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전부는 아니에요 - 16명의 영미 여성 시인선 소명출판영미시인선 8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외 지음, 김천봉 옮김 / 소명출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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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분명 독자를 순수하게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결코 순진무구함이 아니다. 나의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눈으로 세상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순수함이다. 시는 희곡, 수필, 소설 등 다양한 문학의 장르 중에서도 가장 순수함이 압축된 결정체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치 있다. 글자 수와 적절한 배열, 운율과 구성을 철저히 신경 쓰는 장르가 어떻게 '계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어떠한 형식 속에서도 정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답하리라. 시에는 언제나 차가운 글자 안에 뜨거운 진심을 담는다. 이러한 모순의 공존은 문학이 아니면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문학 밖의 세상은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인종과 언어는 물론이요, 이해 관계와 가치관이 다르면 서로를 배척하고 억압하기에 바쁘다.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칼날만 들이미는 현실 속에서 문학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가르쳐 준다. 그 순수함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문학은 아직도 유효하다.


 『사랑이 전부는 아니에요』는 영미시를 잊은 나에게 그것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로 유명한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의 숨겨진 감상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나 에밀리 디킨슨과 같은 저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오롯이 맛볼 수 있었다. 영문학도였던 시절, 다양한 시대의 시를 공부하고 분석했으나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나는 희곡과 소설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그나마 기억이 남은 것은 사무엘 콜리지(Samuel T. Coleridge) 의 「늙은 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였는데, 이 작품은 일종의 환상 문학으로서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이지, 그 안에 담긴 감정이나 표현이 뚜렷하게 각인되지는 않았다.


 이 시집은 16명의 여성 시인의 주요한 작품들을 엄선해서 그들의 작품 세계 및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게 구성되었다. 소설로만 접했던 시인들의 일상적인 시와 감상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시대상과 그에 대한 고찰도 소중했다. 본격적으로 나를 매료시킨 존재는 에밀리 디킨슨이었다. 「달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The Moon is Distant from the Sea)부터 시작해서 「가을에 당신이 오신다면」(If You Were Coming in the Fall)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첫 번째 시는 자연물인 달을 이용해서, 두 번째 시는 시간대를 확장하여 애절함을 강조한다. 특히 후자의 마지막 연인 "그런데 당장, 아련한 날개에 길이조차 모르는 시간이 언제 침을 쏠지 모르는 도깨비 벌처럼 나를 콕콕 찔러대네요"는 화자의 본심을 드러낸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몇백 년이라도, 영원이라도 기다릴 수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림은 너무나 쓰라리다. 


 한편으로 영미 문화권답게 종교시도 종종 보였다. 루이자 메이 올컷은 「나의 왕국」(My Kingdom)에서 감정 조절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데, 이 고백의 대상이 친아버지(father)인지, 아버지 하나님(Father)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원문을 찾아 보니 대문자로 표현된 것을 보아, 신에게 호소하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그밖에 자연물을 이용한 에이미 로웰의 서정시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서정적인 「공상」(Fancies)은 강렬하게 나를 매료시켰다. 개중에는 처음 듣는 이들도 있었고, 익숙한 이들도 있었지만, 각자의 시가 개성이 뚜렷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적으로 잘 전달되어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한 편의 시가 내 인생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시의 감상은 반드시 축적된다. 말하자면, 때묻은 영혼을 한 차례 닦아 준다고 해야 할까? 시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선택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사람들이 낯선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실제로 나는 아이들에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히고, 암송하게 하여 감상을 물어본 적이 있다. 「만약 내가 아픈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If I can stop heart from breaking)이라는 시에 대해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고 대답한 학생이 있다. 또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말한 아이들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존중한다. 그러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들에게 칭찬하고 싶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그 열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당장 그것을 실천하지 못해도, 결국 발현될 테니까. 세상은 언제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꾸는 것이니까. 시를 잊은 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시를 읽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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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가 오르기 전에 - 기후위기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성현 지음 / 애플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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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되는 구절이 상당히 많이 나와서 읽다 보면 피로감이 쌓인다. 차라리 질문을 축소하고, 부가적인 답변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기후 공학이나 지구 공학에 대한 개념을 소개한 것,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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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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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어찌 됐든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 인간성이 모든 소설을 불완전하지만, 매력적으로 만든다. 아니, 정말로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소설이 존재할까? 시대 중심으로 보든, 작가 중심으로 보든, 독자 중심으로 보든, 어떤 작품이나 고유한 결점과 장점이 있다. 그럴 때 창작하는 자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결점을 보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볼 수 있는 세상 너머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상상이야 가능하겠지만). 선택지는 매력을 강화하는 일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객관적인 눈과 자기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차가운 벽」을 쓴 트루먼 커포티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 혼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유년 시절을 지나, 소설의 성공으로 잠시 환락을 누렸으나, 이후의 실패는 그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배경 설명을 알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그의 단편 소설 속에서는 그가 지닌 결핍과 불안이 발견된다. 표제작인 「차가운 벽」을 포함한, 첫 10편의 단편 소설은 뒤틀린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 부분을 통과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작가에게 뭔가 커다란 결핍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 기이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찾아올 수 있지만, 그것을 글로 담아내고 계속 고치면서 내면화하기란 보통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설 쓰기란 삶이 반영된 하나의 실험이자, 끝없는 자기 혐오와의 싸움이다. 문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외롭고 독특한 삶을 산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갔을 뿐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소위 말해, "왜 그리 인생을 피곤하게 사느냐?"라는 질문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태어나기를, 또 배우기를 그렇게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자신이 느낀 모든 생각과 느낌을 곱씹고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상상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이 가볍게 핥고 삼킨다면, 작가들은 그 생각을 수백 번, 수천 번 되새김질하며 새로운 음식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그 결과물이 오물이 되기도 하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독창적인 예술이 되기도 한다. 그 경계선, 즉 '완벽함'의 기준을 누구도 정할 수 없기에 소설가의 여정은 늘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다.


 그런 측면에서 커포티의 고민이 가장 잘 느껴진 작품은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이었다. 이 소설은 "어디 한번 비열함의 정수를 보여줄까. 오드 헨더슨이야말로 내 경험상 가장 비열한 인간이다."(p.350)로 시작된다. 오드 헨더슨이라는 인물을 비판하며 독자들을 기선제압한다. 이 기세에 눌린 독자들은 "대체 오드 헨더슨이 어떤 사람이고, 왜 비열한 건데?"라는 호기심을 품으며 나아가거나, "네가 뭔데 이 사람에 대해 쉽게 판단해?"라는 반발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의 가장 이상적인 시작점은 371쪽에 쓰인 "생명력이 넘치는 날이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은."이라는 문장이었다. 제목이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인 데다가, 추수감사절에 대한 서술자의 기대감과 감상이 담긴 훌륭한 표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추수감사절 대신 오드 헨더슨을 택했다. 내가 적절한 첫 문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20쪽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단편 소설이 소설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량상 다룰 수 있는 이야기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거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또 대단한 이야기라고 해도 일부만 표현할 수 있다.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영역이다. 대신, 작가는 기법과 배치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떤 단락을 어디에 두는지가 단편 소설을 쓰는 이들에게는 늘 치열한 고민의 대상이 된다. 정직하게 사건의 시작을 초반부에 서술하는가 하면, 이 작품처럼 서술자의 감상을 우선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선택도 정답이 없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그 자유로움 속에 책임이 담겨 있으니까.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으니, 그 삶이 반영된 실험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여러모로 즐거운 체험이었다. 트루먼 커포티, 당신의 생애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는 결국 말보다는 글로, 글보다는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참 어렵다. 당신의 실패는 내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담담하게 전한다. 네가 네 삶의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여겨져도, 끈질기게 살아내자. 마음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다시 훨훨 날아오르자. 어떤 고독과 결핍도 너를 제거할 수 없으니, 비록 짓눌리고 위축되어도 펴자. 이제 당신은 죽어서 대답할 수 없으나, 살아 있는 나는 담대히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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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공격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3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빛소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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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는 비정한 자연의 원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양식으로 알려져 있고, 에밀 졸라는 그것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그의 장편 소설에 익숙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졸라의 단편선에 사뭇 놀랐다. 처음에는 「방앗간 공격」이 장편 소설인 줄 알고,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음 장에서 바뀌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대로 끝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갓 약혼한 도미니크와 아버지, 그리고 삶의 터전이었던 방앗간이 프로이센군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의 운명이 가혹한 탓에 소설가가 그것을 보상해 주길 바랐으나, 전쟁은 현실에서도 그랬듯이, 평범한 자들이 영위한 터전을 앗아가 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참혹함에 분노했다.


 첫 번째 작품의 여운이 가시고, 내가 구매한 이 책이 단편선임을 알게 된 이후에는 조금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작품은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이었는데,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붕괴 사고가 일어남으로써 주인공은 흙더미에 깔려 생존을 갈망한다. 오늘날에는 각종 시나리오에서 많이 다루어져서 신선한 맛이 덜하지만, 터널과 기차라는 문명의 이기가 군중의 삶을 파괴한다는 소재는 꽤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 주인공의 사투를 무릅쓰고 그를 끝내 죽이는 결말은 나에게 씁쓸한 여운을 주었다. 


 이 두 작품의 비극에 비해 나머지 세 작품은 비교적 일상적이다. 그렇다고 「나이스 미쿨랭」에서 주인공이 내린 결단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폄하할 수 없다. 또한, 「샤브르 씨의 조개」에서 은밀한 일탈을 저지른 엑토르와 에스텔, 수르디 부부의 합작이 사소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건들은 그들의 인생에 매우 중대한 일들이었다. 에밀 졸라는 각 인물이 내리는 선택이 서로에게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 세밀하고 정감 있게 묘사한다. 때로는 차가운 사실만 전달하다가도, 따뜻한 유머를 섞기도 하다.

 

 결국 하나의 '주의'로 작가의 모든 경향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연주의는 배경이자 지향점일 뿐이다. 에밀 졸라 역시 조금 모자라지만, 기꺼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친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반드시 혁명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소설만 쓸 필요는 없다. 작가가 행동적인 삶을 살았고,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인 것은 진작에 알았다. 이 단편집을 통해 에밀 졸라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다. 그는 경직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는 친절한 이야기꾼이다. 때로는 마음을 쓰리게 하고, 때로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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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서거 100주기 특별판)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7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병덕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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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다. 카프카 문학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단순히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또는 생물체들)의 내면은 우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또는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다. 자신의 나약함이 공개되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그러나 카프카는 단단히 얼어붙은 우리의 내면을 활자라는 도끼로 산산조각내려고 한다. 경계심이 가득한 독자는 그가 지나치게 자기 안에 갇혀 있거나 현학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나 역시 예전에 비해 프란츠 카프카를 위대한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파묻히기에는 아까운 작가이며,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은 「변신」이겠지만, 내 이목을 사로잡은 작품은 「유형지에서」였다. 내가 카프카를 처음 접하게 된 『심판』이나 「변신」, 그리고 이 작품의 공통점은 현대인이 겪는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처벌을 받는지도 모른다. 단지 주어진 부조리를 감당하고 무너질 뿐이다. 인간은 그토록 연약한 존재이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열심히 살아도 이유 없는 고통과 고난에, 억울한 일에 인생이 어려워진다. 그제야 자신의 삶이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가 자신의 판결조차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장교는 재차 말하고 나서 마치 탐험가에게 질문에 대해 자세한 이유를 덧붙이려는 듯이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그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판결 내용을 직접 체험하게 될 테니까요." (p.218~219)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방문한 탐험가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죄수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기구를 개발한 사령관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억압 아래 수없이 희생 당한 죄수들을 본다. 마지막 순간에는 장교 본인이 그 기구의 희생자가 된다. 찝찝함이 잔뜩 남는 이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가 죄책감 때문에 자결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어쩌면 사령관은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야 진정으로 기구가 완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판결 내용을 모른다고 해도 분명히 죄수인 것은 맞다. 누구나 그 끔찍한 기구 안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닐까?


 이는 「변신」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실한 세일즈맨인 그레고리가 어느 날 아침에 벌레로 변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직장 상사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버림 받고 점점 쓸모없어지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죽음을 모두가 반기는 그런 존재가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작가는 후반부의 서술을 통해 그러한 인간 실격이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대인은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한다. 마지막 작품인 「굴」은 동굴 안에 은둔을 선택한 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외부의 침입과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고 거부하는 신경질적인 모습은 '사생활'을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만약 사정이 그렇다면, 왜 나는 망설이고 있으며, 왜 나는 그 침입자를, 어쩌면 나의 굴을 결코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보다 더 많이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의 굴을 못 본다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니, 성찰을 통해 비로소 그 굴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도 전혀 없을 것이다. 나와 굴은, 내가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고요하게, 고요하게 이곳에 정착할 수 있을 테고, 자제하려고 애쓸 필요도, 온갖 의심에 맞서 입구를 열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을 정도로, 서로 매우 긴밀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갈라놓을 수는 없으며 어떻게든 나는 결국은 아주 분명히 아래로 내려갈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 짓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p.771)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인간 밑바닥에 깔린 내면을 정교한 언어로 포착하는 작가들을 보면 참 신비하다. 일반적인 사람은 편린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느낌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때로는 광기처럼 보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과 불안을 보고한다. 물론 그것이 정신이상자의 수기처럼 보인다면, 모든 이에게 기본적으로 광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결핍을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치유가 안 될 수도 있는 병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하루를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 끝이 비루한 죽음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상처와 낙심을 겪을지라도 존재의 최선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카프카가 내리는 결론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그는 인간에 내재한 갈망과 슬픔을 파악하는 데에 능통했지만, 정작 우울을 해결할 해답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거나 폄하하지는 않겠다. 그 정도만 해도 잘한 거야, 카프카. 그가 쓴 작품들이 대부분 죽음으로 귀결되거나 비인간의 시점으로 쓰인 이유는 언제나 그가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대, 멋진 삶을 살았다. 생전에 빛을 못 보아도, 꾸준히 그 길을 걸어준 것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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