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밥상 - 건강.젊음.활력을 되찾는
방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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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싶다면 당장 밥상부터 바꿔라

 

남자의 밥상

방기호 지, 위즈덤하우스, 2013

 

건강하려면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우리가 밥상머리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그런데 이는 틀린 말이고, 오히려 잘 가려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 채식을 바탕으로 식이의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한 방기호 방의원 원장이 쓴 남자의 밥상이다. 저자는 트리플 효소 치료법이라는 획기적인 탈모 치료 프로세스를 개발하여 수많은 탈모증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한바 있는 융합의학자이다. 책에는 같은 나이인데도 누군가는 에너지가 넘치고 누군가는 암, 고혈압, 당뇨, 심장병, 뇌졸중 같은 죽음의 5중주를 앓고 있는 것은 순전히 먹는 음식 때문이라며, 음식만큼 좋은 치료제는 없다고 강조한다. 식탁에서 과감하게 일체의 고기, 생선, 계란, 우유와 인스턴트 식품, 설탕, 소금, 기름을 끊으라고 주장한다. 대신 현미, 과일, 채소, 견과류 등을 매일 먹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인스턴트 식품이 나쁘다는거야 다 알지만 생선이나 계란까지 멀리 하라는 말에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는 이렇게 우리가 그동안 건강이나 음식과 관련하여 알고 있던 여러 상식들을 여지없이 깨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지난 30년간 병원은 열 배 이상 늘어났지만 암, 심장병,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 환자는 오히려 세 배 이상, 발기부전 환자는 네 배 이상 늘어났고, 우리나라 40대 이상 남성 사망률은 전 세계에서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과 직접 관련이 있다. 지금처럼 먹는다면 40대 남성의 생식력은 70대보다 못할 것이며 지금 살아계신 부모님보다 더 일찍 죽는 최초의 세대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몸짱이면 당연히 스태미나도 강할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착각이라는 것이다. 몸짱과 발기력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몸짱일수록 발기력이 약한 경우가 많다. 몸에 좋지 않은 과단백 식품과 단백질 보충제로 근육을 키울 경우 활성산소가 증가하고, 활성산소는 혈관 내피 세포를 공격하여 발기에 필요한 산화질소의 생산을 억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력을 위해서는 혈관 확장을 돕고 남성호르몬을 증가시키는 마늘, 양파, 부추, 달래 같은 알리신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먹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중 하나인 비만의 주범 역시 고기, 생선, 계란, 우유와 같은 동물성 음식이나 빵, 파스타, 쌀밥과 같은 정제 탄수화물이다. 이런 음식들은 우리 몸에서 마약과 같은 인슐린을 증가시킨다. 인슐린이 한 번 증가하면 혈당을 내리기 위하여 더 많은 인슐린이 필요하게 되고, 인슐린 능력이 떨어지면 혈당은 인체 곳곳을 쑤시고 다니다 갈 곳 없는 혈당은 복부에 비계로 저장된다. 이 비계는 변태와도 같아서 망사스타킹 안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이 비계가 복부의 망사 스타킹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가 바로 내장지방이다.

간 때문이야, 피로는 간 때문이야~”라는 TV CF에 나오는 노래가 있는데, 간은 우리 몸에서 참 많은 일을 하는 기관이다. 간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포도당을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방출한다. 또 간은 인체에서 건축 일도 한다.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은 헬스클럽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고 간에서 만든다. 거기다 경찰 업무도 도맡아 하는데, 간은 인체에 들어오는 모든 독소를 혼자서 제거한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간은 하루 2,160리터의 혈액을 배수하는 인체 최대의 장기이다. 워낙 덩치가 커서 웬만큼 나쁜 부분이 생겨도 나머지 부분이 대신 기능을 떠맡아 주기 때문에 간은 완전하게 파괴될 때까지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간은 70퍼센트가 손상될 때까지도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가지 약이 없습니다, 하나는 보약, 두 번째는 감기약, 세 번째는 간장약입니다. 간에 증상이 나타나면 손을 쓸 수가 없어요. 마치 타이타닉 호처럼 물이 새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간을 돌보는 수밖에 없어요.”(169) 그러니 간 때문이 아니라 간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셈이다. 간 회복을 위해서는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함은 물론 과식을 피하고 특히 동물성 음식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을 하라거나 계란과 유유가 절대로 완벽식품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도 들었지만 노화방지를 위해서는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자리잡은 빵과 커피까지 멀리해야 한단다. 그럼 빵 대신 떡을 먹고 커피는 차로 바꾸어야 하나? 당혹감이 들 수 밖에 없다.(지인이 얼마전에 카페를 창업했는데 발을 끊어야 하나?) 저자는 생활 속의 멋과 여유인 커피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나같은 독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안전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몇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인스턴트 말고 원두커피를 마실 것, 로부스터보다 아라비카산 커피가 좋다, 식후에 마시는 커피는 구취를 악화시킨다, 술과 커피를 함께 마시지 마라, 고기나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에 커피를 마시지 마라.(129-132) 저자는 자신의 전공답게 탈모에 대해서도 비껴가지 않는다. 고기, 생선, 계란, 우유와 같은 동물성 식품은 탈모 유전자에 착 달라붙는다. 그 결과 모낭 효소를 증가시켜 탈모 스위치를 켠다. 육식은 남녀 모두에게 탈모증을 유발한다. 그 다음으로 탈모 스위치를 켜는 나쁜 놈이 바로 과식이다. 과식을 하면 혈당이 높아지고 혈당은 인슐린을 증가시킨다. 인슐린은 모낭효소를 증가시키고 그 결과 모낭의 저격수인 DHT가 증가하여 탈모로 이어진다. 탈모 유전자의 스위치를 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채식과 소식이다. 여기다 어성초, 자소엽, 녹차엽까지 사용한다면 최고의 탈모 치료제가 된다. ‘먹을수록 독이 되는 단백질’ ‘비타민C 알약에는 비타민C가 없다’ ‘완전히 나쁜 식품 계란과 우유’ ‘문제는 빵이다’ ‘10년 노화를 부르는 커피’ ‘한식은 건강식이 아니다’ ‘비아그라를 이기는 항문 조이기 운동등 목차만 살펴봐도 궁금증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고기, 생선, 계란, 우유를 먹지 말고 빵이나 파스타도 먹지 말라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인가? 저자는 그것 말고도 먹을 게 많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과일, 채소, 현미와 각종 씨앗류, 견과류, 작은 생선들, 녹조류와 해조류 등이 그것이다.

 

음식과 인체의 명확한 관계를 알려 주는 이 책은 풍요로운 식단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일일 수도 있다. 저자는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40대 남자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으라고 주문한다. 단언컨대 책 내용대로 실천하면 30대로 보이는 40대가 될 것이고, 그렇지않으면 50대로 보이는 40대가 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도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 음식이 곧 약이 되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근본 해결책은 오직 밥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남자의 밥상은 언뜻 표지만 읽으면 중년남자만을 위한 책으로 보이지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내용이다. 오히려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주부들이나 다이어트에 목숨거는 여성들이 알아야 할 정보들이 가득하다. (사족) 만약 이 책을 읽고도 육식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면 육류를 생산하는 공장식 축산의 치명적인 문제를 고발한 논픽션인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장담컨대 전처럼 식탁위에 고기를 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침 설날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 새해 건강계획 실천이 작심삼일에 그치고 말았다고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갑오년 말띠 해를 건강 원년으로 삼을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 책에 소개된 모든 내용을 실천한다면 건강 젊음 활력을 되찾는 남자의 밥상이라는 제목처럼 셋 모두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중 1/3만 실천해도 셋 중 하나는 되찾을테니 밑지는 장사는 안 될 듯하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밥상혁명부터 시작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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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강한 그리고 단단한 출판사 개마고원을 응원합니다. 갑오년! 갑오 잡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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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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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 마를린 먼로에 이어 또 한 명의 먼로가 내 삶에 들어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평생 단편소설을 써온 캐나다 여류작가 엘리스 먼로를 올해 노벨문학상 작가로 선정하면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이유를 밝혔다. 단편은 우리 인생의 독립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안정적인 형식미 속에 담아내야 하기에 직관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장르다. 먼로 역시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단편이 장편소설을 쓰기까지의 습작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엘리스 먼로의 단편집 디어 라이프는 표지만으로도 따뜻함이 묻어나고, 제목을 입에 올리는 순간 날렵한 휘파람 소리가 나는 책이다. 발효를 마치고 막 오븐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배인 빵반죽 같은 문장들이 담백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이 여든이 넘은 노작가가 쓴 글이라는 선입견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루는 인물은 평범하고 벌어지는 사건도 일상적인 소소한 것들이고 배경 역시 캐나다의 작은 타운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가출, 불륜, 배신, 죽음 같은 사건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감정의 파고나 극적인 동선은 희미하고,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려는 성마르고 노회한 시선도 찾아보기 힘들다. 허겁지겁 책장을 넘겨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심히 지나쳐 읽다가는 자칫 앞쪽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읽는 수고를 하기 십상이다. 대신 미세한 사건이나 사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작은 일들이 삶에 가져오는 진동과 균열을 말하며 그것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를 보여준다.

 

<자갈>의 주인공은 언니가 물에 빠져 죽은 그 일이 있고도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지만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은 제 자리에 앉지 못하고 머리 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성거릴 뿐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142)

 

올 한 해,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실은 상심으로 이어졌고 책 안에서 모든 걸 찾고 해결하려던 방법에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금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불안하고 무력했던 현실의 남루한 습관을 뒤로 하고 한 달 동안 인도와 네팔로 여행을 다녀왔다. 꿈은 도망가지 않는데 늘 도망치는 건 자신이었다는 걸 아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렇게 살아온 삶이 온통 못 미덥고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르던 올 겨울에 찾아온 것이 앨리스 먼로였다. 먼로는 우리 삶이 그래서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하는, 온통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것임을 말해 주었다. 그저 지키고 남아있고 바라보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것들로 인생은 채워져 있는것이라며, 너무 많이 흔들리지 말라고 낮게 속삭인다.

 

시인의 시에 대해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당히.

그가 나를 팔로 감싸안고 의자에서 들어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330)

 

열 편의 단편소설과 네 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디어 라이프는 손목으로 쓴 글이 아니다. 먼로가 지나온 여든 두 해의 삶을 몸으로 복기하며 팔꿈치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읽는 내내 삶에 대한 성찰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묻은 이야기들이 스스로 걸어나와 우리가 살아냈던 인생의 어떤 한 장면과 마주치곤 한다.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매번 세수를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디어 라이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 먼로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그러니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그 아래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용서하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라, 용서하려면! (There is no love without forgiveness, and there is no forgiveness without love)”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올 해가 가기전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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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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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 것이 삶이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지,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2013 

 

2013년 겨울, 또 한 명의 먼로가 내 삶에 들어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작가로 평생 단편소설을 써온 캐나다 여류작가인 엘리스 먼로를 선정하면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이유를 밝혔다. 단편은 우리 인생의 독립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안정적인 형식미 속에 담아내야 하기에 직관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장르다. 먼로 역시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단편이 장편소설을 쓰기까지의 습작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엘리스 먼로의 단편집 디어 라이프는 발효를 마치고 막 오븐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배인 빵반죽 같은 소설이다. 단어들이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게 어울리며 문장이 담백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을 놓지 않는다. 여든이 넘은 노작가가 쓴 글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노회한 시선이나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려는 시도를 찾기 힘들다. 배경도 주로 캐나다의 작은 타운을 벗어나지 않고, 다루는 인물은 평범하고 벌어지는 사건도 일상적인 소소한 것들이다. 작품마다 가출, 불륜, 배신, 죽음 같은 사건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감정의 파고나 극적인 동선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심히 지나쳐 읽다가 앞쪽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읽는 수고를 해야 할 때도 많다. 대신 미세한 사건이나 사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런 작은 일들이 삶에 어떤 진동과 균열을 내며 우리 삶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를 보여준다.

 

<자갈>의 주인공은 언니가 물에 빠져 죽은 그 일이 있고도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지만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은 제 자리에 앉지 못하고 머리 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성거릴 뿐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142)

 

올 한 해,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실은 상심으로 이어졌고 책 안에서 모든 걸 찾고 해결하려던 평소 방법에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금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불안하고 무력했던 현실의 남루한 습관을 뒤로 하고 한 달 동안 인도와 네팔로 여행을 다녀왔다. 꿈은 도망가지 않는데 늘 도망치는 건 자신이었다는 걸 아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렇게 살아온 삶이 온통 못 미덥고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르던 올 겨울에 나를 찾아온 것이 앨리스 먼로였다. 먼로는 우리 삶이 그래서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하는, 온통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것임을 말해 주었다. 그저 지키고 남아있고 바라보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것들로 인생이 채워져 있다며, 너무 많이 흔들리지 말라고 낮게 속삭인다.

 

시인의 시에 대해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당히.

그가 나를 팔로 감싸안고 의자에서 들어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330)

 

디어 라이프에 담긴 총 열 편의 단편소설과 네 편의 자전적 이야기는 손목으로 쓴 글이 아니다. 먼로가 지나온 여든 두 해를 온 몸으로 복기하며 팔꿈치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어떤 책들은 이렇게 삶 속으로 무찔러 들어와 균열을 내곤 한다.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매번 세수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먼로는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디어 라이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 난 그 아래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용서하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라, 용서하려면! (There is no love without forgiveness, and there is no forgiveness without love)”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올 해가 가기전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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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안타까움성
디미트리 베르휠스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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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컷들의 웃픈 세상사는 이야기

 

사물의 안타까움성

디미트리 베르휠스트 지, 배수아 옮김, 열린책들, 2011

 

지난 월요일, 매주 나가는 정기모임을 그만 깜빡 잊을 정도로 한 책에 푹 빠져 버렸다. 5분 단위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 도서관에서 집으로 장소를 옮겨서야 맘놓고 뒹굴어 가며 포복절도하며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 뒤쪽이 자꾸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워 수시로 남은 쪽의 두께를 재며 읽은 책이다. 맥주병 위에 사람얼굴을 얹은 표지부터 인상적인 디미트리 베르휠스트의 장편소설 사물의 안타까움성이다.

 

육담肉談으로 써내려 간 블랙코미디 같은 야성적인 이 낯선 벨기에 소설에 누군가는 "자전소설이 거둘 수 있는 최대한의 성취"라는 헌사를 붙이면서, 거칠게 압축하여 젊은 수컷이 기록한 진정한 수컷들의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열세 살 소년 디미트리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 자전적 성장소설은, 무위도식하며 술로만 일관하는 막장 인생을 살면서도 ''처럼 군림하며 거칠 것 없이 야생마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삼촌 세대의 폭죽같은 인생에 대한 따뜻한 회상이다.

 

쥐꼬리만 한 할머니의 연금을 파먹으며 술과 여자에만 탐닉하는 4형제가 있다.(영화로도 만들어진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이 얼핏 떠오른다) 그나마 우편배달부라는 정규직을 가진 아버지를 제외한 3명의 룸펜 삼촌들은 루저 중의 루저이고 더 갈 곳 없는 하층 인생들이다. 그러나 디미트리 눈에는 생강빛 수염을 가진 제임스 본드의 더 멋진 이복동생만큼이나 영웅이며 전설같은 남자들로 비친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재능(이들에게 이런게 있긴한지 의심스럽긴 하지만)을 좋아하는 술과 도자기 몸매를 가진 여자들에게 바치는 데만 온통 써버리는 벨기에인 조르바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미래가 없는 이들 가족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박하고 식물적인 삶 대신에, 도시에서 오토바이 엔진소리같은 동물적인 삶을 선택한다. 가난에 기죽지 않고 일상에 폭죽을 쏘아올리며, 매일매일을 불꽃놀이 같은 축제의 삶으로 바꾼다. 그야말로 도시에서 유목하고, 세속에서 출가하는 삶의 귀재들이다.

 

작가는 곳곳에서 존 레논이 존경한 미국 싱어송 라이터인 로이 오빈슨Roy Orbison에 대한 오마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법원 집행관에게 TV를 압류당한 뒤 그날 밤 예정된 로이 오비슨의 컴백 공연 중계를 보기 위해 마을에 살고 있는 이란 이민자의 집에 맥주 한 박스를 들고 쳐들어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난장亂場이 펼쳐지는 4오직 외로운 이들만이는 압권이다. (난 로이 오빈슨을 이정재가 지금보다 더 젊은 남자였던 20여년전 출연했던 영화 젊은 남자에서 처음 알았다. 그의 노래 꿈속에서In Dreams’와 함께) 아버지가 갓 태어난 디미트리를 자전거 앞에 싣고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을 돌아다니며 믿기 힘들 정도의 비상식적인 탄생 축하를 벌이는 대목(254-259) 역시 맨송맨송한 정신으로 읽기에는 아까운 장면 이다. 누군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어떻게 눈물과 정액 중 하나만을 골라 바칠 수 있겠냐고 한것처럼, 이 소설 역시 지뢰처럼 곳곳에 묻어 놓은 눈물과 웃음을 골라 딛는 것은 불가능하다.

웃음인가 하면 금새 눈물인 이런 괴물같은 소설을 옮긴이가 누군가 들여다 봤더니 배수아 그녀다. 199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법을 개척했다고 알려진, '배수아 소설은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봐도 알 수 있다'는 정평을 받는 그녀가 자신의 문체를 숨기고 능청맞게 풀어냈다. 예컨대 이런 대목에서는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어느 정도의 불행을 자기 운명에 허용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불행에 버리고 말지 뭐. 그게 더 쉬우니까.”(243) “시인 한스 안드레우스를 떠올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아내를 임종의 침상에서 물러가게 했다고 한다. <이만하면 됐으니까 가줘.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 치러야 하는 일이니까>”(270) 또 남자들만의 말 없는 교류가 이루어지는, 긴장과 애정이 씨줄과 날줄처럼 묘하게 겹치는 순간에 대한 묘사도 있다. “지금 우리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암묵적인 경쟁은 모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는 원초적인 일이다. 누가 강자인지 가려내고야 말겠다는 이 끈질진 승부는 결국 나이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이 보통이다. 아버지들은 아들의 손에 친부 살해의 무기를 직접 쥐여 주게 된다. 그러면서 아들이 자신을 능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버지를 무찌르기 위해 주먹 부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그의 자식이 어느덧 이렇게 늠름한 사내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 주어 만족감을 안겨 주기만 하면 그것은 곧 그 자신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고통스러운 깨달음과 동격이 되니 말이다.”(228-229)

 

전세계 애주가들에게 복음같은 이 소설은 갓 끓여 내온 커피와 폭신한 케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맥주를 병째 들이키며 읽는 게 제격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사람은 신을 믿고 악마는 아직은 우리를 믿는한 가끔은 마셔줘야 한다는 걸. 금주협회(정말로 이런 단체가 있다면)는 예산의 절반 이상을 이 소설의 절판을 위해 써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소설을 읽는 내내 아쉬운대로 냉장고에 있던 체코 맥주로 대신했는데, 마지막 318쪽 읽기를 마쳤을 때는 필스너가 한 병도 남아있지 않았다. 벨기에 맥주 호가든을 사러 츄리닝 바람으로 슈퍼로 향했다. 눈발이 마지막 남은 은행잎을 위협하던 지난 월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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