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의 인간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답장을 확인할 수 없기에 그의 편지들이 독백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보이는 애절함과 부족함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 한결 도움을 준다. 한편, 알베르 카뮈와 마찬가지로 생텍쥐페리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녹아 있다. 비평을 하기보다는 감상하려는 목적으로, 여기에 그가 쓴 글의 일부를 남긴다.

"글을 쓰기 전에 우선 살아야한다"라고 앙트완느는 대답했다. 다른 그의 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 P22

리네트, 항공 비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당신 알고 있소? 이 곳에서 비행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오. 내가 비행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여기서의 비행은 부르제 공항에서 하던 것과 같은 스포츠가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일종의 전쟁이오. - P73

밤새도록 나는 불안한 상태였소.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소. 누가 자고 있는가. 내 침대에 누워 내가 밤새우고 있을 때면 환자를 지키는 간호원보다 나는 더 불안하다오. 여러날 밤을 새울 때 나는 나의 보물들을 잘 지키지 못하지요. - P97

리네트, 아가씨들은 그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들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아름다운 모든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지만 바로 그곳으로 그는 아가씨를 찾으러 갔다오. 이렇게 한다는 것은 각자 충실한 노력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지요. - P98

그렇지만 연극이란,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연극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서만 자주 상연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도시인 페르피냥에서도 병원 창문 위에서 어떤 암종 환자가 자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치 냉혹한 소리개처럼 공연히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 도시의 평화는 그 때문에 바뀐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보편적인 중요성도 띄지 않는 고통도 아니고 정열도 아닌 것이 바로 인류의 기적이다. - P119

밤을 새운 암환자가 바로 인간의 두려움의 중심 인물이다. 어쩌면 광부 한 사람이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과 비길 만하다. 나는 인간이 문제가 될 때 이 무서운 숫자를 사용할 줄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단지 인구 문제에서 볼 때 수십 명의 희생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타버린 몇 채의 신전은 계속 생활하고 있는 한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르셀로나에서는 어디에 공포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관점을 거부한다. 아무도 인간의 제국을 측량하지 못한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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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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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몇 단어를 써야 하는가?" 이것이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글을 쓰는 노동자로 일컬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런던은 끊임없이 글을 써야 했고 그 결과가 200여편의 소설들과 500여편의 기사들, 그리고 수백 통에 달하는 편지들이었다. 창작의 결과로 돈과 명예를 원없이 쌓았지만, 말년에는 약물 중독과 지병으로 고통받다가 사망한, 삶의 모든 구간에 모순과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잭 런던의 삶은 그가 쓴 『마틴 에덴』(Martin Eden, 1909) 속 주인공과 매우 유사하다. 


 잭 런던은 먼지가 아닌 재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말마따나 이루어졌다. 40년의 생애 안에서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굴을 약탈하는 해적이었다가 그 해적을 잡는 순찰대원이 되었고, 사회주의자로 오랜 기간 활동했으나 백만장자였고, 남태평양 제도를 일주하고 한국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으나 백인우월주의를 놓지 않았다. 그밖에도 금을 캐기 위해 알래스카로 여정을 떠났다가 실패한 일, 시장 선거에서 낙마한 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랑자 감옥에 수감된 일 등이 있었지만, 생애 전반을 보았을 때는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제3자의 시선에서 잭 런던을 판단할 때, 무엇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삶에서 어떤 요소가 의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 준다. "어떻게 해서 그는 글을 쓰는 노동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왜 아직도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지칭하는가?"라는 두 가지 물음을 해소해 준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은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루스를 만나기 전, 마틴 에덴의 삶은 단순하고 육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교육받지 못했기에 구사하는 언어부터 풍습까지 소위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루스를 동경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속한 세계가 곧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곳이라고 인식했다. 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마틴 에덴은 책을 마구 해치우는 것으로 지식의 갈망을 해소했다. 하지만 마틴은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무지만 확인할 뿐이었고 책에서 배우는 내용이 실제의 삶과 괴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루스의 일가와 그들이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때 그는 언제나 실망했다. 마틴 에덴이 지향하는 가치는 궁극적인 진리를 얻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이었으나 다른 이들의 마음은 시간을 적당히 때우는 소재의 별볼일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루스,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어느새 마틴의 정신을 잠식한, 지식에 대한 강박관념과 잠재적인 특권의식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에덴은 스스로를 노동자의 세계에 있다고 간주했다. 어느새 그가 쓴 글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부와 명예를 순식간에 거머쥐었지만, 그는 상류층이나 지식인들과의 모임을 경멸했다. 그가 굶주리기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썼을 때 거절당했던 글들이, 명예 때문에 갑자기 엄청난 판권을 받는 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는 지식만으로,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루스와의 사랑이 그랬고, 작가로서의 성공이 그랬다. 마틴은 루스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마틴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결국 남들보다 높은 곳에 섰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설의 결말부에 깊은 물로 스스로 뛰어드는 것은 원래 그가 속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헛된 발버둥에 가까웠다. 죽음의 찰나에 그는 어떤 빛과 희망을 발견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어둠뿐이었다. 잭 런던의 삶이 그랬듯, 마틴 에덴의 삶은 모순투성이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았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활동할 당시에는 비평가들로부터, 동료 작가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시간이 지났을 때, 어떤 대중도 그를 기억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21세기의 독자들이 『마틴 에덴』을, 그리고 잭 런던을 다시 읽어야 할까? 작가가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흙이 아닌 물거품으로 살아가기'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잭 런던과 마틴 에덴)처럼 매 순간에 전력을 다해 살아갈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이 지녔던 편협한 사고방식까지 계승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았고 작가가 품었던 사고방식이 언제나 옳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활자를 비집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향한 의지를 본다. 강력한 정신은 시대와 공간, 그리고 언어를 초월하는 법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의 희열과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기대, 그리고 타인에게 이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애틋함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때로 그에게 글쓰기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으로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렸을 적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읽었던 책들이 그의 세계를 형성했듯이, 마지막에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쓰기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언제 재가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 속에서 기억하고 싶은 스스로의 조각을 적어놓기를 원했으리라. 그는 스스로 흔적이 남지 않은 물거품이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읽혀짐으로써 기억되기를 바랐을 테다. 그렇다, 당신의 의지는 어쨌든 전송되었다. 어떻게 끝날지는 몰라도 나 역시 마음 닿는 데까지 가보겠다. 당신이 굳게 믿었던 사랑의 힘을 기억하며.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나요?" 그녀는 속삭였다.

 "처음부터, 당신을 처음부터 본 바로 그 순간부터, 그때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미쳐 버렸고, 그 이후로 점점 더 미쳐갔어요. 지금 나는 최고로 미쳐서, 거의 정신 이상이에요. 너무 좋아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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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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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의 <너는 나의 문학>이라는 노래가 있다. "너는 나의 문학 작품이야"라는 고백을 다양한 책을 통해 전하는 가사가 인상적인데, 그 중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이 언급된다. 헤르만 헤세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막스) 데미안은 익숙한 독자들이 더럿 있을 것이다. 그 명성과 영향력이 지대했기에 어린 시절 『수레바퀴 아래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던 내가 『데미안』을 이제야 읽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다분히 담긴 이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너무 커버린 탓이겠지. 기존의 세상에 대한 인식을 깨라, 특히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막스 데미안의 외침은 오래 전부터 내면화되었던 주제였기에 '늦은 혼잣말'이 되었다. 그래도 박소은의 노랫말이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너는 나의 데미안"이라는 말은 "너는 또 다른 나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왜 그토록 정해진 틀과 자신을 가둔 세계를 깨고자 했을까? 때로는 그 보호되고 정제된 세상이 자신을 지켜주기도 하는데 말이다. '새'라는 상징성이 큰 까닭은 거기에 있다. 아기새는 어미새의 둥지 아래서 먹이를 먹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단순히 주변의 환경을 깨는 것에 그친다면, 성장과 반항은 무의미하다. 그 모든 몸짓들이 도약으로 이어졌을 때, 새가 느낀 고통은 커다란 희열로 변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원리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때로는 더 나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억압을 거스르는 태도, 제1차 세계대전이 주는 상실감 등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의 일부였다. 그러한 경험들이 많은 것을 대변해줄 수는 있어도 전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헤르만 헤세의 발칙한 사유들, 예를 들어 아브락사스나 카인의 표식 등에 대한 기나긴 설명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은 유럽처럼 카톨릭(내지는 개신교)이 일상생활에 배어 있지도 않기에 야곱의 씨름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들이 표제로 나올 때 의아함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1장부터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구제해주는 '사이다'를 선사하는 데미안의 모습이 더 각인되었으리라. 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양면적이다. 구세주처럼 보이는 존재가 악마가 되고, 영원한 사랑처럼 여겨진 존재가 사실은 과장되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싱클레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변에서 알을 깨라고 다그쳐도, 선택은 그대의 몫이니까. 

그는 그저 한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내면에서 빛났으며, 그의 마음에 기쁨의 빛을 반짝이게 했다. 그는 사랑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까지 찾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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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뗏목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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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세계문학의 시작점이 된 주제 사라마구. 노벨문학상이라는 수식어든,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수식어든 그것들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시작된 13년여간의 여정은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지만, 방향성은 동일하다. 요즘 들어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그 탐구의 과정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들은 늘 소환된다. '도시' 시리즈로 시작하여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적인 주제인 '자발적 신성모독'의 정점에 오른 『예수복음』이나 『죽음의 중지』 등의 작품들은 나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된다. 포르투갈에서 파문을 당하고 추방자의 길에 올랐지만, 누구보다 조국에 대해 기억하고 회고하는 그의 면모는 제임스 조이스를 연상시킨다. 포르투갈,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는 그에게 애증의 관계인 셈이다. 『돌뗏목』은 주제 사라마구와 포르투갈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책이다. 


 이 서사시는 마치 물수제비처럼, 페드로 오르세가 던진 돌 하나가 반도를 움직이게 했다는 작은 상상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마술적 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다. 시간과 물리 법칙을 초월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세계가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다. 언론은 페드로 오르세를 찾아 나서고 그와 얽힌 인물들, 주제 아나이수와 조아킴 사사 등이 충돌한다. 그의 오랜 독자로서, 이 작품만큼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순간들 하나하나가 무척 새로웠다. 


 나는 이야기의 흐름이 주는 흥미로움에 주목하고 싶다. 분리된 반도가 뗏목이 되어 대양을 유랑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보통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 예컨대, 한반도가 분리되어 태평양을 떠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소설가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발생하는 대혼란을 묘사할 것이고 어떤 이야기꾼은 대통합의 기회로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romance)'를 다루는 주제 사라마구는 당연히 혼란보다는 통합에 주목한다. 포르투갈은 빠른 속도로 떠다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구의 회전을 느끼지 못하듯 꽤나 일상을 잘 유지한다. 반도의 항해가 멈추었을 때, 그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임신하는 것은 거대한 상징이다.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우리는 새롭게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 평화로웠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배다른 자식이 나오는 불상사도 발생했지만, 이 모든 것이 허구임을 알고 있는 독자는 작가의 메시지에 주목하면 될뿐이다. 일부러 그가 등장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한 까닭도 다른 작품에서 확보한 보편성을 제거하고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결국 반도는 멈추고, 그 위치와 방향은 바뀌었다. 어떻게 되었든 이 사건은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을 넘어서서 각 나라들의 반응과 움직임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작가의 솜씨가 매우 탁월했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을 읽기 전, 반도가 움직인 사건의 파괴적인 영향이나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같은 감옥 생활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외부의 시선에서는 정치적으로만, 내부의 시선에서는 일상적으로만 분석하여 그러한 상징을 차단한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구호 따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일들의 집합임을 강조한다. 세계의 해석은 다를지 몰라도, 적어도 포르투갈인들은 그래 왔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 기적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과바이는 마침내 내일 라코루냐의 정신병원과 연락이 닿으면 어머니가 다른 환자들과 함께 이미 내륙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어떠신데요. 전과 마찬가지로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 답변은 다른 누구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은 땅이 다시 사람들로 복잡해질 때까지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그곳에서 계속 머물며 기다릴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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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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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과 끝은 맞닿아 있다. 조지 오웰의 초기작으로 알려진 『버마 시절』은 『1984』를 연상시킨다. 카우크타다는 버마인에게 있어서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주인공 플로리는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버마를 떠나지 못하고 자살한다. 조지 오웰의 탁월한 글솜씨는 역시 비극에서 온다. 불의한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극에서 어떤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특히 영국인들)은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오만하며, 플로리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체제에 순응하고 있다. 


 자전적인 요소가 다수 포함된 『버마 시절』에서 독자는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차별과 지배를 정당화하며, 명분을 내세워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조지 오웰은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국주의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옹호하거나 묵인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제도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며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남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조지 오웰은 두 가지 형태의 비판을 동시에 수행했다. 하나는 계몽을 앞세우며 식민지를 착취하는 영국 제국주의의 위선을 고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깨끗한 척 하지만 사실 남들처럼 추악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인간상을 통해 체제가 어떻게 각 인물을 무너뜨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으로 최근에 읽었던 『엽란을 날려라』와 더불어, 조지 오웰의 작품에서 거듭해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발견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인식이다. 『엽란을 날려라』에서는 돈과 사랑의 관계, 특히 가난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따라가며 집요하게 짚어내었다. 한편, 『버마 시절』에서 나타나는 베랄과 엘리자베스의 사랑, 플로리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사뭇 다르다. 모두가 가난과 거리가 멀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계산적인 사랑을 한다. 엘리자베스가 버마에 온 까닭도 남편감을 찾는 것이었고 플로리는 순수한 사랑을 내세우지만, 과거에 두었던 정부에 의해 파멸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모순적이다. 소설에 나타난 관계 맺기는 언뜻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결여된 요소들이 상당히 많다. 엘리자베스가 플로리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된 장면에서 그의 모반을 보고 경멸하는 부분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얕았는지 새삼 느끼게 한다.


 결국 이 버마 땅에서 선량한 인물은 없었다. 영국인들은 본질적으로 침략자들이고, 원주민 관리들 역시 체제에 순응하며 자신의 이익만 불리기에 급급했다. 때로 그들은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인을 모함하고 해치는 것에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가 잔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식민지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대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악한 세대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시대의 흐름을 비판없이 따라갈 수는 없다. 플로리의 맹목적인 믿음과 최후를 통해, 독자는 눈앞의 현실 너머를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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