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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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고을마다 전설(傳說)과 민담(民譚) 한 두 자락 없는 곳이 없다고 우리나라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런 이야기(Story)들을 <전설의 고향>처럼 원형(原型) 그대로 후대에 전(傳)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현대적 감각에 맞게 구성, 각색(Telling)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들도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유럽인들의 신화와 전설로 국한되었던 전승(傳乘)을 새롭게 창조해내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이야기로 승화, 발전시킨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말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도 이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설,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 우리 전통 설화와 민담을 새롭게 해석하고 각색하는 시도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니 참 반가운 일이다. 그런 시도 중 단연 발군은 “콩쥐팥쥐”, “우렁각시”, “선녀와 나뭇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전래동화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해낸 “조선희” 작가의 <모던 팥쥐전(노블마인/2010년 6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는지 알진 못하지만 출간 이후 앱북, 라디오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이식되었다고 하니 우리나라 고유의 스토리텔링의 성공 가능성을 증명한 대표적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조선희식 전래동화 재해석 시리즈” - 이런 시리즈 명칭이 있는 것이 아니고 멋대로 붙여 봤다^^ - 2편 격인 책을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모던 아랑전(노블마인/2012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책에는 총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이자 “아랑전설”과 “장화홍련전”을 모티브로 한 <영혼을 보는 형사>를 간략하게 소개해보자. 이 단편은 1984년 처음 개봉된 이후로 10년에 한 번씩 시리즈로 제작되면서 매 편 큰 흥행을 거두었던 영화 <네가 알려준 각색> 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남자 주인공이 영화 개봉 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는 영화 속 스토리처럼 실제로 남자 주연 배우가 불가사의한 사고로 죽어 “저주받은 영화”로 알려진 영화였다. 2014년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제작이 발표되지만 모두들 저주받은 영화에 출연을 고사하자 제작사는 남자 주연 배우 공개 오디션을 개최한다. 지하철 환승역 내의 좁은 가판대에서 신문이며 주간지 같은 잡지를 팔았던, 한마디로 “하급인생”을 살았던 청년 “허중인”은 신문에 난 오디션 공고를 보고 응모하는데, 빼어난 용모 덕분에 덜컥 붙어버리고 만다. 대중은 전임 주연 배우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에게 동정과 공포의 이중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 촬영에 임한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그는 기이한 경험들을 하게 되고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존재가 자신을 대신해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이자 앞서 세 편의 영화 남자 주인공들의 연인이었고 특히 배우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로 알려진, 쉰 살을 넘긴 여가수 “권피아”가 그에게 접근해오고,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푹 빠져 버린다. 영화 제작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중인에게도 운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과연 영화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중인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영혼을 보는 형사>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두 가지 공포 코드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새로운 공포를 선보이고 있다. 먼저 이 단편에 반영된 전래동화를 살펴보면 우선 죽은 원혼(冤魂)이 매번 사또를 찾아온다는 “아랑전설”과 “장화홍련전”의 설정을 10년 마다 제작되는 영화에 깃들어 남자 주연 배우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현대식으로 변형시킨다. 여기에 작가는 여기에 혼기(婚期)가 된 처녀가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은 것이 한이 되어 악귀가 된다는 “손각시” 전설 또한 차용(借用)하여 반영하고, 이야기의 전개와 분위기도 전래동화 특유의 애잔함을 잘 살려 내고 있는데,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 괴담(怪談)으로 종종 화제가 되는 “저주받은 영화” 모티브를 결합한다. 책에서도 언급했던 영화 <폴터가이스트> 시리즈나 영화 <엑소시스트> 시리즈는 책 속 영화 <네가 알려준 각색>처럼 실제로 출연 배우들이 의문의 사고로 죽은 저주받은 영화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처럼 과거의 전설과 현대의 괴담을 절묘하게 조합하여 전혀 새로운 기담(奇談)을 창조해낸 작가의 기가 막힌 상상력과 구성력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게 만든다. 이 외에 다른 단편들인 <스미스의 바다를 헤맨 남자(금도끼 은도끼)>, <버들고리에 담긴 소원(심청전)>, <오소리 공주와의 하룻밤(토끼전)>, <오래된 전화(할미꽃 이야기)>, <29년 후에 만나요(북두칠성)> 들도 전래 동화적 모티브에 학교 괴담, 심야버스 괴담, 심지어 SF적 설정까지 현대적 괴담과 장르를 자유롭게 변주해내며 한 편 한 편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조해냈다. 또한 전편과 마찬가지로 책 곳곳에 실려 있는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의 “아이완”의 그림들은 이번에도 조선희 작가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야기의 환상성과 기묘함을 한층 배가시켜 시각적인 효과도 톡톡히 거두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 책이 그림 없이 활자(텍스트)로만 구성되었다면 영 심심했을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무서운 이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무서움의 정도를 평가한다면 어느 수준일까? 아내는 꿈자리가 사나웠을 정도로 무서웠다고 하는데, 오싹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혹시 몰라 늦은 밤에는 읽지 않고 아침과 오전 시간에만 읽었던 탓도 있지만(^^) 이 책의 공포는 서서히 물들어가는 은근한 무서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고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 그대로 나 매우 무서운 책이요 하고 대놓고 말하는 강력한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 도 있겠지만 은근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한, 읽고 나서 곱씹어 보면 점점 더 오싹해지는 이 책 식의 공포가 나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고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소재와 이야기의 기발함과 독특함, 그리고 은근하고 오싹한 공포 등 모든 면에서 "제대로 만든" 공포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처럼 책 자체가 참 재미있기도 하고, 또한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우리나라 작가가 쓴 책이기 때문에 별점은 만점을 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평가이니 이 글 때문에 책을 선택해서 읽고 실망하신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글을 쓴 이가 우리나라 작가를 심하게 편애를 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조선희 작가가 생각하는 무서운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문구를 인용하고 이 두서없는 감상문을 마친다.

 

무서운 이야기에는 대단한 힘이 있죠. 다른 어떤 것보다 집중하게 만들거든요.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는 온 신경이 곤두섭니다. 무서운 것과 대치한 시선은 보이는 너머 어둠 속까지 살피게 되죠. 무서우니까요. 때문에 절로 오감이 밝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보지 못하고 놓친 것들이 눈에 띄게 되는 거죠.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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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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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열 건 넘게 스팸 메일이나 메시지, 전화들을 받는다. 받는 족족 스팸(Spam) 메일과 번호로 등록하고, 스마트폰 장만하면서 10여 년 동안 써왔던 전화번호도 바꿨지만 어떻게들 알아내는지 며칠 있으면 바뀐 번호로 다시금 스팸 메시지들이 날아오기 시작해서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 정도라면 내 개인정보는 완전히 공개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잠시라도 인터넷에 접속을 하지 않으면 갑갑증이 생겨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IT, SNS와 담을 쌓고 살 수 없는 형편이다 보니 가급적 내 신상정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꽤나 주의를 하고 있지만 철저한 보안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자랑하는 대형 통신사나 포털 서비스의 해킹 사고가 그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도둑이 훔치려고 작정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옛말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렇다보니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사이버 범죄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데, 최근 이런 사이버 범죄의 심각성을 정면으로 고발한 스릴러 소설 한 편을 만났다. 바로 “스릴러의 제왕”이라 불린다는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의 신작 <도로변 십자가(원제 Roadside Crosses / 비채 / 2012년 7월)>이 그 책이다. 작가 이름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는 이 작품으로 처음 - 영화로는 “덴젤 워싱턴”,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본 콜렉터(1999)>로 만나본 적이 있다 - 만나 보게 되었다.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처음 만나는 작가에 대한 낯섦을 여전히 느끼면서 회색빛 음산한 배경과 대비되는 총천연색의 꽃들로 장식된 십자가가 이색적인 표지를 열어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책은 한적한 외곽 도로를 순찰하던 경찰관이 도로변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 6월 25일 월요일 장면에서 시작한다. 교통사고 피해자들을 위한 기념비 쯤으로 여긴 경찰관은 십자가를 뽑을까 하다가 괜히 뽑았다가는 추모객들이 돌아와 새 십자가를 꽂아놓을 게 뻔하다는 생각에 차로 돌아온다. 그런데 오늘 날짜를 확인하다가 순간 십자가 판자 원판에 투박하게 적혀 있던 날짜가 내일 날짜인 6월 26일 화요일이었음을 깨닫지만 추모객이 잘못 적어 놨겠거니 하고 금세 잊어버린다. 그날 밤 밤늦게 귀가 중이던 여고생 “태미 포스터”가 납치되어 자신의 차 트렁크에 갖혀 익사할 뻔한 사고가 발생하고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CIB) 수사요원인 “캐트린 댄스”가 이 사건을 맡게 된다. 댄스는 이 사건이 몇 주 전 졸업파티에서 돌아오던 두 여학생이 차량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사건에서 그 차를 운전했던 남학생 “트래비스”에게 쏟아지던 인터넷 악성 댓글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트래비스의 집을 찾아가지만 가족들의 방해와 트래비스의 완강한 부인(否認)으로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트래비스가 그날 밤 자취를 감춰버리고 새로운 도로변 십자가가 발견되고는 또 다른 여학생의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두 여학생 다 트래버스에 대해비난 악플을 달아 왔다는 공통점이 있고, 십자가에서 트래버스의 범행임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댄스와 동료들은 트래버스를 추격하지만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인 채 도로변 십자가는 계속 발견되고, 심지어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제 도로변 십자가는 “살인 예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트래버스의 범죄는 자신에 대해 악플을 달았던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악플들이 실려 있는 블로그 운영자이자 지역 주요 현안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이슈 메이커가 되는 “제임스 칠튼”의 블로그에 글을 올린 사람들로 확대된다. 경찰의 블로그 폐쇄 요구에도 언론 자유 운운하며 거절했던 칠튼의 집에 권총을 든 괴한이 침입한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역시 스릴러의 제왕이라 불릴 정도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스릴러 소설들에서 흔하게 만나보게 되는 공식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우선 범인의 정체에 대한 반전(反轉)을 들 수 있겠다. 초반에는 범인의 정체가 너무 일찍 밝혀져 맥이 빠져 이 작가 이렇게 일찍 범인을 밝혀 놓으면 남은 분량을 어떻게 채우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들어나는 증거들도 그렇고 이야기 전개도 중반까지는 모두 트래버스가 범인이 분명하다는 논조로 몰아간다. 그런데 블로그 운영자 제임스 칠튼의 살인 기도를 정점으로 이야기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트래버스는 희생자였을 뿐 범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결말 부문에 이르러 다시 한번 범인의 정체에 대한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총 두 번의 반전으로 깜짝쇼를 하는 작가, 어느 인터뷰에서 “디버 씨, 이번 책에서도 완전히 속았습니다! 눈 밝은 독자들이 이렇게 말해줄 때 가장 기쁩니다.”라고 했다더니 역시 독자를 쥐락펴락할 줄 아는 유능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두 번째는 사건 전개에 있어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 결말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다음 장(章)으로 넘기는 구성을 들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제임스 칠튼의 살인 기도 장면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총성(銃聲)이 울리고, 칠튼이 죽었는지는 묘사하지 않고 그 장면을 끝내고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며, 몇 페이지를 더 읽고 나서야 비로소 결말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다음 장을 바로 열어보는, 즉 독자들이 책에 눈을 떼지 못하고 시선을 계속 집중하게 하는 방식은 스릴러 소설들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일종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작가도 이 작품에서 여러 장면에 걸쳐 즐겨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매력적인 여주인공 “캐트린 댄스”에 대한 설정을 들 수 있겠다. 소개글을 읽어보니 이 주인공, 작가의 대표 시리즈라는 “링컨 라임” - 앞서 말한 영화 <본 콜렉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시리즈에서 조연(助演)으로 활약해왔고, 전작인 <잠자는 인형>에서 주연으로 데뷔한 캐릭터라고 한다. 캐트린 댄스는 이 작품에서 “동작학 전문가”라는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억제된 감정은 거의 언제나 몸짓으로 드러난다” 라는 작품 속 문구처럼 범인의 동작을 관찰해서 심리적 상태나 거짓말 유무를 밝혀내는 그런 능력으로 보여진다. 일종의 프로파일링(Profiling) 기술로 보이는데 조금은 생소하고 몇 몇 장면에 등장하지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전작을 읽어본 어느 분 글에서 전작에 비해서 이번 작품에서는 동작학적 능력이 그리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독특한 능력과 그녀만의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미궁처럼 자꾸 꼬여만 가는 복잡한 사건 속에서 범인의 숨은 의도를 간파해내고 마침내 사건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이 억지스러움이나 과장됨 없이 적절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댄스에게 일종의 시련이라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사건 또한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바로 안락사(安樂死) 혐의를 받고 있는 어머니가 바로 그 사건이다. 어머니 사건은 도로변 십자가 사건 때문에 밤낮없이 매달려 있는 그녀에게 사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시선을 분산케 하는 시련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여기에 FBI 수사관이었던 남편을 사고로 여의고 자녀들에게 느끼는 연민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남성 동료와 트래비스 컴퓨터 해킹과 온라인 댓글 분석을 통해 수사에 참여했던 교수와의 로맨스 등 그녀의 개인사 또한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즉 사건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꺼리를 던져 주는 그런 캐릭터인 것이다. 역시나 이런 설정도 스릴러 소설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렇다면 책의 재미는 어떨까? 위에서 말한 스릴러 소설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으니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다고 600 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술술 읽힐 정도로 참 재미있다. 다만 너무 스릴러 공식에 충실한 나머지 전개와 결말에서 다소 느껴지는 식상함과 초반에서 도로변에 살인을 예고하는 십자가가 등장한다는 설정에서 뭔가 “스티븐 킹”식 공포와 초자연적인 설정을 기대했었는데, 설정은 기발했지만 단순 범행 예고 설정에 그친 점은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껴졌다. 분명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딱 내 기대 수준 정도의 기발함과 반전을 맛볼 수 있는, 즉 기대를 뛰어넘는 충격을 맛보기에는, 또한 제프리 디버라는 작가 특유의 색깔을 맛보기에는 다소 부족한 그런 책이었다고 할까? 물론 이 책 한 권만으로 그의 내공을 진단하기에는 너무 성급할 것 같다. 제프리 디버라는 작가, 이 책으로 낯섦이 가신 만큼 자주 만나볼 필요가 있는 그런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책장에서 고히 잠들고 있는 전작인 <잠자는 인형>부터 깨워 읽고 그의 대표작들인 <링컨 하임> 시리즈를 차근차근 만나봐야겠다. 이렇게 즐겨 찾아볼 작가를 추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 충분히 읽어볼 재미와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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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탐정 이상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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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생(生)을 살다간 그의 이름 앞에는 “천재시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한국 근대문학사가 낳은 불세출의 시인” 등 참 많은 호칭들이 붙어 다닌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수많은 문인들 중에서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이름이 항상 목록 맨 앞을 차지 - 수십 번을 읽어도 당최 이해가 되지 않지만 - 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총독부 내무부 건축 기사, 기생 금홍(錦紅)과의 자유 분망한 애정 행각, 베일에 쌓인 의문스러운 죽음 등 그의 파란만장한 삶 또한 탄생한 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화제꺼리가 되고 있다니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의 명성(名聲)은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런 화제성 때문인지 이상의 문학과 삶은 영화 <금홍아 금홍아(1995)>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998)>, 연극 <오감도(2010)>와 <이상 12月 12日(2010)>, 소설 <이상은 왜?(2011)>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으로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이번에 그를 새로운 소설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바로 <훈민정음 암살사건>의 작가 “김재희”의 신작 <경성탐정 이상(시공사/2012년 7월)>이 그 작품이다. 처음 책을 받아 들고서는 추리소설(推理小說)이라니 일견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천재(天才)라는 호칭이 당연한 수식어로 붙는 그만큼 명탐정(名探偵) 배역에 어울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그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는 소설가 “구보(丘甫, 본명 박태원, 1909~1987)”가 이상과 콤비를 이루고 1930년 대 실존했던 예술가들과 인물들이 등장한다니 추리와 역사가 함께 어우러지는 재미를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아 절로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책을 받자말자 흥미와 기대감으로 표지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소설가 “구보”는 선배 문인 염상섭에게서 “구인회(九人會)” 가입 제안을 받고 아침부터 상섭이 근무하는 신문사에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온 시인 “이상”을 만나 통성명을 나눈다. 기다린 끝에 나타난 상섭은 구인회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모임이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경무국 형사들을 도와 까다로운 범죄를 해결해왔다면서 둘에게 일종의 입단 테스트 겸해서 창경원에서 발생한 미녀변사사건(일화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해결을 지시한다. 졸지에 탐정 역할을 하게 된 이상과 구보는 첫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구인회에 정식 입단하게 된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심령회(心靈會)에 얽힌 살인사건과 그림 도난 사건, 평양권번 출신 신인 여가수의 죽음, 구한말 하와이 이민자들의 사진결혼에 얽힌 의문의 여인 “레이디 황”의 정체, 나비 수집가의 과거에 얽힌 살인사건과 함께 밝혀지는 조선총독부 지하 미로의 비밀 등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이상은 구인회 선배인 “김기림”의 요청으로 동경(東京)으로 떠나고, 몇 개월 후 이상의 부음(訃音)이 날라 온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으로 슬퍼하던 구보에게 이상의 연인 “금홍”이이상이 남긴 가방을 전달해오고, 가방에 담겨 있는 이상의 편지들과 “데드마스크(Dead Mask)"로 이상의 죽음에 뭔가 숨겨진 수수께끼가 있다고 확신한 구보는 동경으로 가서 이상의 행적을 조사한다.

 

이 책은 1930년대 경성판 “셜록 홈스와 왓슨” 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와 많은 면에서 닮아 있다. 우선 탐정 이상과 조수 구보라는 콤비 설정이 같고, 옷차림과 생김새로 직업이나 이력을 추리해내는 방식도 흡사하다. 또한 복잡한 암호들을 척척 밝혀내고, 이상이 안락의자 탐정에 머무르지 않고 셜록 홈스처럼 범인들과 격투를 벌이기도 하며, 숙적(宿敵)이자 여러 편에 걸쳐 이상과 대결했던 숙적(宿敵) “류 마치” 자작도 셜록 홈스의 숙적 “모리어티” 교수를 연상시키며 최후 또한 똑같이 닮아 있다. 그런데 비록 셜록 홈스에서 모티브를 따오기는 했지만 작가는 작가 특유의 소설적 상상력으로 독특하고 생명력 있는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먼저 책에는 1930년대 경성의 거리 모습과 시대상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경성 거리를 달리는 전차와 사화 <여가수의 비밀> 편에서의 시내 골목 골목들, 백화점, 아편굴, 창경원, 이상과 금홍이 운영했던 다방(茶房) “제비” 등 당시의 경성 거리를 머릿 속에서 그대로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또한 모던 보이로 불리던 신세대 남성과 여성들의 모습과 당시의 카메라와 자동차, 자전거 등등 시대상 또한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염상섭과 김유정, 김기림 등 <구인회> 문인들과 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자 교육가였던 간송 “전형필(1906~1962)”, 세계적인 나비박사 “석주명” (1908~1950), “떳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로 유명했던 자전거 선수 “엄복동(1892~1951)” 등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 전혀 이질감 없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던 이상의 미스터리한 삶들, 즉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로 총독부 건물 지하에 금괴와 비밀 문서가 숨겨져 있는 미로를 설계했다는 이야기 - 소설과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이를 모티브로 했다 - 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비관을 담은 글 또한 찾아 볼 수 없었던 이상이 갑작스레 동경으로 넘어가서 사상 불온 혐의로 구금되어 불과 2개월 여 만에 세상을 떠난 그의 미스터리한 죽음 - 소설 <이상은 왜?>에서도 이 죽음을 다룬다 - 또한 소재로 등장시켜 흥미를 유발한다.

 

그러나 몇 몇 점에서는 아쉬움이 든다. 우선 추리소설로써의 트릭과 플롯은 기발하거나 특별한 반전(反轉)이 없는 평이한 수준에 머무른다. 특히 주요 증거로 등장하는 “시반(屍班)”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내가 비전문가서인지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또한 193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나 등장하는 용어들도 눈에 띄는데, 대표적인 예가 “특정 취미·사물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고 사교성이 결여된 인물”을 지칭하는 “오타쿠(御宅, otaku,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라는 용어를 들 수 있겠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때가 1970년대부터고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1983년이라고 하니 1930년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셈이다. 그리고 이상과 구보의 대화 중에서도 현대 과학기술을 암시(暗示), 즉 고층 빌딩용 엘리베이터에 대한 언급이나 혈액으로 많은 범죄사실을 밝혀낼 것이라는 언급들도 작가의 재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역시나 당시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묘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어쩌면 논란꺼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는 “오화 그녀는 살아있다” 편일 것이다. 책에는 조선황실과 연관이 있는 의문의 여인으로 “레이디 황”이 등장하는데 스포일러라 밝힐 수는 없지만 그녀의 정체가 참 충격적이다. 아마도 몇 몇 분들에게는 불쾌하거나 발칙한 이야기로 느낄 수 도 있겠지만 그냥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 쯤으로 눈감아주자. 소재만큼은 단순히 단편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기발하고 참신해서 작가의 후속작으로 기대해볼 만 한데 나 혼자 김칫국을 마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53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을 지루함 없이 단숨에 읽을 정도로 참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몇 몇 아쉬운 점도 있지만 참 재미있게 읽었고, 그리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 장르 소설에 대한 나의 편파적인 사랑 때문에라도 별점은 만 점을 준다^^. 추리소설의 재미와 격변의 시대인 1930년 대 경성을 살다간 실존 인물들의 생생한 숨결이 담겨있는 시대 소설로써 그리고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결합한 팩션 소설의 재미를 함께 느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데 어딘가 아쉽다. 여느 추리소설 탐정 콤비 못지않게 훌륭한 궁합을 보여준 이상과 구보의 콤비 플레이는 이대로 끝나는 걸까? 마지막 페이지에 비밀이 담겨 있으니 놓치지 마시기를^^

 

그리고 사족 하나. 이 소설은 1936년 이상과 구보가 구인회 동인지를 편집했던 창문사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고 그만 빵 터졌다. 시인 이상이야 몇 몇 사진들로 익히 봐왔는데 구보 박태원 선생의 얼굴은 이 사진으로 처음 봤는데 아니 이건 요새 <나는 가수다>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 “김연우”와 완전 똑같지 아닌가. 그래서 다른 사진들을 검색해봤더니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궁금하신 분들은 꼭 확인해보시길^^ 그리고 혹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구보 선생 배역을 꼭 김연우씨가 맡게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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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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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2011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18세 이상 성인 10명 중 3명(유병률 27.6%)이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했고, 6명 중 1명(15.6%)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으며 최근 1년간 자살시도자만 10만 8,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이데일리, 2012.7.13.기사 발췌). 그 정도가 차이가 있을 뿐 전국민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 나올 정도- 기사 제목이 “정신질환 공화국 대한민국” 이다 - 로 심각해진 원인은 무엇일까? 수십 수백 개의 원인 분석 기사들 중에 “고(苦)가 많은 현실”이 원인이라는 글에 눈길이 간다. 공해, 실업, 과당 경쟁, 과로, 가정불화, 치안불안, 정치사회 불신 등등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정신 질환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러한 심각성을 고려해 정신건강검진을 확대 시행하고 지원을 늘린다고 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 이상 큰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만 같다. 서두부터 유쾌하지 않지만 남이 아닌 나의 얘기일 수 있는 정신질환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책이 현대인의 대표적인 정신질환 중 하나라는 “강박증(强迫症,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을 앓은 작가의 경험담을 털어 놓은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바로 “에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원제 Amen Amen Amen / 비채 / 2012년 6월)>이 그 책이다.

 

 

 5학년으로 올라간 첫째 주 어느 날 아빠의 여동생이자 영원한 나의 영웅인 “시몬” 고모가 동맥류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죽음은 우리에게 필요한 휴식이고 깊은 잠에 드는 것과 같다는 엄마가 말씀하셨지만 아직 어린 나이라 죽음에 대해 이해를 할 나이는 아니어서 그런지 아직 젊고 생기 있는 사람이 일주일 만에 영영 사라졌다면 좀 더 납득이 가는 설명이 필요했다. 나는 고모의 죽음에 슬픔보다는 나쁜 짓을 저지르면 나쁜 일이 생기고,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죽는다는 사실과 함께 하-님 - 유태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면 불경하다는 생각에 축약해서 부른다고 한다 - 만이 인간이 죽는 이유와 시기를 아시는 유일한 존재이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만이 영원한 잠에 들어서 떠도는 동안 하늘에 계신 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얼마 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나는 조금씩 이상 행동을 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알 수 없는 기도를 올리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못과 같은 날카로운 조각들을 주워 모으며, 자신의 의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즉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저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충격으로 어린 시절 잠시 잠깐의 이상 행동, 즉 일종의 성장통인 줄만 알았던 이런 강박증은 대학을 가고 성인이 되어서도 점점 더 심해져만 간다. 유일한 버팀목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함께 기도하고 자신을 다독거리는 바로 어머니였다. 여기에 또 다른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몇 몇의 남자들과 사랑을 하지만 실패하고 만나게 된 남편 “제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딸이다. 엄마는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이런 강박증을 결국 극복해냈을까? 책에는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남편과 딸로 인해 충분히 극복해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주며 끝을 맺는다.

 

 

 어린 시절부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중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인생 역정과 함께 자신을 평생 괴롭혀 온 강박증에 대하여 솔직하게 털어놓은 자전적인 소설 - 책 분류가 소설로 되어 있는데 엄밀하게는 자서전(에세이)가 맞을 것 같다 - 인 이 책,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자못 감동적이긴 하지만 사실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내가 남성이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이나 어머니와의 사랑에 대해 둔감한 탓도 있을 테고, 다행히(?) 내가 작가와 같은 강박증을 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여담이지만 인터넷에 나오는 강박증 자가 테스트를 해보니 나는 정상이라고 한다. 물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으로 정확한 테스트가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 . 처음에는 그저 사춘기 시절 앓고 지나가는 성장통 쯤으로 그려질 줄 알았는데 장년이 돼서도 쉬이 떨쳐 내지 못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강박증이라는 병의 심각성과 치유의 어려움(難治)에 꽤나 놀랍기도 했다, 또한 주인공(작가)이 앓고 있는 강박증의 수준이 전문적으로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책에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는 심각한 수준 같은데, 장년이 되도록 특별한 치료가 없었다니 그녀의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무신경에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신과 상담을 받아왔고, 성인이 되어 의사들의 진료를 받으면서 약을 복용해왔으니 작가 입장에서는 치료를 받아온 것이겠지만 책이나 TV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신질환은 병원에 강금당해서 치료받아야 한다는 내 잘못된 선입견을 탓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주문(呪文)처럼 끊임없이 외워대는 기도나 길거리에서 못이나 날카로운 것들을 주워 모으는 그녀의 결벽증적인 행동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다는 망상증(妄想症) - 주변의 죽은 사람들 이름을 살인 목록에 올려놓기도 한다 - 이라면 제대로 치료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녀의 인생이 책에서처럼 굴곡지고 힘들지는 않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경험이 오늘날 유명 희극 배우로서, 그리고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강연과 연극 제작을 하는 사회활동가로서의 그녀를 있게 한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대외적으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가 자신이 강박증 환자였다는 것을 내밀한 속살을 털어놓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런 책을 쓰게 된 것일까? 아마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강박증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자신처럼 방치해두지 말고 하루 빨리 치료받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여기에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희망과 용기의 격려도 포함해서 말이다. 정신질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병을 솔직히 인정하고 늦게나마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 작가에게 진심으로 경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우리나라 상황에도 분명한 경종(警鐘)을 울리는 책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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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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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작가를 선택하라면 좋아하는 장르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를 꼽는 분들이 가장 많을 것 하다. 하루키 관련 기사들이야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올라와 있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독서 목록에도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도쿄기담집>, <어둠의 저편>, <1Q84> - 1권만 읽고 2,3권은 책꽂이에 잠들어 있다 - , <잡문집> 등 여러 권에 이르는데, 엉뚱하지만 - 보통은 가장 좋았던 책을 꼽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 가장 난감(難堪)했던 책이라면 에세이인 <잡문집>을 꼽고 싶다.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문학관과 번역관, 음악 애호가로서의 재즈론, 독서론, 인물론 등등 하루키의 30년 문학 인생과 삶을 담아낸, 하루키 팬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책이겠지만 나에게는 읽는데 꽤나 애를 먹인 그런 책이었다. 소설이 아닌 그의 생각과 삶을 만나 본다는 것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의 생각에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잡문집>은 하루키는 역시 소설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하루키를 에세이로 만나게 되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원제 村上ラヂオ(2)おおきなかぶ,むずかしいアボカド / 비채 / 2012년 6월)>가 바로 그 책이다. 처음 책을 받고서는 이 책도 난감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책을 훑어보니 짧은 분량의 글과 삽화가 실려 있어 부담 없이 읽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어 가벼운 마음에 책표지를 펼쳐 들었다.

 

 

이 책은 패션잡지 <앙앙>의 코너인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분을 모은 작품이라고 한다. 하루키는 작가의 말인 “십 년 만에 돌아와서” - 10년 전에도 같은 제목으로 <앙앙>에 연재했었다고 한다 - 에서 이 책을 쓴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하루키는 장편소설 <1Q84>를 탈고했더니 어깨가 가벼워져 에세이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소설의 재료로 준비해뒀지만 결국 소설로는 작품화되지 않은 소재들을 에세이로 풀어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본업이 소설가인 자신에게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지만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라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은 어깨 힘을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글을 썼으니 독자들도 그렇게 읽어달라고 당부한다.

 

 

본문에는 52편의 글들이 실려 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매 편 3 페이지의 짤막한 글과 함께 하루키가 어떤 그림이 더해질지 매회 은근히 기다렸다는, 그것도 연재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는 “오하시 아유미”의 동판화(銅版畵)가 실려 있다. 글들은 영화나 책, 사물,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루키의 짧은 단상(斷想) - 하루키는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 들인데 그의 소소하고 유쾌한 글들을 읽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그중 몇 가지만 짧게 옮겨보자.

 

 

하루키는 행사와 스피치와 파티가 영 고역이라면서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치기라도 하면 완전히 악몽이 돼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 그런 장소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덕분에 종종 의리없는 짓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래 조용한 장소에서 조용히 작품을 쓰는 것이 소설가의 본업이니 그 이외의 기능과 행위는 어디까지나 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좋은 얼굴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자신 인생의 대원칙이라는 그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이고, 독자에게 최선의 얼굴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이외의 부문은 “미안합니다”라고 잘라버릴 수 밖에 없다는, 조금은 상투적(?)인 자기변명을 한다. 그래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파티란 어떤 것일까? 다 합해서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담소를 나누는 부담없는 파티 - 책에는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라고 말한다.

 

 

달리는 걸 상당히 좋아해서 가끔 풀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하루키는 참가자에게 제공하는 호텔 대형사우나에 들어갔다가 사람들 전부가 거의 비슷한 체형이라 아주 진기했다고 말한다. 보통 다양한 체형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욕탕과 달리 전원이 비슷한 체형인 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편하지 않아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반인 여성이 “세계 슈퍼모델 워크숍”에 참가한 모델들이 가득한 대형사우나에 들어가는 것은 꽤 무서운 체험이 될거라면서 자신이 여성이라면 그런 경우만큼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뭐 슬쩍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여러 체형의, 여러 생김생김의,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당히 섞여 적당히 느슨하게 사는 세계가 정신건강상 가장 바람직한 것이구나 싶다고 마무리한다.

 

 

본업인 소설과 절반은 취미인 번역은 어렵지 않은데,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하루키는 에세이는 본업과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스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가 힘들어 대체 어떤 걸 쓰면 좋을까 하고 팔짱을 끼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긴 하지만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은 있는데,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으며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조건을 지키며 에세이를 연재하려고 하니 결과적으로 화제가 상당히 한정되는, 요컨대 ‘쓸데없는 이야기’에 한없이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자신이야 쓸데없는 이야기를 비교적 좋아하니 상관없지만 메시지가 없다는 비판을 받을 때면 소설처럼 툭툭 털어 내버리지 못하고 정말 그런가 싶어 반성하기도 한단다. 그러면서 옛날 미국 서부의 술집에서는 술에 취한 카우보이가 피아노 연주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전속 피아노 연주자를 피스톨로 빵 쏘아버린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글을 독자에게 “피스톨, 갖고 있지 않으시죠”라는 애교 섞인 질문을 한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가늘게 뜨며 이렇게 물어오는 하루키의 얼굴을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그의 <잡문집>을 어려워했는지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내가 읽고 싶었던 하루키의 에세이는 소설에서의 무거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고 유쾌한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지만 무겁고 난해한 주제와 공감하기 어려운 정서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나도 하루키를 “제법” 읽어 봤다고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서는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하루키를 만나보자는 생각에 <잡문집>을 들었지만 기대가 빗나가면서 난감하게만 느꼈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비로소 나는 부담스럽지 않은, 아니 가볍고 유머스럽기까지 한 하루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그의 모습이었기에 즐거움과 유쾌함을 훨씬 크게 느껴볼 수 가 있었다. 또한 이 책으로 하루키에 대한 부담감을 한결 덜었으니 그의 다른 소설 - 우선 읽다만 <1Q84)부터 - 들과 함께 <잡문집>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도 이 책으로부터 얻은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쓰다 보니 <잡문집>과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두 책에 대한 감상글이 되고 말았다^^ 아뭏튼 하루키 식의 소소하면서도 유쾌한 유머와 수다를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하루키는 진지한 얼굴도 멋있지만 가벼운 미소를 짓는 얼굴도 꽤나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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