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습니다 -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정진석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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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입니다. 이 도서의 전반적인 구성은 '복음사가'로부터 발전된 주님의 공생활 행적과 사도와의 구원 역사로, 그들의 행적에 따른 전반적 이해와 주해, 주석을 담아 놓은 이야기입니다.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에 덧붙여 살을 붙여나가서 보다 생생하게 주님의 구원 사업과 이유, 사건, 배경을 아주 구체적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서 생생한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도서로 하여금 우리가 성주간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들은 예수님의 감정. 즉 성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 서로의 신뢰를 중심으로, 성서의 예언이 하나하나 이루어져감으로서 예수님께서 느끼실 감정을 우리들이 상상하면서 독서 한다면, 그 기분으로 성주간에 읽는다면 무척 훌륭한 도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한 상상력은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로서 할 수 있는 행동과 반응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깨닫고, 강하게 느끼면서 회개의 시간에 우리들의 가슴에 부활이 꽃피우는 체험을 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책을 읽고 멋진 역사적 사건과 사실에 관해 더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이 도서 하나를 통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서다."라고 본다면 충분히 그러할 법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론서를 통해서 이론에 입각하여 알맞은 주님의 감정을 통해서 우리의 고생함과 아픈 상처가 낫길 바랍니다.


주님은 예언에 따라서 움직이셨고,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마지막까지 이룰 수조차도 없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절대 예수님처럼 할 수 없을 거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분의 상처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음을. 메시아께 겸손해야 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제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곁에 없다면, 저는 그물이나 짜면서 "나의 메시아께서는 언제 오실까?" 하면서 시시한 농담에 만족하고 살았을 운명이었음을 제가 압니다. 그분께서 제 곁에 오셨음에도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엉뚱하게 제 기분을 만족시킬 인물에게 경배하는 사건은 없어지길 바랍니다. 이 성주간에 제 가슴속에서 흩어져버린 신앙심을 한 곳으로 모아서, 제 가슴에 주님의 피 흘리시는 성심을 전심을 다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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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어린시절
W. 휴 미실다인 지음, 이석규 외 옮김 / 일므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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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심리학과 전공 학생이지만, 책에서 배운 대로 자녀를 양육하고, 양육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확한 조언을 구해주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아동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학자들의 이야기와, 선배 심리학자들의 슈퍼비전을 받더라도, 심리학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이상향이 빌딩처럼 잘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론을 암기하는 일, 그리고 간단한 심리 상담에 관한 요령만으로 한 가정을 지켜 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중요한 갈등 영역은 돈, 성, 오락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동은 성인보다 충동성이 강하고, 도덕에 관해서 불규칙적으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의 가르침이 고르지 않다면, 아동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수용력이 비교적 부족할 것이라 짐작합니다. 편향된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게 된 부모님은 부모의 역할에 지나친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완벽주의, 강압, 유약, 방임, 건강염려증, 응징, 방치, 거부, 성적 자극"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어린 자녀에게, 부모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라서 자신만의 영역이 생겼을 때,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신에게도 새로운 부모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은 대체로 모순이 많고, 모순된 태도가 우리들을 잘못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동들은 이해하지만, 성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세상에 많은 것들은 많습니다. 그래서 몸에 밴 교육 양식을 이해, 인정하고, 변한 세상을 수용해야 합니다.


자녀를 돌보는 것, 그것은 신체만 성인이 된 어린이와 함께 공통된 상호 존중으로 소통하는 것뿐일 것입니다. 자녀와 교육과 양육에서 멀어지면 고함지르는 소리만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기법과 부모의 내면을 치유하는 훌륭한 심리학 교과서라고 생각하셔도 좋겠습니다. 나를 바로 세우는 일과, 부부와의 관계, 그런 것을 보고 체험하는 자녀. 이렇게 한 가정을 위한 필수 도서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훌륭한 성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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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원해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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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첫째 단계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누군가, 혹은 규모가 작든 크든, 잘못을 저질렀거나,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지속해서 받았을 때, 우리들은 정서적인 정체와 마비가 일어납니다. 내 능력 밖의 일. 내가 능숙하게 할 수 없는 일이 맡겨지면, 누구나 도망가고 싶기 마련이기도 합니다. 화목하지 못한 직장에서의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하면,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라는 질책을 받고, 퇴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올바른 일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가 이어질 때, 우리들은 자신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과 대인관계에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예전부터 라이벌로 여겼던 친구와 만났을 때의 열등감이라던가, 나를 비하하거나, 놀리는가 싶은 상황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가진 경제력이 약해져서 자존감도 떨어집니다. 대인관계를 해피하게 되면서부터, 이런 상황에 치닫게 만든 하느님을 자장 처음으로 원망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화해를 원해'라는 책은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처받은 것을 하나하나 화해하는 길을 제시함으로 마지막으로 하느님과의 신뢰를 되찾아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수많은 걱정거리 중에서 첫 번째와 마지막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틀어짐이란 걸, 우리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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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와의 첫 만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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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은 때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비전을 찾기가 어려워 개종을 생각했고, 바쁜 생활에 치이니까 하느님과의 소통 시간이 줄어들면서 마음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도서는 오히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여러 가지 영적 체험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거쳐온 본당의 사제께 가르침 받은 훌륭한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제일 뿐만 아니라, 그 누구나의 얼굴 속에서 예수 그리스를 찾아내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아주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성탄 전야에는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아기 예수님이 모셔져 계시고, "예수님께는 내 마음이 바로 성소이자, 교회다."라고 말씀하신 가르침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늘 이미 장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 가르침을 받고 싶은 제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도 역시 교회이십니다. 장성하기 위한 긴긴 시간이 필요하지요.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과 말을 지금부터 천천히 배울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부딪힌 교회와의 충돌은 어린 예수님의 미숙함으로, 제가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집트 속담이 있습니다. "아침에는 4개 낮에는 2개 저녁에는 3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저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걸어갑니다. 아기 때는 손과 발을 이용해서 4개로 걷고, 자라서 청년이 된 우리는 두 발로 걷고, 노인이 된 사람들은 지팡이로 땅을 짚고 다니니 세 발로 걷습니다. 그러나 저는 네 다리로 걷고 싶습니다.


영적인 제 얼굴이 심하게 망가졌습니다. 꼬집혔고, 얻어맞았습니다. 피와 상처가 흐르는 가운데, 눈은 벌겆토록 멸시와 조롱, 미움과 불신들로 분노해 보입니다. 아, 이것은 절대로 사람이나, 천사의 얼굴이 아닙니다. 제 영혼이 악마와 비슷해져 갈 때, 그것을 막기 위해서 이 얼굴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나 봅니다. 그럼에도 이 도서에서 수록된 마지막 기도서를 읽으면서 주님께로 마음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영혼의 얼굴이 아파서 더러움을 씻는 세수도 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저는 아기들이 생각할 수 있는 생각, 어쩌면 '우정'이 아니라 '오해'의 이름인 대인관계로부터 해방을 원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미성숙한, 비 양심적인 생각을 꿰뚫으시어, 그 죄를 쉽게 용서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스스로 반성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고백할 때, 무릎을 꿇고, 제 스스로 하느님 아버지의 앞에서 조용히 죄를 고백하길 희망합니다. 뜨거운 눈물같이 저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합니다. 12월은 가슴에 붉게 비치는 빛에 집중해서 당신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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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취하여라 - 교부들이 본 아가 가톨릭 성경 학교
안소근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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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서평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다가 수줍은 표현들이 많았지만, 언젠가 연인에게 편지를 쓸 때, 한 글귀 정도는 적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태어났는데요. 사랑이란 원래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불안감이 사라집니다. "이 여자, 이 남자, 내 거니까 건들지 마!"라고 경고하는 그런 느낌처럼요. 여러분, 아가서 정도의 플러팅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남의 연애편지가 제일 신기합니다. 



"아가의 끝맺음으로,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세며, 강물로도 사랑을 휩쓸어 갈 수 없고 재산으로 사랑을 얻을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는 사랑에 대한 아가의 관점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구약"을 이해하기에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큽니다. "아가서"는 구약 중에서 술술 읽히는 편이긴 하지만, 노골적으로 표현된 사랑에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마음은 어디에서 들어온 감정일까요? 저는 진솔하게 성찰해 봤습니다.



그 감정은 제 안에서의 사랑이란 감정을, 연인에게 사랑한다며 매일 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타인에게 들키기에는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랑의 감정과 사랑을 고백할 때의 언어와 행위를 꽁꽁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의 사랑의 언어를 들킨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남편이 여럿이며, 정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크게 낙인 받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경 책은 우리에게 필요한 금욕을 가르쳐야 하고, 교과서처럼, 교양서처럼, 정숙한 신앙인이 바라는 대로 적혀서, 성스러움을 찬양하고, 숨이 넘어질 듯한 성령의 충만함처럼, 그들만의 커트라인이 구상돼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인과 성적인 표현을 전하거나, 연애, 결혼, 임신에 관한 인간의 욕구를 강제적으로 부정시키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아! 우리들도 신부, 수녀처럼 살아야 하는가 보다."라고 혼자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의 금욕은 지나침의 행위를 경고하는 차원의 것입니다. 그 이상과 이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가서"를 읽으면 한국에서 유명한 수필인 <B 사감과 러브레터>가 생각났습니다. 그 책은 노처녀인 사감 선생님이 타인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고 가슴 설레하는 장면을 목격당해서 수치스러웠다고 적혀진 소설이었지요. 저는 "아가서"를 단순한 성적인 호기심과 신경을 자극하는 음란한 장면이 아니라, "어쩌면, 이 사람이 내 사람일까?"라고 판단할 적에 기준으로 삼아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는 사랑의 편지를 적을 때 베껴 적어도 좋고요.



"아가서"는, 여러 학자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크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육욕을 위해서 쓰인 걸까?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라면 "사랑에 취하여라"라는 도서에서 4부로 나뉜 여러 학자의 견해와 연구를 전해 들을 수 있으니 관심을 표현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앙인은 전부 다 알다시피, 성경 속 내용은 내가 필요할 때, 성경 책을 뒤적거리다가 눈에 들어오는 한 구절이 꼭 있습니다. 물론 그 부분이 "아가서"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중요 기관을 통해서 특별히 공인된 지시 사항이 없다면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경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마르코복음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 없는 것처럼, 색다른 느낌 때문에 의견이 분분한 '아가서' 역시도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단지 수줍은 마음입니다. 저는 육욕이 저질스럽고, 죄를 부르는 감정이 아니란 걸 소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아가서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의 분류로, 성적인 에너지라고 말하는 "리비도"와 "교회와 신앙인 사이의 믿음과 헌신"을 한꺼번에 바라는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 가지의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는 이유가, 신앙인들의 건전한 사랑과 언어를 강조하는 바가 아닐는지,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성'의 교과서가 아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교회, 그런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서 아가서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사랑에 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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