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 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임흥준 지음 / 더퀘스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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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역사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노하우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임흥준 지, 더퀘스트, 2015

 

우리나라가 닮고 싶은 모델로 떠올리는 나라가 스위스다. 스위스는 유엔이 158개국을 대상으로 국민 행복도를 조사한 ‘2015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와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와 지하자원이 부족함에도 경제 강국을 이룬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근세까지도 스위스는 공업 기반이 거의 없었던 삼류 농업 국가에 지나지 않는 유럽의 최빈국이었다. 부존자원이 척박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산과 호전적인 기질만 다분한 사람들뿐이었다. 요들송을 부르며 밀크초콜릿이나 만들어 먹던 나라였다. 그런 스위스가 일류국가가 된 역사적 배경에는 스위스 용병이 자리 잡고 있다. 스위스 용병 부대가 유럽 역사의 중앙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전투력 못지않게 그들이 보여준 철저한 계약정신의 역할이 컸다. 1527년에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기거하던 교황청이 신성 로마군에게 점령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2만 명의 로마군의 공격으로 교황청의 수비가 뚫리고, 189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만이 교황을 지키게 되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고 저항해봤자 죽을게 불 보듯 뻔한 위기상황이었다. 근위대는 선택을 해야 했다. 교황은 자신들을 고용한 고용주였고 고용주를 버리고 도망치면 목숨은 건지겠지만 용병으로서의 불명예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스위스 근위대는 계약의 충실한 이행을 위하여 도망대신 전멸을 택했다. 근위대가 성베드로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2만 병력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교황은 간신히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대신 근위대는 147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일에 감동한 교황청은 이탈리아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들로만 근위대를 구성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 전통은 이후로도 무려 5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대가를 받고 그 계약 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고용주를 위해 싸웠던 용병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비즈니스맨들이었던 셈이다. 세계역사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비결을 담은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에 나오는 일화 중 하나다.

 

이 책은 미니 프린터 세계 2위 글로벌 기업인 빅솔론의 해외영업부장인 저자가 세계역사에서 배운 비즈니스 노하우를 담고 있다. 빅솔론은 국내 최초로 미니 프린터 개발에 성공한 삼성전기에서 20031월에 분사한 기업이다. 미니 프린터는 가게나 식당에서 영수증을 인쇄하거나 바코드를 찍는데 사용되는 작은 사이즈의 프린터를 말한다. 빅솔론이 뒤늦게 동종업계에 뛰어들었을 당시에는 이미 엡손, 시티즌, 스타 같은 유명한 일본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사 10년 만인 2013년에 빅솔론은 매출 840억 원, 영업이익 150억 원을 달성하며 세계 2위 기업으로 성장했고, 코스닥 히든챔피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지구를 50번 일주할 만큼의 거리를 비행했고 전 세계 60개국 이상을 발로 밟았다.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 셈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처음부터 프로 비즈니스맨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은행원으로 잠시 일했을 뿐 영업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안정적이지만 보수적인 은행을 박차고 나온 것은 순전히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던 해외영업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그가 새로 들어간 삼성전기가 미니프린터를 생산판매하는 팀을 분사하면서 저자에게는 또다시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삼성이라는 커다란 조직에 계속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회사와 함께 모험해 볼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영업 경험이 없는 초짜 비즈니스맨이었던 저자에게는 도움을 받을 선배나 그럴듯한 매뉴얼은 물론 찾아갈 거래처도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영어 학원과 중국어 학원을 동시에 다니면서 어학 실력을 쌓는 것과, 구할 수 있는 모든 미니 프린터를 직접 분해조립해보면서 제품의 작동 원리를 하나씩 깨우쳐 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로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있을 때 불현 듯 대학 시절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경영학의 많은 용어들이 군사 용어에서 유래됐다. 전략·캠페인·게릴라 마케팅 등이다. 비즈니스도 전쟁도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기계적인 인과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고객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업자에게 성공은 신기루에 불과한 법이다. ‘영업의 기본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찾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저자는 역사서, 특히 전쟁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비즈니스는 결국 인간을 다루는 일이므로 역사에서 성공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역사 공부는 그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영업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당당히 업계의 거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는 세상과 미래를 읽는 더없이 좋은 도구다. 그럼에도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한가하게 역사지식이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활용하는 일은 언뜻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는 책에서 배운 역사적 지식을 비즈니스 현장에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가 체험한 비즈니스 사례를 세계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과 짝을 이루어 소개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그 중 하나다. 새로운 거래선을 찾아 유럽을 종횡무진 하던 저자는 발칸반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출장을 앞두고 고민이 되었다. 준전시나 다름없는 곳에 목숨을 내놓고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스위스 용병을 떠올리고, 다른 업체는 모두 취소한 출장약속을 지킴으로써 파트너와 확고한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경쟁업체와 특허분쟁에 휘말렸을 때는 신라장군 이사부가 사용했던 나무사자 전술을 응용하여 이를 슬기롭게 해결한 이야기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밖에도 칭기즈칸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발상,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사단의 팀워크, 2차 세계대전 당시 단번에 전황을 뒤집은 둘리틀 공습 작전 같은 동서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비즈니스 감각을 일깨워주는 흥미롭고 유용한 다양한 사례들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서가 아니고 신화 창조류의 성공 스토리도 아니다. 대신 방대한 인문학적 역사 지식과 실전 비즈니스 노하우가 생동감 있게 오롯하게 담겨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이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며 겪었던 생생한 경험들과 기가 막히게 버무려져 시종일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비즈니스의 주옥같은 비법을 이렇게 책으로 내놓기 아까웠을 것" 이라는 누군가의 추천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 (기획회의 3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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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모험 - 빌 게이츠가 극찬한 금세기 최고의 경영서
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이동기 감수 / 쌤앤파커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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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본질은 모험이다

 

경영의 모험

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쌤앤파커스, 2015

 

 

매달 쓰는 이 지면의 고민은 늘 리뷰 대상 도서를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 달은 걱정을 덜었다. 세계 부자 순위 1(빌 게이츠)3(워런 버핏)인 이들의 낙점을 받은 책이라고 떠들썩했던 경영의 모험(Business Adventures)으로 일치감치 점찍었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빌 게이츠에게 추천했고, 빌 게이츠가 내가 읽은 최고의 경영서라며 이를 세상에 알렸다. 이쯤 되면 대체 어떤 내용 이길래 하는 궁금증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다. 경제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존 브룩스John Brooks(19201993)가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기고했던 12편의 기업 경영 사례를 묶은 책이다. 195060년대의 기업과 증권가를 배경으로 성장·혁신·소통·금융 등 경영을 둘러싼 첨예한 주제를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끈질기게 핵심가치를 찾는 모험을 멈추지 않은 이들의 도전기가 담겨 있다. 책에 얽힌 드라마틱한 사연도 화젯거리다. 1969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다가 1971년 이후 절판된 책을 빌 게이츠가 팀까지 만들어 재출간을 도왔고 결국 존 브룩스의 아들을 찾아내 40여 년 만에 책을 살려냈다.(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책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로 모아진다. 성공적인 기업 경영을 위한 규칙은 시대가 달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반 한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이 책의 내용은 오래됐음에도 유효한 게 아니라 오래됐기 때문에 유효하다. 존 브룩스의 책은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고, 바로 그래서 시간을 초월 한다고 말했다. 브룩스는 월스트리트와 기업 세계를 상세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금융 부문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쌓았다. 뉴욕타임스그는 단순명쾌한 이야기나 문장으로 인물을 압축해서 설명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자 매우 비상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했는데, 책을 읽어보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도 포함된 주식 시장을 움직이는 손’‘파운드화 구출 작전, 1960년대 월스트리트의 투기 거품을 다룬 호시절로 비즈니스와 금융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기자에게 수여하는 제럴드 롭 상을 받았다.

 

경영의 모험에는 600여 쪽에 걸쳐 12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례랑 상관없이 아무 장에서부터 읽어도 된다. 기자 신분으로 쓴 글이지만 뉴스라기 보다 굵직굵직한 경제 분야 사건들에 역사적·사회심리학적 의미를 부여한 시나리오형 심층분석에 가깝다. 치열한 취재를 통해 길어 올린 방대한 정보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뒷받침하고 있다. 저자는 다양한 인터뷰를 담기 위해 수시로 비행기를 탔고, 9장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엘리 릴리엔셀을 취재할 때는 그의 집 지하실까지 들어가 예전에 그가 쓴 일기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잘 나가는 혹은 잘 나갔던 많은 기업들이 겪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담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마주친 희로애락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눈앞에 보여준다. 이를 위해 문학작품에서 통찰과 인용을 빌려오기도 했다. 경영은 살아 있는 인문학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MBA 과정에 소설, 역사, 철학, 과학 등 인문학 책들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이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 기존 비즈니스 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그러고 보니 브룩스는 직업으로 기자 외에 소설가도 겸했다). 첫 장에서는 자동차 회사 포드가 벌인 신차개발 프로젝트를 다뤘다. 포드는 1955년부터 준중형 세단인 에드셀Edsel’을 개발하는데 투자·디자인·홍보 등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에드셀은 투자를 덜한 다른 모델보다도 판매가 부진했다. 2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판매는 겨우 10만대에 불과했다. 에드셀의 추락은 이름을 짓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에드셀은 포드 창립자인 헨리 포드의 유일한 아들이자 헨리 2세의 아버지인 에드셀 포드의 이름에서 따왔다. 35,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은 에드셀의 실패에 대한 당시 업계의 통상적인 설명은 포드측이 과도한 소비자 행태 분석을 했다는 것이었다. 전문 컨설팅팀을 따로 운영하면서까지 자동차로부터 받는 성적性的 매력을 분석하는 등 불필요한 조사로 정작 실질적인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브룩스의 시각은 다르다. 포드 경영진이 과학적인 소비자 분석 기법을 도입하는 시늉만 하고 정작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 5장에는 특히 빌 게이츠가 저널리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만하다고 치켜세운 제록스의 탄생기가 나온다. 무명 발명가의 아이디어를 붙잡고, 결국 복사기 제록스를 만들기까지의 성공 드라마가 담겨 있다. 복사기를 처음 출시한 1959년 제록스의 매출은 3,3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간에 위기도 있었지만 66년에는 미국 내 순이익률 9, 시가총액 15위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제록스의 창세기는 구글과 애플이 태어나던 실리콘밸리의 초창기와 비슷하게 닮아 있다. 혁신기업의 상징으로 우뚝 선 제록스의 신화는 20세기 기업의 전범이 되었다. 거대한 성공으로 제록스는 복사하다to xerox’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는데, 직원들이 공유하는 철학과 비전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브룩스는 강조한다. 그밖에도 월가의 내부자 거래와 주가조작 등 주식시장의 생생한 민낯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소득세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맞서는 주장들과 파운드화의 평가 절하를 둘러싸고 벌어진 국제적 공조를 다룬 부분은 현재 우리나라 경제이슈와도 맞닿아 있어 실감나게 읽힌다.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자체는 이미 50년 전의 이야기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 기업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기업이 처한 상황이나 개인의 관심에 따라 바짝 당겨 읽어야 할 대목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8, 10, 12장 등 절반 정도를 그렇게 읽었는데, 얼추 300쪽 분량이니 웬만한 책 한 권에 해당한다. 독서의 모험치고는 안전한 모험이다. 혹시 빌 게이츠가 극찬한 책이라서 샀다면 빌한테 낚인(?) 것이다. 요란했던 광고 때문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가졌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경영의 성공법칙을 요약해서 말해주는 여는 경영서와 달리 제목처럼 비즈니스라는 광대한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경영의 모험을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기업의 리더는 물론, 기업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다. 일반 독자들 역시 가독성 높은 비즈니스 책의 훌륭한 전범典範을 맛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다. --

(기획회의 389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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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경제학 - 경제학은 어떻게 인간과 예술을 움직이는가?
문소영 지음 / 이다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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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숨겨진 경제코드

 

그림 속 경제학

문소영 지음, 이다미디어, 2014

       

007 시리즈 영화 <스카이폴>을 보면, 제임스 본드가 미술관에 앉아 물끄러미 그림 하나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19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비극적 걸작으로 꼽히는 유명한 <전함 테메레르>. 해체 직전 마지막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을 그린 경이적인 이 작품은 작은 증기선이 무력해진 거대한 전함을 이끌고 황금빛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증기선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영화에서도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기계 문명과 저무는 옛 문명의 충돌을 드라마틱한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예술 작품에는 그 시대의 상황이 녹아 있고, 예술가들의 사고와 정서가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미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술가들도 사회적·경제적 변화의 흐름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응해왔다. 그래서 한꺼풀만 벗겨내면 당대의 미술 작품과 사회현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작품 감상의 단초 하나를 더 얻게 된다. 그림 속 경제학은 경제학이 인간과 예술을 어떻게 움직여 왔는가를 조망한 책이다. 경제학과 예술학을 전공한 현직 기자가 예술의 꽃인 명화 속에 숨겨진 경제학 코드를 찾아 예술, 경제, 정치, 사회의 유기적 관계를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미술사를 대표하는 명화 속에 한 시대를 상징하는 경제적 사건과 사회적 지문이 묻어나는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매우 반가운 안내서다.

 

1640, 네덜란드 화가 얀 브뢰헬 1세는 독특한 그림 한 편을 그렸다. 왼편 아래의 원숭이는 손에 든 목록과 튤립 꽃들을 꼼꼼히 비교하고 있다. 그 오른편에서는 원숭이 무리가 거래를 하고 있다. 튤립을 가리키고, 악수를 하고, 돈주머니를 흔들고, 장부에 기록을 한다. 계단 위에서는 원숭이들이 성찬을 즐긴다. 그림의 중앙 오른편으로는 알뿌리의 무게를 재고 탁자 위에서 돈을 세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오른쪽은 거품 붕괴의 결과를 보여준다. 맨 앞의 원숭이는 값이 폭락한 튤립에 오줌을 누고, 뒤로는 법정에 끌려오는 원숭이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원숭이가 보인다. 멀리 뒤에서는 부채에 눌려 목숨을 끊은 원숭이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다. 그림은 한바탕 투기 광풍이 휩쓸고 간 비참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에 불었던 튤립 광풍과 그 후유증을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도 없다. 1630년 초, 오스만튀르크 제국에서 물 건너 온 튤립은 희소성 덕에 별안간 명품으로 둔갑했고, 튤립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급등했다. 이른바 튤립 버블' 속에 당시 최저 소득층인 굴뚝청소부까지 튤립 투기에 나섰다. 그러다 반전이 일어났다. 오를 대로 오른 가격 탓에 튤립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고, 수요가 뚝 끊기며 버블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얀 브뢰헬의 그림 속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원숭이는 바로 튤립 투기자들을 그린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 조차도 영국 남해회사에 투자했다가 2만 파운드를 날린 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예측하지 못하겠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바보 원숭이들의 행진은 역사 속에서 한 번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 금융시장까지 뒤흔들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시작은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었다. 그보다 앞선 1990년대엔 일본이 부동산 버블 붕괴로잃어버린 10'을 겪어야 했다.

 

소위이발소 그림이라는 것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밀레가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이 있다. 마치 이발소 주인들이 이 그림을 걸어놓지 않으면 이발소 허가가 취소되기라도 하듯이 모든 이발소마다 걸려있던 그림이다. 날카로운 면도기에 얼굴을 내맡겨야하는 곳이기에 그런 따뜻하고 평화스런 느낌의 그림이 필요했던 걸까. 그러나 이 차분한 그림이 1857년 처음 발표됐을 때, 선동적이고 불온하다는 비난을 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지? 먼 옛날 구약성서 시대부터 추수가 끝난 뒤에 이삭을 줍고 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농지가 없어서 주운 이삭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최하층 빈민이었다. 추수 때 땅에 떨어진 이삭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관례였다. 일종의 자선행위인 셈이다. 그러니 밀레의 그림 속 여인들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서 품을 팔고 품삯으로만은 모자라 이삭을 줍는 가난한 아낙네들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과 손은 고된 노동으로 검붉게 그을렸고 거칠고 투박하다. 그 중 한 여인은 이삭을 쥔 팔을 등에 댄 걸로 보아 허리가 아픈 모양이다. 하긴 하루 종일 넓은 밭을 헤매며 고개를 숙여 이삭을 찾고 허리를 굽혀 주워야 하니 온몸이 뻐근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명의 여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그것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말 탄 지주가 보인다. 이 조용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조야말로 빈부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엄격한 반공주의 교육 시절 밀레의 이런 그림이 교과서에 거리낌 없이 실리고, 식당이나 이발소에 척척 내걸린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명화에서 느끼는 감동은 미학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미술의 경우 상징과 은유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여기서 저자는 명화의 배경과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을 동원한다. 책에 등장하는 명화가 다루는 주제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신기할 정도로 조응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만큼 구체적이고 유용한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을 통해 경제학을 설명하고, 경제학을 통해 그림의 안쪽을 들여다보게 한다. 명화 뒷부분에 숨겨진 경제학 코드를 꼼꼼하게 짚어내고, 그것을 당시의 경제이슈와 버무려 비벼내는 저자의 맛깔난 요리 솜씨가 자꾸만 몸을 그림 앞으로 내밀게 한다. 그림설명을 위해 동원되었던 어려운 경제용어를 정리해 놓은 친절함도 느껴지고,‘재미있는 미술사 이야기처럼 미술사 에피소드가 담긴 뒷 담화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제학미술의 조합을 새로운 미술 감상의 세계로 매끈하게 이끄는 이런 책을 경제경영 서가에서 발견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제 기자와 미술 기자로 오랫동안 일해 온 저자의 내공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림만으로도 책값을 뽑는 셈이니 꿩 먹고 알 먹는다는 말이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 (기획회의 387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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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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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노동은 가라

 

굿 워크

E.F.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느린걸음, 2011

  

직장인의 애환을 담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을 보다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가 떠올랐다. 1930년대 산업사회 속에서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과 물질문명을 신랄하게 풍자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 찰리 채플린은 온종일 컨베이어 벨트라인에 서서 나사를 조이는 지극히 단순한 일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거기에는 인간적이거나 창조적인 일체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태엽장치의 기계처럼 정해진 대로 움직이면 된다. 결국 찰리는 강박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원에까지 간다. 이른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모던 타임즈>에 표현된 것처럼 개성이나 인간성은 무시되고 일찌감치 노동에서 소외 되었다. 오로지 생산성과 능률성 향상이라는 목표에 종속되어 한낮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 결과 노동은 임금에게, 삶은 생존에게, 영혼은 기계에게 자리를 내 주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토크빌이 핀 대가리를 만드는 일로 20년 세월을 보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며 150년 전에 생겨난 분업노동에 대해 했다는 뼈있는 말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E.F.슈마허(19111977)는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독일 태생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가 된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던 슈마허는 현대 산업 사회의 급소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한 문장으로 인류의 생각의 대전환'을 이뤄냈다. 평생을 기존 경제학과 기술, 그리고 이를 떠받쳐 온 가치체제에 대한 근원적 도전을 던지며, 지속가능한 삶으로 이끄는 길을 탐색해 왔던 그의 사상과 실천이 응축된 역작이 굿 워크. 그는 종교가 돼 버린 경제성장, 거대산업과 첨단기술 등 현대 사회의 우상들을 거부하며 인간 중심의굿 워크'에 도달하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했다. 영혼을 잠식하는 나쁜 노동의 본질을 파헤치며인간의 노동'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깊은 통찰과 대안을 제시한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고장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구호가 전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상품화와 화폐경제에 매몰된 시장 만능주의 경제 사상이 모든 이들로부터 근본적인 회의를 사고 있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서 외면당해 온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과 가치에 눈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그 흐름 중 하나다. 가장 그릇된 오해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돈으로 인생과 사회의 다른 부분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굿 워크에서 슈마허는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지적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며, 더 자본집약적이고, 더 폭력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노동을 가장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만들며, 인간의 총체적인 본성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사용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킨 것이 산업사회의 가장 큰 죄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현대 문명이 낳은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또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기 위해 인간은 노동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젊은이들에게 먼저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들에게 나쁜 노동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슈마허가 이 대목에서 내세우는 가장 핵심적이며 독창적인 개념이 바로중간기술내지는적정기술이다. 중간기술이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간단하며, 자본이 적게 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안된 기술을 말한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을 기술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중앙집권화와 관료주의를 낳지 않는 작은 단위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계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질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인도에서 처참한 빈곤을 목격하고 나서 지역 규모에 알맞으며 사용하기 쉽고 생태적인 중간기술 개념을 창안했고 이를 알리는데 힘썼다. 가난한 사람들이 권력자나 기술 엘리트들에게 예속되거나 의존하지 않고 작은 규모의 조직과 중간기술로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자고 호소했다. 1965중간기술개발그룹을 발족해 전 세계에 중간기술을 보급하고, 3세계를 돌며 자급경제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최초의 공동소유권 회사라고 할 수 있는스콧 배더라는 기업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책은 슈마허가 1977년 미 대륙을 횡단하며 펼친 강연을 묶은 것으로 그가 죽고 2년 후인 1979년에 세상에 나왔다. 슈마허의 강연육성을 입말로 그대로 옮긴데다 특유의 유머스런 말솜씨가 곳곳에 배어나와 편하게 술술 읽힌다. (205쪽에 나오는 하느님과 한 경제학자의 대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담고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 그가 말년에 가장 천작했던 문제인 좋은 노동과 좋은 교육에 관한 사상적 성찰과 함께 이를 위한 실천적 탐구가 담겨 있다. 30~40년 후에 벌어질 일들을 비롯해 현대 산업 사회의 모습을 내다본 그의 안목과 예견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슈마허의 진단대로 지금 대부분의 노동은 완전히 재미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 이젠 노동을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와야 할 때다. 학교에서 아이를 찾아오려면 일단 등수가 아니라 몇 반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굿 워크는 그에 대한 맞춤한 길 안내를 보여준다. 읽고 나면 시야가 탁 트이는 그런 책이다. 먼저 읽은 지인이 자신은 빨간 색 속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알베르 카뮈의 말에 밑줄을 그었다고 말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나는 3장이 시작되는 다음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 우리도 이젠 삶의 무지와 불안에서 벗어나 희망에 대한 능란한 낙관을 꿈꾸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숨을 크게 쉬고 싶은 사람과 세상을 살아가는 좌표를 발견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기획회의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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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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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미얀마로 여행을 가기로 작정하고 그곳에서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갔다.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유리 궁전>을 사서 계산대로 가려는데 검정 색 띠지를 두른 작은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었다. 제목이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저자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아니 하루키가 언제 단편집을 냈지? 표지를 넘기니 내가 아는 그 하루키가 맞다. 습관대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첫 번째 단편인 드라이브 마이 카로 바로 돌진한다. 117쪽을 펼쳤다. (내 음력 생일이 117일이다. 그래서 어떤 책이든 117쪽을 꼭 읽어보고 산다)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중략) 그리고 어느 순간 어디선가 꽂혀 들어온 특별한 햇빛을 받아 그들이 자기 삶의 인공성을, 혹은 비자연성을 퍼뜩 깨달았을 때, 사태는 때로는 비통하고 또한 때로는 희극적인 국면을 맞이한다. (117-118)

 

어느 순간 저 문장이 내 심장 안으로 꽂혀 들어왔다. 당장 책을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치고 신촌에 있는문학다방 봄봄으로 향했다. 책을 읽기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다. 그곳에서 커피를 리필 받아 마셔가며 소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읽는 것을 멈춘다면 그건 하루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니면 하루키 소설이 아니든지. <상실의 시대><1Q84>도 그렇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여자 혹은 남자가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떠나보낸 혹은 놓쳐버린상실을 다루고 있다. 특히사랑하는 잠자는 카프카의 <변신>에 하루키가 보내는 오마주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44)

 

술 대신에 여행을 넣는다면 나 역시 분명 후자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실크로드, 인도, 네팔, 티벳 등지를 들쑤시고 다닌 것도 어쩌면 뭔가를 지우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여행은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름 모를 고장을 지나칠 때마다 낯선 전율과 흥분이 눈을 찌른다. 발걸음은 더뎌지고 감상은 농밀해진다. 때론 비어있는 자리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 기어코 휴지 한 장을 더 꺼내 비어 있는 옆자리까지 닦아낸다. 빈자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여행이다. 어깨를 빌려주고 옆구리를 내주는 사소한 사랑의 방식에도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여행은 불안과 주저와 한숨이 반을 차지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중략)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327)

 

그렇다. 살다보면 사랑이 상실과 동의어가 될 때가 온다.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선택하는 경우다. 살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운명 앞에 놓인 그림자를 사랑할 뿐이다. 그렇게 한때를 서로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여권을 챙기고 짐을 꾸렸다. 불룩해진 배낭에서 옷가지를 빼고 미얀마에서 읽을 책을 채워 넣었다. 밑줄을 그은 곳을 다시 읽기 위해 <여자 없는 남자들>도 챙겨 넣었다. 아시아나항공 OZ769편이 내일 나를 양곤에 내려주면 제일 먼저 쉐다곤 파고다로 가려고 한다. 거의 100m에 이르는 그 황금사원 꼭대기에서 내가 알던 그 여자에게 전파를 쏘아 올릴 것이다. 이 신호를 받지 못한다면 그 여자는 지구에 없는 것이다. 난 이제 그녀를 잊는다.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335-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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