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는 펑! 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낙하산 펴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 - P150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 P156

모교에서 첫 강의를 ‘트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을 때,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 P158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 P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 P21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 P32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 P50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 P117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봤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과 의심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하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고독. 그 결정이 하도 고유해 이제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입을 잘못 떼었다가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감정과말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당할지 모르니까. - P128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두 계산된 거였는지 몰랐다. - P132

나는 그들에게 미소로 답한다. 그게 우리의 직업이었으니까.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모든 소설들을 쓴 수천의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등신대의 회색 종이 앞에 서서 한 줄씩 점을 뚫었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 일에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충일감이 더 클 때도 있을 것이다. 한순간 깨끗한 생명이 차오르며 기쁨을 느낄 것이다. 건너가야 할 생각의 고리들, 꿰뚫어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서성거릴 것이다. 퀼트를 짜거나 건축물을 설계하듯 오 년, 십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설 한 편에 골몰해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이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 P314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그의 책상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다. 원고지 묶음, 준비중이던 장편소설의 자료들, 돋보기 안경. 작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무섭게 깨달았다. 새 소설의 자료 준비를 끝냈지만, 이제 쓸 일만 남았지만 쓸 수 없다.
머릿속에선 이미 시작되었을 그 책이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 P321

그리고 그 녹찻잔을 생각한다. 깨어졌어도 아름다운 조각들을 들여다보며 한참 쪼그려앉아 있었던, 어두운 줄도 모르고 어두웠던 그 시절에, 내 책상으로 최인호 선생님이 가볍게 걸어왔던 것을. 담담한 진실을 담은 눈으로 내 눈을 건너다봤던 것을. 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니?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 P322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내가 문득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곧 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 P327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 P332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 P335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뎌야만 하는 순간을 기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마 이 프로젝트는 백 년 동안의 긴 기도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이 순간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 P3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 P271

다만 기억한다. 내가 그토록 성실했던 저녁 여섯시, 검고 긴 바늘이 조금이라도 늦게 한 바퀴를 돌기를 바랐던 그 시간의 두근거림을. - P301

그날, 두 분은 행복하셨을까. 돌아오는 길은 멀지 않았을까. 어린 내가 너무 무겁진 않았을까. - P304

온통 부서지고 튀어오르고 흩어지는 게 햇빛인지 웃음소린지, 눈부신 물줄기, 물방울들인지 알 수 없었다. - P307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뜻함과 차가움,
노동과 휴식, 병과 치유, 꿈과 현실, 애정과 오해, 기대와 실망, 잠깐 마주잡는 손길, 잠깐 마주치는 눈빛들………… 속에서 우리는 나아간다. 사실 식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식구가 주는 애틋함을 말하려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 모든 삶의 국면들을 함께 매만지며, 상처를 공유하며 나아갔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P307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 P308

기억들은 모두 조각조각이고, 그 조각들 하나하나에 어린 빛은 제각기 다른 말을 한다. 씌어지는 것보다 씌어지지 않는 것, 씌어질 수 없는 것이 더 진한 말이라는 것을 간신히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 P3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 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