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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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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한줄]
내가 일상은 어지간해서 비틀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한껏 비틀어지고 싶어도 할 일만은 말뚝처럼 박혀 나를 기다린다고 정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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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옥에 갈 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지옥에 끌려갔을 때 '나는 무고한 인간입니다'라고 악마를 설득할 자신 또한 없다. 게으름 피운 자, 욕설을 한 자,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자, 거짓말을 한 자 등등 그 모두에게 맞춤형 지옥이 준비되어 있다면, 대체 이승의 사람 중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이 지옥을 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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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는 데가 다 지옥이라고. 말만 이승이지, 여기에 명줄 두고 버티려면 돈으로 디딤돌을 쌓아 계속 뛰어야 하는 꼴이 지옥이랑 뭐가 다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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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우리 집에 지옥이 생겼다면? 이 끔찍한 상상력에 이렇게 달콤한 이야기가 곁들여지다니 이건 반칙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 속 지옥에 대해 생각한건 역시 '신과 함께-지옥편'을 보면서부터다. 49일간 재판을 받고 자신이 살아 생전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을 받는다. 7개의 지옥에서 누군가는 혀가 늘려지고, 누군가는 얼음에 가둬지고, 누군가는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는다. 신음소리가 가득한 지옥, 그리고 지옥의 형벌을 집행하는 악마가 우리 집에 하숙을 들어온다면?
주인공 서주는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강복순 할머니와 오래된 주택에서 살고 있다. 10여 년의 시간동안 가족들도 다양한 이유로 떠나버린 이 집에서 할머니를 챙기는 유일한 존재다. 더러운 주택에서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김사장도, 오랜시간 방 안에만 있던 세입자도 결국 다 떠나고 이 집에 남은 이는 서주와 지옥에서 온 악마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피를 흘리고 살려달라는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이 가득한 지옥에서 온 이들과 이 이상한 하숙집의 구성원들은 미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아마도 그건, 서주에게도 김복주 할머니에게도 현실이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을만큼 퍽퍽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한 큰아들과 큰아들의 옷을 입고 집을 나간 막내아들이 큰 트라우마로 남은 할머니는 자꾸 초점을 잃으며 섬망을 앓는다. 그런 할머니 곁에서 그녀를 지키며 닭갈비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서주도 결국 얇은 지갑 앞에서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내비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런 서주의 곁에는 위험한 골목을 함께 걸어주는 승준도, 밝은 미소로 힘을 주는 모카언니도 있지만 결국 그녀의 삶을 달래준 것은 달콤한 미숫가루와 야매로 만든 카페모카를 건네주고, 그의 감정을 끌어내는 존재 악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만 나는 홀딱 빠져버렸다.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을 다루는 존재가 인간을 위해 소매를 내어주고, 등을 내어주고, 하물며 상처입기 까지 하다니.
악마와의 계약은 낡은 주택을 넘어 서주에게 닿아 비로소 그 끝을 맺는다. 물론 계약이 끝났다는 것은 아니고. 이 기발한 상상력과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라니 작가는 충분히 독자의 폐와 간과 심장을 가질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