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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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과 끝은 맞닿아 있다. 조지 오웰의 초기작으로 알려진 『버마 시절』은 『1984』를 연상시킨다. 카우크타다는 버마인에게 있어서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주인공 플로리는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버마를 떠나지 못하고 자살한다. 조지 오웰의 탁월한 글솜씨는 역시 비극에서 온다. 불의한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극에서 어떤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특히 영국인들)은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오만하며, 플로리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체제에 순응하고 있다. 


 자전적인 요소가 다수 포함된 『버마 시절』에서 독자는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차별과 지배를 정당화하며, 명분을 내세워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조지 오웰은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국주의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옹호하거나 묵인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제도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며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남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조지 오웰은 두 가지 형태의 비판을 동시에 수행했다. 하나는 계몽을 앞세우며 식민지를 착취하는 영국 제국주의의 위선을 고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깨끗한 척 하지만 사실 남들처럼 추악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인간상을 통해 체제가 어떻게 각 인물을 무너뜨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으로 최근에 읽었던 『엽란을 날려라』와 더불어, 조지 오웰의 작품에서 거듭해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발견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인식이다. 『엽란을 날려라』에서는 돈과 사랑의 관계, 특히 가난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따라가며 집요하게 짚어내었다. 한편, 『버마 시절』에서 나타나는 베랄과 엘리자베스의 사랑, 플로리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사뭇 다르다. 모두가 가난과 거리가 멀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계산적인 사랑을 한다. 엘리자베스가 버마에 온 까닭도 남편감을 찾는 것이었고 플로리는 순수한 사랑을 내세우지만, 과거에 두었던 정부에 의해 파멸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모순적이다. 소설에 나타난 관계 맺기는 언뜻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결여된 요소들이 상당히 많다. 엘리자베스가 플로리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된 장면에서 그의 모반을 보고 경멸하는 부분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얕았는지 새삼 느끼게 한다.


 결국 이 버마 땅에서 선량한 인물은 없었다. 영국인들은 본질적으로 침략자들이고, 원주민 관리들 역시 체제에 순응하며 자신의 이익만 불리기에 급급했다. 때로 그들은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인을 모함하고 해치는 것에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가 잔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식민지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대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악한 세대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시대의 흐름을 비판없이 따라갈 수는 없다. 플로리의 맹목적인 믿음과 최후를 통해, 독자는 눈앞의 현실 너머를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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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3
제인 오스틴 지음, 나현영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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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으로 번역되어 마치 대비되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메리앤과 엘리너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제인 오스틴 특유의 감정 묘사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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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란을 날려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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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실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 인해 고든 콤스톡과 로즈메리가 결혼 이후 첫 말다툼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엽란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그러한 유형의 말다툼은, 돈은 적으나 숨길 것이 많은 부부라면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사소한 언쟁과 실존하는 아이 앞에서 모든 환상은 현실로 돌아가는 법이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이 책방에서 일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쓰였기 때문에 자전적인 소설로 해석될 수 있지만, 고든 콤스톡은 조지 오웰의 어두운 자아에 가깝다. 가난과 계급사회와 제국주의에 대한 사유 뒤편에 자리잡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여 세간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을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이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생애에 대한 모독이다. 영국 문학사에서, 아니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오웰만큼 실천적인 작가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책방 점원 시절이 묘사되어 있지만, 작품의 주 무대는 서점 밖이기 때문에 자전적인 소설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추태를 보고 있자면, 소위 말해 좀 '깬다'. 


 『엽란을 날려라』의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고든이 미국 문예지에서 받은 50달러를 탕진하는 날이었다. 그 장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돈의 신에 굴복하기 싫다면서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책방 점원이 되기를 선택한 고든이, 막대한 돈을 얻자마자 조력자인 래블스턴과 연인인 로즈메리에게 자랑하듯 돈을 막 쓰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서글프다. 고든은 지속된 가난으로 피해의식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다. 그래서 래블스턴의 호의를 가난한 자신에게 베푸는 동정으로 간주해 왔고, 여자들은 가난한 남자와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대한다. 두 사람은 성인군자처럼 고든을 챙겨주었지만, 10파운드를 하루만에 날리고 만취하여 경관을 폭행한 고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가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정말 대단한 용기를 지녔다고 말하고 싶다. 고든에게 있어서 그 날은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통속소설 같은 갈등의 해소, 평면적인 인물 관계, 다소 늘어지는 심리묘사 등의 단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흥미롭게 읽히는 까닭은, 인간 내면의 모순과 드러나는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실패작이라고 인정했지만, "역시 조지 오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과 돈,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망가뜨리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영제국의 위대함과 제국주의의 정당함을 부르짖을 때, 조지 오웰은 밑바닥 세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과 동화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절을 함께 감당했다. 그가 이 작품을 다시는 출판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까닭도, 오로지 '돈'을 위해 창작을 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떤가, 절실함이 없으면 창의력이 솟아나지 않는 것을. 만약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든이 로즈메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결말은 다분히 해피엔딩이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환상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현실이 언제나 환상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어떤 환상은 다양한 이름으로 변신하여, 세상을 바꾸는 데에 기여한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 적절한 방식으로 접목했을 때의 일이다. 작가를 꿈꾸었으나 훌륭한 카피라이터가 된 남자가, 그 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현실은 언제나 환상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이 더 구체적인 환상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는 데에 그쳤다면, 그저 사실적인 묘사에 탁월한 르포르타주 작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불멸의 우화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품들을 기꺼이 기억한다. 조지 오웰의 삶과 작품은 우리가 환상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유연하게 사고를 바꾸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식당 안에는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엽란이 많았다. 그것들은 찬장 위에, 마룻바닥에, 보조 탁자 위에 등 식당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창문 쪽에 여러 개의 화분이 놓여 있는 스탠드가 서 있는데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방에 엽란이 둘러싸고 있는 어둑어둑한 방에 들어오면 마치 수중화의 따분한 잎들에 에워싸인, 햇빛 없는 수족관 안에 있는 느낌이 든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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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영미문학연구회 소속의 학술지, 『안과밖』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학술지의 제목이 알베르 카뮈의 초기 산문집인 『안과 겉』에서 유래되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수록된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 같은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같은 작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알베르 카뮈와 생텍쥐페리는 동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들의 문장을 읽고 나면, 글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을 넘어서서, 감동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달라진다. 아마 그 이유는, 다른 작가들도 그러하겠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삶 자체를 꾹꾹 눌러담았기 때문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도 그렇고.


 여기에는 그가 최초로 발표한, 그래서 스스로도 애증을 느끼는 『안과 겉』을 읽으며 마음에 감돌았던 문장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 때로 카뮈의 작품은 비평의 대상이 아닌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미 『이방인』과 『페스트』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에게 처음에 쓴 글에 대해 아쉬운 점을 토로하는 일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그렇다, 이런 것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태양과 함께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극단의 의식의 극한점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나의 생은 송두리째 버리든가 받아들인가 해야 할 하나의 덩어리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어떤 위대함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p.81)

 

 카뮈에게 빛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때부터 『이방인』의 서사는 예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역자의 해설대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은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작가에게는 이분법의 경계가 아주 중요했다. 빛과 어둠, 생과 죽음, 조리와 부조리 등이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받아들였다.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없는 열정,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이다. 매일 나는, 짧은 한순간 동안 이 세상살이의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채 마치 나 자신에게서 앗겨가듯이, 그 승원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나다(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p.90~91)

 

 아, 내가 알베르 카뮈와 생텍쥐페리를 사랑한 이유. 그것은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운 삶을 향한 지독한 투쟁의 의지 때문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반항과 생텍쥐페리의 용기는 서로 맞닿아 있다. 반항과 용기는 특정한 행동양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에 가깝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절망 속에서도 기꺼이 희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반항하는 인간과 어린 왕자는 시지프처럼 무시받을 수밖에 없거나, 외계에서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절망을 맛보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을 언제쯤 완전히 이해하게 될까?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 되고 단순해지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p.100~101) 

 

 표제작인 「안과 겉」에 인용된 구절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라는 그의 단언이 와 닿는다. 그는 애둘러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골키퍼로서, 그는 공을 막거나 못 막거나의 기로에 놓여 있다. 솔직해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알베르 카뮈를 수식하는 표현은 참으로 많고 그를 대표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행복'을 빼놓고서 그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알베르 카뮈는 언제나 행복을 찾았다. 지금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 그 투쟁과 반항이 고난의 여정처럼 보여도 결국엔 행복에 이르고 말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모든 무대 장치와 소품, 고된 연기들은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기에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책의 구성은 본문과 해설이 절반씩을 차지한다. 생각보다 짧은 분량에 놀랄 수 있지만, 읽다 보면 길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촌철살인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다만, 글은 사람을 살린다. 더 나은 삶의 양식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조금씩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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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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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선란 작가에 대해서는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국내소설에, 아니 요즘은 문학 전체에 관심이 통 없던 나에게 한국형 SF 소설의 대가가 나타났다는 것이 신문 기사를 통해, 영상을 통해 전해졌다. 그 당시에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얼마 전에 그녀의 신작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불현듯 구매했다. 제목인 『노랜드』에 대한 첫 인상은 "방황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일까, 였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읽고 난 뒤 든 느낌은 "no homeland"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비유하자면 <노 웨이 홈(no way home)>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작품 중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기에 떠나야 했던 자들의 심정이니까. 

 

 나는 이 작가의 소설들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전체적인 감상평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필립 K. 딕의 스타일에 자신만의 주제를 덧붙여 한국의 정서에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의 이야기 또는 종말론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는 세계관은 앞서 언급한 작가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 SF 문학의 대표적인 추세이므로 딱히 흠 잡을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색채를 얼마나 고유하게 녹여내었느냐인데 나는 그녀가 그것을 잘 해냈다고 본다. 우선 갑자기 얻은 명성을 의식해서 작품에 힘을 준 흔적이 없는 것이 좋았다. 그냥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는 인상, "소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조소 섞인 분석 등이 그렇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히지 않고 차분하게 하지만 재치 있게 주제를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말이 곱씹어 보면 작품들을 관통하는 단어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유 없이 살아가자. 문학, 그중에서도 SF 문학은 장르의 특성답게 부연 설명을 참 좋아한다. 사실이든 허구든 도구를 동원하여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대담한 시도는 해야 할 말에 대해서 침묵하는 일이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다는 구차한 변명 대신, 정말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는 도전 말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에게」다. 이름을 불리기 전까지 이승에 남아야 하는 존재라니,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가? 유령으로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 마침내 이름 세 글자가 불리는 순간의 감동을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 천선란은 주인공의 이름에 대해 침묵했다. 대신 단서를 남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이름을 가진 모두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 절제가 이야기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오히려 너무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좀비를 기이한 마을의 분위기와 접목시켜 심리 스릴러처럼 그려낸 「이름 없는 몸」이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한 것은 아이러니이자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담긴 구성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제목과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싶었다. 공간은 있지만, 사람이 없기에 더 이상 고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등장인물들은 수없이 언급되었으나 정신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의 이야기는 소수이다. 고향에서 도망쳐왔다가 귀환한 자들에게 환영 인사는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순수한 상상력이 빛난 단편이었다. 바로 「두 세계」였다. 소재부터 전개까지 모두 매혹적이었다.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고 싶은 욕망을 품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다니! 심지어 온몸을 알집에 가두고 요란하게 흔들리는 기계 따위가 아니라, 마그네틱 버튼을 관자놀이에 붙이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획기적이고 기발한가! 게다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으니, 이보다 신나는 게임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애서광들에게 천선란은 예상 밖의 대답을 던진다.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던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아낀 등장인물에 의해 잡아먹혔다. 우리는 아락스와 신규영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락스는 가상현실 밖의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습득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규영을 설득했을 것이다. 규영은 순수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절대 해서는 안 될 거래를 했다. 현실에서든 프로그램에서든 몸을 죽이면 영혼도 소멸하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소름끼치는 설정이 압권이다. "아락스가 죽었다"는 문장은 이 소설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대목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떠나는 신나는 모험은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어쨌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다. 만약 천선란의 작품에 매력을 느낀 독자라면, 다른 작품을 구매해서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이다. 특히 이렇게 인상적인 한국형 SF소설은 존재만으로 반갑다. 하지만 잦은 모험을 떠난 이들이라면 느낄 것이다. 나를 완벽하게 기쁘게 하는 소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가가 된 이들은 어쩌면 더 큰 목적을 찾아 끊임없이 방랑하는 '노랜드' 속 등장인물들과 같을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맹목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들은 돌아갈 곳을 파괴하면서까지 기꺼이 먼 길을 떠난다. 누군가는 고작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라고 말리지만, 그 안에서 엿보는 새로운 세계에 한 번 감동한 자는 이전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없다. 그 환희를 위해 아락스는 살아간다. 별다른 이유 없이도 말이다.

유라는 원래부터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직접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책이라는 물질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학생 시절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서점에 찾아가 아무 책이나 샀다. 구매한 책을 전부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글자와 글자가, 단어와 문장이 서로 얽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게 늘 신기했다. 유라에게 책은 소비재라기보다 소장품에 가까웠다. 그래서 되도록 어떤 형태든 책이 주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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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9-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arover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starover 2022-09-10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