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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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상상이라는 것이 필요없을 정도로 진보된 기술을 누리고 있다. 약 600년 이후의 미래를 그린 헉슬리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정보통신 분야의 눈부신 혁신을 비롯해 오늘날 과학 기술은 이미 전방위적으로 성취를 이루고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가 그려내는 디스토피아의 가장 무서운 상황은 전체주의적 통제하에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체제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가 과학 기술에 완벽히 종속되어 버린 끔찍한 전복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은 당연히 이를 깨닫지 못하도록 세뇌되어 있다. 완벽하게 비판능력이 상실된 사람들에 의해 세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이것을 먼 미래, 디스토피아로 치부할 것인가. 어쩌면 너무나 많은 혁신의 성취에 눈이 멀어 비판 능력을 상실해 버린 우리는 이미 헉슬리가 예언했던 디스토피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려내는 세계는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행동주의 심리학과 같은 지금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이론에 기반을 둔 미래 사회이다. 지금 우리는 유전보다는 환경 결정론에 더 많은 손을 들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인지에 대한 믿음을 넘어 인간 의지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실존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나드는 우리 현재의 삶에서 헉슬리가 그려내는 '멋진 신세계'는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인다. 술을 마셔도 진담이 나온다는 인간들이 기껏 '소마' 한 알에 모든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MP3 파일 조차 상상하지 못해 600년 이후에도 기껏 '녹음 테이프'를 이용해야했던 헉슬리와의 시대적 갭을 감안한다면, 그가 이룩한 미래 사회의 전근대성을 지적하기보다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훨씬 공평한 일일 것이다. 그가 태블릿 피씨를 손에 쥔 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오늘날 인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전쟁과 전체주의에 의해 피흘리는 세계를 직접 목도한 시대의 증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려내는 미래사회는 현대와 완벽하게 단절된 세상이다. 따라서 현실 기반의 비판적 소양의 확장보다는 과장을 통한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곳은 기계 문명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성취들이 거세된 세계, 즉 예술이나 종교는 물론이고 순수 과학조차 통제되는 세계이다.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는 인간들에게서 감정을 앗아간다. 설령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어휘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수천년을 이어온 가족 공동체가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모든 사람은 사회의 안정이라는 공동체의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유혹과 투쟁, 회의 같은 불안정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행복'이 대가로 주어진다.


그러나 소설은 어느 시대나 있게 마련인 불순분자인 버나드, 헬름홀츠, 존을 등장시켜 비극이 없는 삶은 예술을 창조하지 못하며, 영원한 행복은 종교와의 단절을 낳게 된다는 섬뜩한 진리를 역설한다. 사랑이 수치스러운 감정이 되고 예술이 조롱거리가 되며 도덕은 알약 한 알의 가치로 전락해 버린 사회를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라고 일컫는다. 헉슬리의 이러한 반어와 경고는 그가 만들어낸 미래 사회의 디테일을 넘어서 인류 보편의 반성을 촉구한다. 물질의 맹목적인 추종이 가져온 영혼의 파괴는 각종 질병과 기아, 불안 보다도 더 끔찍한 결말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발표된 <멋진 신세계>는 미래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그리면서 동시대에 경고한다. 그러나 오늘날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경계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엄격한 성찰을 요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헉슬리의 예언처럼 오늘날 사회는 기술 문명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공계 쏠림 현상과 더불어 세계는 언어, 예술,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을 점차 등한시 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심지어는 물질 문명이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소마'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알파 플러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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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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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후각은 인간보다 약 1억 배쯤 더 민감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감각의 어마어마한 차이는 개와 인간이 받아들이는 세계의 모습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다를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차이는 동일한 개체 안에서도 당연하게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세계는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 아님에도 이것을 확인 하는 일은 매번 놀랍다. 기발한 이야기를 만날 때 그 이야기가 탄생한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할지를 상상하면 당연히 작가의 삶이 궁금해진다. 소설가는 과연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경이로운 세계에서 온 것인가. 김연수의 대답은 이렇다. 자기 바깥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라고. 


<소설가의 일>은 아주 기발한 산문집이다. 표면적으로는 소설 쓰기의 실전적 비법 정도로 읽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아니다. 소설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루카치의 영역을 넘보는 것도 아니고, 소설 쓰기의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지만 시중에 넘쳐나는 매뉴얼같은 실용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소설 작법에 대해 단순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라면 얼마든지 있는데 그 대상이 소설인 이상 이런 지시적인 방식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시험 공부할 때나 볼 법한 책을 소설 쓰기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세상에 소설 읽는 재미란 깡그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소설가의 일>은 소설 쓰기의 지침이라는 목표에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소설가의 마음 자세에서부터 플롯, 캐릭터, 문장, 시점에 이르기까지 소설가로서 느낀 바를 한 편의 에세이처럼 기록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모든 제재는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취하고 있어서 보다 실재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무엇보다 그 사소한 삶의 경험이 소설의 원리로 바뀌어가는 명쾌한 과정이 글맛을 더해준다. 이런 저런 경험에서 취합해 마구잡이로 늘어 놓은 것 같은 사설들이 일정한 결론을 향해 수렴되는 것을 확인하는 쾌감. 김연수의 다른 산문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작가의 특징이 이 책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이런 특징 덕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이토록 많은 추상적인 개념들의 메타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가의 일>은 사람의 마음, 이를테면 사랑의 감정이나 욕망, 좌절 같은 것을 심리학서보다 더 예리하게 포착한다. 등장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현실의 사랑과 다르지 않고 인물의 성장 과정은 현실의 그것처럼 역동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뻔하지만 깨닫기 힘든 진리들을 다양한 경험적 보조관념을 통해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경험이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역설적 진리들이 자리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라든지 '위대한 소설가는 실패작만 쓴다'같은 위트 있고 절묘한 깨달음들이 글마다 넘쳐난다. <소설가의 일>은 이런 식으로 삶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거듭 파고든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같은 세계를 경험해도 그것을 감각해서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개인차는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김연수가 가진 '소설가의 시선'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별 수 없이 그가 소설가일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게 된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의 차이가 이토록 다르다면 소설을 써야지 달리 무엇을 하겠는가. 김연수는 결국 이 책에서 소설 쓰기의 과정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소 시범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쓰기의 지침으로 이런저런 말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삶을 섬세하게 감각하는 것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말하자면 소설가의 일이란 개의 후각만큼 예민하게 이 세상을 감각하는 것, 그래서 소설가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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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 아시아 문학선 6
타예브 살리흐 지음, 이상숙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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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경험은 종종 타자성을 부각시키는 형태로 드러난다. 특히 문학 속에 드러난 문화충돌의 양상은 많은 경우 선진문화가 후진문화를 잠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문화적 파급력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탈식민 담론을 펼친다고 해도 주류의 언어가 이른바 주류의 문화를 실어나르는 구조 속에서는 이 논의도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법이다. 타예브 살리흐가 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키플링보다 더 많이 읽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반대로 존 쿳시는 제3세계 출신의 작가임에도 주류의 언어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이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위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되는 비주류 언어권 소설이 담고 있는 생각들은 그들 언어만큼이나 생소해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늘 타자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목소리를 내도 목소리를 전달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에 나온 희귀한 작품을 만나는 일은 단순히 생소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고 패러다임의 변화마저 가져다 준다. 아프리카 수단 출신의 작가 타예브 살리흐가 아랍어로 쓴 소설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은 아프리카의 문화가 영국으로 대표되는 선진 문화와 충돌하는 경험을 그들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시선의 역전은 당연히 신비와 환상, 비합리와 미개로 정의되는 오리엔탈리즘을 탈피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주인공인 무스타파 사이드와 그의 관찰자이자 서술자가 된 '나'는 모두 수단 출신의 흑인으로서 서구의 근대 문물을 경험하고 서구의 학문을 습득한 엘리트다. 아직 서구적 정의로서의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한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 역할은 분명하다. 이들에게 근대 문화를 전파하고 이들을 오랜 부패와 악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시혜자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그 역할을 당연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무스타파 사이드의 행보는 '나'와 다르다. 그는 서구 문화를 습득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마을의 일원으로서 그들과도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못하는 상태다. 소설은 '나'를 앞세워 무스타파 사이드의 정체성 해명에 나선다.


뛰어난 지성으로 유럽사회의 주류에 속하게 된 무스타파 사이드는 유럽 사회에서 그가 가진 태생적인 타자성을 전복시키기 위해 전위적인 행위를 감행한다. 바로 백인 여성들을 유혹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식민지적 침탈에 비유되는 그의 여성편력은 침략과 강제라는 측면에서 제국주의가 맛보았을 통쾌함을 어느 정도 흉내내고 있다. 서구의 야만성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그들이 행했던 야만적 행태를 번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복수라 할 수 있는 그의 이러한 행위는 그에게 통쾌함을 주기보다 오히려 환부를 더 쓰리게 할 뿐이다. 무스타파가 서구 사회에서 행한 혹은 겪은 일련의 일들은 결국 제국주의가 행한 약탈이 물질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도 큰 상처를 남겼음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무스타파에게 제국주의의 환영은 아픔인 동시에 떨쳐낼 수 없는 거대한 동경의 세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고국의 시혜자도 제국주의의 정복자도 될 수 없었던 그는 고국의 생명력을 껴안은 채 문명의 유산들을 깊숙이 감추어 놓게 된다. 그는 성적 에너지로 상징되는 고국의 생명력을 지닌 웃드 라이스에게 깊은 관심을 보임으로써 흑인의 성적 신화를 일부 긍정하는가 하면, 서구적 문명에 깊이 접촉해온 '나'를 가족의 후견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서구적 합리성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다. 이렇게 무스타파는 정체성의 혼돈을 가져오는 사상적 불구가 되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것이다.  


무스타파 사이드가 가진 이 입체성으로 인해 타자성을 전복시키려는 대담한 작가의 시도는 도식적인 결말을 맞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검은 백인'이라는 기형의 상태는 강자의 침탈이 약자에게 미치는 상처를 복합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 내세운 탈식민지적 담론은 그 사상적 토대를 넘어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적인 담론을 걷어내고 인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제3세계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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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반양장) -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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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정보 자체가 아닐지 모른다.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에 오히려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조리있게 이야기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왕왕 있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들의 영역은 무궁무진하고 여기저기서 주워섬긴 정보들의 뭉치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기 쉬운 탓이다. 심지어 그것들은 제대로 여과되지 않아 하나의 현상에 대한 상충된 정보로 혼란을 주기도 하고, 인과나 과정을 무시한 채 단편적으로만 존재해 정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하루에 15시간을 공부하지만 삶과 동떨어진 지식을 제각각 억지로 주워 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오늘을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의 소화 능력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궁한 정보는 실제로는 일정한 체계 속에서 생성된다. 이 정보들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시간을 들여 깊이 공부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 또한 한두 영역 정도만 가능한 일이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체계를 스스로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정보 자체보다 지식들의 층위를 바로 잡고 그 체계를 세워주는 역할을 담당해줄 누군가가 더욱 필요하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그런 책이다. 책 속에 담긴 지식이나 정보의 가치보다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이 가져다 주는 쾌감이 더 크다.


제목의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어감이 주는 오해처럼 이 책이 교양의 다이제스트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일종의 교양의 벼락치기같은 종류의 서적은 소화 안 된 정보 위에 또 다른  정보를 얹어 두서없이 뒤섞어 버리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단편적인 지식들을 일정한 체계로 정렬하는 데 집중한다. 인문 교양의 각 분야를 일정한 흐름에 따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각각의 분야에서만 무수한 개념들이 분화되어 나오는 인문학의 영역들을 인간 사회라는 현실에 기반한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은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개별적인 영역은 인과의 틀속에서 계기적인 연속체로 재정의된다. 저자는 역사 영역으로 포문을 연다.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 하는 원동력은 경제체제로 설명된다. 그리하여 책은 자연히 다음 단계인 경제 영역으로 넘어간다. 경제체제에 의해 추동된 계급적 개념은 또다시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 성향을 결정하는 단서가 된다. 이러한 정치 영역은 사회 속에서 개인의 생존 방식을 결정짓는 사회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영역에 대한 주체적 판단력을 고양하기 위한 윤리 영역이 책의 마지막 장에 자리한다.


각 영역들이 무의미하게 나열되지 않고 이야기처럼 하나로 흘러가는 동안, 머릿속을 떠돌던 산발적인 정보들은 자리를 잡아간다. 막연했던 것들이 명료해지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감이 크다. 제목에서 이 책의 목적이 '지적 대화를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지만 실상은 지적 대화를 위한 공부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측면이 더 크다. 공부를 위한 수단으로서는 이 책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넓고 얕은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인문학 영역에 입문하기 위한 스캐폴딩으로서의 활용도는 그만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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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아시아 문학선 10
쿠쉬완트 싱 지음, 황보석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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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도입부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의 연쇄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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