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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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나라 대표적 대중소설 작가인 “김진명”은 발간 1 년 만에 300 만 부가 팔렸다는 초특급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으로 처음 만난 후 신간 소식을 들을 때마다 꼬박 꼬박 찾아 읽었을 정도로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권 두 권 읽은 책들이 쌓이다 보니,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음모론과 과도한 민족주의라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에 어느새 식상함과 실망감이 함께 느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의 신간 소식이 더 이상 내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 그와 멀어진지 한참이 되었다. 즉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읽고 나면 실망스러운, 나에게 있어 “재미”와 “실망”, 두 가지 모두를 느끼게 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작년(2011년)에 출간되어 50만부 이상 팔렸으며 인터넷 서점에서 “2011년 네티즌 선정 올해의 책 선정도서”로 선정되었다는 그의 역사소설 <고구려>시리즈 도 몇 몇 지인들의 권유와 독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출간된 지 1년이 훌쩍 넘은 후인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엉뚱한 이유에서다. 최근에 전자책(e-book)을 선물 받게 되어 가입되어 있는 전자책 도서관에서 테스트용으로 <고구려 1; 도망자 울불(2011년 3월/새움)>을 대출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저 전자책이 읽는데 어떨까 하는 테스트 목적으로 읽기 시작한 이 책, 결국 읽던 종이책을 뒤로 밀어두고 두 권을 더 대출 받아서 이틀 만에 세 권을 모두 읽었다. 다 읽은 후 소감부터 말하자면 오랜만에 만난 김진명의 소설은 역시 재미있었다.

 

미천왕 때부터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까지 여섯 왕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는 <고구려> 시리즈 중 이번에 만난 책은 고구려 제 15왕인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을 그린 1권 <도망자 울불>과 2권 <다가오는 전쟁>, 3권 <낙랑축출> 이었다. 그런데 역대 고구려왕 들 중 한 번도 소설이나 드라마로 다뤄지지 않았을 정도로 별로 주목받지 않았던 미천왕을 첫 소재로 한 이유는 뭘까? 작가는 어느 지방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빼놓고 미천왕을 처음으로 다룬 이유는 미천왕이 고구려왕 중 최고로 훌륭하기 때문이며 일반인이 모를 뿐이지, 미천왕은 중국 세력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즉, 400 여 년 가까이 옛 조선(古朝鮮)의 영토를 지배했던 한사군(漢四郡)인 “낙랑군(樂浪郡, 313년)”,“대방군(帶方郡,314년)”을 점령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에 미천왕이 어릴 적 숙부(叔父)인 14대 왕 “봉상왕(烽上王, 292~300)”의 핍박을 피해 소금장수로 숨어 살다가 성인이 되어 숙부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연이 꽤나 극적(劇的,dramatic)이어서 소설로써 충분히 그려볼 만 한 점도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고대 영웅설화(英雄說話)나 무협소설(武俠小說) 등을 통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정형화된 스토리 라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김진명은 이런 미천왕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워낙 많은 분들이 읽었고, 서평들 또한 많이 올라와 있으니 줄거리 요약은 중언부언(重言復言)이 될 테고 개인적인 감상 몇 가지만 언급해보자.

 

이 책,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틀 만에 세 권 1,0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어낼 정도로 참 재미있다. 울불이 숙부 봉상왕의 살해위협을 피해 노비와 소금장수로 떠돌다가 낙랑으로 피신하고, 수많은 위험과 고초를 꿋꿋히 이겨내고 마침내 숙부를 폐위하고 제15대 왕위에 올라 10년을 준비한 끝에 낙랑군을 점령하는 과정 하나 하나가 영웅설화와 역사소설 특유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든다. 특히 3권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와 낙랑군과의 전쟁 장면이 참 재미있는데, 그중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装機兵)인 “개마무사”와 낙랑군의 장창보병(長槍步兵)으로 구성된 “장창방진(長槍方陣)”과의 최후의 전쟁 장면은 여느 역사소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장쾌한 스케일에 손에 땀을 쥐는 박진감과 스릴, 그리고 비장미까지 느껴져 이 책에서 백미이자 압권이라 부를 만하다. 이렇게 치열했던 전쟁과 처절한 희생 끝에 마침내 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이 자신과 함께 했던 병사들과 전우(戰友), 그리고 선조들에게 승전을 고하는 장면에서는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 책, 역사 소설 특유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고, 재미와 더불어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우리나라 역사이기에 감동적이기까지 했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쉬움은 남는다. 그동안 그의 한계로 지적되어 온 “과도한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이 소설에서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용납해줄 만 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현대사(現代史)를 배경으로 어설픈 음모론(陰謀論)과 역사 왜곡 수준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주창해온 그간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이 아예 민족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으니 민족주의를 좀 지나치게 담아냈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미천왕과 일대 전쟁을 치룬 숙적인 낙랑태수 “최비(崔毖)”가 실제 역사에서는 진(晉) 나라의 평주자사(平州刺史)로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지내다가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에게 쫓겨나 고구려에 도망 와서 319년(미천왕 20년) 고구려에 귀화했다고 하니 낙랑군 점령(313년) 훨씬 후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나 지금의 평양(平壤)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낙랑군을 요동(遼東) 지역에 있었다고 설정 - 물론 한사군 위치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니 한사군 요동 위치설이 틀렸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남한 사학계 정설은 한반도 내륙설이다 - 한 점은 소설적인 허구(虛構)로써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극적인 재미와 감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너무 작위적(作爲的)인 느낌을 곳곳에서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낙랑군과 고구려 간의 전쟁에서 낙랑군이 부상병을 앞세우는 장면이나 마지막 대목에서 전쟁에서 패한 낙랑군들이 성 밖에 고조선 유민들을 세워 놓고 성으로 진격하면 유민들을 활로 쏴죽이겠다며 미천왕 군대의 입성(入城)을 막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유민들이 고구려 장수 - 그것도 전장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장수가 사실은 살아있었다는 설정 - 의 설득으로 자진해서 화살 받이가 돼서 모두 몰살당하는 장면은 나름 비장미는 있지만 그동안 여러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통속적인 장면인데다가 극적인 효과를 너무 지나쳐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여기에 정통 역사 소설에 걸맞지 않은 무협소설적인 설정들,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라는 표지 문구처럼 그만큼 작가가 삼국지를 의식하고 썼다는 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삼국지와 유사한 인물 설정 등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들었다.

 

아쉬운 점을 들다 보니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것처럼 쓰게 되었지만 이 책, 이런 아쉬움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참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김진명 작가는 그동안 현대사 소재 작품들만 읽어봤었는데 - 역사소설로 <살수>라는 작품이 있다는데 읽어보지 않았다 - 역사 소설에도 꽤나 재능이 있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나 문학적인 성취를 떠나 “재미” 하나 만큼은 단연 발군인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김진명의 소설들 중 이 <고구려> 시리즈 만큼은 계속해서 찾아볼 생각이다. 당초의 기획대로 “장수왕” 편까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책과 관계 없는 사족 하나, 이 책으로 해본 전자책 테스트는 성공적이었다. 이 책 외에도 여러 책들을 테스트해봤는데, 종이책 못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고, 수십 권을 한꺼번에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휴대의 편리성은 가히 신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조작이 불편하고, 컨텐츠(책)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많은 개선이 필요할 것 같아 아직은 종이책을 대체하기에는 요원할 것 같다. 그래도 전자책 덕분에 책읽기가 더 편리해지고 즐거워질 것 같아 벌써부터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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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쾌자풍 1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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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우혁 작가는 데뷔작인 <퇴마록(1994)>부터 최근작인 <바이퍼케이션(2010)>까지 모든 작품을 읽어 본, 나에게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더불어 “유이(唯二)”한 전작주의(全作主義)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 이유는 신화(神話), 역사, 판타지, 초능력, 스릴러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소재와 장르 소설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계속 읽다보니 설명문이 지나치게 많고, 이야기 전개가 늘어지는 한계 때문에 실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어느 작품을 읽어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즉 나에게는 검증된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챙겨 읽고 있다. 2년 만에 새로 나온 그의 신작 소설 <쾌자풍 1(해냄/2012년 8월)>을 선뜻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우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신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나의 이런 신뢰를 이번에도 지켜 줄 수 있었을까?

 

중국 명(明)나라 홍치제(弘治帝) 2년(1489년), 고위 관료들이 잇달아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황실(皇室)을 지키는 최고의 정예무인들인 금의위(錦衣衛) 소속 무사인 “남궁수”와 “엽호”는 시랑 염승필의 피살 현장에 조사를 나왔다가 사건 정황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탁견을 선보여 현장 수사를 지휘하던 제독 동창(東廠) “유온”에 의해 발탁된다. 제독 동창은 그들에게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라고 명령하면서 조선에 밀사로 파견한다.

 

한편 조선 북쪽 변방 고을인 의주(義州) 위화(威化) 마을 말단 포졸(捕卒) “지종희”는 고을 이방인 형네 집에 얹혀 살면서 압록강 너머 난전(亂廛)을 드나들며 술 꽤나 퍼마시고 뒷돈을 챙기며 <수호지(水湖志)>의 양산박(梁山泊) 108 호걸들을 본 따서 맺은 의형제들이 108명을 훌쩍 넘겨 버린 한량(閑良)이다. 하는 짓은 영 무뢰배이지만 그래도 매사 반듯하고 도리를 지키는 형의 영향 - 엄밀히는 아침마다 하는 놀이인 손바닥 쳐내기에서 자신을 날려 보내는 형이 무서워서이지만 - 을 받아서인지 적당한 수준에서만 뒷돈을 챙기고 폭력을 휘둘러도 사람 목숨을 해할 정도까지는 아닌, ‘사람으로서의 선’을 지킬 줄 아는 녀석이다. <춘추(春秋)>를 공부하라는 형의 성화를 피해 난전으로 넘어온 지종희는 국경 수비대에서 노닥거리다가 갖은 고생 끝에 조선 땅에 다다른 남궁수와 엽호를 만나게 된다. 만나자 마자 활을 싸대고 화포를 들이 밀어내는 난리법석 끝에 지종희는 남궁수와 얼렁뚱당 의형제까지 맺게 되고, 그들을 난전으로 데려간다. 난전에 들어선 그들을 사람들이 에워싸더니 칼을 들고 들어왔다며 누명을 씌우고는 단체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한다.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규칙에 애검(愛劍)을 지종희에게 맡기고 적수공권(赤手空拳)인 상태로 들어온 터라 둘은 변변히 무공 한 번 펼쳐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구타당하고 만다. 속사정은 바로 지종희식 의형제 길들이기였던 것이다. 조선에 입국도 하기 전에 천하에 몹쓸 놈 때문에 굴욕과 고초를 겪은 남궁수와 엽호는 고위 관료 살인범을 추적하는 조선측 동행인으로 지종희를 지목한다. 이렇게 중국 전역에 쾌자 바람(快子風)를 일으킨 지종희의 일대 모험이 시작된다.

 

책을 받아들고서는 전작들에서 선(善)과 악(惡)의 대결, 종말론(終末論), 우리 민족과 외세와의 대립 등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들을 다뤄왔던 이우혁이 이번에는 우리나라 전통 웃음 코드인 “해학(諧謔)”을 들고 나왔다니 조금은 엉뚱하다는 생각이 앞섰었다.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이우혁 작가에게 원래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해학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여 내어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을 정도로 참 재미있었다. 특히 천하의 몹쓸 놈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 지종희의 엽기 행각들이나 명문 무림세가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종복(從僕)으로 남궁수와 엽호를 수행하는 “아칠”의 행동들은 작가가 코미디적 요소를 아예 작심하고 연출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설명문도 간략해졌고, 이야기도 비교적 빠르게 전개되어 앞서 언급한 그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것으로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영웅문(英雄門)>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대만의 무협 작가 “김용(金庸)”의 <녹정기(鹿鼎記)>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무협소설의 신(神)이라 불리는 김용과 어떻게 비교가 되냐고 김용의 열성 팬들은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김용 작가가 충의(忠義)를 강조하던 기존 작품들과 달리 천하제일 사기꾼이라는 전례없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녹정기>로 작품 세계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은 이우혁 작가가 이 소설로 그동안의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가볍고 유쾌한 주제로 전환했다는 점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였는지 어쩌면 이 작품이 이우혁의 작가생활에서 어떤 분기점(分岐點)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시리즈 첫 권이니 너무 성급한 판단이겠지만 그래도 유쾌함과 즐거움을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우혁 작품은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한다라는 나의 기대를 다시금 충족시켜준 참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쾌자풍 시리즈, 첫 권부터 이렇게 즐겁고 유쾌하게 출발했으니 이어질 작품들에서는 또 어 떤 기상천외하고 기발한 사건들로 나를 즐겁게 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래서 이우혁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전작주의 작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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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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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을 대표하는 두 장르인 “공포(恐怖) 소설”과 “추리(推理) 소설”은 분위기면에서 “무섭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지만, 무서움(恐怖)을 야기하는 주체가 주로 귀신, 악마 등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존재들인 공포소설과 달리 추리소설은 주로 “인간(人間)”이라는 면에서 서로 다르다. 추리소설이 무섭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주변에 추리소설이 무서워서 읽기가 두렵다고 말하는 분들이 몇 몇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추리소설은 무섭다"라는 명제가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구분이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어서 몇 몇 공포 소설들은 인간이 저지르는 흉악하고 끔찍한 범죄를 주제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저런 식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추리소설은 작법(作法) 원칙상 비과학적인 초능력이나 마법,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금기(禁忌)로 하고 있으니 두 장르의 접점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실재(實在)”가 아니라 우연이나 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트릭에서 비롯된 오해(誤解)때문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분위기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한 공포로 전개되지만 결말에 이르러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지는, 즉 과학적인 해석이 가능한 추리소설로써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포와 추리가 결합된 “호러 미스터리” 소설을 여럿 만나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 시리즈와 제목이 “~것”으로 끝나서 <것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 전 권은 아니지만 시리즈별로 한 권 씩 - <속 항설백물어>, <산마처럼 비웃는 것> - 을 읽어봤는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 분위기와 절묘한 트릭과 반전이라는, 공포와 추리 두 장르적 재미를 한껏 보여주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멋진 작품들이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도조 겐야> 시리즈의 서막을 연 첫 번째 작품인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원제 厭魅の如き憑くもの / 비채 / 2012년 9월)>이다. 책을 받아들고서 첫 느낌은 검고 붉은 색감과 그림으로 공포스러움을 부각시켰던 기존 작품들의 표지 - 그만큼 거북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 와는 다르게 하얀색 바탕에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그려져 있는 표지 때문이지 단순(simple)하다는 느낌이었다. 대신 공포감이 좀 덜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읽고 나니 전편 못지않은 공포와 기막힌 반전으로 이 시리즈가 왜 성공했는지를 절로 알게 해 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궁벽한 산골마을인 “가가구시” 촌은 그 지리적 궁벽함에 걸맞게 일본 전통의 민속 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마을이다. 마귀 계통인 흑의 기운을 상징하는 “가가치”가(윗집)과 전통 신도 신앙을 숭앙하는 백의 기운을 상징하는 “가미구시”가(큰신집)이 대립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선신(善神)인 산신(山神)과 악신(惡神)인 “염매(厭魅)”- 책 뒷표지에 ⓛ가위누르는 귀신 ②짚으로 만든 인형(제웅)을 매개로 삼는 주술의 일종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병에 걸리게 하려고 귀신에게 빌거나 방술을 쓰는 행위“라고 씌여 있다 -, 두 가지를 상징하는 “허수아비”들이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거나 귀신들림을 치료하기 위해 가가치 집안의 무녀(巫女)인 “사기리”를 찾아가곤 한다. 어느날 적대 관계라 할 수 있는 가미구리 가의 젊은 마님인 “가미구시 지즈코”가 딸 “지요”기 빙의(憑依)“ 되었다며 무녀를 찾아온다. 일흔을 넘겨 체력은 감퇴했다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은 여전한 사기리는 손녀딸이자 신을 몸에 받아들이는 손녀딸 “사기리” - 이 집안의 무녀들은 모두 “사기리”라는 이름을 쓰는데, 구별하기 위해 “리” 자 옆에 점을 찍어 표시한다. 그런데 이게 일본어 발음상으로 달라지는 표기인지 아니면 단순히 구분 목적인지는 모르겠다 - 와 함께 축귀(逐鬼) 의식을 펼치는 데 손녀딸 사기리의 입에서 “저 놈은 예사 마귀가 아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간신히 의식을 끝낸 사기리는 손녀딸에게 마귀를 봉인한 물건을 전통 의식에 따라 강물에 떠내려 보내라고 이르는데, 손녀딸 사기리는 축귀가 끝나면 늘상 해오던 일이었는데도 왠지 모를 공포를 느끼면서 치를 떨게 된다.

 

괴담(怪談) 수집가인 “도조 겐야”는 이무렵 가미구시가의 초대장을 받아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시작부터 시골 특유의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을 톡톡히 맛본 도조는 두 가문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시작하는데, 사람이 한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괴이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 괴이담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이 있는 도조는 마을의 이런 종교적 전통을 깨뜨리고 싶어 하는 가미구시가의 아들 “렌자부로”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그러나 괴기스런 살인 사건이 계속 이어지면서 마을에는 염매가 강림했다, 손녀딸 무녀 사기리의 죽은 쌍둥이 언니가 생령(生靈)으로 나타났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 전체가 공포에 떨게 된다. 과연 이 연쇄살인사건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마을 전체를 떠도는 염매와 생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책은 가가치가의 손녀딸 무녀 사기리의 일기와 도조 겐야의 취재 일기, 가미구시가의 청년 렌자부로의 일기, 이렇게 세 가지 시점으로 번갈아 전개되고,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이 수수께끼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탐정 도조 겐야에 의해 베일을 벗고 마침내 그 속살을 드러낸다.

 

일본 현지에서 2006년 2월 이 작품이 출간된 이래로 지난 6년 여 동안 아홉 번째 시리즈 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도조 겐야” 시리즈의 첫 출발점인 이 책은 그간 출간된 여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이 난감한 소설이다. 책 표지를 열면 별지 형식으로 가가구시 촌 지도와 함께 가가치가와 가미구시가, 두 가문의 가족관계도가 실려 있는데, 등장인물 수 만 해도 30 명이 넘고 마귀촌이라 불리는 가가구시 촌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각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 설킨 사연들이 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읽다 보면 인물 이름을 까먹어서 몇 번을 별지를 확인하고, 앞 페이지들을 들춰 보게 만든다. 특히 우리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일본 민속학적 전통은 쉽게 적응이 안되어 책 읽는 속도를 더디게 만든다. 그런데 이 고비(?)만 잘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페이지가 넘어간다. 기괴한 살인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등골이 오싹해지고 소름이 돋는 공포 분위기에 절로 물들여져 가고, 빨라지는 호흡 속도에 맞춰 페이지 넘김 또한 절로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은 페이지가 얼마 되지 않은데도 쉽사리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자 절로 걱정이 들었다. 도대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의문거리를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나의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머리를 후려치는 반전과 함께 도조 겐야의 명쾌한 추리 솜씨로 사건의 비밀을 단숨에 밝혀버리고, 짧은 후기를 남기고는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초반은 더디지만 갈수록 빨라지는, 그리고 결말에서는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휘몰아치는, 그래서 550 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결코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읽기였던 셈이다. 이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유는 뭘까? 먼저 주인공인 도조 겐야라는 독특한 캐릭터부터 책 속 문구들을 통해 간단하게 짚어보자.

 

이 책의 탐정인 도조 겐야는 앞서 말한 대로 괴담 수집가이다. 그런데 명탐정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괴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든다.

 

괴이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이야기 속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멋대가리 없는 짓은 하지 않고 괴이 자체를 즐긴다. 겐야도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지만, 가끔 괴이가 가져다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본인은 어디까지나 지적 호기심이라고 주장하지만) 추리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괴이의 합리적 해석이 불가능함을 밝혀 거꾸로 괴이 자체를 긍정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하니 하여간 성가시다.

 

괴이담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첫 번째 버릇과 이따금 괴이를 해석하고 싶어하는 두 번째 버릇, 그리고 꼭 합리적 해결을 본다는 보장은 없다는 세 번째 버릇(이를 버릇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는 결국 이 버릇들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무니없이 기괴한 사건에 말려들어 심지어 위험에 처하곤 한다 - P.179

 

이렇듯 괴이를 해석하려는 버릇이 그를 사건에 말려들게 하고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가 가는 곳에는 늘 끔찍하고 기괴한 사건들이 예비 되어 있다. 물론 그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건들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겠다. 살인을 몰고 다니는 명탐정 “누구”와 마찬가지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괴이를 무조건 해석하려고 드는 것만은 아니다. 괴이를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석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생각해보지 않고 괴이를 받아들이는 건 인간으로서 한심한 일이야. 그렇다고 인지를 뛰어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건 인간으로서 오만한 거고 - P.266

 

세상의 모든 일은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안 돼.-P.273

 

즉 괴이를 일단 의심해보고 최대한 파헤쳐 볼 것, 그런데도 밝혀낼 수 없다면 -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면 - 쿨하게 인정할 것 이 바로 도조 겐야의 신조인 것이다. 꽤나 독특한 신조인 셈이다. 캐릭터의 독특함은 주인공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원 수가 많아 초반에는 헷갈리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자리 잡혀가는 주변 캐릭터들 또한 하나하나가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다. 즉, 이 책이 재미있는 첫 번째 이유는 독특하고 생동감있는 캐릭터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인공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다면 독자들은 다음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의 사건은 결국 도조 겐야가 그 비밀을 속 시원하게 밝혀낼 것이라는, 혹시 못 밝혀낸다면 도조 겐야처럼 쿨하게 인정해버리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힌트가 하나 있다. <도조 겐야> 시리즈는 앞에 “공포”라는 말이 붙기는 했지만 엄연히 “추리소설”인 만큼 반드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말로 끝맺을 것이란 것을.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 힌트를 깜빡깜빡하게 된다. 구전 동요나 전설에 맞춰 연이어 일어나는 괴이한 살인사건, 그리고 명탐정(도조 겐야)의 등장과 함께 아무리 불가능한 사건이라도 결국 해결된다는 어쩌면 지극히 뻔한 도식(圖式)을 따르고 있음에도 식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책 속 사건들의 기괴함과 공포가 그런 힌트를 깜빡깜빡 잊게 만든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작가는 공포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우선 도입부에서 지루하기까지 한 지역 전설과 유래, 인물들 간의 얼키고 설킨 관계 등 공포 분위기 조성용 소품들을 꼼꼼하게 배치한다. 이런 소품들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 둘 씩 서로 촘촘하게 맞물리게 되는데, 이런 결합이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일으켜 공포 효과를 더욱 고조시키고,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간다. 처음에는 그저 배경 설명이겠거니 하고 지나치기 쉬운 소품들이 결말에 이르러 부속품처럼 맞물려 전체의 그림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작가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일종의 단서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결말에서 설명을 지루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결말을 알고 나면 허망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쾌하게 결말짓는다. 물론 독자들도 탐정처럼 단숨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힐 수 는 없지만 이번 작품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좀 시시할 수 있었겠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결말을 맺는다. 결말을 듣고 나면 절로 납득이 가는 그런 깔끔한 결말로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이 재미있는 두 번째 이유는 결말까지 읽을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는 공포 분위기와 명쾌한 결말을 꼽고 싶다.

 

감상글이 “참 재미있다”라고 한 문장만 쓰면 될 것을 글이 참 두서없이 지루하게 길어졌다. 아뭏튼 이 책, <산마처럼 비웃는 것> 감상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나에게는 공포소설과 추리소설의 장점만을 극대화시킨 최고급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었다. 너무 더워서 일부러 공포소설을 찾아 읽기까지 한 여름에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가을에 만나다 보니 살갗에 닿는 바람이 차갑다 못해 으스스하게까지 느껴지니 계절을 잘못 만난 셈이 되었다. 부디 다음 <도조 겐야> 시리즈는 여름에 만나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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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1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한 때는 위기론이 거론될 정도로 침체되었던 인문학(人文學)이 요즈음 “대세(大勢)”로 불린다고 한다. 대학들과 주요 지자체들, 시민단체 등에서 개설하는 인문학 강좌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고, 취업시장에서 찬밥 신세였던 비인기 인문·사회 계열 학생들도 경영자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채용이 조금씩이지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인문학 열풍을 가장 잘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출판시장인데, 인터넷 서점에서 “인문학”을 검색해보면 수십 권의 신간이 올라와 있고, 몇 몇 책들은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인문학이 인기가 있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묻고 답하는 학문, 곧 삶의 학문인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김덕기]인문학을 보는 사회의 이중성> 발췌, 중도일보, 2012.10.3.), 또한 기업환경이 기존 정보산업을 넘어 창조산업 중심으로 바뀌며 효율성 중심의 경영이 가지는 한계가 드러났고, 인문학이 더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융합이라는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의 핵심 아이콘이기 때문(<프리즘]독서, 그리고 인문학> 발췌, 이티뉴스, 2012.10.15.)이라고 한다. 즉 인문학 열풍은 “시대의 요구”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문학에는 어떤 학문들이 있을까? 인문학의 분야로는 언어학과 문학, 역사학, 철학, 종교학, 여성학 등이 있으며, 크게 문사철(文史哲. 문학/역사/철학)로 요약되기도 한다(위키백과 발췌). 너무 방대하고 이름만 들어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어려운 학문들 일색이다. 철학을 예로 들면 우선 지역적으로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되고, 서양 철학의 경우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아야 될 철학자 이름들과 이론들이 수백 개는 족히 될 것이며,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용어와 이론들 천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쉬운 공부 없다고는 하지만 어디부터 공부를 시작할 지 영 난감하기만 한, 그래서 시작도 못하고 포기하기 일쑤인 학문이 바로 인문학인 것 같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근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인문학 입문서(入門書)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주현성 저/더좋은책/2012년 10월)>이 바로 그런 인문학 입문서이다.

 

 

저자는 서두의 “한 권의 책으로 인문의 기초 여섯 분야를 꿰뚫는다”에서 인문학 인기의 이유를 앞에서도 언급한 인문학의 창조성과 실용성, 게임, 영화 등 문화 콘텐츠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인문학적 해석코드, 그리고 인간의 지적 욕망을 든다. 그런데 인문학은 꽤 다양한 기초 상식이 있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만만해 보이지 않은 학문이며, 그동안 많은 교양 입문서가 나왔지만 매우 산발적이거나 한 분야의 지식에만 치우쳐 있어, 인문 교양에 욕심을 내는 초심자들에게는 꽤 긴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바로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체계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기획했다고 말하면서, 이 책에서 다룰 인문 교양의 주제로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이렇게 여섯 가지 주제를 제시한다. 저자의 기획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저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고개가 약간 갸우뚱거려졌다. 역사(歷史)와 철학(哲學)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인문학의 주요 학문이고, 신화(神話)는 역사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으며 글로벌 이슈는 시사(時事)성 있는 주제이니 맞다 싶은데, 심리학(心理學)과 회화(繪畵)가 의외였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사회과학(社會科學)”, 회화는 “예술(藝術)”로 분류되지 않을까?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인문학의 범주(範疇)에 대해 이견(異見)이 많고, “자연과학(自然科學)”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회과학, 예술까지 총망라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니, 심리학, 회화도 광의적인 의미에서 인문학의 분야로 봐도 맞을 것 같았다.

 

 

본문에서는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주제를 차례대로 다루고 있다. “1장. 인간의 영원한 화두, 마음ㆍ심리학” 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자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자 심리학의 아버지요 창시자로 생각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1832~1920)”를 심리학의 아버지로 인정한다고 한다 - 에서부터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뇌과학(腦科學, brain science)”과 “경제 심리학(經濟心理學,psychology of economic behavior)”을 소개하고. “2장. 눈으로 확인하는 지식의 지형ㆍ회화”에서는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 양식의 창시자인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에서부터 현대 미술계의 중심인 “뉴욕파(New York School)”의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 1987)”까지 소개한다. 이처럼 주로 근·현대의 심리학자들과 미술가들을 소개한 1,2장과는 달리 “3장. 은유로 가득한 또 하나의 인간 역사ㆍ신화”에서는 신화(神話)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리스 신화”와 “4장. 세계를 이해하는 기초 지도ㆍ역사”에서는 서양 세계사(世界史) 전체, 즉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의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철학은 인문학의 대표 학문답게 가장 많은 장을 할애했는데 현대 이전과 현대로 나누어 “5장. 역사를 움직여온 지식 동력ㆍ현대 이전의 철학”, “6장. 현재와 미래를 재구성하는 대화의 장ㆍ현대의 철학”에서 소개한다. 마지막 장인 “7장. 앞선 교양인의 궁극적 관심사ㆍ글로벌 이슈”에서는 이슈의 중심이 되고 있는 “세계화”에 포커스를 맞춰 유효수요 확대를 주장했던 경제학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와 반대 개념인 “통화주의”를 주장하고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경제학자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 ~ 2006)”의 이론을 소개하고, 세계 분쟁의 주무대인 중동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의 세계의 화약고들를 이야기한다. 책에는 이런 설명글들과 함께 페이지 곳곳에 삽화와 도표들을 배치하여 시각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문은 현대 철학을 다룬 “6장. 현재와 미래를 재구성하는 대화의 장ㆍ현대의 철학”이었다. 현대 이전 철학은 학창시절 세계사(世界史) 수업과 철학 입문서로 가장 유명한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그리고 몇 몇 철학 관련 교양서들을 통해 나름 지식이 있었는데, 현대 철학은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현대 철학에 대해 공부해 볼 요량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좌파들의 반항> 등을 읽었었는데, 너무 어려운 책들을 골랐는지 읽다가 포기했던 아픈 경험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Karl Marx, 1815~1883)”부터 명칭만큼은 숱하게 들어봤지만 그 뜻을 모르고 있었던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 “기호학(記號學, Semiotics),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까지 현대 철학자들과 철학 사조들을 일목요연하게 관통해볼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개괄적인 소개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앞으로 현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과 이론들을 공부해야하는지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철학 부문은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신화”와 “역사” 부문은 아쉬움이 남는다. 책에서는 그리스신화와 서양 세계사를 연대기 순으로 요약하는 수준에 그치는 데, 철학처럼 학문으로서 “신화학(神話學, Mythology)"과 ”역사학(歷史學, Historiography)“의 방법론이나 학자들을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신화학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자연신화학, 인류학적 비교신화학, 구조주의적(構造主義的) 신화분석 등 다양한 학파와 이론이 있으며,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 1854~1941)”,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 등 이론가로써 또는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하며, 철학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고 하는 역사학은 더욱 더 다양하고 많은 이론들과 학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인문학 입문서로서 후속작품을 구상하고 있다면 다른 학문들에 비해 학문적인 지식과 정보가 생소한 신화학과 역사학을 다뤄주길 바래본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인문학 공부를 어려워하는 초보자들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쉽고 친절한 기초 입문서이자 일반 상식(常識)으로 읽어도 충분히 좋을 책이었다. 관심 있는 학문은 이 책으로 전반적인 가닥을 잡은 후에 강론(講論)으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철학부문을 공부할 때는 꽤나 유용할 것 같다. 그나저나 서두에서 인용한 <[김덕기]인문학을 보는 사회의 이중성>, 중도일보, 2012.10.3.) 기사를 더 읽어 보면 인문학이 열풍이라고는 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대학이 취업준비를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취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비인기 학문 - 이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취업이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숫자가 매우 미미하여 피부로 체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 으로 전락했고, 인문학자들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즉 대학 안에선 사라져가는 인문학이 바깥에선 열풍인 상호 모순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다는 인문학 열풍도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유행에 그칠지도 모르겠다. 학문 연구가 기본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문학도 그 중요성은 갈수록 커져 가지만 연구 시설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아직까지 노벨상 하나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기초과학(基礎科學)”과 같은 운명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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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이다.

요즈음이야 사시사철 책읽기 좋지 않은 계절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을만큼 “독서(讀書)의 계절”이 잘 어울리는 계절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수많은 소설들 중 어떤 장르가 가을에 잘 어울릴까? 개인적으로 즐겨 읽는 추리·스릴러 소설은 아무래도 여름이 제격이고, 아침저녁으로 옷깃이 절로 여며지는 추운 가을 날씨에는 가슴을 따뜻함으로 물들이는 감동적인 소설이나 감성이 충만한 가슴 아픈 연애 소설이 딱 어울릴 듯하다. 그래서일까? 장르소설 마니아인 나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을, 거기에 처음 만나는 작가에 대한 울렁증이 있는 내가 이름만 들어봤을 뿐 아직 만나본 적이 없었던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2012년 8월)>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 이었다

 

 

시(詩)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띠지와 책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위 문구는 평소라면 손발이 오그라들었을 문구였겠지만 갈수록 깊어가는 가을과 딱 어울리는, 처음부터 눈길을 확 잡아끄는 문구였다. 다른 책들은 책 읽기 전에 출판사 홍보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 그리고 책 앞 뒤 면의 작가의 말들부터 꼼꼼히 읽고 시작하는데, 이 책은 그런 사전 조사 없이 이 문구로 바로 시작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가슴 시린 로맨스 소설이겠거니 하고 말이다.

 

 

2012년 현재, 양모(養母)인 “앤”이 죽고 난 후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는 26세 미혼 여성인 “카밀라 포트만”에게 양부(養父)인 “에릭”이 카밀라가 쓰던 2층 방을 정리했다며 여섯 상자에 카밀라의 유년 시절 물건들을 가득 담아 보내온다. 상자들이 배달되던 날, 상자에 담겨 있던 테디 베어 인형을 보고 눈물을 흘린 뒤로 상자를 더 이상 열어보지 않고 방 한쪽 벽에 쌓아놓았다가 남자 친구 “유이치”의 권유로 상자 속 물품들을 꺼내보며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글이 출판되면서 제법 인기를 끌게 되고 뜻하지 않게 작가가 되어 버린 카밀라에게 출판사에서 의뢰가 들어온다. 생후 6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카밀라가 모국인 한국에서의 과거를 찾아보는 논픽션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카밀라에게 한국에 대해 남은 거라고는 양모인 앤이 죽기 몇 해 전 카밀라의 친오빠라며 보내온 편지에서 경남 진남이라는 지명과 카밀라의 생모가 진남여고 재학생이었다는 내용, 그리고 함께 동봉해온 생모로 추정되는 여자의 낡은 사진 한 장 뿐이었다. 앤은 카밀라에게 편지와 사진을 주면 곁을 떠날까봐 편지를 없애버리고 사진만 남겨뒀던 것이다. 카밀라는 유이치와 함께 한국 진남으로 찾아와 진남여고를 방문해보지만 현 교장 선생님이자 카밀라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정지은”이 학교를 다녔던 1988년 선생으로 근무했던 “신혜숙” 교장은 진남여고에서 순결을 중요시하는 학교여서 재학생이 아기를 가졌던 일은 절대 없었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수소문과 당시 엄마의 친구들, 그리고 엄마와 추문이 돌았던 선생님 - 신혜숙의 남편이기도 하다 -의 증언들을 통해 하나 둘씩 과거의 진실이 그 베일을 벗게 된다. 카밀라이자 재희가 마주하게 된 과거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가슴 시린 로맨스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어릴 적 입양되어 이제는 성인이 된 한 여성이 자신의 과거를 찾는 과정이 전개되면서 솔직히 당황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과 같은 아름답고 감성적인 시어(詩語)들이 계속 이어지고, 카밀라가 과거를 찾는 과정이 미스터리하게 전개되면서 제법 흥미가 느껴져 이내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카밀라가 마주하게 되는 과거는 결코 간단치가 않다. 그녀의 엄마 지은은 미성년인 여고 2학년 때 카밀라를 임신한다. 그것도 자신의 친오빠와의 패륜적인 관계로 말이다. 결국 그녀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카밀라는 어쩌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과거는 밝혀지면 밝혀질 수 록 그녀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기까지 한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 도 있고, 나빠질 수 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P.201.~202.

 

 

그러나 카밀라는 그런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직시한다. 엄마와 자신과 관계된 추문(醜聞)속에 감춰진 진실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남들처럼 살지 못한 과거의 점의 인생을 선의 인생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입양아”라는 삶에서 벗어나 비록 불행하고 비참하더라도 자신의 과거를 올곧이 갖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불행하다고 외면해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자신이 온몸으로 그것을 껴안았을 때 비로소 불행은 사라지고 자신에게 온전한 과거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 말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과거를 찾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에 짠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다행히 점점 밝혀지는 과거의 진실은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추문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결말에서 자신의 아버지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짧았지만 엄마와 손을 마주 잡았을 때부터 불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을 느꼈던 아버지를 말이다.

 

 

사랑이 끝난 뒤에야 나는 언제 그 사랑이 시작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잡고 있던 게 정말 불이라면, 그게 첫사랑의 불꽃같은 게 맞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어린 심장은 완전히 불타올라 잿더미로 바뀌었으리라 - P. 314

 

 

내 나름대로 카밀라에게 있어 과거의 의미와 있는 그대로 과거를 마주하려 한 카밀라를 응원하며 읽긴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작가가 나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입양아의 정체성 찾기인지, 아니면 불꽃같은 사랑을 하다 간 지은의 사랑인지, 아니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어떤 비참하고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메시지였는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남겨 놓은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중략)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당부처럼 작가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 읽고 나서도 쉽게 가시지 않은 가슴 속 울림과 여운에 책을 쉬이 덮지 못하는 것이 작가가 말한 이야기 때문이라면 아직은 여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호흡을 길게 갖고 찬찬히 글자 한자 한자를 꼼꼼히 읽어볼 생각이다. 작가가 텔레파시로 계속 보내고 있는 메시지를 계속상기하면서 말이다.

 

 

가슴시린 로맨스 소설은 아니었지만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은, 감수성이 절로 예민해지는 이 계절에 참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김연수 작가, 첫 만남이었는데 나쁘지 않은 그런 느낌의 작가이다. 이야기(敍事)의 구성력은 이 책 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책 속 곳곳에 등장하는 시와 문구들은 연습장에 따로 적어두고 싶을 정도로 참 아름답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작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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