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어쩐지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시봉이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장마가 와도 산책을 못 가도, 우울할 때나 주눅들 때도, 계속 우리가 함께할 거라는 생각. 그 마음이 무언가를 견디게 해주었다. 나는 이시봉을 품에 안은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P70

때때로 인간의 역사와 동물 혈통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다르게 기술된다. 인간의 역사는 사건을 중심에 둔 채 쓰이지만, 동물 혈통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방점이 찍힌 채 기록되기 때문이다. 누가 태어나고, 누가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는가? 누가 돌봐주었고, 누구와 짝짓기를 했는가? 죽는 순간, 바로 옆에 누가 있었는가? 그 사실이 핵심을 이룬다. 그래서 이 역사는 사적이고 생략이 많으며 편협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번식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밝은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인간의 역사 또한 한 꺼풀 벗겨보면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 또한 구구절절 변명은 많지만, 늘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왔다는 것을. 그걸 숨기고 감추기 위해 이따금씩 엉뚱하게도 동물에게 화풀이해왔다는 것을.....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늘 그렇게 투쟁적이며, 피냄새가 진동한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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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자기 자신은 잘 모를 때가 있거든."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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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든 상상이든 자신의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족감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있을까. 종종 오만이 허영심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사실은 아주 달라. 허영심 없이도 오만할 수 있어. 오만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평가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심은 타인이 우리에 대해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바와 더 관련이 있거든." - P31

상대방의 성격을 서로가 속속들이 알고 있거나 결혼 전부터 꼭 닮아있었다고 해서 그게 두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거든. 부부란 서로 안 닮으려고 어지간히 애쓰다 결국은 각자의 몫만큼 짜증을 내게 되어 있어. 그러니 평생 함께하기로 한 상대방의 결점이라면 되도록 모르는 편이 낫지.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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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의 집에서 나동그라진 늙은 화가는 그 자신이 그저 늙은 개에 불과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지만 아름다운 것, 마음을 따듯하게 하고 미소 짓게 하는 것,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 그러니까 종달새의 노랫소리를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산뜻하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날갯짓이 꿈결처럼 귓가에 스친다. - P309

그림은 어떻게 역사가 되는가? 얇디얇은 종이에 가느다란 선으로 그린 아이디어 스케치가 마침내 껍질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열었다. 어떤 위대한 걸작도 그 시작은 이렇듯 하나의 선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수많은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이야기들이 남는다. - P323

얇은 종이 위에 그려진 가느다란 펜 드로잉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고, 가치를 알아보고 비용과 기술을 들여 수집하고 보존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 앞에 불멸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행성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들을 어떻게든 지켜오는 그 마음이, 어떻게든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예술의 생애를 무한하게 만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제는 온 마음을 다해 지키는 사람들이 전제가 된다. - P331

예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끝끝내 보는 사람이다. 본다는 것은 온몸으로 그 몸을 둘러싼 것들과 벌이는 맹렬한 싸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데는 마음이 작동한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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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폐허가 된 자신을 그릴 때 그 고통은 표현의 기쁨으로 해소되었을까? 오히려 엄습하는 고통을 거듭 되새기며 더 깊은 고통 속에 머무르게 했던 건 아닐까? - P219

날아가는 검은 티티새 같은 눈썹으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있다.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눈물도 방해하지 못했다. - P221

우리는 백골로 남게 되고 그마저도 풍화되어 한 줌의 먼지가 될 운명이지만 자연은 영원의 이름으로 존재를 감싸게 될 것이니, 이것은 위로의 순간이라 해야 할까, 초월의 순간이라 해야 할까? - P245

출생지나 교육환경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몸담고 있는 그곳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그것이 미국의 예술을 만든다고 그녀는 믿었다. - P250

그가 지난날 몰두하던 죽음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고, 이제 도처에 있었다. 이 어두운 세계를 예술로 돌파하려면 그 죽음들을 다시 바라보아야 했다.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던 두 눈을 세계를 향해 돌렸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몸을 감싸주던 색색 가지 이불이었을지도 모른다. - P282

서로를 끌어안는 것만큼 인간적인 행동은 없다. 에곤 실레의 그림처럼, 인간의 몸은 서로를 끌어안으라고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안고 보듬으며 사랑을 나누고 열매를 맺는 것.
1918년의 사람들이 바랐던 것은 단순히 그것이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 바로 그것.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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