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 - 처음으로 읽는 조선 궁중음악 이야기
송지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드라마 '동이'를 보면서 잘 만들어진 사극 한 편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참 크다는 생각을 한다. 초반부를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드라마 시작 당시 '장악원'을 재현하겠다는 제작진의 포부가 밝혀져 기대를 한껏 모았다가 어느 순간 부터 장악원 이야기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통에 말들이 많더라. 더구나 앞서 방송된 장악원의 풍경에서 지적되었던 오류나 무성의한 부분에 대해 만회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상태라서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쨌거나 '동이' 덕분에 <최숙빈>을 읽었고, 같은 이유로 이번 책을 선택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는 제목 그대로 장악원에 관한 내용을 담은 역사서이자 궁중음악에 대한 책이다. 우선 장악원이란 조선시대 궁중에서 행해지던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을 말한다. 조선은 문치주의, 유교주의 국가로 공자의 '예악禮樂사상'을 이념으로 정치를 펼쳤던 나라다. '예'와 '음악'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완전하다고 생각했기에 궁중의 제례를 비롯한 각종 의식에는 반드시 격식과 음악이 함께 준비되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궁중음악이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세종시대와 영,정조 시대이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는 것이 세종대왕의 시대는 조선을 통틀어 모든 분야에 기틀을 다진 시기다. 우선은 나라가 안정이 되어야 예도 찾고 음악도 있는 법, 시기적으로 부흥했던 때에 예악 정치의 꽃을 피웠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있거나 정통했던 임금이 다스렸던 시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세종대왕과 영, 정조의 경우는 궁중음악이 연주될 때, 연주가 어떻고 음이 맞는지 혹은 악기의 상태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음악적인 조예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궁중음악이 유지, 계승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끊이지 않는 전란이 원인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연주가를 구할 수 없거나 악기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사실상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무형문화재의 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내야할 전통 궁중음악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어렵고 지루한 음악일 뿐, 이런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세종 때 명나라의 요구로 보냈던 '창가비'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문화교류라 할 수도 있지만 어린 아이들을 기약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당시의 분위기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숙종때는 청나라 사신의 요구로 국상 중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니 누구를 탓하랴. 그리고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 우리의 전통 악기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음악은 단순히 귀로 듣고 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문화의 집결체이자 조상의 혼이 담긴 소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내 아이만 하더라도 뱃속에서부터 태교에 좋다는 클래식을 듣고 자랐다. 클래식이 무엇인가, 결국은 서양 궁중음악에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예술의 한 분야로 전해 내려온 음악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지금까지 우리 전통에 음악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무관심 했구나 싶다. 내가 우리 것을 챙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지킬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똑같이 사람사는 세상인데도 동, 서양의 기준과 가치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그 속에 예와 인을 녹여내고자 했던, 선율에 우주를 담아내려 했던 조상들의 넓은 기상에 고개가 숙여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인가 로마의 멸망과 지중해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팍스 로마나 이후 지중해는 이슬람 해적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해안선을 따라 높다랗게 세워진 망루들을 보면서 당시 해적의 출몰을 감시하던 병사의 긴장과 두려움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의 참혹함을 뒤로하고 지금은 버려지거나 혹은 관광명소가 된 망루들이야말로 세월의 덧없음이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날 죽일 거요....? 지금?"

"아니요.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냥 죽이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전에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당신을 좀 더 알아야 할 필요도 있고, 또 당신이 몇 가지 알아야 할 일들도 있고요. 난 당신이 그것들을 알고 깨닫기를 바랍니다. 물론 결국 그렇게 된 이후에는 당신을 죽여버리겠지만. (p.48)"

 

 주인공 파울케스는 버려진 망루에서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다. 그는 전직 종군기자로 전쟁터를 누비며 삶과 죽음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사진은 특정 상황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100마디 말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를 향해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대야만 하는 일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게다가 점차 무감각해지는 스스로의 모습과 진실성이 결여된 사진을 보면서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직접 전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전쟁터를 터났지만 전쟁터(망루)를 벗어나지 못하고, 더이상 전쟁을 목격하지는 않지만 과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깊은 연민과  비애가 느껴진다.  

 

 어느날 그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으니 자신을 아주 오래전 파울케스에게 사진이 찍힌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파울케스를 죽이기 위해 오랫동안 찾아다녔다고 말하는 남자, 하지만 금방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남자,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사흘간이나 계속된다.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파울케스가 찍었던 사진들에 관한 것이었고 엄밀히 말해 그들이 겪은 전쟁의 비참함이자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게  사진 속 인물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나비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특정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 자체로 이미 서로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가정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그들중 어떤 사람은 부부가 되고, 친구, 동료가 되었다가 생사를 함께하는 동지가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지나가는 것 조차 때론 상대방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이 수년에 걸쳐 결국 두 사람을 만나게 했으니 말이다.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이 책은 단순히 소설적인 흥미나 재미를 위주로 한 책은 절대 아니다. 전쟁이라는 소재 자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고 묵직한 것처럼 내용도 상당히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전직 종군기자였다는 저자의 이력이 영향을 미친 것도 있겠지만 주인공이 회상하는 전쟁의 참혹함은 몇 마디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이 극도로 북받칠 때 정작 눈물이 나지 않는 순간 만큼이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살상인가! 지구상 어느 곳이든 전쟁은 안된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솟구쳤다.

 

 인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시대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법과 제도, 교육 수준 등 모든 것이 발전했음에도 왜 전쟁은 끊이지 않는 것일까? 리는 흔히 고대인들이나 아프리카 오지의 원시 부족들을 미개하다고, 문명화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고대에 인신공희가 있었고 사실상 '인권'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때는 그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쟁'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과연 현대인들이 문명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긴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중국의 유명한 인문학자인 위치우위가 말하기를 "문명은 일종의 겉치레가 될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다. 그 마지막 지향점은 인류를 보호하는 길이다." 라고 했다. 사람들이 관습이나 규율을 만들고 법을 만든 것도 인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문화의 발전은 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이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 먹을 것과 여자들을 얻기 위해서 전쟁을 치렀을 때보다 '이념'을 내세워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차마 못할짓을 하는 현대인들이야 말로 스스로를 망루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인 전용복 - 옻칠로 세계를 감동시킨 예술가의 꿈과 집념의 이야기
전용복 지음 / 시공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남과 다른 열정을 가지고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감동 그 이상의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서 마침내 정상에 선 인물이라면 더욱 존경받아 마땅하고 그들의 지난 시간에 대해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 전용복> 이 책은 세계적인 옻칠 공예가인 전용복님의 자서전이다. 옻칠이라하면 어릴 적 기억에 제사상이라든지 친정집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자개농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상 지금은 많이 잊혀져 명맥만 유지되는 전통이 아닌가 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유년시절과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 계기와  일본의 메구로가조엔의 작품을 복원하게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옻의 성분 자체가 자연에서 얻은 천연 재료이다 보니 옻칠이 자연친화적인 것이라는 사실쯤은 쉽게 짐작이 된다. 하지만 옻칠된 작품이 만년을 간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옻칠이 된 나무는 옹기처럼 숨을 쉼으로써 나무를 보호해 준다. 고구려의 벽화나 팔만대장경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 오래된 무덤의 제기에서 발견된 밤톨이 썩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옻칠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무 한그루에서 얻을 수 있는 옻의 양이 너무 작아 구하기 어렵다는 점과 같은 이유로 인해 가격이 비싸다는 점 때문에 오늘날에는 옻칠 대신 니스 같은 다른 칠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화, 산업화가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가격 경쟁력은 질적으로 우수한 옻칠을 대중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요즘은 아예 생소한 분야로 인식되어 버렸다.

 

 책을 읽으면서 신한균 님의 <신의 그릇>이라는 팩션이 떠올랐다. 그릇을 빚는데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알아채지도, 이용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일본에 빼앗겨 버린 과거가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옻칠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옻칠 기법을 연구하고 성과를 얻을 때마다 국내에서 뜻을 펼치기를 원했지만 결국 일본에서의 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옻칠 공예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대물림된 악감정 탓인지 일본이란 나라가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그들의 심미안이야말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가 복원했던 메구로가조엔 이라는 호텔의 경우도 장사치로서의 이익보다 문화재를 지키려는 경영진의 노력에 고개가 숙여졌다. 일본내의 유명한 공예가들을 제치고 다른 나라의 그것도 무명의 공예가에게 1조원 예산의 복원 사업을 맡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한국인 전용복>을 통해서 전통을 이어가려는 한 인간의 열정과 깊은 고뇌를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묵직해져왔다. 60여년전 선배 장인들이 작품을 하나씩 복원하면서 느꼈을 감동과 희열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만약 이 책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전통 기법인 '옻칠'에 대해 이렇게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은 갈 길이 먼듯 보이지만 언젠가는 저자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국내에서도 옻칠이 새롭게 주목받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밑줄 긋다

 

"우리 조상들의 작품들에는 삶에서 무르익은 혼과 철학이 있다. 민화만 보더라도 삶을 꿰뚫는 통찰력과 풍자정신, 샤머니즘이 녹아 있다.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티브는 바로 '민족'이었다. 내가 특별한 애국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진 것만 표현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p.63)"

 

"전통적 정신을 계승하고 그 전승된 정신을 밑거름으로 삼아 끊임없이 자기를 연마할 것 그리고 자기연마를 통해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낼 것. (p.149)"

 

"처음부터 우리가 완벽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와 직원들은 작품 하나하나 만들어가면서 완벽에 가까운 기법을 터득해낼 수 있었다. 결국 메구로가조엔의 복원작업과 함께 성장한 셈이다. (p.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숙빈 - 숙종시대 여인천하를 평정한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숙빈 최씨
김종성 지음 / 부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독서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내 경우는 그렇다. 놀아달라 졸라대는 아들 녀석, 산더미 같이 밀린 집안일, 퇴근 후 기운빠진 심신... 그런 이유보다 더 강력한 방해물이 있으니 바로 '드라마의 유혹' 이다. 집에서 TV를 아예 치워버릴까도 고민했었지만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편이라서 마음을 접었는데, 가끔씩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을 맡은 트랜디 드라마나 사극에 한번 꽂히면 독서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된다. 

 

 드라마 '동이'의 경우는 처음 부터 보기 시작했던 것은 아닌데 이런저런 입소문과 '이산'의 제작진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어 스쳐지나가듯 몇장면을 보다가 결국 고정으로 챙겨보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 시작에 발맞춰 바빠진 곳이 있으니 최숙빈에 대한 책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동이'의 경우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왕 세종> <이산>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등 방송과 함께 출판계가 활성화된 경우는 매우 흔하다. 

 

 물론 사극이 역사를 왜곡하고 일반인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그것은 국민들을 과소평가하는 생각에서 나온 주장은 아닐까? 그런 논란은 10여년도 훨씬 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것이고 이젠 사극의 내용을 100% 진실이라 받아들이는 시청자도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다시말해 팩션과 역사서의 차이, 사극과 역사왜곡에 대한 부분에서는 어느정도 자유로와져야 할 것이고 궁금한 것은 관련 책을 통해 따로 살펴보면 될 것이다.   

 

 <최숙빈> 이 책은 '동이'의 주인공 최숙빈에 대한 역사서이자 인물탐구에 관한 책이다. 배경이 되고 있는 숙종시대는 우리 역사 중에서도 가장 자주 작품화되는 시대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라는 두 여인이 벌이는 팽팽한 긴장감은 드라마틱함의 진수이자 여인열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남인과 서인을 대변하는 두 여인들의 치열한 싸움에서 정작 어느 누구도 승자는 없다, 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아닌 왕의 어머니 최숙빈이야말로 '최후의 승자' 라고 말이다. 최숙빈은 자신을 지켜주던 뒷세력이 없었고 천민 출신에 따뜻한 보살핌 한 번 받지 못하고 자랐던 여인이다. 우여곡절 끝에 입궐하였으나 침방 나인을 비롯해서 힘겨운 궁중 생활을 견디어야만 했다. 하지만 당차고 소신있는 모습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용종을 잉태하였을 뿐 아니라 열한 당쟁 속에서도 왕의 어머니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반상의 제도가 지배하던 시대다. 영조는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으로 인해 컴플랙스가 심했고 재위기간동안 사력을 다해 어머니의 지위를 승격시키기위해 애쓴다. 반면 당시의 천민들과 평민들에겐 최숙빈이 자랑스러움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인지상정일 것이다. 또한 당색이 없었던 최숙빈의 말은 숙종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어 점차적으로 궐내에 입지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최숙빈>을 통해 드라마 '동이'를 통해 궁금했던 점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다른 역사서의 경우 최숙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해놓고는 결국 주변인물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경우가 많던데 이 책은 최숙빈에 대한, 최숙빈을 재조명한 내용이어서 맘에 든다. 다만 사료가 워낙 부족한 탓인지 내용이 반복되는 부분이 있어 아쉬운 점도 있다. 역사학자들이 한 인물에 대한 책을 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문을 뒤져야 하고, 관련 자료를 취합해야 할지 그 노고가 짐작은 되나 앞으로도 더 많은 '진실'이 대중에게 공개되기를 기대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역시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일찌기 시작된 동이와 숙종의 인연,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촐싹대는 숙종의 재발견도 그렇다. 특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을 양손에 쥔 여인으로 묘사된 동이, 목숨이 10개도 넘을 것 같은 그녀의 활약도 모두 시나리오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동이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최숙빈>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놀라운 사실은 동이가 아닌 최숙빈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나서도 여전히 동이가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상상이 가미된 역사와 역사의 진실 사이에 양다리 걸치기... 생각보다 짜릿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라는 것이 계획대로만 살아진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학창 시절에는 무난한 성적을 얻고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 졸업장에 남들이 알아줄만한 직장을 다니고 그런대로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그렇게 늙어간다면, 중년 무렵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소리도 듣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더할 것 없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내가 그렇게 이루고 싶었던 자리에 오르고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을 가졌지만 삶의 어느 순간 찾아오는 공허감이랄지, 마치 길을 잃은 듯함 당황스러움은 예상치 못했던 복병처럼 나타나 일상을 뒤흔들곤 한다.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가장 먼저 가족을 비롯해서 친구, 지인 등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떠올려 보지만 결국 극복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 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럴때면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 진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이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서영은 님의 '산티아고 순례기'이다.  우선 저자에 대해서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름은 낯익은데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작품이 없는, 하지만 저자에 대한 소개글 만으로도, 특히 김동리의 여인이었다는 점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책을 읽은 후 그녀의 작품이 실린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당장 주문해야겠다고 결심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향해있던 문학계의 관심과 명예를 단호하게 내려놓고, '진정한 자신'을, 절대자를 느끼기 위해 순례자가 된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 두 제자중 야고보의 무덤(스페인식 이름이 산티아고)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다.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을 기준으로 대략 800km나 되다보니 며칠만에 끝날 여행은 아닌 것이다. 저자의 경우도 약 2달 가까이의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최대한 간소한 방식으로 숙식을 해결해가면서 도보로 이동을 했으니 흔히 말하는 '관광'과는 차원이 다른, 과연 여행자들의 로망이라 할만한 여행인 것이다.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는 말, 이 책을 읽은 후에는 그저 욕심부리며 아둥바둥 살지 말라는 교훈을 넘어서 더 깊은 의미로 와닿는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오로지 걷고 걸어서 완성되는 산티아고 순례를 통해 결국은 '나를 찾는다'는 것이 '나를 내려 놓는 것'임을 배운다. 길 위에서 만난 착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신의 존재를 느끼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통해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하고, 설사 거룩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상업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에 분노와 허탈감이 들지라도,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이미 전과 다른 '나' 되었다는 것, 그것 만큼은 분명 가치 있는 변화일테니 말이다. 

 

 

밑줄 긋다

 

"음식, 극도로 간소해요, 옷차림, 옛날 순례자들은 단벌이었어요, 잠자리, 물론 불편하죠, 그나마도 얻지 못하면 노천에서도 잘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을 고생스럽다고 여기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없어요. (p.143)"

 

"착한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평소에는 밥하고 빨래하고 손녀를 안아주고 바느질을 하는 일상인이지만, 고난받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즉시 하나님의 사자로 바뀌는 준비된 영혼이다. (p.297)"

 

"사람들이 누군가 자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 존재가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 누구도 일단 존재했던 모든 것은 절대로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완전한 무란 없다. 다만, 있음을 내포한 없음, 없음을 내포한 있음이 계속 생성과 소멸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은 다만 '나였던 존재'일 뿐이다. (p.348)"

 

"여기까지 오는 길이 고통스러웠으니 산티아고가 거룩하고 성스럽기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일 수 있다. 산티아고가 설사 내 기대대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성지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 역시 표적에 지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영적 빛으로 거듭거듭 변환되는 삶과 말씀의 동화작용이다. (p.365)"

 

"위기에 처한 것은 엘리야가 아니라, 가뭄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줄 모르는 세상이었다. (p.3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