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호 품목의 경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7
토머스 핀천 지음, 김성곤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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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은유와 상징을 해석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러모로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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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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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셸리의 기념비적인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역자가 해설에서 밝혔듯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공의 괴물은 과학기술과 문명에 대한 경고이자 메리 셸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비추는 역할을 수행한다. 처음에 내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존재가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만약 인간으로 볼 수 있다면,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이 아니라면, 감정과 사고를 지닌 기이한 존재를 만든 빅토르는 왜 칭송받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괴물의 이름을 창조자의 이름으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괴물의 이름을 작가가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가 괴물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자주 애용되는 소재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물리칠 때, 괴물이 제시한 정답이 인간이라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인간이야말로 쉽게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종종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그렇게 된다. 괴물은 자신의 비극을 합리화하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괴로 몰아넣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빅토르가 만든 괴물이 인간인지 아닌지는 작품의 말미에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창조자는 생명체와 자신 중 반드시 한 쪽이 파멸해야 하는 시합을 열었기 때문이다. 괴물이 증언하듯이, 그의 광기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 괴물은 옆에서 발명가의 행보를 항상 지켜보았고 그(여자 괴물을 원했기에)의 눈에 프랑켄슈타인은 겉모습을 제외하면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이 가진 명성에 비해 상당히 늦게 이 소설을 접했다. 내용이 고전문학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것임에도 19세기 영국 소설의 중요한 계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풍조에 기꺼이 어긋나기를 택한 천재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일종의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작업이었지만, 메리 셸리는 그 안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생애를 담았다. 내가 포착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괴물이 드 라세의 오두막에서 읽은 고전에 대해 감상을 남기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시점을 계속 변화해가며 어느 한쪽이 편향된 시선으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사태를 예방했다.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괴물 역시 사연이 있었으나 결코 옹호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론이다. 이 단순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작가는 주변 인물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자로서, 제3자로서 작가의 입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감정적으로 몰입되는 부분도 있었다. 엘리자베트와 결혼을 약속했으나 밝은 미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빅토르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녀가 괴물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을 상상하니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동시에 그를 옹호하는 대신 그녀의 죽음에 그가 일조했다는 냉정한 생각이 한편에 자리잡았다. 가상의 이야기, 또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여 그들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을 상상하고 준비하게 만든다. 문학이 일종의 교육이라면, 그리고 교육이 삶 전체에 걸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또 다른 세계를 찾아 헤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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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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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의 정수는 마지막 문장에 달려 있다. 특히 반전이 존재하거나 특이한 설정이 존재하는 단편들의 경우 그 중요성은 배가 된다. 이러한 법칙을 적용했을 때, 필립 K. 딕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에 더 걸출한 능력을 보인다. 정신착란이나 꿈처럼 보이는 인상들이 반복되면 읽는 이들은 쉽게 지친다. 하지만 잘 마무리된 단편은 그의 정신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납득이 될 만큼 설득력이 있다. 수많은 SF 영화의 영감을 제공하거나 실제로 영화가 된 그의 단편들을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었고, 마침내 접하게 된 그의 대표작들은 왜 그가 여전히 최고의 SF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어렴풋한 인상을 남기기보다 각 작품들의 장단점과 특징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리뷰를 다시 보았을 때,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1.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워브의 원형을 찾기 위해 독자는 작품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워브는 돼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다. 자신을 먹어치운 생명체의 뇌를 장악하여 생존한다. 설정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짧은 분량 안에서 작가의 독특한 생각과 워브의 평온함이 주는 묘한 공포감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또한, 필립 K. 딕이 주로 모색하는 주제인 "인간은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대해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입문하기에 적절하다. 


 2. 수호자: 내가 여러 버전으로 존재하는 작가의 단편집들 중 『마이너리티 리포트』을 선택한 이유였다. 필립이 선호하는 배경은 언제나 핵전쟁 이후 몰락한 문명 또는 새롭게 세워진 문명이다. 이 소설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상에서 활동할 수 없는 인간 대신 리디라는 로봇이 전쟁을 대신 수행하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지표면이 파괴된 순간 끝나 있었고, 리디는 인간의 눈을 속인 채 자연을 보전하고 있었다. 적절한 반전과 흥미로운 설정들은 소개만으로 나를 매혹하기에 충분했고, 실제로 읽으니 더 만족스러웠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가 냉전과 메카시즘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제시하려는 대안에 가깝다.


 3. 두 번째 변종: 상상력이 빛나긴 하지만, 그 빛이 매우 날카로워 독자들을 때로 혼란스럽게 한다. 굳이 반전을 넣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곱씹어 볼수록 주제의식이 강렬해진다는 효과가 있지만, 변종이 끊임없이 생기고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려 한다는 결말을 보고 나서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즉 서술자가 불안정할 때 독자 역시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절 이후의 세상의 모습을 창의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4. 콜로니: 이른바 '생활 공포'라고 할까? <트랜스포머>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기기와 자동차가 순식간에 인간을 위협할 때일 것이다. 도구가 도구가 아니게 될 때, 인간은 어떠한 위치에 있을까? 옷조차 믿을 수 없어 발가벗은 채 우주선에 오르는 군상을 묘사하는 필립 K. 딕의 어조에는 조소가 느껴진다. 인간이 인간으로만 남아 있을 때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는 상상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5. 페이첵: 표제작이 없었다면, 분명 이 작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가장 영화로 구현하기 좋은 소재와 줄거리를 갖추었다. 물론 실사화된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준 '시간 트릭'은 무척 참신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추격전에서 느껴지는 스릴, 그리고 작가가 강조한 '사소한 물건의 놀라운 쓰임새' 등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만 설정에 있어서 의문스러운 지점들이 존재했다. 개인의 삶을 얼마든지 박탈할 수 있고, 억압할 수 있는 보안경찰이 기업 앞에서 쩔쩔맨다는 설정이, 다른 디스토피아에 익숙한 나로서는 설명력이 부족했다. 또한, 아무리 무력하다 해도 수십 년 동안 시간 창문을 개발했는데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제닝스 혼자서만 그것을 수리할 수 있다는 것들도 아쉬웠다. 하지만 만족스러웠기에 아쉬운 지점이 보이는 법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 단편은 매혹적이었다. 


 6. 변수 인간: 과거의 능력자가 현재에 찾아와 미래를 조작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것이다. 변수 인간에 집중하기만 해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필립스러움'이 사족이 되었다. 센타우리 행성과의 전쟁을 넣을 필요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확률을 계산하는 컴퓨터에 의존하는 라인하트를 비꼬고, 더 높은 이상을 꿈꾸는 토머스 콜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지구 내에서 이야기를 해결해도 별 문제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작가의 아이디어가 상당히 두드러지는 작품이며, 꽤 집중력 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기에 기꺼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7. 통근자: 가상의 세계로 인한 현실의 붕괴라는 소재는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가상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이야기는 이제 새롭지 않다. 필립의 유쾌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예지적인 작품이다. 


 8. 요정의 왕: 작가가 시도한 몇 안 되는 판타지 소설이다. 하지만 필립 K. 딕에게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그럴 듯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아무리 무리한 설정을 사용해도 그가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가미가 되면 그만이다. 핵폭탄과 수소폭탄이 몇 번이 터지든 상관없다. 그에게는 판타지 소설이 일반 소설과 다를 것이 없다. 때로 이러한 환상적인 이야기와 해피엔딩은 독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9. 단기 체류자의 행성: 적어도 필립 K. 딕은 인간의 정의에 '지구에 거주하는 생물'을 절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우주로 공간을 확장한 다음, 인간의 거주지를 지구 밖의 어딘가로 보내버린다. 전쟁 이후, 수많은 돌연변이들로 인해 우리가 알던 인간의 정의는 바뀌었고, 지구는 우리가 아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대신, 새롭게 정의된 인간들이 그 영역을 차지했다. 그러니, 제목에 나타난 '단기 체류자'는 바로 현 인류다. 

 

 10. 자가 광고: 굉장히 극단적인 방식으로 광고를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광고에 지친 남자가 태양계를 벗어나 재가 되는 이야기이다. 끝까지 에드 모리스의 옆에 붙어서 광고를 해대는 파스라드를 보면, 쉴새없이 광고에 노출되는 현대인으로서는 경각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결말에 대해 불만을 내뱉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주제의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 어차피 그의 이야기는 모두 대체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11. 황금 사나이: '인간을 적대하는 절대자'라는 설정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다. 언제나 선제공격은 인간이 먼저 했으니까. 진화된 인류는 그냥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고, 기존의 인류는 그것을 허용할 리가 없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하지 않는가? 끝에 누가 살아남는지 말이다. 


 12. 제임스 P. 크로우: 「페이첵」에서 사용되었던 시간 창문이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인류가 전쟁으로 멸망하고, 로봇과 인간의 위치가 도치된 미래 세계이다. 줄거리를 설정대로 따라가면 의문스러운 지점이 생기기 때문에 일종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으로는 두 상응하는 존재의 공존은 불가하다는, 필립 K. 딕의 쓸쓸한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3. 사칭자: SF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공포소설에 가깝다.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의심하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만약 1인칭으로 전개되었더라면, 주인공이 느낀 감정이 더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립 K. 딕은 독자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작품 속에 던져진 단서와 암시를 확인하고 그가 제시하는 결말에 대해 사유하길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저게 올햄이라면, 나는 분명..."이라는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기폭제라는 것에 대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이 폭탄이라고 인식되는 순간, 사칭자의 세계는 붕괴된다. 앞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복제 생물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해답일 것이다. 


 14. 음울한 대지에 고하노니: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적 공포'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다만 필립은 언제나 그것을 지구 전체의 규모로 확장시킨다는 차이점이 있다. 실비아의 형상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장악하여 마침내 릭까지 차지해버리는 모습, 그리고 정작 본인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 공포감을 유발한다. 작가의 창의력이 절제 있게 구현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 작품이다. 


 15. 조정 팀: 현실의 붕괴, 조정 팀, 그리고 진실을 알 수 없는 투쟁 등, 이 소설은 '필립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그의 팬이라면 이 소설을 사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줄거리와 결말에 대해 의구심을 표할 것이다. 나는 물론 만족했다.

 

 16. 아버지 괴물: 그의 다른 SF 소설들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그의 순수한 상상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재미 있게 감상할 수 있다. 다만 미완성된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결말은 찝찝함을 남긴다. 조금만 이야기를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들었다.


 17. 포스터, 넌 죽었어!: 전체가 대의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선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메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태도가 엿보인다. 미국과 러시아 독자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대중들 대부분이 만들어진 증오의 물결에 휩쓸려 지쳐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그놈의 명분이 뭐라고 우리의 삶이 침해되고, 때로는 빼앗겨야 하는가? 이러한 부당함에 대한 의문은 표제작으로 연결된다. 

 

 18. 독점 시장: 이 작품까지 보고 나서 느낀 것은, 특별한 반전이 없으면 필립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힘이 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는 호기롭게 독자를 사로잡고 나서 후반부에 그것을 풀어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은 끝까지 나를 붙잡았지만, 이 소설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19. 얀시의 허울: 여러모로 실존 인물보다는 '빅 브라더'를 연상시킨다. 조지 오웰이 만든 인물과 뚜렷한 차이점은, 빅 브라더가 힘과 단순한 구호로 사람들을 억압한다면, 얀시는 그럴 듯한 말장난과 눈에 좋은 허울들로 대중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얀시의 환상에 휘말려 자신의 의견을 잃어버린 자들을 제시하는 이 단편은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경고가 된다. 자극적인 언론이나 대중매체를 접할 때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리고 자신만의 사유를 가지고 접근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기게 한다.


 20. 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영화는 알고 있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리고 직접 읽어보니 납득할 만큼 잘 썼다.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많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프리크라임의 정당성,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우위, 예측할 수 있는 미래라는 환상 등 '필립스러움'의 장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상해 보라. 나는 평화롭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나를 살인죄로 체포하는 장면을.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하루아침에 수용소에 감금되는 모습을. 카프카나 카뮈의 소설에서 나오는 부조리한 상황이 미래에 현실이 되고, 시스템이 되는 모습을. 그러한 상상력이 있다면, 누구나 프리크라임 제도를 거부할 것이다. 소수점에 그치는 범죄율 따위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인간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낙관적인 법이다. 다시 말해, 필립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알았고, 프리크라임의 현실화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불가능한 설정을 도입하여 인간의 의지와 정의에 대해 묻는 것이다. 누가 평범한 인간을 살인자로 만드는지 말이다. 


 그의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통찰만큼이나 날카롭다. 문체나 구체적인 설정, 캐릭터 등이 상상력을 못 따라간다는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주제의식이 탈시대적인 배경과 만나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한 것을 볼 때, 그의 작품은 계속 조명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똑같은 위기가 찾아올 때, 인간은 실수를 반복할까? 아니면 교훈을 찾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답을 찾을까? 그 답이 나오기 전까지 '필립스러움'은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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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전집 2 러브크래프트 전집 2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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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작품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우주에서 온 색채‘와 ‘광기의 산맥에서‘는 각각 우주적 공포와 미지에 대한 공포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두 작품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다. 러브크래프트 입문을 마쳤다면, 당장 도전할 만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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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 - 들길을 가는 사내에게 건배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6
잭 런던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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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와 문명'이라는 주제에 맞춰 여러 작가들을 탐색하다가, 나는 다시 잭 런던을 떠올렸다. 그가 남긴 야생의 기록들은 원시와 문명의 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했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대개 거칠고 감각적이다. 그의 문체는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조차 포착하게 만들며 장면들을 생생한 이미지로 남긴다. 그래서 잭 런던의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어렴풋하지만 선명한 인상이 하나씩 남는다. 이번에 읽게 된 『잭 런던』 현대문학 단편선은 '클론다이크 이야기'와 이외의 단편들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분마다 뚜렷한 특징이 있다. 

 

 단편들의 공통점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그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는 '삶을 향한 의지'라고 뭉뚱그려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단편들은 그 이상의 신념을 담고 있다. 언뜻 보면 '클론다이크 이야기' 속 인물들은 삶을 그저 연명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지금의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었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누군가는 실패했지만, 누군가는 이루었다. 그 의지들이 모여 광기와 모순의 시대를 만들었다. 역자도 인정했듯이, 잭 런던을 이야기할 때 그의 삶을 빼놓을 수 없고, 잭 런던만큼 미국 문학사에서 역동적이면서 모순적인 인물도 드물다. 그것은 그가 시대의 조류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하며 유유히 누비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잭 런던의 장편들 위주로, 그리고 원시의 세상에 대한 기록들만 살펴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소재가 무척 새로웠다. 잭 런던과 알래스카의 겨울은 한 몸인 것을 알았지만, 그가 이토록이나 인디언들의 삶과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서술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옹호하고 있다. 비록 백인 문명이 그들을 살육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고, 여전히 그는 백인우월주의를 품고 있었지만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자신의 단편을 통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어떤 자들이 더 우월하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쩌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의 논리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을. 잭 런던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았나. 


 각 부분(클론다이크 이야기와 그 외)에서 인상적인 단편을 하나씩 꼽자면, 「불 피우기」와 「스테이크 한 조각」이었다. 전자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불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자연스럽게 부각시키면서,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처절한 투쟁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안에서 긴장감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탁월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줄거리가 꽤 긴 편이다. 과거의 챔피언인 톰 킹이 돈을 벌기 위해 샌델이라는 젊은이와 권투 시합을 벌이는 과정을 담았는데, 톰 킹의 육체와 정신을 번갈아 조명하면서 실제로 시합을 관전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참 다양하다는 것, 그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잘 다룬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어쩌면 이 책에 담긴 단편들 중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단순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생활의 영역에서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소설을 보며, 잭 런던이 말하려 했던 것은 '삶을 지키려는 의지'였음을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삶을 지킨다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한 채 편안함을 추구하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더 나은 무엇인가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끊임없이 싸워서 쟁취하는 것을 진정한 수호라고 여겼다. 때로는 그 싸움의 대상이 잘못되어서 등장인물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한겨울에 맨 몸으로 들개와 싸울 용기가 없는 자는 그의 작품에 담긴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삶은 언제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잭 런던이 사회주의자로서 앞장서고, 종군기자로서 조선까지 찾아온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는 겪어보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다는 격언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멸의 영역을 상상하거나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추론하지도 않았다. 영하 45도는 뼛속을 파고드는 혹한이라 장갑, 귀마개, 따뜻한 모카신, 두꺼운 양말로 막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에게 영하 45도는 정확히 영하 45도였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 P243

나는 이 생각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몰라. 나보다 앞선 오랜 옛날의 생각이고, 그러니까 진실이야. 사람은 진실을 만들지 않아. 눈이 멀지 않았다면 진실을 보고 알아차릴 뿐이지. 내가 생각한 이 생각이 꿈일까?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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