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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녀의 짓궂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처음에 역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라는 느낌이었다. [염소의 축제]의 라틴 아메리카 독재 정치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연사 인식, 그리고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의 놀라운 성적 상상력과 유머를 통한 정치 풍자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가로서의 능력, 아니 이야기꾼으로서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착한 소년과 나쁜 소녀의 평생에 걸친 파란 만장한 러브 스토리와 간간이 곁들여진 남미, 특히 페루의 격동적인 혁명과 독재로 점철된 현대 정치사는 독자에게 한치의 지루함이나 난해함을 허용치 않는다. 작가는 과도한 심적 묘사나 불필요하고 장황한 사물 및 현상에 대한 미적 분석을 배제하고 인물과 사건 위주의 서사적 진행으로 독자에게 가독성 이라는 선물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주인공 착한 소년이 파리에 있을 당시 프랑스 문화계에 대한 아래의 글은 작가의 소설론을 대변한다.
- “(중간 생략) 그로 인해 창작가 대신 비평가들이 멘토가 되면서 문화가 약간 위축되었다. 처음에는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 같은 구조주의가 멘토였다가 그나중에는 질 들뢰즈와 자크 데리다 같은 해제주의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오만하고 난해한 수사법을 구사하는 그들은 자기 신봉자들과만 은밀하게 무리를 이루며 고립되어 일반 대중과 멀어졌고, 이런 변화의 결과로 문화생활은 갈수록 진부해졌다”.
난 이 부분을 읽고 격하게 동의했다. 대학시절 사회학 수업을 듣는데 – 강의 과목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셀 푸코,
질 들뢰즈의 책들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고 결국 난 이 과목을 중도에 포기했다. 머리 나쁘고 게으른 내 잘못
이었지만, 수업을 들을 때마나 강단 앞에서 떠들고 있는 교수는 자신의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지 궁금했는데
그의 표정과 눈빛은 그의 나불되는 입만큼 자신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착한 소년의 친구들은 매력적이다. 파리에서 만난 파울은 페루 학생들을 쿠바 게릴라 훈련에 파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열렬한 혁명주의자이지만 오로지 파리에서 사는 것이 꿈인 소부르주아주적인 리카르도를
비난하거나 계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루 학생들 무리에서 첫사랑 나뿐 소녀를 보고 자신의 업무를
망각한 채 그 여자와의 데이트를 부탁하는 철딱서니 없는(?) 친구 리카르도를 보고 데이트를 허락하면서
현실적인 충고를 잊지 않는 파울은 혁명주의자이기에 앞서 진정한 친구이자 남자 였다. 그러기에 파울은 페루
산악지대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자신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페루 혁명의 결과가 결코 쿠바에서처럼 해피
엔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리카르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혁명 동지들에 대한 죄의식과 자신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비판에 괴로워하는 순수한 혁명적 열정으로 페루행을 결정하게 된다. 또한 히피 친구 후안 바레토와
유네스코 친구 통역사 살로몬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그들의 죽음은 처연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들의 사랑은 후반부로 갈수록 길을 잃고 서로에게 심리적, 육체적 고통과 파멸을 주는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양상을 보이다가 종국에는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인류 불면의 신파로 끝이 난다. 마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남자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반전 메시지로 무장한 히피로 출발 했으나 결국에는 문란한 성적 방종과 마약에의 탐닉으로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첫사랑 제니의 죽음을 지켜주는 모습처럼 말이다. 물론 이는 아름답지도 않는 클리셰에 불과하다.
반복되는 엽기적인 나쁜 소녀의 거짓말과 변신은 진부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쁜 소녀의 악행을 그대로 받아주기만 하는 착한 소년은 답답하고 짜증난다. 칠레소녀 릴레, 아를레테 동지, 차콘 사령관의 정부, 로베르토 아르누아 부인, 리차드슨 부인, 구리코, 리카르도 소모쿠루시오 (착한소년)의 부인, 그리고 본명인 오틸리티까지, 나쁜 소녀의 변신은 처음의 기대감이 무색하게 소설적 개연성을 희생하는 대신 절대적 사랑의 극한을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과도한 욕심의 충실한 도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사랑은 윤리가 아닌 감정이다. 그래서 때로는 질병이 될 수도 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소설 [나쁜 소녀의 짓궂음] 속의 사랑의 질병은 인위적으로 계산된 질병이다. 마치 인간의 질병을 연구하기 위해 쥐에게 인위적으로 병균을 투입한 후 질병의 정도에 따라 그들의 행동의 변화와 적응의 과정을 관찰하는 실험 같은 느낌 말이다.
뭐 이런거다. 남녀의 사랑에서 한편에는 이기적이다 못해 무책임한 소녀를, 반대편에는 순수함을 지나쳐 미련해 보이기 까지 하는 소년을 통해 '사랑이란 이럴수도 있는거야' 라는 자유롭고 절대적인 사랑에 바치는 헌사와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공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