 

  그래 좋다. 우리집에서 먹는 채소며 곡식은 전부 유기농이다. 밭에서 직접 길러다 먹고 논에서 직접 추수해 도정한 쌀을 먹고 있으니까 말이다. 철마다 옥수수, 토마토, 고구마, 밤 등등 주전부리도 남아날 정도로 넉넉하다. 참기름, 들기름? 깨 길러서 방앗간 가져가 직접 짜다 먹는다. 중국산이 다 뭐냐. 우리집은 그런거 모른다. 집 근처에는 블루베리, 포도, 머루, 자두, 복숭아 나무도 있다. 약 안처도 열매 실하게 맺어서 먹고 남으면 술 담글 정도로 푸짐하다. 게다가 이게 다 공짜다. 그저 밭에 나가서 캐고, 따고, 털어오면 된다. 그뿐이냐. 우리집은 김장할 때 무, 배추, 파, 마늘, 고추, 생강 하나도 안산다. 심어먹으니까.

 

"그래? 좋겠다. 나도 시골 살았으면 좋겠다. 땅 밟으면서 살고 싶어."

 

  장난하냐? 이게 다 그냥 나오는게 아니다. 때되면 모길러서 논에 모내기 하고, 밭에 콩심고 깨심고 고구마 심고 고추심고 옥수수심고 이게 끝이 아니다. 가물면 물 대줘야지, 풀 자라면 메줘야지, 엇자라지 않게 줄도 줘야지 기타 등등! 밭일이든 논일이든 매일 매일 일이 끝도 없다. 농사 라고 하면 그저 제때에 심어주고, 제때에 재배하는 건줄 아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게 아니다. 밖에 내다 팔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가족, 내식구 풍족하게 먹이려고만 하더라도 그게 노동량이 만만치가 않다 이말이다. 나는 아주 가끔 엄마 아빠 도와 손이나 더하는 수준이지만 일 한번 도와드리면 3일을 앓아 눕는다. '에이 씨, 그냥 사다 먹어!' 내가 해마다 이 말을 안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치가 않아요.

 

  사람들은 시골에서 농사짓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근거없는 로망을 갖는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내어 주는 정직한 땅에 기대어 사는 삶, 눈치주는 상사나 괴롭히는 동료가 없는 자유로운 직장,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자연 친화적인 삶! 뭐 전부 맞는 소리다만, 농민으로 밥벌어 먹으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아름답고 느긋한 삶이 절대로 아니다. 몸을 쓰는 일이니 고생스럽고, 고생스러운 반면에 수익은 날씨나 정부의 정책에 따라 로또 수준이다. 게다가 기계를 쓰는 일이 많고, 농약을 쓰기도 하므로 위험요소가 아주 많다. 말 그대로 3D업종인 샘. 평생을 땅을 밟으며 살아오신 나의 부모님은 항상 말씀 하셨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리고 너는 절대 농사 지으면서 살지 말아라.'

 

  농촌생활에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때 마다 '고마 정신 차리소!'라고 외치고 싶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그런 로망을 갖게 된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고향 찾아 떠나는 여러 프로그램들, 아이돌들이 시골가서 일하는 프로그램, 귀농 체험 프로그램! TV에서 보여지는 단편적인 모습들이야 도시생활만 해 본 사람들은 이색적이고 좋아보이겠지만 막상 현실이 TV에 보여지는 것만 같으냐 이말이다. 결국 그럴듯 하고 아름다운 부분만 보여주는 TV의 탓이 크다.

 

 

  그런데 이 영화는 100프로 리얼이다. 농촌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건 이런 거예요~를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다. 감독은 여성 농민 3인과 1년여간 동거 아닌 동거를 하며 이 영화를 찍었다. 대학 공부도 한 여자들이지만 스스로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여자들, 일명 땅의 여자들의 삶을 순도 100퍼센트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선보인 것이다.  농촌에서 산다는 것, 농민의 아내로 산다는 것, 농민의 며느리로 산다는 것, 농촌 아이들의 엄마로 산다는 것, 또한 한 사람의 농민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친숙하고 가식없이 보여줬다. 이런 삶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정말 특별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도 평범하다고 말한다. <땅의 여자>특별하고 평범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기획된 것은 2005년, 감독이 홍콩에서 있었던 WTO 반대 투쟁에서 아주 특별해 보이는 두 여자를 만났을 때부터 이다. 당시 투쟁에 참가 했던 강선희 씨와 그녀의 시어머니의 모습은 고부간이 아니라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결의한 ‘동지’ 같았다고 감독은 전한다. 그녀들의 인상적인 모습에 호기심을 갖게 된 감독은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고, 결국 그들의 사는 진주시 지수면에 머물며 그들을 촬영할 것을 허락받는다. 소희주 씨의 도움으로 마을 빈집에 거주하며 그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그녀들의 농민 모임에 동참하고, 그녀들의 안방까지 드나들며 리얼한 땅의 여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 된 감독, 그녀가 농촌의 여성 농민들의 삶을 이야기 한다.

 

  대학 시절부터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아가씨들은 ‘나는 나중에 농촌에 시집가서 살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다녔고, 그 특별한 선언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인연은 세 아가씨가 같은 농촌 마을에 시집을 가게 되면서 진득하게 이어지게 됐고 그 결과 아가씨들은 아지매가 되어 벌써 13년째 마을 주민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단다. 

 

 농사일과 농민회 간부 일을 겸하느라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소희주 씨는 남편의 눈치와 핀잔도 불사하며 열심히 농민회 활동을 한다. 여성 농민모임을 이끌며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백발이 성성한 농촌 아지매들을 모으고 단풍놀이 가는 것처럼 시위를 하러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남편과 밭일을 하고 집에 축사를 짓고 소들 들이며 바쁘게 농민으로의 삶을 살아간다.

 

  강선희 씨는 농사일에 영 소질이 없다. 그녀는 밭일보다는 마을 아이들의 선생님 노릇을 더 잘한다. 그런 선희 씨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것은 그녀의 시어머니로 며느리의 바깥일을 열심히 내조해 주신다. 선희 씨의 남편은 젊은 날 열정적으로 농민 운동을 벌였던 사람이지만 덕분에 심각한 지병을 얻어 버렸다. 아픈 남편과 농사일을 맡아 주시는 시어머니를 뒤로 하고 선희 씨는 농민회 활동과 농민 권익 신장을 위한 정당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다.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한 부분이지만 선희 씨는 농촌의 문제들을 무시하며 농사만 짓고 살 수는 없다. 물론 그녀의 활발한 활동은 그녀를 지지해 주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변은주 씨는 농촌에서 여성 농민으로 산다는 것의 고충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농민의 아내로, 농민의 며느리로 살며 집안 농사일의 주도권에서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는 본인의 입장은 때때로 회의스럽다. 은주 씨는 최근 시댁으로부터 분가했다. 분가를 하기까지 시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평생 시부모를 모시며 농민의 며느리로 살아오신 시어머니는 은주 씨를 이해할 수 없고, 은주 씨도 그런 시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간다. 함께 일을 하고 함께 밥을 먹는다. 서운한 부분은 남편과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얘기하고 쿨하게 풀어버린다. 최근 은주 씨는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농민의 아내로, 며느리로 정신없이 역할에 치여 살아오면서도 놓지 않았던 꿈에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카메라는 그녀들의 일터와 모임은 물론 안방과 주방까지 못가는 곳 없이 다니며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100프로 리얼!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아가는 땅의 여자들의 삶이다.

 

 

  영화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농촌에 지금 이런 문제가 있으니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해결하자! 는 것도 아니고, 농촌 생활은 이렇게 좋은 것이니 우리 모두 귀농합시다! 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농촌에 사는 여성 농민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뭐랄까, 스크린으로 옮겨진 ‘인간극장’이랄까?

뭐 그래서 좋다. 포장되지 않은 농촌에서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농촌 생활에 근거 없는 환상을 품고 있는 이들이 불편한 나는 진짜 옆집 아줌마 얘기 같은 이 다큐멘터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일반인들이지만 카메라를 전혀 불편해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개하고 허심탄회하게 감독과 소통하는 땅의 여자들을 보며 이렇게 되기까지의 감독의 노력이 보일 것도 같아서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게 탄생한 영상이 정말 리얼하고 꾸밈이 없어서 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조금 산만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라.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촌에서의 일이란 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가짓수도 많고 할 일도 많기 때문에 일하는 모습만 담아도 번잡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농민회에 참석하고 각가지 활동을 벌이는 모습도 더해졌는데다가 세 명의 여인들의 일상을 그런 식으로 교차 편집되어 있으니 당연히 보기에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기 전에 농민운동에 남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성 농민들의 일상이라는 소개를 봤는데 그럼 농민 운동을 하는 모습을 집중해서 다루려나, 농민으로서의 모습을 집중해서 다루려나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결국은 어느 한쪽에도 추가 기울지 않더라. 어느 쪽 기우는 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그들의 사는 모습을 담아 내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구태여 그런 캐스팅이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뭐 조금, 아주 살짝. 내가 농촌 아지매들의 일상을 너무 친숙하게 접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삶’은 어디에라도 존재한다. 그것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특별할 것이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면 그냥 그런 것이다. 다만, 다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보든 경이로울 것이며 느끼는 것이 많을 것이다. 농촌 라이프에 남다른 로망을 갖고 있는 사람, 다른 삶의 모습에 다채로운 감상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은 이 영화가 아주 보석 같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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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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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형무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수십 킬로미터의 철조망을 얹은 담장  /  수천 킬로그램의 철근 쇠창살  /  수십만 개의 별돌로 가로막힌 수백 개의 감방  /  서른여섯 명의 간수와 2백여 명의 간수병, 그리고 형무소장  /  천여 명의 죄수들 ―― 살인자, 강도, 사기꾼, 도둑, 조신인…….  /  처형장 둘, 무연고자 무덤, 시체실.  /  시인 한 명.  /  피아노 한 대.  /  그리고 비밀 하나.

- <스기야마의 메모>

 

  이정명 작가의 책은 읽고 나면 참 아리송해 집니다. 여기서 그의 ‘책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출세작(감히 이렇게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그리고 이 책, <별을 스치는 바람>을 말합니다. 그에게 ‘한국형 팩션’ 작가라는 이름표를 붙여준 책들이죠. 이 책들은 모두 하나의 ‘설’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네요. 너무나도 과학적이고 신묘한 구조를 가지는 문자인 ‘한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미스터리, 모델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 미인도와 그 그림의 작가 신윤복에 대한 미스터리 그리고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 다루고 있는 청년 시인 윤동주에 대한 잔혹한 미스터리. 그 희미한 이야기들에 달라붙는 여러 가지 설들에 살을 붙여 만들어 낸 이야기였던 거죠.

 

  근데 그것이 참 절묘했던 겁니다. 이전의 책들이 드라마화 되었을 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학자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었죠. 특히 <바람의 화원>이 드라마화 됐을 때는 한국 미술사학계의 원로 학자들이 앞 다투어 인터뷰를 하고 우려의 기사를 쏟아 냈었죠. 그 정도로 절묘하게 이야기를 추적하고 만들어 내는 재주가 뛰어난 작가입니다, 이정명이라는 작가는. 이번 책도 영상화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영상화 된다면 <바람의 화원> 못지않은 파장이 일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킬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읽어 가면서 울컥 울컥 했었거든요.

 

  이야기는 일단은 추리소설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종반으로 치닫던 늦겨울,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어난 간수 살인사건”의 전말을 또 다른 간수인 와타나베 유이치가 조사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그가 19살의 겨울, 그 시절의 기후만큼이나 시리도록 아프고 괴롭고 자괴했던, 충격적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인연과 기억과 회한을 처연하게 되뇝니다. 그 시절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있던 악마라고 불린 난폭한 교도관 스기야마와 마지막까지 시인이고자 했던 청년 윤동주, 그리고 ‘그’의 최후를 지켜보게 되는 유이치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그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 계획에 연루되어 사그라져 갔습니다. 그 생지옥 속에서 잔혹한 교도관과 젊은 시인이 만나게 됩니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검열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대립하며 소리 없는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스기야마 도잔은 살해당합니다. 스기야마 도잔의 진실, 스기야마와 윤동주의 진실 그리고 그 시절 지옥 속에서의 윤동주의 진실. 그리고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유이치의 독백은 괴로움과 자괴감에 차 있었습니다.

 

  교도관 살해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거죽이라면 알맹이는 윤동주입니다. 부당하게 억압받아야 했던 그 시절의 조선의 청년들과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 그들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보낸 시절의 미스터리가 소재지요. 그 속에서 진정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로서 소통하고 시로서 감화되어 가는 이들의 모습은 처절하고 감동적입니다. 결국에 시는 불태워 지고 진실마저 불살라져 버릴지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계속 살아가겠지요. 살아가는 겁니다.

 

  이 책은 참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뿌리 깊은 나무>나 <바람의 화원>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하지만 재미있었던 만큼 읽기도 괴로웠습니다. 아름다운 시로만 기억되어야 할 시인의 참혹한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이란 글이라도, 설사 그것이 허구라고 해도 힘든 일이었네요. 오랜만에 윤동주의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폭력의 시대 속에서 총칼보다 강력했던 시와 문학의 힘 그리고 은폐하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작가의 차기작도 기대해 봅니다.

 

 

***

 

1권

 

  어떤 말은 단순한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떤 말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영혼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의를 숨기고 있다. 삶의 신비는 언어를 통해 드러나고 구현된다. 나는 우리의 입을 통해 파열되거나 마찰되는 자음의 신비를 알고 있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모음의 우아함도 알고 있다. 그것들은 섞이고 마찰하고 충돌하면서 음조와 의마와 분위기를 만든다. - 36

 

  비가 내렸다. 비는 장막처럼 너울대며 허공에 드리워졌다. 희뿌연 물의 장막 너머로 모든 것이 어렴풋해졌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그치면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8월의 태양이 식고 9월의 바람이 불리란 것을. 전쟁터러 끌려간 소년들은 청년이 되리란 것을. 죄수는 죽어가고 새로운 죄수들이 감방을 채우리란 것을. - 221

 

  스기야마는 원고 맨 앞장을 뜯어냈다. 불꽃이 구겨진 종이의 가장 자리를 핥았다. 단정한 글씨가 순식간에 삼켜지고, 금지된 구문은 불꽃의 혓바닥에 녹았다. 한 자씩 한자씩, 한 줄씩 한줄씩, 한 장씩 한 장씩. 원고 뭉치는 우악스럽게 뜯겨졌고, 찢긴 종이들은 화염 속으로 날아들었다.

  <자화상>, <돌아와 보는 밤>, <사랑스러운 추억>…….

  그는 흩어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불 그림자가 어른어른 순결한 글자에 달려들었다. - 260

 

 

2권

 

  형무소에서 아프다는 것, 다쳤다는 것은 남들에게 떠벌릴 일이 아니었다. 이 담장 안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모든 죄수는 허약했고 병을 달고 살았다. 별것 아닌 감기조차도 이곳에선 폐병으로, 죽음으로 번져다. 이곳에서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 아니라 수많은 질환과, 폭력과, 학대의 종착역일 뿐이었다. - 100

 

  책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어갈까?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낱말과 조사와 구두점이 모인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삶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우듬지를 이루는 동안 책장은 찢어지고 표지는 낡고 글자들을 바랜다. 그리고 어느 날 먼지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 영혼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책은 죽지 않는다. - 172

 

  이 더러운 전쟁은 내가 일으킨게 아니예요. 도시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 그 폭탄에 죽어 간 사람들 때문은 아니에요. 전쟁을 벌인 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병신으로 만들고, 고통에 빠트렸어요. 그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반드시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대가를 치러야 해요! -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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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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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행위도 사랑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거다. - 시자키 마사토

이렇게 잡고 있으면 나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또 나를 데려가 줄까. - 스기사타 조미

톡, 톡, 톡, 톡. 샤프펜슬을 네 번 두드린 소리는 ‘네, 가, 좋, 아’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걸로 충분하다. - 루세 신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 부임하게 된다고 하면 그녀는 부러워 할까. 말없이 소맷자락을 붙든다면 데리고 가도 좋다. - 안도 조미

 

  미나토 가나에 책은 늘 그랬지만, 한번 붙잡으면 중간에 내려놓을 수가 없네요. 뭐지? 뭐지? 하면서 읽다보니 이건 뭐 새벽이네? 보통은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으면 그 자체가 기특해서 뿌듯한 마음에 잠이 드는데, 어젯밤은 열대야 때문인지 몸이 끈적끈적해 져서 영 찝찝스럽고 마음도 공허한게 배도 고픈 것 같고, 뭘 먹자니 내 몸에 미안하고, 샤워를 하고 찬물을 한잔 마실까 그냥 누워 있을까 생각하다가 왜 잠도 못자고 아직까지 이러고 있는지 갑자기 짜증이 솟구치더군요. 읽을 때는 정말 즐겁게 선풍기 타이머가 다 된 줄도 모르고 읽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읽을 때의 긴장과 즐거움이 싹 달아나 버리고 말더라구요. 읽는 즐거움에 비해 여운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것이 이 책의 아쉬운 점이 아닐까 싶어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요. 고급 멘션에 사는 구치 다카히로(42세)와 그의 부인 오코(29세)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들에 대해 사정청취가 이뤄져요.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노구치 부부와 개인적인 인연으로 교류하고 있던 M상사의 신입사원 안도 조미와 대학생인 스기시타 조미, 레스토랑 출장 디너를 담당하는 루세 신지 그리고 노구치 다카히로의 부인 나오코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작가 지망생 시자키 마사토. 네, 모두 이름에 이니셜 N이 들어가죠. 범인은 스스로 범행 사실을 자백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 중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N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그날, 모두가 가장 소중한 사람만을 생각했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장 상처 입지 않을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사건의 ‘진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죠. N은 N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지켜주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N은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본인 뿐만이 아니라 사건에 관여된 사람들이 그날 누구를 위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무얼 숨겼는지, 그때는 무시되었던 진실을 이젠 알고 싶습니다. 아니, 알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10년 전 무언가를 숨겼거나 거짓말을 했던 N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되었는지, 상대를 어떻게 생각 하는지 도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N을 위해 공범이 되어줬지만 정작 본인들도 그날 사건에 의문을 품고 있지요.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행동과 이유를 밝히면서 그날의 사건의 은폐되었던 진실이 들어납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욕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N을 위해서,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뿐인걸요. 그들의 이야기처럼 궁극의 사랑이 죄를 공유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정말 궁극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 뿐이니까요. 그것도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 이야기예요. 조금은 기묘한.

 

  미나토 가나에의 전작인『고백』이나, 『야행관람차』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N을 위하여』까지, 그녀의 책에서는 참 살인이 대책없이 일어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살인의 이유나 살인의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내기 보다는 살인사건에 얽혀든 사람들의 사정과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두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래도 식상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죠. 『고백』이후의 책으로는 계속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고백』보다는 물론이고 『야행관람차』보다도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이 부분은 개인적인 감상일 뿐입니다만,) 『야행관람차』에서는 불편하긴 하지만 인물들의 어두운 내면이 그나마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인물들이 과장되고 억지스러워 보이는 부분이 더러 보입니다. 사람의 추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면서 감명을 주었던 작가가 여기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특이한 사람들의 내면상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없고, 여운을 주지도 못합니다. ‘이야미스’ 라는 신장르의 책들에서 공감과 감명과 여운을 바라는 것은 대단한 사치일까요?

 

  물론 그녀의 필력은 여전해서 독자를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듯한 그 마력은 대단합니다. 끈적한 여름밤에 정말 제격인 책입니다. 더위도 잊게 만들며 무섭게 몰입하게 되는 책이예요. 그런데도 전작들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남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겁니다. 하루빨리 『고백』의 패턴을 벗어나는,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쌈박한 책을 또 다시 내주길(아니, 국내에 소개해 주길 출판 관계자들에게 바라야 하는 걸까요?) 바랄 뿐입니다.

 

  이 책, 처음 읽을 때는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나가다 보면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측 증인』과 겹쳐집니다. 묘하게도 말이지요. 하지만 결말을 모두 읽어내고 나면 나쓰키 시즈코의 『제 3의 여인』이 생각납니다. 그게 제 감상이예요. 환영은 결코 내 손에 붙잡을 수 없는 존재이고, 사랑은 곧 환영이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오만함이 스스로에게는 궁극의 사랑일 수도 있겠죠. 진실 보다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중요했던 그 때, 『N을 위하여』였습니다.

 

 

***

조짐이라는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알려주는 사소한 사건을 뜻하지만, 그거이 조짐이었다는 것은 일이 일어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것도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에야. 그러고 보니 그때 서쪽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었는데,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얌전하던 개가 무언가에 겁을 먹은 것처럼 계속 짖어 댔었지, 그러고 보니 여느 때보다 안색이 안 좋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 190

 

- (…중략…)궁극의 사랑이란?

- (…중략…)죄의 공유.

- (…중략…)그거 중고생 녀석 둘이서 도둑질을 했는데 손을 잡고 도망치다 보니 신이 나더라, 뭐 그런 얘기랑 똑같잖아. 완전히 저급한 수준의 사랑이라고.

- (…중략…)그건 공범이지. 공유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상대의 죄를 절반 짊어지는 거야. 아무도, 그러니까 상대도 모르게 죄를 떠안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 - 154

 

섬에 있을 때는 그곳만 벗어나면 인생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지. 아빠의 애인 때문이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좁은 세계 속에서, 행복해지려는 노력도 없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인생을 끝내기는 정말 싫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즐거운 듯 지낼 수 있는지,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지. 숨 막혀 하는 사람은 없을까, 내내 동지를 찾고 있었어. 그러다 간신히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찾았다 싶었던 게 바로 너야. - 115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를 희생해도 좋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모두가 가장 소중한 사람만을 생각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장 상처 입지 않을 방법을 생각했다. -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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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위선(僞善)이라고 쓴다. 작위적으로 선함을 가장한다는 말이다. 위선을 하는데 에는 대게에 어떤 ‘의도’가 있게 마련이다. 선함을 가장해서 상대방의 환심을 산다든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든지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조금 애매모호하다. 선하다는 말의 의미가 해석하기에 따라 엄청나게 광범위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선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것인가? 상대방에게 너그럽다는 것인가? 착하다는 것일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일까? 착하다거나 좋다는 의미라면 , 그 ‘착하고, 좋은’ 것이 어떤 집단에 대한 것일까? 만물? 인류?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범위를 조금 좁혀보자 지인? 가족? 아무렴 어떤가. 이 말의 의미는 너무 유동적인지라 그 범위를 상정한다는 것은 조금 골치 아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헤르만 코흐의 소설 <디너>는 ‘위선’ 이라는 말을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디너>를 더욱 골치 아프게 읽어보자. <디너>에서 위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왜 그렇게 머리 아픈 구분에 목을 매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참 쓸 데 없겠지 싶으면서도, 나는 결론을 내고 싶었다. 가려내고 싶은 것이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누가 선을 가장해서 그럴듯하게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있는지 말이다.

 

 

무슨 그런 얘길 석 달 전에 예약안하면 곤란한 레스토랑에서 하니?

 

파울과 끌레르는 형님 내외와 저녁 식사를 앞두고 있다. 석 달 전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는 레스토랑이지만, 파울의 형님 세르게는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는 거물인지라 인기 레스토랑에 급하게 자리를 만드는 일을 스포츠처럼 즐기는 인물이다. 파울은 그런 형님과의 디너가 불편하다. 레스토랑 스텝의 인사를 받으며 거들먹거리며 입장할 형님이 눈꼴 시린 것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오늘 디너에서 파울은 세르게와 긴히 나눌 말이 있다. 아내는 몰랐으면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도 없어서 형제간의 가족모임을 청했던 것이다.

 

파울과 끌레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미헬. 어렵게 얻고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외아들이다. 형님 세르게 내외에게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두 아들 이라고는 하지만 한 아이는 친아들, 한 아이는 입양을 했다. 릭과 베아우라고 한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베아우가 흑인이라는 점이다. 베아우는 세르게 내외가 빈국에 대한 원조활동으로 알게 된 아이로, 베아우를 입양한 것은 정치인 세르게의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파울은 생각한다. 끌레르는 그런 파울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지적하지만.

 

어쨌든, 파울과 세르게 내외에게 미헬과 릭은 소중한 아들이다. 그런데 이 아들놈들이 엄청난 사고를 쳤다. 노숙자를 구타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 것도 모자라 불까지 질렀다. 그런 엄청난 일이 <사건파일 XY>라는 프로그램에 대대적으로 방송되기 까지 했다. 물론 방송된 화면은 CCTV영상으로 그 누구도 노숙자 살인사건의 범인이 미헬과 릭이라는 사실을 알 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는 역시 다른지라 그 방송으로 보고 그 잔악무도한 범죄의 범인들이 자신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파울과 세르게는 오늘 이 문제에 대해 결판을 지으려고 한다. 이 잔혹한 죄를 지은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그날 그 ‘부모들’의 디너

 

아페리티프를 마시고 애피타이저로 식욕을 돋운 다음 메인요리를 먹고 디저트로 마무리, 다음에는 더부룩한 속을 소화제를 해결하고 만찬을 제공한 레스토랑에 팁을 남긴다. 아들들의 곤란한 문제를 의논하는 부모님들의 저녁모임은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따라 시작은 유쾌하게, 과정은 스릴 넘치게, 때로는 무섭게 이어진다. 그들은 교사이고, 유명 정치인 이지만 그다지 인격적으로 완벽한 인간들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파울은 독선적이고 그의 아내 끌레르는 이기적인 헛똑똑이이며 세르게는 속물이고 그의 아내 베르테도 남편못지 않다. 그들의 진면목은 식사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의 아들들은 살인을 저질렀다. 그 노숙자는 힘없는 여성이었고 피폐해져 있었으며 더럽고 냄새가 났다. 아들들은 그녀를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아니, 그녀가 노숙인 이었다는 자체가 이유가 됐을까나? 열다섯 살 아이들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잔혹하고 무참한 범죄였다. 세상은 아이들의 범죄에 공분하고 있다. 아이들은 죄를 저질렀고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선’이다. 그런 명분을 세르게는 갖고 있었다. 세르게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줄도 놓아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 세상은 그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지만 세르게는 그것을 알리고 아들에게 죗값을 물게 할 생각이다. 타당한 이야기 이다.(물론 그의 생각은 순수하게 세상의 선을 쫓고 있지만은 않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대단한 속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르게의 정치생명은 끝이 나고 아들은 감옥에 갈 것이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더불어 그의 아우네 집까지 말이다. 그의 결심은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아우네 가정마저 흔들고 말 것이다. 이것은 과연 ‘선’ 일까?

 

세르게의 결심에 끌레르와 베르테는 반발한다. 끌레르는 그런 일로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들 미헬과 남편 파울이 있어 행복하다. 그들이 있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세르게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행복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베르테에게도 남편의 선언은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 뻔 한 이야기다. 남편을 수상으로 만드는 일이 바로 목전에 있다. 그 일을 망칠 수는 없다. 물론 아들의 인생도 망칠 수는 없다. 끌레르와 베르테, 그리고 파울까지 그들은 세르게를 막는데 의기투합한다. 그것이 그들의 ‘선’이다. 물론 그들의 ‘선’이 세상의 ‘선’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모르는 죄를 부러 나서서 밝혀 그들의 행복을 부숴대는 것 또한 ‘선’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에게도 명분은 있다. 그 명분은 아들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사랑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극적인 타협(?)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릭과 미헬 그 누구도 희생되지 않고 이 난관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희생양을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선’이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해해 줄 수도 있는 그들의 ‘선’. 그들의 문제는 짐짓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미헬은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파울과 끌레르도 파울을 사랑한다. 그걸로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이다.

 

파울과 끌레르, 세르게와 베르테가 내세우는 ‘선’들 가운데 가짜가 있다. 그것은 잘못되었고 위장되었으며 이기적이고 위험하다. 가짜는 무엇일까? 위장된 선은 누구의 ‘선’이었을까? 그 가짜는 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 위의 네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위선자가 될 수 있다. 참으로 골치 아프고 속이 쓰라리지만 이다지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답을 내린 것처럼 끝을 맺고 있지만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읽히면 읽힐수록 계속 확장되어가며 의문과 의심만의 꼬리를 길게 남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꼬리잡기에 뛰어들어 보길 권한다. 즐거운 두통과 뜻밖의 고뇌를 맛보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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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원죄론 이니 하는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인터넷 상으로 보도된 기사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아주 종종 그 몇 줄짜리 글속에서 정말 놀랍도록 절망스러운 수치들을 마주하게 된다. 공원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는 기사에 따르면 경찰청 통계로 한해 평균 2940건의 범죄가 ‘공원’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아동 성폭행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기사를 보면 2009년에는 한 해 동안 하루에 평균 44건의 성범죄가 발생했으며 그 가운데 6.3%가 아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최근의 기사도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통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서울특별시에서 발생한 5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행)건수는 총 6만3185건에 달한다. 통계의 맹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우리가 사는 이 좁다란 땅덩어리에서는 매일 수많은 범죄가 발생한다. 매일 지나치는 공원에서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고 강간을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딘가 골목에서 누군가는 강도를 만났을 지도 모른다. 어떤 이가 악의를 품은 누군가의 손에 허망하게 목숨을 빼앗겼을 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어느 공간에서 일수도 있고, 내가 지나치는 그 곳에서 일수도 있다. 참 무서운 이야기 이다. 소름 돋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상황이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쨌거나 나는 모르는 일이다. 무지는 죄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정말 무지와 무관심은 죄가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임에도? 설사 알게 되더라도, ‘내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다. 두렵기 때문에 ‘두려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은 본능적인 의지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어쩌면 무지, 무관심, 무책임 이 모든 것이 더 악질적인 죄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편안한 이 순간에 조차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된다.

 

납치된 여자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

 

납치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145cm의 최단신 형사 카미유 베르호벤은 상처한 슬픔을 떨쳐내기도 전에 파리 한복판에서 일어난 미모의 여성 납치사건을 맡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미유는 그의 충실한 동료인 잘생긴 부호형사 루이와 지독한 구두쇠 형사 아르망과 재회한다. 카미유 반장은 아내의 일과 겹쳐지는 이 불쾌한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고자 수사력을 총 동원해 납치 용의자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성급한 작전으로 용의자를 어이없게 잃고 만다. 납치된 피해자의 신분도 확인하지 못했고, 그녀의 생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다. 이대로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여성이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허망하게 죽어갈 것이다.

 

카미유 반장은 수사방향을 바꿔 납치 피해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사라진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녀의 실종을 알리는 신고전화는 걸려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이다. 카미유는 용의자에 휴대전화에 남은 피해자의 사진을 토대로 그녀에 정체를 수사하는 한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끔찍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그녀는 어째서 납치범의 타깃이 된 것일까? 발견된 시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녀에 대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는 그녀, 나탈리, 레아, 줄리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카미유 반장은 직감한다. 그녀를 찾아내야 한다. 아니, 그녀를 잡아야 한다.

 

알렉스는 왜 슬픈 살인자가 되었나?

 

표지와 내용소개에서 알리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실 이것은 1부의 가장 큰 반전내용이다. 뭐 이미 다 밝히고 있는 부분이니 당당하게 언급하겠다. 알렉스는 살인자다. 그녀는 수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빨간 머리의 레아, 갈색머리의 줄리아, 금발머리의 나탈리. 그녀가 다녀간 곳에서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시체들이 즐비 한다.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된 피해자들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분모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일까? 어째서 그녀는 신분과 모습을 바꿔가며 살인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것이 3부의 핵심적인 의문이자 이 소설의 핵심이다. 왜, 어째서 알렉스는 살인자가 되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사회파 스릴러 류의 소설로 홍보되고 있는 점이다.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를 뛰어넘는 유럽 사회파 스럴러의 거장! 이라는 거창한 홍보문구와 함께 말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사실 처음 선뵈는 작가이고 나에게는 <알렉스>가 그와의 첫 대면이니 홍보문구에 대해 어떤 의견을 보태기는 좀 뭣하지만, 그런 장르로 분류된 <알렉스>라는 소설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사회파 스릴러물이라는데 과연 남은 이야기가 어떻게 풀어질까에 대한 의문으로 2부를 견디고 3부에 와서 좀 멍해졌다. 1부의 내용은 읽기 전부터 드러나 있었고 2부는 잔혹한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좀 지루한 반면에 3부는 선정적이고 파격적이다. 상상 이상의 전개가 이어지는 3부는 알렉스 사건의 진실부터 결말까지 반전이 여기저기서 넘처난다. 비로소 알렉스가 살인자가 된 이유(그것도 ‘슬픈’이라는 수식어를 단)가 드러나는 것이다.

 

알렉스는 왜 슬픈 살인자가 되었을까? 가 이 책이 이야기 하고 있는 핵심일 것이다. 서두에 끄적거린 궤변은 지나친 과장 혹은 호들갑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무지와 무관심과 안일한 무책임이 엄청난 괴물을 키워낼 수도 있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괴물을 만들어 내는 그 죄 아닌 죄는 이기주의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생한다. 사회 고발 프로그램의 아이템이 수십 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넓지도 않는 땅덩이에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살면서 해마다 끔찍한 강력범죄들이 감소하기는커녕 늘어나는 이유는, 내 일이 아니므로 나서지 않고 쉬쉬하며 지나쳐 버리는 가면을 쓴 사람들의 죄이다. 한 사람이라도 OOO 했다면, 같은 말을 혐오한다. 아마 그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국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은 사람에게 용기와 오지랖의 중간 쯤에 있는 ‘어떤 것’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사람들은 대게 비슷비슷 하다. ‘구원의 손길’이라는 말은 종교에서나 사용하는 말이 되버리진 않을까? 그런 세상이라면 괴물이 된 자가 스스로 정의를 외치며 심판자로 나서는 날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물을 비난해야 할까? 우리 자신을 비난해야 할까?

 

 

책 속의 글.

 

카미유는 걱정이 깃든 눈길로 창밖의 재난을 바라보고 있다. 제리코가 그린 <대홍수>와도 같은 처연한 심판의 전조가 먹구름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위에 널리 퍼저있는 이 위협적인 기운은 그저 두려움이 극대화된 것일 수도 있다. 카미유는 생각한다. 우리의 이 알량한 삶에 지나치게 매달려선 안 된다. 세상의 종말은 뚜렷한 형세 변화를 통해 도래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렇게 일상적으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 284쪽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던 여자가 죽은 것이다. 이것은 중세시대 때 사람들의 손에 늑대가 처치되었다고 공고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그런다고 해서 세상의 표면이 바뀌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는 우리를 안도하도록 다독이면서 사람들이 따르고 의지할 만한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뢰감을 세간에 퍼뜨린다. 사람들이 따르고 의지할 만한 정의란 그러므로 환멸스러운 공모의 수렁 속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 415쪽

 

 

“당신들, 증거 있습니까?”

“하아!”

그쯤해서 그런 기함과 함께 다시 카미유가 나선다. 그 소리는 기쁨의 탄성처럼 시작해서 탄복을 금치 못한다는 투의 웃음으로 끝난다.

“하하하, 나는 이렇게 나올 때가 제일 좋더라!”

“참고인이 증거가 있느냐고 물을 때는,” 카미유가 바로 말을 잇는다. “그가 더 이상 최종결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자인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거든요. 그런 사람은 그저 붙잡고 늘어질 지푸라기라도 찾느라 발버둥치기 마련입니다.” - 426쪽

 

 

“진실이라, 진실이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반장님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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