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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첫 챕터인 꽃게잡이 배 이야기를 다 읽기도 전에 깊은
반성이 밀려왔다.
(어떤 장르의 책을 읽어도(심지어 로맨스까지) 반성 할 점이 최소한 하나쯤은 떠오르는 걸 보면, 난 아무래도 반성에 특화된 성향이거나 그동안 엄청 엉망으로 살아왔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이 글을 쓰면서도 또 반성을 하고있다)
나름 예술가에 속하(고 있다고 믿)는 대중적인 창작 분야의 일을 막 시작했던 때부터, 적어도 하기 싫은 일은 거절할 수 있는 짠밥의 경력자가 된 지금까지 내가 걸핏하면 하던 말 중 하나가 ‘정 할 거 없으면 일용직(노동)이라도 하면 되지 뭐.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소위 일용직이라 불리는 노동에 내가 얼마나 무지 했었는지 깨달았고,
‘정 할 거 없을 때 육체 노동을 하기‘엔 내겐 체력도
요령도 경험도 지식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단 하루도 그 현장에서 가치 있는 대접을 받으며 일당을 받을 능력이 전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노동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내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쉬운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이 나이가 되도록 난 모르고 있었던 거다, 정말이지 너무나 한심하게도.
흔히 ‘노동은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이 말이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말하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버금가는 굳건한 경제적 사회적 수직적 지위 아래 갑과 을의 차별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노동은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 땀 흘리는 육체노동자들을 멸시하고 당연한듯 천대하는 자본주의 사회.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더 많이 일하고 더 위험하고 더 힘들면서 돈은 훨씬 더 적게 받는 노동은 점점 더 하층 지위로 내몰린다.
이 책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나와 내 가족은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어쩔수 없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르포나 취재 형식의 관찰자 시점으로 노동 현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작가중 가장 많은 직업을 가져봤을거라 장담하는 저자가 직접 경험했던 우리나라 곳곳의 노동현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담겨있다.
저자가 직접(그것도 생계를 위해) 경험했던 수많은 노동의 현장은, 저자의 뛰어난 문장력에 생생한 묘사력이 더해져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직접 겪은 일이라는, 누군가가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힌 진짜 삶이었다는 확실한 근거를 배경으로 가진 글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삶의 바닥까지 내려가본 불행한 경험이 작가에겐 귀중한 창작의 자산이 된다‘는 표현이 적어도 이 책의 저자인 한승태 작가에겐 맞는 듯하다.
저자는 ‘종이에 쓰여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기본월급 100만원이라 쓰인 전단지만을 믿고 꽃게잡이 배에 올랐다가, 살고 죽는건 하늘의 뜻이라고 믿는 선원들에게 구박 받으며 순식간에 생사가 갈리는 갑판에서 끔찍한 노동에 내몰리고,
우리나라 최고 매출을 자랑하는 강남의 주유소에선
운전석에 앉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최악의 갑질을 서슴치 않는 고객들을 상대하며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아산의 돈사에서 돼지똥을 치우는 동안 평생 했던 기도보다 더 많이 신을 불렀으며,
숨조차 편히 쉬기 힘겨운 비닐 하우스에선 누군가가 축복이라 부르는 햇빛조차도 어깨를 짓누르는 노동의 무게임을 깨닫고,
자동차 부품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새삼 저울질 하게 됐음을 고백한다.
책은 꽤 두껍지만 저자의 뛰어난 묘사력과 날카로운 비유,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인해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자는 그저 자신이 경험했던 여러 노동현장의 사람과 일에 관해 담담하게 풀어놓을 뿐이지만,
꽃게잡이 배에서 시작해 편의점과 주유소, 돼지농장과 비닐하우스, 자동차 부품공장을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이기주의, 갑과 을로 대변되는 계층 문제 등에 대해 슬그머니 분노가 치밀고,
최소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 받으며 가치 있게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 해보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꽤나 진지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책 속의 문장들은 딱딱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게 바로 블랙유머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묘사 속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질만큼 놀라운 유머를 감추고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를 들자면 이런 놀라운 문장들이 책 곳곳에 포진 해있다가 기습공격으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 양돈장 악취는 심각한 걱정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고, 조증 환자를 진정시키는데
효력이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좀도둑질이나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사회봉사랍시고 꽁초나 줍게 할 게 아니라, 이런 똥 리어카를 끌게 해야한다.
- 선원들의 대화 주제는 선주가 얼마나 ‘좆같은‘ 놈인가와 일이 얼마나 ‘좆같이‘ 힘든가로 엄격하게 한정 되었다.
- 지방 젊은이들은 계속 서울로 몰려들고, 그 덕분에 지방 소도시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가 SG워너비의 신곡을 연주하며 지나간 것같은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이 건물은 화재 발생시 투숙객들을 최대한 신속하게 질식사 시킬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내가 완강기나 비상계단은 없냐고 묻자 고시원장은
내가 샹들리에는 어디 달려있냐고 묻기라도 한 것처럼 황당해했다.
이렇게 내심 감탄하며 속으로 웃게되는 글 뿐 아니라, 풉! 하고 입 밖으로 웃음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문장들도 많은데, 특히 고시원에서 화장실 사용을 두고 벌인 어느날의 싸움처럼 주변 사람들과의 일화
중엔 큰 소리로 웃게되는 이야기들이 적지않다.
이처럼 뛰어난 묘사력 속의 치밀한 유머 뿐 아니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노동자를 무시하는 세상에 대한 날선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상위계급은 하위계급을 마음껏 욕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은 이제껏 단 한번도 이 권리를 소홀히 하는 상위계급을 본 적 없다고 일갈하고,
자신이 감정노동자임에도 타인의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 되면 상대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무례하게 대하는 을들의 이중성을 꼬집으며,
한국의 모든것이 서울에 있을뿐 아니라 많은 것들은 서울에만 있기에, 문화와 의료중 어느 쪽도 제대로 향유할 형편은 못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싶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기때문에 ‘한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서울‘이라는 말로 지나치게 편중된 지역 발전의 불평등을 비판한다.
그저 작가로서의 호기심으로 발만 살짝 담군 것이 아니라 생활자로서 그 많은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써내려간 그의
솔직함에 감탄했고,
설명을 목적으로 썼음에도 탁월한 묘사력으로 무장한 뛰어난 문장들이 가득하다는 점이 부러웠고,
이런 밑바닥 생활에도 주눅 들거나 자학하지 않는
당당함과 예리한 비판의식이 존경스러웠다.
책을 모두 읽고 서문을 다시 읽어보니 저자가
주장 했다는 제목인 ‘퀴닝‘이 출판사가 결정한 ‘인간의 조건‘보다 이 책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무 능력도 없고 할 수 있는건 앞으로 한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없는 졸(체스에선 폰)이라도 끝까지 가면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체스의 룰 ‘퀴닝‘.
현실에선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가 되는 일같은 기적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해도, 평생 졸로 살아야하는 우리에게도 퀸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가 한번쯤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 하나 정도는 가능한 세상이라면 용기 내서 열심히 살아볼만 하지 않을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받고 살 수 있는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졸도 성실히 땀 흘려 노력하면 언젠가 퀸으로 짠!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기적일 뿐이라 해도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