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첫 챕터인 꽃게잡이 배 이야기를 다 읽기도 전에 깊은
반성이 밀려왔다.
(어떤 장르의 책을 읽어도(심지어 로맨스까지) 반성 할 점이 최소한 하나쯤은 떠오르는 걸 보면, 난 아무래도 반성에 특화된 성향이거나 그동안 엄청 엉망으로 살아왔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이 글을 쓰면서도 또 반성을 하고있다)
나름 예술가에 속하(고 있다고 믿)는 대중적인 창작 분야의 일을 막 시작했던 때부터, 적어도 하기 싫은 일은 거절할 수 있는 짠밥의 경력자가 된 지금까지 내가 걸핏하면 하던 말 중 하나가 ‘정 할 거 없으면 일용직(노동)이라도 하면 되지 뭐.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소위 일용직이라 불리는 노동에 내가 얼마나 무지 했었는지 깨달았고,
‘정 할 거 없을 때 육체 노동을 하기‘엔 내겐 체력도
요령도 경험도 지식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단 하루도 그 현장에서 가치 있는 대접을 받으며 일당을 받을 능력이 전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노동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내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쉬운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이 나이가 되도록 난 모르고 있었던 거다, 정말이지 너무나 한심하게도.

흔히 ‘노동은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이 말이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말하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버금가는 굳건한 경제적 사회적 수직적 지위 아래 갑과 을의 차별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노동은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 땀 흘리는 육체노동자들을 멸시하고 당연한듯 천대하는 자본주의 사회.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더 많이 일하고 더 위험하고 더 힘들면서 돈은 훨씬 더 적게 받는 노동은 점점 더 하층 지위로 내몰린다.
이 책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나와 내 가족은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어쩔수 없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르포나 취재 형식의 관찰자 시점으로 노동 현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작가중 가장 많은 직업을 가져봤을거라 장담하는 저자가 직접 경험했던 우리나라 곳곳의 노동현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담겨있다.
저자가 직접(그것도 생계를 위해) 경험했던 수많은 노동의 현장은, 저자의 뛰어난 문장력에 생생한 묘사력이 더해져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직접 겪은 일이라는, 누군가가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힌 진짜 삶이었다는 확실한 근거를 배경으로 가진 글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삶의 바닥까지 내려가본 불행한 경험이 작가에겐 귀중한 창작의 자산이 된다‘는 표현이 적어도 이 책의 저자인 한승태 작가에겐 맞는 듯하다.

저자는 ‘종이에 쓰여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기본월급 100만원이라 쓰인 전단지만을 믿고 꽃게잡이 배에 올랐다가, 살고 죽는건 하늘의 뜻이라고 믿는 선원들에게 구박 받으며 순식간에 생사가 갈리는 갑판에서 끔찍한 노동에 내몰리고,
우리나라 최고 매출을 자랑하는 강남의 주유소에선
운전석에 앉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최악의 갑질을 서슴치 않는 고객들을 상대하며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아산의 돈사에서 돼지똥을 치우는 동안 평생 했던 기도보다 더 많이 신을 불렀으며,
숨조차 편히 쉬기 힘겨운 비닐 하우스에선 누군가가 축복이라 부르는 햇빛조차도 어깨를 짓누르는 노동의 무게임을 깨닫고,
자동차 부품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새삼 저울질 하게 됐음을 고백한다.

책은 꽤 두껍지만 저자의 뛰어난 묘사력과 날카로운 비유,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인해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자는 그저 자신이 경험했던 여러 노동현장의 사람과 일에 관해 담담하게 풀어놓을 뿐이지만,
꽃게잡이 배에서 시작해 편의점과 주유소, 돼지농장과 비닐하우스, 자동차 부품공장을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이기주의, 갑과 을로 대변되는 계층 문제 등에 대해 슬그머니 분노가 치밀고,
최소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 받으며 가치 있게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 해보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꽤나 진지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책 속의 문장들은 딱딱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게 바로 블랙유머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묘사 속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질만큼 놀라운 유머를 감추고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를 들자면 이런 놀라운 문장들이 책 곳곳에 포진 해있다가 기습공격으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 양돈장 악취는 심각한 걱정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고, 조증 환자를 진정시키는데
효력이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좀도둑질이나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사회봉사랍시고 꽁초나 줍게 할 게 아니라, 이런 똥 리어카를 끌게 해야한다.
- 선원들의 대화 주제는 선주가 얼마나 ‘좆같은‘ 놈인가와 일이 얼마나 ‘좆같이‘ 힘든가로 엄격하게 한정 되었다.
- 지방 젊은이들은 계속 서울로 몰려들고, 그 덕분에 지방 소도시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가 SG워너비의 신곡을 연주하며 지나간 것같은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이 건물은 화재 발생시 투숙객들을 최대한 신속하게 질식사 시킬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내가 완강기나 비상계단은 없냐고 묻자 고시원장은
내가 샹들리에는 어디 달려있냐고 묻기라도 한 것처럼 황당해했다.

이렇게 내심 감탄하며 속으로 웃게되는 글 뿐 아니라, 풉! 하고 입 밖으로 웃음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문장들도 많은데, 특히 고시원에서 화장실 사용을 두고 벌인 어느날의 싸움처럼 주변 사람들과의 일화
중엔 큰 소리로 웃게되는 이야기들이 적지않다.
이처럼 뛰어난 묘사력 속의 치밀한 유머 뿐 아니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노동자를 무시하는 세상에 대한 날선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상위계급은 하위계급을 마음껏 욕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은 이제껏 단 한번도 이 권리를 소홀히 하는 상위계급을 본 적 없다고 일갈하고,
자신이 감정노동자임에도 타인의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 되면 상대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무례하게 대하는 을들의 이중성을 꼬집으며,
한국의 모든것이 서울에 있을뿐 아니라 많은 것들은 서울에만 있기에, 문화와 의료중 어느 쪽도 제대로 향유할 형편은 못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싶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기때문에 ‘한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서울‘이라는 말로 지나치게 편중된 지역 발전의 불평등을 비판한다.
그저 작가로서의 호기심으로 발만 살짝 담군 것이 아니라 생활자로서 그 많은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써내려간 그의
솔직함에 감탄했고,
설명을 목적으로 썼음에도 탁월한 묘사력으로 무장한 뛰어난 문장들이 가득하다는 점이 부러웠고,
이런 밑바닥 생활에도 주눅 들거나 자학하지 않는
당당함과 예리한 비판의식이 존경스러웠다.

책을 모두 읽고 서문을 다시 읽어보니 저자가
주장 했다는 제목인 ‘퀴닝‘이 출판사가 결정한 ‘인간의 조건‘보다 이 책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무 능력도 없고 할 수 있는건 앞으로 한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없는 졸(체스에선 폰)이라도 끝까지 가면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체스의 룰 ‘퀴닝‘.
현실에선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가 되는 일같은 기적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해도, 평생 졸로 살아야하는 우리에게도 퀸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가 한번쯤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 하나 정도는 가능한 세상이라면 용기 내서 열심히 살아볼만 하지 않을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받고 살 수 있는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졸도 성실히 땀 흘려 노력하면 언젠가 퀸으로 짠!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기적일 뿐이라 해도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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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그해, 여름 손님》 리마스터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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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읽는 내내 머리 속에 계속 떠오른 생각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력이 이 세상을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 채우며 눈부시게 반짝이는 여름 풍경도,
찬란한 그 시간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태워버릴듯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만나 조금씩 변해가는
열일곱 소년의 뜨거운 열정도,
낯선 여름 손님을 따뜻한 고향의 마음으로 안아주는
엘리오의 가족과 친절한 이웃들도..
이 소설에는 아름답지 않은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눈물 나게 슬프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아름다움에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스며있음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깨닫게 된다.

주인공 엘리오는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열일곱살의 고교생.
가족들이 해마다 여름을 보내는 시골 마을 별장에는
대학교수인 아버지의 번역작업을 도우며 자신의 책을 집필하려는 손님이 오는데, 그해 여름엔 올리버라는 스물 네살의 대학교수가 초대됐다.
그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엘리오는 올리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를 향한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에 휩싸인다.
모든 감각이 마치 올리버를 향해 열린듯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그의 눈빛과 미소와 체취와 사소한 말과 작은 몸짓 하나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하루 하루.
소설은 이처럼 여름 손님인 올리버에게 매혹된 소년
엘리오가 갑작스런 그 끌림의 정체를 모른 채 겪게되는 온통 그만을 향한 감정의 변화와,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어 나누는
두 사람의 짧지만 뜨거운 사랑,
예정된 이별 후 다가온 고통의 나날을 지나 20년 후
서로를 처음 만난 시골집 앞에서의 재회까지..
갑자기 찾아온 불꽃처럼 뜨거운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대책 없이 흔들리고 아파하면서도 더없이 찬란한 황홀을 경험하는 소년 엘리오의 성장기를 섬세하고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올리버를 대상으로 한 엘리오의 상상과 욕망, 연인이 된 두 남자의 성 묘사는 꽤 노골적이다.
하지만, 동성애나 성 묘사의 수위같은 잣대는 이 소설을 평가하는 데 있어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게 되는 그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오는 내밀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빛나는 청춘의 한 시기에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군가를 처절하게 갈망해본 사람이라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엘리오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리버가 떠난뒤 아들의 고통을 짐작하는
엘리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위로의 말은
아픈 청춘의 시간을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준다.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 지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랄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일면 끄지도 잔혹하게 대하지도 마라.
무엇도 느끼면 안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건 시간 낭비야.˝
찬란한 청춘의 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 시절의 사랑은 죽을만큼의 고통을 함께 가져오지만 피하지 않을 가치가 있다는 것,
몸과 마음이 순수하게 반짝박짝 빛날때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기꺼이 누리고 즐기라는 것.
후회보다는 아픔을 남기는 게 낫다는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이런 멋진 아버지를 둔 엘리오가 한없이
부러웠고, 상처 받을까 두려워 시작도 하지 못했던
내 청춘이 떠오르며 저렇게 멋진 어른이 내 옆에 있었다면 내 삶도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기도 했다.
이 소설이 그저 단순한 퀴어소설로 치부되지 않고
명작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그것, 엘리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했던 삶의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짧기에 더 아쉬운,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처럼
지나고 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의 한 시절,
온 마음으로 그의 존재를 받아들여 내 안에 가득 채우고 나의 모든 진심을 다해 그를 사랑하는 것.
어쩌면 누군가의 삶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 뜨겁고
순수한 열정의 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고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소설은, 지나버린 찬란한 한때를
향한 아름답고 슬픈 그리움의 향수인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을 돌고 돌아 20년 후 첫만남의 장소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엘리오의 바람대로 올리버는 자신의 이름으로 엘리오를 불러줬을까?
(사랑하는 이를 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이토록
설레고 섹시한 거였다니..^^)
엘리오가 좋아했던 올리버의 말로 두사람에 대한 나의 바람을 대신한다.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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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읽는 내내 머리 속에 계속 떠오른 단어였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력이 온 세상을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 채우며 눈부시게 반짝이는 여름 풍경도,
찬란한 그 시간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태워버릴듯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만나 조금씩 변해가는
열일곱 소년의 뜨거운 열정도,
낯선 여름 손님을 친절한 고향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탈리아 가족과 이웃들도..
이 소설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눈물 나게 슬프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아름다움에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스며있음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깨닫게된다.

주인공 엘리오는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열일곱살의 고교생.
가족들이 여름을 보내는 시골 마을 별장에는 해마다 대학교수인 아버지의 번역을 도우며 자신의 집필을
하려는 손님이 오는데, 그해에는 스물 네살의 미국 대학교수 올리버가 초대된다.
그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엘리오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때부터 온통 그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엘리오의 감정이 펼쳐진다.
모든 감각이 올리버를 향해 열린 것처럼 그만을 보고,
그의 몸 곳곳을 살피고, 그의 체취와 눈빛과 말과 발걸음 소리와 습관까지 온통 자신을 사로잡는 그의 그의 모든 것에 집중하는 엘리오.
소설은 여름 손님인 올리버에게 매혹된 소년 엘리오가 그를 향한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온통 그만을 향하며 느끼는 감정의 변화와,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어 후회 없이 사랑을 나누는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들, 그와의 이별 후 겪게된 아픔의 나날을 지나 20년 뒤 그와 처음 만났던 집앞에서 다시 재회 할때까지, 갑자기 찾아온 불꽃같은 사랑의 감정 앞에 대책 없이 흔들리는 소년 엘리오의 성장기를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있다.

올리버를 대상으로 한 엘리오의 상상과 욕망, 연인이 된 두 남자의 성 묘사는 꽤 노골적이다.
하지만 이성애냐 동성애냐 하는 구분과 성 묘사의 수위 같은 것들은 이 소설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게 된 순간부터 겪게되는 그 모든 내밀한 감정들의 흐름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이성이든 동성이든 빛나는 청춘의 한 시절에 누군가를 처절하게 욕망 해본 사람이라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 뜨거운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올리버가 떠난 뒤 아들 엘리오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던 아버지가 해주는 위로의 말이 우리에게도 큰 위안을 주며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다.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랄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일면 끄지도 잔혹하게 대하지도 말아라.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없어져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건 시간 낭비야.˝
찬란한 청춘의 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 시절의 사랑은 죽을만큼의 고통을 함께 가져오는
것이라 해도 피하지 않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
몸과 마음이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반짝반짝 빛날때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기꺼이 누리고 즐기라는 것.
후회보단 아픔을 남기는 게 낫다는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이런 멋진 아버지를 둔 엘리오가 한없이
부러웠고, 상처 받기싫어 시작도 하지 않았던 내
청춘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나에게도 저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기도 했다.
이 소설이 그저 단순한 퀴어소설로 치부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것, 아버지가 엘리오에게 알려주고 싶어했던 삶의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짧아서 더 아쉬운,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의 한때처럼 지나고 나면 다시는 오지않을 청춘의 한 시절,
온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여 그의 존재를 내 안에 가득
채우고, 모든 생각과 마음과 몸으로 온통 그만을 뜨겁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
어쩌면 누군가의 삶에는 한번도 오지 않을 그 순수한
열정의 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고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소설은 지나버린 그때를 추억하게 하는 아름답고 슬프고 아쉬운 그리움의 향수인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을 돌고돌아 20년전 첫 순간의 장소에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그후에 어떻게 됐을까?
엘리오가 바란대로 올리버는 자신의 이름으로 엘리오를 다시 불러줬을까?
(사랑하는 이를 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이렇게나 설레고 섹시한 일이었다니..^^)
엘리오가 좋아했던 올리버의 말로 두사람에 대한
나의 바람을 대신하련다.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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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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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간을 사용하되 그사람이 시간을 낭비 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것.‘
이 단편집의 저자인 유명작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창작원칙이라고 한다.
멋진 원칙이다.
다른 이들의 시간에 대한 존중과, 은연중에 결코 시간낭비로 치부되지 않을거라는 자기 작품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
그의 작품을 읽고나니 충분히 저런 말을 할 자격 있는 작가임을 인정하게 된다.

솔직히 그의 이름은 알고있었지만(그런데 커트 보니것, 커트 보네거트, 컷 보네것 등 출판사마다 다른 그의 이름 표기는 통일하면 안되는 건가요?ㅜㅜ),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된 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다보면 그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로 그의 이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필력이나 작품에 대한 칭송도 여러번 언급되기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될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심히 유감스럽게도 내가 애정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라 해서 그 작품이 반드시 내 취향과도 부합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터라 계속 읽어? 말아? 하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한결같이 재밌다는 감상을 쏟아내는 독자들 서평의 힘이 컸다.
설마 이 많은 독자들이 모두 나와 다른 관점에서 소설을 읽는 건 아닐텐데, 대부분 일단 재밌다는 감상이 첫번째인 걸 보니 최소한 지루하진 않겠구나
라는 안전보장(?)의 확신이 있었던 거다.

다행히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고, 단편집 치곤 꽤 두꺼운 책임에도 순식간에 다 읽었을만큼 수록된 작품들 모두 편차 없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장점이라는 블랙유머.
유머에는 열광하는 나지만, 어설픈 유머는 차라리
성실한 지루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블랙유머라는 건 유머라고 불리는 어떤 감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한다고 믿기에 보니것 작품의 특징이 블랙유머라는 글을 읽고는
실망과 감탄중 어느 쪽일지 내심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결론적으로 엄청난 감탄과 찬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취향을 기준으로 한 만족도에 따른 거다),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유머로 웃음 터지게 만드는 문장 대신 전체적으로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나 여지 없이 기대와 다르거나 앞서버리는 반전, 독자의 예상을 비웃듯 전혀 다른 길로 흐르는 전개 등에서 그의 유머감각(블랙유머 인정)은 빛을 발한다.
특히 오래전 화석에서 발견된 예술적 감성을 지닌 턱없는 개미들의 멸종 원인을 찾아낸 고고학자
형제를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고, 그들의 연구결과를 거꾸로 편집해 공산주의의 당위성으로 만들어내는 러시아 관리의 이야기에서 그의 블랙유머는 정말 놀랄만큼 반짝인다.
연인이라 생각했던 바람둥이 음악가에게 버려진 앨런이란 소녀가 그의 다른 여자들처럼 절망이나 비난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6개월동안 예민한 음악가의 주변에 밤낮으로 꾸준히 소음을 일으킴으로써 그 소음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진 음악가가 그녀를(엄밀히는 그녀가 만든 소음들을) 잃지않기 위해 어쩔수 없이 그녀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만드는 웃픈 이야기에도,
평범한 주부였다가 이웃들의 위선을 소설로 써 유명작가가 되었지만 외톨이가 된 아내와, 아내의 소설 때문에 해고된 남편이 최악의 상태까지 몰려 서로를 미워하다가, 어느날 길을 지나던 외판원을 만나면서 자신들을 전혀 모르는 그에게서 위로받고 서로를 돌아보게 되며 예전의 애정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에도,
평범한 소시민 부부가 일년동안 모은 돈으로 결혼기념일 호사를 누리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멸시를 당하고 살인까지 목격하지만, 그 식당의 주인이자 도시의 지배자인 범죄자에 의해 도리어 살인자로 몰려 쫒기다가, 결국 상상도 못했던 전개 속에 결국 악을 응징하고 소중한 일상을 되찾는 이야기에도..
작가 커트 보니것의 장점이라는 날카로운 블랙유머의 강력한 힘과 소설적 매력이 넘칠만큼 충분히 담겨져 있다.

다른 단편집들과 달리 책 제목인 ‘카메라를 보세요‘란 제목의 작품이 책의 거의 끝부분에서야 나오는 것도
신선했고, 이야기들 대부분이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거의 1세기 전에 태어나(1922년생이라니!)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재미있고 공감을 느끼게 해주다니..
예술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감각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끄덕이게 된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조롱한 부자들의 안일함과 이기주의, 권력자들의 무자비한 탐욕과 위선, 순수학문까지 위협하는 체제의 부당함이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서글프고 유감스럽지만,
소박한 일상이 주는 기쁨과, 따뜻한 관계를 통해 얻는 삶의 소중한 가치는 언제나 변함없이 지켜질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지않은 위로와 격려가 된다.
장편도 이렇게 술술 읽히고 재미있을까?
그렇다면 다른 작품들도 설레는 마음으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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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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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엄마와 우리 자매는 정말 각별한 사이였다.
언니와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인 코레드와 아율라처럼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어느것 하나도 같은 점이 없는 거의 극과 극의 자매지만, 그래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작고 귀여운 외모에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선하셨던 엄마를 마치 우리의 동생처럼 또 자식처럼(죄송하지만 사실이다) 소중하고 애틋하게 그리고 열렬히 사랑했었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코레드와 아율라, 엄마의 심리가 좀체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소설
자체로는 신선하고 재미있어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솔직히 이 책을 고른 건 눈에 확 띄는 제목과 나이지리아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가 컸다.
뒤의 역자 후기에 보면 나이지리아 출신의 유명작가에게 그 나라에도 서점이 있느냐며 당신 책을 나이지리아 국민들도 사서 읽느냐는 무례한 인터뷰를 한 진행자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어쩌면 나 역시 그동안 아프리카에 대해선 너무나 무지했던 독자 중 한명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두명이나 있는 나라란 사실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되었으니..
때때로 무지는 타인에 대한 존중도 잊게 한다는 걸 또한번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소설의 스토리는 제목에서 짐작되는 그대로다.
주인공인 언니 코레드는 남자친구를 죽였다는 동생 아율라의 전화를 받고 죽은 페미의 집으로 가서 살해 현장인 그 집을 청소하고 사체를 강에 버린다.
그런데, 페미는 아율라가 죽인 첫 남자가 아니었다.
벌써 세명째 남자친구를 죽여놓고도 죄의식은 커녕
인스타그램의 사진 업뎃에 열중하는 동생을 보며
코레드는 정말 아율라의 말대로 그가 폭력을 휘둘러
정당방위로 죽인 것인지 의심을 갖게된다.
그러던 중 접수계 간호사인 코레드가 남몰래 짝사랑
하고있던 훈남 의사 타테가 언니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온 아율라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게 되면서
코레드에겐 악몽같은 시간이 시작된다.
어린시절부터 마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모든 이들에게서 사랑을 독차지 해온 아름다운 동생 아율라와 모든 순간 비교 당하며 처절한 무시와 좌절 속에 살아온 코레드.
어디서든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하고, 사랑 받는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하고싶은 것은 뭐든지 하고야 마는(살인까지도) 아율라의 뒤에서 늘 그녀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동생을 지키며 살아온 코레드였지만, 믿었던 타테마저 아율라에게 빠져 자신을 오해하고 비난하자 동생과 엄마의 부속품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 타테와의 만남이 지겨워지는 순간 그 역시 죽일지도 모르는 동생 아율라의 변덕과 충동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떻게 그를 지킬수 있을지 고민 하는데..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코레드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유일하게 털어놓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사고로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환자 무흐타르 뿐이다.
가족들의 면회조차 거의 끊긴 그의 병실에 수시로 찾아가 자신의 고민들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으로
그나마 답답한 마음을 푸는 것.
그런데, 어느날 기적처럼 무흐타르가 깨어난다.
게다가 그동안 코레드가 고백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전부 다 기억한다고 말한다.
설상가상, 타테는 아율라에게 청혼 할 거라며 다이아몬드 반지를 코레드에게 보여주고, 페미가 죽은 날 사체를 처리하던 코레드와 아율라 자매를 목격한
이웃의 증언으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 코레드.
악마같은 아버지에게서 동생을 지키기 위해 비극을
선택했던 과거의 어느날 이후 가족의 해결사로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채 살아온 코레드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짝사랑하는 타테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풀기힘든 문제처럼 복잡한 사건이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문장들은 쉽고 간결하며, 한없이 복잡하고 불행할 것 같은 주인공 코레드의 심리는 우직하고 단순하게 흘러간다.
미모를 무기 삼아 살인에도 거침 없고 후회나 자책을 모르는 아율라와, 아름다운 딸 아율라에게만 관대한
엄마의 심리 역시 더없이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스토리는 심각하고 복잡하고 긴장의 연속임에도 가벼운 트렌디 소설을 읽는 것처럼 거침 없이 술술 읽힌다.
코레드가 자각 한대로 아율라는 이미 세명 이상의 남자를 죽인 연쇄 살인범이고 짐작했던 또다른 죽음이 이어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이야기는 질척대지도 처절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마지막 문장을 읽고나면 그 결론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지극히 타당한 결정이라는 합의가 내 마음에도 생기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미권 혹은 일본작가들이 썼다면
이 소설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상상 해보면
익숙한듯 쉽게 떠오르는 몇가지 (자극적인)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저 담담하게 코레드의 마음을 따라가며 요란스럽지 않게 가족의 비극과 범죄를
대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런 면이 낯설면서도 아주 매력적이다.
매일 더없이 힙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인싸 친구만 보다가 수수하고 조용하지만 왠지 자꾸만 궁금해지는
낯선 친구를 알게된 신선함 같은 것이랄까..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소재도 중요하지만, 그 소재를 어떤 문체로 어떻게 변주해 가는 지가 소설의 정체성과 매력을 드러내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그와 더불어 영미권과 일본 등 익숙한 국가의 작가들 뿐 아니라 이제껏 많이 접해보지 못한 제3세계 국가의 작품도 많이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소설이 준 또 하나의 보너스.
일단, 나이지리아로 시작했으니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작가들도 시작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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