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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계부
제윤경 지음 / Tb(티비)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IMF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결혼직전 시댁에 부도가 난 일로인해 우리 부부의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 닥쳤다. 산더미같은 빚, 급할 때 쓴 사채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 남편한테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두사람의 퇴직금을 정산해서 급한불을 끄고,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았지만 월급날 남편의 통장은 항상 '0'였다. 언니들은 "살아보니 결혼은 현실이더라 " 하며 결혼을 말렸고, 나도 머리카락이 한줌씩 빠질만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넘의 정이 무언지... 몇날 몇일을 밤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만큼 할 말이 많지만 여하튼 신혼때 정말 힘든 세월을 보냈다. 생활이 궁핍했던 탓에 경제관련 서적이나 재테크 관련 서적은 거의 읽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최소한의 종자돈이 있어야 돈도 불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싶어서다. 경제관련 책을 살 돈으로 차라리 로또를 사고 말지. 이랬던 내가 <아버지의 가계부>라는 이 책에 필이 꽂혔다. 제목 위에 씌여진 "물려받은 재산이나 로또당첨 없는 내가 진짜 부자가 된다" 는 문구때문에 유독 관심이 갔다. 부와 가난이 세습된다는 이 시대에 맨손으로 시작한 우리 부부가 진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책을 통해 그 답을 듣고 싶었다.
책에는 네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사업을 하는 재벌, 구조조정에 고민하는 문식, 수입은 많지만 지출 또한 만만찮은 광수, 친구들중 형편이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하늘이 주인공이다. 절친한 친구인 이들 네 사람은 40이라는 나이를 앞에두고 각자 자신들의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임을 가진다. 대화를 통해 어떤 유형의 부부, 가정이든지 제각기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지금은 수입원이 있기때문에 느끼지 못할뿐 의외로 수입없이 살아야만 하는 노후가 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된다. 여기서 하늘은 '아버지의 가계부'를 꺼내든다. 하늘의 아버지가 처음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사업실패로 끼니를 걱정하던 때에 직장을 구한 시점이었다. "여전히 나에게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가." p.83 가계부를 쓸때마다 가난하다는 냉정한 현실과 거기서 발버둥 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고 상처를 받지만 그것은 참 삶을 찾아가는 첫걸음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가계부'는 돈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한 아버지의 마음이요 희생 이다. 삶에 대한 희망이고 꿈을 담은 기록이다. 아버지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웃을 수 있는 날이 왔기에 더욱 값진 보람의 결정체다.
이 책을 읽은 후, 결혼 8년차인 우리 부부가 그동안 얼마나 두서없이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신혼 때는 월급날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기때문에 가계부를 쓴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출되는 내역은 항상 뻔했고 돈 모으는 재미가 빠진 가계부는 쓸 맛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따금씩 남편이 던지는 질문은 "이제 우리 빚 얼마 남았어?" 였다. 우리 부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순자산 없는 우리에게 보증을 부탁하고, 급전을 융통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단지 급여 소득이 높다는 이유로 보육비를 포함해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사는데 거기다 돈까지 떼먹다니 정말 벼룩의 간을 빼먹지 싶었다. 시간이 지나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하면서도 직장맘의 일상이 그러하듯 일단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입출금 내역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이 궁상스럽게 느껴져 되는대로 살았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더니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긴장감이 떨어진 탓이다. 내년에 서른평형대의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나름대로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축하고 싶었는데 이제 겨우 한고개 넘고나니 노후를 대비해야할 나이가 된 것이다.
따져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카드 쓰면서 포인트 적립되는 것에 흐뭇해 했던 나 자신이 너무 바보같다. 당월에 적금할 돈 먼저 예금하고 예산에 맞추어 지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사교육비 지출에 있어서도 일정 비율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지출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거래은행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고,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우리 세대에서 부동산 디플레현상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결국은 하늘 부부처럼 차곡차곡 모아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 돋보이는 점은 네 부부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전개되는 중간중간에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요점을 색지를 써서 구분한 점이다. 남편에게 이 책이 재테크 관련 책이라고 소개하자 책을 휘리릭 넘기고는 색지 부분만 열심히 읽는 것이다. 그러더니 "흠... 우리 가계가 말이야 너무 심각한데... 이제 부터 가계부한번 써보지. 그리고, 카드 가진 거 다 해지하자~" 하면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남편이 정년퇴직하면 울 아들은 몇학년이 되는거지? 대학 공부시킬려면 얼마가 필요하고, 장가 보낼려면 얼마가 필요하고 하며 도표를 그리고, 평소 하지 않던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책에 등장하는 하늘 부부의 수입과 지출, 한달 평균 예금내역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토론도 했다. ^^;; 내친김에 내 생애 처음 가계부도 써 보아야 겠다. 입출금 내역뿐만 아니라 인생 설계도 하고, 내 삶의 흔적도 남기고, 남편에게 가끔씩 한마디 쓰라고 압력도 넣어야 겠다. 돈이 많아 부자, 마음이 풍요로운 부자 두 가지 다 이루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