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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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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상황에 빠졌거나, 못된 사람을 겪었거나, 때를 잘 만나지 못했거나. 살다가 쿵 하고 넘어질 때가 있다. 나이 먹고 넘어지면 가볍게 생채기만 나고 끝나지 않는다. 뭔가가 깊게 후벼 파고 지나간 자리는 예전처럼 잘 아물지 않는다.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다시 일어설 때 누군가가 길잡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게는 이 구절이 이를테면 밤하늘의 북극성 같은 이정표가 되어줬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定式)은 아모르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p167.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어찌 보면 엄청난 우연과 행운으로 얻은 삶.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나만의 삶.


어떤 일을 겪었든 그것은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일 뿐. 지나간 일을 거듭 되새김질하며 시간을 아깝게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 뭐라도 해볼 것인가. 답은 정해져있다.

좋든 나쁘든 기쁘든 슬프든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나무가 자라나듯 물길이 넓어지듯 지금까지의 나를 뛰어넘는 내가 되기. 쓸데없이 심각해져서 어둠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춤추는 아이처럼 경쾌하게 하루하루 앞으로 내딛기. 무엇보다도, 하루하루 내 삶을 사랑하기.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삶을 또 선택할 것처럼. Amor Fati.


니체는 평생 변방을 맴돌다 외롭게 죽었다고 한다. 그가 처절하게 남긴 외침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고동친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맸던 철학자. 그래서일까? 니체의 철학은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책이 없었다면 니체를 만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권력 의지, 운명애, 영원회귀, 낙타-사자-아이의 변신까지. 니체 사상의 큰 줄기를 친절하게 짚어준다. 글쓴이의 강연을 활자로 옮긴 책이라고 한다.

7년 전이었던가. 호기롭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펼쳤다가 너무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미치광이가 있나’했다. 그 뒤로 니체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니체에 빠져버렸다. 어렵다는 니체의 철학을 잘 씹어서 먹기 좋게 만들어놓았다. 징검다리 같은 책이랄까? 시간이 난다면 니체의 ‘원전들’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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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심성보.이동기.장은주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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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멋지게 극복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한국은 ‘국민’은 있으되 ‘시민’을 찾아보기는 힘든 사회라는 사실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다.


국민은 피동적 존재다. 국가가, 정부가, 권력자가 정해준 정체성을 내면화한 존재다. 반대로 시민은 긍정적 존재다. 시민은 정체성을 스스로 찾는다. 국가나 민족보다 더 보편적이고 중요한 가치, 민주주의가 그들의 나침반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겨우 정상으로 돌려놓은 이 나라의 미래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만들어가는 존재가 필요하다. 자기 삶에서 민주적 원칙을 스스로 구현하는 사람, 지배 받는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시민이 필요하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시민이 될 수는 없다.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시민은 ‘형성’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p14.


국민이 만들어지듯 시민도 만들어진다. 대충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라는 공정에 맞춰 대량으로 찍어내는 게 국민이라면, 시민은 조각을 빚듯 정성을 담아 만들어져야 한다. 단 거기에 강압이나 강제가 있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에 맞는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 몸에 배인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클 수 있게 교육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견해나 입장의 다양성, 또 그에 따른 ‘갈등’이나 ‘논쟁’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아무런 갈등이 없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갈등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킨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갈등과 논쟁의 여지가 없는 원칙은 오직 ‘갈등과 논쟁이 그 본질을 이룬다.’는 원칙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P26.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때때로 충돌하는 것. 그러한 충돌을 위험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보여주는 지표로 여길 수 있는 사회. 논쟁과 갈등이 항상 있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줄 아는 사람. 갈등을 억지로 없애려 하는 게 아니라 갈등 상황을 성숙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내 입장과 상대 입장을 넉넉하게 품는 품성을 키우려 노력하는 사고방식.



민주 시민을 키우려면 교육부터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 교육 목표를 주입이나 교화가 아니라 학생의 자발적 ‘성숙’에 두어야 한다. 학생을 주어진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객체가 아니라 자기 가치와 입장을 만들어갈 주체로 봐야한다. 독일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 ‘정치교육’을 발전시켜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연합국은 독일 나치즘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막으려고 패전국 독일에 미국식 시민 교육 체계를 이식했다. 독일의 정치교육(즉, 민주시민교육)은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구 민주주의 정치, 사회 제도를 잘 전달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68혁명의 열기가 독일을 휩쓸면서 정치교육의 흐름도 바뀐다. 사회 비판과 변혁을 강조하는 좌파의 입장과 체제 유지를 원하는 우파의 입장이 정치교육의 역할과 위상을 두고 심하게 충돌하게 된 것이다. 정치교육에서 어떤 것을 다루고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두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독일 교육학자들은 작은 도시 보이텔스바흐에서 양쪽 입장을 절충하는 회의를 열어 크게 세 가지 합의사항을 만들었다.


1. 강압(교화)금지: 학생들에게 특정 견해를 주입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의견을 독립적으로 만들고 스스로 성숙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 논쟁성 원칙: 학문과 정치의 논쟁점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저마다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 관점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수업이 되어야 한다.

3. 행동지향: 학생들이 특정 정치 상황과 자기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은 두 번째 원칙이다. 정해진 입장을 전달하지 않고 다양한 입장을 보여주고 학생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 좌파든 우파든 특정 이념을 학생에게 주입하거나 교화하지 않는다는 것. 교사는 첫 번째 원칙처럼 특정 입장을 학생에게 주입해서는 안 되고 학생은 세 번째 원칙처럼 판단한 바를 갖고 스스로와 사회를 위해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수동적인 국민이 아니라 능동적인 시민 한 명으로 성숙할 수 있게 학교가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보이텔스바흐에서 독일의 교육 전문가들이 합의한 기본 정신이었다.


실제로 보이텔스바흐에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사항이나 완결된 학문적 결론을 정해서 발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교육에서 꼭 지켜야만 하는 최소한의 원칙을 논의했을 뿐이다. 다만 포괄적 수준에서 전체적 흐름만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합의 사항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합의’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교사는 완벽히 중립적이어야만 하는가?’, ‘어디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가? 또는 어디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허용해야 하는가?’, ‘학생의 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가운데 어느 쪽 비중을 더 두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제기가 대표적이다. 글쓴이들이 이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한 구절을 몇 가지 소개한다.



보이텔스바흐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정치교육의 목적은 ‘정치적 판단 교육’이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사들 스스로 충분한 논거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판단을 공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 무엇보다 교사들은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참여하고, 투쟁하는 성인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은 대화, 책임 있는 실천, 그리고 현재 경험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잘 논의된 대안을 도출할 수 있다. p147.


즉, “어떤 방식으로든 보편성을 거부하는 문화 입장들, 예컨대 자기 세계관이 우월하다고 맹신해 다른 신념이나 문화 특징을 지닌 사람들을 순전히 그 신념이나 특징 때문에 탄압하거나 심지어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문화 입장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논쟁성의 경계는 “타자의 신념과 문화 특징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고 정당하다고 인정할 의지가 있는 그런 문화 입장들만을 교육 대상에서 정당한 것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p99.



한국의 시민 교육은 기형적이다. 헌법에 적힌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정치교육 금지’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시민을 기른다면서 정치적 쟁점을 다루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면서 그저 정치 제도의 파편만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실체를 감추어두고 그림자만 보게 하는 것이다.


학생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려면 교실에서도 정치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라 교사가 교실에서 ‘정치’라는 단어를 꺼내는 일조차 금기시한다. 그저 시민교육에서 어떤 내용까지 가르치는 게 ‘위험하지 않은지’에 대해 소모적이고 낡은 논쟁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가르칠 내용이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규범을 합의하고 마련하려 한 독일의 사례를 소개하는 이 책이 반갑다.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를 두고 싸울 게 아니라 학생들이 ‘어떻게 배울 것인가’의 원칙을 먼저 이야기해보는 것. 그런 자리를 만들고 공론화해보는 것. 정답을 바로 정하기보다 의견 차이를 드러낼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을 먼저 만들어보는 것. 아직 민주주의를 꽃피워보지도 못했으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처방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이루어진 배경, 과정, 내용, 미래까지 무척 자세하고 충실하게 다루어놓았다. 읽는 내내 먼저 내 수업 시간에 ‘합의’의 발상을 어떻게 적용해볼까를 생각하느라 가슴이 뛰었다. 교사의 위상과 역할을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 시민 양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과 결론이 무척 와 닿는다.


다만, 독일과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교육의 발전 과정이 어땠는지 자세히 비교하는 글이 하나 들어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군대의 점호를 떠올리게 하는 아침 운동장 조회를 아직도 여러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계속하고 있는 한국이다. 이미 나치즘을 극복하면서 ‘정상을 지향’하던 독일의 20세기 후반과,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를 극복하지 못해 사회 전체와 학교마저 ‘비정상을 지향’하던 한국의 20세기 후반은 출발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독일과 한국의 현대사를 구체적으로 비교해보고, 독일과 같은 ‘합의’와 ‘논의 과정’이 한국에서도 어떻게 해야 이뤄질 수 있을 것인지를 전망해보는 꼭지가 하나 들어간다면 좀 더 책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조금 위험한 책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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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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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할 일이 많았다.


신기루 같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까워지는 것도, 둘도 없는 사이가 되는 것도, 그러다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어 제 갈 길을 가는 것도. 시간은 모든 걸 희미하게 흩어버린다.


시간은 지나가도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남는다. 사람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장 진하게 남길까? 나는 그게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 만들어져서 둘 사이에만 의미를 가졌던 행동들. 어쩌면 이별은 상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보다도 이제는 의미 없어진 습관을 혼자 끌어안고 버텨야 하는 시간 때문에 더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올 곳은 없었지만,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텔레비전 야구 중계를 켜놓고 보는 척했다. 그리고 나와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응시했다. 나는 그 공간을 둘로 나누고, 나눠진 공간을 또 둘로 나눴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계속하다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로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p43. <반딧불이>



주인공은 꽤 오랫동안, 하지만 데면데면하게 알고 지냈던 어느 여자―먼저 죽어버린 친구의 애인이었던―와 갑자기 가까워진다. 같이 시간 보내고 같이 걸어 다니다가 어느 날은 하룻밤 자기도 한다. 주인공에게는 매주 토요일 밤마다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이별도 갑자기 찾아왔다. 그녀는 편지 한 통을 짧게 남기고 그의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남은 건 토요일 밤마다 전화를 기다리던 습관뿐.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의미가 없어져 버린 습관을 끌어안고 반복한다.



어디서 본 듯한, 아니 겪어본 것 같은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습관을 붙들고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지. 그렇게 옛 기억을 잠깐 꺼냈다가 바람결에 흘려보낸다. 이런 것도 소설의 미덕이라면 미덕이지 않을까?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하지만 그 무서운 걸 계속해서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사람이기도 하다. 그걸 만들고 나누며 좋아했던 그 순간은 진짜였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그런 시간도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소설 주인공도 반딧불이를 날려 보내놓고는 아마 다른 빛을 찾아 살아갔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이별의 그림자를 슥 그려냈다. 이 단편을 바탕으로 썼다는 《상실의 시대》에서는 이런 장면을 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단편 쪽이 좀 더 기억에 깊게 남을 것 같다. 물론, 단편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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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안에서 - 1%의 차이가 만드는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 프레임 안에서 1
데이비드 두쉬민 지음, 정지인 옮김 / 정보문화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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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한 사진을 보게 될 사람에게는 프레임 안의 세상이 존재하는 전부다. p28.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내가 찍은 사진은 내겐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남들에게는 ‘처음 보는 사진’이다. 처음 보는 사진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느끼게 할까. 아니, 매력을 떠나서 어떻게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진을 만들까.


사진을 찍어서 내보인다는 건 내가 본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행위다.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행위다.


내가 발견한 이 세계의 인상적인 한 조각을 그저 나 혼자 담아놓고 싶다면 아무렇게나 찍어도 된다. 나만 알아보면 되니까. 하지만 내가 발견한 그것을 남들도 알아보길 원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지, 어떻게 내용을 담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내 생각을 남들에게도 전하고 싶다면 말을 조리 있게 요령껏 해야 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런 걸 잘 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딱딱할 수도 있는 내용을 말랑말랑하게 풀어쓴 재주가 좋다. 내용을 보지 않고 책에 실린 사진만 봐도 즐겁다. 글쓴이가 찍은 사진들은 그것만으로도 무척 탁월하니까.


카메라를 만지고 사진을 나오게 하는 기초부터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사진을 이렇게 저렇게 찍어보다가 ‘아. 내 사진은 왜 맨날 제자리지?’라고 느껴본 사람에게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 이 책에도 카메라와 렌즈를 다루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개 이런 식이다. 어떻게 다뤄야 사진이 좀 더 의도한 바에 맞게 나오는지에 대한 팁들.







패닝을 할 때 자동초점을 사용하면, 해결되는 것보다 생기는 문제점이 더 많다. 나는 수동 초점 모드에서 피사체가 지나갈 지점에 대고 미리 렌즈의 초점을 맞춰놓고, 조리개를 잔뜩 조여 넓은 피사계 심도에 의지한다. p45.


렌즈의 선택을 “피사체가 얼마나 멀리 있지?”하는 단순한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은 문제를 말도 안 되게 단순화시키는 일일 뿐 아니라, 사진의 외양에 미묘한 효과를 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일이기도 하다. p65.


망원렌즈는 깔끔하지만 광각렌즈는 산란하다. p70.







글쓴이가 거듭 강조하는 말이 있다. ‘비전’이다. 이 책은 그 비전을 찾는 방법부터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도록 틀을 짜고 표현하는 방법까지 두루 다룬다. 반드시 어떻게 하면 잘 된다는 말을 해주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걸 생각해보면 좋은지를 알려준다.







사진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암시하고자 한다면 그 사진은 무언가에 관한 것이어야만 한다. p90.


성급하게 한 장소의 표면만 스쳐 지나면서 사진을 찍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물론 흔치 않은 일이지만 심오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둘러서 사진을 찍을 때는 대체로 엽서 사진과 같은 전형적이고 진부한 사진만 나온다. p184.


갈등이 없으면 이야기도 없다. 사진이 이야기다운 것을 포함하거나 암시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갈등이 있어야 한다. p94.


그것은 미묘하게 해야 한다. 꼭 자유의 여신상을 넣어야겠다면, 숨어 있는 작은 디테일로 만들어 다른 디테일과 대조를 이룰 수 있게 할 방법을 찾아보라. 그런 사진은 “그래, 이게 바로 뉴욕이지”하고 말하지, “이봐요! 이건 뉴욕이야! 알아차리셨나? 뉴욕이라니까!”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 그것은 선택과 배제의 행위이며, 자신이 그 장소에서 한 경험을 가장 강렬하게 반영하는 요소들은 포함시키고, 무의미한 디테일은 제외하는 일이다. p199.







책 한권 읽는다고 금방 사진을 잘 찍게 되지는 않는다. 책을 제본이 떨어지도록 읽었지만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할지 여전히 막막하다. 차라리 아무 생각없이 찍었던 사진이 더 나아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책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읽는다고 바로 그게 내 자신이 되지는 않지만, 책에 담긴 무언가를 나도 잘 해보고 싶은 욕심을 갖게 하는. 노력을 해보는 계기가 되고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돌아보는 글을 쓰며 나도 기대해본다. 언젠가 내 사진도 좋아지겠지? 언젠가 내가 하는 고민들이 동물적 감각이 되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되겠지?







재현적 사진은 “베를린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해석적 사진은 한걸음 더 나아가 “베를린은 이랬습니다. 그리고 나는 베를린에 대해 이렇게 느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차이는 아내의 여권 사진과 약혼할 때 내가 아내를 찍은 사진의 차이와 같다. … 후자의 경우 아내에 대한 사랑과 성격에 대한 이해, 그리고 기술과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써서 그것을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여권 사진은 “그녀는 이런 모습이다”라고 말한다. 남편이 찍은 사진은 “그녀는 나에게 이런 존재다. 이것이 내가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이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이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p166.







책에서 가장 깊게 와 닿은 구절이다. 재현적 사진과 해석적 사진의 차이. 특별한 사진은 피사체를 내 시각으로 해석한 사진이다. 그런 사진만이 탁월한 사진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사진을 잘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 목표는 다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를 특별하게 담은 사진을 탁월하게 남기는 것. 가장 보고 싶은 누군가를 뷰파인더로 바라볼 때 가장 또렷한 사진이 남는다. 지나간 시간의 나도 그랬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나도 그럴 것이고.


이 구절을 읽으며 글쓴이가 사진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하나를 하더라도 마음을 담아서 할 것. 내 사진도 마음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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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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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러시아 소설을 꺼내 읽는다. 뻔한 제목에 끌렸던 것일까?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골랐다


옛날 러시아 소설은 대사가 왜 이렇게 길까? 그 시절에는 원고료를 글자 수대로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길게 늘어진 말들이 읽기 힘들었지만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보니 어느새 주인공 입장이 되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역시 '대가'는 달라.


주인공은 이웃집에 사는 처녀를 깊이 좋아하게 된다. 그는 애가 타지만 그녀는 마음을 줄듯 말 듯 아리송하고 여유 있다. 어떨 땐 차갑게 밀어내다가 어떨 땐 따뜻하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그녀보다 나이도 내면도 아직 너무 어려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남자보다 여자가 빨리 크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남자는 너무 근사해서 주인공이 평소에 열등감을 품었던 사람. 그리고 주인공 가까이에 있던 사람. 주인공은 안절부절하기만 하다 그렇게 사랑을 놓친다. 주인공 내면의 무언가도 크게 바뀐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뜨겁게 좇지도, 원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참 불쌍하다. 길고 자세히 묘사해서 읽는 나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여자가 하는 말과 행동에 따라 하늘을 날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기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귀엽다. 우리, 한 번쯤 이래보지 않았나요? 아니, 지금도 이러고들 있지 않나요?


이 구절이 무척 깊이 와닿았다.


아마도 너의 아름다움의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맞다. 젊음이 아름다운 건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을 믿는 마음 때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가능성을 만든다. 그렇게 스스로 믿고 살았던 시간에 나는,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며 아름답게 세상을 비췄다.


나는 지금 어떤지 돌아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고 싶지만 이룰 수 없는 무언가도 있다는 걸 잘 알기도 한다. 난 그렇게 아름다운 젊음에서 슬쩍 멀어져왔나 보다. 나도 이렇게 칙칙한 세계로 밀려나온 것인가. 하지만 꿈을 계속 꾸고 싶다. 벌써 그러기엔 뭔가 억울하다. 주어진 가능성에 맞춰 살기보다 가능성을 만들어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남이 내는 빛을 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스스로 빛을 비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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