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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평점 :
[책속한줄]
— 깨끗이 쓸어버린다…라고들 하지. 그러나 내 오랜 경험에 미루어 보건대 ‘깨끗이’ 쓸어 낸 자리란 없지.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들을 다 죽이고 나면 언제나 그들의 잔해가 남지. 부서진 조각들과 흘러나온 액체들로 그 ‘어딘가’는 오히려 더 엉망이 되곤 하지.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망치게 되는 경험.
— 망친 게 아니야.
— 그럼?
— 구한 거야. 이룬 거야.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야.
— 그럼 잔해를 떠안고 살아가. 고약한 피 냄새에, 무질서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착각하면서.
*
엄마가 숨을 멈추고 나를 지켜본다. 나는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는 늘 개를 좋아했다. 개와 함께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살기 위해 개와 함께 사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나는 살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는 개와, 나와 함께 살 수 있다. 나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개를 무서워하던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삶의 시작엔 늘 끝이 따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하게 공평히 주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끝은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여기, 새로움을 시작하려는 아이의 앞에 또 다른 원죄의 고통이 내려앉는다. 타고난 팔자가 단명할 상이란다. 왜 어떻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의 보상이 죽음이라니. 그것도 입시의 고통을 막 끝낸 스무살에게. 이렇게 뜻하지 않게 수정은 죽음을 피해 달려야 한다. 막막한 여정의 시작, 수정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 조차 모르는 자신의 삶과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고, 그 곳에서 이안을 만난다. 나의 삶과 죽음이 그에겐 죽음과 삶이 된다는 아이러니. 함께하고싶은 꿈을 꾸지만,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만 끝이 나는 이 돌고 도는 굴레에 이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숨이 턱 막힌다.
이 이야기는 '북두칠성과 단명소년'이라는 신화에서 비롯된다. 열아홉에 단명하게 된 아들을 살리기 위한 아비의 노력으로 99세까지 살게 됐다는 전설이다. 마지막 장을 읽기 전까지, 수정과 이안의 그 투쟁이 몽환적이지만 현실이길 바랐다. 그들이 저승의 신을 죽이고 함께 위풍당당히 걸어나가길, 운명따위에 져버리지 않길.
운명은 늘 가혹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다. 기꺼이 나의 죽음을 가까이 맞이하더라도 살리고자 했던 시간과 내가 살기 위해 기꺼이 칼을 빼들었던 시간은 돌고돌아 다시 맞닿는다. 다시, 마주한 그 하루의 시간동안, 아니 만 24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수정은 얼마나 멀리 달렸을까. 그 길의 끝에 그녀는 어느 경계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박지리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니, 그것도 제1회의 수상작이니 그녀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박지리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아슬하게 서있는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어진다. 다윈영의 악의 기원 속 다윈이 그랬고, 다윈보다 더 먼저 상처받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니스 영의 어린시절이 그랬고, 애초에 시작되어선 안될 곳에 있었던 러너가 그랬지. 맨홀 구멍 속으로 결국 빨려들어간 그 날의 나도, 모두의 죽음 속에서 혼자 번외편같은 삶을 살아가는 아이도. 사실 이들에게 얼마나 큰 원죄가 있다고. 태어남으로 인해 가둬진 원죄를 찾아 그들은 방황하고 방황하다 결국 스스로를 죽음이란 공간으로 데리고 간다. 그 공간에서 죽음과 삶을 택하는 것은 늘, 원죄의 고통 속에 고뇌하는 청춘들이다.
삶과 죽음이 마주하는 자리 무엇이 답인지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모호한 운명이 정한 숫자에 순응하며 왜-인지 조차 모르고 접하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