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력이 지속적으로 나빠지는 것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 4학년때 처음 안경을 쓴 후로 시력이 계속 나빠졌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어느새 시력판에 기호를 하나도 맞출 수 없게 되었고, 시력판을 통채로 외운적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난시까지 겹쳐 막대의 끝이 어디를 짚는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데도 나빠지는 정도가 약간 둔화되었을 뿐 시력은 계속 나빠졌다.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쯤엔 안과에서 상담을 받은 적도 있다. 안과 의사가 말했다. 보통은 20세 이후에 안구와 각막이 다 자라면 시력이 고정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계속 나빠지나요? 안경이 없음 맹인과 다를바 없는데 이러다가 정말 눈이 머는 것은 아닐까요? 의사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꼭 그런것은 아닙니다. 너무 걱정마시고 일단 지켜봅시다. 근데요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게 되는 경우도 있나요? 그런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만... 의사는 귀찮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리면서 미용상의 문제라도 해결하시려면 일단 이걸 써보시죠. 의사는 콘텍트랜즈를 권해주었다. 그날 안과에서 맞춘 랜즈는 착용한지 한달쯤 되었을 때 내 눈에 염증만 남기고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다시 안경으로 돌아왔다.
실명은 원래 옮는 것이 아닌데. 죽음도 옮지 않죠. 하지만 우리 모두 죽지 않습니까. p.53 교통 체증으로 짜증스러운 도로 한복판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출발하지 못하는 차량이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닫힌 창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운전자는 신호등이 바뀔때쯤 갑자기 눈이 멀어 버렸다. 왜? 이유는 모른다. 그냥 멀었다. 안과 의사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돌림병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건부의 공무원은 그저 평범한 안과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병원장도 신중한 태도를 택한다. 실명은 옮는 것이 아니라면서... 첫번째 눈이 안보이는 남자가 생긴 이후, 그의 아내, 그를 집에 데려다준 택시기사와 남자, 경찰, 병원에 있었던 환자들, 의사,간호사 순대로 실명이 전염되고 단 몇일만에 '기하급수적으로 번진다'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는 상황이 된다. 당국은 실명한 사람들을 비어있는 정신병원에 수용하고, 군병력을 투입하여 감시하는데 보초를 서던 군인들 중에서도 실명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감시라인을 벗어나는 수용자들에게 무조건 사살이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 p. 166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의사의 부인'이다. 그녀는 의사가 구급차에 타는 그 순간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말하고 수용소로 따라와 남편과 다른 눈먼 사람들을 돌본다. 지금껏 살면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에 적응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쓴다. 그러나, 보초 선 군인들이 방관하는 것을 이용해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한 눈 먼 사람들의 무리가 등장한다. 더 이상은, 정말이지 더 이상은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고, 격리 수용되고, 추위와 굶주림, 더러운 환경에 놓여졌다. 그 보다 더 끔찍한 상황은 무엇일까? 상상을 뛰어넘는 끔찍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환상적 리얼리즘', '경계없는 상상력','실랄한 풍자' 이 모든 수식어는 저자인 사라마구를 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출판사에서 홍보를 위해 내세운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말 때문에 이 책을 더 늦게 만나게 되었다. 먼 길을 돌았지만 입소문에 힘입어 마침내 내게로 온 책, 첫장을 펼치면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후론 계속 경악하고, 분노하고, 한숨쉬며 그렇게 읽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름도 필요 없단다. 472페이지나 되는 이 책에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없다. 첫 번째 눈이 먼 남자,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의사, 의사의 부인, 검은 안대를 한 노인등이 등장인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옴표가 없는 대화체를 읽을 때는 '책을 더듬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게 작가가 노린것인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독특하다.
한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책읽는 동안 계속 긴장이 되었다. 실체없는 공포, 이유없는 설정에도 구성은 치밀하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은 '살아남는 것', 생존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느낀것인가 하는 부담감도 없지 않다. 의문점들... 왜 의사의 부인은 눈이 멀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먼다는 것을 암시한 것일까? 왜 암흑이 아닌 백색, 빛의 실명일까? 성상들은 왜 눈이 가려졌을까? 등 그 속에 어떤 상징적인 뜻이 담겨 있것은 아닐까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과감하게 털어버리기 했다. 고민을 끌어안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무겁고 신작인 '눈뜬 자들의 도시'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은 의문 한가지. 모두가 눈먼 세상에서 혼자 눈뜬 사람의 고통이 눈먼 자보다 덜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 모두가 눈 먼 세상에서 혼자 앞을 보는 여인의 고통을 떠올리며...
-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볼 권리가 없어. (p.96)
- 다른 모든 사람이 눈먼 세상에서 눈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러분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나는 장님 나라의 여왕이 아니에요. 나는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려고 태어난 사람일 뿐이에요. (p.388)
-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에요. (p.418)
-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p.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