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 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임흥준 지음 / 더퀘스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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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역사를 알면 비즈니스가 보인다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임흥준 지, 더퀘스트, 2015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운다고?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언젠가 이 드라마에서 직원 채용의 마지막 관문으로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함께 한 상대방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때 비즈니스 노하우가 빼곡하게 담겨 있는 '수첩'이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드라마를 보던 많은 초짜 비즈니스맨들은 현실에서도 그 수첩처럼 영업 필살기가 담긴 '비기(秘記)'가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을 것이다. 마침 비기를 담은 그 수첩만큼이나 비즈니스맨 생활을 시작하는 사회초년병들에게 지침이 될 만한 책이 나왔다. 미니 프린터 세계 2위 글로벌 기업인 빅솔론의 해외영업부장인 저자가 세계역사에서 배운 비즈니스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고 있는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이다. 역사는 미래를 읽는 더없이 좋은 도구다. 월가의 인디아나 존스로 불리는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는 그의 책에서 투자와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역사를 세밀하게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역사지식이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활용하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는 책에서 배운 역사적 지식을 비즈니스 현장에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계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저자가 체험한 비즈니스 사례와 짝을 이루어 소개하기 때문이다. 빅솔론은 국내 최초로 미니 프린터 개발에 성공한 삼성전기에서 20031월에 분사한 기업이다. 미니 프린터는 가게나 식당에서 영수증을 인쇄하거나 바코드를 찍는데 사용되는 작은 사이즈의 프린터다. 매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제품의 특성상 높은 품질을 갖춰야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빅솔론이 뒤늦게 동종업계에 뛰어들었을 당시에는 이미 엡손·시티즌·스타 같은 유명한 일본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빅솔론은 분사 10년 만인 2013년 세계 2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3년 기준으로 매출 840억 원, 영업이익 150억 원을 달성해 코스닥 히든챔피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지구를 50번 일주할 만큼의 거리를 비행했고 전 세계 60개국 이상을 발로 밟았다.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다. 그렇다고 저자가 처음부터 프로 비즈니스맨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은행원으로 잠시 일했을 뿐 영업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안정적이지만 보수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온 것은 순전히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던 해외영업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그가 새로 들어간 삼성전기는 20031, 미니프린터를 생산판매하는 팀을 분사했다. 저자에게는 또다시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삼성이라는 커다란 조직에 계속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회사와 함께 모험해 볼 것인가였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영업 경험이 전무한 초짜 비즈니스맨이었던 저자에게는 도움을 받을 선배나 그럴듯한 매뉴얼은 물론 찾아갈 거래처도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영어 학원과 중국어 학원을 동시에 다니면서 어학 실력을 쌓는 것은 물론이고, 구할 수 있는 모든 미니 프린터를 직접 분해조립해보면서 제품의 작동 원리를 깨우쳐 나갔다. 그러나 수시로 크고 작은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영업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로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있을 때 불현 듯 대학 시절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경영학의 많은 용어들이 군사 용어에서 유래됐다. 전략·캠페인·게릴라 마케팅 등이다. 비즈니스도 전쟁도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기계적인 인과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고객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업자에게 성공은 요단강 너머에 있는 신기루에 불과한 법이다. 역사를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로 되살려내서 생생하게 숨 쉬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영업의 기본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찾아온 것이 바로 그때다. 이때부터 저자는 역사서, 특히 전쟁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비즈니스는 결국 인간을 다루는 일이므로 역사에서 성공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역사 공부는 그가 전 세계 60개가 넘는 나라에서 승승장구하며 당당히 업계의 거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뢰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책은 (): 승부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 ‘(): 싸우기 전에 생각하라등 크게 3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 총 21장의 교훈이 되는 역사적 사건저자의 생생한 경험담이 녹아 있다. 스위스 용병이 목숨을 던져 신뢰를 쌓은 사실에서부터 칭기즈칸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발상,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사단의 팀워크 등 동서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비즈니스 감각을 일깨워주는 다양한 사례들이 눈길을 끈다.

근세까지도 스위스는 공업 기반이 거의 없었던 삼류 농업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처럼 부존자원이 척박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산과 호전적인 기질만 다분한 사람들뿐이던 유럽의 최빈국이었다. 요들송이나 부르고 밀크초콜릿이나 만들어 먹던 그런 스위스가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고품격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며 유럽의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그 역사적 배경에는 스위스 용병이 자리 잡고 있다. 스위스 용병 부대가 유럽 역사의 중앙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가진 전투력 못지않게 그들이 보여준 철저한 계약정신의 역할이 컸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1527년에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기거하던 교황청이 신성 로마군에게 공격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로마군 2만 명의 공격으로 교황청의 수비망이 뚫리고 189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만이 교황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고 저항해봤자 죽을 게 뻔했다. 교황은 자신들을 고용한 고용주였고 고용주를 버리고 도망치면 목숨은 건지겠지만 용병으로서의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스위스 근위대는 계약의 충실한 이행을 위하여 도망대신 전멸을 선택했다. 근위대가 성베드로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2만 병력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교황은 간신히 피신하는 데 성공했지만 용병 부대는 147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위스 용병에 감동한 교황청은 이탈리아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들로만 근위대를 구성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 전통은 이후로도 무려 5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대가를 받고 그 계약 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고용주를 위해 싸웠던 용병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비즈니스맨들이었던 셈이다. 새로운 거래선을 찾아 유럽을 종횡무진 하던 저자한테도 비슷한 경우가 생겼다. 계약을 맺은 헝가리 전자제품 수입업체에서 출장 지원 요청이 들어왔는데 하필 그곳이 발칸반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였다. 연일 폭격과 총성이 계속되고 있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곳인데다 출장을 일주일 앞두고 세르비아 총리가 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구나 그 무장 세력들은 빅솔론이 참가하려고하는 전시회장을 폭파시키겠다는 예고까지 한 상태였다. 세르비아는 준전시상태에 돌입하고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이쯤 되면 전시회에 참가하기위해 그곳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출장여부를 고민하던 저자는 이때 스위스 용병을 떠올렸다. 결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가 모습을 나타내자 헝가리 파트너는 놀랐다. 애초에 빅솔론 말고도 4개 업체가 참가를 약속 했지만 빅솔론만 출장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약속을 지킨 저자에게 감동한 파트너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빅솔론과 특별한 신뢰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사부 장군의 전술을 실전에 써먹다

 

책에는 신라의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복하면서 펼친 나무사자 전술을 경쟁사와의 특허 싸움에 적용해 성공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섬나라 우산국은 울릉도의 옛 명칭이다. 고구려와 세력 다툼을 벌이며 북진을 꾀하던 신라에게 우산국은 목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강단 있는 우산국이 고구려나 일본과 손을 잡을 경우 신라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사부 장군은 지증왕의 명을 받고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출항일을 앞둔 이사부는 고민을 거듭했다. 도착까지 꼬박 이틀이 걸리는 바닷길은 험하기로 유명한 난코스라 병사들은 전투를 개시하기도 전에 초죽음이 될 게 뻔했고 간신히 도착하더라도 상륙 역시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에겐 최소한의 희생으로 확실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이사부는 오랜 고심 끝에 우산국 병사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병기를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그 신병기는 무시무시한 사자의 모습을 했지만 사실은 나무로 깍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섬에서만 살아서 육지 맹수를 본 적 없는 우산국 병사들에게 군선 가득 실린 집채만 한 사자들은 엄청난 공포를 줬다. 미지의 맹수에 대한 두려움은 우산국 병사들의 전의를 꺾어놓았다. 우산국 군주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신라 병사들이 상륙한 뒤, 맹수가 사실은 나무로 만든 가짜였음을 눈치 챘지만 이미 우산국 병사들은 모두 무장을 해제당한 뒤였다. 이렇게 신라 장군 이사부는 단 한 사람의 아군 희생자 없이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저자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해외 전시회에 참가했다가 알토라는 대만 업체가 빅솔론 제품을 복제해서 팔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특허 소송을 벌여가며 대응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저자가 써먹은 방법이 바로 이사부의 나무사자 전술이었다. 빅솔론이 삼성에서 분사된 기업이며, 여전히 삼성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몇 가지 기술적 장치를 한 항의 문서를 알토의 경영진에게 보낸 것이다. 문서는 소장(訴狀)양식에 준해서 사용했고 저자의 이름 밑에는 영업사원 대신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넣었으며 소속 또한 해외영업팀이 아닌 법무팀으로 기재했다. 일종의 꼼수를 부린 셈인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알토 측으로부터 정중한 사과와 함께 특허 침해 사실에 대한 인정, 그리고 디자인 변경에 대한 확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상대의 두려움을 자극한 심리전과 이성을 찾기 전에 속전속결로 밀어붙인 속도전이 성공한 사례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주옥같은 비즈니스 비법

 

책에는 그밖에도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영화 <300>의 테르모필레 골짜기와 같은 비즈니스의 길목은 어디인지, 기업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다가 황폐해진 이스터 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단번에 전황을 뒤집은 둘리틀 공습 작전같은 비즈니스 필살기는 무엇인지 등 흥미롭고 유용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세계 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는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서가 아니고 신화 창조류의 성공 스토리도 아니다. 저자 역시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한 학자도 아니다. 대신 저자의 방대한 인문학적 역사 지식과 실전 비즈니스 노하우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오히려 생동감이 넘친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이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며 겪었던 생생한 경험들과 기가 막히게 버무려져 시종일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25쪽에 이르는 알차게 구성된 부록은 보너스다. ‘완전히 다른, 국가별 비즈니스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각기 다른 비즈니스 스타일이 수록돼 있고, ‘어떻게 협상을 승리로 이끌 것인가에는 협상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10가지 노하우가 담겨 있다. 세계시장을 발로 뛰며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는 글로벌 미생이 아닌 국내 미생이라면 본문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하다. "비즈니스의 주옥같은 비법을 이렇게 책으로 내놓기 아까웠을 것" 이라는 추천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월간금융 vol.731, 2015.2 전국은행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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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인구 절벽이 온다
해리 덴트 지음, 권성희 옮김 / 청림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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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인구다

 

2018 인구절벽이 온다

해리 덴트 지, 권성희 옮김, 청림출판, 2015

 

"한국은 2018년 이후 인구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마지막 선진국이 될 것이다. 그 후 수십 년간 소비 흐름의 하락세가 중단 없이 이어질 것이다." 인구구조전문가이자 애널리스트인 해리 덴트의 신간 2018 인구절벽이 온다(원서명 : The Demographic Cliff)의 한국어판 서문에 나오는 섬뜩한 전망이다. ‘인구절벽이란 한 세대의 소비가 정점을 치고 감소해 다음 세대가 소비의 주역으로 출현할 때까지 경제가 둔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처음으로 앞 세대보다 인구 규모가 작은 세대가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경제예측 전문기관인 덴트연구소의 창업자이자 HS덴트재단의 이사장인 저자는 인구와 소비 변화를 변수로 한 경제 전망과 투자 전략의 권위자다. 인구와 인구 변동 추이, 이에 따른 소비 변화가 세상과 경제를 해석하는 확고부동한 틀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구통계학은 미래를 여는 열쇠다. 인구변수는 미래 사회·경제를 결정짓는 가장 상위 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를 보고 싶다면 인구구조적 추세를 보면 된다.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 역시 미래예측의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로 인구통계를 사용했다. 저자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일본 경제가 곧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1990년대에 일본의 몰락을 전망했다. 이 틀로 지난 1980년대 일본 버블 붕괴와 199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을 정확히 예측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책은 자세하고 심층적인 도표와 통계를 동원하여 선진국을 중심으로 인구 절벽 상황을 살피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와 얽히고설킨 일본의 식물경제와 중국의 버블을 분석한 2, 7장은 중요하게 읽어야 한다. 일본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서구형 국가로 성장했지만, 선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인구 절벽을 맞았다. 1989년과 1996년 사이에 인구절벽을 경험한 뒤 25년째 장기불황에 시달리며 경제가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물가상승률과 GDP성장률이 거의 0퍼센트였다. 한마디로 식물경제다. 거기다 인구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고, 2020년 이후 또 한 차례 인구 절벽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인구 절벽은 2014년부터 2019년 사이에 거의 모든 선진국을 덮칠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고점에 도달하면서 앞으로 몇 년 내에 한 국가에 이어 또 다른 국가가 일본을 따라 식물경제에 빠질 것이라 전망한다. 이제 일본은 성공 모델이 아니고 재앙 공식이 되었다. 저자는 경제학자들과 정부 관료들, 투자가들, 기업가들이 왜 일본의 사례를 더 많이 연구하지 않는지 의아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을 22년 뒤처져 따라가고 있다. 근거는 일본에서 출산 인구가 가장 많았던 해가 1949, 한국은 1971년이라는 22년 격차 때문이다. 가장이 47세일 때 가계 소비가 정점이라고 가정해 일본의 소비 정점을 1996, 한국은 2018년으로 계산한다. 22년 후 한국이 일본이 될 텐데, 이때 부동산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미래 자본주의의 모델일까? 대답은 NO.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중국 경제를 이끈 것은 소비자들의 소득과 지출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 크레인의 대부분은 중국에 있다. 오늘날 가장 높은 마천루가 올라가고 있는 곳 역시 중국이다. 중국은 수십 년간 오로지 대규모 과잉 건설을 통해 정부가 경제를 이끌어오며 현대 역사상 가장 큰 버블을 형성했다. 미국은 돈을 찍어내고 중국은 부동산을 찍어내는 형국이다. 다음 글로벌 금융위기의 방아쇠는 남유럽이 당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골칫덩어리는 세계 2위이자 가장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는 중국이다. 중국의 부동산 버블은 다음 금융위기의 희생양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터져 다음 금융위기를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될지 모른다. 중국은 그간의 과잉 건설을 흡수하는 데만 10년 이상 걸릴 것이고 다른 신흥국보다 훨씬 더 이른 2015년에서 2025년 사이에 인구 절벽이 찾아 올 것이다. 2025년 이후 과잉 투자를 흡수한 다음에는 급격하게 인구 절벽 아래로 떨어져 결코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더 심각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자 향후 한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요인으로 중국을 꼽는다. 버블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 버블이 터지면 한국은 직격탄을 맞는다. 한국은 수출이 GDP50퍼센트를 차지하며,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이 전체 GDP20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중국 수출이 50퍼센트가 줄면 한국은 GDP6퍼센트가 사라지게 된다. 이는 깊은 침체를 의미한다. 버블은 팝콘 튀기는 기계 같다. 점점 더 커져 마침내 서로 다른 시간에 여기저기서 터지게 된다. 버블은 예외가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전 세계 주요 정부들은 상상 이상의 부양책을 쏟아냈다. 지금도 각국 정부들은 부채를 축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긴축을 피한 채 파산 상태의 경제를 구제하고 부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부양책은 장기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는 단기 처방에 불과하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채권 등 시중의 금융자산을 사들여 돈을 푸는 것으로 새로운 부채 마약에 다름 아니다. 부채는 마약처럼 점점 더 많이 사용할수록 점점 더 효과가 떨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마약의 부작용과 독성으로 무너지거나 사망에 이르게 된다. 결국 빠르게 고령화하는 선진국들은 정상화하지 못할 것이고 더 큰 규모의 부양책을 쓴다 해도 경제 상태는 기껏해야 비틀거리는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다. 앞으로 수년간 많은 국가들이 인구구조적 절벽을 맞아 정부 부양책의 효과가 점점 떨어질 것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책에서는 현재의 경제 겨울이 지나고 장기호황이 시작되는 시기를 2023년 말이나 2024년 초로 보고 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지금부터 2023년 사이에 일어날 위기, 특히 지금부터 2019년 말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될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한국경제를 언급하는 대목을 흘려듣기엔 너무 구체적이다. 한국의 가장 위험한 시기는 지금부터 2016년까지 그리고 2018년과 2019년이라며 대대적인 디플레이션에 대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8장과 9장은 다음 위기에 대비한 투자 전략과 경제의 겨울을 대비한 기업 전략에 할애했다.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15년 새해의 최대 화두가 인구가 될 것이란 말도 들린다. 인구변수를 중심으로 미래를 예측한 인구 충격의 미래 한국(프롬북스)같은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이래저래 을미년乙未年 새해 출발이 심상치 않다. -- (기획회의 383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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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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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누군가는 들으리라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박하, 2014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은 독일 시사잡지 슈테른의 기자 출신으로 미국과 아시아 특파원을 지낸 얀 필립 젠드커의 첫 장편소설이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담은 독일소설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름답기 이전에 진한 슬픔이 배어있기 때문이고 독일 작가이긴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미얀마이어서 그렇다. 2002년 독일에서 출간되어 서점주인과 독자들의 입소문만으로 화제에 오르며 전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얀마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변호사의 삶을 살던 남자가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다. 화자인 20대의 딸 줄리아는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미얀마의 한 여성에게 썼던 50여년 전의 편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행방을 쫒아 미얀마 껄로로 떠난다. 그곳에서 줄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된 소년(틴 윈)과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소녀(미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 귀로 세상을 느끼는 틴 윈에게 우 메이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사물의 참된 본질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우리는 오히려 감각 기관 때문에 길을 잃지.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은 우리를 잘 속인다.”(149) 틴 윈은 보지 못하는 대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더 깊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둘은 서로에게 눈과 발이 되어주며 물리적 거리의 장애와 시간의 부식력을 거스르며 하나의 영혼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어깨를 빌려주고 옆구리를 내주는 사소한 사랑의 방식에도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감동과 매혹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경이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미얀마로 여행계획을 세워놓고 가이드북보다 먼저 손이 닿은 책이다. “이 도시에서 좋은 시간 보내십쇼. 깔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19) 길을 잃고 두리번거리는 줄리아에게 낯선 미얀마 청년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며 하는 말이다. 애초 계획하고 있던 양곤-바간-낭쉐 여행일정에 깔로를 추가하기로 마음먹은 게 아마 이 대목을 읽을 쯤 이었나보다. 틴 윈은 35년 만에 미미 옆으로 돌아왔고, 둘은 그 다음날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날이 15일이다. 한 달 후에 나는 미얀마에 있을 것이고, 일정을 짜다보니 공교롭게도 15일 쯤에 깔로에 닿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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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낭송Q 시리즈
허준 지음, 임경아.이민정 풀어 읽음, 고미숙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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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을 하노라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허준 지음, 임경아.이민정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북드라망, 2014

 

작년 봄에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했다. 갠지즈 강을 거닐다가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고목나무에서 흘러내린 듯 허리까지 내려와 있는 사두(힌두 탁발승)와 마주쳤다. 얼굴에는 경극 배우처럼 두꺼운 분칠을 했고, 몸에는 갖가지 요상한 악세사리를 두르고 있다.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어디서 왔는가?”

코리아

아니, 네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모르겠다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면 50루피!”

사실은 너는 네가 온 곳을 알고 있다. 단지 그 사실을 네 자신이 모를 뿐이다”“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

 

평화는 모르겠고 화가 살짝 나는 게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50루피는 그의 손에 쥐어진 다음이었다. 아이 엠I am을 찾을까 했다가 루피만 날렸다.

 

갠지즈 강에 석양이 지는 것을 보려고 다시 가트로 나갔다가 그 사두를 다시 만났다. 오늘 하루 영업(?)을 결산이라도 하는 듯 가트 옆에서 지긋히 눈을 감고 앉아 명상을 하며 이따금씩 만트라(신성한 주문)를 내뱉는다.

하리 옴! 옴 나마 시바야!”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 옆으로 몰래 다가가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동의보감>을 공부하다 읽은 주역周易64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멋대로 읊어 댔다.

 

중천건 중지곤 수뢰둔 산수몽

수천수 천수송 지수사 수지비

풍천소축 천택리 지천태 천지비

 

사두가 놀랐는지 눈을 번쩍 뜨고 지금 외는 주문이 뭐냐고 묻는다.

궁금한가?

궁금하면 50루피!”

 

사두는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채고 그 턱없이 크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는다. 내친김에 손바닥을 비벼 눈자위를 비비고, 콧등을 문지르고, 이를 부딪치는 고치법 등 <동의보감>에서 배운 몇 가지 양생술을 시범으로 보여줬더니 따라한다. 물론 50루피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있는 것이 생업적 사기로 번 돈을 반환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20134월 어느 봄날 갠지즈 강가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한바탕 웃고 헤어졌다.

 

아유르베다는 우주와 인간을 상호 연관 지어 고찰하는 고대 인도의 전통의학이다. 인도와 네팔 등에서 5천년 이상 동안 일상생활에서 활용되어 왔는데, 아유르베다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균형이다.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기운의 상호 균형이 깨졌거나, 또는 개인과 자연환경의 균형이 깨졌을 때 질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우주의 기운이 우리 신체와 연결되어 있듯이 몸과 마음이 서로 소통한다고 말한다. 희로애락과 오장육부가 연동되어 움직이며, 감정은 삶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화를 자주 내면 간이 상하고, 너무 기뻐하면 심장이 다치며, 두려움이 지속되면 신장에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유르베다가 표방하는 인간은 소우주이고 질서는 건강이고 무질서는 병이라는 철학은 한의학과 일부 통하는 지점이 있다. 서양의학도 다르지 않다. 네델란드 출신의 헤르만 부르하페(16881738)라는 의사는 죽어서 의학사상 최고의 비밀이라는 두툼한 노트 한 권을 남겼다. 이후 이 노트는 경매에 붙여졌는데 그 노트를 펼치자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노트 맨 끝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한 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차갑게 하고, 발은 뜨겁게 하며, 몸속에는 찌꺼기를 남겨주지 마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의사를 비웃게 될 것이다." 차가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것,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편안하게 복부는 따뜻하게 하는 것이 건강의 지름길이라는 것으로,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수승하강水昇下降이나 두한족열頭寒足熱과 같은 의미다.

 

<동의보감>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으로, 동아시아 2,000년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동양의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책이다. 조선조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허준이 장장 14년에 걸쳐 완성한 책으로, 25권에 달하는 엄청난 스케일로 목차만 무려 100쪽이 넘는다. 특히 중국에선 30여 차례 간행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한의학의 표준적 모델이 되었다. 의서임에도 보다는 생명활동에 중점을 두고 병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양생법을 강조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닌 삶의 비전서, 혹은 양생술의 지혜가 가득한 인생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양생법은 말 그대로 잘 사는 방법인데, 태어날 때 천지로부터 받은 기운을 잘 아끼고 보양하라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맞게 잠자고 일어나며, 음식은 담박하고 적당히 먹으라는 등 일상적인 실천지침을 제시한다.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동의보감> 중 몸 안의 세계를 다룬 내경편에 있는 내용을 가려 뽑아 낭송하기에 알맞게 그 편제를 새롭게 만든 발췌 편역본이다.

 

하루 중의 금기는 저녁에 배부르게 먹지 않는 것이고, 한 달 중의 금기는 그믐에 만취하지 않는 것이고, 인 년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여행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의 금기는 밤에 불을 켜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89)

 

그런데 왜 낭송인가?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대체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교과서를 달달 외고 문제집을 술술 풀고 계산을 척척 해내는 게 공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안다. 그렇다. 공부는 쿵푸다.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을 넘어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의 핵심은 역시 소리요 청각이다. 신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낭송이라는 전통의 공부법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비유컨대,‘정신은 몸의 의지를 수행하는 손이라는 것.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도 않고, 분리할 수도 없다. 고로, 나는 신체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2021)

 

올 한해 시절인연이 닿아서인지 동의보감을 좀 더 가까이서 공부하게 되었다. 낭송과 산책이 최고의 용신이라는 걸 믿기에 날씨가 좋을 때면 사시사철 화보를 펼쳐 보여주는 남산길을 산책하며 동의보감을 읊조리곤 했다. 몸은 삶의 유일한 현장이자 무대요, 존재와 우주가 교차하는 접점이다. 낭송은 아주 구체적이면서 신체적인 활동이며 몸이 좋아하는 독서법이다. 백미보다 현미가 몸에 좋은 것처럼 묵독보다 낭송이 몸에 더 잘 호응한다. 묵독은 이야기에 담긴 긴장과 갈등, 지혜와 성찰의 호흡을 제거한다. 그런데 낭송하는 순간 책속에 몽글몽글하게 웅크리고 있던 활자들이 그 뜻을 곧게 펴고 책 밖으로 걸어 나온다. 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그 파동과 기를 몸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입과 귀를 써야 한다. 입과 귀가 움직이면 뇌가 충전된다. 그리고 뇌를 자극하면 심장을 거쳐 신장으로, 허벅지와 발바닥까지 그 기운이 전달된다. 그래서 낭송을 일종의 양생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일한 부작용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쁜 중독이든 좋은 중독이건 중독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낭송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읽으려고 달려들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가계부와 애 성적표일지라도. 그러니 일단 신체와 궁합이 잘 맞는 좋은 고전을 고른 다음에 머리로 바짝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낭송을 통해 몸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핵심은 외는 것이다. 다 외워야 낭송이 가능하다. 암기와 암송은 다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의미 단위로 텍스트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암송은 소리로써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그렇다. 뼈에 새기려면 외워야 한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115)

 

이 책을 포함한 낭송Q시리즈는 낭송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꼭 소리 내어 읽고, 짧은 구절이라도 암송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머리와 입이 하나가 되어 책이 없어도 내 몸안에서 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낭송이다. 1신형新形, 내 안의 자연에서는 인간과 우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명은 어떻게 탄생하고 살아가는지 소개한다. 세상과 고립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1부를 소리내서 읽어 보자. 또 자괴감에 시달리거나 남 탓을 하고 싶을 때는 꿈에서 똥까지 몸 속 무수히 많은 존재들을 탐구한 6부를 큰 소리로 읽다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형편에 이어 외형편, 잡병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어쩐지 을미년乙未年 새해가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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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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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

언제부턴가 남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삶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어중간한 존재로 사는 쓸쓸함과 피로감이 미역줄기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어느 날 아침 토스트를 굽다가 식빵이 톡하고 튀어 나와 식탁 아래로 굴렀다. 커피도 떨어지고 냉장고 안도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인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들레르처럼.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구하고 짐을 꾸렸다. 불룩해진 배낭에서 옷가지를 빼고 몇 권의 책을 채워 넣었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도 그중 하나다. 앨리스 먼로는 우리 삶이 그래서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하는, 온통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저 지키고 남아있고 바라보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것들로 인생이 채워져 있다며, 너무 많이 흔들리지 말라고 낮게 속삭인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문학동네, 2013, 142)

 

먼로의 소설은 여행 내내 위태로운 내 발걸음을 위무慰撫해 주었다. 읽을 때마다 매번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느낌과 함께 내가 살아냈던 인생의 어떤 한 장면과 마주치게 하면서, 삶 속으로 무찔러 들어와 균열을 냈다.디어 라이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 먼로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그러니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델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쪽을 덮으며 한쪽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용서하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라, 용서하려면!”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브라마의 도시 푸쉬카르에서 낙타를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사막으로 갔다. 들판에서 만난 목동들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게임을 하거나 다운로드한 음악을 듣느라 염소 떼를 돌보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염소들이 제멋대로 멀리 달아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염소들이 저렇게 흩어지는데 괜찮아? 안 쫓아가도 돼?”

여전히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목동이 답한다.

“No Problem! 저들이 가는 방향이 내가 가려던 쪽이예요.”

 

여행은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름 모를 역을 지나칠 때마다 낯선 전율과 흥분이 눈을 찌른다. 발걸음은 더뎌지고 감상은 농밀해진다.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새삼 외로움이 더해지는 게 기어코 휴지 한 장을 더 꺼내 빈자리까지 닦아낸다. 그러나 하나는 적지만 둘은 너무 많은 게 여행 아닌가. 때론 비어있는 자리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 빈자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여행이다. 불안과 주저와 한숨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그럴 때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푸쉬카르에서 아그라를 거쳐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50루피짜리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한가롭게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방인들이 점령해 버린 관광지를 벗어나 자연 속에 자리 잡은 마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울타리 없이 짐승을 기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사진 찍히기를 두려워하는 우물가의 여인들을 지나치기도 했다. 카주라호는 궁색한 시골벽촌 이지만, 여전히 북인도 최고의 사원 유적지다. 노골적인 에로틱한 힌두사원 조각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조각상들은 인도 최초의 성애서인 카마수트라에 실려 있는 것들로 일반적인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한 체위의 남녀 미투나상(교합상)들이 너무나 리얼하다. 남녀 둘만의 교접에서 더블Double은 물론, 동성애와 심지어 수간까지 등장한다. 이쯤 되면 19금이 아니고 49금이다. 그러나 신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는 투명한 사랑의 행위라니 어쩔 것인가. “어떡하나요, 사랑 없인 살 수 없고, 사랑만으로도 살 수 없으니.”‘외로움이 지나쳐 애로움으로 변했는지, 카주라호에서의 마지막 날 밤 꿈속에 현란한 미투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참지 않았다.

 

몽정은 나의 외가外家. 몽정이 육체의 정열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육체를 사용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몽정은 타인의 몸과 나누는 성교가 아니다. 자신의 육체와 벌이는 성교다. (중략) 몽정은 자신의 몸을 그리워하며 몸을 지나간다. 몸에 잔설殘雪을 남긴다.

(김경주, 밀어, 문학동네, 2012, 3539)

 

사막에서 사람들이 타고 온 낙타들이 저녁이 되면 둥글게 모여서 울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낙타들이 집단적으로 수음을 하는듯한 몽롱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밀어는 인간의 몸속에 억겁으로 뒤엉킨 시차의 눈을 달래며 엄혹하고도 정밀하게 써내려간 육체의 서사시다. 신체 각 부위에 명명된 인간의 욕망과 고뇌의 흔적들을 하나씩 호출한다.

 

밤기차를 타고 콜카타에 도착했다. 한때는 대영제국의 전 세계 영토 중 런던을 제외하고 가장 컸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20세기 초반의 한 언저리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퇴락해가는 슬픈 화양연화花樣年華의 기억을 간직한 도시다. 집과 사람이 함께 쓰러져 가고 있는 슬럼가를 곳곳에 품고 있다. 역에서는 꼬질꼬질한 옷과 때 묻은 손을 한 아이들이 기부나 후원을 뜻하는박시시!’를 외치며 맨발로 앞을 가로막는다. 인도 아이들의 눈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아마 다른 민족에 비해 몇 배는 더 검고 몇 배는 더 흰 눈동자를 가진 듯하다. 그 큰 눈에 자신들의 모든 감정을 한껏 담아 손바닥을 내미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낙타의 그것처럼 허망하고 공허하다.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으로 일단 피해 보지만 여자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등짝을 후려쳐 아이들을 관광객 앞으로 다시 내몬다.

 

나는 라면이 끓는 사이, 그들의 눈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나눠 먹어야 마땅했지만 그 소중한 그것을 나눠 먹는 일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약간의 사례를 하고는 다 끓은 라면을 들고 찬바람까지 일으키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내가 떠나자 아이들이 라면 봉지와 스프 봉지를 차지해 핥으면서 다투기 시작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2012, 7#)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71억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84200만 명이 기아에 내몰리고 있다. 5초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가 못 먹어 죽어가고 있고, 해마다 630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5살이 되기 전에 굶어 죽고 있다.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고, 풍요로운 곳일수록 굶주림이 많은 곳인가. 세상의 거의 모든 신이 깃들어 사는 이곳 인도에 거의 모든 가난과 비참함이 동거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콜카타를 떠나기 전날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비오는 콜카타를 찍겠다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한다. “카메라와 사람 둘 다 젖지 않으면서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우산을 던져놓고 셔터를 눌렀다.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를 던지는 거예요.

그 다음은 그 이후의 모두를 단단히 잠그는 거예요. (중략)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2012, 11#)

 

인도에서 한 달 쯤 시간이 지나자 입고 갔던 옷들의 단추가 하나둘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긴 했지만 그건 다른 빛깔의 희열이고 충만함이었다. 그러나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여행이라고 했던가.어디론가 짧은 편지를 썼다.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삿포르 대신에 상하이행 항공권을 끊었습니다. 12141155분에 푸동공항에 도착하는 OZ 363편입니다. 삿포르는 아니지만 공항에서 당신이 눈을 맞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하이에도 눈이 올까요?”--

     

리뷰한 책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2013

밀어, 김경주, 문학동네, 2012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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