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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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 등장한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no 1953~2003)가 200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다. 나 자신과는 평화롭게 지냈는데. 그저 묵묵히 평화를 누렸건만. 그런데 느닷없이 이 일 저 일 떠올랐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칠레의 밤>은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라는 신부이자 문학 평론가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종의 회고록이다. 


소설은 1970년 선거에 의해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 아옌데 정부, 정부의 개혁 정치에 대항해 일어난 군부 쿠데타 그리고 17년간 이어진 피토체트의 독재를 배경으로 한다. '이바카체'라는 필명으로 문단에서 활동한 한 사제의 고백(혹은 자기 변명)을 통해 칠레 문학과 지식인들의 위선을 고발하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씁쓸하다.


일례로 1973년 쿠데타가 성공하고 이바카체에게 수상한 두 남자가 접근, 피토체트와 몇몇 장군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함) 

10주에 걸친 강의를 끝내고 이바카체는 이 사실을 동료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이 일이 자신의 문인으로서의 경력에 해가 되진 않을지를 걱정하며 '침대에 대자로 누워'(p.116) 우는데, 나는 이 장면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처음에는 독재자 피노체트를 도왔다는 어떤 양심적인 가책으로 괴로워 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읽으니 자신의 알량한 문학 경력에 누가 될까 두려워 흘린 눈물이었던 것. 그것도 대자로 누워서. 참으로 추하고 역겹지 않은가!

더 이상 중압감을 견딜 수 없었던 이바카체는 이 사실을 자신을 키워준 문단의 권력자 페어웰에게 말하는데 웬걸, 페어웰은 '권력의 영역에 예기치 않게 진입한'(p.117) 그에게 오히려 질투심을 느끼는 게 아닌가!

이후 모든 문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누구도 이바카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철권통치와 침묵의 시절 오히려 많은 사람이 서평과 평론을 끈질기게 계속 발표하는 나를 예찬했다. 많은 사람이 내 시를 칭송했고! 여러 사람이 내게 접근해 부탁을 했어! 나는 추천, 칠레식 호의, 소소한 경력 포장 등을 남발했고, 덕을 본 사람들은 내게 영원한 구원을 얻은 듯 감사했어!"(p.125)]


이 외에도 참으로 기가 막힌 일화가 또 있는데, 길지 않은 소설이니 직접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칠레의 밤>은 문학의 역할을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던 작가의 비판 의식이 담긴 작품이다. 정치와 문단의 권력에 기생해 타락한 지식인들을 보여주면서 '문학은 어디에 있는 걸까?'(p140)라는 질문을 던진다. 천박한 문인과 지식인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p.153)]


이 소설은 총 두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한 문장에서 문단이 바뀐다. 


"그 후 지랄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늘 역사와 함께'(p.154)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쏟아낸 고백,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건 '지랄 같은 폭풍'이다.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성공하고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하자 이바카체가 내뱉은 말은 "참 평화롭군."(p.100)이었다. 그와는 참으로 대조되는 그의 마지막 모습, 마침내 자신의 위선과 비겁한 침묵에 더 이상 평온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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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3-20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 볼라뇨 시리즈의 시초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K문고에서 사서 정말 허겁지겁 읽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다시 읽게 되었을 때는 또 다른 느낌
으로 다가오더군요.

웰캄 투 볼라뇨 월드.

coolcat329 2024-03-20 23:39   좋아요 1 | URL
이번에 볼라뇨를 알고 보니 참 대단한 작가더라구요. 근데 50세, 한창 작품활동 할 시기에 떠나서 참 아쉬웠어요.
 
정신과 의사 페이지터너스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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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는 표제작을 포함 다섯 개의 중단편을 담고 있는 ‘브라질 문학의 거장‘ 마샤두 지 아시스(Machado de Assis 1839~1908)의 소설집으로 결코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를 특유의 해학적인 문체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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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3-16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관심 생깁니다. 고맙습니다!

coolcat329 2024-03-16 18:07   좋아요 1 | URL
이번에 마샤두 지 아시스의 책을 처음 읽고 맘에 들어서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을 바로 읽었는데, 40쪽에서 포기했습니다.ㅠㅠ 글이 정신산만해서 이해도 안되고 재미가 없더라구요...ㅠㅠ
죽은 사람이 주인공인 점과 작가가 브라질 문학을 대표하기에 기대가 컸는데 이렇게 초반 포기를 하게 되니 좀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Falstaff 2024-03-16 19:24   좋아요 1 | URL
˝나의 차가운 시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은 벌레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기념품으로 이 사후 회고록을 헌정한다.˝
뭐 이런 헌사가 있는 작품으로.... ㅎㅎㅎ
브라스 꾸바스는 뭐 그렇다고 치고, 그 유령이 살아 생전 사랑했던 여인이 ˝비르질리아˝, 베르길리우스의 여성형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을 사려면 (저는 딱 십 년 전에 읽어서 당시 가치로) 소주 열 병에 달하는 돈을 지출해야 하는데, 소주 열 병을 마셔서 얻을 쾌락과 책을 읽어 느낄 수 있는 엑스터시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ㅎㅎㅎ 독자가 알아서 해야겠습지요.
하여간 저는 다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4-03-16 21: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ㅋ 헌사 읽을 때는 너무 좋았는데 말이에요.😮‍💨
폴스타프님은 이 책이 소주 열 병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셨군요. 폴스타프님 리뷰가 없어서 궁금합니다.

페크pek0501 2024-03-1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신, 인간 본성, 아이러니. 제가 끌리는 낱말들의 조합이군요.
책, 검색해 보겠습니다. 사고 싶은 책이 넘 많아욤.^^
 
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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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보브(Emmanuel Bove 1898~1945)의 <나의 친구들(Mes Amis)>은 빅토르 바통이라는 한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이다. 바통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에 부상을 입고 돌아온 상이군인으로 일자리 없이 군인연금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간다. 

책 제목이 '나의 친구들'이니 바통에게 친구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나의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특히 자기처럼 의지할 곳 없는 '불행한 친구'(p.61)라면 더욱 좋다. 그래야 친구가 자기만을 바라볼테니까.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을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p.37)]


바통은 누군가의 관심을 기대하며 매일매일 밖으로 나간다. 내 생각엔 몸이 불편해도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바통은 일은 하지 않고 친구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 

<나의 친구들>은 이런 바통이 만난 다섯 사람-뤼시 뒤누아, 앙리 비야르, 느뵈, 라카즈, 블랑셰-과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매일 점심을 먹으러 가는 카페에서 그는 여주인 뤼시가 자고 가라고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군중 틈에서 우연히 본 호감이 가는 남자를 뒤따라 가기도 하는데 이 행동에는 그 남자가 자신이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는 망상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싶어 다리 위에 서서 자살할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부유한 사업가가 베푼 호의를 확대 해석하여 (사랑 고백을 하려고!) 그의 딸을 찾아 갔다가 운 좋게 얻은 직장을 잃기도 한다. 모르는 여자가 조금의 관심만 보여도 바로 그 여자와 함께 사는 상상을 하며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여자와 단둘이 있게 되면 불안해지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철저히 혼자인 바통을 보며 처음에는 너무 짠하고 불쌍해 '아 이 사람 어쩌면 좋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책을 계속 읽다 보니 바통의 행동에 어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자신의 외로움을 더욱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슬픔에 가둠으로써 그 상황을 은근히 즐기면서 살아갈 힘과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닌가!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억지로 기운을 내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슬픔을 지속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내가 정말로 보잘것 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부러 더 각인시키려 애쓰며 걸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p.50)]


붐비는 기차역을 좋아하는 이유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고 이렇게 외로워 보이는 자신을 사람들이 혹시나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 데 있다. 기차역에서 더 외로워 보이려고 '슬픔에 잠겨 있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을 보며 '아...바통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슬픔에 잠겨 있기 위해 노력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런 내게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외국으로떠나는 열차 안에서 내 생각을 해주기를 바란다. (p.113)]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일자리를 준 라카즈의 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들켜 한바탕 욕을 먹고 혼자 방에 남아 울던 바통이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계속해서 울려고 하는'(p.156) 모습이나, 자살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자살할 것처럼 다리 위에 서서 우는 시늉을 하는 모습도 다 자신의 외로움을 과장하여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은 바통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바통은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불안을 느끼며 그 관계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는데, 이 장면에서 '바통의 진실한 친구는 결국 외로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톨이'라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거리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관찰하게 만들고 그 가운데 삶의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니 말이다.

내 생각에 바통은 자신이 원하는 '진실한 친구'를 만나지 못할 거 같다. 외로움에 고통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친구들>은 책의 뒷표지에 쓰여 있는 '대도시에 고립된 현대인의 그늘'이라는 문구처럼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에게 이 세상은 또 다른 전쟁터이지 않을까, 그들이 예전처럼 다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바통은 전쟁에서의 공로로 훈장도 받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봐 주질 않는다. 친구도 전쟁에서 죽어 그는 죽은 친구의 가구를 쓰고 있다. 바통은 분명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을 겪었을 것이고 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행을 극대화하여 외로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에마뉘엘 보브의 <나의 친구들> 나는 이 소설이 너무너무 좋았다. 작가가 47세에 떠나서 많이 안타깝다. 짧은 생애, 세 편의 소설을 남겼다는데 나머지 소설도 번역되어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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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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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의 시니컬한 문장이 은근히 웃긴 소설이지만 마지막엔 절대 웃을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p.195)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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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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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하든 그 이면에는 ‘반대어‘가 있기에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삶을 기꺼이 살겠다는 마지막 안진진의 선언이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삶에 완벽이란 없기에 그 불완전함, 모순을 껴안고 살아갈 때 우리는 발전할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보여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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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3-05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분명히 읽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 내용은 생각나지 않네요.ㅋㅋ

coolcat329 2024-03-05 12:10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두번 째 읽는 건데 처음 읽는 기분이었어요. 어쩜 안진진 이름 빼고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