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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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정과 사랑을 다 잃은 한 남자가 41년 동안의 고독 속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와 진실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드러난다. 품위 있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깊은 사유가 빛나는 품격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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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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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핏빛 자오선>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로드>에 이어 세 번째 만나는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의 작품으로 1985년에 발표되었다. 미국의 평론가 헤럴드 블룸이 '현존하는 미국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매카시는 이 작품으로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아이를 보라'라는 예언서에서나 나올 법한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 아이'의 여정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1833년 미국 테네시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주인공인 소년은 열네 살에 가출하여 여기 저기를 떠돌며 거친 생활을 시작한다. 

때는 1800년대 중반 미국과 멕시코 간의 전쟁이 끝난 무렵으로 구걸과 도적질을 하며 떠돌던 소년은 백인 우월주의자 화이트 대위에 의해 비정규군에 가입하게 되고 멕시코로 원정을 떠난다. 그러나 이국의 땅에서 코만치 부족을 만나 전투를 벌이다 군 전체가 거의 박살이 나고, 소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멕시코 군대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 후 글랜턴이라는 자가 이끄는 용병대에 가담하게 되는데, 글랜턴 일당은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벗겨 멕시코 주 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집단으로 일명 '머리가죽 사냥꾼들'이다. 이들은 습격과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멕시코 정부에 의해 고용되었지만 이들에게 머리 가죽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영수증'이었기에 이들의 전투는 인종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살육으로 번진다. 다음은 이들 열 아홉 명의 용병대가 천 명의 인디언을 죽인 대학살 장면 중 일부이다. 


[시체들이 바다에서 일어난 대재앙의 희생자인 양 물가에 나뒹굴었다. 소금으로 얼룩져 있던 호숫가는 순식간에 피와 내장으로 뒤덮였다.(...)군인들은 시신을 아무 이유 없이 난도질하며 시뻘건 물 속을 돌아다녔고, 몇몇은 호숫가에서 죽어 가거나 죽은 젊은 여인네의 구타당한 몸뚱이에 들러붙었다. 델라웨어 하나는 시장에 장사 나온 행상인처럼 머리 가죽 다발을 들고 다녔다. 손목에 묶인 머리카락 끝에는 머리 가죽이 서로 엉겨 붙었다. 이곳에서의 매 순간순간이 훗날 사막에서 입에 오르내리리나는 사실을 잘 아는 글랜턴은 부하들 사이로 말을 몰며 열심히 독려했다. (p.209)]


<핏빛 자오선>에서 보여주는 서부의 모습은 온갖 살육과 폭력이 난무하는 혼돈 그 자체이다.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p.67)울 것만 같은, 가는 곳마다 인간과 동물의 사체와 해골이 널려 있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세상이다. 

서부 개척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백인이 인디언에게 가한 폭력을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폭력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 백인, 인디언, 멕시코인 모두 피에 굶주린 짐승들처럼 서로를 속이고 죽이는 가운데 극한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이런 폭력, 살인, 죽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 같은 세상을 작가 매카시는 건조하면서도 시적인 긴 문장으로 묘사하는데 뭔가 섬뜩하면서도 독자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가히 일품이란 생각을 했다 


[북쪽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뇌운에서 검은 덩굴처럼 벋어 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비커에 묻어난 램프의 시커먼 그을음 같았다. 그날 밤 수 킬로미터 너머에서 초원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실려 왔다.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자니 저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을 번개가 훤히 드러냈다. 벼락이 내려칠 때마다 바위가 울렸고 씻어낼 수 없는 형광 물질 같은 푸른 불 다발이 말에 들러붙었다. 부드러운 용광로 빛이 금속 마구에 번지고, 푸른 빛이 총신을 물처럼 흘러 다녔다. 토끼가 푸른 섬광에 미쳐 날뛰다 우뚝 서고,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바위산에는 독수리가 익살스레 몸을 웅크리거나 천둥에 짓밟혀 한쪽 눈이 노랗게 갈라졌다.(p.244)]


사실 나는 이 책을 참으로 힘들게 읽었다. 438페이지의 소설을 장장 9일 동안 읽었다. 살기 위해 죽이고 숨고 또 길을 떠나는 여정은 지루하고 피로했으며, 연이어 나오는 끔찍한 이야기의 잔혹함에 마음이 쉽게 지쳐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광대한 서부의 풍경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초현실적이며 때로는 잔인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고, '아 이 책은 그 '영혼을 압도하는 매혹적인 문체'를 느끼려면 원서로 읽어야 겠구나' 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읽기 힘든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 힘은 매카시의 문체와 함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에게 있다. 홀든 판사...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징그럽고 잔혹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핏빛 자오선>에는 선악의 구분 없이 모두가 다 악한 존재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악인은 바로 홀든 판사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소년을 의식하기 보다는 판사의 행동과 말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의 모습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210cm의 '거대한 덩치에 털 오라기 하나 없는 아이 같은 얼굴'(p.111)로 5개 국어를 하며, 세상에 안 가 본 곳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는, 한마디로 소설 속에서 미친 존재감을 뿜어내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무한한 지식을 활용하여 글랜턴 일당을 이끌며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글랜턴을 비롯한 용병들은 그를 정신적인 지주이자 구원자로 여기며 따른다. 

'이 세상에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함은 곧 나의 허락 없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p.259)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자신의 허락 하에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홀든 판사는 자신을 이 세상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이런 지배력을 무섭게 보여주는 예가 소설 속에 몇 번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어린 아이를 성적 도구로 삼다가 가차 없이 죽여버리는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판사는 모닥불가에 그 아파치 아이와 같이 앉아 있었다. 아이는 검은 딸기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몇몇은 아이를 놀리며 웃어 댔고, 육포를 주기도 했다. 아이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침에 군인들이 말에 안장을 얹는 동안 판사는 아이를 한쪽 무릎에 앉히고서 얼러 댔다. 토드빈은 안장을 들고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10분 후 말을 끌고 그 자리에 오니 아이는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죽어 있었다. (p.219)]


<핏빛 자오선>은 한 소년의 여정을 통해 사막의 모래처럼 거칠고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부 개척 시대의 모습을 인간의 잔악한 본성에 초점을 두고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로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30년을 보낸 소년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서부 개척 신화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냉철히 비판한 소설 <핏빛 자오선>, 재미가 있거나 가독성이 좋지도 않았지만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묵직함과 엄숙함을 가진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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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3-03-1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얘기인데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coolcat329 2023-03-11 12:41   좋아요 0 | URL
영혼을 사로잡는다는 그 문체를 오리지날로 맛을 못 보니 참 아쉬웠습니다. 호우님도 기회되시면 읽어보세요~따뜻한 주말 잘 보내시구요~

Falstaff 2023-03-11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매카시, 이 인간은 에휴, 말을 말아야지, 징글징글해요. 근데 별오. 흠. 안 속겠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3-03-11 15:47   좋아요 1 | URL
아 골드문트님 매카시 안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ㅎㅎ
저는 이 소설 읽으며 콘라드의 <어둠의 심연>이 떠올랐어요. 제가 좀 이런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징그럽게 피곤한 소설인 건 맞습니다. 😓

바람돌이 2023-03-11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카시는 모두 다 예쁜 말들 하나 읽었는데 좋았어요. 그런데 그 뒤 다른 책의 평이 대부분이 이렇게 잔혹함이 먼저 나오는지라 읽을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ㅠ.ㅠ

coolcat329 2023-03-12 04:59   좋아요 1 | URL
잔혹하기도 하지만 400페이지 넘게 사막, 초원, 바위 산 등을 뭐에 홀린듯이 쫓아다니는 기분이라 피로하더라구요. 좋은 일은 없는데 말이죠. 😥
<모두 다 예쁜 말들>저 갖고 있어요. 국경 삼부작의 1권이라 아마도 다음에 읽을 매카시 작품이 될 거 같네요.
좋으셨다니 기대됩니다.😚
 
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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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작가는 주로 초자연적인 호러물을 발표해 '공포의 제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2021년 발표한 <빌리 서머스>는 그동안의 작품들과는 다른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범죄 소설이다. 


주인공은 마흔네 살의 청부살인업자, 빌리 서머스다. 그는 미 해병대 출신으로 이라크 전쟁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는 저격수로 그동안 의뢰 받은 열 일곱 번의 암살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베테랑 킬러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악인만을 처단한다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고 그 원칙에 위배되면 일을 수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지적인 킬러로 이야기 사이사이에 많은 문학 작품을 인용하지만 의뢰인 앞에서는 철저히 '바보 빌리'로 행세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소설은 빌리가 열 일곱 번의 임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심한 시점에서 마지막 암살 의뢰를 받는 데서 시작한다. 저격 대상은 현재 살인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 중인 프로 저격수로 성공 보수는 200만 달러. 그야말로 '마지막 한탕'이다. '마지막 한탕은 항상 문제가 생긴'(p.27)다는 징크스에 께름칙하면서도 빌리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거부할 수 없어 마지막 의뢰를 수락한다. 

빌리는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법원 근처 한 건물에 잠복하여 재판일에 올 저격 대상을 기다린다. 의뢰인은 그에게 작가로 위장하여 잠복할 것을 제안하는데, 의뢰인 앞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겨 왔던 그는 순간 당황하지만, 장기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야기, 즉 수기를 써보기로 결심한다. 


위장을 목적으로 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 빌리. 그의 수기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빌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잊고 있었던 고통스러운 과거와 대면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 애인에게 무참히 맞아 죽은 어린 여동생, 그 여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첫 살인, 위탁 가정에 보내져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보낸 청소년 시절, 해병대에 입대하고 이라크 전에 파병되어 겪은 전쟁의 참상 등 잊고 있었던 많은 기억들이 빌리의 마음을 헤집어 놓으며 급기야 자신의 본업인 저격보다 글쓰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글을 쓸 수 있어서 좋다. 예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좋다. 하지만 이렇게 아플 줄 어느 누가 알았을까? (1권-p.110)]


빌리가 글쓰기에 빠져들며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만나는 과정은 글을 쓴다는 행위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과거, 그 당시의 감정과 조우한 빌리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 글을 씀으로서 자기 내면의 진실에 눈을 뜬 빌리의 변화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무엇보다 2권에서 함께 곤경을 헤쳐 나가는 동반자 앨리스를 변화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는 몰랐고 심지어 고민한 적도 없는 부분이었건만, 그것이 글쓰기가 매혹적인 이유 중 하나다. 나를 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고 있잖아. 옷을 벗었어. 나를 드러내고 있어. (1권-p.158)]


청부 살인업자로 고독한 삶을 살았던 빌리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하는 모습에서 작가 스티븐 킹이 생각하는 글쓰기의 기능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빌리의 입을 빌어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의 작가 팀 오브라이언이 '소설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로 가는 길'(1권-p.233)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점을 언급한다. 빌리는 글을 쓰면 쓸수록 작가는 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책임을 가져야 하는 직업이며,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쓴다는 것도 일종의 전쟁이라는 생각,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생각'(1권-p.340)을 한다. 



<빌리 서머스>는 미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아동 학대, 무책임한 부모, 여성 폭행 등-과 함께 반전(反戰) 메시지도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글쓰기에 관한 작가의 고민과 생각을 담고 있는 특이한 범죄 스릴러 소설이다. 주인공이 문학을 사랑하는 킬러이기에 이야기 중간마다 여러 책들과 작가 이름이 나오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마지막에 빌리가 네브라스카의 옥수수밭을 바라보며 앨리스에게 책을 추천하는데, 스포가 되어 그 상황을 말할 수 없지만, 그 장소와 그 상황에서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이렇게 책을 추천하는 빌리의 모습이 긴 여운을 남긴다.


 "읽어 봐. <핏빛 자오선>." (2권-p.410)


3월의 첫 책은 빌리가 추천한 <핏빛 자오선>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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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2-28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
스티븐 킹. 80년대 초반 군대 갔더니 내무반에 이이의 책이 잔뜩 꽂혀 있더군요. ㅎㅎㅎ 다 인생입니다.

coolcat329 2023-02-28 17:48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ㅋㅋ 47년생으로 70-80년대 유명한 작품이 워낙 많으니 그럴만도 하네요.ㅎ
저는 이번에 처음 읽고 의외로 내용이 도덕적이라 놀랐습니다. 😅

바람돌이 2023-02-28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우리 킹옹께서는 따뜻한 이야기를 더 많이 쓰신답니다. 저는 좋더라구요. 빌리 서머스도 저는 좋았어요.

coolcat329 2023-03-01 10:2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공포의 제왕이 쓰신 책이 따뜻해서 놀랐어요.
 
전망 좋은 방 Mr. Know 세계문학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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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은 E. M. Forster (1879~1970)가 1908년 발표, 작가가 자신의 가장 유쾌한 작품이라고 평한 소설이다. 주인공 루시가 두 남자, 조지와 세실을 만나며 당시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관습과 자기 내면의 열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국에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유쾌한 사랑 이야기로 한 여성의 성장 소설로 볼 수도 있다. 

더 이상 중세가 아닌 근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두 남녀의 갈등과 사랑이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소설의 제목인 '전망 좋은 방'은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의 전경이 보이는 방으로 루시가 사촌 언니 샬럿과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을 갔을 때 간절히 원했던 방을 말한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그녀들에게 배정된 방은 아르노 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 아닌 전망이 전혀 없는 방이었던 것. 이때 같은 펜션에 묵고 있던 에머슨 부자가 선뜻 자신들의 '전망 좋은 방'과 바꾸자고 제안을 하고 이 무례한 제안을 반 강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 제안이 왜 무례한지 모르겠으나 당시 영국에서는 남의 대화에 끼어들어 숙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천박한 행동이었던 듯하다. 이런 영국의 답답하면서도 융통성 없는 관습, 거기서 생기는 위선은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재미가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여기서 말하는 '전망'이 그저 단순한 전망이 아닌 당시 영국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인습과 규율에 반대되는 정신, 즉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은 르네상스 정신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작가가 이 소설의 첫 장소로 피렌체를 선택한 이유는 피렌체야 말로 인간의 자유와 본성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문명이 태어난 도시이기 때문이다. 


사랑 이야기가 중심에 있지만 당시 영국 사회 계층 간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도 담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뒤에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포스터의 문장이 상당히 냉정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고 하는데, 나는 읽으면서 크게 유머를 느끼지 못해서 '책이 너무 구판이라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그런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1985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영화는 웃겼는데, 루시의 약혼자로 나오는 세실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가 재밌었고, 세 남자가 옷을 다 벗고 호수에서 목욕하다가 산책하던 루시와 세실, 루시 어머니에게 들키는 장면에서는 가장 크게 웃었다. 근데 세 남자의 전라(全裸)가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 그대로 다 드러나 정말 놀랐다. 


포스터의 책은 처음 읽었는데, 사랑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당시 영국의 인습에 얽매인 시대상과 가치관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펜션 베르톨리니 '전망 좋은 방'에서 피렌체의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는 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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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2-17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동네서점에서 사다가
읽다 만 것으로 기억하네요.

쿨캇트님의 포스팅을 기회로 삼
아 마저 다시 읽어야지 싶습니다.

정말 오래 전에 오스카상 수상식
인가에서 이 영화 제목을 보고
이름이 참 멋지다 싶었었는데...
정말 오래 전 일이네요.

coolcat329 2023-02-17 18:51   좋아요 1 | URL
아 읽다 마셨군요. ㅎ 저도 제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의미를 알고 나니 더 마음에 드네요.
책 찾아서 다시 읽어보시길요~

페넬로페 2023-02-17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영화로 보고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저도 요즘 연애소설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이 책의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어요~~바빠서일까요?
연애세포를 좀 더 자라게 해야겠어요 ㅎㅎ

coolcat329 2023-02-17 18:54   좋아요 0 | URL
저는 이번에 영화 처음 봤는데 배우들의 풋풋했던 시절의 모습 보니 참 좋았어요. 사랑 이야기도 가끔 읽어줘야 할까봐요~^^

stella.K 2023-02-17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정말요? 전망 좋은 방 본 것 같은데...
그런 장면이라면 제가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면 제가 안 보고 봤다고 기억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친구 녀석 하나가
야, 그 방 참 비싸겠다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울나라 사람들 어디가나 뭘 보니 부동산으로 보는 건 참...
저도 연애는 별론데 그래도 유명한 작가의 연애 소설은 일단
관심은 갑니다. 요즘 드라마나 오글거리고 재미없지.ㅋ

coolcat329 2023-02-17 18:58   좋아요 1 | URL
정말입니다. 🤣 특히 비브 목사님이 아주 ㅋㅋ
세 남자가 다 벗고 호수 주위 뛰어다니고 아주 난리입니다.
예전 개봉했을 때는 다 편집하지 않았을까도 싶어요. 저는 와차에서 봤습니다.
하여튼 영화 참 웃겼습니다.

바람돌이 2023-02-17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야기 좋아하는 저는 재밌을듯한데요. ^^
앗 그리고 피렌체에서 저런 전망 비슷한 방에서 자 봤어요. 무려 나흘간이나요. 자랑질입니다. ^^

coolcat329 2023-02-1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나흘이나 부럽습니다.저도 가보긴 했는데 전망과는 상관없는 민박집이었습니다. ㅋ
사랑 이야기 좋아하시면 읽어보세요~

물감 2023-02-20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요즘 고전만 읽으시네요.
그것도 제가 모르는 책들만요ㅎㅎ
이 작가의 이름은 자주 들었는데 손이 잘 안가더라고요.
다작을 해서 그런건가 했는데, 리뷰를 보니 알 것도 같고...

coolcat329 2023-02-20 14:16   좋아요 1 | URL
포스터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읽어봤네요. 영화가 워낙 유명하기도 해서요.
너무 지식이 미천해서 고전으로 좀 교양을 쌓아볼까 싶어 나름 노력하는 중입니다. ㅎㅎ 전 지금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 읽고 있답니다.
 
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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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글을 쓰고 싶은 열망과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작가, 폴 오스터가 겪은 갈등과 험난한 여정을 재미있게 풀어낸 자전적 이야기.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밑바닥 시절 자신의 경험담을 쉼 없이 풀어내는 그의 입담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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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2-10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자기 전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는데 매번 조금 듣다가 잠이 들곤 해요 ㅎㅎ
책으로 정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coolcat329 2023-02-19 10:40   좋아요 1 | URL
저도 이상하게 자기 전 뭘 들으려고 하면 곧 바로 잠이 오더라구요. ㅎ
이 책 여러 에피소드들이 재밌습니다.

페크pek0501 2023-02-13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것 김영하 팟캐스트로 들었어요. 요즘 없어져서 다시 들을 수 없는 게 아쉬워요.


coolcat329 2023-02-19 10:42   좋아요 0 | URL
오 김영하 작가가 소개한 책이군요. 유명한 책 같아 저도 이번에 읽어봤는데 작가가 끊임없이 늘어놓는 에피소드들이 재밌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